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화협 윤승효는 그 화려한 외양과는 다르게 사치스러운 성품이 아니었다. 북경 권문세가의 귀하디귀한 귀공자이니 끼니때마다 금준미효를 찾아도 흠이 되지 않으련만, 입맛 까다로운 식도락가인 모 교주와는 달리 그는 소채 한 그릇에 만두 두어 개로 간단히 허기만 면하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소탈한 입맛의 소유자였다.
“그들이 잃어버린 표물이라는 건, 아마도 앵속罌粟일 겁니다.”
소박한 음식으로 허기를 메우고, 대신 먹음직스러운 일품요리와 귀주의 명물인 오량액五粮液을 시켜 술상을 마련한 두 사람은 당문에 대한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윤승효는 여전히 서글서글하게 웃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문평에게 당문이 숨겼던 진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앵속이요? 그건 약재가 아닙니까? 통증이 심한 환자들에게 종종 처방되기도 하는 약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앵속이라는 말에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장에서 자란 그는 부상병들이 고통을 참기 위해 앵속을 음용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앵속은 병사들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취제로, 적당히 하면 통증을 잊을 수 있지만 많이 먹으면 환각을 보게 되고, 강한 중독성이 있어 제때 끊지 못하면 끝내 폐인이 된다.
문평은 통증 때문에 앵속을 찾았다가 폐인으로 전락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개중에는 무공의 고수도 있었고, 배울 만큼 배웠다는 서생도 있었다.
“앵속에 대해 아신다니 설명이 쉽겠습니다. 앵속은 보통 마취제로 쓰이지만, 중독성이 강해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깊이 쓰이지 않는 재료입니다. 관리도 보통의 약재들보다 엄격하기 마련인데, 잘못 쓰이게 되면 사람을 쉽게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앵속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제가 기억하기로 그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말로만 듣던 오량액은 매우 독특한 술이었다. 향도 순하고 맛도 부드럽지만,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뜨거운 화기가 치솟는 걸 보면 도수가 보통이 아니다. 술을 좋아하는 문평은 이야기보다 술에 더 집중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그가 술을 반색하는 기색을 보이자 윤승효는 웃는 낯으로 그의 잔에 한 번 더 술을 채워 주었다. 문평은 기쁜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화끈한 감각이 다시 한번 그의 배 속을 가득 채웠다.
“당문은 문파의 특성상 여러 가지 약재를 고루 다룹니다. 당문이라고 하면 우선 유명한 것이 독이지만, 그 독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여러 가지로 제련이 필요하니 부수적으로 소비하는 약재가 만만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당문에는 채집당採集黨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필요한 약재들을 채집하는 기관인데, 당문 안에서 소비되는 중심적인 약재들은 전부 그곳에서 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평은 윤승효가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술을 산 것도, 목숨을 구해준 것도 그라서 문평은 윤승효의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술값을 내는 사람이 술자리의 주인이라는 것은 문평과 그 친구들 사이에서 맺어진 암묵적인 불문율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문평의 입장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에게 오량액을 맛보여 주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품목들은 채집당에서 손수 재배하고, 그 외 사소하게 쓰이는 것들은 외부에서 들여오는데, 그 임무를 위임받은 것이 바로 은성표국입니다. 그러므로 은성표국의 표물들은 특별할 게 거의 없지요. 단 한 가지 품목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 한 가지라는 게, 앵속입니까?”
“그렇습니다. 앵속은 약재로 쓰이지만, 실은 아편의 원료이기도 합니다. 아편은 명색이 정파라는 당문에서 직접 재배하기에 곤란한 품목이라 외부에서 사들이는 것이지요. 은성표국에서 호송하는 앵속은 질이 최상급입니다. 토양과 기후가 알맞은 운남에서 거두는 것이라 중원에서는 찾기 힘든 품질을 가졌죠.
당적형은 무심결에 ‘불의한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물건’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확신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당문에서 앵속이 풀렸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뒤를 감당하기 힘들게 되겠지요. 그렇기에 당문에선 단순한 추적자가 아니라 당문오독까지 내보내 뒤를 수습하게 한 겁니다.”
문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한 문제라면 당문오독이 친히 나설 일이 맞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름을 중요시하는 게 정파인데, 자기네 문파에서 아편이 유출됐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문평이 그렇겠네요, 라며 태평하게 긍정하자 윤승효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는 입가에 머물고 있던 미소를 지우며 문평에게 되물었다.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습니까? 곽 형께서는 지금 당문에서 숨기고 싶은 비밀을 아시게 된 겁니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만, 당적형도 머지않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당문의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했던 말을 듣고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저처럼 말입니다.”
문평은 헉하고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윤승효가 꼭 집어 말해 주는 것을 듣고서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빠져 있는지를 깨달았다. 고약하게도 이번에도 당문과 얽혀 버리고 말았다. 그가 의도했던 바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의 실수도 아니고 상대의 실수로 인해 당문과 척을 지고 만 문평은 그만 얼굴이 노랗게 질리고 말았다. 설마 그깟 일로 살인멸구를 하겠어? 라고 태평하게 생각하기엔 그는 당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덜한 일에도 서슴없이 남의 목을 따려고 들었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질 상황에서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무슨 일로 귀주로 오신지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곳에 오래 머물러 계실 수는 없을 겁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이만 포기하고 안서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군의 진지 안에 계신다면 설사 당문이라 할지라도 쉽게 손을 뻗지는 못할 겁니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하고 문평은 머리를 굴려 봤다. 자칫하면 당문에게 살인멸구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 당문의 추적을 받다 보면 경공을 드러내야 할 테고, 신법을 사용하다 보면 수법이 드러나게 될 것이 문제였다. 만에 하나 그의 신법을 알아보는 자가 하나라도 나타나게 된다면…….
설상가상雪上加霜에 점입가경漸入佳境. 그 순간 그의 목숨은 끝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기 가문에 죄를 지은 자였다. 두 번 다 문평에겐 억울한 누명이었으나, 당문은 그런 점 따윈 신경도 안 쓸 거다. 오히려 괘씸죄를 적용해 한층 더 기를 쓰고 죽이려고 들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느냐? 문평의 입장에서는 그것 또한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와 이틀의 거리를 두고 마영대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만약 사흘에 한 번씩 그가 흑화를 남기지 않는다면, 그의 마지막 흑화를 확인한 비밀 분타에서 포영의에게 전서구를 날려 그가 배신했음을 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문이고 뭐고 없이 그냥 죽는 거였다. 뱃속에서 꿈틀대는 독물이 그 즉시 온몸에 퍼져,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겠지.
진퇴양난進退兩難.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는 처지가 된 문평은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천령개를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전생에 얼마나 몹쓸 짓을 저질렀기에 이런 꼴을 당하는 걸까. 매사 꼬이기만 하는 자신의 인생에 화가 난 문평은 마침내 전생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회秦檜처럼 나라를 팔아먹었나? 아니면, 희대의 강간마라 수많은 여인을 잔혹하게 겁간하고 살해하기라도 한 것일까?’
적어도 그 정도의 죄가 아니라면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세상에 팔자가 사나워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나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만약 눈앞에 사람이 앉아 있지만 않았다면 그만 울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문평이 벌게진 눈매를 하고도 묵묵히 그냥 앉아만 있자, 잠자코 그를 지켜보던 윤승효가 빈 잔을 채웠다. 문평은 반사적으로 술잔을 잡았지만,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 좋아하는 술조차도 내키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울분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 상황에선 제아무리 대단한 술이라고 해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떠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문평의 분위기가 너무도 침중해지자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윤승효가 담담히 물었다. 안전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결정을 못 내리는 그를 보고, 무슨 사연이라도 있겠거니 짐작한 모양이었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영상이 떠올랐다. 뺀질뺀질한 낯짝. 못돼 먹은 성깔머리. 그의 인생 최대의 암초 천마. 지금 이 순간 문평에겐 그 얼굴처럼 미운 낯짝도 달리 없었다.
“누굽니까?”
“여동생…… 의 아들인데 제게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입니다.”
문평은 창백한 머릿속에서 기억을 찾아내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곧이곧대로 천마를 찾는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 대신 미리 지어 뒀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어서일까. 스스로가 만든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뒷내용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을 두고 헤매듯 말하게 됐지만, 어쩐지 그러고 나니 이야기가 더욱 효과적으로 들렸다. 그의 망연자실한 모습이 이야기의 현실감을 한층 북돋웠다.
“얼마 전에 누이가 자식을 잃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멀쩡하게 아침에 집을 나갔던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수소문을 했더니, 엉뚱하게 귀주에서 그 애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광서에서 사라진 애가 성을 넘어 귀주에 나타났다니 그 애가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렇습니까. 다 죽어가는 누이가 울면서 매달리는 편지를 보내더군요.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와 본 것인데……. 설마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잃어버린 조카를 찾는다는 이 이야기는 문평의 작품으로,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확인한 후 즉석에서 지어낸 것이었다. 음모의 배후를 찾는다는 티를 내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그를 가릴 명분이 필요했고, 마침 새로 만들어진 가짜 신분에는 광서성에 사는 여동생이 있었다.
문평은 사람들의 이목을 쓸데없이 끌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소박하게 이야기를 꾸몄다. 기억하기 쉽게, 그러니 잊기는 더 쉽도록.
이야기를 듣고 난 윤승효는 말없이 문평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평소에는 예쁜 하늘색인 눈동자가 어두운 남빛으로 변했다. 감정에 따라 눈동자 색깔이 달라지는 인간은 지금 처음 봤지만, 자기에게 닥친 일로 벅찬 문평은 그런 소소한 일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누이분이 광서성에 사신다고 했습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평은 문평대로, 윤승효는 윤승효대로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에 윤승효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문평은 자신의 설정을 고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서성에서 사라진 아이가 귀주에 나타났다면…….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저도 마침 그와 비슷한 일을 쫓고 있던 참이거든요. 관 형의 이야기를 듣자니, 관 형의 일 역시도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놀랍게도 윤승효는 본인 역시 아이들의 납치 사건을 쫓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공론화된 일도 아니고, 복건성의 일 외에는 크게 주목도 받지 못한 사건인데 이 남자는 벌써 그 사건을 알고 뒤를 캐고 있었다. 문평은 순수하게 놀라운 기분으로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제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 일은 단지 광서성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광동성, 복건성, 사천성, 거기에 더해 운남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게 피해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없어진 아이들은 대략으로 잡아도 800~900명. 줄잡아 1000명이나 되는데, 그런데도 소란이 일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 방법으로 아이들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는 꽤 오랫동안 이 일을 쫓아온 모양이었다. 마교의 비밀 분타에서도 모르던 없어진 아이들의 숫자까지 알아낸 것을 보면 그의 정보력은 마교가 가진 것보다 더 대단할는지도 모른다.
문평은 뜻밖의 우연에 놀라면서도 약간은 감동했다. 남에게 억지로 등 떠밀려 아이들의 납치 사건을 조사하게 된 그와 달리 윤승효는 이 사건에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목숨이 이중으로 위협받는 문평보다도 한결 적극적인 자세로 사건에 임하고 있었다.
문평이 보기에 윤승효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협의俠義 때문이었다. 세상에 협객俠客을 자칭하는 자는 많아도 진정한 의미의 협사俠士는 드문데, 윤승효는 바로 그 드물다는 진짜 협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관 형의 일과 제 일이 서로 같은 일이라면, 관 형 혼자서 일을 해결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성에 손을 뻗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수백 건의 납치 사건을 저질렀으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만큼 치밀한 자들입니다. 그들을 쫓을 생각이라면 소생과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혼자 힘보다야 두 사람의 힘이 낫지 않겠습니까?”
윤승효는 문평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했다. 납치 사건의 배후를 캐는 일에 자신과 함께하자고 권해 온 거다. 말로는 문평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문평을 납치 사건의 배후와 당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 생판 모르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윤승효는 문평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었다. 이토록 순수한 선의善意를 받는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인지라, 문평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날름 달라붙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득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내려진 행운을 못내 기쁘게 누렸을 텐데, 윤승효의 앞에서는 어째 그런 선택을 하기가 힘들었다.
윤승효는 타인의 곤란함을 발견하면 서슴없이 돕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 만난 사람을 위해 당문과 대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 슬퍼해 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제일 먼저 뛰어들어 옷을 더럽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아이들의 납치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은 핑계고 사실은 천마를 찾고 있는 건데. 정파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는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윤승효와 같은 의인義人을 이용하는 건 지나치게 파렴치하지 않은가.
‘언제부터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고 살았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석문평. 이런 절호의 기회를 차버리면 혼자 어떻게 할 생각인데? 홀로 당문을 피해갈 수 있을 것 같아? 고독이 뱃속에서 터져도 네가 무사할까? 우선 나부터 살아야지. 주제에 누굴 근심해?’
문평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윤승효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는 살고 싶었다. 이 꼴로 죽어 나자빠지려고 여태껏 살아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싫다는데 억지로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먼저 도와주겠다는 거다. 그런 것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자신에게 지금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문평은 주저하면서도 끝내는 이성을 택했다. 오랜만에 활동을 시작한 양심이 따끔따끔하게 가슴을 괴롭혔지만, 그의 욕망은 선의보다 강했다.
“그럼요. 괜찮다마다요. 잘됐습니다. 관 형. 동지가 생겼군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합니다.”
윤승효는 남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푸른 눈동자가 맑게 개자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아름답게 빛이 났다. 문평은 차마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상대가 지나치게 반짝거려서 그런지 눈을 마주치기가 껄끄러웠다.
***
윤승효는 천성이 밝은 사람인 듯했다. 그는 농담을 좋아했고 자주 웃었으며 사사로운 대화 또한 몹시 즐겼다. 윤승효와 같이 지낸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문평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문평은 그가 삼 남매 중에 막내이며,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의 익애가 남달랐고, 그 덕분에 강호를 자유롭게 떠돌며 사는 걸 허락받은 유일한 자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를 만난 이튿날에 들었다. 그의 청안靑眼은 색목인이었던 외할머니에게서 격세 유전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서평왕西平王인 그의 외할아버지가 유달리 그를 귀여워해 어린 시절 대부분은 서평왕부에서 자랐다.
그가 무공을 사사한 것은 서평왕부에서였다. 서평왕의 빈객賓客 중에는 강호의 이름난 고수가 많았는데 그들에게서 한두 수 전수하기 시작한 것이 재능을 보여 나중에는 아예 스승을 청해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사문을 밝히기를 꺼리는 듯 그가 사사한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절정에 이른 그의 성취로 볼 때 스승 역시도 굉장한 고수인 것이 분명했다.
문평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사람을 만났다. 존경받는 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 밝고 바르게 컸다. 그는 문평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런 것을 가지기에 조금도 모자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등은 양지에서만 자란 식물처럼 올곧게 곧았고, 그의 미소에선 밝은 태양의 냄새가 났다. 음지에서만 자란 자신과는 뿌리부터가 다른 인종이었다. 근본부터 너무 다른 존재여서인지 시기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있는 집안에서 곱게 자란다고 해서 다 당적형이나 포영의 같은 인간이 되지는 않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다.
그에게 흠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지나치게 눈에 띄는 미모 때문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점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인들의 시선이 특히나 열렬했는데, 얼굴이 잘난 사람들은 원래가 이런 건지 천마처럼 윤승효도 남의 시선에 무감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같이 쳐다보면 신경이 쓰일 만도 한데 정말 끝까지 모르는 척이군.’
문평은 불편한 기분으로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옷 한 벌 마련하는 일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점원을 붙잡고 한참을 떠드는 윤승효의 얼굴에는 아까부터 보기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조금 전 길에서 마주친 후 그대로 가게까지 따라온, 누가 봐도 꽃답다고 할 만한 어여쁜 소녀의 시선이었다.
윤승효의 인물이 잘났다지만 소녀 또한 어디 가서 빠질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직 어려서 태가 덜 나 그렇지 2, 3년만 지나면 천하를 울릴 미인이 될 얼굴인 데다, 어린 소녀답게 붉은 치마에 노란 상의를 입고 있어 자태가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속눈썹은 뽑아다 붓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길고, 두 뺨은 상아와 같고, 도톰한 입술은 붉고 매끄러워서 잘 익은 앵두 같다. 귀한 집 아가씨인 듯 산호로 장식된 목걸이와 옥 팔찌를 찼는데 그 모습조차도 요란하지 않고 기품 있었다.
저런 아가씨가 어째서 뒤에 붙인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고 있는 행색으로 봐서는 혼자 장에 나올 집안의 아가씨가 도저히 아닌데 말이다.
‘저러다 아예 울겠네. 윤 형은 어떻게 저렇게 무심할 수 있지?’
처음 윤승효를 보았을 때부터 깜짝 놀랐던 아가씨였다. 낯선 남자를 보고 반해서가 아니라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게 만나 드러내는 놀라움.
그녀는 반가운 듯 활짝 웃었고 윤승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윤승효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소녀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낌새조차 눈치 못 챈 것처럼 굴었다.
자신을 무시한 남자를 보고 잠시 당황하던 소녀가 이를 앙다물었다. 그녀는 치마까지 걷어 올릴 기세로 성큼성큼 윤승효의 뒤를 따랐다.
윤승효는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문평을 잡아끌었고, 포목점으로 들어가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윤승효의 동행이라는 죄로 그들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문평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녀의 참을성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나중에는 화가 나서. 소녀는 윤승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점점 더 표독해지는 시선으로 그녀는 윤승효가 자신을 돌아봐 주길 기다렸지만 그 기다림은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가 분하게 오르내렸다. 사슴 같은 커다란 눈동자에 맑은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자존심이 상해 붉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소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가가哥哥. 뭐 하시는 거예요? 어째서 소매小妹를 모르는 척하시는 거죠?”
‘헉? 가가라고?’
어린 소녀가 남자를 부르기엔 지나치게 대담한 호칭이었다.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윤승효를 돌아보았다.
그가 알기로 윤승효는 막내라 여동생이 없었다. 가가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허락하는 것이 아니니 상대가 친여동생이 아니라면 정인情人이라는 뜻일 텐데, 정인이라고 하기엔 소녀를 대하는 윤승효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옷을 내보이던 점원조차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는데, 윤승효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하고 옷을 뒤적일 뿐 소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고의로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게 역력한 태도였다.
견디지 못한 소녀가 손을 뻗어 윤승효의 소매를 잡았다. 윤승효는 그제야 소녀의 존재를 알아챈 듯 움찔하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소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소저.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윤승효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온후한 태도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따뜻한 태도는 냉담한 독설보다 더 차갑게 소녀를 상처 입혔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윤승효의 태도에 소녀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지 못하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가가?”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입니다. 소생은 소저 같은 분을 알지 못하니,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팔을 놓아 주십시오.”
윤승효는 두 눈에 난처한 빛을 떠올리면서도 자상하게 말했다. 그는 부드러운 태도로 소녀의 손아귀에서 소매를 빼내려 했지만, 소녀는 그를 놓지 않았다. 소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화조차 내지 못하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윤승효에게 매달렸다.
“무슨 소리세요, 가가? 저를 모르신다니요. 저 자慈 소매예요. 가가께서 늘 묘랑猫娘이라 부르시던 자 소매요. 제가 정말 기억이 안 나세요? 그렇지 않죠? 지금 저를 놀리려고 이러시는 거죠?”
“저는 자 소매라는 사람을 모르고, 묘랑이라는 아명兒名은 더욱 알지 못합니다. 정말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으니 이만 놓아 주십시오.”
윤승효의 말만 들어서는 소녀가 정말로 사람을 착각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녀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슴없이 자신의 옷깃을 걷어 올리고, 백옥 같은 팔에 걸고 있는 팔찌를 내보였다. 세상에 보기 드문 혈옥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팔찌는 귀중품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값진 물건이었다.
“사람을 착각하다니요. 제가 어떻게 가가를 잘못 볼 수가 있겠어요? 이것 보세요, 가가. 제가 열 살 때 이화정梨花庭에서 가가께서 제게 선물로 주었던 바로 그 팔찌예요. 똑같이 생긴 팔찌 두 개를 나눠 끼면서 약속하셨잖아요. 제가 성인이 되면 저와 함께 춘몽례春夢禮를 치러 주시겠다고요. 저는 아직도 그날의 약속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순간 입에 담는 것은 춘몽례가 아니라 혼례다. 하나 소녀는 춘몽례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언급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소녀가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이 다른 아가씨들이 혼례를 언급할 때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그와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무슨 팔찌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이화정이라는 곳도 모르고, 누군가와 춘몽례를 약속한 적도 없습니다. 의심스러우시면 직접 확인해 보시죠. 제가 팔찌를 끼고 있습니까?”
어린 소녀가 남의 가게 안에서 옷깃을 걷어 자기 팔을 내보였다. 여인이 사내의 앞에서 속살을 내보인다는 것은 어지간한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소녀는 아직 시집도 안 간 청백지신의 몸으로 이런 짓을 했다.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행동도 윤승효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윤승효는 소녀의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지, 자신도 소매를 걷어 보였다. 소녀가 말한 팔찌 같은 것은 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다.
그가 팔을 걷자 매끈한 팔이 드러났다. 남자의 팔인지라 소녀보다 굵고 단단하긴 했지만, 윤기가 흐르는 흰 피부는 소녀의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그 팔엔 팔찌가 없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윤승효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그 큰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후드득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팔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소녀가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속삭였다.
“팔찌를 어떻게 하신 거예요? 왜 안 끼고 계세요? 약속하셨잖아요. 늘 끼고 있으시겠다고. 설사 잘 때도 그것을 벗지 않으시겠다고요. 마치 소매처럼 여기고 곁에 두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늘 같이 있는 거라고……. 떨어져 있어도 헤어진 게 아니라고. ……그런데 그 팔찌를 어떻게 빼놓으실 수가 있으세요?”
그녀의 작은 어깨가 애처롭게 떨렸다. 소녀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생각도 못 하고 망연히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이런 유의 소란은 언제나 구경꾼을 불러 모으기 마련인지라, 어느새 그들의 다툼은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포목점 안의 다른 손님들도, 지나가던 사람들도, 심지어는 다른 가게의 주인들마저도 모두 그들을 주목했다.
보통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면 여자는 동정받고 남자는 욕을 먹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구경꾼들은 일반적인 상황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모조리 팽개치고 사람 많은 대로에서 울고 있는 소녀를 동정의 눈길로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승효를 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소녀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녀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선하게 생긴 윤승효가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소녀에게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독심장부라도 어여쁜 소녀가 이토록 매달리면 흔들리게 마련일 텐데, 윤승효는 초지일관 그녀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냉담하게 뿌리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도저히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는 여길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말이다.
윤승효가 보기 드문 인격자라는 것은 알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문평은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어 긴가민가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만 그 표정을 윤승효에게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다.
문평마저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윤승효가 난처하게 웃었다. 그 입매에 진하게 배인 씁쓸함의 흔적에, 문평은 왠지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소저의 사정이 어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이렇게 괴로워하실 만큼 딱한 사정이 있으신 거겠지요. 하지만 소저가 찾으시는 분은 정말로 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윤승효는 소녀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조곤조곤하게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그러나 윤승효가 끝까지 그러는 것처럼, 소녀 역시도 완강히 윤승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녕 소매를 잊으신 건가요? 그 아름다웠던 언약의 날로부터 고작 2년의 세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기다려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보다 더한 세월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를 잊지 않는다고 말해 주셨으면서. 그 사이에 저를 벌써 잊으셨단 말인가요?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단 말인가요?”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소녀가 중얼거렸다. 딱히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소녀는 비감 어린 표정으로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윤승효는 비 맞은 난초처럼 처연한 그녀를 한숨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전 잊을 수 없어요. 그때의 약속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춘몽례의 대상은 오로지 가가뿐입니다. 가가께서 아무리 제게 정이 떨어지셨다 하더라도 그 약속만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생은 누구와도 그러한 일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모르신다면 아시게 될 겁니다. 설사 잊으셨다 하더라도 다시 깨우쳐 드리죠. 저희에게 춘몽례의 언약은 신성한 것. 바깥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혼례조차도 저희의 춘몽례만큼 중요하진 않습니다.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가가.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소녀는 젖은 눈을 닦으며 생긋 웃었다. 눈물에 잔뜩 젖은 배꽃 같은 얼굴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보였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두 눈엔 생생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을 모두 끌어모아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윤승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녀가 자리를 완전히 떠난 후에도 그의 근심 어린 표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녀와 윤승효가 한 편의 경극을 연출하고 있는 동안, 구경꾼으로 소외되어 있던 문평이 주춤주춤 윤승효에게 다가왔다. 윤승효는 멋쩍은 듯 미간을 문지르며 문평을 돌아보았다.
“이것 참. 엉뚱한 오해를 사고 말았군요.”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며, 윤승효는 소탈하게 웃었다. 문평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끝까지 오해라고 하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저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밖에.
“많이 닮았나 보지요. 정인이었던 사람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가끔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얼굴을 닮은 사람이라고요? 그것참 흔치 않은 경우인데요. 솔직히 말해 제 외모가 독특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은 세상에 소생밖에 없을 거라고 자위하고 살았는데요. 정말 그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어지는데요. 저와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합니다.”
아까 믿는다는 표현을 해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입에 발린 말을 내뱉었더니, 윤승효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말대로 윤승효의 인물은 쉽게 남으로 착각 당할 만한 외모가 아니긴 했다. 어지간한 여인들보다 더 선이 고운 얼굴인 데다, 온화하고 선한 생김새에 눈동자까지 파래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조각품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과 닮은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이 넓은 중원에서도 어려운 일일 게 분명하다. 문평이 윤승효를 쉽게 믿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 사람이랑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어? 하는 의문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데 관 형은 어떤 색깔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까? 체격이 있으니만큼 아무래도 푸른색 쪽이 더 낫겠지요? 흰색은 너무 유약해 보일 테고, 붉은색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역시 푸른색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관 형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무섭도록 기분 전환이 빠른 윤승효는 금세 소녀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리고 본래의 목적에 몰두했다.
그는 태연하게 옷감을 꺼내 문평의 어깨에 대보더니 거기에 품평까지 곁들였다. 일이 벌어진 가게를 아직 떠나지도 않았던 데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지켜본 점원이며 손님들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보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윤승효는 그들에게 몰리고 있는 시선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외모만 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남자에게는 정말로 무신경한 데가 있었다. 진짜로 무신경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모르겠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곁에 있는 문평은 몹시도 괴로웠다.
‘하긴. 이런 면이 있으니까 이 사람의 별호에 ‘괴怪’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것이겠지. 언제 별호가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것을 봤어? 사람을 기인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차마 다른 데로 가자고 말은 못 하고, 문평은 소심하게 투덜거리며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옷감을 잡았다. 팔자에도 없는 일이어서일까. 비단옷 한 벌 얻어 입기가 너무 힘들었다.
***
세상엔 인피면구人皮面具라는 말이 있다.
인피면구란 강호야담을 다루는 책에 자주 등장해 이야기를 즐기는 일반 백성들이 강호에 실존하고 있다고 믿는 기물奇物이다. 이야기책에 따르면 그 물건은 끔찍하게도 사람을 죽이고 그 피부 가죽을 벗겨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뒤집어쓰면 죽은 사람과 같은 얼굴이 되어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진짜 강호인에게 인피면구에 관해서 묻는다면, 그 강호인은 분명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질문을 던진 사람을 바보 취급할 것이다. 차라리 사람 손톱을 먹고 쥐가 둔갑한다는 걸 믿지, 바보같이 인피면구 같은 허황한 이야길 믿느냐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을 익힌 강호인이란 의원 다음으로 인간의 몸에 대해 해박한 자들인지라, 인간의 몸이 단지 가죽 한 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에는 뼈가 있고, 뼈 사이를 채우는 오장육부가 있으며, 그 위를 덮는 근육이 있다. 인간의 안면도 예외는 아니라서, 사람의 얼굴을 훔치려면 단지 가죽뿐만이 아니라 그 아래의 근육과 골격까지도 모조리 훔쳐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이 강호상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역용술易容術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불리는 수많은 기술 중에는 축골공縮骨功3)과 같은 본격적인 무공도 있고, 환혼소幻魂笑와 같은 미혹술도 있으며, 약물과 화장술을 사용하는 보다 발전된 종류의 분장술도 있다.
강호를 굴러다니다 보면 되도록 아는 게 많은 게 좋은지라, 이것저것 잡다하게 배워 둔 것이 많은 문평도 가벼운 역용술 몇 개 정도는 알고 있다. 고수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정교한 솜씨는 못 되어서 지레 포기하고 다니지만, 무공을 모르는 백성들을 속이는 것 정도는 문제없는 수준의 기술이다.
“잠시 동안은 얼굴이 간지러울 겁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마세요. 잘못 움직이면 틀을 만든 점토가 어긋나서 얼굴이 이상하게 삐뚤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평이 알고 있는 가벼운 수법 따윈 윤승효가 가진 수법에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재주를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승효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사람을 바꾸는 분장을 할 줄 알았다. 비록 특수한 약물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완성된 결과가 너무나 정교해서 과정에 대한 불만을 다 잊을 만큼 뛰어난 기술이었다.
“얼굴 찡그리지 말라니까요!”
윤승효는 따끔하게 경고하며 손을 움직였다. 그는 문평의 얼굴 위에 근육을 뻣뻣하게 하는 특수한 약물을 바르고, 그 위에 점토를 붙여 전체적인 골격을 바꿨다. 점토가 마르고 나자 아교를 바르고 정교하게 만든 돼지가죽을 뒤집어씌웠다.
미리 약품으로 손질해 둔 돼지가죽은 꼭 사람 피부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눈썹을 만든 것은 말총이었고, 새파랗게 죽은 안색을 감추기 위해 간단한 화장도 했다. 그랬더니 약간 야비해 보이는 40대의 남자 얼굴이 만들어졌다. 왼뺨에 희미하게 칼자국이 있고, 입매와 눈매가 험악한 사내. 윤승효가 뒤집어쓴 마르고 신경질적인 생김새의 사내와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문평은 그 얼굴을 하고, 새로 산 푸른색 비단옷을 입었다. 윤승효도 평소에 입던 백의를 벗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검은색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 윤승효가 허리띠를 졸라매자 등판에 수놓아진 황금색 잉어가 파도 속에서 춤을 추었다.
원래도 호리호리한 체구인데 몸에 딱 맞는 흑의를 입자 더욱 왜소해 보인다. 바싹 마른 얼굴에 눈만 흉흉한 게, 딱 봐도 도적 같은 행색을 한 윤승효는 가죽으로 된 수투까지 끼고 창문을 열었다. 이 꼴을 하고 정문으로 나갈 수 없으니 창문을 통해 움직이려는 속셈이다.
“일단 지붕으로 올라갔다 서쪽으로 가지요. 그쪽에 사혈회蛇血會의 본거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윤승효는 창틀을 밟고 가볍게 날아올라 지붕 위로 올라섰다. 공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듯 매끄럽게 솟아오르는 상승의 신법이다.
문평 또한 경공이라면 그에 못지않았지만, 일부러 둔하게 움직여 윤승효의 눈을 속였다. 그의 신법은 만씨 노인네 때문에 은근히 많이 알려진 신법이라 자칫하면 정체를 들키기 쉬웠다. 이름조차 거짓으로 말하고 있는데 정체가 알려져서는 안 되기에 문평은 조심 또 조심하며 자신의 실력을 가리려고 애썼다.
“이쪽입니다.”
윤승효가 전음을 보낸 후 지붕을 타고 달려갔다. 마른 기왓장을 밟고 있는데도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문평은 조금 덜그럭거리며 그를 따라간 후 어렵게 골목길에 착지했다. 윤승효는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들이 목표로 잡은 곳은 개양開陽의 밤거리를 휘어잡고 있다는 흑사회, 사혈회의 본거지였다.
여타의 흑사회가 그렇듯이 사혈회의 본거지는 도박장이다. 겉으로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골목의 깊숙한 안쪽. 모르는 사람이라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도록 위장한 안가의 대문을 열면, 양 소매를 찢고 우람한 이두박근을 드러낸 거한들이 문지기를 서고 있는 도박장의 입구가 드러난다.
원래 흑사회가 운영하는 도박장엔 관의 끄나풀이 드나들 염려가 있어 뜨내기손님은 잘 받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윤승효는 어떻게 했는지, 그들과 통하는 암구호를 알아내 그들이 스스로 문을 열도록 만들었다.
윤승효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 윤승효의 등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문평은 가슴에 품은 칼을 슬쩍 들어 보이고는 묵묵히 그를 따라갔다.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연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앞이 뿌열 정도로 연기가 가득한 도박장 안에는 수많은 도박사가 모여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운을 시험하고 있었다.
시시하게 마작 같은 놀이를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투계鬪鷄로 돈내기를 했고, 다른 쪽에서는 골패骨牌를 쪼거나 투전鬪錢을 하는 이도 있었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2층으로 가는 계단도 있었는데,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윤승효가 향한 곳은 바로 그 2층의 계단 쪽이었다.
“잠깐. 못 보던 얼굴인데.”
도박장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계단참에도 번을 서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바깥에 있는 자들만큼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그들보다 한층 예리한 기세가 살아 있는 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더니 윤승효의 앞을 막았다.
윤승효는 자신의 앞을 막은 사내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바짝 마른 얼굴에 한 줄기 주름이 잡히자,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인상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육 대인六大人의 소개로 왔다. 이곳에 오면 재미를 보고 갈 수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 내가 잘못 온 건가?”
윤승호가 목구멍 한쪽이 긁힌 것처럼 칼칼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가래가 낀 것처럼 가르랑거려 듣기에 매우 거북한 목소리다. 번을 서던 자는 목소리보다 말의 내용에 더 긴장한 듯 등허리를 뻣뻣하게 굳혔다. 그의 태도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육 대인이시라면?”
“금사金沙의 육대가 말이다.”
“아, 육대가의 소개로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이쪽으로 올라오십시오. 육대가의 손님이시면 저희에게도 언제나 손님입니다.”
육대가라는 이름이 뒷골목에서는 꽤 먹히는 이름인 듯, 번을 서던 사내는 자세까지 달리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귀찮다는 듯 손을 저은 윤승효가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 저녁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등 뒤에 서 있기만 하라는 명을 받은 문평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 그의 뒤를 따랐다.
2층으로 올라가니 그나마 공기가 좀 맑아졌다. 다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1층과는 달리 의자와 탁자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고, 바닥도 깨끗한 데다가 음식 냄새도 간간이 났다.
탁자 앞에 둘러앉은 패거리의 옷차림도 1층보다 나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신분이라는 게 대놓고 드러나던 1층의 손님들과 달리 2층 사람들은 깨끗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부유한 자들이었다.
“어서 오시오. 잘 오셨소.”
번을 서던 사내가 위쪽으로 무슨 신호를 보냈는지,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그들을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2층에서도 가장 큰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사내였는데, 그 자리에서도 가장 상석에 앉은 채 주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바로 사혈회의 회주인 북견北犬 공야욱公倻勖임을 알 수 있었다.
“육대가의 소개를 받고 오신 분이라고 하셨소?”
사내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로 윤승효에게 물었다. 윤승효는 서늘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그렇소.”
“그럼 금사현을 다녀오시는 길인 게로군.”
“금사현에서 오는 길이 맞소. 한데 그건 왜 물으시오.”
집주인은 다정하게 묻는데 객의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집주인의 기분은 쉽게 상하지 않았다.
“내가 요즘 개양의 일에 바빠, 한동안 육대가를 찾아뵙지 못하였기에 안부나 물으려고 그러는 거요. 아무리 사는 게 바빠도 사람에게는 도리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이 모자란 동생은 육대가 형님과 오대가 형님을 뵌 지 너무도 오래됐다오. 혹시 형장께서는 이번 금사행에 오대가 형님도 만나 뵈셨소? 형님께서는 평안하시오?”
사내는 번듯한 얼굴에 제법 호감 가는 미소를 머금으며 윤승효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이 육대가의 왼손이 오른손과 같은 모양이 된 거냐는 뜻이라면 아니라고 하겠소. 육대가의 왼손은 여전히 손가락이 여섯 개요. 그분은 그 점을 부끄러워하시지도 않으니 아마도 평생 그렇게 사실 것 같소.”
그는 특유의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북견의 질문에 답했다. 거의 빈정거리는 거나 다름없는 어투였는데도 불구하고, 공야욱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윤승효에게 말했다.
“알았소. 됐으니 앉으시오. 가끔씩 육대가의 이름을 빌려 도박장을 드나드는 뜨내기가 있어 내 한번 시험해 본 것이오. 육대가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보고도 살아남은 분이면 내게도 남은 아니지. 이왕 왔으니 재미있게 놀다 가시오. 최대한의 편의를 보증하겠소.”
공야욱은 짐짓 호탕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자신의 탁자로 초대했다. 윤승효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문평은 예리한 눈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사내들을 살펴보았다.
단단하게 단련된 몸을 드러낸 사내들이 탁자 곁에 서 있었지만, 문평의 눈에 그들 정도의 실력은 차지도 않았다. 진짜 고수는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 앉아 있는 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들을 부른 사내는 흑사회의 일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강한 무공을 갖고 있었다.
‘저 사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류 수준이군. 내공을 제대로 배운 것 같지는 않고, 대부분이 외공. ……한데 저자는 내력이 의심스러운걸. 흑사회 출신이 내공을 익히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야. 그것도 썩 정순한 심법이라. 대문파에서 흘러나온 비급이라도 익힌 건가? 아니면 파문 제자?’
하수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같은 하수다. 그중에서도 문평처럼 온갖 종류의 하수를 다 보고 다닌 사람의 눈썰미는 웬만한 고수보다도 매섭다. 그가 파악해 보니 이 자리에서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단 한 명, 내공을 익힌 사내뿐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문평에겐 문제가 되는데 윤승효에겐 어떤지 모르겠다. 절정의 고수라 소문이 짜한 인물이니 상대도 안 될 건지, 아니면 경험이 모자라 뜻밖의 장면에서 손해를 볼 것인지. 윤승효와 같이 다니면서도 정작 그가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없는 문평은 그의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오. 광동廣東의 염가요.”
냉랭하게 포권한 윤승효가 그들이 내주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들은 아패牙牌를 사용해 골패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판이 돌아간 끝인지 패를 다시 섞고 있는 중이었다. 윤승효는 접시에 담긴 감초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자에 마주 앉았던 나머지 두 사람이 눈인사를 건네 왔다.
“무엇으로 놀고 있소?”
“인원이 모자라 꼬리 붙이기나 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찼으니 포飽를 해도 되겠군.”
그것으로 도박의 종목은 포로 결정 났다. 패를 떼서 물주物主를 정하니 공교롭게도 이 자리의 주인인 사혈회주 공야욱이 되었다.
공야욱은 패를 아패의 다섯 쪽을 떼 각자의 앞에 놓고, 다시 두 쪽을 떼어 낸 후 그중 하나의 패를 뒤집었다. 좌左가 나왔다. 패를 옆 사람에게 돌리는 일 없이 도박이 시작되었다.
“염 형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요?”
자기에게 필요 없는 패를 버리고 새 패를 받으며, 공야욱이 윤승효에게 물었다. 미간을 접으며 패를 노려보고 있던 윤승효가 칼칼한 어투로 대답했다.
“염왕채閻王債를 놓소.”
염왕채는 흑사회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으로 고리대금업을 말한다. 공야욱은 다른 사람들이 각각 패를 버리거나 줍는 광경을 구경하며 계속해서 물었다.
“그리고?”
“돈 되는 건 거의 다 하지. 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재미를 봤던 건 밑천 안 드는 장사였소. 그 장사가 언제나 짭짤했는데, 요즘엔 통 신통치가 않소.”
“밑천 안 드는 장사야 늘 성황인데 어째서 그렇소?”
“쓸 만한 계집아이가 동이 났소. 어느 놈이 그랬는지 남의 구역까지 와서 싹쓸이했더군. 그놈들의 발이 어찌나 넓은지 내가 있는 양산陽山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네들도 마찬가지였소. 알고 보니 광동성 전체에 그 사달이 난 모양이더군.”
밑천 안 드는 장사란 쉽게 말해 인신매매다. 따로 들이는 품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업어 오면 그만인 장사니 흑사회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쉬운 장사도 없는 셈이다.
윤승효의 말을 들은 사내들 중에 한 명이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해 왔다. 윤승효 못지않게 마른 몸에 눈이 길게 찢어진, 전형적인 쥐 상의 사내였다. 웃긴 것은 그가 성까지 서舒가라는 점이다.
“광동뿐만이 아니라 우리 귀주도 마찬가지요. 내가 하는 가게는 어린 계집을 전문으로 다루는데, 괜찮은 물건이 없어서 문을 닫을 판이라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은 없다는 듯 쥐 상의 사내가 푸념했다. 그가 한탄하자 그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타박을 주었다. 푸짐하게 살이 올라 턱이 두 개로 보이는 그 남자는 좋은 패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투덜투덜 입을 놀렸다.
“이 사람아. 자네 상황이 염 형이랑 같은가? 자네 가게에 새 물건이 안 들어오는 건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가장訴家莊 때문이잖나.”
“소가장?”
무심한 표정으로 자기 손에 들어온 패를 바꾸며 윤승효가 물었다. 쥐 상의 사내가 윤승효의 질문을 듣고 불만스럽게 코를 울렸다.
“있소. 그런 위선자들이. 자기네 장원에다 구빈원救貧院인지 뭔지를 차려 놓고 거지새끼들을 끌어다 모으는 자들이지. 그네들이 단지 그 짓만 하면 그래도 참을 만한데, 문제는 이자들이 빚 때문에 팔릴 예정인 애들까지 돈을 주고 사 간다는 거요. 우리한테 파나 그 집에다 파나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텐데, 돈 때문에 애를 판다는 것들은 죄 그 집으로 몰려간단 말이거든. 그러니 우리 집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있겠소?”
“이 사람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자네 가게에 팔리게 되는 거랑 소가장으로 가는 거랑 어떻게 처지가 같나? 자네 가게에 가면 어린 나이에 몸 망치고, 그 집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며 공부까지 시킨다던데?”
투실투실한 사내는 아무래도 쥐 상 사내와 앙숙인 모양이다. 아편굴을 운영한다는 그는 인신매매 자체에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순전히 쥐 상 사내의 심기를 긁기 위해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상한 판에 투실투실한 사내까지 비위를 긁자 쥐 상 사내가 왈칵 성질을 부렸다. 그는 상도의를 어기는 옆 가게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선량한 상인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좌중에 하소연했다.
“다르긴 뭐가 달라. 내가 전에 이야기했잖아. 소가장인지 소가지인지 하는 거기에서도 사실은 애들 장사를 한다니까? 내가 2년 전부터 탐내던 여진이 있지? 바깥 골목통에서 등짐 지는 하가네 딸. 그 계집애가 소가장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어떻게 됐나 확인해 봤는데, 겨우 두 달밖에 안 돼서 그 계집애가 사라졌더란 말이야. 한데 사라진 건 그 계집애뿐만이 아니야. 춘희 년도 없고, 수경이 년도 없고. 좀 괜찮다 싶은 것들은 다 사라지고 없더라고. 어디로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팔려 간 게 분명해. 그걸 알고 내가 어찌나 아깝던지. 고것들 이제 겨우 열 살이라 내가 데리고 있었으면 장사 밑천이 톡톡히 됐을 거야. 족히 몇 년은 뽑아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올해 열 살이라면 2년 전엔 고작 여덟 살이었을 거다. 그런 어린애를 창기로 만들려고 몇 년이나 눈독 들이고 있었다고?
문평은 진득하게 차오르는 불쾌함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누구 못지않게 험한 꼴 많이 보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문평이지만, 살다 살다 이런 더러운 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중원에서는 삼두육비 괴물 취급하는 천산의 마인들도 저렇게 파렴치한 소리는 안 한다. 천하에 쓸모없는 것들. 천인공노할 놈들이란 저런 자들에게 내뱉기 위해 만들어진 말인 것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패나 뒤집읍시다. 우선 돈부터 걸어야 할 텐데 얼마 거시겠소?”
윤승효가 감초를 질겅질겅 씹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소가장에게 빼앗겨 버린 장사 밑천을 아쉬워하던 쥐 상 사내가 자기 패를 얼른 들여다보았다. 공야욱도 자기 패를 심각한 인상으로 내려다봤다. 윤승효는 품 안에서 주머니를 통째로 꺼내 탁자 위에 집어 던졌다. 은자가 가득한 비단 주머니가 탁자 위에 올라오자 좌르륵 돈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은원보銀元寶 하나를 걸지.”
“나도 은원보 하나.”
“나는 가진 게 은자밖에 없으니 은자로 오십 냥을 걸지. 그래도 상관없겠소?”
“오늘 저녁에 관 형은 아무 말도 하시면 안 됩니다. 그저 말없이 제 등 뒤에 서 있기만 하세요. 그래 주기만 하셔도 제 역할을 충분히 다 하시는 겁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평은 돈을 거는 윤승효의 목소리를 듣고서, 오늘 저녁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승효 역시 저 인간 말종들이 좋아서 마주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저 쓰레기들과 어울리며 도박까지 하고 있는 건, 그들에게 얻어내야 할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문평은 그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 실패한다면 내일은 다른 장소로 이동해 또 똑같은 짓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
옷깃에서 아직도 불쾌한 냄새가 났다. 찌들 대로 찌든 연초 연기와 눌어붙은 땀내, 통풍이 제대로 안 되는 건물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새로 지은 비단옷에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냄새에 예민한 사람이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밤이 늦었는데 수욕물을 청하면 받아 줄까?’
문평은 몸에 달라붙은 역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안 받아 주겠지?
“제 방에 잠깐 들렀다 가십시오. 역용한 것은 떼어 내야 주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도박장을 나온 이후부터 줄곧 말이 없던 윤승효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조용히 그를 배려하고 있던 문평은, 그들이 머무는 객잔의 지붕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말문을 여는 윤승효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행이네요. 피곤하다고 안 떼어 주시면 어쩌나 고민했습니다. 아까부터 코가 간질거리고 있었거든요.”
긁고 싶은데 점토 때문에 손이 안 닿았다고, 문평은 멋쩍게 웃으며 고백했다. 윤승효는 하하하, 하고 짧게 웃었다.
줄곧 목이 긁힌 사람 같은 목소리만 듣다가 본래 목소리를 들으니 답답하던 귀가 확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평은 내심 신기하게 생각하며 윤승효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목소리까지 청량하네.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목소리에서도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가?’
사람이란 참 단순한 게, 한번 괜찮아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문평의 눈에는 윤승효가 그랬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구명지은을 입은 자의 콩깍지가 틀림없었다.
윤승효는 먼저 자신의 역용을 지우고, 문평의 얼굴도 손대기 시작했다. 분장은 덧씌울 때와 마찬가지로 벗을 때도 긴 시간과 인내를 요했다.
우선 얼굴에 붙인 가죽의 가장자리를 따라 기름을 바른 후 손으로 잘 문질러서 가죽의 끝부분을 벗겼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가죽은 점토와 아교로 붙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벗겨 내려면 가죽과 점토를 한꺼번에 벗겨야 한다. 그런데 점토는 피부와도 붙어 있으므로 떼어 내는 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윤승효는 내공을 일으켜 손에 온기를 주입한 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문평의 얼굴을 만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교가 열기로 인해 녹으면서 점토와 붙어 있던 부분이 느슨해졌다. 말라 있던 점토도 아교의 습기와 열 때문에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한다. 얼굴을 뒤덮은 가면에 전체적으로 열이 오르자 꼭 따뜻한 진흙을 얼굴에 바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적당히 점토가 부드러워지자 마지막 작업이 시작되었다. 윤승효는 섬세하게 손을 움직여 문평의 얼굴 위에서 분장을 걷어 냈다. 내내 얼굴을 덮고 있던 무거운 것이 사라지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푸하.”
얼굴에 와 닿는 공기까지 차고 맛있다. 공기가 너무 달아서 문평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분장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잘 알고 있는 윤승효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문평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제 좀 살 것 같죠?”
가면처럼 모양대로 떨어진 분장을 둘둘 말아 치우며 윤승효가 문평에게 물었다. 문평은 내내 간지러웠던 코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제야 살 것 같군요. 오늘의 경험이 아니었으면, 피부로도 숨을 쉰다는 걸 평생 몰랐을 겁니다.”
“하하하. 얼굴이 아주 멋진데요. 얼굴 전체에 분을 펴 바른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손톱 밑에 점토가 묻어나네요. 세수해야겠습니다.”
수욕은 못 해도 세수는 하고 자야겠다. 점토 밑에서 흐르던 땀과 점토가 섞여 얼굴 전체에 흙물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문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승효가 만류했다. 그는 자기가 먼저 나서 방문을 열며 문평에게 말했다.
“앉아 계세요. 제가 물을 받아 올 테니까.”
“괜찮습니다, 윤 형. 윤 형보다는 제가 가는 게…….”
“관 형보다는 제가 더 잘 먹힐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여인들에게 인기가 좀 있는 편이거든요.”
윤승효는 짓궂게 말하며 방을 나섰다. 그가 재빨리 방을 나가 버리는 바람에 문평은 순서를 놓쳤다.
엉거주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문평은 허탈하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귀한 태생의 사람이 참 소탈하기도 하다. 윤승효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부탁하는 일이 없었다.
만약 천마가 여기에 있었다면 그는 완전히 종이었을 거다. 아니 천마가 아니라 마중사기였다고 하더라도 온갖 부림을 당하며 시중을 들었어야 했을 거다. 한데 윤승효는 달랐다. 도움을 주는 입장임에도 내세우는 법이 없었고, 작은 일 하나에도 상대를 먼저 배려했다. 진짜 명가의 후손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안하무인에 유아독존, 자기 목표를 위해서라면 아랫사람을 어떻게 쥐어짜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들과 윤승효는 분명 달랐다.
윤승효가 직접 물을 가지러 갔는데 가만히 앉아서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문평은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방을 치워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분장을 위해 쓰던 도구들이 널려 있는 것을 가지런히 치우고, 윤승효가 벗어 던진 흑의를 곱게 갰다. 다시 봐도 금실로 수놓은 잉어는 깬다. 대저 흑사회 놈들이란 미적 감각이 왜 이 모양일까?
문평은 낮게 혀를 차며 탁자 위에 옷을 올려놓았다. 그들이 방을 비운 동안 점소이가 다녀갔는지 다탁 위엔 차가 담긴 새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아까 방을 나가기 전에 비우고 나갔던 것 같은데 부지런하기도 했다.
마침 목이 마르기도 한 터여서 문평은 차를 한 잔 따라 쭉 들이켰다. 잎 차가 아니라 꽃 차인지 진한 향기가 느껴졌다. 단지 한 모금 머금었을 뿐인데도 확 하니 밀려오는 농도 짙은 향에 머리가 어질해질 지경이었다.
향이 너무 짙어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입술을 닦은 문평은 잔을 내려놓고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어째 휘청하는 느낌이 든다.
문평은 방 안의 사물이 이지러지는 걸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피부가 따끔따끔해지면서, 불이라도 붙은 듯 갑작스레 더워졌다. 문평은 당황해 목을 누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독이구나.’
그제야 문평은 자신이 먹은 차의 정체를 눈치챘다. 가물가물해지는 그의 눈앞에서 당적형의 표독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들. 명색이 명문 정파라면서 암습을 가해? 곱게 나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살수 같은 짓까지 저지르다니 당문의 이름이 울겠다!’
내공을 일으켜 독을 밀어내려고 해봤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는다. 망할 자식들이 독과 함께 산공분도 쓴 모양이다.
‘이렇게 죽을 순 없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그렇게 악을 쓰고 살아남으려고 했는데, 너무나 허망하다고 생각하며 문평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어버린 몸이 마치 포대처럼 거칠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머나, 씨팔.”
줄곧 바닥에다 귀를 대고 옆방을 염탐한 소득이 있었다. 드디어 쿵 하고 사람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혔구나 싶어 희색이 만면해진 자묘랑은 얼른 방을 나와 윤승효의 방으로 건너왔다.
한데 막상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니, 이 인간은 그가 원했던 상대가 아니었다.
‘젠장. 실패했다.’
자묘랑은 기대로 부풀어 오르던 가슴이 푸시식 꺼지는 것을 느끼며 허탈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원통하게도 묘랑이 쳐 놓은 덫에 걸려든 남자는 원래 목표였던 윤 가가가 아니라 그 사람 옆에 있던 낯선 사내였다. 윤 가가의 동행인지 호위인지 모를 이자는, 그러고 보면 포목점에서 윤 가가와 실랑이를 벌일 때도 곁에 있었던 것 같다.
‘왜 먹으라는 사람이 안 먹고 네가 먹었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꼬인 것을 깨달은 자묘랑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한탄했다. 설마하니 그 차를 윤 가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늦은 밤중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윤 가가의 방에 들를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진짜, 병신 같은 게!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새치기를 하고 그래? 네가 먼저 처먹고 나자빠지면 우리 윤 가가가 의심하잖아. 우리 윤 가가가 얼마나 약삭빠르고 잔머리도 잘 굴리는 인간인데, 일을 이렇게 만들어? 방심하게 만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경계심만 부추기게 생겼으니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윤 가가를 못 자빠트리게 되면 책임질 거야??”
묘랑의 조그만 입에서 쉴 새 없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낮에 포목점에서의 모습은 그렇게 청순하고 가련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모두 내숭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그때보다는 앙칼지고 매서운 지금의 모습이 더 본색 같다.
누군지 몰라도 묘랑의 아명을 지어 준 사람은 자묘랑의 본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자묘랑은 정말로 성난 고양이 같았다.
자묘랑의 패악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조그마한 꽃신에 감싸인 발로 퍽퍽 걷어차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길질에 내공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심보가 못돼먹었어도 그게 도를 넘는 짓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다.
“으, 으음.”
묘랑의 발길질이 몸에 와 꽂히자, 정신을 잃은 문평이 신음을 흘렸다. 차를 마신 후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가뜩이나 엉망이던 얼굴이 얼룩덜룩해졌다.
“아이참. 이걸 어쩌지. 계속 여기 놔두면 진짜로 윤 가가가 알아채고 말 텐데. 옆방에다 옮겨 놓을까? 자는 척 이불을 덮어 놓으면 모르지 않을까? 이 멍청이 때문에 오늘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아무리 윤 가가라도 지금은 방심하고 있을 거란 말이야.”
당연히 방심하고 있을 거다. 오전에 그런 식으로 울면서 간 사람이, 오후가 되자마자 마음을 수습하고 오기를 불태우며 되돌아왔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할 테니까.
역시 한 번 더 시도해봐야겠다. 이렇게 맥없이 물러날 순 없다고 생각한 자묘랑이 빠르게 결심을 굳혔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시행착오가 없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윤 가가가 돌아오기 전에 이 사람은 얼른 치우고, 다시 한번 기다려 보자. 차를 좋아하시는 분이니 자기 전에도 틀림없이 차를 맛보실 것이다. 한 잔이든 한 모금이든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일은 일사천리일 테고 말이다.
자묘랑은 쓰러진 사내의 어깨를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따끈따끈하다 못해 뜨끈뜨끈할 정도로 달아오른 몸이 무겁게 축 처졌다. 방심하듯 열린 입술에서 색색거리는 뜨거운 숨소리가 흘렀다. 숨이 가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가볍게 뒤척이는 사내에게서는, 기이할 정도로 묘한 색향이 묻어나고 있었다.
“남의 방에서 지금 뭐 하는 거지?”
막 문평의 몸을 끌고 창을 넘으려는데,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을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자묘랑이 화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방으로 돌아왔는지 문간에는 윤승효가 서 있었다. 왠지는 몰라도 세숫대야를 들고 있는 데다 어깨에는 마른 수건까지 얹은 허술한 차림새였지만, 자묘랑에게는 그런 윤승효의 모습이 꼭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아, 아니 저. 나, 나는…….”
묘랑은 뭐라도 변명을 해야겠다 싶은 마음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마음만 급할 뿐 제대로 된 변명이 나와 주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의미가 있는 문장은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더듬거리고 있는 묘랑을 바라보던 윤승효가 픽 하고 웃었다. 그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창틀에 발을 올리고 있는 자묘랑과 그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문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아. 아가씨는 오늘 낮까지만 하더라도 나 없으면 못 산다고 울고불고하던 그 아가씨 아닌가?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설마하니 우리 관 형을 납치하고 있는 건가?”
나른한 조롱조의 목소리가 자묘랑의 귀를 파고들었다. 자묘랑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윤승효의 눈을 피했다. 냉큼 도망가고 싶은데 발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 근육이 굳어 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아가씬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나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한데 왜 이 몸이 아니라 관 형을 납치하지? 그새 취향이 바뀐 거야 아가씨? 우리 관 형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지?”
윤승효는 한없이 선한 얼굴을 하고 짐짓 부드럽게 물었다. 그의 질문을 들은 자묘랑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두 눈이 윤승효의 눈을 똑바로 향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로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 향기는 몽중십야夢中十夜잖아? 오늘 처음 본 남자를 환희루가 자랑하는 최상급의 춘약까지 사용해 가며 붙잡고 싶었다니, 역시 한번 동하면 불같이 뜨거운 사랑을 하는 환희루 출신답군. 정 그렇게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 다만, 열흘이나 기다려 줄 수는 없으니 닷새만 놀고 와.”
태연하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간 윤승효는 다탁 위에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찻잔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았다. 한 번 맡으면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는 진한 꽃향기가 찻잔 속에 남아 있었다. 역시. 몽중십야다.
“윤 가가……. 당신이 내게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귓전이 얼얼했다. 따귀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묘랑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묘랑이 태어나서 처음 사랑해 본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을 모욕했다. 그것도 평소 자묘랑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대놓고 꼬집으면서 말이다.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아직 어린 나이. 게다가 이제 막 첫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에게서 쉽게 마음을 바꾸는 음탕한 여자 취급을 받은 자묘랑이 끝내 참지 못하고 윤승효를 노려보았다.
너무 분해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괴롭히려고 일부러 한 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거기에 당해 줄 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요. 당신은 변했어요, 윤 가가. 당신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에요.”
자묘랑은 문평을 거칠게 내팽개치며 윤승효에게 화를 냈다. 윤승효는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자묘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 나더러 어쩌라고?”
윤승효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하게 자묘랑의 원망을 받아들였다.
‘사내란, 마음이 변하면 다 저러는 것일까? 마음이 돌아선 사내는 모두 저 사람처럼 철저하게 무정한 걸까?’
사랑을 버렸으면서 미안해하지도 않는 그의 태도에 자묘랑은 다시 한번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한때는 이마를 맞대고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이 완전한 남처럼 묘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 아가씨’하고 부르던 달콤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한데, 정작 그 말을 들려줄 사람의 다정한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착각하는 게 있어요. 난 당신의 장난감이 아니야. 세상의 모든 남자가 여인들의 순정을 두고 장난치더라도, 우리 환희루에서만큼은 달라요.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버려요. 누구도 감히 우리를 갖고 놀게 내버려 두지 않아요. 당신도 거기에서 예외일 수 없어요. 우리 두 사람 중 관계를 끝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예요.”
입술을 질끈 깨문 자묘랑이 잠시 숨을 골랐다. 실은 더 이상 말하면 진짜로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당신이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날 버릴 순 없을 거예요. 날 이렇게 대한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이를 악물며 간신히 하고 싶은 말을 끝낸 자묘랑이 훌쩍 몸을 날려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돌아서는 순간까지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툭 하니 창틀에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탁자 옆에 서 있던 윤승효가 지겨운 듯 한숨을 쉬며 손짓으로 창을 닫았다. 탁. 탁. 허공섭물虛空攝物로 열려 있던 창이 닫히고, 저절로 고리도 걸렸다.
그는 창문 아래로 길게 쓰러져 있는 문평에게 느릿느릿 다가가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꼭 흙장난하다 집에 들어온 아이처럼 엉망으로 얼룩진 얼굴이 보였다. 이마는 발갛게 익어 있고, 속눈썹은 모진 꿈을 꾸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떨렸다. 자묘랑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약이 온몸으로 퍼졌는지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귀찮게 됐군.’
속으로 낮게 혀를 찬 윤승효가 맥을 잡았다. 일단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내기를 이용해 몸 밖으로 몰아내야겠다.
윤승효는 가늘게 뽑아낸 내기를 이용해 문평의 몸속을 살폈다. 혈행血行이 끓어오르듯 격렬했다. 용암이 흐르는 것 같은 기세로 거침없이 피가 온몸을 휘돌고 있다. 다리 사이에 잠들어 있어야 할 물건 또한 뿌듯하게 기지개를 켠다. 이런 상태에서 잃었던 정신을 되찾게 되면, 문평은 문자 그대로 발정 난 짐승이 되고 말 터였다.
“주워 먹을 게 따로 있지. 병신같이 이딴 걸 주워 먹어?”
윤승효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내기로 소주천小周天을 시도했다. 임맥任脈으로 흐르기 시작한 내기가 승장承奬을 지나 백회혈百會穴로 갔다. 화기가 몰려 위태로운 그곳을 내기로 슬쩍 흩어주고 다시 독맥督脈 쪽으로 길을 잡는다.
약이 효과가 좋긴 좋았는지 온몸에 화기가 들끓었다. 이 상태에서 채양보음採陽補陰이라도 당했으면 속절없이 쪽쪽 빨려 버리고 말았을 거다.
‘음? 이건?’
그래도 이 정도면 쉽게 치료할 수 있겠다. 약 기운 정도만 뽑아내면 되겠네.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던 윤승효의 눈에서 순간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때를 같이 해, 문평의 몸이 크게 요동을 치며 그 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더욱 강해졌다.
괴로운 신음이 정신을 잃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고통을 참지 못한 듯 평온하던 얼굴도 크게 일그러졌다. 꿈틀꿈틀. 갑자기 사지를 경련하는 몸을 위에서 내리누르며 윤승효는 내심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이변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고蠱가 있었다니!! 이 빌어먹을 놈이 하다못해 고까지 주워 먹었어?’
내기를 더욱 빠르게 돌려 문평의 몸속을 훑던 그는 문평의 단전까지 가서야 원인을 알아차렸다. 이제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이놈이 뱃속에 고를 숨겨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진작에 손을 썼을 텐데 몰랐다는 게 문제다. 방치해 뒀던 고가 몽중십야의 영향을 받아 대단히 위험한 물건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고는 강한 영성을 지닌 독물이다. 원래는 시술자의 의지에만 반응하도록 길든 존재이지만, 자신이 기생하고 있는 숙주에게 아예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감정이 움직일 때마다 고 역시도 따라서 반응을 보인다. 그러니 폭발적인 양기와 독기에 노출된 고가 그에 영향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이제까지는 평범한 자고에 불과했을 그것은 이제 양고陽蠱가 되었다. 그것도 곁에 그를 조종할 음고陰蠱도 없는 양고 말이다. 그는 날뛰는 말에 고삐조차 없다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짝을 찾는 미물의 본능은 대단히 강력하다. 양고 또한 그러해서, 이놈을 이대로 놔둔다면 문평의 몸 안을 미친 듯이 헤집으며 짝의 흔적을 찾아 헤맬 것이 분명했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녹이고, 거치적거리는 것은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면서.
일이 그렇게 되면 대라신선이 와도 문평을 살릴 방도는 없다. 내장이 완전히 녹아 없어진 사람을 누군들 살려 내겠는가.
‘미치겠군.’
이제 막 내장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고를 아슬아슬하게 낚아챈 윤승효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내기가 몸을 짓누르자 이성을 잃은 고가 발버둥 쳤다. 윤승효는 기를 더해 고를 완전히 감싼 상태에서 그것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교활한 고가 위협하듯 독을 뱉어냈다. 윤승효는 그것조차 내기로 막고 서서히 고를 짜부라트렸다.
고가 미친 듯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막을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꿈틀대며 난동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윤승효는 흘려 넣는 내기의 양을 더했다.
문평의 혈도가 감당해 낼 수 있을 한도 안에서, 최대한으로 기운을 불어 넣었다. 막강한 힘이 밀어닥치자 문평의 혈도가 힘겹게 벌어졌다. 그의 몸 안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기운이 아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평의 혈도가 자칫 잘못하면 터질 수도 있을 정도로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아직 간신히 버티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윤승효도 몰랐다.
문평의 몸으로 향하는 기의 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열이 올라 발갛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헐떡거리는 약한 숨소리가 애처롭게 방 안을 울렸다.
윤승효는 문평의 몸에서 고를 꺼낼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정상적인 상황의 고라고 해도 어려운 일인데, 이 고는 아예 미쳐있기까지 했다. 이것이 문평의 내장을 찢어발기게 하지 않으려면 안에서 녹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기로 단단히 부둥켜 잡고 짓누르듯 쥐어짜 버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그렇게 고를 죽이고 나면 그 잔재가 문평의 몸에 그대로 남아 버린다.
춘약의 기운을 받아 양고가 되어 버린 고였다. 몽중십야의 기운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응축된 기운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게 뱃속에서 퍼지면 문평은 골수까지 춘약에 찌든 짐승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문평의 혈도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승효조차도 그 기운을 몸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다. 뱃속이 찢겨 죽느냐, 욕정에 달떠 죽느냐. 차이는 오로지 그것뿐이다.
‘……아니. 방법이라면 한 가지 더 있지. 내가 그 방법을 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윤승효는 버둥거리는 고를 붙잡아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문평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안 남았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한 그랬다. 하지만 윤승효는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느니 그냥 문평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택하겠다. 그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네댓 살 난 어린아이도 안다. 근데 이놈은 애새끼들보다도 못하게 넙죽넙죽 아무거나 막 주워 먹었다. 모르고 먹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될 수 없다. 강호에 나온 몸으로 적의 암계暗計를 예상치 못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실수다.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을 놈이 멍청하게 굴어 이 꼴이 났으니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 남 탓할 거 하나 없는 일이다.
그는 얕은 숨을 낮게 헐떡거리는 문평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감은 눈꺼풀 아래서 희미하게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의식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몸에 닥친 위기를 아는지, 연신 눈을 움직이며 가느다랗게 바르작거린다.
‘바보. 멍충이. 천치.’
윤승효는 비는 손이 있다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리쉬었다.
문평은 자신이 뜨거운 용암 아래 누워 있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손도, 발도, 내장도. 온몸을 덮고 있는 피부도. 하다못해 코에서 흘러나오는 숨결까지도 모두 불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거기에서 도망치려고 해봤지만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슬에 꽁꽁 묶여 대지에 속박된 것처럼 무엇 하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
몸을 움직이려고 힘겹게 꿈틀대고 있는 그를 향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이 올라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지? 누가 말하는 거야?’
문평은 목소리의 주인이 궁금했지만, 몽롱한 머리로는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 목소리가 자신이 아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뜨거운 피부 위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촉촉하고 시원한 그 어떤 것. 그것은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고, 팔과 다리도 지나갔다. 그것이 지나갈 잠깐은 열이 좀 식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시원한 감각은 그때뿐이었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지옥 같은 열기가 그를 덮쳤다.
문평은 괴로움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피부 전체의 통각이 한꺼번에 열린 것만 같았다. 너무 아파서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그 끔찍한 고통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뭔가가 몸에 닿을 때마다 그러했는데, 아까 촉촉한 것이 와 닿았을 때 느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감각은 좀 더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고통을 사그라트렸다.
“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가슴 쪽이 시원해졌다. 누군가가 그쪽을 손으로 만져 주며 가슴의 돌기를 뾰족하게 세워줬기 때문이다. 마치 피부 위에 얼음이라도 얹어 놓은 것처럼 한기가 퍼지면서 예민하던 감각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거기에 안도에 가까운 평온이 찾아왔다.
목덜미에 와 닿은 입술도 효과는 같았다. 그것이 목을 깨물고 핥을 때마다 피부에선 고통이 사라졌다. 냉수를 끼얹은 것처럼 시원했다. 그 사람이 만지고 핥는 부분만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문평은 그 사람이 자신의 모든 곳을 만져 주길 바랐다. 목을 깨물듯 뱃가죽도 깨물고, 가슴을 비비듯 엉덩이도 움켜쥐어 줬으면 했다. 말짱한 정신이었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이지만, 이성이 없는 그는 보다 본능에 솔직했다. 그는 상대가 몸의 어느 구석을 만지든 솔직하게 기뻐하며 희열에 떨었다.
거침없이 그의 몸을 가지고 놀던 손이 회음부로 가 닿았다. 문평이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다리를 더욱 크게 벌려 그 손을 맞이했을 터다.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것이 엉덩이골 사이의 주름을 늘리는 게 느껴졌다.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난폭하리만큼 거칠게 드나드는 것도 좋았고, 찢어져라 구멍을 벌리는 것도 좋았다. 솔직히 말해 문평은 그 손이 해주는 건 뭐든지 환영이었다.
“시간이 없어. 이대로 들어갈 테니 아파도 참아.”
그의 머리 위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문평은 그가 하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조금 전에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 들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말하는 거야?’
문평은 아까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반복하며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 아아앗!!”
문평은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항문에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문이 있는 힘껏 벌어지면서, 거대한 무언가가 뱃속까지 밀어닥쳤다. 굵고, 차갑고, 시원한. 그래서 더욱 죽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물건이었다.
그 기분 좋은 것이 내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아예 두들기듯 쾅쾅 밀고 들어오는 그것에 문평은 전율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야!’
문평은 자신이 온몸으로 바라왔던 게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바로 이런 걸 원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두꺼운 이것.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이것. 그게 뱃속으로 더 깊이 들어올수록 문평은 행복했다.
‘좀 더. 좀 더. 좀 더!!’
문평은 목을 젖히며 황홀하게 울었다. 뱃속이 시원해지고 있었다. 엉덩이의 통증도 사라졌고, 허리도 더 이상 불타지 않는 것 같다.
“아앙!!”
상쾌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죽도록 목이 말랐을 때 마시는 감로수가 이러할까? 바짝 마른 논바닥에 냉수 한 바가지를 퍼부었을 때 이러할까?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아픔이 사라지고 그 자리가 편안해졌다.
그건 단순히 정사의 효과가 아니라, 상대가 손으론 추궁과혈椎躬過穴을 하며 한편으론 심법을 운용해 채양採陽까지 해주고 있어 화기가 밖으로 배출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문평은 그것이 오로지 정사만의 공인 줄 알고 그것을 찬양했다.
문평의 몸은 남자가 주는 모든 것을 갈구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항문을 차지한 것을 경배했다. 그가 만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허리를 흔들어 그 거대한 것이 자신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오도록 도왔을지도 모른다. 팔로는 상대의 어깨를 껴안고, 발로는 상대의 등을 감싸서 자신의 안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문평은 상대가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 이 편안함과 행복이 사라지고, 다시 한번 온몸이 불타는 고통이 시작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걱정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이 점점 사라지더니, 어느 순간부턴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죽을 정도로 진한 쾌감이다. 아까의 시원하고 즐거운 감각과는 전혀 다른, 말초적이고 관능적인 쾌감. 문평의 몸은 그 새로운 감각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었다.
실제로 팔이 움직여지기 시작하자, 문평은 상대의 얼굴을 붙잡고 입맞춤을 퍼부어 댔다. 다리가 움직이자 그는 상대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상대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엉덩이 근육을 힘껏 조여 상대를 감싸고, 그 상태에서 허리를 한껏 뒤로 물리며 상대의 몸이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다행히 늘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것으론 만족하기 힘들었다. 실패가 거듭되면 될수록 문평은 약이 올랐다. 그래서 더욱 힘껏 조이고, 더욱 힘껏 허리를 움직여 상대를 몸 안에 가두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상대를 잡아당길 때마다 머리 위에선 짙은 신음이 들려왔다.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뭔가 구시렁거리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하지만 문평은 엉덩이를 조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엉덩이 속에 들어와 있는 상태가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