제 9 장
문평은 나른하게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천장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파도를 타고 있는 듯 출렁출렁. 몸이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출렁거린다. 몽롱하게 풀린 눈에 희뿌연 먼지들이 보였다. 창밖에서 들어오고 있는 햇살 때문에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먼지들이다.
먼지는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의 흐름에 따라 아래로, 위로. 혹은 주위를 뱅뱅 돌면서. 그것들은 그들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군무를 추고 있었다. 마치 지금 문평과 그 아래에 누워 있는 사람이 단둘만 이해할 수 있는 육체의 언어를 나누는 것처럼.
“하…….”
문평은 갸우뚱하게 고개를 숙여 남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와 숱하게 몸을 섞어 왔지만, 이렇듯 자신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한 것은 처음이다. 장소가 어디든 어떤 행위를 하든, 언제나 위쪽에 있는 건 남자였고 아래쪽에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상대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되자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이 강하고 압도적인 남자를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문평은 늘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남자의 표정을 처음으로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명필名筆이 심혈을 다해 그린 것 같은 유려한 눈썹이 오만하게 치켜 올라갔다. 단단하고 강인한 눈매가 노려보듯 문평을 향한다. 완벽한 선을 자랑하는 탐스러운 입술이 단단히 비틀려 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 하지만 그는 쾌감을 느끼고 있다. 문평 자신이 상대에게 강요하는 일방적인 쾌감이다.
문평은 상대의 얼굴에서 내비치는 모든 감정이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불편함도, 그의 분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쾌감도 모두 문평 때문에 생긴 감정들이다. 그는 분명 느끼고 있었지만, 그 감각을 즐기고 있지는 않았다. 그 모습 또한 평소의 자신과 같았다. 자신 역시 언제나 사내가 주는 쾌감에 몸부림쳤지만 그걸 기꺼이 기뻐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겨우 자세가 바뀐 것만으로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 늘 지배당하던 자신이 지배를 하고, 항상 강요하던 남자가 강요를 당하고 있다.
문평은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평범한 남자의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싶은 농염한 색기가 문평의 전신에 맺혔다.
문평은 몸속에 들어와 있는 상대의 성기를 더욱 강하게 조이면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상대의 유실을 입술로 희롱했다. 단단하게 단련된 가슴에서 유일하게 부드러운 부분인 유실은 그의 몸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게 작고 깜찍해서 가지고 놀기 딱 좋았다.
혀로 희롱하다 말랑말랑한 살점을 이 끝으로 긁어내리고, 할짝할짝 핥아 주면서 단단하게 키웠다. 그러면서도 허리는 계속 둥글게 움직여 상대의 쾌감이 흐트러지지 않게 했다.
온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속도로 허리를 움직이자 문평도 관계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는 물결처럼 느릿하게 퍼져 나가는 쾌감에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문평이 언제나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거였다. 자신의 발로 걸어서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의 차이. 문평에게 그 이상의 것들은 너무 버거웠다.
“……평소에 좀 이래 보지 그랬어.”
낮게 쉰 목소리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단단한 손이 턱 끝을 잡고 문평의 얼굴을 들어 올린다. 문평은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온 상대의 손가락을 기꺼이 핥아 올렸다. 모양 좋은 엄지손가락을 혀로 휘감으며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들이자, 남자는 쿡 하고 웃으며 문평의 턱 끝에 입을 맞췄다.
“귀엽게 구는군. 늘 뻣뻣한 나무토막같이 있더니만.”
문평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멍한 정신이라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남자가 말하는 방식 자체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남자의 가슴께에 손을 짚고 다시 허리를 세웠다. 막 손을 뻗어 문평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려던 남자가 픽하니 웃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문평은 가슴 위로 흐르는 남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깍지를 꼈다.
체중을 싣고 몸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하자 상단만 간신히 걸친 채 내부를 왔다 갔다 하고 있던 성기가 꿈틀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의 성기에서 가장 단단하고 둥근 부분이 점막을 밀어냈다. 부드러운 내벽이 빠듯하게 열리며 단단한 물건이 내부를 비집는다.
허리에 힘을 빼고 더 깊게 남자의 몸을 받아들였다. 엉덩이 사이의 구멍이 찢어질 듯 벌어지면서 한계까지 남자를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성기라 항상 깊게 들어오는데, 자신의 체중까지 그 위에 실리자 너무 깊어 겁이 날 지경으로 밀려 들어온다.
문평은 충격에 헐떡거리면서도 몸을 계속 내렸다. 몸의 중심이 완전히 꿰뚫리는 듯한 충격이 말초적인 공포와 쾌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아. 아읏. 아아…….”
문평이 경련을 하며 숨을 헐떡이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이 자세로는 다 못 넣는다니까.”
남자는 혼잣말처럼 말하더니 문평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어느 사이엔가 그는 다시 아래에 있고 남자는 위로 올라가 있었다. 문평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고, 조금 남았던 나머지 부분까지 욕심스레 집어넣은 남자가 충격을 참지 못해 벌어진 문평의 입술을 탐욕스레 집어삼켰다.
잡아먹힐 듯 혀가 먹혔다.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데도 전율이 일었다. 내장을 터트릴 것같이 비집고 들어온 이 물건이 자신에게 어떤 것들을 안겨 줄 수 있는지 문평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한 기대로 두근거렸다.
“네가 이렇게 적극적인 건, 뭣 때문이지?”
문평이 기대로 입술을 떨며 허리를 들어 올리자 남자가 추삽질을 시작하며 물었다. 내벽 깊숙이 남자를 받아들인 문평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남자의 호흡에 자신의 호흡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말해봐. 응? 뭣 때문이지? 춘약을 먹어서인가? 아니면 너를 안는 남자 때문인가.”
남자는 문평의 몸이 딸려 올라갈 만큼 깊게 들어왔다가, 다시 한번 호흡을 고르며 강하게 내려갔다.
퍽퍽. 주먹으로 치듯이 강하게 몸을 쳐 대는 남자 때문에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소리에 약간의 습기가 어려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로 자신이 얻어맞고 있는 거라는 착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문평은 거대하고 단단한 불알이 꼬리뼈를 쳐 댈 때마다 애처롭게 바르작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으. 나 살려…….”
“말해봐. 내가 누구야? 넌 지금 누구랑 자고 있는 거지?”
“으읏. 아윽. 아!.”
“널 안는 게 누구야? 지금 이렇게 널 기쁘게 해주는 게 누구야?”
“유, 우은…….”
“……뭐라고?”
“유으……읏, …스…, 읏, 아읏.”
문평은 집요하게 떨어지는 남자의 질문에 다시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입 밖에 낸 음을 단어로 채 맺기도 전에, 남자의 몸이 거센 폭풍처럼 문평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아니. 관계를 갖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난폭한 태도로 몸을 밀어 올리는 남자 때문에 문평은 위로 밀리다 못해 머리가 침상 벽에 부딪힐 정도로 몰렸다.
“윤승효라고?! 내가?”
“악! 아악! 아파. 그만…….”
“다시 말해봐. 내가 누구야? 누구 같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석문평. 말해봐. 남자는 집요할 정도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하지만 문평은 너무 아파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저 도리질만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오해를 했는지, 남자는 더욱 사납게 화를 내며 으르렁거렸다.
“착각하고 있군. 석문평. 이곳이 교가 아니라고 해서 너와 나의 관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남자는 옆으로 고개를 젖힌 문평의 턱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문평은 초점이 맞지 않는 데다가 눈물까지 흘러 흐릿한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상대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가장자리가 일그러지고 흐트러진 그림자와 그 그림자 속에서도 강렬할 정도로 빛나는 상대의 눈빛만 보일 뿐이다.
“내 화단에 난 풀은 설사 잡초 한 포기라고 할지라도 내 소유라고 했지? 뽑든 물을 주든 전적으로 내가 알아서 할 문제지, 네가 어떻게 해 볼 문제는 아니라고. 사람이 좋게 말로 하니까 못 알아듣겠던가? 그래서 중원으로 나들이씩이나 나오셨어?”
눈물막을 사이에 두고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검은 그림자가 점점 더 커졌다. 서로의 코끝이 맞닿았다. 남자는 난폭하게 웃으며 자신의 몸을 문평에게 박아 넣었다. 문평이 아파서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일부러 더 그랬다. 남자는 진심으로 그 행동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도망치고 싶다면 한번 도망쳐 봐. 실컷 즐기게 해주지. 대신 꿈에서 깰 때 울게 되는 건 네가 될 거야. 달콤한 꿈일수록 깨어나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남자는 잔혹하게 속삭였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문평은 그것이 남자가 자신에게 던지는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문평의 머리는 아직도 혼몽했고, 그의 넋은 반쯤 꿈속에 잠겨 있었다.
문평의 의식은 현재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남자의 거센 몰아붙임 때문에 희미하게 떠오를 뻔했던 의식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가 점점 어두워져 간다. 깊은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멀어져 갔다. 문평의 몸을 난폭하게 희롱하는 남자의 성기도, 잔인한 맹세를 반복하는 목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안온한 무無가 찾아왔다.
완벽하게 아무것도 없기에 더욱 완전한 세상,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부드럽고 상냥한 무無.
문평은 차라리 그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이 더욱 편안하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괴상한 꿈을 꿨다.
문평은 찝찝한 심정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야한 종류의 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행히 몽정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날 만큼 발기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죽이느라 애를 좀 먹었다.
서른을 진작에 넘은 자신이 느닷없이 춘몽春夢이라니. 그것도 밤잠도 아니고 겨우 한두 시간 눈을 붙인 짧은 오수에 말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긴장감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문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찌뿌둥한 것 같아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해 봤다. 상태가 나쁘지는 않다. 춘몽을 꾼 직후라 하체가 다소 나른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근육이 결리는 데도 없고 이상이 있는 곳도 없다.
만족스러워하며 벗어 놓았던 상의를 집어 드는데, 문밖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문평은 소매에 얼른 팔을 끼며 상대에게 말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윤 형.”
문평은 윤승효가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아직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것을 본 윤승효가 낮게 웃었다.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문평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옷매무새를 여몄다.
“일어나셨으면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 건너왔습니다.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았지요?”
윤승효는 가볍게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자다가 일어났던지 평소보다 옷차림이 가벼웠다. 눈빛을 숨기기 위해 늘 끼고 다니는 애체도 벗어 두었고, 부채도 없고. 머리엔 문사건도 쓰지 않아서 검고 긴 머리채가 그대로 드러난다.
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윤승효의 얼굴은 앳돼 보였다. 색목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유난히 새하얀 피부는 티 없이 맑아서 마치 옥결玉玦 같고, 흰 피부 위에 오로지 입술만 붉으니 주순호치朱脣皓齒를 그림으로 그린 듯하다.
근래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미인을 만났던 문평이지만, 그중에서도 감히 윤승효와 비견할 미인은 없었다. 물론 요염함이야 포영의가 더 하고,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천마도 있지만, 미모의 고차가 아니라 취향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둘 다 윤승효에겐 대적이 안 되는 자들이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습니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문평은 윤승효를 탁자로 안내했다. 그리고 점소이를 불러 간단한 저녁과 새 차를 주문했다. 윤승효는 습관인 것처럼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눈빛이 옅어진 눈동자가 연한 옥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전에 말했던 대로, 오늘 밤 자시에 소가장으로 잠입할 겁니다.”
저녁으로 시킨 산순계酸筍鷄에서 죽순을 건져 먹으며 윤승효가 입을 열었다. 문평도 닭에 집중했다. 다른 반찬으로 시킨 산채酸菜가 지나치게 시어서 북방 음식에 익숙한 문평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아직 제게 흑화를 보낸 사람의 정체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문평은 걱정스러운 태도로 윤승효에게 말했다. 그는 계속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가 마교의 흑화를 남겨 놓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잠깐 놔둔 것이니 정확히 그를 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흑화를 그렸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냥 거기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파투가 났고, 기다리다 일어서서 나왔을 뿐 자기는 아무런 짓도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내는 심지어 자신이 젓가락을 가지고 장난친 일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평소 습관적으로 하던 장난이라서 설마 그게 문제가 됐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고작 뼈가 부러진 정도로도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던 자다. 사내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비밀을 지킬 만큼 강단 있는 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문평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평은 그게 누구의 소행일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윤승효와 대화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주위를 경계하는 것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주위에 누가 얼마나 더 있었는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몽중십야의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또 이 모양이라니. 문평아. 문평아. 넌 이러다가 정말 암습으로 죽겠구나.’
석문평은 소리 없이 한탄했다. 그러나 윤승효는 그 일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면 필연이라는 석 형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지만 때로는 의외의 해답도 존재하는 법이지요.”
윤승효는 태연하게 웃으며 걱정하는 문평에게 말했었다. 그는 가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전에 말하기를, 석 형이 속한 단체는 이 암중의 단체와 절대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인연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월동주吳越同舟라. 적의 적은 동지임을 석 형의 윗선도 잘 알 터이니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겁니다.”
윤승효의 말을 들으니 ‘윗선’에 대한 신뢰는 문평 자신보다 그가 더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윤승효는 눈길을 떨어트리고 젓가락으로 닭의 뼈를 바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밤, 아니면 늦어도 오늘 새벽, 소가장은 증거를 인멸하고 자리를 뜰 것입니다.”
“네? 그게 무슨?”
확신에 가까운 윤승효의 단언에 문평은 반문했다.
“제가 변복도 하지 않고 개양 안을 돌아다녔었지요? 심지어는 소가장을 마주 보는 다점에서 몇 시진이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바깥을 감시하는 눈이 있었다면 필시 그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풀숲을 건드렸으니 뱀이 나타나겠지요. 그 뒤를 쫓으려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소가장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단서를 얻으셨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늘 같이 있었는데 문평은 단서를 하나도 못 잡았었다. 그가 궁금해하자 윤승효가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였다. 이럴 때의 윤승효는 꼭 임학 같다. 상대가 모르는 걸 한심해하지 않고 차분히 가르쳐 주니까.
만약 상대가 천마였다면 ‘너 같은 게 알 필요가 뭐 있어?’라는 반응을 보이거나 아니면 아예 비웃었을 거다. 그 양반은 본인께서 너무나 대단하신 나머지, 자기 외에 다른 모든 사람을 모조리 돌 취급하는 분이니까 말이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한마디씩 주웠더니 그럴듯한 그림 하나가 그려지더군요. 소가장이 개양 땅에 들어선 건 두 해가 조금 못 됩니다. 그때부터 구빈원을 시작했는데, 제가 파악하기론 꽤 많은 아이들이 들어갔습니다. 소가장의 장주가 개양 땅에서 꽤 인심을 얻은 자라 별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소가장에서 아이들이 비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반년 전부터인데, 한꺼번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한 명씩 한 명씩, 일을 소개받았다거나 자식으로 삼아 데려갔다는 식으로 없어진 거라 주변에서도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일을 소개해 준다고 말해 놓고 하인으로 팔아 버리거나, 심한 경우 유곽으로 보내거나 하는 건 소가장이 아닌 다른 구빈원들도 하는 일이다. 못된 짓이지만 암중의 세력이 할 짓 같지는 않은데, 그것을 꼭 집은 이유를 모르겠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주 완벽하게 사라졌어요. 떠나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도 없고, 그 후에 우연히라도 아이들을 만난 사람도 없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에 가까운 아이들 전부가 그랬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요. 그 아이들이 유곽으로 흘러간 것도 아니라는 것은, 전날 도박장에서 서가가 하는 말을 들으셨을 테니 이미 아시겠지요. 아이들은 그냥 사라졌습니다. 석 형.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천마에게는 그 외에도 정보가 몇 가지 더 있었다. 아이들을 실은 마차는 항상 밤중에 떠난다는 것과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은 늘 같은 사람이라는 것. 꽤 멀리 다녀온다고 하면서도 싣고 가는 식량이 거의 없었다는 것. 심지어는 그 식량을 남겨 올 때도 있었다는 것.
‘소가장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할 뿐이야. 아이들을 모으고 그것을 공급하는 하부책인 동시에 외부와의 연락책 정도일 뿐, 실체는 그곳이 아니지. 하지만 실체와 연결은 되어 있어. 며칠 이내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 안에 근거지가 마련되어 있다.’
천마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그는 솔직히 문평을 소가장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나이 어린 애첩을 끼고 전장에 나서는 장수 꼴이 아닌가. 자신이 무슨 전쟁 중에 후궁을 데리고 대운하 유람을 했다는 수양제도 아니고, 좋은 꼴도 아닐 텐데 일부러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놔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인 게, 이 애물단지를 안심하고 맡겨 놓을 곳이 없었다. 꼴을 보아하니 교에서는 강제로 내몰린 것 같고 ─ 천마는 그 일로 포영의에게 할 말이 좀 많았다 ─ 귀주 땅에 때아닌 당문 놈들이 돌아다니는지라 혼자 내버려 두기도 어려웠다. 순간적으로 하오문도 생각났지만, 뺀질뺀질한 윤승효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것조차 내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만, 석 형. 오늘 밤에는 꼭 제 뒤만 따르셔야 하고, 제 허락이 없으면 무기도 드셔선 안 됩니다. 전적으로 제 뜻을 따라 주셔야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니 저를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위태위태한 문평을 바라보며 천마는 윤승효의 흉내를 냈다.
그가 만약 본색을 하고 있었다면 ‘너까지 따로 건사하기는 힘드니 그냥 내 등에 업혀 있어.’쯤으로 끝날 말인데, 위군자의 행색을 하고 있자니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고 뜻도 흐려진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저 순진한 것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필시 그 속내가 무슨 뜻인지 다 읽지 못하는 게지.
늘 딱딱한 나무토막 같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와 홍조가 생기는 걸 보고 천마는 다시 한번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매운 닭을 먹어서 그런가, 어쩐지 속이 쓰렸다. 배도 아슬아슬하니 아픈 것 같고.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심리적인 현상임이 분명했지만, 천마는 옹고집처럼 모든 것이 닭 때문이라고만 치부해 버렸다.
***
미인의 눈썹처럼 가는 초승달이 유달리 요요로운 밤이다.
잠시 달을 올려다보던 문평은 턱 아래로 내렸던 복면을 코 위까지 끌어 올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소가장訴家莊.
단아한 필치로 쓰인 멋 부리지 않은 이름이 현판 안에서 가지런히 돋보이고 있었다.
현판과 마찬가지로 장원의 꾸밈새도 상당히 정갈했다. 화려한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덕분에 단정해 보였고, 허물어진 곳 없이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어 정성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난 정경만 보자면 낙향한 선비가 빈민 구제로 소일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평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낙향 선비보다는 윤승효를 믿었다. 그가 의심스럽다면 의심스러운 거다. 윤승효는 오랫동안 이 일을 추적해 왔다. 문평은 그런 그의 감을 믿었다.
문평은 질문을 던지듯 윤승효를 돌아보았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체중이 아예 없는 것처럼 몸을 지탱하고 서 있던 윤승효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은 윤승효도 흑의로 갈아입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어도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진 검은 야행복인데,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이 원래부터 소지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의외로 이런 일이 꽤 자주 있는 모양이다.
윤승효가 앞장서서 장원의 담을 넘었다. 윤승효는 출발하기 전 문평에게 자기가 밟은 자리만 밟고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문평은 어미의 뒤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윤승효의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심처까지 갑시다. 대개 비밀 통로란 우두머리와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윤승효는 눈짓으로 안채 쪽을 가리켰다. 문평은 머리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평소 신법과 보법이 자랑이었던 문평이지만, 윤승효는 그런 문평과 비교해 봐도 모자라지 않은 신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로 윤승효가 스며들었다. 마영들이 사용한다는 은형잠행술隱形潛行術이 연상될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그들은 거의 무인지경인 것처럼 장원을 침투했다. 그들의 신법이 놀랍기도 했지만, 장원의 외곽 경비가 평범했던 터라 잠입하기 수월했던 덕도 있었다.
예상외로 소가장 외곽의 경비는 다른 장원의 일반적인 수준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순찰을 도는 무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모두 삼류로, 담을 타고 넘어 물건을 훔치러 들어오는 도둑에게나 적합할 수준일 뿐 강호의 고수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저 눈속임일 뿐이었다. 장원의 외곽을 벗어나 심처로 들어가자 상황은 완전히 돌변했다. 미리 알아 놓았던 장주의 거처 근처로 다가서자 경비망이 그물코처럼 촘촘해졌다. 겉으로 몸을 드러내고 있는 자들도 기도가 상당했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은신자들이다.
거의 사각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게 짠 경비망은 드러난 자들과 드러나지 않는 자들의 효율적인 위치 선정으로 인해 더욱 공고한 그물을 형성했다. 잠시 몸을 숙이고 상황을 살피던 윤승효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위로? 지붕으로?’
문평이 눈짓으로 되묻자 윤승효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거기도 은신자가 있을 텐데. 문평은 내심 근심스러웠지만 윤승효의 생각이 자신에게 미치지 못할 리 없으므로 묵묵히 그의 의견을 따랐다.
윤승효가 먼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없이 가뿐했다. 문평도 그 뒤를 따라 올라섰다. 한데 윤승효는 그사이에 벌써 은신자를 처리한 후였다.
지붕으로 올라선 것은 겨우 반걸음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상대를 찾아내 처리까지 하다니. 깜짝 놀란 문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아무리 일류와 절정의 차이가 크다고 하지만, 실력이 이 정도로 차이 날 수는 없는 일이다. 문평은 윤승효의 실력이 소문처럼 이제 막 절정에 오른 것이 아니라, 벌써 초절정에 근접해 있음을 알아보았다.
잘하면 근시일 내에 최연소로 초절정을 돌파하는 기재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제 고작 20대 초반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말 남다른 재능이다. 하늘이 내린 기재라는 천마도 저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이루지는 못했을 텐데 말이다.
“잠깐.”
문평이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윤승효는 무엇을 느꼈는지 갑자기 몸을 낮추면서, 손을 뻗어 문평의 가슴께를 짚었다. 단단한 손매가 힘 있게 가슴을 눌렀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흰 손가락들이 미인의 그것보다 아름답다.
문평의 가슴이 돌연 쿵 하고 내려앉았다. 혈을 짚은 것도 아니고 그저 손만 닿았을 뿐인데, 온몸이 꼿꼿하게 굳어 버렸다. 잠깐이지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자세를 낮추세요. 누군가 옵니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문평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효의 손이 그제야 가슴에서 떨어져 나갔다.
‘알아차렸을까?’
문평은 지붕 위에 납작하게 몸을 엎드리면서 불안한 기분으로 윤승효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손이 가슴을 정확히 짚고 있었으니 어쩌면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평은 그가 자신이 보인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랐다. 나중에라도 윤승효가 그때 왜 그랬냐고 물어 온다면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문평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긴 하지만 절대로 인정하기 싫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는 이제 서서히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는 중이지만,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문평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어깨에 무슨 곡식 자루 같은 것을 메고 있었는데, 안력을 돋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곡식 자루가 아니라 마구 꿈틀거리고 있는 커다란 가죽 부대였다.
“따라갑시다.”
암중의 세력을 조사하러 와서 저런 수상한 광경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차분한 눈으로 사내의 행동거지를 살핀 윤승효가 결정을 내렸다. 문평은 고개를 끄덕이고 윤승효의 뒤를 따랐다.
윤승효는 바람이라도 타는 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건너편 지붕에 착지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예리해지는 경계망을 뚫고 갔더니 예상대로 장주의 처소가 나온다.
가죽 부대를 든 사내는 경비들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장주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장주의 처소가 마주 보이는 건너편에서 문평과 윤승효는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할까요?’
문평이 눈으로 묻자 윤승효가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댄다.
“쉿. 가만히 있으세요.”
윤승효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쇠털처럼 가는 우모침牛毛針을 뽑아 들었다.
“석 형이 제압해 줘야 할 상대는 저기 지붕 밑, 오른쪽 처마의 아래쪽에 숨어 있는 자입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혈을 짚으세요. 절대로 소리가 나게 두셔선 안 됩니다.”
문평은 윤승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야 거기에 은신자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은신자들의 존재는 아직도 확인할 수 없었다. 문평의 실력으로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는커녕, 몇 명이 있는지조차도 알기 힘들었다.
눈에 보이게 모습을 드러낸 자가 다섯. 그리고 사각지대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자들은 몇인지도 모름.
이런 상태에서 ‘제압’이라는 강경책을 사용하는 게 걱정스러워진 문평은 근심스럽게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복면 위에서 윤승효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문평에게 속삭였다.
“석 형이 맡은 바 임무만 다해 준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셋 하면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소리는 그가 튀어 오르듯 지붕을 밟고 나아갔을 때야 들려왔다. 뭐라고 항의할 새도 없이 끝나 버린 숫자라 자기도 모르게 뒤를 따른 문평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목표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문평이 다가오자, 은신자는 얼떨결에 일어나 칼을 뽑았다. 평소 소리 없이 숨어 있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은신자는 이런 순간에도 소리를 지를 생각은 미처 못 하는 모양이다.
문평은 가능한 한 빨리 제압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 칼을 맞받지 않았다. 문평은 칼이 자신에게 쏘아져 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은신자의 정면으로 똑바로 달려들었다가, 목에 칼이 닫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을 사용해 몸을 눕혔다. 그리고 연이어 허공에서 몸을 틀어 은신자의 사선으로 빗겨 올라갔다.
은신자가 황급히 피했지만 문평의 속도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무릎의 탄력을 사용해 단번에 몸을 일으킨 문평은 은신자의 목에 자신의 칼을 꽂아 넣었다. 칼 한번 맞대어 보지 못하고 은신자가 죽었다.
말로는 길었지만 행동으로는 실로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 은신자는 결코 이렇게 쉽게 죽을 자가 아니었으나, 문평의 기습이 너무 빨랐던 것이 문제였다.
죽은 은신자의 위치는 여러 은신처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었다. 기습자의 첫 번째 제물이 되기엔 힘든 장소고, 경비망을 짠 사람조차 초병이 아니라 방어병의 개념으로 구상한 위치다. 그 자리에 오랫동안 은신하고 있던 은신자도 은연중에 자신의 자리를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의 틈을 파고든 것이 문평의, 아니 윤승효의 기습이었으니, 은신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손쉽게 적을 해치운 문평은 윤승효가 어떻게 됐나 싶어 고개를 돌려 봤다. 한데 놀랍게도, 그 짧은 순간에 적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깜짝 놀란 문평은 자신이 눈으로 본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진짜 다 죽은 게 맞는 모양이었다. 서늘한 밤공기는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고요했다.
자신도 적을 쉽게 죽이긴 했지만, 그의 공격은 거의 암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기습이었고 상대도 한 명뿐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평이 그 한 명을 죽이는 사이에 윤승효는 남은 모두를 쓰러트렸다. 윤승효가 적이었으면 문평은 서슴없이 ‘사술’이라는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만큼 그가 이뤄낸 일은 경이적이었다.
문평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 내려다보니 사내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온몸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서, 이자가 대체 왜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 솟은 문평은 안력을 돋워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딱 한 방울의 피가 눈에 띄었다. 사내의 미간을 뚫고 들어간 우모침의 끄트머리에 작은 핏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깔끔한 솜씨다. 우모침처럼 가느다란 암기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일을 여러 명을 상대로 단 한 수에 해치웠으니 이는 가히 신기神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 형은 지청술을 사용할 줄 안다고 했지요?”
문평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 부딪히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을 끝냈기에, 처소 안의 사람들은 아직 바깥의 이변을 모르는 듯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정적만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로 단 한 수의 공격으로 아홉 명이나 되는 상대를 절명시킨 윤승효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전히 호리호리하게 마른 몸이었으나 그가 무서운 고수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문평에겐 그 모습이 달리 보였다.
“지붕 위로 올라갑시다. 안에도 방이 많을 것이니, 일일이 찾다간 적들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문평은 그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자기보다 강한 자를 따르는 본능은 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다. 문평은 무의식적으로 이전보다 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개로 치면 배를 드러내 놓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태도였다.
문평은 처소의 지붕 위에 올라 지청술을 펼쳤다. 오래지 않아 집 안에 있는 자들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잡음들을 제외하고, 의미가 있는 소리만 따라간 문평은 머지않아 쓸 만한 이야기들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낮게 웅얼거리는 듯했지만 집중해서 청력을 돋우자 말소리는 물론 억양까지 뚜렷이 들렸다.
“이 계집애는 어떻게 찾았어?”
다소 짜증이 섞인 태도로 한 사내가 말했다. 곧이어 퍽, 하고 뭔가를 차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작은 욕설이 이어진다. 사내의 발치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것’은 공포에 질려 그저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말도 마. 조막만 한 계집애가 쥐새끼처럼 어찌나 잘 숨어 다니던지. 요 계집애를 찾아내느라 닷새나 허탕 쳤어.”
또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문평은 그들의 말이 울리는 방식을 듣고 그들이 밀실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만 간신히 통할 정도로 완벽한 밀실 안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집으로도 안 갔다더니. 어디 있었던 거야?”
별로 할 일이 없는지 그들은 노닥노닥 수다를 떨었다.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장주의 처소 안에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밤에 흔적을 수습하리란 윤승효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몰라. 그냥 남의 집 처마 밑이나 굴다리 아래에서 자고 그랬나 봐. 이년이 은자를 들고 의원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영영 못 찾을 뻔했어. 어디서 다쳤는지 팔은 또 부러져서는, 멍청하게도 훔친 은자를 들고 왔더래. 거지꼴을 하고 있는 애가 은자를 가지고 있는 게 미심쩍었는지 의원이 잡아다가 관에 넘기려고 했더라고. 내가 직전에 발견하고 빼내 왔어.”
이야기를 엿듣던 문평은 가느다랗게 미간을 좁혔다. 어째 그에게 익숙한 이야기가 사내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러진 팔에 은자를 가진 소녀라.
문평의 머릿속에 한쪽 눈이 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작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값싼 동정으로 던져줬던 은전 한 닢도.
문평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갔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바람을 완전히 배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계집애는 그냥 여기서 묻어 버리고 가는 게 어때? 어차피 처녀도 아니니까 상관없잖아. 이년을 잡아 오라고 한 건 밖으로 나가 비밀을 폭로할까 봐 그랬던 거지, 다른 쓸모는 없었던 거 아냐? 동정을 잃은 계집아이는 재료로 가치가 없다며?”
도망친 소녀 때문에 어지간히 고생했는지,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무시무시한 제안을 했다.
“아냐. 적 노야가 그러는데, 이 애는 삼음절맥이라 처녀가 아니라도 괜찮대. 선천적으로 음기가 강해서 오히려 처녀보다 낫다던데.”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 저거 또 꿈틀거리네. 귀찮아 죽겠어. 앵속 남은 거 없어? 좀 먹여 놔야 조용하지.”
“없어. 오늘 저녁에 옮겨야 할 애가 몇이었는데 그게 남아 있겠어? 귀찮으면 점혈이라도 해놔.”
“쟤 점혈 안 된다니까? 저년 도망간 게, 애들 점혈시켜놓고 앵속 먹일 때 혼자 점혈이 풀려서 그런 거잖아. 분명 뉘어 놓고 돌아섰는데 감쪽같이 없어졌다고 하던 말 못 들었어? 명삼호의 유언이었는데 그 정도는 기억해야지.”
“그럼 내버려 둬. 묶인 가죽 주머니 안에 있는데 지가 뭘 어쩌겠어. 숨구멍이나 내주고 모르는 척해.”
사내들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철면피한 자들의 대화에 문평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문평은 고개를 들어 윤승효를 올려다보았다. 윤승효가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확히 사내들이 서 있는 자리 위로 걸음을 옮겼다.
‘이 아랩니다. 그러니 지금 가죠.’
문평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의 제안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온전한 진심이다.
문평은 지금 즉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고 싶었다. 그가 세상의 모든 불행한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무시하기란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아래의 아이는 자신 때문에 저 꼴을 당하는 거나 다름없다.
저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서슴없이 앵속을 먹이고, 아이들을 재료로 삼아 사이한 대법을 펼치려고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윈 없는 짐승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아이는 저들에게서 힘들게 도망쳤다가 자신 때문에 다시 잡혔다. 멍청하게도 약을 사다 주는 대신 은자를 던져 준 자신의 안이함 때문에 말이다.
저 애의 인생 전체를 구해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상황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문평은 생각했다. 수많은 인간을 죽였지만 어린아이만큼은 한 번도 죽인 적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손에 앞으로도 어린아이의 피가 묻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더 들어 보십시오. 저들은 분명 비밀 통로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곳의 위치를 알아내셔야 합니다.”
하지만 윤승효의 의견은 문평과 달랐다. 그는 냉정하게, 당초의 예정대로 상대의 뒤를 밟을 거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답답해진 문평은 복면을 내려 입을 드러냈다. 그리고 입모양만으로 윤승효에게 말했다. 아이가. 문평은 손가락으로 지붕 아래를 가리켰다.
‘밑에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자 윤승효는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의 본거지에는 최소한 수백 명의 아이들이 더 있을 겁니다.”
문평이 구하고 싶은 건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의 아이가 아니라 그와 인연이 있는 아이다. 이기적인 자기 위안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진심은 그랬다. 그러나 윤승효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아이들이라는 명분 앞에서 여전히 당당했다.
몇 번을 설득해 보아도 그의 뜻은 먹히지 않았다. 답답해진 문평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억눌러 참았다. 혼자 힘으로 아이를 구할 수 있었다면 나서도 벌써 나섰으리라. 하지만 사내들이 숨어 있는 밀실은 그 혼자의 힘으로 깰 수 없는 곳이다. 무력한 자신은 혼자 힘으로 불쌍한 아이조차 구할 수 없었다.
문평은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지청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담담한 시선으로 윤승효가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문평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은 얼굴 위로도 시선은 느껴졌다.
“그런데 이놈의 암도는 언제 열리는 거야? 한번 가면 감감무소식이니 이거야 원, 갑갑해서.”
“어쩔 수 없지. 저쪽 문이 열리지 않으면 이쪽 문도 열리지 않도록 설계된 걸 어쩌겠어? 짧은 길이 아니니, 아직도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그놈의 화협인지 화괴인지 때문에 괜히 우리만 고생이구먼. 두더지같이 이게 뭐 하는 꼴인지.”
대화를 들어보니 그들이 숨어 있는 밀실이 ‘암도’라고 불리는 비밀 통로의 입구인 모양이었다. 문평은 소리의 반향과 음색을 통해 그들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약 사 장四丈1) 정도 아래. 밀실이면서 지하인 공간이다.
문평은 자신이 전음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갑갑하게 여겼다. 암도가 열리면 그들도 같이 암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쪽에서 문을 열지 않으면 이쪽에서 문을 열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그 문이 닫히면 그들의 추적 또한 막히게 되는 셈이다.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승효에게 다가섰다. 문평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윤승효는, 문평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흠칫하며 어깨를 경직시켰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생각하는 순간, 뺨과 뺨이 맞닿았다. 문평은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윤승효에게 말했다.
“암도가 있답니다. 그런데 설계가 복잡하게 되어 있어 이쪽에선 문을 열 수 없고 건너편에서만 문을 열 수 있다고 하는군요. 지금 쫓지 않으면 늦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천마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문평의 입김이 귓불에 닿은 감촉이 선연했다. 문평이 속삭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그의 입김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살짝 간질간질하기까지 했다. 입술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문평의 입술이 천마의 귓불과 맞닿아 있었다. 친밀하게 맞닿진 않았지만 살짝 스치기는 했다. 깃털로 간질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살짝.
“그들이 있는 위치는 정확히 아시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천마가 문평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하지 못하는 문평은 다시 귓속말을 하려고 했다. 천마는 그런 문평을 가볍게 저지하며 말했다.
“입모양만 보이셔도 됩니다.”
‘윤 형이 서 계신 곳에서 직선으로 사 장 아래에 있습니다. 밀실입니다. 지하에 있고요.’
혹시 입모양이 흐트러지면 뜻이 잘못 전해질까 싶어, 문평은 최대한 간결하게 말을 끊었다.
“분명 저쪽에서 먼저 열지 못하면 이쪽에서는 열리지 않는다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짧은 순간 천마는 고민했다. 문평은 신법은 제법 뛰어났지만 잠행술엔 조예가 없는 위인이다. 너무 가까이서 따라붙으면 기척을 들킬지도 모른다. 문평의 기척을 완전히 감추기 위해선 기막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그는 윤승효로 분하고 있는지라 그 정도의 무공수위를 드러낼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는 일이다.
문평은 아직까지 그가 천마라는 사실을 모른다.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남의 신분을 빌렸던 천마는, 그 사실을 끝까지 문평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알릴 거였다면 아예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겠지.’
천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체를 드러내고 이놈을 받아들이게 되면 제자 놈들이 딸려 보냈을 수족들까지 달고 다녀야 한다. 하지만 그런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달게 되면 흔적을 들키기에 십상이다.
‘번거롭군. 이래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더니 듣지도 않고.’
천마는 내심 혀를 차며 못마땅하게 문평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잡초 주제에 지나치게 손이 많이 갔다. 난이라고 하면 본래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겠는데, 길가에 널린 잡풀 따위가 뭐가 이렇게 까다로운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일단 내려갑시다. 밀실에 있다면 바깥의 기척을 예리하게 살피지는 못할 겁니다.”
지하의 밀실. 게다가 암도의 입구. 그런 곳이라면 그 벽 역시 기관으로 무장되어 있을 게 뻔하다.
천마는 고심 끝에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문평에게 신호를 보냈다. 윤승효의 말이라면 뭐든 잘 듣는 문평이 고개를 끄덕이고 처마 아래로 뛰어내렸다. 천마도 기척을 감추고 문평이 들어간 3층의 창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찾아든 장주의 처소는 수수하지만 격조 있는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멋진 산수화도 걸려 있고, 공기 중에서는 아직도 은은하게 먹 향기가 났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장주의 신분과 어울리는 고아한 문사의 방.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만 같은 처소 한가운데에 선 윤승효는 예리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날 선 비수처럼 예리한 눈빛이다. 그의 눈빛이 검기였다면 방 안의 모든 물건은 조각조각 분해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윤승효가 찾고 있는 것은 사내들이 숨어 있을 밀실로 통하는 입구였다. 문평이 장담하고 그가 추측한 대로 그것은 이 방 안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문평이 열린 방 안을 들여다보자 윤승효가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걷는 윤승효와 달리 자신의 걸음걸이에 자신이 없는 문평은 차마 방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대는 중이다. 혹여 나무 바닥이라도 잘못 밟았다가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스스로 저어했기 때문이다.
“침상 아래를 보십시오.”
문평과 눈을 마주한 윤승효가 눈짓으로 침상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윤승효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 문평은 탄성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효가 왜 그쪽을 주목하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평이 생각해도 그곳이 비밀 통로의 입구가 맞는 듯했다.
추종술에 능한 문평은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과 그렇지 않은 흔적을 구분할 줄 알았다. 덕분에 그는 침상의 네 다리 중 아래쪽의 바깥 다리가 유난히 반들반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비밀 통로와 연결된 장치임이 분명했다.
보통 침상의 다리는 사람의 손이 자주 닿지 않아서 저런 흔적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설치된 기관이 얼마나 정교한지는 모르겠지만 드나드는 사람이 저렇게 부주의해서야 흔적을 밟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입구는 찾은 것 같으나 그다음이 문제다. 밀실 안으로 들어가 사내들을 제압하고 암도의 입구를 확보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암도가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를 따를 것인가?
문평의 입장에서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암도가 어떤 방식으로 열리게 되는지, 혹은 얼마 동안이나 열려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이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든 모험일 수밖에 없다.
“사내들이 아직 아래에 있습니까?”
윤승효는 문평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문평은 다시 바닥에 귀를 갖다 대려고 했다. 그러나 윤승효는 손을 저어 그를 만류하고는, 의아해하는 문평에게 색다른 것을 제의했다.
“아니, 그렇게 말고. 약식으로 한번 해 보세요.”
‘약식으로요?’
“네. 지청술이라는 건 땅을 매개로 진기를 증폭시켜 청력의 범위를 넓히는 무공이 아닙니까? 그러니 같은 방식으로 용천혈湧泉穴을 이용한다면 완전히 같지는 못해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한번 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직 초식을 벗어나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문평은, 배운 것 이상으로 무공을 궁리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윤승효의 말을 듣고 보니 변칙적이긴 해도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기의 흐름을 전폭적으로 바꿔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기를 증폭시키는 혈을 약간 바꾸는 정도이니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윤승효가 제안한 방식대로 지청술을 응용해 봤다.
보통 때는 고막을 향해 증폭되는 진기를 이번에는 발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다리는 그의 신체 중 가장 혈도가 발달되어 있는 곳인지라 길을 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집중해 용천혈로 기를 보냈다. 귓바퀴가 소리를 모으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바닥 전체가 소리를 모으기 시작한다. 문평은 그 소리들을 진기와 함께 귀로 보냈다.
진기가 귀에 닿자 그의 발밑, 겨우 한 장 아래의 밀실에서 떠들고 있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려왔다. 귀를 사용할 때에 비하면 매우 작은 음향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됩니다.’
문평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윤승효에게 고했다. 들리는 소리 자체는 무척 작았지만 어쨌거나 진짜로 되긴 됐다.
“다행이군요. 그럼 계속 감시를 해주십시오. 그들이 움직이면 바로 알려 주시고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윤승효가 재차 명령을 내렸다. 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극히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 덕분에 문평은 별다른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고 그의 뜻을 따랐다.
잠시 뒤. 쇠와 쇠가 마찰하는 기음奇音이 들리는 것을 느낀 문평이 다시 눈을 떴다. 문평의 표정만으로 그가 말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윤승효가 문평에게 손짓을 했다. 문평은 얼른 몸을 날려 윤승효의 곁으로 다가갔다.
“암도는 어느 쪽으로 통하고 있습니까?”
‘뒤쪽인 듯합니다. 북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지청술은 계속 운용하시고요.”
문평은 이제야말로 밀실 안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추측은 틀렸다. 윤승효는 문평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고, 지하로 내려가는 대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평은 순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저 잠깐 손이 닿았을 때도 숨 쉬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엔 한술 더 떠 허리를 끌어안겼다. 윤승효의 가슴과 그의 상체가 단단히 밀착되었고 뺨과 뺨 사이도 서로의 열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당황한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윤승효의 가슴을 밀어냈다. 문평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갑작스러운 윤승효의 행동에 항의했다.
“갑, 갑자기 이게 무슨…….”
“쉿. 조용히.”
너무 놀라 입 밖으로 소리를 냈던 문평은, 윤승효의 엄한 경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안긴 놀라움은 여전해서, 목덜미까지 번져 나간 붉은 기운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지청술을 계속 운용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까?”
이런 상황에서 들리기는 뭐가 들려? 라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집중해보니 뭔가가 들리긴 들렸다. 정확히는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들렸는데, 덕분에 문평은 자신들이 그들이 뚫어 놓은 암도 위를 정확히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계속 북쪽입니까?”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놓고 신경도 안 쓰는지 윤승효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거듭 물었다. 문평은 마지못한 심정으로 윤승효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데 계속 이렇게 가실 겁니까?’
“석 형도 나도 은신술隱身術을 할 줄 모르니 별수 없지 않습니까. 서투르게 접근해 미행을 들키는 것보다는 이렇게 쫓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석 형께선 계속 지청술을 사용해 방향을 잡아 주십시오. 달리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진작에 해 주셨어야지요. 그래야 제가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것 아닙니까. 문평은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윤승효가 원망스러웠다. 문평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윤승효야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문평은 그의 무신경한 행동 때문에 하마터면 심장 마비에 걸릴 뻔했다.
윤승효는 옆구리에 사람 하나를 끼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하늘을 날았다. 3층짜리 건물 정도는 한 번에 뛰어올랐고 담이나 바위 같은 장애물도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윤승효는 그야말로 구름처럼 유유히, 마치 흐르듯이 수월하게 그 모든 것을 넘어 다녔다. 그런 윤승효를 보며 문평은 그의 숨겨진 사문이 무당이나 곤륜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제운종梯雲縱이니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니 하는 이름을 가진 전설적인 경신법과 그 운용 방식이 닮아 있는 데다 윤승효의 내공에서 장강처럼 도도히 흐르는 정종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윤승효의 기초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깊고 견고했다. 어린 나이에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성긴 데 없이 견실한 것을 보면 필시 명사의 지도를 받았음이 분명했다.
‘그래. 그럴 거야. 분명히, 정파의 명사…….’
문평은 혼잣말로 중얼중얼하며 머릿속으로 신선 같은 노老도인을 상상했다. 선풍도골의 인상에 도관을 정제하고, 금방이라도 등선할 듯 현현한 선기를 드러내는 노도인. 윤승효의 사부는 분명 그런 외관을 가진 정파의 이름난 고수일 터였다.
애써 윤승효의 사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그와 맞닿아 있는 어깨로만 쏠리던 신경이 분산되었다. 윤승효가 알아차릴까 무서울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피부 위의 열기도 차츰 기세를 잃는다. 효과가 있다. 문평은 기뻐하며 계속 그 생각에 골몰하려고 노력했다.
문평은 발끝까지 흰 수염을 기른 고상한 풍격의 노도인을 떠올리며,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의 강인한 감촉에 대해서는 잊으려고 발버둥 쳤다.
날렵한 겉모습과는 달리 윤승효의 몸은 바위처럼 강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따뜻할 뿐만 아니라 감미롭고, 그의 그림 같은 옆얼굴은 그 어떤 미녀보다도 더 고운 선을 가졌으며……. 아니. 이딴 생각은 집어치워야 한다.
문평은 잠시 마음을 놓은 틈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을 뿌리치고 노인의 흰 수염에 집중했다.
그의 상상이 거듭됨에 따라 노인의 수염은 점차 길어졌다. 노도인의 수염은 발치를 지나 바닥에까지 닿았다. 문평은 관우도 부러워할 풍성하고 아름다운 미염을 정성껏 상상해갔다. 그렇게라도 딴생각에 집중하지 않으면 윤승효의 팔 안에서 어떤 꼴을 보이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잠깐.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있던 문평은 하마터면 은밀히 들려오던 소리의 흔적을 놓칠 뻔하고 말았다.
뒤늦게야 자신이 쫓던 발걸음 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풀숲을 헤치며 산길을 쫓아 달려가던 윤승효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문평은 눈을 감은 채 바닥에다 발을 디디고 생각에 잠겼다. 윤승효는 진지한 얼굴로 그런 문평을 지켜보았다.
“자세히 들리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놓친 것 같은데, 아니. 기음이 들립니다. 기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평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그가 흔적을 놓친 게 아니라 상대가 발을 멈춘 거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평은 작금의 상황을 고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출구가 있다는 소리가 되는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렇게 정신을 팔고 있으면서도 적들의 위치를 놓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문평 혼자의 힘이 아니라 윤승효가 틈틈이 진기를 증폭시키는 데 도움을 줘 가능했던 일이었기에, 문평은 자랑스러운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외려 면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윤승효가 허리를 놔 주었다.
문평은 계속 몸 안에 돌리고 있던 진기를 풀어 내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달리면서 지청술을 운용해 본 것은 처음이라 온몸이 노곤했다. 과도하게 진기에 노출된 귀가 먹먹하고, 찡한 이명이 끊이질 않는다.
문평은 꼭 귀에 물이 들어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귓바퀴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산중이었다. 길을 보지 않고 무작정 소리만을 따라왔기에 이곳이 정확히 어디의 무슨 산인지는 확인하기 힘들었다. 귀주는 원래 산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고, 개양은 그중에서도 기이한 봉우리가 유독 많다. 그들이 서 있는 곳도 꼭 그러한 곳이었다.
검첨처럼 뾰족하고 날렵한 봉우리가 사방에 비죽비죽하게 늘어서 있고, 나무들은 하나같이 수령이 오래되고 커서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사위가 더욱 어둑어둑하게 느껴졌다.
“혹시 윤 형도 들립니까?”
멈추지 않는 이명 때문에 계속 귀를 문지르며 문평이 물었다. 윤승효는 침착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문평을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요. 이건 제 착각이 아니지요?”
처음에는 귀에 이상이 있어 이런 소리가 들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니, 이건 그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진짜로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이런 산중에서 물소리라니, 계곡이 있을 법한 지형도 아닌데?’
의아하게 생각한 문평은 윤승효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윤승효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도 들립니다. 근처에 물길이 지나나 봅니다.”
사방이 어두워서 물이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시각은 밤이 가장 어두울 시간인 축시丑時2).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문평은 안력을 돋우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물길이라는 말을 내뱉은 후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윤승효가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위험합니다.”
윤승효가 걸어가며 주의를 주었다. 문평은 자기도 명색이 무인인데 설마 발밑이 위험하겠나,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걷다가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하마터면 실족할 뻔했다. 부스스, 그의 발밑으로 돌과 모래가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문평이 황급히 몸을 낮췄다. 윤승효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엄한 꾸짖음이 전음으로 왔다. 웃자란 풀 때문에 미처 낭떠러지를 확인하지 못했던 문평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실수를 해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창피해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풀숲으로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자니 아래쪽 어귀에서 불꽃들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문평이 바닥이랑 구분하지 못했던 낭떠러지는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깎여 나가 직각으로 떨어졌다가, 십여 장 아래쯤에 가서야 다시 땅과 이어졌다. 아래엔 절벽에 등을 맞댄 조그만 사당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불빛은 그 근처를 서성이는 사내들이 들고 있는 횃불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가 떨어트린 돌 때문에 횃불을 든 사내 중 몇몇이 위를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다행히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시야를 가려주어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용왕당龍王堂이 그들의 비밀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던가 보군요.”
문평은 어두워서 그저 어슴푸레하게 건물이 서 있다는 것밖에 모르겠는데, 윤승효는 용케도 그것이 용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듯했다.
‘용왕당이 여기에 있다면 근처에 물도 있어야 할 텐데?’
의아해진 문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위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십 장 아래의 평지에서 다시 땅이 끝나는 게 보였다. 건너편 절벽과 겨우 삼 장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폭인데, 아마도 물은 그 아래서 흐르는 것 같았다. 절벽 아래로 줄사다리가 매여 있고, 사내들은 용왕당 앞에 놓인 작은 상자들을 줄사다리를 통해 절벽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그 상자들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지 못할 사람은 없다. 문평은 불편한 기분으로 작은 관이나 다름없는 상자들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걸 말려야 사람의 도리인 것 같은데, 지그시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누른 윤승효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윤승효는 정말 끝까지 뒤를 쫓아 그들의 근거지까지 확인을 한 후에야 움직일 생각인 모양이다. 그가 옳다는 걸 알면서도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성이 대단하다. 별로 인의와는 상관이 없이 살아온 자신마저도 이리 피가 끓는데, 협의지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저렇게 냉정하게 기다릴 수 있다니…….
이런 차이를 일컬어 그릇이 다르다고 하는 것일까. 문평은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부스럭.
돌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무언가 작은 것이 풀을 밟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문평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옆에 서 있었다. 아주 작은 체구를 가진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가 이런 밤중에 어쩐 일로?’
문평은 고개를 갸웃하며 어린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문평의 눈에 달빛보다 더 푸르스름한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체 같은 얼굴에 푸른 입술이 말려 올라가 있었다. 보라색으로 변색된 잇몸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누런 이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의 얼굴이 끔찍했다. 꼭 비명을 지르다가 죽은 시체 같은 얼굴이었다.
“조심!!”
윤승효조차도 아이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윤승효는 대경해 소리를 지르더니, 문평의 어깨를 쳐서 그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문평은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윤승효는 ‘저것’에게 공격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십 장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저게 대체 뭐길래? 문평은 자신이 뭘 봤는지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문평은 신법을 이용해 황급히 몸을 곧추세우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 위에서 챙, 하고 칼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아아앙!”
꼭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문평은 추락을 막기 위해 절벽에 도를 뽑아 박아 넣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횃불을 들고 있던 사내들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한꺼번에 한 놈도 아니고 세 놈이나 달려들고 있었다.
‘끝장이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평은 절벽에 발을 디딘 채 박도를 뽑고, 다시 아래로 뛰어내렸다. 머리 위의 놈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절벽에서 떨어진 후 일류 고수 세 명의 공격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웬 놈이냐!!”
가장 먼저 다가온 사내가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문평의 앞에 닿은 것은 끄트머리에 푸르스름하게 물이 든 날카로운 철질려鐵疾藜였다.
문평은 뛰어내리던 자세를 바꿔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횡으로 몸을 누이며 옆으로 떨어져 내리자 머리를 노리던 도끼가 목표를 잃고 스쳐 지나갔다. 철질려 역시 마찬가지로 옷깃만 스쳤다.
옆으로 팽이처럼 돌며 떨어져 내리던 문평은 다리로 땅을 박차고 일어나 도끼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도끼 사내가 도끼날의 넓은 면적으로 그를 막아왔다.
문평에게 달려온 사내들은 각각 다른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제일 성격이 급해 보이는 사내는 도끼를 썼고, 그 뒤를 따라온 사내는 창을 썼으며, 맨 뒤의 사내는 암기를 사용했다.
부斧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용력에 자신이 있는 자들이다.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나 급선봉急先鋒 삭초索超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 도끼를 다루는 자들은 대개 덩치가 크고 힘이 장사인데, 이는 선천적인 용력이 아니고서는 무거운 도끼의 진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평에게 달려든 사내도 그러한 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문평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덩치도 실로 산山만 했다. 들고 있는 도끼도 족히 80근은 되어 보였다. 그 큰 덩치로 큰 도끼를 휘두르니,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박도를 들고 있는 문평에겐 큰 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도끼를 휘두르는 자의 등 뒤에는 호시탐탐 암기를 쏘아낼 기회만 엿보고 있는 자도 있었다. 장창을 휘두르는 자 역시 지지 않고 빈틈을 향해 창을 휘둘러 왔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서로 합격술을 익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각각 일류 고수급에 준하는 그들이 합격술마저 능했다면 문평은 별로 버티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서로의 병기에 익숙하지 못했고, 그래서 종종 서로의 진퇴를 가로막거나 방해하는 실수를 범했다. 덕분에 문평은 겨우겨우 숨통을 틔워 가며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요행도 그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게 되면 바랄 수 없게 될 터였다.
휘잉.
위압적인 소리를 내며 문평의 상체를 향해 도끼날이 달려들었다. 문평은 몸을 피하면서 도면을 도끼날에 붙여 도끼의 방향을 틀었다. 깔끔한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술수. 거세게 달려들던 힘을 옆으로 흘려 보내자 도끼 사내의 균형이 일순간 흐트러졌다.
문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도를 힘을 흘린 방향 쪽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장창의 사내가 동료의 위험을 알고 창을 휘둘러 문평의 어깨를 노려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소한 사내가 날린 암기까지 눈을 향해 날아왔다.
도를 회수해 암기를 쳐낸 문평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물리고 말았다. 그새 균형을 찾은 도끼 사내가 내리찍듯이 문평의 허리를 노렸다. 문평은 도명을 울리며 그런 도끼 사내를 향해 마주 나아갔다.
순식간에 여러 합의 공세가 흘러갔다. 얼핏 보기에 문평의 상태는 매우 위태로운 듯했다. 뒤로 물러날 공간조차 없는 절벽을 뒤로하고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남자를 피해야 했고, 그 사이사이로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뿌려지는 암기도 상대해야 했다. 장창 사내가 끼어들 틈이 적은 건 그나마 다행한 일로, 도끼 사내의 성급함이 없었다면 가지지 못했을 장점이었다.
문평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형형한 도끼날을 피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에서 아이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운 흉포한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키아아아앙. 캬아아아아앙!!!”
그 소리를 들은 암기 사내가 흉물스럽게 웃으며 문평을 놀렸다.
“저 위에 동료라도 있는 모양이지? 안됐군. 이왕에 죽을 거라면 사람 손에 죽는 게 훨씬 나았을 텐데.”
별로 재미있는 농담도 아닌데 도끼 사내가 그 말을 듣고는 킬킬거렸다. 장창 사내도 불길하게 웃었다. 문평은 그들이 어리석은 아이를 놀리듯 웃어 대는 게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박도를 세워 앞을 막으며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저게 대체 뭐지?”
까슬까슬하게 쉰 목소리가 문평의 목울대를 울리며 흘러나왔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것. 문평이 본 것은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지도 숨 쉬지도 않는 것이다. 문평의 시선이 자동으로 아이들이 담겨 있는 상자로 향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이 입가에 비죽 웃음을 머금었다.
“건예자乾麑子.”
“건예자?”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문평이 그 이름을 되뇌는 사이 왜소한 사내가 그에게 유엽비도柳葉飛刀를 던졌다. 버들잎처럼 얇은 비도들이 그의 전신으로 쏟아진다. 문평은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의 수법으로 그것을 피했다.
그러자 장창이 날아와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문평은 몸을 아래로 낮추는 대신 절벽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며 창의 공격을 피했다. 물 찬 제비처럼 날쌘 동작이었다. 그러나 시간차로 달려드는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허벅지의 근육이 베였다. 허공에 피가 튀었다.
비명이 절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면 죽는다. 그건 엄포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는 허공에서 거꾸로 돌면서 몸을 날린 후 다시 벽을 걷어찼다. 찢어진 근육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찰나 간에 균형이 흔들렸으나 탄력은 얻었다. 문평은 도끼 사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의 빼어난 신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꺄오오오오!!”
머리 위에서 강한 외침이 터져 나오더니 절벽 위에서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도끼 사내의 어깨를 노리며 몸을 날리던 문평은 사내의 도낏자루를 차고 몸을 날려 그들의 등 뒤로 몸을 피했다.
절벽 위에서 희끄무레한 존재가 떨어져 내렸다. 문평이 절벽 위에서 봤던 바로 그 아이였다.
창백한 얼굴에 흰옷을 입어 혼백처럼 보이던 아이는 그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얼굴과 목 부근이 예리하게 베였고, 오른팔도 하나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땅에 떨어진 그것은 분을 못 이긴 듯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그것이 몸을 뒤틀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들이 갑작스러운 횡액에 놀란 듯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으아악. 피해!!”
처음에 문평은 그들이 왜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도끼 사내가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도끼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자기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처럼 그도 피하려고 했지만, 워낙에 발이 느렸던 터라 제대로 몸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도끼 사내는 건예자가 내는 소름 끼치는 비명과 비교해도 모자람 없을 만큼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시꺼멓고 고약한 진물이 오공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는 사지를 뒤틀던 것을 멈추고 숨을 거뒀다.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었다. 대단한 용력을 자랑하던 모습치고는 허망할 정도로 초라한 죽음. 흠칫 놀란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뭐지?’
문평보다 더 멀리 물러선 것은 조금 전까지 도끼 사내의 동료였던 자들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문평보다 더 겁먹은 얼굴을 하고, 그들이 ‘건예자’라고 부른 것을 바라보았다. 건예자가 불그스름한 불길이 이는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를 악물더니, 갑자기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 머리 위로 미친 듯이 뿌려댔다.
“물러서요!”
머리 위에서 다시 한 사람의 외침이 들렸다. 윤승효의 목소리다. 문평은 그 목소리에 얽힌 다급함을 읽고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상황의 위급함을 보고 상자를 옮기던 사내들까지 달려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들은 이쪽으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에 메고 있던 상자만 들고 잽싸게 사다리 아래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은 윤승효가 아니라 건예자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부리는 것이면서도 저토록 두려워하다니. 문평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 건예자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마물인지를 실감했다.
“더 물러서요. 저것의 피는 어지간한 독물보다 더 악랄합니다.”
건예자보다는 상태가 양호하지만, 그래도 다소간의 낭패는 면하지 못한 듯 옷차림이 너덜너덜해진 윤승효가 바닥으로 내려서며 외쳤다. 어둠 속에서도 윤승효의 상아 같은 상체가 훤히 보였다. 옷에 독물이 묻자 아예 상의를 찢어 버린 모양이다. 그는 군데군데 독물이 묻어 부식된 검을 세워 건예자를 노렸다.
윤승효가 얼마나 막강한 상대인지 익히 알고 있는 듯 건예자가 그를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등줄기를 꼿꼿이 세운 건예자가 하나 남은 팔을 휘두르며 윤승효에게 달려들었다. 윤승효는 검에 검기를 입히고 건예자를 맞이했다.
까가강!
검과 팔이 닿았는데 꼭 쇠와 쇠가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어린아이의 얇은 팔뚝은 검기를 입힌 칼과 닿았는데도 옷이 찢어지는 것 외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인간이라고 하기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그것이 날카롭게 이를 드러냈다. 그러더니 윤승효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윤승효는 검첨을 돌려 건예자의 팔을 바깥으로 내치면서 발길질로 복부를 걷어찼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건예자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윤승효가 제대로 된 권각술을 사용했는지 건예자의 몸에서 북이 터지는 것 같은 소음이 들렸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공격으로는 건예자를 완전히 죽일 수 없었다. 건예자는 무릎조차 굽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윤승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윤승효의 초식은 자로 잰 듯이 정교했지만 건예자의 거친 태도엔 그 정교함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공세가 이어졌다. 건예자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윤승효는 인간의 움직임을 초월한 몸놀림으로 그 공격들을 막아 나갔다.
문평은 윤승효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잘못하면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문평은 윤승효의 검첨을 비껴간 건예자가 그의 다리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는 걸 보고 숨을 삼켰다. 윤승효는 보법을 이용해 공격 범위를 벗어나더니 건예자의 목을 그대로 내리쳤다.
깡, 하고 다시금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튕겨 나가는 게 아니라 건예자의 목을 꺾었다. 검은 건예자의 목을 힘겹게 파고들어 절반이나 갈라놓았다. 하지만 끝까진 자르지 못했다. 목이 절반 가까이 잘린 상태로도 건예자가 이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쉽게 죽지도 못하는군.”
윤승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주먹을 휘둘러 건예자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반쯤 부러졌던 목이 완전히 꺾였다. 거무스레한 피가 아이의 작은 목에 솟았다. 피라고 하기보단 진액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진득진득하고 고약한 액체였다.
윤승효는 건예자의 목에 꽂힌 칼을 빼더니, 몸을 돌리며 건예자를 사선으로 양단했다. 나무토막이 잘리는 것처럼 아이의 몸통이 잘려 나갔다. 건예자의 몸이 드디어 땅을 뒹굴었다.
“거, 검사劍絲!!”
왜소한 사내가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윤승효의 검에서는 정말로 실처럼 가느다란 기가 유형화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서 얼른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안력을 돋워 보면 검사의 하느작거리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보였다.
“검사의 고수라니. 초절정의 고수가 여긴 왜!!”
문평도 같은 생각이었다. 설마설마했지만 당신, 진짜로 초절정이었어? 아직 20대 초반밖에 안 됐는데 뭐가 그렇게 빨라?!
“왜 왔을 것 같은가?”
윤승효가 냉담하게 말하며 엉망진창이 된 칼을 흔들었다. 건예자의 피에 부식되어 너덜너덜해진 검은 이미 고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액이나 다름이 없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앞으로 겨눈 윤승효가 서리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정면에서 그 악마 같은 웃음을 본 왜소한 남자는 오금이 저렸다.
“위에서 듣자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저것의 손에 죽느니 그나마 사람 손에 죽는 게 나을 거라고 했던가? 그래. 소원을 들어주지. 네놈들이 만들어 낸 마물이 아니라 내 손에 죽을 테니 억울하진 않을 거야.”
왜소한 사내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윤승효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장창의 사내도 윤승효의 기세를 이길 수 없는 듯 비틀거렸다. 그들은 상대가 대체 무슨 원한으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임이 분명한데, 저 사람은 왜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말하면서 저렇게 기쁘게 웃는 걸까? 유달리 선하고 아름답게 생긴 얼굴이라서 이질적인 느낌은 더욱 두드러졌다.
왜소한 사내에게 윤승효의 모습은 정말로 명부의 천장天仗이 악행만을 일삼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처럼 보였다.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저자는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다!
왜소한 사내의 눈에 건예자를 단칼에 베어 버린 윤승효는 건예자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왜소한 사내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암기를 쏘아 댔다. 당문의 전설적인 암기술인 만천화우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그에 필적하는 폭발적인 기세로 암기가 날아갔다. 이는 당가의 방계 출신인 왜소한 사내의 구명절초救命絶招였다. 이 기술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조차도 사내의 목숨을 구해 줄 수는 없었다. 윤승효는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 왜소한 사내의 눈앞에 섰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이형환위以形換位였다.
윤승효는 고철이 된 검을 왜소한 사내의 심장에 서슴없이 꽂아 넣었다. 장창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등을 돌려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도 윤승효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왜소한 사내의 심장에 꽂힌 검을 부러트린 윤승효는 남은 부분을 던져 장창 사내의 등을 맞췄다. 수치스럽게도 등에 칼을 맞은 장창 사내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는데, 검이 등에 꽂혀서라기보다는 건예자의 피가 살갗에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장이 찔려 즉사한 왜소한 사내와 달리 장창 사내는 좀 더 고통스럽게 바닥을 긁다 명을 달리했다. 전장을 전전하던 문평의 눈으로 보기에도 참혹하기 그지없는 죽음이었다.
용왕당이 서 있는 평지 위로 을씨년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세 구의 시체, 아니 건예자의 것까지 모두 네 구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들이 싸움을 벌이는 사이 상자를 옮기던 사내들은 아이들을 모두 싣고 달아나 버렸다. 건예자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문평은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윤승효가 절벽 쪽으로 내려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깊은 아래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도도히 들려왔다.
“……어쩌지요?”
이 자리에서 사라진 아이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건예자를 통해 내다본 문평이 착잡한 음성으로 물었다. 윤승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계곡을 응시했다.
개양의 북쪽으로 쭉 올라온 상황에서 맞이한 협곡이니 저 아래의 계곡은 분명 남강대협곡南江大峽谷이리라. 굽이굽이 기암괴석을 따라 흘러갈 수백 리의 계곡. 지형의 문제 때문에 저들처럼 배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따라잡을 수는 없는 곳이다.
“뒤를 쫓겠습니다.”
윤승효는 결심을 굳힌 눈을 하고 문평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을 들은 문평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들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같이 갈 생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문평에게, 윤승효는 연이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석 형은 이곳에 남아 계십시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문평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기껏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앞길이 얼마나 위험할지 자신의 눈으로도 확인한 터에 혼자만 가겠다니? 문평은 윤승효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위험할 텐데요.”
“그러니까 혼자 가겠다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군요.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낫지 않습니까? 윤 형에 비하자면 초라한 실력이긴 하지만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상대는 생강시입니다. 조금 전만 해도, 저런 것이 한 구만 더 있어도 당해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앞길은 더 하겠지요. 그런 상황에선 제 몸 하나 빼내는 것은 가능해도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윤승효의 말은 뜻이 명료했다. 더는 지켜 줄 수 없으니 이만 빠지라는 거다. 그러나 문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큼 위험한 길이기에 더욱 자신이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목숨까지 윤 형이 책임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미끼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석 형!”
“빈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문평은 진심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느긋하던 윤승효가 제 입으로 단언해 사지死地라고 말하는 곳이다. 문평은 그런 곳에 윤승효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윤승효는 그의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 준 은인이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사모하게 된 사람이기도 했다.
천마와 억지로 관계를 맺고 괴로워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준 상대조차 또다시 남자라는 건 문평이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문평은 윤승효를 사랑했다. 몇 번이나 목숨을 살려 주고, 늘 자신을 배려해 준 저 사람을 사모하게 됐다. 겨우 손가락 하나 닿은 것만으로도 숨이 멈출 것 같을 정도로. 윤승효의 체온 때문에 가장 급박한 순간에도 다른 생각 따윈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같이 가고 싶다. 고집이라고 해도 좋고 욕심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어떤 소리를 들어도 윤승효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곳이 죽을 자리라면 더욱 그랬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등을 지켜 주고 싶었다. 문평이 이렇게 느낀 상대는 윤승효가 처음이다. 문평에게 있어 윤승효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맞은 사랑인 것이다.
윤승효, 아니 천마는 문평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싶습니다. 문평의 말이 지고지순한 순애의 고백임을 천마는 알아차렸다.
그의 잡초는 지금 윤승효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서슴없이 내던지고 있었다. 천마가 아니라 윤승효에게. 석문평의 진짜 주인이 아니라, 그의 주인이 뒤집어쓴 껍데기에 불과한 자에게 말이다.
‘그렇게 윤승효가 좋으냐?’
천마는 기가 막히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문평이 윤승효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증세가 설마 이토록 깊을 줄은 몰랐다.
석문평이 윤승효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보름 남짓한데, 녀석은 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려 들었다. 세상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하고, 자기 목숨 하나 구할 수 있으면 어떤 치욕을 당하더라도 기꺼이 견뎌 내던, 저 얄밉도록 자기중심적인 녀석이 말이다.
어이없고 괘씸하다. 무엇보다도 약이 오른다.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자 했더니만 이 녀석은 끝 간 데를 모르고 선을 넘었다. 버릇없이 굴더라도 자신이 봐줄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하는 법인데, 문평은 몸과 마음을 바치다 못해 이제는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내주었다.
‘그게 네 것이냐?’
천마는 할 수만 있다면 대놓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몸도, 제 마음도, 제 목숨도 주인이 따로 있는데, 저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남의 소유물을 제멋대로 갖다 바치는 건지 모르겠다.
저놈은 아무래도 천마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자신같이 존재감이 큰 인간을 잊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문평이 하는 맹랑한 짓거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말을 하시다니요. 석 형은 저를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윤승효의 탈을 쓴 천마가 불쾌한 낯빛으로 문평을 돌아보았다. 실제로 빈정이 상해 있기에 그의 태도는 신랄하고 사나웠다.
윤승효가 정말로 화가 났을 때는 늘 그렇듯,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낯으로 화를 내자 문평은 주눅이 들었다. 윤승효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나설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윤 형.”
“지금 이런 일로 다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이 순간에도 저들은 아이들을 싣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저들을 놓쳤다간 지금 간 아이들마저 모조리 생강시가 되고 말 테지요. 이런 상황에서 감상적인 기분으로 죽겠다는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도 석 형도 모두 살릴 생각입니다.”
어두운 하늘 아래서도 푸르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문평을 직시했다. 사람의 눈동자가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문평은 아픈 시선으로 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석 형은 용왕당에 남은 아이나 구해 주십시오. 저 아이의 용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윤승효는 납치범들의 배를 쫓기 위해 몸을 돌리기 전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했다. 문평은 용왕당 안에 무슨 아이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용왕당 앞에 늘어서 있던 상자들은 모두 사라졌고, 특별히 눈에 띄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용왕당의 문어귀에 괴상한 가죽 부대 하나가 오도카니 남아 있는 게 보였다. 낯이 익은 가죽 부대다. 방금 전 소가장에서도 본 적이 있는 물건이 아닌가. 문평은 직감적으로 저 가죽 부대 안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잊을 뻔했다. 저 아이……!
문평은 고개를 돌려 윤승효에게 아이의 정체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사이 윤승효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적들을 쫓으러 간 모양이었다.
문평은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다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자신을 놔두고 가버렸다. 내가 정말 그렇게 도움이 안 되는 건가? 무인으로서의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며 문평은 너털너털 가죽 부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이 아이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그나마 아주 쓸모가 없는 인간 취급은 면했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