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6 장(3권) (7/26)

제 6 장

어슴푸레하게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다. 누군가에게는 일과가 끝나는 시점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시작이기도 한 시간. 전자보다는 후자에 속하는 편인 홍화객잔의 점소이 왕삼은,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의 인기척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옵쇼.”

그는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네며 들어서는 손님의 행색을 빠르게 살폈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대충 묶은 검은 머리채 위에 소복이 쌓인 누런 먼지였다. 꽤 오랜 길을 걸어온 모양인지 본래는 청삼이었을 의복도 거의 갈색이 될 정도로 먼지가 쌓였다.

‘흥. 기껏해야 3급이군.’

왕삼은 마음속으로 단정을 내렸다. 남루한 복색에 피로한 인상. 아무리 뜯어봐도 1층 이상으로 올라갈 위인은 아니다. 시켜 봤자 소면이나 만두가 고작일 테지.

“이쪽으로 오십시오.”

왕삼은 그렇다고 해서 손님을 막대할 정도로 직업 정신이 없는 점소이가 아니다. 그는 풍파 많은 객잔 생활을 해오면서 이제껏 살아남은 점소이였으며 앞으로도 살아남을 점소이기도 했다. 그는 겉으로는 내색 하나 없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님을 자리로 안내했다.

상대는 많이 팔아 줄 손님은 아니었으되, 제대로 접대하지 않으면 골치 아픈 손님이기는 했다. 족히 육 척은 되어 보이는 체구는 단단한 근육으로 채워져 있었고, 늘어트린 두 손은 굳은살로 거칠었다. 등에는 천으로 감싼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메고 있었는데, 점소이 경력만 벌써 15년인 왕삼은 그 물건이 장창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낭인 무사로구먼. 아니면 퇴역한 군인이거나.’

홍화객잔이 위치한 이곳 송반松潘은 감숙성에서 사천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어 가욕관이나 옥문관에서 퇴역하는 군인들이 자주 지나곤 했다. 사내 역시도 그들 중의 한 명일 거라고 추측한 왕삼은 1층의 적당히 구석진 자리에다 사내를 안내했다.

사내는 말 없이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등에 짊어진 장창을 풀어 놓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썩였다. 왕삼은 그럴 줄 알고 미리부터 구석진 자리로 그를 안내한 자신의 선견지명을 내심 뿌듯하게 여겼다.

“뭐로 하시겠습니까?”

“소면.”

“반주는?”

“됐네.”

더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딱 떨어지는 대답이다. 그거 봐라 싶은 기분이면서도, 왕삼은 다시 한번 겉으로만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점소이인 그에게는 명문대가의 공자나 사파의 마두보다 오히려 사내와 같은 하류층의 무부가 더 위험한 존재다. 이름 있는 고수들은 고작 점소이인 그에게 손을 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가진 거라고는 삐뚤어진 자존심밖에 없는 파락호나 낭인 무사들의 경우에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기면 출수를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면 하나!”

왕삼은 주방을 향해 외치며 남자의 곁에서 물러갔다. 수고비로 동전 한 푼 안 집어 줄 상대였지만, 바라지도 않는다. 골치 아픈 일은 질색인 왕삼으로서는 그가 빨리 먹고 빨리 나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평은 머리 위로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 무렵이라 객잔 안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한갓진 구석인 그의 자리 근처에나 탁자가 비어 있을 뿐, 좁지도 않은 객잔 안이 거의 다 꽉 찬 것을 보니 제법 장사가 잘되는 곳인 모양이다.

송반은 사천 북부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일 뿐만 아니라 사천을 종으로 가로지르는 민강岷江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현지인뿐만 아니라 여행객이나 상인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시끄럽고 번잡스럽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대체 이게 몇 년 만의 중원인가. 문평은 이런 작은 일 하나에도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꼈다. 단 한 번도 고향 따위 가져 본 적이 없건만, 꼭 고향에라도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전 아래 고독蠱毒이 숨어 있지만 않았더라도 더 좋았을 것을. 좋은 기분에 초를 치는군.’

문평은 예전과 조금도 변한 바가 없는 일상적인 중원의 풍경에 잠시 기분이 들떴다가, 뱃속에서 은은한 통증이 퍼지는 것을 느끼고는 불쾌히 미간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을 정도로 미미한 통증에 불과했지만, 문평은 그 감각을 소홀히 넘길 수 없었다. 뱃속에 독물을 넣고 있는 사람이 독물의 존재를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아무리 작은 움직임이라고 할지라도 소름 끼치도록 예민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다른 데로 신경을 쏟으려고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체내에 독물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독한 인간. 이런 걸 일부러 먹었단 말이지.’

그는 이런 흉악한 것을 자진해서 입 안에 털어 넣었던 인간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야 상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다지만, 포영의는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나서서 고를 삼켰다. 그는 단지 석문평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채 도망가는 꼴은 눈 뜨고 보지 못한다는 심산만으로 그 짓을 한 거였다. 세상엔 그런 지독한 독종도 다 있었다.

원래 고는 한 쌍으로 이뤄지게 마련인데,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진 쌍을 음양고陰陽蠱라고 하고, 어미와 자식으로 이뤄지는 쌍을 자모고子母蟲라고 한다. 둘 다 사람의 의사를 강제하는 일에 쓰이지만, 음양고는 보통 색정과 관련된 일에 이용되고, 자모고는 복종을 강요하는 일에 쓰이는 식으로 특색이 나뉜다.

문평과 포영의가 나누어 삼킨 고는 음양고가 아니라 자모고다. 명을 받는 자고子蟲는 그가 삼키고, 명을 내리는 모고母蟲는 포영의가 삼켰으니 고를 없애지 않는 이상 그는 포영의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때 그 자리에서 고를 먹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위험해졌을 테고 말이다.

순순히 보내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고를 사용할 줄이야. 문평은 풍문으로만 듣던 일을 직접 당하자 마교에 대해 떠돌던 소문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이번 일만 겪지 않았어도 마교가 진짜로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안 믿었을 텐데.

그동안 마교의 하부 조직에 머물면서, 마교에 대한 중원의 소문들은 모두 날조요 헛소리인 줄로 알았는데 이번 일을 보아하니 생각이 또 달라졌다.

역시 소문이 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어디서나 아랫사람보다는 윗사람이 문제였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나올 겁니다.”

문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배를 쓰다듬고 있자, 무슨 착각을 했는지 지나가던 점소이가 얼른 말을 붙여 왔다. 혹시나 난동이나 부리지 않을까 쩔쩔매는 모양새였다.

문평은 귀찮은 듯 손사래를 치며 점소이를 보냈다. 굽실굽실하며 점소이가 물러갔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어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소면을 가지고 돌아온다. 기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편육도 평소보다 많이 얹어진 느낌이다. 배가 고팠기에 다짜고짜 젓가락부터 잡았다.

문평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청해로 바로 내려온 게 아니라 감숙으로 올라갔다가 돌아서 내려왔다. 시일을 단축하기 위해 죽어라 신법을 운용하며 잠조차 길에서 자고, 식사도 건량으로 때웠던 터라 따끈따끈한 음식이 몹시도 그리웠다.

문평은 머리 한 번 들지 않은 채 소면을 먹었다. 매운 것으로 유명한 사천요리답게 칼칼한 국물 맛이 색다르게 맛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식경이 아니라 고작해야 일다경도 안 돼 식사를 끝낸 문평은 점소이가 내온 차로 목을 축였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제법 목이 말랐던 듯, 점소이가 내온 싸구려 차가 감로수처럼 달았다.

“여보게, 자네들 그 소문 들었는가?”

문평이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에 비어 있던 옆자리가 들어찼다. 왜 그의 옆자리에 앉았는지 이해가 갈 만큼 그쪽도 먼지투성이였으나, 그들은 이쪽과는 달리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무슨 소문?”

앉자마자 점소이에게 오리구이와 화주를 시킨 행상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괜히 남의 말을 엿듣는 것 같아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끊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중원을 떠나 있던 지가 무려 10년.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건가?”

“복건성에서 몇 년 만에 다시 왜구들이 들끓고 있다는 소식 말일세.”

“아니, 왜구라니.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 왜?”

세 사나이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먼저 화주가 나오고, 뒤를 이어 오리구이까지 나오자 대화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내가 이번에 상행을 강서로 가지 않았겠나? 올해 강서성에서 생산되는 하포夏布가 질이 좋다고 들어서 한몫 단단히 잡으러 갔었는데 말이야……. 막상 남창南昌에 도착하니, 비렁뱅이 떼가 갑작스레 늘었더라고. 성 밖에 못 보던 빈민촌도 들어서고.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니까 그 사람들이 다 복건성에서 밀려온 난민이라는 거야. 왜구 등쌀에 못 이겨 짐 싸고 나온 백성들이라는 거지.”

처음 입을 열었던 사내가 여전히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곁에서 화주를 잔에 따르던 자가 의아하다는 듯 사내에게 되물었다.

“성도에까지 난민이 들이칠 정도로 피해가 극심하단 말인가?”

“그렇게 심한가? 내가 몇 달 전에 갔을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말도 마. 몇 달 전하곤 비교도 안 돼. 얼마나 살벌하던지 복건으로 행상 나갔던 자들까지 도로 돌아오더라니까. 심지어는 십대상방十大商幇 중 하나인 회양상방檜養商幇조차 상단의 철수를 고려한다더군.”

중원 십대상방 중 하나인 회양상방이 복건성에서 발을 뺐다는 말에 문평은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눈치챌 수 있었다.

회양상방은 절강에서 시작된 상방으로 가장 주요한 거래 물품이 건어물과 해초인데, 그런 곳에서 해안 지방의 대표적인 성 하나를 포기하려 할 정도라면 그 폐해가 어느 정도로 극심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왜 갑자기 왜구들이 날뛰는 건가? 다른 곳도 아니고 복건성이라면, 청혈단淸血團의 근거지인 걸로 아는데. 청혈단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설마 옥기린 대협의 신상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강호상에서 협객이란 칭호를 얻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강호가 시작된 것 자체가 형가荊軻라는 협객 때문이고, 칼을 찬 무인들의 무리인 정도 문파가 관의 간섭을 받지 않고서도 지금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그들이 협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강호 인사들에게 협이란 무겁고 진중한 의미를 가진다. 설사 자칭 협객이라며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에 그에 어울리는 무게가 없다면 결코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협객의 칭호다.

옥기린은 이런 강호에서조차도 인정받는 진정한 의미의 협객이다. 강호인들끼리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부르는 ‘대협’이 아니라, 백성들까지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대협’이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에 바쁜 다른 강호 인사들과는 달리, 민초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옥기린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행상인 하나가 그의 안부를 마치 친지의 안부라도 되는 양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의 위상은 백성들 사이에서 더없이 드높았다.

“옥기린 대협의 신상이 아니라, 그 근친에게 문제가 생겼다네. 대협께서 모친상을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자네는 못 들었는가?”

“모친상? 아니, 홀몸으로 옥기린 대협을 길러내셨다는 그 여장부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야?”

셋 중에서 가장 소문이 느린 남자는,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듯 깜짝 놀라며 친구들에게 되물었다. 기름 범벅이 된 입으로 열심히 오리구이를 찢어 먹고 있던 친구 하나가 핀잔 어린 시선으로 늦된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소식이 깜깜하군. 그렇게 정보가 느린 사람이 어떻게 상행으로 밥을 먹고 살아?”

“내가 이번 상행을 운남으로 다녀온 터라 그동안의 소식에 어둡다네. 그러니 타박 말고 이야기나 해줘.”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쯤에 옥기린 대협의 모친이신 백 부인께서 돌아가셨다네. 전갈을 늦게 받는 바람에 겨우 임종만 지켰다는 모양이야. 왜구들 때문에 몇 년간 안부도 못 드렸다던데, 그런 모친을 보내 드렸으니 옥기린 대협의 기분이 어떠시겠나. 대단한 효자라는 모양이던데, 그야말로 천붕天崩1)이겠지.”

“그럼 장례 기간 내내 호북성에 계시는 건가? 본가가 호북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외가가 제갈세가라니, 거기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겠나? 젊어서 혼자된 후 줄곧 친정에 의지해서 사셨다고 들었는데.”

“왜구 때문에 피해를 보는 복건 사람들에겐 안된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구먼.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천륜인데 그 정을 어찌 막겠나? 사십구재가 끝날 때까진 움직이실 수도 없을 테니 당분간은 참고 견뎌야겠구먼.”

그들의 추측과는 달리 옥기린은 호북이 아니라 감숙에 있었고, 어머니의 사십구재를 지내기는커녕 장례식에만 겨우 참석한 채 기린패를 쫓는 중이었다. 그러나 강호인들처럼 기린패니 마교니 하는 거창한 것에 관심이 없는 일반 백성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문평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자신보다 처지가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쓸데없는 것들을 아느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을 선택했을 거다.

수십 년 전 반란을 일으켰다가 들켜 축출된 마교의 배교자가 다시금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옥기린 백우경이 감숙에서 쫓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음모의 주재자들이 꾸며 놓은 암계일 거라는 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눈치로 보건대, 검협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옥기린이 사실은 천마의 사생아쯤 되는 핏줄이라는 것도 모르고 싶었고, 화경도 넘어 현경에 이른 천하제일 고수인 천마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채 중원으로 뛰쳐나와 있다는 사실도 가능하다면 모르는 채로 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뱃속에 고를 넣어야 할 일도 없었을 거고, 목숨을 걸고 천마의 뒤를 추적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 문평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옷자락에 묻어 있던 먼지가 다시금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옆자리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상인들은 그들의 음식 위에 갑작스럽게 먼지가 날리자 화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상대가 등에 장창을 짊어 멘 키 큰 남자인 것을 보고는 조용히 다시 머리를 맞대었다.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문평을 본 점소이가 무전취식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는지 놀라서 달려왔다. 문평은 그런 점소이에게 식대 외에도 구리 돈 몇 문을 더 집어 주었다. 점소이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손님.”

점소이의 목소리에는 제법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문평은 몇 푼 안 되는 돈 앞에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뒤집는 점소이의 태도에 씁쓸하게 웃으며 객점을 걸어 나갔다.

***

청장고원靑藏高原과 맞닿아 있어서일까. 송반의 밤은 이르게 찾아왔다. 해가 질 때까지 도시를 거닐며 대강의 지리를 익히고 있던 문평은, 성안을 헤맨 지 한참 만에야 자신이 찾고 있던 거리를 발견해 발을 들여놓았다.

밤이 왔으니 사위가 어두워야 정상이련만, 이 거리는 밤인데도 마치 대낮처럼 불이 밝았다. 하늘의 별이 모두 지상으로 내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둥마다 내다 건 채색 등불이 색색으로 빛났고, 달큰한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향긋하기 그지없는 분내가 바람을 타고 거리까지 흘러들었다.

중원 어디를 가나 별반 차이가 없을 법한 홍등가의 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문평은 팔을 잡아끄는 여인들의 사이를 헤치며 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포영의가 알려 준 장소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루는 송반의 밤거리인 홍몽로紅夢路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몽연루夢連樓.

거리 이름과 운을 맞춘 듯한 간판을 단 기루는 호화롭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한 외양을 뽐냈다. 대문의 처마 아래뿐만 아니라 담을 따라서 길게 등을 내걸고, 대문 너머로 보이는 누각은 온통 붉은 천으로 치장되어 있다. 창기를 파는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여인이 나와 호객하는 법도 없고, 담 안쪽에선 은은히 풍악 소리까지 흘러나와 도도한 흥취를 더한다.

아무래도 이곳은 청루靑樓가 아니라 홍루紅樓인 듯했다. 치장도 그렇거니와, 적어도 왈짜패 이상은 되어 보이는 문지기들이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보면 홍루 중에서도 꽤나 비싼 축에 드는 가게인 모양이다.

‘이거 곤란하게 됐는걸.’

지치고 남루한 삼류 낭인의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문평은 자신이 들어가야 할 곳이 하필이면 홍루인 것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천 땅에서는 가능하면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생겼다. 딱 봐도 손님을 가려 받는 가게인 것 같은데, 이런 곳에 자신 같은 차림을 한 사람이 들어서면 얼마나 눈에 뜨이겠는가?

문평은 언짢은 기분으로 낮게 혀를 찼다. 몽연루가 이런 곳일 줄 알았으면 비단옷이라도 한 벌 마련한 후에 왔을 텐데.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을,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지 아니면 엿 먹이려고 작정을 한 건지 포영의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나마 더럽다는 인상은 주지 않기 위해 몸에 묻은 먼지들을 털며 다가서자, 몽연루의 열린 대문 앞을 지키던 문지기가 그를 돌아보았다. 입으로는 점잖게 묻고 있지만 문평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문평이 이런 곳에 드나들 만한 신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가욕관嘉峪關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수혜秀慧 소저라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문평이 가욕관을 입에 담자, 문지기의 불편했던 표정이 풀어졌다.

‘아. 심부름 왔구먼.’

문평이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문지기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평에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가욕관이라면 혹여 문천환汶踐宦 장군님께서 보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장군께서 몽연루의 수혜 소저께 전하라는 서찰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전해 주시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십시오. 안에 여쭤보겠습니다.”

문지기는 지나가던 하인 하나를 불러 전갈을 들려 보냈다. 문평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담 쪽으로 물러서서 먼지를 털어냈다.

언뜻 보아도 먼 길을 왔다는 티가 확연하게 나는 문평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문지기는, 은근한 어투로 문평에게 질문을 던졌다.

“행색을 보아하니 멀리서 오신 듯한데, 어디서부터 오셨습니까?”

“안서安西에서부터 왔습니다.”

“군관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안서에서 오셨으면 문천환 장군님의 수하는 아니시겠군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가는 길에 명을 받았습니다.”

고작해야 심부름 왔다고 하는 사람에게 문지기는 이상할 정도로 깊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슨 낌새를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내심 긴장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문지기가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가 드러났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형장이 처음은 아닙니다. 문천환 장군님께서는 송반의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로 계실 때부터 우리 몽연루의 단골이셨거든요. 가욕관으로 승차하여 가신 지도 벌써 반년이 넘으셨지만, 아직도 이렇듯 잊지 않고 서찰을 보내 주시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한번 말문을 연 문지기는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자신의 직장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기루에는 천장화千長花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기녀가 있는데, 문천환 장군께서 푹 빠져 계시는 수혜 소저가 바로 그녀다. 그녀는 청루의 숱한 창기들하고는 차원이 다르고, 어설픈 예기藝妓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미모는 서시를 뺨치고, 재지는 이태백을 뺨치고, 춤은 조비연에 노래 솜씨는 월궁의 항아 못지않으니, 예향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소주나 항주에서도 이토록 뛰어난 가인佳人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이자가 그 기녀를 짝사랑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문지기의 자랑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빼어난 기녀라면 진작에 강남으로 내려갔겠지. 그런 가인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좁은 송반 바닥에 묶여 있을까.’

문평은 문지기의 말을 반도 믿지 않았지만 굳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기에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안쪽에서 답이 되돌아왔다. 서찰을 가지고 오신 분을 안으로 들이라는 답이었다. 문평은 목덜미에 솜털이 송송한 동기童妓의 뒤를 따라 몽연루의 문안으로 들어섰다. 난생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홍루지만 마음이 설렌다거나 하는 건 없었다.

말 많은 문지기는 상상조차 못 할 테지만, 이곳 몽연루는 마교가 중원에 세운 비밀 분타 중에 하나다. 그러니 수혜라는 기녀도 마교의 일원이리라.

문평은 란란을 필두로 한 마교의 여고수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그녀들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문평은 그녀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자칫 실수하면 험한 꼴을 보게 될 테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고작 그 정도가 문평이 가지고 있는 각오의 전부였다.

붉은 비단으로 서까래를 장식하고 그 위에 홍등을 달았다. 방방의 문마다 구슬로 만든 발을 달아 맑은 소리가 울리게 두었고 허공엔 공기가 반, 분 냄새가 반이다.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가진 기녀들이 한들거리며 지나가다 문평을 돌아보고는 웃었다. 일부러 길게 만든 소매로 입을 가리고 눈웃음을 치는 그녀들의 어깨는 유달리 뽀얗고 싱그러웠다.

난생처음 들어가 보는 홍루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이곳이 마교의 분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마저도 한 번씩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예화나 란란 같은 절세의 미녀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문평에게는 그런 벼랑 위의 꽃보다는 적당히 어여쁘고 적당히 귀여운 이 아가씨들 쪽이 훨씬 편했다.

꽃밭을 지나는 기분으로 층계를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치장은 화려해지고 아가씨들은 더 아름다워졌다.

문평은 무려 다섯 층이나 되는 기루의 마지막 층에 올라서서 조용히 심호흡했다. 돈을 내고 여기로 올라왔다면 미인을 볼 생각에 즐거웠겠지만, 여기서 그가 맞닥트려야 하는 것은 미인이 아니라 마녀였다.

“수혜 아가씨. 가욕관에서 오신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모시거라.”

그를 여기까지 안내한 동기가 안에다 고하자, 기품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마교의 여고수라고 믿기 힘든 우아하고 가냘픈 음성이다.

“안으로 드세요.”

문평은 동기가 열어 주는 문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깥의 호사스러운 치장을 본 문평은 방 안쪽의 치장이 더 화려하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바깥에 비하자면 외려 수수하게 꾸며져 있어 화려하다기보다 고아하다는 표현이 더 알맞아 보였다. 이름난 기녀의 방이 아니라 귀한 댁 규수의 규방 같은 꾸밈새. 설상가상으로 방의 안쪽에는 발까지 둘러쳐 있었다.

발의 건너편에는 한 사람의 인영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바로 문지기가 자랑했던 송반의 자랑, 천장화인가 보다. 그러나 발의 안쪽에 있어서 안력을 돋워 봐도 희미한 윤곽만 보일 뿐 정확한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다.

문평은 잠시 그쪽을 바라보다가 간단히 예를 표했다. 발 너머의 그림자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가욕관에서 오신 손님이십니까?”

여전히 발을 내린 상태 그대로 여인이 질문을 던져 왔다.

‘돈을 안 낸 사람에겐 얼굴도 보여 주지 않을 심산인가 보지?’

문평은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묻는 대로 순순히 대답했다.

“서쪽에서 수혜 소저께 전하라는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장군께서는 무탈하신가요.”

“고향을 떠나온 지가 이미 수 해이니, 그저 고향을 그리워하실 뿐입니다.”

미리 정해진 문답이 오고 갔다. 포영의가 일러 준 그대로의 춘전春典2)이었다. 대화가 끝나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발이 걷혔다.

발 뒤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평에게로 다가왔다. 푸른색 궁장 차림에 선녀처럼 머리를 틀어 올린 미인을 그리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문평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누님? 경화 누님 아니십니까? 누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된 문평은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점잔 빼던 것을 다 잊었는지, 수혜는 활짝 웃으며 문평에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본산에서 마영魔影께서 내려오신다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더니만 어째서 네가 왔어? 마영님을 시중하고 온 거니?”

“아닙니다. 시중하고 온 것이 아니라…… 저 혼자 왔습니다.”

“그래? 그럼 지부에서 연락이 잘못 온 건가? 아니야. 그럴 리 없는데? 분명히 마영께서 오신다고 들었어. 무슨 경을 치려고 그런 정보를 틀리겠어?”

문평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대답할 말을 고심했다. 정당하게 한 승진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잘난 척을 했겠지만, 사실상 몸으로 승진한 거나 다름없으니 내세우기가 껄끄러웠다.

어떻게 된 상황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수혜는 뒤늦게야 문평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를 눈치채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본래는 아무리 놀라도 저렇게 다소곳한 동작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기루에서 3년 살다 보니 물이 들기는 든 모양인지 교태로운 자세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어머, 그렇다면 이번에 오신다는 마영님이 바로? ……실례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상명하복이 철저한 마교에서 나고 자란 수혜는 문평의 정체를 알자마자 바로 무릎을 굽혔다. 하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님처럼 따르던 그녀에게 절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평은 황급히 몸을 피해 그녀의 절을 마다했다.

“진짜 마영인 것도 아닌데 이런 예는 부담스럽습니다. 누님. 제가 마영의 직책을 가졌다고는 하나 특수한 상황이 있어 임시로 자리를 받은 것뿐이지 정식으로 임명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문평은 간곡하게 그녀를 만류했지만, 그녀의 고집은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영이신데 어떻게 소홀하겠습니까? 교주님의 그림자라면 내전의 대주와도 비견되는 존귀한 직책입니다. 소녀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문평은 그녀에게 받는 존대가 생소하고 불편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그녀를 설득했다.

“왜 자꾸 이러십니까? 절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십니까? 누님도 아시다시피 마영의 직책을 맡은 자는 바깥에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진짜 마영이라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누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를 거두고 모르는 척해 주세요. 어차피 길게 앉아 있을 자리도 아닙니다.”

그래도 어떻게, 라는 듯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그녀를 문평은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잠시 눈치를 보듯 문평의 안색을 살피던 그녀는 그가 진심인 듯 보이자 그제야 마음을 놓고 어깨를 폈다.

수혜, 아니 본래 이름이 천경화千暻花인 그녀는 날수낭랑辣手娘娘이라는 별호를 가진 마교의 여고수다. 중원으로 파견 나가기 전까지 문평의 직속 상사였던 인물로, 문평 이전에 참혼대의 제삼조장이었다. 그녀는 무공이 뛰어나고 심계도 깊어서 외전의 고수들 중 가장 촉망받던 인재였는데, 3년 전 중원의 비밀 분타로 파견 나간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었다.

일단 중원의 비밀 분타에 부임하게 되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에게도 연락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문평조차도 천경화가 중원의 어느 분타에 파견 나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를 이렇게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니 반가움이 남달랐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누님.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더 젊어지시고 더 예뻐지셨어요. 오면서 듣자니 심지어는 시서詩書와 예악禮樂까지 두루 섭렵하신다면서요?”

방금 전의 소동을 날려 버리려는 듯, 문평이 애써 명랑한 어조로 그녀에게 인사를 늘어놓았다.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다는 명목으로 하는 말이긴 했지만 그의 말이 아주 빈말인 것은 아니었다.

거의 3년 만에 만나는 그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더 예뻐지고 더 젊어졌다. 무엇보다도 호방하던 기질 자체가 완전히 변화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를 ‘여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평은 이런 그녀의 변화가 이채로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빼어난 미인이긴 하지만 천생 무인이고, 털털한 데다 말술이기까지 했던 그녀는 무엇을 겨루어도 남자에게 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옛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문평으로서는 잘나가는 기녀를 넘어 귀한 댁 규수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사락사락 비단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는 은은하게 꽃향내도 풍긴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전해 주면 대체 어떤 반응이 되돌아올까? 문평은 잠시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래 봤자 그 사람들은 경화의 변화를 믿지 않을 터다. 자신이 뭘 잘못 봤을 거라고 치부하거나, 아니면 아예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우기겠지. 문평은 보지 않고도 그들의 반응을 생생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문평이 놀리듯 말을 건네자, 경화는 입술을 비죽댔다. 옛날 같았으면 틀림없이 주먹이 날아왔을 터인데 이제는 주먹 대신 새치름한 눈빛이 날아온다.

“그때야 시커먼 사내자식들 틈에서 버티느라 나도 사내인 양했던 것이지. 내가 그리 굴지 않았으면 그 머리 굳은 것들이 여자를 상관이라고 따랐겠어? 나도 맘만 먹으면 꽃다워질 수 있는 여자야. 이곳으로 오면서 송반에 자자한 내 기명도 들어보지 못했니? 천장화야, 천장화. 천장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꽃. 이곳에는 살짝 던져 준 눈웃음 한번에도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내들이 널리고 널렸단다.”

그녀는 짐짓 요염한 미소로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장난스럽고 짓궂으면서도 은밀히 농염해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미소다. 그 미소를 보니 천장화를 찬양하던 문지기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저런 전문적인 미소를 어디서 익혔나 모르겠다. 설마하니 환희루로 가서 특별히 훈련이라도 받은 것일까?

짧은 웃음을 나누고 나니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문평은 경화가 이끄는 대로 탁자에 가 앉았다. 미리 준비해 놓은 차를 찻잔에 따르며 경화는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일이야? 3년 전에 겨우 참혼대 조장으로 승진했던 네가 갑자기 마영이 되어 나타나다니. 그동안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거야?”

중원 분타에서 지내고 있어 지난 몇 달간 문평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경화는 못내 궁금한 어조로 채근했다.

참혼대의 고수 중에서 가장 출세 가도를 달리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경화는 중원 분타에서의 임무가 끝나면 대주급으로 승격되리라 예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후임이었던 문평이 돌연 상사가 되어 나타났으니 그 내막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질문받은 문평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마교로 돌아가면 사정을 알게 될 테니 거짓말도 못 할 일이고,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좀 특이한 재주가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마침 그 재주를 쓸 일이 생겼기에 제가 발탁된 겁니다. 마영이라는 직위를 받은 것은 이번 일을 원만히 해결하자는 뜻이니 영구적이지 않아요. 이번 일만 끝내면 도로 물러날 직책입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마교 자체를 떠날 테니 필히 그렇게 될 터다. 그는 자신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자위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어? 그래. 듣고 보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해결해야 하는 일에는 그런 쪽의 재주가 필요하거든. 마영대보다는 추영대에 맡기는 것이 훨씬 적합한 일이다 싶었는데, 네가 왔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문평의 대답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끄덕끄덕. 그녀는 혼자서 무언가를 납득했다. 하지만 사전 정보가 없어 그녀가 뭘 납득하게 됐는지 알 수 없었던 문평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제게 주라는 정보는 뭐였습니까? 여기서 제가 뭘 해야 하는 거죠?”

포영의는 천마를 쫓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면서도 그를 감숙이 아니라 사천으로 보냈다. 이유 없는 행동은 아니겠지만 내막을 말해 주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문평은 경화의 태도를 보고 그녀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평의 질문에 경화는 탁자 아래로 손을 넣었다.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 자단목으로 만든 두툼한 다탁 아래에서 기음이 울리더니 상판의 가장자리 부분이 조금 열렸다. 그녀는 상판의 열린 부분을 들어 올려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탁 위에 펼치자 그것은 하나의 지도가 되었다. 군사 지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묘하게 그려진 중원 전도였다.

“얼마 전, 광동과 복건 등지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어. 처음에는 마을 전체가 몰살되어 왜구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몇몇 마을에서 어른들은 몰살되고 아이들은 끌려갔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지. 거기에서 쓰인 화골산이 이번에 제갈세가에도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그건 이미 알고 있겠지?”

알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호완평이 천마에게 고했던 내용이니 그가 모를 리 없다.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중원 전도를 짚었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절강과 복건, 광동성을 차례로 훑어 나갔다.

“한데 이와 비슷한 일이 사천에도 있었어. 해안 마을에서처럼 마을 전체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잘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들이 발생한 거야.

나이는 보통 5세에서 10세까지의 동남동녀. 부잣집 아이들보다는 아이를 잃어도 찾으러 나서기 힘든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이나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사라진 것인데, 제일 먼저 그걸 알아챈 쪽은 개방이야. 곧이어 하오문에서도 알아챘고 비밀리에 수소문을 시작했지. 그러나 중원의 양대 정보단체가 뒤를 캐고 있어도 아직까지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어.”

문평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어떤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일은 그런 일반적인 상황과는 궤를 달리하는 일인 듯했다.

하나도 아니고 서너 개의 성에서 수많은 아이가 사라졌다. 인신매매 집단이 저지른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규모가 크다. 필시 어떤 강력한 집단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일은 중원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야. 운남에서도 벌어졌어. 운남에서 당한 것은 주로 백족白族이나 랍호족拉祜族같은 이족들인데, 광동에서처럼 화골산을 사용한 흔적이 있고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곳도 종종 있어.

하지만 이족들의 마을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밀림 속에 있어서 바깥으로 알려진 사례가 거의 없어. 우리조차도 백련교 쪽의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야.”

“백련교요? 백련교가 운남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광서에서 발생한 유아 유괴 사건에 백련교도의 아이들도 끼어 있었던 모양이야. 뒤를 쫓던 백련교 측에서 운남까지 흔적을 쫓다가 발견했다고 하더군. 불행히도 암수의 흔적은 거기서 끊겼던 모양이야. 백련교야 더 파 보고 싶었던 눈친데 정파의 3대 세력이 버티고 있는 사천 쪽으로는 올라올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우리 쪽에 부탁했어. 우리가 한번 알아봐 달라고 말이야.”

그녀의 손가락이 운남을 거쳐 사천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이 그리는 경로를 눈으로 따라가던 문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럼 귀주는?”

“보고된 사례가 없어. 귀주의 비밀 분타에서도 찾지 못했고, 개방이나 하오문도 못 찾았어. 오로지 이곳만 깨끗하지. 중원의 남단 전체가 다 휩쓸렸는데, 오로지 여기만 그래.”

문평은 노골적으로 의심스러운 그 장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천마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문평에게 경화가 작은 대나무 통을 건넸다. 사천에서 집결된 정보를 알리고, 이 대나무 통을 본산에서 온 자에게 전하는 것까지가 그녀에게 내려진 지령이다. 대나무 통 안에 어떤 정보가 있는지는 그녀조차도 몰랐다. 그녀는 다만 그것을 전하는 임무만을 맡았을 뿐이다.

“오늘 낮에 본산에서 온 전서구야. 마영이 송반에 도착하거든 전해 주라는 전갈을 받았어.”

대나무 통을 열어 돌돌 말린 한지를 꺼냈다. 한지를 열어 보니, 손가락 두 개 넓이의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이 촘촘히 쓰여 있는 것이 보인다. 사용된 글자는 어떻게 조합하는지 방법을 모르고서는 뜻조차 알아볼 수 없는 정식 흑화黑話다. 문평은 마치 처음 글을 배운 아이처럼 띄엄띄엄, 힘겹게 문장을 해석해 나갔다.

개를 뒤쫓으면 주인이 나온다.
잉어는 그물로 잡아도 용을 그물로 잡을 수는 없다.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 구름은 개를 따라 흐를 것이다. - 母

기껏 글귀를 해석했더니만 이제는 뜻이 문제다. 누구처럼 머리가 좋지 못한 문평은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자 그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경화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지켰다. 천산에 있을 땐 부하에다 나이도 어려서 그저 철없는 동생 같기만 했는데, 이렇게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이 녀석도 제법 사내 냄새가 난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문평은 그녀만 변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경화가 보기에 변한 것은 그녀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오랜만의 해후였지만 길게 마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서찰을 전하러 온 남자가 여인의 방에 오래 머무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전해 받아야 할 용건이 모두 끝나자,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화도 문평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문평이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는 중요한 임무를 맡아 길을 나서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대놓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그에 비해 경화의 반응은 오히려 대범했다. 그녀는 문평처럼 서운해하는 대신 어른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다독였다.

“고생해. 좋은 기회잖아. 외전 무사에게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아.”

넉넉하게 웃으며 말하는 태도가 나이 많은 큰 누님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다. 손위라고는 해도 고작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처지이건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누님.”

“오늘은 이대로 가고, 나중에 네가 맡은 그 일을 모두 마치거든 한 번 더 들러줘.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때 마저 하자. 내가 그날을 위해서 괜찮은 술을 한 병 구해 놓을게. 중원에 나와 있어서 좋은 게 있다면 각 지방의 이름난 술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거야. 너는 송반에도 숨은 명주가 있다는 사실을 아니? 마실 때마다 친구가 그리워지는 맛이야. 누군가와 그 향기를 같이 나누고 싶어지거든.”

그러니 꼭 다시 와 그 술을 한잔하자며, 그녀는 문평에게 당부했다.

경화는 이번 일이 끝나면 문평이 마교를 떠난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기에 아무 스스럼없이 다음을 기약한다. 그러나 문평은 그녀의 부탁을 듣고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번 만남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합법적으로 교를 떠나게 될 테니 배교도 취급까지야 받지 않겠지만, 외부에 배타적인 교의 습성상 한번 교를 떠난 사람이 아직도 교에 남아 있는 옛 친인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나마 융중지약을 지켜야 하니 마교의 무사들이 중원까지 내려올 일이 드물고, 설사 이번처럼 비밀 분타에 파견되어 나온 인원과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보안 규칙상 서로를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일단 교를 떠나고 나면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방법이 없다. 죽어서 헤어진 것도 아닌데 영영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니. 문평은 벌써부터 서늘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참았다.

그동안 떠돌이로 살아도 한 자리에 오래 있었던 적이 없어서 이렇듯 깊은 정이 든 적은 없었는데, 마교에서 지낸 세월이 세월이다 보니 떠나려고 해도 정이 발목을 잡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 왜 이리도 무거운 것일까.

문평은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간신히 움직여 웃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석별의 정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처지가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뵙는다면 꼭 술 한잔합시다, 누님.”

“그래. 꼭 그러자.”

그녀는 눈매까지 접어가며 곱게 웃었다. 문평은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에 가볍게 목례하고 몸을 돌려 방에서 걸어 나갔다. 남들의 시선 때문에 경화는 그를 앉은 자리에서 배웅할 뿐 방 밖으로는 따라 나오지 못했다.

방을 나서자 밖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동기 아이가 앞장서 길을 잡았다. 문평은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안내를 받아 기루를 내려갔다.

경화의 방에서 보낸 시간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그새 기루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번쩍번쩍한 화의華衣를 입고, 기름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얼굴에 호탕한 웃음을 가득 담은 작자들이다.

처음부터 걱정했던 대로 그 사람들 사이에서 낡은 청의를 걸친 문평의 존재는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그가 최상층에서 내려오는 중이라는 사실까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의아함과 흥미로움 혹은 원인 모를 적대감.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눈빛이 그의 등 뒤에 꽂혔다.

문평은 그 모든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채 뒤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빠져나갔다. 괜한 시비에 걸려 소란을 만드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게를 완전히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흩어졌다. 드문드문 저자는 누군데 5층에서 내려오느냐는 질문도 들렸지만, 곁에 있던 기녀에게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었는지 그 이상으로 화제가 이어지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한 사람, 문평을 바라보던 사람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은 그 사람만은 반응이 달랐다. 사내는 문평이 기루를 나간 이후에도 그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시선은 문평이 아직도 거기에 있는 것처럼 기루의 문간에 고정되어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그를 방으로 안내하던 기녀가 애교 어린 목소리로 사내의 정신을 일깨웠다. 여전히 시선을 문간 쪽으로 던지면서,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기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잠깐,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사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기녀는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엽게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것이 고스란히 티가 났지만, 워낙 예쁜 얼굴인 데다 태도에도 아양이 철철 넘쳐서 밉기보다는 오히려 깜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 송반은 처음이시라면서 아는 사람이 있으세요? 어떻게 아시는 사이세요?”

“아니. 아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데, 아닐지도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기녀의 호들갑스러운 질문에 사내는 덤덤히 대답했다.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것처럼 별 미련 없는 투였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사내의 반응에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기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다시금 그를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사내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어리고 예쁘지만 아직 노련하지 못한 기녀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사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짧은 일별 동안 사내의 시선 안에서 차디찬 기광이 스쳤다는 것도, 사내가 자기가 한 말과는 달리 상대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사실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사내의 주머니에서 더 많은 돈을 긁어낼 수 있을까 궁리하며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인상은 평범하지만 돈은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이런 사내를 후려내는 정도야 그녀에게는 손쉬운 일. 언니들에게 배운 기술을 조금만 써먹는다면, 며칠간 일하지 않아도 먹고 놀 수 있는 벌이가 될 터였다.

***

개를 뒤쫓으면 주인이 나온다.
잉어는 그물로 잡아도 용을 그물로 잡을 수는 없다.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 구름은 개를 따라 흐를 것이다. - 母

문평은 걸음을 옮기며, 흑화보다도 더 암호 같은 구절을 곰곰이 되뇌어 보았다. 모르는 글을 되풀이하여 읽다 보면 깨우치게 된다는 성현의 말씀도 있는 모양이지만, 포영의가 보낸 구절은 무공비급도 아닌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다 이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되새기다 보니 오히려 처음에는 명료했던 것도 흐려지고 알던 것도 모르게 된다.

‘사람 머리가 다 자기 같은 줄 아나.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것도 없이 두루뭉술한 구절 몇 개를 가지고 지령이랍시고 보내다니 뭐 이런 황당한 작자가 다 있어?’

뜻풀이를 하다 신경질이 난 문평은 애초에 이런 사달을 만들어 낸 포영의를 마음속 깊이 원망했다. 하여간 그 인간은 뭘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몇 년간 손발을 맞춘 관계라 척하면 아 하고 아는 사이도 아닌데,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걸까?

‘……개를 쫓으면 주인이 나온다는 건, 어린애들 납치 사건을 한번 파 보라는 거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굳이 날 사천으로 보내지도 않았을 거고, 그에 관한 정보를 내게 숙지하도록 시키지도 않았을 테니까.’

문평도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서, 첫 번째 구절 정도는 혼자 힘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정황상으로 볼 때 포영의가 ‘개’라고 지칭한 자들은 애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하고 있다는 그 정신 나간 놈들이 분명했다. 문평은 그들의 배후가 곽효일 거라는 설명을 이미 들은 바가 있고, 그가 생각하기에도 각 성에서 벌어진 일은 서로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여러 개의 성에서 똑같은 목표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노려졌는데, 그중에 한 번은 배후가 밝혀졌다. 그렇다면 나머지 일들도 같은 배후가 저질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다음부터란 말이지. 잉어는 그물로 잡아도 용은 그물로 잡지 못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용을 찾으라는 구절이 다음에 오는 걸 보면, 용이라는 게 천마를 가리키는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럼 잉어는 뭐냔 말이지. 설마 잉어가 옥기린인가? 옥기린은 잡아도 천마는 못 잡는다고? 용을 찾으려면 구름을 쫓아라. 구름은 또 누구지? 천마 외에도 찾아야 할 사람이 더 있는 건가?’

첫 번째 구절을 지나 두 번째로 가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여기서부터는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따로 떼어 놓은 구절만으로는 이해가 안 가서 다 같이 붙여 놓고 해석해 봐도, 기본적으로 포영의가 어디다 뭘 비유해 놓은 건지를 모르니 여전히 깜깜할 따름이다.

용은 그렇다 쳐도 잉어는 또 뭐고 구름은 또 뭔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지, 그런 단체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문평은 너무 오랜만에 회전시켜 쥐가 나기 시작하는 머리를 힘겹게 감싸 쥐었다. ‘이거 해.’ ‘저거 해.’ 하는 식으로 한 문장 안에 깔끔하게 끝나던 참혼대주의 명령이 이토록 그립기는 처음이었다.

글공부는 못 해봤어도 문맹은 면했다는 게 평생의 자랑이었는데, 이제는 그것 가지고는 자랑도 못 하게 생겼다.

‘문장의 어감으로 봐서 대충 뭘 하라는 건지는 알겠어. 어쨌든지 간에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를 캐보라는 거 아니야. 그러다 보면 구름도 만나고, 용도 보게 될 거란 말이지.

하지만 그러면 뭘 하냐고. 만나 봤자 구름이 뭔지 모르면 죄다 헛것인데. 모르고 지나치면 어쩔 거야. 몰랐다고 변명하면 봐줄 거야?’

장담하건대 절대로 안 봐줄 거다. 그럴 인간이라면 애초부터 사람에게 강제로 고를 먹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골몰하며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해 주위를 둘러보는 일에 소홀했던 문평은, 사위를 아우른 정적이 한참을 이어질 때까지 그의 앞에 벌어지는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풀벌레가 우는지 새가 우는지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그는 상대방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앞에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뭣 하는 사람들이오?”

석문평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산길을 따라 걷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 사내들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사내들이란 산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사내들은 달랐다. 고작해야 산적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운 기세를 가진 데다, 눈빛은 잘 벼린 칼처럼 예리했다.

아무래도 사내들은 체계 잡힌 문파에서 제대로 훈련된 무인들인 듯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고수라, 일류 이하의 수위를 가진 자가 없었다.

‘누구지?’

마음속으로 거리끼는 것이 많은 문평은 경계심을 감추지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신색은 애써 담담히 유지하고 있지만, 사내들을 살피는 눈동자는 여지없이 흔들렸다.

‘당문唐門?’

문평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낮게 신음을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유난히 소매 폭이 큰 상의와 손에 낀 녹피 장갑을 몰라볼 순 없었다. 소매 폭이 크다는 것은 그 안에 감추는 것이 많다는 뜻이고, 이런 복장을 갖춘 무인이라면 대개 암기의 고수다. 피독의 효과가 있는 녹피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은 독물을 다룬다는 뜻이다. 차림새로 보아 상대는 독과 암기의 고수가 분명했다.

독과 암기는 공을 이루는 것이 지난한 무공이다. 독공은 상황만 잘 따라 준다면 이류 고수가 다른 무공의 일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만큼 성취를 이루기도 어려워서 이류가 일류가 되는 과정은 다른 무공의 일류가 절정 고수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런 독공의 고수를 한꺼번에 다섯이나 파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문파는 강호상에 오직 하나 당문 뿐이다. 적어도 문평의 상식으론 그러했다.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군. 그대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당문에서 파견된 고수로 보이는 사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신경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바싹 마른 몸에 눈빛이 푸른, 마치 뱀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내가 왜 그것을 당신들에게 설명해야 하오? 댁들이 관군이요?”

석문평은 애써 냉담하게 되물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마음속에서 낭패감이 피어올랐지만 애써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당문이라면 그와 끔찍한 악연이 있는 곳이다. 본의 아니게 은원을 맺어 적대했던 곳. 석문평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설마하니 그들이 자신을 쫓아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강호상에서 가장 은원이 확실하다는 문파가 바로 당문이다. 그들의 끈질김과 집요함은 그들의 천라지망 속에서 몇 달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문평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당문이 그 일을 잊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강호에서의 은원은 수십 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사소한 시비가 대를 이어서까지 이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한 곳이 강호다. 만일 그들이 그를 쫓아왔다면 그 지긋지긋한 추격전이 다시 시작되고 말 터였다. 문평은 내심 그것이 두려웠다.

“관군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당문에 죄를 지은 수상한 무리를 뒤쫓는 중이다. 섣부른 의심을 받기 싫으면 순순히 협조하라.”

우두머리 사내는 냉담한 태도로 말하며 문평의 호패를 요구했다. 분명 자기 입으로 관군이 아니라고 말했으면서도, 그 태도는 관군이나 다름없이 고압적이다.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행히 자신을 쫓는 것은 아닌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역시 당문이군.’

문평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했다. 세상 모두를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저 안하무인은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변한 게 없었다.

“내 눈에는 그대들이 수상한 무리로 보이는군. 관군도 아니라면서 행인의 길을 가로막고 다짜고짜 호패를 요구하다니. 그대들은 무슨 권리로 이런 방약무인한 짓을 자행하는 게요? 관의 허락은 받고 이러는 것이오?”

문평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우두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수상한 무리라.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문에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당문이다. 그런 자들이 사천의 경계를 넘어 귀주 땅에 나타났다.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일 테지만, 신분을 숨기고 싶은 문평에게 있어 당문의 출현은 뜻하지 않은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귀주 땅으로 들어가는 언저리에서부터 그들이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그 수상한 무리라는 자들이 귀주 땅으로 스며든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을 텐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귀주 곳곳을 수색해야 하는 처지인 문평에게 당문의 천라지망은 발목에 감긴 그물이나 다름없었다. 자칫하면 곳곳에서 당문과 부딪힐 여지가 있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그중에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그것만큼 낭패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내 운수는 대체 왜 이 모양인가.’

문평은 마음속으로 깊이 한탄하면서도, 겉으로는 꿋꿋이 우두머리 사내를 노려보았다. 내심 켕기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를 드러냈다간 뼈도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리게 될 거다. 상대는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되는 독공의 고수다. 절정도 못 된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낭인 주제에 말이 많군. 우린 당문이다. 순순히 호패를 내놓아라.”

“고작 낭인이라니. 그대들이야말로 강호의 낭인 무리가 아닌가. 나는 이래 봬도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처지이니, 관도 아닌 그대들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

윽박지르듯 말하는 사내에게, 문평은 한층 더 강경한 태도로 맞섰다. 그는 이제까지 반 존대하던 말투조차 버리고 한 점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당당히 나섰다.

안전 위주의 문평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물론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믿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호패였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는지, 포영의가 준비한 그의 호패는 관인의 호패다. 높은 관직도 아니고 그다지 위세도 없는, 고작해야 백호에 불과한 자리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그럴싸한 구석이 있었다.

예로부터 강호와 관은 서로를 경원시해 왔다. 강물이 우물물을 침입할 수 없듯, 우물물도 마찬가지로 강물로 역류할 수 없다. 아무리 작은 관직이라고 하더라도 관인官人이 상대라면 야인野人에 불과한 강호인은 섣불리 굴 수 없는 법.

아니나 다를까. 석문평이 자신을 관인이라고 칭하자 우두머리 사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새삼스러운 태도로 찬찬히 석문평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살펴봐도 그에게는 특별한 기색이 없었다. 제대로 단련이 된 무인의 몸에 체격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낡은 청의인 데다 등에는 장창을 짊어졌고, 말도 없이 걸어서 길을 가고 있다. 문인이라고는 보기 힘들고, 무인이라고 해도 낭인에 가깝지 입신한 관인으로 보기는 힘든 행색이다.

“나라의 녹을 먹는다. 그럼 관인이란 말이요?”

‘그 꼴로?’라고 되묻고 싶은 게 명백한 태도로 우두머리 사내가 되물었다. 의심하는 마음과 별개로 눈앞의 낭인에게 완전히 말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석문평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직위가 무엇이오?”

“안서 좌천호소安西 左干戶所의 백호百戶다.”

우두머리 사내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백호라. 낮다고 하기에도 높다고 하기에도 모호한 지위다. 일단 품계가 있으니 관직은 관직이지만 고작해야 백 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말단 군관에 불과하다. 게다가 부임지는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안서가 아닌가.

옥문관이 코앞인 안서의 좌천호소 군관이라면 말 그대로 옥문관을 지키는 문지기나 다름없다. 꼴을 보아하니 무과를 통해 제대로 급제한 신분이 아니라 최전선에서 구르다가 공을 세워 진급된 사례인 모양인데, 고작해야 그 정도 직위의 관인에게 허리를 굽히기엔 당문이라는 자부심이 너무도 컸다.

사내는 문평의 대답에 잠시 망설였다. 한발 물러서야 함을 알면서도 그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당문이라는 이름이 겨우 백호에게 물러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알았으면 이제 길을 비켜라.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한 바가 아니라면 그대들에게 검문받을 까닭이 없다.”

사내가 주춤하는 것을 본 문평은 단호한 태도로 그를 다시 한번 몰아붙였다. 기세를 선점한 이상 이제 밀어젖힐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서 행한 일인데, 예상외로 우두머리 사내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거리낄 것이 없다면 호패를 보여 주시오. 확인치 못한다면 길을 비켜줄 수 없소.”

사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문평에게 요구했다. 문평이 간과한 게 있다면, 강호의 명문들에겐 관인들조차 꺾지 못할 자부심이 있고, 그중에서도 당가의 그것은 유달리 높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낮은 계급의 군관에게 가문의 체면이 깎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천호급이라면 한 번 더 생각이라도 해봤을 테지만 상대는 백호. 그것도 평민 신분의 백호였다.

그러한 신분의 사내가 사사로이 관군을 동원할 일도, 연줄을 움직여 당문을 압박할 일도 없으리라 짐작한 당문의 무인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호패를 꼭 확인하려고 들었다.

증거도 없이 말로만 하는 이야기는 믿지 못하겠다. 당신이 정녕 관인이라면 그 신분을 증명해 보여라. 겉으로 드러내는 명분은 그러했으나, 실상 그들이 끝까지 신분 확인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체면치레 때문이었다.

그런 눈치를 문평이 못 알아챌 리 없다. 그는 당문의 무인들이 오로지 자신을 꺾기 위해 호패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문의 피붙이들이 오만하다는 건 알았지만 관인에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대들은 본관이 군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핍박하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애초에 했던 계산이 어긋나버린 것을 알았지만 문평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가 이제껏 연기한 인물은 자존심 강하고 고지식한 군관이었다. 상대가 당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갓 야인으로 치부해 버리는 성격의 인물.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타협도 모르는 우직한 사내. 그런 모습을 보이다 갑자기 호패를 제시한다면 외려 의심만 더하고 말 터였다.

이판사판이다. 설마 관인을 죽이기야 하려고. 문평은 어그러진 계산을 뭉개며 우두머리 사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우두머리 사내의 눈빛이 독사처럼 날카로웠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호패 좀 보겠다는데 그걸 가지고 반역으로 몰 셈이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떳떳하다면 왜 호패를 제시하지 못하는 거요? 그대가 우리라면 그저 말로만 드러내는 신분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그런 논리라면 나도 묻고 싶군. 그대들이 당문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지? 그대들도 내게 호패를 제시하는 것이 어떠한가? 나에게 그대들의 신분을 증명하려면 그 수밖에 없을 텐데.”

문평이 냉랭히 빈정거리자 우두머리 사내의 눈썹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푸른 안광을 더욱 시리게 번득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강호에서의 명성은 말로써 쌓는 게 아니지. 원한다면 우리가 당문이라는 것을 강호의 방식대로 증명해 보이겠소. 야인에겐 야인의 방법이 있는 게 아니겠소?”

우두머리 사내의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양 다른 사내들의 손도 일제히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문평은 이를 악물었다.

‘이 미친 것들. 진짜로 손을 쓸 셈인가? 일반 백성도 아니고 군관에게 손을 쓴다고?’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이미 생사 대적을 앞에 둔 자들의 눈빛이었다. 낭패한 문평은 어찌할 수 없이 등 뒤로 손을 돌려 장창을 잡았다.

이제는 피할 도리가 없는 듯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맞서 싸우거나 뒤돌아서 도망가거나 둘 중의 하나. 그러나 이 상황에서 뒤돌아선다면 당문이 아니라 마교에게 칼침을 맞게 된다.

‘내가 이렇게 객사할 운명이었나.’

일류 고수 다섯 대 자신 하나. 워낙 차이가 나는 전력이다 보니 이제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당문이든 마교든 둘 다 이가 갈렸다.

망할 것들. 문평은 장창을 풀어 그들을 겨누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어 댔다. 가기 싫다는 자신을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낸 마중사기를 끓는 물에 데치고 싶었다. 자신을 이런 처지에 빠트린 궁극적인 원흉인 천마는 아예 용암 속에다 처넣고 싶다.

만에 하나 다시 태어난다면 이런 독한 것들과는 두 번 다시 상종도 하지 않으리라. 문평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굳게 결심했다. 강호 따윈 꿈도 꾸지 않고 땅이나 파먹어야지. 칼이라곤 식칼도 들지 않겠다.

팽팽한 긴장감이 좁은 산길에 가득했다.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에 길짐승들조차 숨을 죽였다.

“이것 참. 재미있는 광경이로군요.”

일촉즉발의 상황.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기만 하면 피바람이 불어칠 국면 위로, 느닷없이 태연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서로만 신경 쓰고 있던 문평과 당문도들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일에 몰두했었다고는 하나, 일류 고수 여섯이 머리 위로 사람이 올 때까지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경계 어린 태도로 목소리가 들려온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서로에게 향하던 칼끝이 그곳으로 향한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뜻하지 않은 상황에 신경이 곤두선 우두머리 사내가 날카롭게 외쳤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듯 소매 속을 움켜쥔 그의 눈빛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하하하.”

우두머리 사내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낭랑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인영 하나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다. 간단한 동작이지만 마치 나뭇잎처럼 가뿐히 떨어지는 그 모습에서 표홀한 신법이 돋보였다.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문평은 상대의 무위가 녹록지 않음을 깨달았다.

험악하기 그지없는 대치 상황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참으로 이색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무위를 지닌 듯했지만, 몸은 하늘하늘했고, 얼굴도 곱상한 게 꼭 백면서생 같았다.

입고 있는 것도 폭이 넓고 화려한 화의華衣다. 영웅건 대신 문사건을 두르고, 눈에는 색이 들어간 이상한 애체愛逮를 끼고 있는 데다, 그에 더해 버드나무를 우아한 필치로 그려 낸 부채까지 들고 있어서 어느 모로 보나 팔자 좋은 화화공자花花公子였다.

그자는 그 화려한 부채를 펄럭펄럭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우두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이거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당문오독唐門五毒 여러분. 소생은 딱히 당문의 행사를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들여다보니 재미있는 일이 있는 듯하여 그만 실례를 하게 됐습니다.”

당문오독. 문평은 그의 말에 비로소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자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당문오독이라면 당문의 일대 제자 중에서 손꼽히는 다섯 제자를 일컫는다. 비록 다섯 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명성은 화산의 매화검수 못지않게 유명하다.

각기 독사, 전갈, 지네, 거미, 두꺼비를 대표하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각자가 매우 뛰어난 고수이지만, 천망진天網陣이라는 이름의 독진에 특화되어 있기에 더욱 무서웠다.

십만대산으로 물러간 마교, 그러니까 백련교와의 전쟁 때 무려 50이나 되는 고수를 고작 한 식경 만에 한 줌의 혈수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천망진이니만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자신이 상대하던 자들이 예상보다 더한 고수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문평은 오싹하니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칫 잘못했다면 진짜로 한 줌 핏물이 될 뻔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는 몰라도 당문도들의 정체를 알게 된 그보다 상대가 더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상대가 관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평을 핍박하던 당문오독의 수장은, 낭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호리호리한 화화공자를 바라보았다. 화화공자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면서 우두머리 사내를 바라보았다.

“화협花俠께서 여기엔 어쩐 일이시오?”

우두머리 사내는, 거의 공손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태도로 인사를 하며 잘생긴 청년을 맞았다. 아무리 봐도 서른이 넘지 않을 것 같은 화화공자는 우두머리 사내의 인사를 듣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것 참. 당대공자께서 이 윤 모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화협은 무슨 화협입니까. 앞에서는 금칠들을 해도 등 뒤에선 다들 화괴花怪라고 부르는 건 저도 압니다. 편하게 말하세요. 전 협이라 부르나 괴라 부르나 상관치 않습니다.”

‘화괴? 화괴라고?’

문평은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이름이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교 안에서 어렴풋한 풍문으로만 들은 이름이지만, 분명 그런 별호를 가진 강호 기인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다. 일반 백성들은 화협이라고 부르고, 강호 인사들은 화괴라고 부르는 사내. 강호 삼괴 중의 일인으로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무려 절정에 이른 고수. 그는 이름 그대로 기괴하고 호협한 짓을 일삼음으로써 강호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그에게는 강호인으로서는 매우 특이하다 할 만한 출신상의 이력이 있다. 그의 출신이 일반적인 강호의 문파가 아니라 북경의 명문 권세가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부친은 금의위錦衣衛의 도독都督이고, 그의 모친은 왕부의 군주郡主다. 그야말로 비할 바 없는 귀한 신분이다. 대장군부의 공자인 데다가 황제의 혈족. 그만한 위치가 되면 제아무리 관을 경원하는 강호의 인사들도 한 수 양보할 수밖에 없다.

그의 출신성분이 기억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평은 이 남자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내린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강호의 인사라면 모르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북경 권문세가의 인물. 거기에다 대장군부의 공자다. 이런 그가 강호인에게 핍박받고 있는 군관을 그냥 지나칠 것 같지 않았다.

문평은 얼른 무릎을 꿇고 화협 윤승효尹承曉에게 예를 다했다. 그의 머리가 아예 땅에 닿을 것처럼 깊이 숙어졌다. 천마에게도 이렇게 진심을 다해 인사를 해 본 적은 없을 정도였다.

“신 관량關糧, 금의위도독 윤휴명尹携明 장군의 막내 공자께 인사를 올립니다.”

당문오독의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자,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던 윤승효의 눈에서 이채가 빛났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자신을 향해 머리를 숙인 문평을 바라보았다.

“나라의 녹을 먹는 당당한 군관께서 어찌 마땅한 직위도 없는 야인에게 무릎을 굽히십니까. 관작을 받으신 것은 소생의 아버님이시지 소생이 아닌 것을요. 과례가 아니신지요?”

빈정거리는 것인지, 진심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높은 분들이 떠보듯 던지는 질문에 본의 아니게 단련되어 있던 문평은 꿋꿋한 태도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대장군부의 윤휴명 대장군께서는 건주 여진의 침입을 세 차례나 물리치셨던 일세의 영웅이시고, 군주께오서는 천자의 핏줄이시니 황친이 아니십니까. 명의 백성이자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 그런 핏줄을 가지신 분께 어찌 예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강호의 야인인 화협에게 인사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장군부의 공자와 군주의 아드님이신 분께 인사를 하는 거다. 문평은 오로지 한 가지만 보는 우직한 군인 연기를 제대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은 바가 적지 않으니 그를 흉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가 재미있었던지, 윤승효는 고개 숙인 문평을 내려다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어지간한 여인들보다 더 섬세한 얼굴에 달콤한 미소까지 떠오르자, 침어낙안沈魚落雁, 그 어떤 미인에도 비할 바가 못 되는 아찔한 미혹이 되었다.

“세상에 자식의 덕이 부모에게 돌아가는 법은 있어도, 부모의 덕이 자식에게 돌아가는 법은 없는 법입니다. 두 분의 덕은 두 분의 것이지 저의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형장께서는 저에게 그분들의 몫을 가로채라 하십니까?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부모의 재산을 훔칠까요? 형장은 저를 왜 그런 불효자로 만들려 하십니까?”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우면 뭘 할까? 속 알맹이가 정상이 아닌 것을. 윤승효는 그 꽃 같은 얼굴을 하고, 우아하고 단정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문평을 공황에 빠트렸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정성을 다해 인사를 건넸다가, 졸지에 사람을 불효자로 만드는 불한당이 되고 말았다.

문평은 생뚱맞기 그지없는 상대의 반응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시에 나타난 그를 보고 하늘에서 내려 준 구명줄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구명줄이 아니라 썩은 동아줄이었나 보다.

그러나 문평의 속없는 오해와는 달리 윤승효가 진짜로 시비를 건 상대는 문평이 아니라 당문오독이었다.

윤승효가 제멋대로 지껄인 말속에서 자신을 향한 일침을 제대로 알아챈 당문오독의 수장 당적형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파를 대표하는 대가문에서 태어나 촉망받는 후기지수로, 장차 문파를 대표할 고수로 키워지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자존심이 꺾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면전에서 가문을 믿고 까불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말 한마디에 그와 당문이 싸잡아 모욕당한 셈이었다.

당적형은 치솟는 성미를 드러내는 대신 침중하게 눈을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오만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일의 선후를 제대로 생각할 줄 알았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화괴와 대적해서는 안 된다.

화괴는 원래도 다루기 힘든 존재이지만, 지금처럼 명분을 쥐고 있을 때는 더욱 대적하기 힘든 적이다. 게다가 이번 일은 한 치만 잘못 소문이 돌아도 관의 개입을 받을 수 있는 불리한 사안. 섣불리 다루었다간 자신의 잘못된 처신으로 가문까지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화협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정황만 보고 상황을 오해하고 계신 듯하오. 저희에게도 입장이 있으니 부디 거기까지 들어 주시고 판단을 내리시는 게 어떠하겠소?”

청린사靑鱗蛇 당적형唐赤炯은 손을 들어 포권을 하며 점잖게 말했다. 당적형의 포권을 받은 윤승효는 눈을 크게 뜨더니, 유쾌한 듯 웃기 시작했다. 다 큰 사내의 웃음소리가 꼭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고 청량했다.

“제가 무슨 오해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당대공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감히 당문의 행사를 방해하려고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그냥 지나가던 길에 들른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구경꾼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계속하십시오.”

윤승효는 진짜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까지 휘휘 저어 가며 당적형의 말을 부인했다. 그러더니 한술 더 떠 앉기 편한 바위가 있는 길섶으로 가 퍼질러 앉기까지 했다.

그의 그러한 행동 때문에 산길에는 졸지에 싸워야 하는 사람 여섯과 구경꾼 하나가 생겼다. 구경거리로 전락한 기분에 당문오독 중 하나가 울컥한 표정으로 나서려 했지만, 당적형이 눈짓으로 이를 막았다. 화가 끓어오르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이 자리에서 저자와 군관 둘 다 죽여 살인멸구를 할 게 아니라면 그저 참을 수밖에 없다.

“관 형이라고 했소?”

상황이 여기까지 오니 드디어 문평도 눈치를 챘다. 윤승효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문평에게 도움을 주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승효가 나섰으면 윤승효와 당문 사이의 일이 되어 버렸을 테지만, 윤승효가 한발 물러나 관전함으로써 상황은 문평이 직접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화괴 같은 인물이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는 눈이 된다는 것은 당문 쪽에 적잖은 부담이 되는 일이다. 상대는 강호인도 아니고, 더군다나 관인이기까지 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라면 모르겠으나 남의 눈앞에서 함부로 핍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방금 전까지 손을 쓰는 것을 서슴지 않던 당문오독이 다시 대화로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윤승효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치 국면을 전환시켰다.

“그렇소이다.”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니, 문평 또한 상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문평은 무뚝뚝한 태도로나마 상대의 말을 받아 주었다.

“서투른 응대가 피차간에 오해를 부른 듯하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겠소. 일단 우리가 당문의 인물이라는 것은 화협께서 직접 증명해 주신 일이니 그에 대한 의심은 없길 바라오.”

당적형이 당당하게 주장했다. 끝까지 너 따위한테 호패를 보이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신분을 증명할 증인으로 겉으로는 관람자요 실제로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윤승효를 내세웠으니, 그의 낯을 깎지 않으려면 당적형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평은 마지못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협께서 증명해 주셨으니 그는 믿겠소.”

삐딱한 그의 대답에 당적형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얼핏 보기에도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했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의 절제를 발휘해 치미는 성미를 눌러 참았다.

“얼마 전, 당가타로 들어오던 상단이 습격당한 일이 발생했소. 우강羽江 어귀에서 벌어진 일인데, 은성표국恩城驃局과 당문이 계약을 맺고 행하던 정기적인 표행이었소.”

당적형은 누에고치 같은 눈썹을 꿈틀꿈틀 움직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표행을 이끌던 표두는 물론이거니와 표사와 쟁자수들까지 모두 몰살당했고, 당문으로 들어오는 중이던 표물 역시 도난당했소. 본 문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나서야 상황을 알게 되어 추적을 시작했지만 표물을 되찾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소. 우리가 간신히 얻은 정보가 있다면,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귀주 쪽으로 달아났으며 그들 중에 누군가가 표물을 운반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소.”

당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었으므로, 그 사건에 관해 설명하는 당적형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우강 어귀라.’

문평은 당적형의 설명을 듣고서야 당문오독이 유독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았다.

자신의 세력권이나 다름없는 우강 어귀에서 당문으로 오는 표물을 도난당했고, 그 사실을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알았으며, 아직까지 흉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내지도 못했다.

사천 제일의 토호로 사천을 넘어 전 중원을 호령하는 대가문인 당문의 체면이 사정없이 깎여 나가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자존심이 하늘 같은 당문인들이 그런 수모를 언제 또 겪어 봤겠는가?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것도 못 참는 자들이, 그 일에 얼마만 한 독심을 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갔다.

“본 문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훔쳐 간 표물 중에는 불의한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물건들이 있었다는 점이오. 강호로 흘러나가 사사로이 사용되면 필히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물건들이니, 물건의 원래 주인인 당문으로서는 책임지고 그것들을 회수할 수밖에 없소. 그래서 우리를 비롯한 칠색대가 파견된 거요. 그 물건들을 되찾기 위해서 말이오.”

이야기를 듣자니 명분은 참으로 그럴듯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교에서 정파인들에 대해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명분 가지고 사람 잡는다.’ 마교인들은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파인들을 그렇게 비꼬곤 했는데, 문평도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여타의 마교인들과 완전히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형장께서는 스스로가 안서의 군관이라고 우기지만, 우리로서는 그 말을 믿을 이유가 없소. 신분을 증명할 일행도 없고 평범한 백성의 행색도 아니니, 미안하지만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요. 이 의심을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되오. 혹시 다른 생각이 있다면 형장 역시 기탄없이 말해 주길 바라겠소.”

당적형은 문평에게 포권까지 하며 정중히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듯 옳은 일을 하려고 한 것뿐인데, 그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깃장을 놓았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길 가던 사람을 다짜고짜 붙잡고 검문을 하려다가, 그게 여의치 않자 무력까지 쓰려고 했던 자신들의 잘못은 입도 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문평의 잘못만 부각했다.

‘뭣이 어쩌고 어째?’

힘 있는 것들이 힘 있다고 떠는 유세에 치일 대로 치인 문평은 배알이 뒤틀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최대한 곱게 넘어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솟아오르는 신경질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욱하고 울화가 치미니 뱃속에선 또다시 자고子蠱가 춤을 춘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바닥을 기는데 설상가상이다.

문평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당적형을 바라보았다. 당적형은 뻔뻔하게도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는 얼굴을 하고, 문평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본관도 같은 생각이 드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 같구려.”

문평은 싸늘하게 말하며 품속을 뒤져 호패를 꺼냈다. 정교한 솜씨로 위조된 호패는 어찌나 현실감 있게 만들어졌던지, 겉모습만 봐서는 정말로 전장에서 구르고 채인 물건인 양 보였다.

당적형은 그가 호패를 꺼내자 슬쩍 눈을 빛냈다. 저것만 확인하고 나면 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이런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상대는 호패를 내놓고 이쪽은 내놓지 않았으니 상대를 굴복시킨 것이고, 호패를 확인해 신분을 알았으니 놓아 보내는 일 또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건방진 군관을 혼내 주진 못했지만 화괴에게 괜한 꼬투리를 잡히느니 이렇게나마 수습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러나 한번 비위가 뒤틀린 문평은 곱게 호패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참자 참자 하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무나 걷어찬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인데 하물며 자신은 지렁이도 아니고 사람이 아닌가.

저놈들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래 봬도 이 몸은 무려 천마에게도 밟혀 본 몸이다. 어디서 급도 안 되는 피라미들까지 밟으려고 덤비는 건가?

“이것이 제 호패입니다. 확인하시고 신분을 증명해 주십시오.”

문평은 품에서 꺼낸 호패를 들고 윤승효에게 다가갔다. 구경꾼을 자처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윤승효는 자신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는 문평을 난처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이보시오. 관 형. 이 몸은 아까부터 줄곧 구경꾼이라고 말해 왔지 않소? 그런 사람에게 어째서 이렇게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시는 게요?”

눈치를 보듯 슬쩍 당문오독을 바라본 윤승효가 곤란한 듯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러나 문평은 개의치 않고 윤승효의 무릎 위에 호패를 올려놓기까지 하며 처분에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당사자가 아니라 구경꾼이시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화협께서는 보통 구경꾼이 아니라 당문오독이 신분을 보증하는 증인으로 인정할 만큼 신의가 있으신 분 아니십니까? 그러니 저의 증인도 되어 주십시오. 화협이 증인이시라면 당문 사람들도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당적형을 무시하고 멀찍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 가서 확인을 요청한 것은, ‘나는 너희를 도저히 못 믿겠다’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던가. 변경 구석에서 평생을 구른 저 촌무지렁이는 감히 당문의 권위에 도전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무지로 인한 실수라고 해서 실수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용서를 모르는 성격의 당적형은 핏발이 선 매서운 눈으로 문평을 노려보았다. 저자가 보통의 강호인이었으면 단숨에 손을 써 목숨을 빼앗았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못내 분했다. 하다못해 일반 백성이기만 했어도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구경하게 만들었을 텐데.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당적형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의 힘이 되어 주었던 명분이, 지금만큼은 그의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에게 그들의 신분을 증명한 것은 윤승효다. 그 바람에 윤승효는 당문오독이 신뢰하는 객관적인 공증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데 그러고 나니 상대가 윤승효를 증인으로 내세우겠다는 주장을 거부할 방법이 없어졌다.

이쪽과 똑같은 방식으로 본인의 신분을 확인시키겠다는데 그걸 두고 대체 뭐라고 반대할 수 있겠는가? 설사 자기중심적인 당적형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모순된 주장을 펼칠 낯짝은 없었다.

“당문오독께서는 의견이 어떠십니까? 제가 이 일에 대한 증인이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저희 집안의 일로 그런 부담을 끼쳐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저자의 고집이 도를 넘으니 저희도 어쩔 수 없겠군요. 수고스럽겠지만 화협께서 확인을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당적형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윤승효의 청을 수락했다. 교묘하게 말을 비틀어 일말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 와중에도 잊지 않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기엔 감수해야 하는 굴욕이 너무 컸다.

“관 형께서도 부탁을 하시고, 당문오독께서 허락하셨으니 부족하지만 이 사람이 호패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름 관량. 나이는 서른 하나. 광서성廣西省 무의현武宜縣 출신. 신분은 관인이며 안서 좌천호소의 백호. 위조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호패에 찍힌 관인官印이 정확합니다.”

윤승효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 호패를 잠시 살피더니 딱 떨어지는 대답으로 문평의 무고함을 증명했다. 그 대답에 당적형의 이마에서 핏대가 푸들거리며 떨렸지만, 신분이 증명되었다는데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는 없었다.

“감사드립니다. 화협. 덕분에 스스로가 맡은 임무를 다했습니다.”

당적형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확연히 보이는 태도로 포권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작 마찰을 일으킨 당사자에게는 한마디 사과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문평은 묵묵히 호패를 도로 가슴에 챙겨 넣으며 그들을 소리 없이 비웃었다. 흥.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하니 전형적인 소인배들이구나. 그래 놓고 정파를 자처하다니. 낯짝도 두꺼운 작자들이다.

“이렇게 끝날 일인 줄 알았다면 달려오지나 말 것을. 구경거리가 생긴 줄 알고 신나서 찾아온 게 무안하군요. 간만에 흥미로운 소문 거리 하나 건지나 했는데.”

일이 대충 수습된 듯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윤승효가 옷을 툭툭 털면서 혼잣말을 했다. 혼잣말이라도 작은 목소리가 아니어서 당적형의 귀에도 충분히 들렸을 것인데, 당적형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문평은 급격히 윤승효가 마음에 들었다. 괜찮은 사람이다. 문평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강자 앞에서 약자를 옹호하고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남자란, 사나이의 표상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윤승효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관 형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지나는 길손도 없어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이참에 말벗이나 되어 주십시오.”

윤승효는 문평까지 착실히 챙겨 그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묻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문평은 얼른 윤승효를 따라나섰다.

떠나는 그들의 등 뒤로 누군가의 독살스러운 눈빛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비수였으면 족히 육회가 되고도 남았을 만큼 무시무시한 눈빛. 그러나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당장은 속이 시원해진 문평은 그들의 눈빛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들이 끝났다는 걸 시인했던 사안이니 이 일로 또 시비를 걸지는 못할 것이고, 관량이라는 이름을 뒤져 봤자 어차피 유령 신분이니 뒤가 잡힐 리도 없다.

‘다음에 만나는 당문인들 앞에서만 고분고분하면 되지 뭐.’

문평은 속 편한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번엔 잘하면 되는 거였다. 설마하니 이 넓은 귀주 땅에서 저 인간들을 두 번이야 만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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