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문평이 잠에서 깼을 때 제일 처음 본 건 자신의 눈앞에 드리워진 새하얀 이마였다. 상아처럼 반듯하고 동그란 그것은 핏줄조차 비치지 않을 만큼 희고 투명했는데, 그랬기 때문에 그는 잠시 동안 그것이 사람의 이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알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그란 이마를 드러낸 채 잠든 상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사람이 실은 남자에, 심지어는 윤승효라는 점이었다.
깜짝 놀란 문평은 그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허리에 힘을 싣자마자 엉덩이가 찡하니 아팠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유, 윤 형!! 유, 윤 형!!”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문평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윤승효의 어깨를 흔들어 그를 깨웠다.
그는 윤승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왜 우리 둘은 알몸인가? 어째서 지금 내 엉덩이가 이렇게 아픈가? 무슨 일 때문에 침상에는 원인 모를 액체가 잔뜩 말라붙어 있고, 당신은 피곤에 지친 얼굴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인가?
“……관 형. 깨어나셨습니까?”
문평이 너무 거칠게 흔들어 대는 바람에, 불쾌하게 잠에서 깨어나 버린 남자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햇빛에 비친 푸른 눈동자에선 졸음의 기운이 역력히 묻어 나왔다.
“윤 형.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가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지요?”
태평한 윤승효와는 반대로 사색이 되도록 얼굴이 질린 문평이 다급히 그를 채근했다. 졸린 듯 눈을 비벼대던 윤승효가 그의 질문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군요. 관 형이 깨어나기 전에 미리 일어나 흔적을 치워뒀어야 하는 건데 그랬습니다. 관 형이 너무 보채는 바람에 진이 빠져 잠시 눈만 붙인다는 게 그만……. 몸이 불편할 테니 누워 계세요. 제가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윤승효는 태연스레 그렇게 말하더니, 미끄러지듯 침상을 나가 알몸을 드러냈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백옥으로 조각한 것 같은 몸매가 눈앞에 드러났다.
그동안 옷을 입은 모습만 봐서 매우 호리호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눈앞에 있는 사내의 모습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마른 것은 사실이지만 온몸이 잘 단련돼 있었고, 그중에서도 특히나 어깨와 가슴이 발달되어 있어서 벗고 있어도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뭐가 저렇게 커?’
그런데 그 몸에는 놀라운 것이 하나 있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는 곳에, 거의 흉기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물건이 떡하니 달려 있다.
날씬한 몸에 붙어 있어 더욱 두드러지게 커 보이는 그것은 어린아이 팔뚝만 한 두께와 길이를 자랑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문평은 천마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간에게도 저런 게 달려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인간이라면 말이다…….
저런 것이 자신의 아래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안 그래도 아프던 엉덩이가 그 물건을 확인하고 나니 더욱 격렬하게 쑤셔 온다. 문평은 우울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는 왜 하필 잠을 자도 저런 걸 가진 놈들하고만…….’
사내로서의 박탈감하고는 좀 다른, 이를테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무시당한 것만 같은 묘한 기분에 문평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유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윤 형. 저는 어젯밤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어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관 형이 말하는 어제가 사혈회의 도박장에 갔던 그 날을 말하는 거라면,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났습니다. 오늘이 사흘째 아침이니까요.”
윤승효의 말에 문평은 입을 딱 벌렸다.
‘뭐라고? 그날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났다고?’
문평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은 도박장에서 돌아와 역용을 지워 낸 직후에서 끝이 났다. 그 이후로는 완전히 새까맸다.
그날 윤승효가 세숫물을 가지러 간다고 나간 후 자신은 방을 치워둘 생각으로 움직였다. 윤승효가 벗어 놓은 흑의를 개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다. 갑작스레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지금 이 상황이다.
“윤 형! 나는…….”
“미안한데 옷 좀 입고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벌거벗은 채로 이야기하려니까 어쩐지 쑥스럽군요. 좀 춥기도 하고요.”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문평의 입을 윤승효가 막았다. 평정심을 완전히 잃은 문평과 달리 윤승효는 지나치게 태연해 보였다. 정황상 두 사람이 정사를 나눈 게 확실한 것 같은데도, 윤승효는 그 일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문평은 윤승효가 한가롭게 옷을 입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헝클어져 엉망진창이었다. 상황의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것 같아서 이상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바라도 이 일은 꿈이 될 수 없었다. 아직도 욱신욱신 쑤시는 아픈 엉덩이와 허리를 울리는 익숙한 둔통이 그것을 증명했다.
윤승효가 옷을 입고 있는데 자신은 벗고 있을 수가 없어서, 일단 옷을 입었다. 그랬더니 윤승효가 점소이를 불러 세숫물을 가져오게 했다. 세수를 했더니 방으로 식사까지 시켰다.
윤승효의 권유 때문에 문평은 식욕이 전혀 없었음에도 식탁에 앉았다. 아침이라 간단히 어죽이 나왔지만, 문평은 입맛이 없어 그것조차 잘 먹지 못했다.
반면에 윤승효는 자기 몫의 어죽을 깨끗하게 비웠다. 식사를 끝낸 후 따뜻한 차를 청해 자기도 한 잔 마시고, 문평에게도 가득 따라 주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차를 마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억하고 있는 문평은 윤승효가 주는 차를 받긴 했지만 마시진 않았다.
“몽중십야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식사가 끝나고 차도 마셨다. 그러니 이제 더 미루지 않고 이야기를 해줄 때다. 문평의 강력한 기대를 알아차렸는지 윤승효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몽중십야라면 환희루의 비약 아닙니까?”
문평은 자기가 아는 게 정확히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윤승효에게 되물었다.
사내들에게 밤일이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술을 먹건 안 먹건, 사람이 많건 적건, 사내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꼭 한 번은 나오게 되는 게 바로 음담패설이다. 문평은 그런 종류의 대화들 속에서 몽중십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모금을 마시면 꿈속에서 열흘을 보낸다는 약. 말이 비약이지 실은 춘약이다.
몽중십야는 지독한 미약媚藥으로, 환희루의 탕녀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비전의 묘약이다. 단순한 춘약 정도가 아니라 몽환약夢幻藥에 산공분散功粉까지 더해져 있어서 미리 주의하지 않는다면 절정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게 단순히 소문만은 아닌지 실제로 몽중십야에 당했다는 강호의 고수들은 상당히 많았다. 두각을 드러내던 청년 고수가 갑자기 칩거하여 몇 년 동안 보이지 않으면, 몽중십야 때문에 환희루의 탕녀에게 당해 요양을 하고 있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떠돌곤 했다.
“사흘 전, 그러니까 관 형께서 마지막으로 기억하시는 그날 관 형이 마신 찻잔에 들어 있던 약이 바로 그 몽중십야입니다.”
문평은 충격을 받았다.
‘틀림없이 당문의 암습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춘약이었다고? 그럼 환희루의 탕녀가 무려 나를 노리고 있었단 이야기인가?!’
“아마도 본래 목표는 저였던 모양인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 저 대신 관 형이 그것을 마시게 된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좀 더 확실히 경계했어야 하는 건데, 주의가 소홀했습니다.”
그러나 문평의 엉뚱한 착각은 바로 다음 순간에 간단히 깨지고 말았다. 윤승효가 지극히 담백한 태도로 본래 목표는 자기였다는 것을 말해 버린 것이다.
‘쳇. 그렇지. 목표가 나였을 리 있나. 바로 옆에 이런 기린아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어쩐지 조금 섭섭해졌다. 요즘 걸핏하면 남자와 엮여 불안하던 참인데, 비록 탕녀라고 불릴지언정 ‘여자’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잠시나마 가슴이 설렜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의가 소홀했던 사람은 윤 형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직접 차를 따라 마시면서도 아무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던 건 제가 아닙니까. 그나마 춘약이었으니 다행이었지, 독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을 겁니다. 부주의했던 것치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문평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 생각을 얼른 수습하며 윤승효의 사과를 거부했다. 진짜로 그 일은 윤승효의 사과를 받을 일이 아니다.
한가롭게 유람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적의 음모를 남몰래 쫓고 있다는 자가, 무엇이 섞여 있을지 의심해 보지도 않고 아무거나 먹고 마셨으니 실수는 전적으로 자신이 한 것이지 윤승효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관 형.”
문평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윤승효가 문득 진지한 얼굴을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여기부터가 진짜 본론이라는 분위기여서, 문평은 얼른 입을 다물고 윤승효의 말을 기다렸다.
“왜 그러십니까. 윤 형.”
“제가 관 형에 대해 정말로 궁금한 일이 한 가지 생겼는데, 그에 대해서 솔직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윤승효는 여전히 맨얼굴이었다. 그가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은,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할 생각으로 이렇게 분위기를 잡을까 고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답해드리겠습니다.”
윤승효가 눈을 들어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목구비를 구성하는 선이 곱고 눈이 부드러워 매우 선한 인상이지만, 이렇게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나니 또 의외로 강단이 엿보였다.
윤승효는 문평을 지금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질문을 던졌다.
“관 형은 뱃속에 고가 있었지요? 내가 보니 그 고는 자고던데, 그렇다면 모고는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칼날처럼 다가온 질문에 문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온한 얼굴을 무너트리지 않으려 애써 노력했지만, 불행하게도 문평은 썩 훌륭한 연기자가 되지 못했다. 뒷골이 섬뜩하게 곤두섰다. 목덜미 위로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그걸 대체 어떻게?’
문평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윤 형, 나는 윤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일단은 잡아떼야 할 것 같아 말문을 열었지만,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거리고 있는데 그런 변명이 먹힐 리 없다. 윤승효는 단호한 태도로 문평의 어설픈 시도를 저지했다.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거짓말은 사양입니다.”
“……윤 형.”
“뱃속에 있는 고가 걱정돼 사실을 말씀하시지 못하시는 거라면 말씀드리지요. 아까 말했다시피 관 형의 뱃속에는 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제가 없앴지요. 그러니 안심하고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도망을 가야 하나? 하지만 이 몸으로는 신법을 사용해 봐야 얼마 가지도 못할 텐데. 더군다나 짐도 호패도, 심지어는 유일한 무기도 옆방에 있다. 몸 뺄 시간도 부족한데 거기까지 들렀다 가기에는 너무 촉박하다.
‘어쩌면 좋을까?’
윤승효가 그의 뱃속에 있는 고에 대해 물었을 때부터 문평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파의 협의지사인 윤승효가 마교인인 그를 살려 둘 리 없다.
윤승효는 절정 고수다. 몸이 멀쩡해도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을 지금 같은 몸 상태로, 하물며 무기조차 없이 상대할 수는 없다.
‘맨몸으로 도망가 몸을 숨긴 후 마교의 비밀 분타를 찾아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예 길을 되돌아가 마영대와 합류해버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골몰하던 참이었는지라, 윤승효가 고를 없앴다는 말은 나중에야 귀에 들어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윤승효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닫게 된 문평이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진기를 운용해 봤는데, 진짜로 뱃속이 깨끗하게 비어 있다. 거기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내공마저 약간 늘어난 상태다. 문평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고를 없앴다고 하셨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며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를 의심하던 문평이 미심쩍은 태도로 물었다. 윤승효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없앴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으셨습니까? 혹시 독공에도 조예가 있으신가요?”
“독공에는 조예가 없지만, 의술은 좀 알고 있습니다.”
“고라는 게 단순히 의술만 안다고 해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진짜로 어떻게 하신 겁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몽중십야의 기운을 관 형의 몸에서 몰아내기 위해 진기를 주입했더니 단전 밑에서 고가 발견되더군요. 고만 없었으면 음약의 기운쯤이야 쉽게 빼냈을 텐데 하필이면 고가 있는 바람에 일이 어렵게 됐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별로 쓰고 싶지 않았던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었죠. 어쨌든 사람의 목숨은 살려야 했으니까요.”
문평의 채근이 거듭되자, 윤승효는 자신이 고를 치료했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만 들어도 사정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걸 알게 되자 조금 전 침상에서 일어났을 때 보인 윤승효의 반응 역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그저 윤승효가 뻔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일은 그런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있어서 그 일은 정사情事가 아니었던 거구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요 치료 행위일 뿐, 욕정이나 사심 따윈 눈곱만큼도 섞이지 않았으니 그 행위를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세 번째. 문평은 벌써 세 번이나 윤승효에게 목숨을 빚졌다. 당문오독에게서 한 번, 당문의 추적에서 또 한 번. 그리고 고를 없애 준 것으로 한 번.
목숨 빚이라는 건 한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엄청난 빚인데, 그 빚을 세 번이나 졌으니 삼생을 꼬박 갚아도 다 못 갚을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생각이 미치자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옷깃을 조심스레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윤승효를 향해 깊은 절을 했다. 포권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머리를 거의 탁자에 닿을 정도로 숙인 극공의 예. 윤승효는 그런 문평의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인은 비록 비루한 삶을 살았지만 은혜조차 모르는 자는 아닙니다. 윤 대협께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저의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 주셨습니다. 머리를 잘라 신을 만들어서라도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서로에게 건네던 편한 호칭을 버리고, 대협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해 윤승효를 높였다. 진짜로 감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내를 그리 부르는 것이 전혀 껄끄럽지 않았다.
고가 사라졌다. 고가!! 할 수만 있다면 두 손을 들고 펄쩍펄쩍 뛰며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덕분에 발목을 감싸고 있던 족쇄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그만 앉으세요. 관 형. 예도 거두십시오. 인사를 듣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윤 대협께는 사사로운 일이겠지만, 저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은혜입니다.”
“제가 관 형에게 바라는 것은 그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앞서 말씀드리질 않았던가요. 전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관 형. 그러니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문평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효는 그의 뱃속에서 고를 없애 준 사람이었다. 10년을 몸 바쳐 충성한 조직에서는 그를 모욕하고 이용하기만 했는데, 그저 지나가다 만난 이 사람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관 형, ……아니, 먼저 이것부터 묻는 것이 낫겠군요. 관 형은 진짜로 관 형입니까? 제가 확인했던 호패상의 신분이 관 형의 본래 신분인가요?”
습관적으로 문평을 관 형이라고 부르던 윤승효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신의 질문을 정정했다. 그 질문을 들은 석문평은 고개를 저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본명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아닙니다. 윤 대협. 제 본명은 석문평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턴 석 형이라고 하죠.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편한 대로 불러 주십시오.”
문평은 충직하게 말했다. 늘 조금씩 삐딱하고 건들거리는 그가 이렇게 진심을 다해 누군가에게 대답을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승효는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문평에게 질문을 던졌다.
“석 형과 소생의 만남이 누군가의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귀주에 들러볼 생각을 한 것은 저의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그날 그 시간에 제가 그곳을 지날 걸 미리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의심스러운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석 형의 뱃속에 있던 고 때문입니다. 석 형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석 형에게 고를 집어넣은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문평은 성의껏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폭로하려고 하는 상대가 다름 아닌 포영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문평이 속해 있는 단체는 마교고, 그에게 고를 집어넣은 사람은 소비 포영의였으며,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다. 단체는 천하제일세고, 원흉은 그 천하제일세의 이인자가 된 권력자며, 천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파인에게 재앙과 같은 자다.
그런 자들과 얽히게 된다면 설사 윤승효라고 할지라도 처지가 난처해질 게 뻔했다. 윤승효가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여럿이 아닌 혼자의 몸. 천마 정도의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하기 힘든 건 당연한 이치다.
아닌 말로 이틀 거리……, 아니. 문평이 정신이 없는 새 벌써 그 이틀이 지났다고 했으니 아마도 지근거리에서 머물고 있을 마영대와만 부딪혀도 윤승효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윤승효가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다.
문평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을 차마 위험에 빠트릴 수 없어 갈등하기 시작했다.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러면 문평과 윤승효는 둘 다 위험해진다.
그 악독한 포영의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문평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 낼 것이 틀림없었다. 살인멸구를 거의 취미처럼 일삼는 인간이니, 핑계 삼아 없앨 인간이 더 생겼다고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제가 정파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낭인 출신으로, 우연한 기회에 정파와 절대로 손잡을 수 없는 단체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는 일단 두리뭉실하게 뭉쳐서 표현함으로써 자세한 언급을 회피하며 말문을 열었다. 윤승효는 차분한 표정으로 석문평의 말을 말없이 경청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느 단체에 속한 사람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곳은 비밀이 많은 곳이고,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제가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게 되면 저뿐만 아니라 윤 대협에게도 해가 갈 터이니, 제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을 시작한 문평은 자신의 숨겨진 사연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그는 자신도 아이들의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귀주로 왔다고 고백했다. 그 일을 꾸민 암중의 인물이 문평이 속한 단체를 배신했던 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추정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파견한 거라고. 그리고 그들은 제갈세가에서 기린패를 훔쳐 간 자들과 한패일 거라고도 말했다. 포영의가 직접 한 추측이니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맞을 거다.
하지만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데다 감출 것도 많았기에 문평의 설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말재주도 별로 없는 편이라서, 딴에는 해줄 말을 다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되새겨 보니 제대로 알려준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뭔가 횡설수설한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수상한 작자가 이따위 이야기를 변명이라고 해댔으니, 이제는 윤승효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왜 고를 먹었습니까?”
예상대로 그의 대답은 윤승효에게 의심만 던져 준 듯했다. 심문하듯 날카로워진 그의 질문에 문평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제가 맡은 일을 하던 중간에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석 형이 신의를 의심받을 행동이라도 했던 건가요?”
“그렇다고 하기보단……. 제가 먼저 떠나겠다고 했었습니다. 이번 임무만 제대로 해결하고 나면 그곳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었죠. 거기가 너무도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랬더니 작별 선물로 고를 주더군요. 이것을 먹고 임무를 수행해야 보내 주겠노라고 말입니다. 그걸 받아먹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겠기에 눈 딱 감고 삼켰습니다.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니더군요.”
그때 일을 생각하니 다시금 입 안이 씁쓸해졌다. 그래도 10여 년을 몸담은 곳이고, 아직도 보고 싶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 일 때문에 질릴 대로 질린 문평은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문평의 대답을 들은 윤승효의 눈매가 슬쩍 가느다랗게 변했다. 못마땅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비웃음? 냉랭히 코웃음을 칠 때나 어울릴 법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사라졌다. 하지만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던 석문평은 윤승효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나타났는지 알지 못했다.
“절 믿기 어려우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정체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으면서도 본래의 정체를 제대로 밝히지 않으니 윤 대협께서 저를 신뢰치 않으신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동행을 고집하지는 않겠습니다. 목숨 빚을 진 주제에 짐까지 되진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홀로 음모를 뒤쫓느라 고단할 사람이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동행하고 있는 이를 경계하고 의심하느라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면, 그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윤승효의 처지를 배려한 문평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문평은 당문의 추적을 피할 우산이 되어 준 윤승효의 그늘에서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수상쩍은 정체가 드러났는데 계속 머물러 있을 배짱은 없다는 사실도 한몫하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윤승효의 처지를 고려한 측면이 더욱 컸다.
약삭빠른 그가 자신의 어려움을 앞에 두고 남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윤승효에게는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미 받은 것이 많으니 자신의 것을 하나 떼어준다고 하더라도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밖에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제 곁을 떠나면 갈 데는 있으십니까?”
윤승효가 물었다. 그게 ‘당문의 추적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라는 질문을 돌려 말한 것임을 알아들은 문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진 의지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
과연 의지가 될는지 의문이었지만, 갈 곳도 없으면서 떠나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겁니까? 석 형에게 고를 먹인 그자들에게요?”
“고는 없앴다고 하더라도 약속은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약속을 이행하기 전까지 저를 놓아줄 곳이 아니니, 어떻게든 끝까지 임무를 수행해내야 합니다.”
“아랫사람의 신의를 믿지 못하고 독물의 무서움만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과연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랫사람의 신의를 믿지 못하고 독물의 무서움만을 믿은’이라고 말할 때 윤승효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늘 싱글싱글 웃는 그에게서 보기 힘든 격한 노여움이다. 왠지는 모르지만 윤승효는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상호 간의 믿음을 독물로 때우고 있는 배덕한 집단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그런 심한 꼴을 당하고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문평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문평은 자기를 위해 윤승효가 화를 내주는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대협…….”
“그런 자들에게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내 옆에 계십시오. 어차피 같은 자들을 쫓고 있다니 더 잘되었습니다. 석 형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윤승효는 문평을 강하게 붙잡았다. 정체 모를 자고 뭐고,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문평이 반론을 해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답지 않게 강압적으로 자기 뜻을 고집했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까? 듬직하다고 해야 하나? 고아로 나고 자라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느낌을 몰랐던 문평은, 자신의 앞을 단단히 버티고 선 것 같은 윤승효에게서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
윤승효의 장담을 듣고 있자니 자신이 꼭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작고 힘없는 어린아이가 되어서 자신을 지켜 주는 어른의 등에 업힌 것만 같다.
문평이 정말 어린아이였을 때도 이런 아늑함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기묘하다. 가슴속으로 뭔가가 서서히 들어차는 것만 같았다. 그곳에 공간이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가고서야 그곳이 이제껏 비어 있었다는 걸 알겠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감정이 문평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적당히 데워진 물처럼 따뜻하고 기분 좋은 그 감정은 천천히 수위를 높이며 문평의 빈 곳을 채우고 있었다.
문평은 제 마음이 정확히 무엇을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윤승효에게 감사하고 있다고만 생각했고, 견마지로를 다해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윤승효가 던진 시선 앞에서 꽃처럼 웃어 버린 것은, 그의 본능이 자신이 느끼기 시작하는 감정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투르기 짝이 없는 그는 몰랐지만, 본능은 알고 있었다. 어떤 감정은 때론 이렇게 문득 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
“저기 혹시, 윤 형.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다점 안에서 차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윤승효는 느닷없이 이상한 문장을 들이대며 답을 구하는 문평을 돌아보았다.
한 식경 전. 일행 둘이 앉아서 아무 대화 없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남들 눈에 수상한 일이니 어떤 말이든 좀 해 보라고 주문을 넣었던 것을 뒤늦게 기억해 낸 윤승효는, 그 엉뚱한 질문이 문평이 간신히 쥐어짠 화젯거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글쎄요. 그 한 문장으로 봐서는 무슨 맥락으로 나온 이야기인지 알 수 없군요. 이상한 문장이네요. 이야기책에라도 나왔던 건가요?”
포영의가 보낸 암호문에서 나왔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문평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모르는 윤승효가 흠, 하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됐다.
“용이라는 건 뭡니까? 진짜로 용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것에 비유한 겁니까?”
전후좌우의 맥락 없이는 해석될 문장이 아닌지라 윤승효가 질문을 던졌다.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능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이요.”
“그렇다면 꽤나 신출귀몰한 사람이겠군요. 그다음 문장은 뭡니까?”
“구름은 개를 따라 흐를 것이다, 입니다.”
“개요? 갑자기 무슨 개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제일 안 풀리는 문장 하나만 슬쩍 찔러서 물어보고, 거기에 나오는 해석에 따라 다시 뜻을 짜 맞출 생각이었던 문평은 윤승효가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꺼낸 말을 중간에 물릴 수도 없는 법이고, 윤승효의 푸른 눈동자에 이미 흥미가 담뿍 담겨 있어 기대를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결국 문평은 자신이 받았던 암호문의 전문을 윤승효 앞에 털어놔야만 했다. 윤승효는 총 네 문장으로 구성된 암호의 전문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내용이 무슨 암호 같군요. 그렇다고 하기엔 비유가 너무 쉽고 간단하지만요.”
따로 자세한 상황을 설명도 안 해줬는데 윤승효는 그게 무슨 뜻으로 전하는 말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너무 쉽고 간단한’ 것도 제대로 몰라 열흘 넘게 헤맸던 문평은 잠시 기분이 상했지만, 얼른 그 기분을 떨쳐 버렸다. 자신은 정말로 몰라서 물었던 것이니, 상대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마운 일이지 시기할 일이 아니다.
“‘개를 뒤쫓으면 주인이 나온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부하를 쫓아 주인을 찾아가라는 이야기지요. ‘잉어는 그물로 잡아도 용을 그물로 잡을 수는 없다.’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용이 사람이라면 잉어도 사람일 테니, 아마도 그에 관련된 것이겠지만 잉어가 누구를 뜻하는지는 알지 못하니까요.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 전설에 따르면 용은 구름 속에 모습을 숨긴 채 신비롭게 살아가는 생물입니다. 심지어는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조차도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전체를 드러내는 일이 없지요. 용이 사람으로 치환된다면 이 문장은 그 사람이 신분을 가리고 있을 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마지막 문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름은 개를 따라 흐를 것이다.’ 용이 신분을 숨긴 채 부하들을 따라다닐 테니 그 숨은 신분을 찾아내라는 겁니다.”
윤승효는 명쾌한 태도로 문장을 풀어 주었다. 자신이 붙들고 있을 땐 그렇게 아리송한 내용이었는데, 윤승효에게로 가니 정말 손쉽게 풀려 버리고 만다. 사람은 이래서 배우고 봐야 한다는 건가. 문평은 윤승효의 총명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윤승효는 아무리 봐도 어디 하나 모자란 데가 없는 것 같다. 집안 좋지, 인물 좋지, 무공 빼어나지, 성품 인자하지. 게다가 정의롭고 재치 있고 영민한 데다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문평에겐 윤승효의 모든 것이 그저 좋아만 보였다. 원래도 존재하던 콩깍지가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모종의 감정 때문에 더욱 강력해졌다. 윤승효의 눈에도 그것이 훤히 보일 정도였는데, 웃기게도 문평 본인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암호는, 설마 석 형의 윗전에서 받았던 것입니까?”
질문을 던졌는데 대답이 없다. 의아해하며 눈을 들었던 윤승효는 문평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입술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쩌다 눈이 간 모양이지만 쉽사리 시선을 뗄 수가 없는 듯, 그는 넋을 잃고 윤승효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윤승효는 은근히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을 굳이 일깨워 주고 싶진 않아서, 짐짓 찻잔을 들어 입술을 가리는 것으로 완곡하게 시선을 차단했다.
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표정으로 윤승효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문평은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육욕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풋풋한 감정인 까닭에 본인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석 형.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문평이 시선을 내리고도 딴생각에 빠져 있자 윤승효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눈빛이 몽롱하던 문평은, 윤승효의 채근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윤승효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야 이해하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보일 패는 다 내보여 놓고 뒤늦게 발뺌하는 꼴이 윤승효의 눈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내 말 믿지 말라고 광고라도 하듯이 서투른 태도로 문평이 거짓말을 했다. 상대가 윤승효가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어리숙하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상대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의 대상이다 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다.
“그렇게 당황하지 마십시오. 석 형이 원하지 않으면 묻지 않겠다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아니라면 됐습니다.”
예전에는 문평이 허둥대는 꼴을 보는 게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문평이 당황하고 민망해할수록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윤승효는 짜증스러운 눈빛을 감추기 위해 눈을 창밖으로 돌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매듭지었다. 자신이 실수했다고 여긴 듯 안색이 어두워진 문평은 눈치를 보듯 윤승효의 안색을 살폈다.
“윤 형…….”
문평은 뭐라도 변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한데 그가 막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하필 그때, 윤승효의 등 뒤에 앉은 자가 늘어놓은 젓가락의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문평은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모양새여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얼핏 보아서는 젓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 같은 모양이지만 그것은 흑화였다. ‘천산天山’의 천 자와 산 자를 겹쳐 놓은 모양새였으니 그 흑화가 뜻하는 바는 실로 명백했다.
‘천산!’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흑화를 발견한 문평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슴이 내려앉았다.
혹시 저자가 내 말을 엿들은 것은 아닐까? 내가 본교에서 내려온 지령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광경을 지켜본 것은 아닐까? 탁자 간의 거리가 좀 떨어져 있긴 했지만 고수에게 이 정도의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모든 것을 들었으리라.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빳빳하게 굳어 있는 문평의 눈앞에서, 다른 젓가락을 가지고 몇 번 손장난을 치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없이 문평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평은 그를 따라 돌아갈 뻔한 고개를 붙잡느라 무진 애를 썼다.
지나가던 점소이가 그 남자가 만들어 놓은 젓가락 암호를 보더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 사람은 안 쓰는 젓가락을 왜 이렇게 늘어놓은 거야? 젓가락이 밥 먹는 도구지 무슨 산가지라도 돼?”
아무것도 모르는 점소이는 한꺼번에 젓가락을 쓸어 모으더니 젓가락 통에 쑤셔 넣었다.
문평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챘는지 밖을 바라보고 있던 윤승효가 고개를 돌렸다. 문평은 어색하게 웃으며 윤승효에게 말했다.
“저, 윤 형. 그러고 보니 제가 깜빡 잊은 게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어 잠시 다녀오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윤승효는 말없이 문평을 바라보았다. 문평도 자신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실수가 아니었다. 지금은 일부러 그렇게 티를 낸 거다.
암호를 전하러 온 사람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틀림없이 들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교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
자신이 해결하기 위해 노력은 해 보겠지만, 그 자신도 성공에 대한 자신감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실패에 대해서도 대비가 필요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것은 미리 알고나 있어야 필요한 순간에 적절히 몸을 뺄 수 있지 않겠는가.
문평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윤승효를 위험 속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윤승효가 문평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줬듯이, 문평도 마찬가지로 그를 위해 똑같은 행동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꼭 가야 하는 거라면 다녀오십시오. 그러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한참 동안 문평을 바라보고 있던 윤승효가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 문평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포권을 한 후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걸이가 무섭도록 결의에 차 있었다. 윤승효는 그런 문평의 뒷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윤승효는 문평이 다점茶店 아래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문평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윤승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온후하게 웃고 있던 입매가 서서히 굳었다. 마치 추수秋水처럼 영롱하게 맑던 눈망울에서 한기가 스치고, 부드럽던 분위기도 냉엄히 바뀌었다.
그는 마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냉담한 얼굴을 하고 부채를 접었다. 문평이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았던 붉디붉은 입술에서 서리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심지어는 한갓 백호에게조차 공손하던 화협이 돌연 모습을 달리했다. 그는 마치 자기 집 머슴을 부르듯 오만한 태도로 다점의 시중꾼을 불렀다. 주둥이가 긴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손님들의 차를 채워 주고 있던 점소이가 그 말을 듣고 얼른 다가와 그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윤승효는 차가 아니라 술을 마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모금에 찻물을 넘기더니,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차를 청했다.
어깨엔 탁자를 훔칠 수건을 두르고, 낡은 옷이나마 깨끗이 차려입은 점소이가 묵묵하게 다시 다가와 찻잔을 채워 주었다. 상대의 거친 태도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이 바닥에서 제법 오래 굴러먹은 자인 모양이다.
“꼴이 그게 뭐냐? 어울리지도 않게 하오문주라는 감투를 쓰더니, 이젠 아예 다점에 취직까지 했더냐?”
윤승효는 은밀히 점소이에게 말을 건넸다. 겉모습만 보고 있으면 그저 기분이 가라앉은 문사 하나가 차를 마시는 것으로 보이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상대에게 말을 거는 이 수법은 강호상의 고절한 절기 중의 하나인 전음입밀傳音入密이다. 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면 시연은커녕 흉내도 내기 힘든 기술인데, 윤승효는 입매의 근육이 경직되는 작은 흔적조차 없이 그 기술을 사용했다.
만약 점소이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평범한 백성이었다면 귓속에서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들리는 낯선 이의 목소리에 기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승효가 말을 건넨 상대는 미리부터 그럴 거라고 짐작을 하고 있었던 듯 갑작스러운 전음을 듣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그저 우연인 것처럼 슬쩍 눈을 들어 윤승효를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몸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는 백조부님께서는 그 태도가 무엇입니까? 화협은 원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낌새를 들키지 않으시리라 장담하시더니, 어째서 바로 본색이십니까?”
다짜고짜 타박을 했더니, 상대에게서도 그에 어울리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되돌아왔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흉내 내는 이 모습이 바로 윤승효의 참모습이다. 위군자 노릇이 뭐가 어려워 못할까. 걱정 마라. 내가 이 모습으로 두 성을 건너왔지만 내가 윤승효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윤승효는 태연히 말하며 찻물을 홀짝였다. 그는 자기 자신, 즉 화협 윤승효를 감히 위군자라고 말하면서도 저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저는 위군자이나 대단히 뛰어난 위군자라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백조부님. 저는 바깥에 나와 있을 때면 혼자 있는 방 안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백조부님처럼, 당장 곁에 있는 동행의 눈만 의식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점소이는 대단히 진지한 태도로 윤승효에게 대답을 되돌렸다. 윤승효, 아니 이제껏 윤승효의 신분을 사칭했던 자는, 진짜 윤승효의 말에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뻔뻔스럽기는. 이런 네게 천하가 속고 있는 게 유감이구나.”
윤승효를 사칭했던 자가 어이없는 듯 중얼거리자, 진짜 윤승효가 냉큼 되받아쳤다.
“이거 기쁜 일이군요. 백조부님께서 드디어 천하를 생각하시다니요. 소문대로 정말 등선을 하시기는 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윤승효는 상대를 백조부라고 부르면서도 맹랑하게 굴었다. 윤승효의 백조부는 손자의 재롱이 가소로웠던지 다시 한번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등선? 어느 놈이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입에 올리는가 했더니 바로 네가 그러는구나. 할 일이 그다지도 없더냐.”
가볍게 던진 말이긴 해도 나름대로는 상대를 추켜세운 칭찬이었는데, 백조부님은 말을 꺼낸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심하게 비웃었다. 별 뜻 없이 한 말이었건만 왠지 울컥해, 윤승효는 조용히 볼멘소리를 냈다.
“왜 등선이라는 말에 그렇게 부정적이십니까? 강호에 백조부님과 같은 경지를 이룬 자가 몇이나 있다고요. 삼봉진인이 평생을 참오해 검선이 되었다면, 그와 비슷한 경지의 대종사이신 천마께서도 당연히 격을 맞추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백조부님은 검선은 못 되셔도 마선은 충분히 되실 겁니다.”
실은 그런 게 아니고선 그 괴물 같은 경지가 설명이 안 된다고 윤승효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닌 말마따나 인간의 몸으로 반로환동이라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윤승효는 천마 혁련상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그런 일을 이뤘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마선이라 함은 세상에 혼돈과 죽음을 불러오는 존재가 아니더냐? 그런데 마선이 되면서 도리어 천하를 걱정하게 된다고? 제가 하는 말의 앞뒤도 모른단 말이냐? 아둔한 것들과 같이 놀더니 너도 물들었나 보구나. 그렇지 않다면 답지 않게 그런 얼빠진 소리를 할 리가 없지.”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아부를 해도 효과적으로 하려면 머리를 써야 하는 법인데,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워섬겼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밖에.
윤승효는 생각 없이 입을 놀린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했다. 백조부님의 성정이 까다롭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에 걸맞게 상대를 못했으니 구박을 들어도 쌌다.
“엉뚱한 수작 말고 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나 고해라. 겨우 신분 하나 빌린 것 따위로 네가 이렇게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나타나지는 않았을 게 아니냐? 내가 찾으라는 것들을 찾아보았느냐? 그들의 흔적은 잡았고?”
고작 서신 하나 달랑 보내 놓고 남의 신분을 훔쳤으면서, 백조부는 오히려 자기가 받을 빚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얼굴을 맞이하자마자 내던지는 비아냥에, 맡겨 놓기라도 했던 것처럼 정보부터 털어 가려는 저 태도라니.
솔직히 말해 윤승효는 백조부의 태도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졸지에 신분을 빼앗겨 변장 없이는 세상을 나돌아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도 치사 한번 받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제가 어디에서 누구와 뭘 하고 있을지 알고 그렇게 대담하게 행동하셨습니까? 제가 제때 서신을 받아 보지 못했더라면, 하마터면 세상에 두 명의 윤승효가 돌아다닐 뻔했는데 말이지요?’
내심 따지고 싶은 바가 정말 많았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 백조부가 저지른 일과 완전히 똑같은 일을, 그 또한 저지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조부는 그나마 그에게 서신이라도 보냈지만, 윤승효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침 뚝 떼고, 백조부에게는 아예 고하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그 짓을 해치워 버렸다. 은거기인과 관계된 일이라 세상에 소문이 안 날 것으로 생각해서 저지른 일이었다.
그 나름대로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던 거였지만, 지금 백조부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니 그때 일이 아주 제대로 걸렸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이제껏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니, 하여간 음흉한 노인네였다.
“나쁜 소식이 있어 전하러 왔습니다.”
마음에 두고 있는 말을 꺼내 봐야 이번에도 타박만 받을 터다. 윤승효는 못마땅하게 입맛을 다시면서도 더는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는 대신 자신이 여기까지 와야 했던 이유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진짜 중요한 용건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 그가 변복하고 이 먼 귀주 땅까지 내려온 것에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북 땅 일부에서 괴이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기린패에 대한 소문인데, 아무래도 백조부님께서 아셔야 할 일 같아 찾아왔습니다.”
“기린패에 대한 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어떤 소문이지?”
“소문이 불어나다 보니 따라붙은 곁가지들이 많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공통된 내용은 한 가지입니다. 기린패가 마교의 지보至寶로, 역대 마교 교주들이 마지막을 선택한 마교의 조사동으로 가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기린패의 뒷면에 조사동으로 가는 지도가 숨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북에서 시작해 빠르게 퍼지고 있는 소문인데, 듣기로는 정도맹에서도 이미 소문을 입수했다고 합니다.”
천마는 기가 막혔다. 자신의 허리에 달려 있던 옥패 하나가 어느덧 마교의 지보가 되더니,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조사동으로 가는 열쇠가 됐단다. 그야말로 눈이 산비탈을 굴러가듯 유언비어가 덧붙는 셈이다.
천마 역시 중원에서 떠도는 마교의 소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중원인들은 마교 교주를 무슨 코끼리쯤으로 생각하는지, 마교의 심처에는 마교 교주들이 마지막을 보낸 조사동이 있고 거기엔 마교의 모든 비전절학이 모여 있다는 식의 전설을 만들어 낸 후 그 전설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소롭기 짝이 없는데, 이번에는 아예 한술 더 떠서 거기로 가는 지도까지 만들어 냈다. 물론 그 짓을 한 인간이 누군지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문에 부화뇌동하는 강호인들도 아주 결백하지는 않다. 그들은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까지도 진위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일 테니 말이다.
‘그걸 알기에 그런 엉뚱한 소문을 지어낸 것이겠지. 간단해서 좋겠구나, 곽효. 고작 그 정도의 소문만으로도 어리석은 강호인들이 부화뇌동을 할 터이니 너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겠구나.’
천마는 마음속으로 냉랭히 중얼거리며 매섭게 혀를 찼다.
“기린패에 조사동으로 가는 지도가 있다? 그래서 뭘 어쩌려고? 설마하니 기린패 하나 달랑 들고 천산을 침공하기라도 할 생각이라더냐?”
여태껏 마교주들의 무덤이 있다고 소문이 난 곳은 천산이었다. 마교가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니, 달리 후보지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예상이 틀렸다. 윤승효는 손님이 나간 탁자를 정리하면서, 뜻밖의 사실을 전음으로 전했다.
“아닙니다. 백조부님. 천산에 있는 게 아니랍니다. 지금 떠돌고 있는 새로운 소문대로라면, 마교의 조사동이 있는 곳은 천산이 아니라 중원입니다. 천 년 전 마교가 천산으로 쫓겨 가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곳이라 중원의 중지에 있다더군요. 그곳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기린패에 숨어 있으며, 기린패가 없는 사람은 그곳을 찾아내더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 때문에 백조부님께서 융중지약을 맺으셨다는 이야기도 나돕니다. 우연히 기린패를 습득하게 된 검협이 마교의 중원 침공에 앞서 기지를 발휘했고, 그것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세 가지 약속을 들어줄 것을 내걸었다고 말입니다.”
당년 융중산에서 일어났던 일의 결과는 매우 유명했지만, 정작 그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파 쪽의 유일한 증인인 제갈희련의 말 외에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강호상에서는 그 일에 대해 갖가지로 재창조된 ‘진실’이 제멋대로의 소문으로 나돌고 있었다.
이미 그런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의 소문 역시도 쉽게 받아들여지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는 존재다. 천마를 당대 최고수로 만든 마교의 무학이 무려 중원 안에 있다는 것은 설사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현혹될 수밖에 없을 만큼 달콤한 미끼다.
“그래?”
자칭 협객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 강호인들은 말로는 자기네가 신외지물에 초연하다 지껄이곤 한다. 그러나 신투의 보고寶庫니 전설상의 보검寶劍이니 하는 일로 툭하면 들썩거리는 강호의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그들의 장담은 말 그대로 허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달랐다. 고작 전대 고수의 비급 하나에 양민들을 몰살하고,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것이 강호인이다.
이번 일로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까.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했다. 천마는 앞으로의 상황을 뻔히 내다보곤 소리 없이 웃었다. 자기들 스스로가 자초하는 죽음이니 동정조차 가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강호에 수많은 피가 흐르게 할 음모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윤승효가 천마에게 물었다.
천마는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내심 초조함을 감춘 윤승효의 속내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못내 무심한 태도로 차 맛을 음미할 뿐이었다.
“당분간은 놔두어라. 이미 커지고 있는 일이다. 용을 써봤자 이 상황에서는 어떤 노력도 소용없어. 너는 그렇게 당하고도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모르느냐?”
“하지만, 백조부님…….”
“죽을 놈은 죽게 놔두고, 일단 판이 커지길 기다려 보자꾸나. 고작해야 부나방 같은 자들을 구하겠답시고 뛰어들 수는 없어. 그리하면 일을 꾸민 자가 뜻한 것을 모두 이루게 될 터이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리는 못 하겠다.”
천마는 자신을 그물의 미끼로 내건 주재자의 음모를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천마에게는 천하의 안위와 죄 없이 사라질 수많은 생명보다는 감히 자신을 노렸던 자를 찾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게 바로 마인의 심성이겠지만, 나름대로 협객 소리를 듣고 있는 윤승효는 그런 천마의 태도가 안타까운지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오문의 뛰어난 정보력으로도, 금의위도독의 자식이라는 권세로도 이번 일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천마와 같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고수가 조력자가 되어 준다면 큰 도움이 되련만,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성품의 천마는 아무래도 상황을 수습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백조부님.”
“당분간은 사태의 추이나 살피거라. 나는 당분간 귀주에 있을 생각이다. 아이들이 사라진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곽효는 하나의 일을 하더라도 두 가지 이상의 이득을 보려고 하는 자지. 그런 자가 단순히 옥기린 하나를 유인하려고 그토록 수고스러운 일을 꾸몄을 리 없다. 뭔가가 더 있을 거야. 그가 이루려는 대업에 긴요히 쓰일, 그런 뭔가가.”
천마는 더 이상 반론의 여지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단호히 말했다. 세상에 천마가 이미 마음먹은 일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직도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더는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윤승효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아, 참 그리고.”
점소이의 복장을 하고 있는 윤승효는 탁자를 치운 후 걸레질을 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한데 그런 그의 발목을 천마가 잡았다.
“웬 어린것이 다짜고짜 따라붙어 춘몽례를 요구하던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승효야? 그 꼬맹일 어쩌면 좋을까?”
그놈의 빌어먹을 꼬맹이 때문에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바득바득 갈린다. 더군다나 ‘그 일’ 이후로 미묘하게 달라진 문평의 태도를 생각하면……. 정말 그 망할 꼬맹이 녀석을 산 채로 뼈를 갈아 버려도 시원치가 않다.
윤승효의 탈을 썼다는 이유로 그 녀석을 그냥 고이 보내 줘야 했던 천마는 거의 시비나 다름없는 태도로 윤승효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로는 어쩌면 좋을까 물었지만, 진짜로는 죽여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천하를 뒤흔드는 암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담담하던 윤승효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애써 숨기려고 노력하며 천마에게 대답했다.
“춘몽례라니……. 제게 말입니까?”
“그래. 약속이 되어 있는 일이라고 하던데. 제가 열 살 때부터 쭈욱. 정인군자인 체하는 네가 열 살짜리 꼬맹이와 그런 언약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마는. 게다가 그 어린것은 언약을 핑계로 내게 나쁜 장난까지 쳤다. 덕분에 내가 손해를 많이 봤지.”
윤승효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애가 맹랑하고 버릇없다는 건 윤승효도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그 애를 보아 온 승효에게는 그런 것조차도 귀여웠지만, 남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는 천마는 그저 버르장머리 없고 짜증 나게만 느꼈을 것이다.
왜 그 애가 벌써 강호에 나와 있는 걸까? 빨라야 내년, 늦으면 내후년쯤에야 출관할 거라고 했는데. 윤승효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내심 허둥거렸다.
“할아버님, 그 애는 아직 어립니다.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는 다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변명부터 하기 시작했다.
“철이 없고 맹랑할뿐더러 어린것이 간교하기까지 하지.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일들이 많아 미뤄 두고 있다만 어찌할까 싶다. 그냥 놔두기엔 그 애가 저지른 일이 너무 크다.”
천마는 냉랭하게 말했다. 탁자를 치웠으니 이제 주방으로 향해야 할 터인데, 이 상황에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었던 윤승효는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다급히 전음을 날렸다.
어떤 일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저놈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꼬맹이의 행동을 보고 짐작했던 일이지만, 그 되바라진 어린것과 그의 의손義孫 사이엔 적지 않은 사연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 애는 제 정인입니다. 백조부님. 백조부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한 실수이니 제발 제 낯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그 앤 백조부님이 전 줄 알았을 겁니다.”
윤승효의 전음은 거의 절박하기까지 했다. 천마는 그 어린것을 무려 제 ‘정인’이라고 부르는 승효를 향해 어이없이 되물었다.
“정인? 그 고약한 것이 네 정인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런 놈이 춘몽례를 약속해? 정말 춘몽례를 치를 생각이냐?”
천마는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겉으로는 그저 호기심에 찬 질문일 뿐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말은 잔혹하기 그지없는 비꼼이었다. 아픈 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알기에 오히려 더욱 집요히 그 상처를 후벼 팠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 약속입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내일을 기약하는 줄로만 알고 섣불리 맹세했던 거니까요. 그러니 백조부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 그 아이와 춘몽례를 치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춘몽례를 치러 주지 않을 작정인 게냐? 그 아이를, 네 정인이라는 그 애의 초야初夜를 다른 놈에게 넘기겠다고?”
용서치 않고 다시 한번 상처를 꼬집는 천마의 행태에 윤승효는 내심 아프게 웃었다. 용서가 없는 백조부님의 성격답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모양이다.
자기 자신도 아니고 마음을 준 사람의 약점을 긁어내는 일인지라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좋은 마음이 되지 않았다. 천마가 쉽게 언급하는 그 일이,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큰 상처요 아픔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백조부님. 어떤 결정이든, 그 결정이 제 인생을 좌우하게 될 테니 어찌 그 일을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부탁하겠습니다. 그 애와 저의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잠시나마 제 신분을 빌리셨으니, 그 정도의 일은 해 주실 수 있다고 믿겠습니다.”
애써 잠재워 둔 상처를 덧나게 만들었으니 화를 낼 수도 있고, 울분을 토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모두 소용없는 노릇. 아니, 오히려 천마의 불쾌한 기분을 더욱 긁어내는 바보짓일 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마를 알아 온 윤승효는 천마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담담한 어투로 천마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다.
“네 정녕 진심이더냐? 왕부의 핏줄이며 대도독의 자식인 네가 환희루의 루인樓人에게 진심이라고?”
천마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다시 물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윤승효는 조용히 질문을 되돌렸다.
“예년에, 친왕親王이셨던 외조부님께 노비 출신이던 외조모님을 소개해 줬던 분이 바로 백조부님 아니십니까? 그런 분이 어째서 신분을 따지시는지요.”
“그 일이 이 일과 같으냐?”
“다를 것은 또 무엇입니까?”
다르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윤승효는 고집을 부렸다. 얼핏 보자면 그의 주장은 사실인 듯도 했다. 그의 말마따나 서평왕西平王 주강진朱姜進에게 화란和蘭4) 출신의 노비 청련淸蓮을 소개한 사람이 천마였고, 그녀를 단순한 첩이 아니라 정식 아내로 맞아들이게끔 서평왕을 설득한 사람 역시 천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순수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결실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철저하게 계산된 정치적 술수라고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그 결혼 덕분에 실제로 친왕에 불과했던 서평왕이 왕부를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색목인을 정처로 맞은 왕과 그의 자식에게 황위 계승권이 돌아갈 리 없다. 덕분에 서평왕은 어린 황제를 옹립한 황태후와 그 일파의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위를 넘볼 가능성이 없으니 힘을 키우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서평왕이 거듭되는 암살의 위협에서 벗어나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색목인 아내 덕분이었다. 그러한 내막을 영리하기 짝이 없는 윤승효가 어찌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 저놈은 지금 그걸 몰라 저러는 게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천마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면서 고집을 내세우는 윤승효의 태도에 혀를 차고 말았다.
자신이 봤을 때는 그저 못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일 따름인데, 그의 의손에겐 그 아이가 더없이 소중한 모양이다. 이렇게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감싸고 싶은 상대인 모양이니 말이다.
‘겨우 이런 녀석을 두고 그놈은 그런 눈빛을 한단 말이지. 협객 행세를 하면서도 하오문주라는 이중 신분을 가지고 있고, 정인군자인 체하면서 뒤로는 열 살 때부터 환희루의 동기를 찍어 놓고 기른 놈이 바로 이놈인데……. 이런 내막을 알면 넌 어찌 나올까? 그래도 여전히 감탄만 할까? 이 모든 걸 알아도 너는 여전히 이 얼굴 앞에서 볼을 붉히고, 잡힌 손목을 감히 빼내지 못하며 눈썹만 떨어 댈까?’
의손이 그 못돼먹은 꼬맹이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을 보자니 천마는 자신의 잡초 생각이 난다. 누군가에게 정신없이 빠져 버린 눈빛을 가장 최근에 본 것이 바로 그의 잡초에게서였기 때문이다. 그놈의 풀떼기는 누가 잡초 아니랄까 봐 가벼운 바람에도 사정없이 흔들려서 천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놈의 본색이 이런 줄도 모르고 그놈은 대단한 대협을 보는 듯한 눈으로 윤승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히 대놓고 보지도 못하고 힐끔힐끔. 마치 수줍은 처녀가 담 너머로 정인을 훔쳐보듯이.
문평은 티를 안 낸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실은 티가 다 났다. 천마가 보기에, 문평은 윤승효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봐야 그 속 알맹이는 자기가 치를 떠는 천마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실제로 문평은 진짜 윤승효를 만난 적도 없었다. 처음 산중에서 만났을 때부터, 아니 송반의 기루에서 문평을 발견하고 그의 뒤를 밟았을 때부터 그는 천마였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기실 천마는 요즘 기분이 저조했다. 그는 천마일 때의 자신과 윤승효일 때의 자신을 대하는 문평의 차별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승효에 비해 딱히 못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윤승효는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천장天將인 양 대하고 천마 자신은 마라魔羅처럼 여겼다.
비단옷을 해줘도 자기가 더 많이 해줬고, 술을 먹여도 자신이 더 많이 먹여 줬는데. 도대체 뭐가 모자라 천마가 윤승효보다 못하단 말인가?
“옥기린의 소식 중 중요한 소식이 들어오면 연락하고, 그 외에는 따로 연락을 넣지 마라.”
문평에 대해 생각했더니 괜히 진짜 윤승효까지 못마땅해졌다. 갑작스레 짜증이 치솟은 천마는 단호한 명을 끝으로 윤승효를 물렸다. 아직 자묘랑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닌지라 윤승효는 머뭇거렸지만, 천마는 더는 받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한 백조부가 다점에서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힘차게 허리를 굽힌 윤승효는 속으로 울상을 짓고 말았다.
‘묘랑아. 묘랑아. 넌 어쩌자고 벌써 나왔니.’
윤승효는 정인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속 깊이 한탄했다.
뒤늦게 다점을 나섰던 문평은, 탁자 위에 흑화를 놓고 떠난 사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간신히 그의 종적을 찾아냈다.
사내는 시장통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걷는 중에 가게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괜히 지나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구경하며 낄낄거리기도 하는 것이 영락없는 파락호의 행색이었다.
문평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내의 뒤를 쫓았다. 따라오라고 일부러 여유를 두고 있는 것인지, 사내를 미행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내는 훈련받은 일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걷고 있었다.
규칙을 찾아보기 힘든 난잡한 발걸음. 그러나 교에서 보낸 사람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일 리 없다. 반박귀진反樸歸眞의 고수가 아니라면 흔적을 감추는 것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살수. 둘 다 문평이 상대하기에 어려운 상대다.
문평은 내심 일이 어렵게 됐다고 생각하며 허리에 찬 칼자루를 쥐었다. 손아귀에 습기가 배어 축축하다. 오랜만에 잡아 본 도인 데다 원래 그가 쓰던 것도 아니라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무척 낯설었다.
다른 낭인들과 마찬가지로 도를 쓰고 있긴 하지만, 문평은 도객이 아니었다. 그는 도를 쓰지만 창도 쓰고, 필요하다면 활도 썼다. 매우 특이한 기병奇兵 정도가 아니라면 거의 다 다룰 줄 알았고, 그 수준도 평범치는 않았지만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었다. 전문화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평의 무공은 전장에서 비롯된 실전 무예였고, 보급이 엉망인 전방에서는 한 가지 무기만 고집해서는 살아남기가 힘들었으므로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 특성을 잘 발전시켰으면 금군 특유의 십팔반무예十八般武艺가 완성됐겠지만, 정예군이 아니라 잡병 출신이다 보니 그조차도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것은 마교에 투신하고 나서부터다. 기초는 만자외가 잡아 줬지만, 그가 세운 틀에 새로운 살을 입힌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진 마도 본산의 기본공이었다.
문평은 마교에서 쾌검술과 도의 기초를 닦았다. 비록 마교에 투신하면 누구나 배우게 되는 기본적인 공부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추지 못해 얼기설기 얽은 모양새였던 문평의 무공은 그 덕분에 정돈되고 가지런해졌다. 덕분에 그동안 얻었던 깨달음들도 제자리를 잡았는데, 그의 실력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사실 강호 전체를 통틀어 보자면 일류 고수라는 무위가 그리 모자란 것은 아니다. 중원에서 일류 고수라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의 대표 고수급이거나 대문파의 주축을 이루는 일대 제자급으로 적어도 중진 취급은 받는다.
하나 절정, 초절정이 즐비한 마교에 오래 몸담았던 문평은 그런 자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웬만한 사람은 다 자기보다 한 수 위거나, 비슷한 수준이라도 뒤로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를 기준으로 감각이 맞춰져 버렸다.
문평은 발도를 빨리하기 위해 호수반護手盤5)에 손가락을 걸었다. 물 위에서조차 그림자가 없다고 정평이 난 그의 신법은 흐르듯 가볍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사람들은 눈으로 그를 보면서도 그가 신법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바로 곁을 스치고 지나가도 좀 빠르게 걷네, 라고 생각할 뿐 정확한 속도를 인식하지 못했다.
상대가 몸을 돌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문평은 그를 따라서 골목에 들어섰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벼운 움직임이다. 꼭 구름이 흐르는 것 같다.
문평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내보이며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깊이 갈등했다. 자신이 뒤에서 따라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저렇게 태평한 걸까?
‘내가 습격해도 피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저 앞에 잠복해 있는 다른 일행이 있나?’
공격을 해야 할까 말까. 문평은 호수반에 손가락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따라가다간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여기는 사람의 시선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이 자리에서 승부를 볼까? 이토록 좁은 골목 안이라면 신법에서 유리한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을지 모른다.
“어라. 이것 봐라. 너 자옥이 년이지?”
막 칼을 뽑아 상대를 덮치려던 찰나였다. 앞서가던 사내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평은 흠칫 놀라 발도하려던 것을 멈췄다. 상대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며 와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썅. 거기 서, 이년! 너 자옥이 년이지! 자옥이 년 맞지!!”
황당해 하는 문평은 알지도 못하고, 사내는 앞으로 열심히 달려갔다. 후다닥. 사내의 덩치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조그만 것이 그 앞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조그만 것은 사내에게 잡혔다. 사내는 그것을 잡고 흔들며 무지막지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년이 발정이 났나? 어딜 싸돌아다녀, 이 개년아! 네년 때문에 내가 얼마나 창피를 당한 줄 알아? 서 대인한테 네년을 넘겨주기로 찰떡같이 약속했는데, 되바라진 게 냅다 도망을 가? 오냐, 너 잘 걸렸다. 오래 안 맞았더니 온몸이 근질근질하지?”
사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올리자,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의 음성이었다.
“아악. 오빠.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 때리지 마요!!”
“망할 년이 영악하게 소가장으로 내빼더니만, 왜 여기서 거지꼴로 이러고 있냐? 소가장에서도 너 같은 년은 안 받아 주디? 거기서도 처녀만 좋다지?”
“오빠. 아파요. 때리지 마! 아악!!”
“때리지 말긴 뭘 때리지 마. 걸레 같은 게 꼭 맞아야 말을 들으면서.”
“아악. 오빠!!”
퍽퍽퍽. 우당탕. 비명이 난무하고 사내가 어린 계집아이를 짓밟는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상대가 본산에서 내려온 고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문평은 너무나 기가 막힌 광경에 얼이 빠져, 잠시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품위를 잃은 고수라고 해도 저런 막말을 하며 자기 허리춤에도 안 오는 어린 여자애를 두드려 팬다는 소린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사내는 보이는 대로 파락호가 맞는 모양이었다. 문평에게도 낯익은 서 대인이니 소가장이니 하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사내는 파락호인 동시에 개양 토박이다.
‘뭐야. 내가 착각한 건가? 저 사람이 보낸 신호가 교에서 보낸 흑화가 아니었단 말이야?’
문평은 사내가 젓가락을 놓은 모양이 흑화와 닮은 것이 순전히 우연이었나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천天 자는 뒤집고 산山 자는 똑바로 세워 겹치는 데다가, 획에 따라 위로 올라가는 젓가락과 아래로 내려가는 젓가락의 구분이 틀린 것까지 일치했다. 그게 모두 우연이라면 너무 정교한 우연이 아닌가.
그 흑화를 정확히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교에서 직접 보낸 자는 아니라도, 마교인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정확한 사정은 저놈 입에서 직접 들어봐야겠지만 말이다.
문평은 조그마한 계집애를 때리느라 정신이 팔린 파락호의 뒤로 가 발길질을 내질렀다. 아무런 경계 없이 어린애를 패고 있던 놈이 호되게 허리를 걷어차여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뭐야 이건!”
갑작스레 걷어챈 파락호가 바락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들었다. 기개는 좋았지만, 상대가 문제였다. 무공을 정식으로 배운 고수를 일반인이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문답무용으로 문평은 한 번 더 다리를 내질렀다.
사내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구르는 것을 한 번 더 걷어차 잠잠하게 만든 문평은 입맛을 다시며 발끝으로 툭툭 사내를 건드려 봤다.
좀 아프게 내지르긴 했는데, 사내가 이렇게 빨리 뻗을 줄은 몰랐다. 남을 때릴 줄만 알지 맞아 본 적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피투성이가 된 두 팔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던 꼬맹이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직 예닐곱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가 애처로웠다. 말라서 뼈밖에 안 남았는데 눈만 커다래서 사내의 말이 아니었으면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도 구분치 못했을 것 같았다.
아이는 아직도 눈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한쪽 눈은 부어서 형편없고 반대편 뺨에도 시커먼 멍이 들었다. 문평은 파락호를 툭툭 차며 작달막한 꼬맹이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 짧은 일별에도 꼬맹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꼬마 입장에서는 무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를 때리고 있던 무서운 오라비를, 그저 한 번 걷어차는 것으로 날려 보낸 사내가 바로 문평이니까. 하지만 사실 문평이 애를 내려다본 것은 그저 난감해서이지 그 앨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지금도 지나치게 많이 맞았다.
“……많이 아프냐?”
철이 들고 나서 이렇게 작은 어린애와 대화해 본 기억이 없는 문평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 불쑥 물었다. 아이는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요. 하나도 안 아파요.”
“……아픈 것 같은데.”
팔로 머리 위를 감싸고 있었음에도 아이의 얼굴은 피범벅이다. 팔에도 여기저기 피멍이 난무했고, 왼팔의 관절은 어색할 정도로 퉁퉁 부어 손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저건 분명 부러진 거다. 문평은 마음속으로 끌끌 혀를 차며 생각했다. 저렇게 조그만 아이를 팔이 부러질 때까지 때리다니, 오라비라는 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보기만 해도 딱 견적이 나오는데 아이는 다시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이는 문평이 아파 보인다고 말할 때마다 점점 더 겁을 먹었다. 아프다고 대답하면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안 아파요. 하나도 안 아파요.”
아이는 이제 울먹이기까지 했다. 자기가 뭘 하면 할수록 더 겁을 먹는 것 같아서 문평은 아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비칠비칠 몸을 뒤로 물리면서도 기력이 딸려 도망도 못 가는 앤데, 괜히 가까이 다가갔다간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다.
“그 팔, 그대로 두면 탈 난다, 아가. 의원한테 가라.”
의원한테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설움을 알고 있는 문평은 주머니를 뒤져 은자 한 냥을 꺼냈다. 손에 쥐여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손톱 끝으로 튕겨 아이의 무릎 위에 떨어지게 했다.
뭔가가 몸 곁으로 툭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던 아이가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자기 무릎 위에 떨어진 것이 은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은 한쪽 눈으로 은자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문평을 쳐다보았다. 문평은 아이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쓰러진 파락호에게 다가가 그를 어깨에 걸쳐 맸다. 아이는 그 광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도 깜빡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평은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이 겨우 은자 하나로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 아이처럼 혹독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남이 자신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언가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을 쉬이 믿지 못한다. 항상 배신당하고 갈취당한 전력이 있기에 낯선 사람의 선의를 믿지 못하는 거다.
사람의 선의를 믿지 못하게 된다는 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다. 나쁜 점은 진짜로 도와주려는 손을 구분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고, 좋은 점은 악심惡心을 가지고 다가오는 손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아이들의 삶에 선의의 손이 다가올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문평은 자신이 던진 값싼 동정에 아이가 변하지 않기를 빌었다. 아이에겐 아직도 길고 고단한 삶이 남아 있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삶 자체에 잡아먹히고 마는 그런 삶이.
아이는 당분간 도망치고 또 도망쳐야 했다.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가장 멀리 뛰어야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평은 아이의 오라비를 어깨에 짊어진 채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어디 한적한 곳을 좀 찾아서 친절한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그 흑화를 어디서 배웠는지, 왜 내 눈앞에서 그런 걸 드러냈는지. 파락호에게 물어봐야 할 걸 차근차근 정리하던 문평은 머리 위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끼며 발걸음을 멈췄다.
“흥.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군. 어이, 그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갈 참이지?”
그가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휘리릭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 위쪽이다.
문평이 고개를 들자 거기엔 붉은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차려입은 귀여운 아가씨 하나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그러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문평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낯익은 얼굴이다.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인지라 문평은 그녀가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녀가 말을 건 사람이 자신인 것 같아 문평은 일단 대답을 건넸다.
“그럼. 볼일이 있어서 왔지. 내가 다점 앞에서부터 계속 너를 기다렸다는 건 알고 있어? 그 앞에서 내내 네가 윤 가가와 떨어질 시간만을 기다렸다고.”
소녀의 말을 들은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소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 남자를 시켜 저를 이곳으로 유인한 것도 소저입니까? 소저가 저를 불러낸 겁니까?”
“그럴 리가. 내가 그런 더러운 남자와 말을 섞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그냥 네가 움직이니까 따라온 것뿐이야.”
문평은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험악하게 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포목점에서 울며 사라지던 뒷모습이다.
자신이 먹은 약이 자묘랑이 준비한 약이라는 것도, 묘랑이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그는 소녀의 얼굴에 가득 차 있는 악의에 진심으로 어리둥절했다.
“너! 내가 기억 안 나? 이렇게 예쁘고 깜찍한 내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문평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소녀는 문평이 자신을 알아보면서도 일부러 못 알아보는 척한다고 오해하고 분개했다. 문평이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칼진 모습으로, 그녀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화를 냈다.
“한 번밖에 못 뵙긴 했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 소저가 아니신지요?”
문평은 그때 소녀가 스스로를 ‘자 소매’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점잖게 대답했다.
흥. 그럼 그렇지. 자묘랑은 자기 성을 단번에 기억해 내는 문평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자묘랑이다. 윤 가가와 춘몽례를 약속한 사이지.”
저 주장은 예전에 포목점에서도 한 번 들었던 주장 같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윤승효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게 된 지금의 문평은 그 말이 썩 달갑지 않게 들렸다.
이 꼬마 아가씨는 자신이 윤승효와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윤승효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아가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윤승효는 정혼자를 함부로 버리는 파렴치한이라는 소린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문평은 윤승효라는 사람의 인격을 너무 잘 안다.
“윤 대협은 그런 일이 없다고 했소. 나는 윤 대협을 믿소.”
문평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문평의 말을 들은 자묘랑이 다시 인상을 썼다. 그녀는 남의 집 담벼락 위에서 조그만 발을 동동 구르며 약이 올라 소리를 질렀다.
“흥! 잘난 척하지 마! 윤 가가는 꼭 내게로 돌아올 거야. 너 같은 사내 계집에게 질 내가 아니라고!”
“사내 계집이라니, 그거 지금 나더러 하는 소리요?”
어지간하면 여자에게 큰 소리 안 내는 문평이지만, 이건 정말 불쾌했다. 안 그래도 찔리는 데가 없지 않아 더 그랬다.
문평은 얼굴을 굳히며 냉담하게 자묘랑을 쏘아보았다. 자묘랑은 자기보다 월등하게 큰 남자의 험상궂은 얼굴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턱까지 치켜세우며 당당히 소리쳤다.
“그래. 너더러 하는 소리다!”
“어린 아가씨가 정말이지 못 하는 말이 없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정네에게 너무 심한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소?”
남자아이였으면 벌써 반 죽도록 패놓고도 엉덩이를 까서 일곱 대를 더 때렸다. 하지만 상대가 어린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문평은 참았다. 여자와 아이에게 손을 대는 남자는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해 오던 자신이, 저 소저 하나 때문에 평소 경멸하던 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하긴 뭐가 심해! 진짜로 심한 건 너야. 발정 난 암고양이 같으니라고. 내가 차린 밥상인데 감히 지가 받아?! 난 다 들었어! 다 들었다고!! 네가 윤 가가의 아래에서 앙앙거리던 것도. 네 몸 안에 더 깊게 넣어 달라고 울부짖는 것도! 내가 그날 지붕 위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정인을 여인에게 빼앗겨도 억울할 판에 하필이면 사내 계집이라니! 우리 윤 가가를 너 같은 것 따위에게 빼앗기고 말다니!!”
소녀는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거침없는 말을 쏟아 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소녀의 말을 들은 문평은 헉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얼굴 위로 숯불이 쏟아진 것 같았다. 낯가죽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면서 속에서도 확 하니 열기가 치솟는다.
차오르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못 이긴 문평은 차라리 이대로 기절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우리 윤 가가 허리는 아무리 봐도 네 허리 반밖에 안 돼. 그런 허리에 네가 뭔데 올라타는 거야? 게다가 밝히기는 왜 그렇게 밝혀?!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이틀이 뭐니, 이틀이. 우리 윤 가가 복상사하는 줄 알았어! 너한테 우리 윤 가가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고!”
그는 자신과 윤승효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문평의 기억은 모두 날아가 버렸고, 윤승효는 거기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없었다. 윤승효는 그 일을 정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고, 혹시 그가 오해할지도 몰라 문평도 말을 삼갔다.
덕분에 어영부영 그냥 없던 일인 양 넘어가려던 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의 일을 창밖에서 엿들었다는 증인이 나타나 다 꺼져 가던 불씨를 새삼스레 들쑤셔댔다.
적나라한 소녀의 묘사 때문일까. 문평의 머릿속에 한 폭의 춘화도春畫圖 같은 장면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자신보다 가는 체구의 윤승효 위에 올라타 스스럼없이 허리를 흔들던 장면과, 일을 끝내려는 상대를 오히려 잡아끌어 자신의 몸 안에 가두는 장면. 더 박아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윤승효의 그 거대한 거시기를 물고 빠는 장면까지.
실재했던 기억이라고 하기보다는 자묘랑의 말로 인해 촉발된 망상에 더 가까웠지만, 당황한 문평에겐 그 모든 것이 진실한 기억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정말 그랬던 건가? 그냥 사람 하나 살리자고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안았던 사내에게 그런 추태를 보였나?’
그가 당황하고 두려워할수록 머릿속의 망상은 점점 더 생생해졌다.
“그, 그것은 오해요, 소저. 그때의 일은 모두 치료를 위해 벌어진 의료 행위로써, 절대로 정사 같은 게 아닌…….”
문평은 당황한 얼굴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기 때문에 청정한 이름이 더럽혀질지도 모르는 윤승효를 위한 변명이다.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협객으로 이름 높은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흠이 될 터였다. 다 죽어가던 사람을 치료한 죄밖에 없는 사람을 남색가라고 손가락질받게 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치료는 무슨 치료야. 네가 먹었던 몽중십야? 그까짓 것 딱 한 모금 먹었는데 그걸 못 빼내? 그 정도 양이면 진기도인만으로도 뺄 수 있어. 소주천 한 번 하면 끝나는 일을 가지고 치료는 무슨?”
그녀가 알고 있는 상식하에서,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직접 복용한 사람 혼자서는 빼기 어려운 약이지만 옆에 고수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몽중십야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실로 간단하다. 진기도인으로 춘약의 기운을 밀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평이 가지고 있던 고의 존재를 몰랐고, 몽중십야가 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의 오해는 멈추지 않았다.
“변명하지 마. 도랑 친 김에 가재 잡는다고, 약 먹은 핑계 대고 놀아났던 거잖아! ……아냐. 혹시 또 몰라. 이 여우 같은 게, 약이 풀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차를 마신 건지도. 설마 너 진짜로 그런 거야? 알면서 일부러 먹었어? 우리 윤 가가 한번 넘겨보겠다고 진짜 그렇게까지 한 거야??”
그녀는 적반하장으로, 이제는 알면서도 일부러 약 먹고 자기 정인을 꼬신 거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소녀라서 그런지 그녀의 상상력은 지나칠 정도로 풍부했다.
윤승효를 위해 또다시 변명을 하려던 문평이 멈칫 말을 멈췄다. 소녀가 하는 말속에 이상한 단서가 있었다. 처음엔 흘려들었지만, 자꾸만 정보가 쌓이기 시작하자 드디어 문평에게도 어렴풋이 실체가 보였다.
‘내가 차에 탄 약을 먹은 것을 저 소녀가 어찌 알았을까?’
문평은 그제야 그 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밖에서 엿들었다고 하더라도 문평이 마신 차에 약이 들었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니 차를 마시고 쓰러지다니. 게다가 이건 춘약?’이라는 식으로 윤승효가 독백하지 않았다면, 밖에서 들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그저 털썩하는 소리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소녀는 그가 먹은 약이 몽중십야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가 그 약을 먹은 방법도 알았다. 게다가 그냥 이름만 주워들었다고 하기에는 해독법을 너무 자세히 안다.
‘내가 차려 놓은 밥상을 받았다’고 화를 내는 것 하며, 처음부터 윤승효를 보자마자 달라붙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설마, 아가씨는 환희루의 루인인가?”
설마 이 조그만 아가씨가 ‘윤승효를 노려 차에 춘약을 집어넣은 환희루의 탕녀’일지는 몰랐던 문평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차마 탕녀 소리는 못 하고 점잖게 ‘루인’ 소리를 하는 건, 눈앞에 보이는 아가씨의 얼굴이 너무 앳되고 고왔기 때문이다.
채양보음을 통해 60대 노파라도 20대처럼 젊음을 유지한다는 환희루니, 눈앞의 아가씨가 실제로 몇 살일지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모습이 어린 소녀이니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냥 루인이 아니야. 난 소루주小樓主다. 다음 대 환희루주가 되실 몸이라고!”
자묘랑의 고고한 대답에 문평은 머리가 어찔해졌다. 어린 나이임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환희루라고 하면 여인들만의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사파에서 세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강력한 단체로, 현 환희루주 자옥군慈玉君은 아미검후 조약영에게 여중제일인의 자리를 간발의 차이로 빼앗긴 대단한 여고수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자묘랑이라고 했던가. 어머니 성을 따른 걸 보니 진짜 자옥군의 자식이 맞나 보다.
“흥. 이제야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보는군. 네가 얼마나 위험한 상대를 적으로 삼았는지 이제 감이 와?”
자묘랑은 문평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자신의 신분에 기죽었다고 생각하며 큰소리쳤다. 이제껏 자신의 신분을 알고도 당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는 상대가 자신에게 당연히 굴복했을 거라고 믿었다.
“이보시오. 소저.”
문평은 곱게만 커서 철딱서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소녀를 한숨 어린 목소리로 불렀다.
‘그래. 이제 꼬리를 말려고 그러는 거지?’
자묘랑은 속으로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문평을 바라보았다.
‘자. 사과해. 감히 이 자묘랑이 찍은 남자를 넘본 죄를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내 신발에 입을 맞춘 후에 흙탕물 위로 ‘나는 암퇘지입니다. 꿀꿀.’하고 울면서 뒹굴면 이번 한 번만큼은 넘어가 줄 수도 있어. 물론 우리 윤 가가에게 두 번 다시 접근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야 하지만.’
완전한 승리를 자신한 묘랑은 너그럽게도 문평이 용서받을 방도까지 이미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윤 형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자 소저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오. 내 몸엔 자 소저가 예상치 못한 괴이한 병이 있었고, 소저가 쓴 춘약 때문에 그 병이 몹시 악화하였소. 윤 대협은 날 치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운 것뿐이오. 그 일은 내게도 윤 대협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소.”
윤승효가 애써 강권하는 바람에 그를 마주한 곳에서는 다시 평존칭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없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윤승효를 공경하는 마음이 깊은 문평은 나이도 어린 윤승효를 소협이 아니라 대협이라고 불렀다.
문평의 이야기를 들은 자묘랑은 입술을 비죽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귀담아듣는 듯, 비죽비죽하면서도 눈빛은 부드러워진다.
그녀가 그의 말을 열심히 듣는 것은 그에게 압도되어서는 물론 아니고, 그가 자묘랑이 몹시도 바라고 있던 말을 해주어서다. 윤승효가 문평 때문에 자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묘랑은 기분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문평은 자묘랑의 기분이 계속 좋아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이제껏 그 일이 윤 대협의 몸을 노린 탕녀의 소행인 줄로만 알았소. 윤 대협도 그렇다고 했고, 수법의 악독함 때문에 다른 쪽으로는 생각할 여지가 없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오늘 소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일을 저지른 당사자가 바로 소저구려. 매우 놀랍고 유감스럽소. 설마 윤 대협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소저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오. 아직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어쩌면 그렇게 악독할 수 있소?”
진짜로 악독한 사람이라도 악독하다는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으면 화를 내기 마련이다. 어린 자묘랑도 그러했는데, 그녀는 문평이 자신을 앞에다 두고 악독하다 악독하다를 반복하자 크게 화를 내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뭐가 악독하다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소저는 자신이 정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소? 윤 대협의 차에 춘약을 타고 그를 강제로 범하려고 하지 않았소. 윤 대협이 자신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그를 겁탈하려고 했단 말이오!”
“그게 뭐가 나빠? 나와 한 약속을 먼저 어긴 사람은 윤 가가인데. 윤 가가는 내게 춘몽례를 약속했었어. 그래 놓고 나를 배신했지.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키게 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 춘몽례의 상대는 윤 가가뿐이니까. 윤 가가가 나를 배신한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나는 다른 사람 따윈 생각할 수도 없으니까.”
자묘랑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집을 피웠다. 마음이 변했건 말건 그건 상관없다. 일단 약속을 한 게 우선이니, 하늘이 두 쪽 나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춘몽례, 춘몽례 하는데 그게 대체 뭘까?’
문평은 무엇이 소녀를 그렇게 집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춘몽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윤승효에 대한 잘못된 집착은 버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와 윤승효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었는데, 이대로 계속 놔두기엔 상태가 너무 위험했다.
“춘몽례가 뭔지 나는 모르오. 하지만 소저의 말이 지나친 억지라는 건 잘 알겠소.”
“뭐가 억지야?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거야!”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이 나올 때는 조용하더니만, 자신을 탓하는 말이 나오자마자 자묘랑은 돌변했다. 남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더 이상 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벌컥벌컥 화부터 낸다.
그래도 석문평은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가씨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또 어떤 돌발 상황을 만들어 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맹목적인 아가씨가 자기 목표만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대형 사고를 사전에 예방하려면, 현재의 인내심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상황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시다. 한 아가씨와 청년이 있소.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맞아 장래를 약속했는데, 중간에 아가씨가 변심해 약혼이 깨지고 말았소. 청년은 너무 상심했고, 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가씨에게 화가 났소. 그래서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겁탈하고 말았지……. 이 이야기에서 진짜 잘못한 것은 누구요? 중간에 마음이 바뀐 아가씨요, 아니면 아가씨를 겁탈한 청년이오?”
바보도 아닌데 그 이야기가 누구를 빗댄 것인지 모를 리 없다. 그녀는 욱하는 고집에 아가씨가 잘못한 거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가 자란 환희루는 남자에게 상처받은 여인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그녀를 어릴 때부터 예뻐해 준 유모와 시비들 가운데도, 방금 문평이 말한 것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여인들이 실제로 있다. 마치 그 사람들을 욕보이는 것만 같아서, 자묘랑은 끝내 아가씨가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붕어처럼 몇 번 입을 벙긋벙긋하다가 차츰 울상을 짓고 말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잘못한 거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대답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고 분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누가 잘못했는지 알겠다면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아도 상관없소. 대신에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약속받고 싶소. 그럴 수 있겠소?”
“왜 내가 너한테 그런 약속을 해야 해? 네가 윤 가가의 뭐라고?”
“물론 저는 윤 대협의 동행일 뿐이오. 하지만 소저에겐 소저의 계략에 빠져 몸을 버린 피해자도 되오. 이 몸이 정녕 소저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자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평이 그 점을 다그친다면 이번에도 그녀는 할 말이 없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문평이 몽중십야를 먹은 것은 자신 때문이고, 윤승효가 문평과 몸을 섞어야 했던 것도 결과적으로 그 약 때문이니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섣부르게 약을 쓰려고 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윤승효를 직접 노려 하독한 것도 아니고 그의 방에 있는 찻물에다 넣는 것 정도로 만족했으니, 일을 너무 허술하게 처리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약을 쓰지 않겠다는 건 약속하겠어. 하지만 다른 것까지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마. 난 윤 가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나는 윤 가가가 아니면 안 되니까.”
문평의 말 없는 시선에 떠밀린 자묘랑은 사과가 아니라 선언을 했다. 앞으로 윤승효를 안 덮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약만 안 쓰겠단다.
소녀는 고작 그것만 약속했는데도 분해 죽겠는지 씨근거리기 시작했다. 남에게 떠밀려 억지로 약속해야 했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로 날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두고 봐. 난 언젠가는 진짜로 나의 윤 가가를 되찾고 말 거니까.”
자근자근 입술을 깨물던 자묘랑이 돌연 팩하니 소리치고는, 몸을 돌려 지붕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휙 나타났다, 마음이 내키면 휙 사라지고. 진짜로 고양이 같은 아가씨다.
문평은 자묘랑이 사라진 지붕 위를 허탈하게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까지 길 저쪽에 앉아 있던 꼬맹이가 자리에 없었다. 자묘랑도 사라졌다. 이제 남아 있는 건 자묘랑과 실랑이를 하는 동안 내내 어깨에 올려 두고 있던 파락호뿐이다.
“……다 들었지?”
문평이 조용히 묻자 파락호가 움찔 놀라 몸을 굳혔다. 자묘랑과 대화하는 와중에 정신을 차렸던 파락호는, 발길질 몇 번으로 자신을 기절시킨 남자의 어깨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그머니 도망가려다가 마비혈을 잡혔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다.
그저 몸 한 군데가 따끔하다는 느낌뿐이었는데, 파락호의 온몸이 굳었다. 늘어트린 팔로도, 멀쩡한 다리로도 힘을 보낼 수 없다. 그제야 파락호는 자신이 무공 고수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시간 동안 건장한 사내를 어깨에 메고 있으면서도 힘든 기색 하나 안 보이고, 손가락으로 온몸을 제압할 수 있는 건 무공 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행사다.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정신을 차려 명을 재촉하는구나. 덕분에 네가 죽을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문평은 사내에게 겁을 주며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사지가 빳빳하게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아혈은 찍지 않았는데도 겁을 먹었는지 숨도 못 쉬고 조용하다. 간혹가다 흐느끼는 소리가 나면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우는 것도 같고 말이다.
‘쫄긴. 진짜로 죽일까 봐 그러나.’
문평은 어이없는 사내의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 여동생은 팔이 부러질 만큼 두드려 패 놓고, 자기가 똑같은 상황이 되니 살려 달란 소리도 못 하고 벌벌 떤다. 이건 인간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사내도 못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 한마디 잘못 들었다고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다. 그가 무슨 포영의도 아니고, 그런 살벌한 짓을 해서 뭐 하겠는가.
그는 다만 살짝, 아주 살짝만 사내를 손봐 줄 생각이었다. 크게는 아니고, 그저 두 번 다시 자기 가족은커녕 지나가는 개미조차 죽일 수 없도록 손발의 근맥을 끊는 정도? 그렇다고 해도 아예 앉은뱅이를 만들 생각은 없으니 이놈의 파락호는 아주 복 받은 거였다.
여자 패는 것을 광적으로 혐오하는 악 형에게 걸렸으면, 앉은뱅이가 되는 것도 모자라 고자까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석문평에게 걸렸으니 근맥 절단 정도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