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5 장 (6/26)

제 5 장

늦은 밤이지만, 장원의 이곳저곳에 선 전각들의 불빛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밤, 혹은 새벽이 고비. 꼬박 한 달 반을 노부인의 병세를 돌보며 그녀의 힘겨운 삶을 지탱해 왔던 의원마저도 오늘 저녁엔 고개를 흔들었다. 임종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제갈세가의 식구들은 물론이거니와, 빈청에서 머무는 빈객들, 그녀의 병세를 듣고 문안을 온 손님들. 그들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한겨울의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고희를 넘긴 연세니 호상好喪이라면 호상이지만, 평생 그녀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왔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은 그녀의 인생 앞에서 그저 경건해지기만 할 뿐, 감히 딴생각을 품지 못했다.

각기 다른 상념을 가진 사람들을 가득히 품고 있는 불 켜진 전각군. 그 전각들의 사이사이를 등불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녀에게 등을 들려 앞세운 사람은 제갈세가의 내전 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일총관 고흠원高欽原이다. 키가 크고, 풍채가 훌륭한 데다 선한 소 같은 인상이 두드러지는 그는, 현 제갈세가주인 천기수사天技修士 제갈부諸葛赴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자로 성품이 유달리 우직해 장우贛牛라고 불리기도 했다. 정말로 머리가 미련해서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니라 미련한 소처럼 믿을 만한 사람이란 의미에서 불리는 이름이었으니, 결국 칭찬인 셈이다.

그는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천재들의 가문으로 유명한 제갈세가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재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자신의 머리가 뛰어나기 때문에 손발로는 믿음직한 자를 찾고 있었던 제갈부에게는 그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고 총관님. 이 밤중에 어딜 가십니까?”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듯 뒤꼍에서 나오고 있던 빈객 중 하나가 고 총관을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해왔다. 고 총관은 진중한 얼굴로 빈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명받은 게 있어서 잠시 창고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말을 듣고 보니 고 총관의 허리춤에 광의 열쇠가 보였다.

“백 부인의 병세는 좀 어떻습니까. 차도가 있으십니까?”

빈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 총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빈객의 질문에 고 총관은 근심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빈객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오늘 밤이 고비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들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어요. 저도 오늘은 잠을 못 잘 것 같습니다.”

“예. 여러분들께서 걱정해 주시고 있다는 것 저희도 잘 압니다. 가주께서도 빈객 여러분의 걱정에 감사하실 것입니다.”

공손하게 고 총관이 머리를 숙이자, 인사를 받은 빈객이 얼른 만류했다. 남에게 인사를 받을 일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 무슨 말씀을. 강호의 여러 동도는 백 부인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분과 검협께서 해주신 일을 생각한다면 이런 일로 생색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지나치게 우직하고 진중하다는 평답게, 고 총관은 내내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평소의 그를 알고 있는 빈객으로서도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대화를 나누던 빈객의 눈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무공을 익힌 그들과는 다르게 그저 어린아이의 몸일 뿐인 그녀는 가뜩이나 추운데 어른들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그들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남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빈객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 총관을 놓아 보냈다.

“이런, 제가 바쁜 분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군요.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인사를 한 고 총관이 다시 길을 걸었다. 여자아이는 얼른 등을 들고 따라와 다시 길을 밝혔다.

“아니다. 이쪽 길이 아니라 내고內庫로 가자.”

여자아이는 자신에게 익숙한 바깥 창고 쪽으로 길을 잡아 갔다. 하나 고 총관은 외고가 아니라 내고로 가자며 길을 틀었다.

여자아이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지만, 까마득한 웃어른의 분부이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고 총관은 축축해진 손바닥을 소매 속으로 숨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교에서 지령이 내려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의 일이었다.

고 총관은 마교에서 중원으로 내보낸 고정 간자로, 20여 년 이상을 제갈세가에 머물며 정보를 빼내 왔다. 그는 보름 전 마교의 지령을 받고 자신의 역할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임무를 마치고 나면 자신은 더는 제갈세가에 남아 있을 수 없을 터였다. 혹은 아예 살아 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평생 보아 온 제갈세가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린패라.’

그가 소속되어 있는 추밀각의 각주 포영의는 보름 전, 비선을 통해 그에게 기린패를 훔쳐내라는 명을 내렸다. 마교 출신으로, 기린패에 얽힌 사연을 잘 알고 있는 고 총관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교에서 나온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에게 있어 천마는 영원한 태양이다. 척박한 신강 땅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 준 사람이 천마였으며, 영원한 변방에 불과하던 그들을 중원의 패자로 불리게 해준 이도 바로 그였다. 그 한 사람의 존재가 10만 마교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기린패는 그런 위대한 거인의 발목을 잡기만 하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기린패가 없었으면 융중지약도 없었을 것이고, 그 약속만 없었다면 마교가 아직도 천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을 터였다.

중원인들에게 기린패는 천고의 보물이었지만, 마교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지독한 흉물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걸 훔쳐 낸다. 천세 마교를 위하여!’

고 총관의 순한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타올랐다. 간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마인의 눈이 이 순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릿속으로 내고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그가 내고에 들어가 본 적은 단 한 번, 제갈부의 심부름으로 천 년 된 산삼을 넣으러 갔을 때뿐이다. 내고의 내부를 확인한 것은 그때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신중히 동선을 고려했다.

제갈세가에는 두 개의 창고가 있다. 각각 외고와 내고라고 불리는 것들인데, 외고外庫는 말 그대로 제갈세가의 바깥에 자리 잡고 있으며 쌀이나 비단, 돈, 식자재 같은 생필품들을 넣어 두는 장소이고, 내고는 그에 반해 제갈세가가 특별히 보관하고 있는 귀한 보물들을 모아 두는 곳으로 제갈세가의 중지에 위치해 있다.

제갈세가의 내고는 제갈세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보물들이 가득 쌓여 있는 장소다. 제갈세가의 비전 무공들은 물론이고, 갖가지 영물이며 영단들이 가득했다.

아무리 신임받는 가신이라고는 하나 고작 총관에 불과한 그가 그런 내고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리 없었다. 평소라면 감히 시도도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백 부인의 임종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수선한 현 상태에서는 그래도 해 볼 만한 모험이다.

‘백 부인의 서재나 침실에도 기린패는 없었다. 백 부인이 정신을 잃고 있던 것이 보름이 넘었는데, 그동안 몸시중을 든 시비 아이들도 그 물건을 보지는 못했다고 했지. 그럼 직접 몸에 지닌 것도 아니라는 소리야. 이제 남은 곳은 내고뿐이다. 제갈세가 내에 있는 건물 중 그곳만 찾아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기린패가 있다면 그곳에 있겠지’

내고에 생각이 이르기까지 기린패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던 고 총관은, 그 물건이 거기에 있을 거라는 사실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고를 제외한 다른 곳은 모두 찾아본 후였다.

집안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터라 그가 장원 내 여러 곳에 출몰해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위한 행운이라면, 생각이 닿는 모든 곳을 다 뒤졌어도 결국 그 물건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닥친 크나큰 시련이었다.

제갈세가의 내고는 신기제갈神機諸葛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가문답게 갖가지 진과 기관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다. 무려 일곱 가지 진이 서로 순서를 바꿔 가며 설치되는데, 해마다 낡은 곳을 보수하고 위치를 바꾸는 기관에, 요소요소에 보초까지 배치돼 있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년 전에 들어가 보긴 했지만, 그때 사용한 방법이 아직 통할 리 없다. 각 진의 파해법을 알아 두고, 기관 장치의 설계도를 훔쳐 숙지하긴 했지만, 진과 기관이라는 게 어디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는 터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 고 총관님. 여기 보세요.”

등불을 들고 걷던 소녀가 돌연 탄성을 발했다. 머릿속으로 일곱 가지 파해법을 열심히 기억해 내고 있던 고 총관은, 소녀의 탄성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조그마한 손으로 콧대를 가리면서 등불을 흔들어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부분을 비추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여기 무슨 얼룩 같은 것도 있고.”

“얼룩이라니. 무슨 얼룩?”

“모르겠어요. 으. 그런데 냄새가 지독해요.”

소녀의 말을 듣고 고 총관도 그곳을 살펴보았다. 과연 소녀의 말대로 거기엔 누렇고 이상한 물이 흘러 있었다. 코를 찌르는 강한 산의 냄새와 노릿한 비린내. 간자로 교육받은 고 총관의 머리에서 순간 냄새의 정체가 스쳐 지나갔다.

‘화골산化骨散!’

눈앞에 있는 액체의 정체를 알아낸 고 총관은 남몰래 경악했다. 다른 곳도 아닌 제갈세가의 내부에서 이리도 악랄한 물건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화골산은 보통 시체를 숨기기 위해 쓰는 강한 부식액으로, 일반적으로는 살만 녹여 뼈를 남기지만 어떤 종류는 뼈까지 녹여 누런 액수로 만들 만큼 극악한 것도 있었다. 얼마나 독한지, 뿌려진 자리엔 3년간 잡초도 안 자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인데, 그 정도의 물건은 사파에서조차 경원시하는 터라 아주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경아. 뒤로 물러서라.”

고 총관은 얼굴을 굳히며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가 잡아끄는 대로 얼떨결에 고 총관의 뒤로 물러난 소녀는, 심각해진 고 총관의 얼굴을 보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고 총관님?”

“그건 심각한 독액이라 몸에 닿으면 살이 타고 뼈가 녹는다. 다가가지 말고 조심스럽게 물러서.”

고 총관이 진지하게 말하자 깜짝 놀란 소녀가 다시 두어 발짝 물러섰다. 고 총관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그는 액체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자리가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던 보초가 숨어 있던 장소임을 깨달았다.

‘누군가 내고를 노리고 있다!’

같은 목적이 있었기에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정파인이 화골산 같은 물건을 썼을 리는 없고, 사파에서는 천마의 물건인 기린패에 감히 손댈 자가 없다. 하나 정파도 사파도 아니라면, 이 잔혹한 인물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가 노리고 있는 물건이었다.

‘기린패가 위험하다.’

제갈세가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목을 잡고 있던 기린패다. 그런 물건이 또다시 정체도 모르는 신비 세력의 손에 넘어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음이 조급해진 고 총관은 소녀를 향해 몸을 돌려 수혈을 짚었다. 눈가림 삼아 데려오긴 했지만,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그는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해질 장소에 아이를 데려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고 총관은 근처의 전각 안에 잠든 아이를 숨겨 놓고 몸을 날렸다. 부식액의 강한 악취를 따라 길을 가다 보니 자신보다 앞서간 자들의 행적을 어렵지 않게 쫓을 수 있었다.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제갈세가의 경비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벌써 다섯 명째의 골액骨液이 발견되자 고 총관의 눈에 불이 켜졌다.

화골산이 몸을 완전히 녹이는 시간은 대략 일각. 몸이 완전히 녹아 버린 자가 다섯이 될 때까지 그들을 발견치 못했다는 것은, 자신이 족히 이각 이상은 지체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는 신법을 드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바람에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몸이 드러나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신법을 드높인 그가 내고의 담을 막 넘었을 때, 검은 복면인들이 담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고 총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연검을 꺼내 상대에게 내질렀다.

파라라락.

잠자리 날개가 떨리듯 격렬한 검음을 내면서 연검이 상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상대는 필가차筆架叉의 호수차를 이용해 연검을 막았다. 진기를 이용해 연검을 휘게 했으나, 상대가 든 필가차는 호수차의 간격이 넓어 중간에 휘는 것이 막히고 말았다.

양손에 모두 필가차를 든 상대는 한쪽으론 연검을 막아 내고, 다른 쪽으론 고 총관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연검을 풀고 뒤로 물러선 고 총관은 담장 위의 기와를 발로 날려 위기를 모면했다.

위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때부터 오히려 시작이었다. 고 총관은 혼자였지만 상대는 셋이다.

고 총관이 허공에 몸을 날리자, 남은 둘 중 하나가 그에게 비수를 뿌렸다. 날아오는 비수를 피해 몸을 돌렸던 고 총관은 하체를 쓸어 오는 검기를 느끼고 대경해 다시 연검을 내질렀다.

독오른 뱀처럼 파르륵 몸을 떨며 연검이 상대의 검을 타고 올라갔다. 사내는 연검을 뿌리치기 위해 몸을 팽이처럼 돌렸다. 연검이 타고 올라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돌며 날아내린 사내는 연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고 총관의 눈에 백옥으로 만든 상자가 보였다. 복면인이 가슴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그 상자는, 평소 백 부인이 기린패를 보관하고 있던 바로 그 함이었다.

눈에 핏발이 선 고 총관이 몸을 날려 손을 뻗었다. 고 총관의 목표가 무엇인지 깨달은 복면인이 황급히 가슴을 가로막으며 몸을 뒤로 날렸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비수와 필가차를 든 다른 두 사람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고 총관도 무시 못 할 고수였지만, 공수 합벽이 완벽한 그들 세 사람을 홀로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 총관은 그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는 비수로 인해 너덜거렸고, 소맷자락도 찢어져 몸을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다.

짧은 순간 여러 번의 공수가 교환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질 뿐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비책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고 총관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고 저자들은 기린패를 챙겨 들고 유유히 자리를 떠날 것이다.

평소라면 세가 내의 중지에서 이만한 공방이 오갔을 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아니었으나, 오늘 같은 경우 신경이 온통 백 부인에게로 쏠려 있어 이런 소란이 있음에도 알아차리는 자가 없었다. 자신도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을 노리지 않았던가.

“기린패를 도둑맞았다!!”

고 총관은 연검으로 몸을 감싸며 급급히 방어하다가, 돌연 방어를 멈추고 내공을 가득 실은 일성을 토해냈다.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기에, 그의 고함은 세가 내 전체에 달하도록 울려 퍼졌다.

“제기랄!”

설마하니 그가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던 듯, 복면인 중 한 명이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전각들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높아지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까지 들리자 더욱 다급해진 그들은 재빨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고 총관은 그들을 악착같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오살할 놈!”

고 총관이 끝까지 그들의 발목을 잡자, 검을 들고 있는 놈이 버럭 화를 내며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고 총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비수를 막느라 미처 보지 못했지만, 놈이 꺼낸 것은 다섯 구의 시신을 녹였던 바로 그 화골산이었다.

그는 물러서는 고 총관에게 화골산을 뿌렸다. 죽지도 않고 산 채로, 그것도 안면에 지독한 부식액을 맞은 고 총관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두 눈이 화끈하더니 곧 타오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안구가 타버린 듯 앞이 보이지 않는다. 제 몸이 타는 냄새가 끔찍하리만큼 적나라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격전 중에 시야를 빼앗긴 그는 곧 심장이 찔렸고, 그의 무거운 몸은 바닥으로 굴렀다. 그때까지도 화골산은 그의 얼굴을 태웠다. 산 채로 살을 태우고 근육을 녹여 뼈를 드러냈다.

고 총관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

늦은 밤, 일과를 마치고 이제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호완평은 자리에 눕다 말고 한 사람의 방문객을 맞게 되었다. 타인을 방문하기엔 실례가 될 정도로 늦은 시각에 갑작스럽게 그를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삼사제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린패가 사라지다니?”

호완평은 다급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포영의를 향해 의아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기린패를 무사히 훔쳐냈다는 뜻이냐?”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진짜로 기린패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 비선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제갈세가의 내고에 있던 기린패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치는 느낌이었다. 잠시 아찔한 기분이었던 호완평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무슨 말이냐?”

“어제 자정에 제갈세가의 내고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자들은 보초 일곱을 화골산으로 녹이고, 내고 내에까지 침입해 기린패를 훔쳐 갔습니다. 그걸 막느라 고 총관이 죽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밤에 백 부인까지 임종해서 지금 제갈세가가 발칵 뒤집혔답니다.”

이야기를 듣던 중에 낯익은 이름이 하나 있었다. 호완평은 그 점을 짚어 냈다.

“고 총관이라면 제갈세가에 침투해 있던 우리 측 간자가 아니냐?”

“네. 맞습니다. 그 사람입니다. 이번에 기린패를 훔쳐내도록 명받았던 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기린패는 사라졌다?”

“누가 갖고 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고 총관이 죽기 전에 기린패를 도둑맞는다고 소리 질렀다는데, 아무래도 그가 기린패를 훔치는 자들과 맞닥트렸던 모양입니다.”

포영의의 얼굴이 한없이 심각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완평도 동요를 쉬이 감출 수 없었다. 기린패가 사라졌다. 하나, 자신들의 손으로 거둔 것은 아니다.

제길. 상황이 답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제갈세가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책이던 고 총관마저 사라졌으니 일이 복잡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합니까? 상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자신들의 손에 있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은 물건이 기린패다. 그런 물건을 정체도 모를 자들에게 빼앗겼으니 그들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네 생각에 상대의 정체가 무엇일 것 같으냐?”

“알 수 없습니다. 천하에 기린패를 탐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정도맹, 상인 연합, 장강수로맹, 황실……. 세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탐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탐보망에 그들 또한 걸려 있지 않으냐. 설사 네가 놓쳤다 하더라도 이미 쳐 놓은 그물이 있는데 이렇게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긴 어렵지. 분명 그들이 아닌 제삼의 조직이 있는 게 분명해.”

제삼의 조직.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머리에서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 두 사람이 몇 시간 동안 회의를 하게 만들었던 한 사람의 이름이다. 호완평은 낮은 침음성을 발했고, 포영의는 생각에 잠긴 태도로 턱을 매만졌다. 호완평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포영의에게 물었다.

“……네 생각에도 그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으냐?”

“그의 소식을 듣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그의 이름이 한번 물 밖으로 나온 상태입니다. 20여 년이 넘게 꼼짝도 하지 않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포착될 정도로 활동 중이라는 소린데, 정황으로 봐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그럼 기린패가 백우경보다 더 위험한 자의 손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구나.”

“그 가정이야말로 최악이겠지만, 네. 그럴 가능성을 부인할 순 없다고 봅니다.”

호완평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리더니,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일을 사부께서 아셔서는 안 된다.”

“사형?”

“끝까지 숨기자는 게 아니다. 당분간만이다, 당분간. 적어도 누구의 손에 기린패가 들어갔는지, 그것이라도 밝혀낸 후에 알려 드리자는 거다. 너도 알겠지만 기린패는 사부께 각별한 물건이다. 그 물건이 그런 식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면 틀림없이 혼자 몸으로라도 중원으로 나가실 거다.”

언제나 그렇듯 호완평은 한 사람만 걱정했다. 포영의는 답답한 얼굴로 그런 호완평을 탓했다.

“당분간이나마 사부의 이목을 가리실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분이 얼마나 예리한 분이신지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아니. 다행히 잠시 그분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을 거다.”

포영의의 다그침에, 호완평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금시초문이군요.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포영의는 호완평의 자신감을 보고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나마 그분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자신의 사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사부께서 지금 한창 열중하고 있는 상대가 있다는 소리다. 무언가에 한 번 관심을 가지시면 다른 곳에 쉬이 눈을 돌리지 않으시는 분이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그러니, 시간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상대를 추적해라.”

여전히 영문 모를 말이다. 그러나 호완평이 워낙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포영의도 더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주 잠시뿐이다. 평생을 마교라는 거대한 집단을 움직인 분이시니, 작은 실마리에도 모든 일을 눈치채실 게 뻔하다.

포영의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여서 마음이 급했다.

포영의가 방을 나간 자리에, 호완평은 홀로 남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똑똑 서탁을 두드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대부분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존재였지만, 간혹가다 그렇지 않은 이름도 있었다.

“네가 시간을 벌어 줘야겠다. 석문평.”

포영의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던 호완평은, 근래 사부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존재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처음 그를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그가 이렇게 유용해질 줄은 몰랐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사부의 관심을 끌어내는 바람에 훌륭한 방패막이가 될 듯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잠깐이나마 사부의 주의를 돌릴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만도 행운이다. 그렇게 생각한 호완평은 자신의 머릿속에 석문평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를 포함 시킨 큰 계획을 머릿속에서 짜내기 시작했다.

***

“아니, 잠깐만요 아가씨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아침 세수를 끝내고 상쾌하게 방으로 돌아오던 석문평은, 자신의 방에서 줄줄이 나오는 시비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하게 보다 보니 그녀들이 손에 하나씩 들고나오는 물건들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문평 자신의 개인 소유물이었다.

놀란 문평은 그녀들에게 다가가며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이건 내 물건들인데요. 왜 이런 걸 가지고 나오시는 겁니까?”

자신의 검, 자신의 의복 보따리, 몰래 숨겨 놓았던 술병에, 심지어는 춘화집까지.

당혹해하며 시비의 손에서 자기 춘화집을 빼앗은 문평은 그걸 품에 확 하니 끌어안으며 시비들의 면면을 살폈다. 어째 많이 낯익은 얼굴들이다.

“윗분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그가 매섭게 따지고 들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들 등 뒤에서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여인, 란란의 목소리였다.

문평은 시비들이 몸을 물려 만든 길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란란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뇌정전의 수석 시비로, 천마의 시중만을 드는 그녀가 이런 허술한 일반 무사의 숙소까지 내려온 연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윗분이라면, 그분 말씀이십니까?”

석문평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질문을 던졌다. 언제나 그렇듯 깔끔한 어조로 란란이 대답했다.

“아뇨. 그 아랫분이십니다.”

호완평이라는 소리 같았다.

“그분이 왜?”

“뇌정전으로 석 무사님의 짐을 옮기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뇌정전의 전각이 하나 비워질 겁니다.”

“뭐, 뭐라고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개에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되물었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더러 뇌정전으로 가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보다 훨씬 넓고 쾌적한 곳입니다.”

문평이 왜 그렇게 경악하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딴소리를 했다. 그러더니 말을 잇지 못하는 문평을 지나 밖으로 걸어가 버렸다.

문평의 눈앞에서 자신의 물건들이 줄줄이 방을 나섰다.

그의 검. 그의 옷가지. 그의 속옷. 게다가 또 술병하고 춘화집…….

‘아니 잠깐만. 당신들 대체 뭐야? 그냥 한 번이라도 내 의사를 좀 물어봐 주면 안 돼?’

그녀들이 들고 가는 물건 중에는 그의 전낭도 있었다. 그게 없으면 자신은 앞으로 술도 못 먹는다. 대경한 문평은 그녀들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중간에 물건을 빼앗지도 못하고, 그녀들의 발걸음을 멈추게도 하지 못한 채 결국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뇌정전이었다. 그가 달라고 손을 내밀 때마다 생긋 웃으며 손을 피하는 아가씨들을 차마 험하게 대할 수 없었던 석문평은, 뇌정전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설탕에 꾀이는 개미처럼 자기 물건들에 꾀여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난 왜 이렇게 둔할까. 왜 이리 멍청할까.’

자책감에 주먹으로 머리를 두드렸지만, 그런다고 해서 나쁜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 전각을 치워 두었는지, 그의 짐은 하나의 전각 안으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천마의 침소와 불길할 정도로 가까운 그 전각은 문평이 이제껏 살아왔던 그 어떤 장소보다 호화찬란했다.

서역풍을 좋아하는 천마의 취향을 따랐는지, 바닥에는 아름다운 바닥 깔개가 깔려 있었다. 양털로 촘촘하게 짠 바닥 깔개는 흰 바탕에 푸른색 당초무늬를 섬세하게 짜 넣은 귀중품이었는데, 색상이 색상인지라 바닥 전체에 청화백자를 깐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흑단목으로 만든 침상은 사람 넷이 누워도 상관없을 정도로 커다랬고, 비단 금침에, 그에 더해 견사로 만든 비단 휘장까지 둘러 송구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웠다.

다탁은 자단목이고, 농과 장은 칠보를 둘렀으며, 그는 읽어 본 적도 없는 책들이 가득 찬 책장에는 자개가 반짝거렸다. 볼 줄도 모르는 그림, 읽을 줄 모르는 글씨가 벽에 붙어 있고, 이 겨울에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르는 생화 꽃다발이 놓여 있어 인간 세상인지 별천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런 방에 살기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석문평도 잘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문평 그 자신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번쩍번쩍하고 휘황한 물건들에서 강한 위협감을 느꼈다. 서방 잘 만나 팔자 핀 여인네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그에게 익숙한 생활감과는 전혀 관계없는 낯선 장소가 무서웠다. 문평은 절대로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지금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천마가 이런 장소를 자신에게 제공했다면, 석문평은 화를 내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래. 그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해서, 자신과 격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이런 전각을 덥석 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완평은 아니다. 그는 천마와 다른 성격이다. 그가 애초에 문평을 이 자리에 밀어 넣은 것은, 첩 노릇을 위해서가 아니라 첩자 노릇을 하라는 뜻이었다. 첩자라는 것을 들켜도 죽지 않기 위한 예방책으로 미인계를 쓰긴 했지만, 그거야 본래 업무에 부가 되는 내용이지 본이 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느닷없는 선물을 하는 건지 문평은 알 수 없었다.

선물이라고 좋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문평에겐 잘 포장한 진천뢰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천마에게 당한 일이야 하소연도 못 할 만큼 많았지만, 사실 그런 일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천마가 아니라 호완평에게 있었다. 모든 일의 원흉은 천마가 아니라 호완평이다. 자기 사부에게 지독하게 집착하는 그 이상한 변태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이렇듯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석문평은 호완평이 주는 것이면 설사 후아주라고 할지라도 경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자신에게 호완평이 했던 짓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의심은 약과에 불과하다.

“벌써 도착했군. 방은 마음에 드나?”

마침 자기 생각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호완평이 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

문평이 망연자실해 있는 동안 당연한 것처럼 그의 물건들을 방 안에 정돈하고 있던 시비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인사를 건넨다. 자연스레 인사를 받은 호완평이 시비를 밖으로 물렸다.

석문평은 의심 어린 시선으로 그런 호완평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문평이 냉담히 물었지만, 호완평은 그에 대답하지 않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마련한 신접살림을 검사하는 듯 꼼꼼히 주위를 둘러본 그는 한참 후에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괜찮게 꾸며 놨군. 너무 급하게 준비한 거라 소홀한 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석문평은 영락없는 동문서답에 못내 짜증이 났다. 지금 그가 화를 내는 건 방이 괜찮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의 방이 갑자기 바뀐 것이 화나는 것이고, 자신에게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는 방식에 화가 나는 것이다.

아무리 까마득한 부하라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문평은 과거 몇 번이고 당했던 수법이 또 등장하는 것 같아 조용히 이를 갈았다.

“단주님께 여쭙습니다. 제가 왜 갑자기 이런 방을 가지게 된 겁니까?”

이번만은 결코 그런 식으로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문평이 당당히 따지고 들었다.

“이 방뿐만 아니라 이 전각 전체가 자네 걸세. 따로 시비도 붙여 주려고 하는데, 자네가 눈여겨본 아이가 있나?”

“단주님!”

“늦었다고 화내는 거라면 용서하게. 내가 요즘 바쁜 일이 너무 많아서 미처 신경을 못 썼네. 진즉에 거처를 바꿔 줬어야 하는 건데 내가 너무 소홀했지.”

사람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 계속해서 자기 할 말만 하는 그의 태도에 석문평은 이제 진짜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새파랗게 노려보기 시작하자, 호완평이 말을 멈췄다. 그는 물끄러미 석문평을 바라보았는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고 무심한 눈길이었다.

“내가 왜 자네를 이 전각으로 옮겼는지 물었나?”

호완평이 조용히 물었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물처럼 고요하고 담담하다. 하지만 가끔씩 그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였다. 석문평은 천마의 압도적인 기세와는 또 다른, 지그시 짓누르는 듯 내리누르는 호완평의 기도에서 묵직한 압박을 느꼈다.

“자네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라면 대답해 주지. 자네의 처지가 변했기 때문일세.”

“제 처지가 변하다니요?”

“자네의 처지가 더는 하급 무사인 석문평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소리지. 자네는 이미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버렸지 않은가?”

그가 하는 말의 의도는 명백했다. 대놓고 남총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호완평의 말 없는 태도는 그보다 더 무거웠다. 문평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네가 더는 다른 하급 무사들과 같지 않다는 건 본인 스스로도 잘 알 거야.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이지. 그런 상황에서 일반 무사들과 같은 숙소를 쓴다는 건 괜한 충돌만 만들어 낼 뿐이야. 그래서 숙소를 옮긴 거네.”

“……괜, 찮습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너는 이제 보통의 하급 무사가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호완평에게 깊은 모욕감을 느낀 석문평이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호완평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 혼자 참아서 될 일이 아니야. 자네 때문에 불편해하는 다른 이들을 생각해야지. 자네가 그들이라면 어떻겠는가? 그들도 자네가 어느 분의 총애를 받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같이 생활하는 이들의 마음이 편하겠나?

그들은 자네가 있으면 수욕장도 마음대로 못 쓰고, 자네가 밥을 먹으면 그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지도 못해. 수욕장도, 식당도, 심지어는 연무장에서도 자네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일세.

다른 무사들이 일부러 자네가 사용하는 시간을 피해 다닌다는 사실을 설마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어떤 자들은 벌거벗은 자네와 마주칠 걸 두려워해서 아예 숙소의 수욕장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자네는 자네 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에게 그런 불편을 끼쳐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호완평의 지적에 문평은 할 말이 없었다.

문평은 단 한 번도 그 생활에 대해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돌린다고 생각했었고, 자신을 싫어해서 피한다고만 여겼다.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망연해진 문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의 처지에만 관심이 쏠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문평은 호완평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과 같은 처소를 썼던 다른 무사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여견자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

호완평은 또다시 물었다. 여전히 무심하고 담담한 음성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으므로 석문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본명은 강구회姜究誨라는 자로, 적호각 소속의 무인이었으니 내 수하였지. 본래는 그리 나쁜 친구가 아닌데, 술버릇이 너무 고약해서 친구들이 놀림 삼아 그를 여견자라고 불렀다더군.”

술버릇이 나쁜 남자라. 그 이야기를 듣자 석문평은 그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죽었네. 누구에겐가 팔의 관절을 다치고 몸져누워 있던 다음날,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지. 그 전날 팔이 빠졌었던 것 외에 외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떠도는 소문을 들어보니 그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겠더군.”

호완평의 눈길이 의미심장하게 문평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도 문평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냥 물러나신 게 아니었구나. 기어코 손을 쓰신 게로구나.’

뜻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너무 안이했던 것 같다. 그분 성격에 한 번 하고자 나선 일을 하지 않고 물러나셨을 리가 없는데. 그때 자기는 어째서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한 번은 그냥 돌려보냈으면서 끝내는 다시 찾아와 이름을 묻던 분이었다. 그런 집요함을 보고 나서도 그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 믿었다니, 자신은 참 어이없는 사람이었다.

“자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천마라는 이름은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바꾸는 분이시네. 자네가 아무리 예전처럼 돌아가려고 발버둥 쳐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분과 자네 사이에 접점이 생긴 이상 결코 예전 같아질 순 없다는 말이야. 자네도 변했고, 자네의 주변도 변했네. 그러니 더는 옛일에 미련 갖지 말게.”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는 문평을 걱정했음일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호완평이 충고를 건넸다.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선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것이 변할 거라고 말했다. 이미 천마를 만났으므로. 주변 사람 모두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그 폭풍 같은 남자와 그가 만나 버렸으므로, 그의 인생이 변할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석문평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는 것 따윈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이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면,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또다시 인생이 바뀔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천마처럼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자기 인생을 맡기다니,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문평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자신의 각오를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천마 하나 때문에, 그 한 사람에게 휘둘려 자신의 인생 전체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다. 오늘의 삶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뿌리 하나 없는 내가 이 세상에서 버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니. 자네는 이미 변했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할 걸세.”

호완평이 단정적으로 말하며 안쓰러운 눈길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그의 단호한 어조에 문평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변한다니? 아니, 이미 변했다니?’

“조금 전을 생각해 보게. 자네가 내게 했던 행동을, 그리고 말들을. 자네가 예전 그대로였다면 과연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그런 식으로 화를 내고 노려보며, 설명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호완평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석문평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머리 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호완평의 앞에서 지금처럼 함부로 굴 수 없었을 것이다. 의도를 추궁하고, 대답을 요구하고. 대답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기세를 세우다니.

석문평은 자신이 감히 천마의 제자이며 마중사기의 일인인 호완평에게 그렇게 행동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건 하급 무사였을 당시의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만 죽지만 않게 요령을 피우는 것이 전부였던 자신이 언제 이렇게 변한 것일까.

‘내가 변했단 말인가? 벌써 변해 버렸다고?’

뜻하지 않는 자각에 가슴이 흔들렸다.

그의 마음속에 곧게 자리를 잡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둥 하나가. 조금 전까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어 온 그것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는 호완평이 한 마디도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맞는 말을 했다.

자신은 변하고 있었다. 천마라는 사람에 의해.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닌, 그 사람의 힘과 능력에 의지해.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그의 뿌리가 변질된 것이다.

소스라친 자각은 매섭고도 날카로웠다.

***

‘원래 잡초도 옮겨 심으면 저렇게 시들시들한 건가? 애가 영 매가리가 없구먼.’

천마는 한쪽 손을 턱에 괸 자세 그대로 문평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문평은 어디에 넋을 놓고 있는지 온종일 멍한 상태로 초점을 놓아 버린 눈을 하고 있었다. 늘 앉는 의자에 앉아 있긴 했지만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 버린 듯, 천마가 흘끔흘끔 살펴보다 못해 아예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문평이 숙소를 뇌정전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천마도 들어 알고 있다. 먼저 일을 쳐 놓고 끝난 후에야 사후보고 하는 완평이 놈 때문에 기가 막히긴 했지만, 정사를 끝낸 후 지친 몸을 하고서도 제법 먼 하급 무사의 숙소를 오가는 게 좀 마땅찮기도 했던 터라 그냥 놔두었던 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마는 완평의 보고를 듣고, 문평의 반응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지키려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문평이다 보니, 이번에도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첩 취급이라고 생각하며 펄펄 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문평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이번에도 대단한 구경거리가 될 것이었다.

요즘은 담이 커져 가끔 한 번씩 맹랑한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천마는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문평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닌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 흥미진진했던 희망과 달리, 정작 문평의 반응은 영 심심하기만 했다. 문평이라면 당연히 보일 거라고 믿었던 생생한 반응 따윈 다 어디로 가고, 덩그렇게 몸만 남은 백치만 있었다.

천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석문평의 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코앞에 다가갈 때까지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문평은, 뒤늦게야 천마를 발견하고 탁한 눈에 빛을 되돌렸다.

자신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까먹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천마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 문평의 코앞에서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너무 바짝 다가와 붙은 얼굴이 불편한 듯, 고개를 뒤쪽으로 살짝 물리며 문평이 물었다. 자기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모양인지 그는 외려 갑자기 왜 이러느냐는 시선으로 천마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기감이 아예 없지?”

천마는 그 얼굴을 여전히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기감이 아예 없다니?’

문평은 그가 무인으로서 병신이 아니냐고 태연히 묻는 천마를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저도 기감은 있습니다.”

“한데 사람 기척을 왜 이렇게 못 느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난데. 나 같은 사람이 코앞에 도달할 때까지도 그걸 못 느낀다는 게 말이나 돼?”

다른 사람이 내뱉은 말이었다면 터무니없이 광오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맹수처럼, 그중에서도 특히 호랑이나 사자 같은 최상위 포식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감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다니는 천마의 경우라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천마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는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어, 신체와 정신 안팎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는 등봉조극의 경지까지 이루었다. 그런 그가 아직도 기세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는 이유는, 그의 말에 따르면 ‘약한 자들에게 미리 알아서 피하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신호는 설사 기감이 약한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음이 복잡해 잠시 딴생각을 좀 했었습니다. 근무 중에 정신을 판 것, 사죄드립니다.”

문평이 정중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요즘은 좀 튀게 굴더니만, 다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간 듯 재미없고 뻣뻣한 반응이다.

‘허어, 이놈 봐라? 무인이라는 놈이 자기 경계가 소홀해진 것을 반성하는 게 아니라 딴생각을 한 걸 반성해?’

천마는 살짝 기가 막혔다. 만약 자기 제자 같았으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낼 일이었다. 하지만 석문평은 그의 제자가 아니고, 딱히 수하라고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천마는 문평에게 무인으로서의 경지를 강요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가 문평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

“너야 항상 마음이 복잡하지. 늘 잡다하고, 번다하고. 그야말로 온 세상의 번뇌란 번뇌는 혼자 다 끌어안고 살고 있지 않나?”

항상 딴생각하고, 언제나 마음 복잡한 놈이 뭐가 새삼스럽다고 이러는 건지. 막 솟아오르던 흥미가 문평의 말을 듣고 도로 사그라졌다. 머리통이 빠개지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놈이니, 이놈은 늘 생각만 한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주님껜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막 허리를 펴고 일어서 몸을 돌리려는데, 문평이 질문을 던졌다. 자기 입으로 먼저 질문을 던지는 건 그에게 매우 드문 일인지라, 천마는 막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에 대답해 주었다.

“그래. 내겐 그렇게 보인다.”

“그런가요?”

석문평은 씁쓸히 웃었다. 천마는 자신이 생각 많고 복잡한 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호기심은 많지만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복잡한 것이 싫어 단순하고 직선적인 쾌검술을 배웠던 사람이다.

천마가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것은, 그가 천마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만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나는 벌써 거기서부터 변하고 있었던 건가?’

인정하기 싫었지만 확실히 호완평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미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지남철 옆에 철을 오래 놔두면 그것까지 지남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마와 같이 강렬한 인물 곁에 붙들려 있는 그는 벌써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고작해야 몸을 내주고 그에게 쾌락 몇 번을 선사했을 뿐인데도 그와 비슷한 위치의 인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건 꼭 질리면 버려질 인형이, 자신이 주인과 똑같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꼴이었다.

“복잡한 생각 따위 하기 싫어하면서도 굳이 생각을 하는 놈이지, 넌.”

막 돌아서려던 천마가, 문평의 오묘해진 표정을 보고는 불쑥 말을 던졌다. 석문평은 생각에 잠긴 눈을 들어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생각의 무게에 자기가 짓눌리는 놈. 명색이 무인이면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구분을 못 하지.”

천마가 손가락을 뻗었다. 그는 문평의 이마 한가운데를 검지로 쿡 찍으며 밀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 네가 다 끌어안고 간다고 해서 그걸 감당할 수 있단 생각 따윈 하지 말고.”

문평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과감한 충고를 하는 건 참 그다운 일이었다.

“……뭘 버려야 할지 확신이 안 서는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스승에게 화두를 묻는 어린 사미승처럼, 진지한 얼굴을 한 문평이 천마에게 답을 구했다.

“바보냐. 그것도 몰라? 가장 무거운 것을 버려야지. 배가 침몰하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더 있나? 보아하니 그리 튼튼한 배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천마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하고 보니 이상했다.

‘내가 이놈에게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해주고 있는 거지?’

이런 이야긴 자신의 제자들한테나 할 법한 소리였다. 그것도 간만에 마음이 아주 크게 내킬 때만.

‘녀석이 보통 때와 영판 다르니 신경이 쓰였던 건가? 아니. 근데 내가 이놈한테 신경을 왜 쓰는 거지?’

문평을 그저 갖고 놀기 쉬운 장난감 취급하던 천마로서는 그를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썩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들이 다 당신 같은 사람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고 아우성쳐도 본인만은 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였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이상하게 본인의 의도와 상관이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해괴한 행동을 말이다.

그것도 딱 한 놈 앞에서만.

‘잡초, 잡초 했더니만 이 녀석 사실은 독초였나?’

꼭 아편이라도 먹은 것 같은 기분에 그런 혼잣말을 했다가,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에 또다시 웃고 말았다.

‘뭐야. 나를 이렇게 움직이는 게 아편이라고? 그럼 이 녀석은 양귀비란 말이야? 잡초 주제에 웬 양귀비?’

“그런데, 내 충고가 좀 비싸다는 건 알고 있나?”

매양 잡초하고만 같이 있다 보니, 잡생각이 많아지는 것까지 잡초를 닮아가나 보다. 문평 이상으로 복잡한 생각을 싫어하는 천마는 문평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늘 그렇듯 엉거주춤, 그의 품으로 끌려 들어온 문평이 빤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본다. 늘 유리처럼 투명하게 그 속내를 비치던 눈빛이 오늘따라 유달리 뿌옇다.

‘생각하는 걸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지.’

입가에 비스듬히 미소를 지은 천마는 문평의 오금 아래로 팔을 넣어 그를 신부처럼 들어 올렸다.

“그걸 다 갚으려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해야 할 거야. 네 몸값으로 감당이 되는 가격이 아니거든.”

천마는 문평을 탁자로 데려가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당연한 듯 옷을 벗겼다.

문평은 그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온몸을 꽁꽁 싸맸던 옷자락이 순식간에 해체가 돼도, 자신의 다리 사이에 거침없이 손이 들어와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놈 하는 꼴을 보니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몰아내려면 시간이 좀 많이 걸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천마는 그게 썩 나쁜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려운 도전이란 언제나 큰 쾌감을 준다. 단 한 번도 마음먹은 일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던 천마는, 이번에도 자신이 성공할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마의 성적 취향은 다양하고도 즉흥적이어서, 문평은 그와 관계를 하기 전까진 상상도 못 했던 부류의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관계하던 도중 비단 끈에 묶여 본 적도 있었고, 하반신에 꿀을 떨어트리고 그것을 핥아먹은 적도 있었다. 소녀경에도 안 나올 것 같은 기기묘묘한 체위를 겪어 보기도 했으며, 장소를 가리지 않는 천마 덕분에 무려 청간도 경험해 봤다.

그런 선례에 비춰 본다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정사를 벌이는 일 정도야 매우 얌전한 경우에 속했다.

문평은 상의는 풀어 헤쳐지고 하의는 흘러내린 채 탁자 위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넓고 단단한 자단목의 탁자는 표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워서, 등에 힘을 주고 누워 있지 않으면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문평은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탁자의 테두리를 붙잡았다. 그래도 불안정한 자세는 고쳐지지 않았다.

천마가 문평의 벗은 다리 사이에 섰다. 벗은 허벅지 사이로 그의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의 다 벗은 거나 다름이 없는 문평에 비해, 천마는 아직도 옷을 빈틈없이 갖춰 입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흑의를 즐겨 입었는데, 덕분에 그가 몸 위로 허리를 숙이면 머리 위로 어둠이 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을 감아.”

천마가 은근한 목소리로 문평에게 재촉했다. 정사를 시작할 때만 들을 수 있는 꿀처럼 감미로운 음성에 문평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직후, 긴장한 턱 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비단보다 더 보드랍고 목면보다 더 따스한 그 어떤 것. 말도 못 하게 감미로운 감촉을 가진 그것이 턱을 덧그리듯 지나더니 뺨을 쓸었다.

감은 눈 위로 그것이 다가오는 촉각이 느껴진다. 감은 눈가에 낯선 물건이 다가올 때는 늘 그러듯이, 미간 사이가 간질간질해졌다.

“눈 감아.”

거듭된 간지러움에 부르르 속눈썹을 떨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뜰 뻔했던 문평은 천마의 명령을 듣고 다시 눈을 감았다.

깃털처럼 보들보들하고, 그러면서도 폭신한 감촉이 느껴지는 ‘그것’이 입술 위에 연지를 그리듯 다가왔다. 작은 잔털의 느낌이 얇은 입술에 생생하다. 덕분에 문평은 지금 자신을 간질이고 있는 것이 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이 이렇게나 좋은 걸 보니, 붓 중에서도 아주 상질의 붓일 것이다.

그런 문평의 예상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지금 문평의 몸 위를 희롱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담비 털로 만든 붓이다. 곤륜산에서 잡은 희귀한 은담비의 털로 만든 이 붓은, 담비의 털 중에서도 가장 보드라운 목덜미 털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붓 중에서도 최상등품으로 친다.

담비 붓은 글씨를 쓸 때도 물론 좋지만, 그림을 그릴 때야말로 적격이라 화공들 사이에선 웃돈을 얹어 주고서라도 꼭 구하고 싶어 하는 물건이다.

천마는 이 붓을 선물 받았다. 그가 수연 때 석란을 그려 준 것이 감사하다며 만수백요가 보낸 것이다.

말이 감사하다는 뜻이지 그림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뜻임을 천마도 모르지는 않는다. 그림 보는 눈 따윈 하나도 없는 그녀가 정말로 그림이 모자란다고 생각해서 붓을 보낸 게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그녀는 다만 바위틈에 난초를 그려 보낸 그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라고 해서 그 그림의 뜻을 모를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선물을 준 본인은 전혀 알 수 없었을 테지만, 천마는 이 붓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써먹어 보고 싶었다.

먹을 묻히게 되면 아무리 깨끗이 씻었다가 말려도 은은한 묵향이 나므로 이런 일에 쓸 수는 없는데, 마침 다행히 딱 적당할 때 기회가 생기는 걸 보니 자신이 운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천마가 담비붓을 귓전으로 훑어 내리자 뺨 곁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을 사랑스럽다는 듯 붓질하고 붓을 목덜미 선으로 내렸다. 꿀꺽. 크게 아래위로 움직이는 문평의 결후가 눈에 들어왔다.

천마는 문평의 몸 위를 붓으로 그려 나갔다. 누워 있는 문평의 몸을 붓으로 새로 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피부결 사이사이를 누비며 세심히 붓질했다.

단단하게 새겨진 가슴골, 짙은 갈색의 유두. 지나치게 그가 자주 만져서 이제는 조금 커진 것 같은 유륜에, 납작한 복근. 그에 더해 부드러운 둔덕의 서혜부까지.

그의 붓이 섬세히 움직일 때마다 잘 익은 근육들이 뒤틀렸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 건강한 피부 위를 지나느라 조금씩 붓끝이 젖어 드는데, 그 감촉을 더 참기 힘든지 이를 악문 문평의 턱에서 파란 핏줄이 솟았다.

자꾸만 오므라들려는 다리 사이를 몸으로 지탱한 채, 천마는 마침내 처음부터 공략하고자 했던 곳을 찾아냈다. 검은색 수풀 아래에 누운 문평의 성기와 그 아래에 고이 숨은 비경을.

“히익!”

붓으로 가볍게 음경을 쓸어내리자 문평이 콧속을 깊이 울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살짝 땀에 젖긴 했지만 아직도 보송보송한 담비 털이 음경에서 돋기 시작하는 핏줄 위를 그대로 따라 내린다. 간지러움과 함께 전해지는 달콤한 쾌락에, 오르내리는 서혜부의 움직임이 격렬해진다.

천마는 한 손으로 음경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담비붓을 든 채 그의 귀두 부분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붓질이 시작되자, 아악! 하고 이번에는 아예 비명 같은 신음이 솟아올랐다. 문평은 신체 중에서 유독 귀두가 약한 편이다. 이 부분은 그저 만져만 주어도 완전히 자지러지는데, 이런 감도 높은 성기를 가지고도 앞으로는 삽입 한번 못하고 살 거라 생각하니 일견 가엾기도 했다.

‘어디. 인심 한번 써 볼까?’

천마는 문득 떠오른 짓궂은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손을 내려 문평의 음경을 움켜쥐었다. 지나치게 부드러운 손바닥을 사용해 여인의 질처럼 부드럽게 조이고, 문평의 귀두와 요도 부분을 붓으로 자극했다.

하으윽. 다시 문평이 퍼드덕 몸을 떨었다. 천마의 몸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허벅지의 근육이 잔뜩 굳어 들었다. 천마의 손이 조임을 반복할 때마다 부쩍부쩍 일어선 성기가 이내 손아귀를 가득 채운다.

“아앗! 아읏! 읏!! 읏!”

과도하게 몰리는 자극에 문평은 학질이라도 일으키듯이 허리를 떨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는 괴롭게 헐떡이며 간절히 애원했다.

“그, 그만. 그만!”

불쌍하게도, 문평은 그만해 달라는 애원조차 다 하지 못하고 턱을 떨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벌써부터 정액이 방울방울 새어 나와 귀한 담비붓을 적셨다. 먹을 묻혀 보기도 전에 정액부터 묻히게 생긴 비운의 붓이다.

자극이 너무 컸던 탓일까. 다른 데는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문평이 사정을 했다. 마침 요도를 막고 있던 붓을 다른 곳으로 옮기던 참이었기에, 정액은 허공으로 튀어 올라 천마의 옷에 그대로 묻었다.

천마는 검은색 은란금 위에 쏘아진 흰 액체를 바라보았다. 검은 옷에 묻은 흰 정액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빛났다.

“버릇없는 놈이군.”

가라는 허락도 안 했는데 혼자 가 버린 문평을 탓하며 천마가 낮게 웃었다.

“빚을 갚으라고 했지, 더 만들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천마는 정액이 묻은 옷을 벗었다. 부드러운 비단이 다리를 쓸어내리면서 떨어지자, 다가올 쾌감에 대한 공포와 기대로 감은 눈이 바르르 떨렸다.

“어떻게 갚을 건가, 가난뱅이? 담비붓을 정액으로 적시질 않나, 비단 장포에 사정을 하지 않나. 네 몸뚱이로 그걸 다 갚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고나 그래? 평생 내 밑에서 다리 벌리고 싶은가 보지?”

“평, 평생은 안…….”

“설마 평생은 안 걸릴 거라고? 자기 자신을 꽤 높이 쳐주는군.”

천마는 낮게 웃으며 담비붓에 향유를 발랐다. 젖은 붓이 항문으로 스며들자, 화들짝 놀란 문평이 입을 딱 벌린다. 잦은 출입 때문에 이제 손가락 하나 정도는 쉽게 들어가는 몸이지만 여기에는 아직 이물질을 넣어 본 적이 없었다.

뿔로 만든 모조 성기라든가, 상아로 만든 가짜 달걀 같은, 갖고 놀기에 좋은 물건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평을 상대로 그런 걸 사용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덕분에 담비붓은 영광스럽게도 문평의 몸속에 드나드는 첫 번째 이물이 되었다. 문평을 범한 첫 번째 물건인 셈이다.

흠뻑 젖은 붓이 내벽을 간질이자 다시 문평이 히익거리는 애처로운 소리를 낸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엉덩이를 뒤트는 걸 허리를 붙잡아 고정시키고, 붓을 돌리듯이 휘저어 문평의 엉덩이 안에 향유를 고루 발랐다.

붓의 출입이 시작되자 문평의 눈자위가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까지 어린다. 그는 바들바들 어깨를 떨며 울었다.

“싫습니다. 그만하세요!!”

문평은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탁자 위로 좀 더 달려 올라가고 말았다. 그 덕에 허벅지 한쪽은 탁자 위에 올라가 있고 다른 한쪽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문평을 희롱하고,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이미 단단히 서버린 천마에겐 참으로 군침 도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항문 안에 들었던 담비붓을 일부러 긁어내듯 꺼내고 자신의 성기를 들이밀었다.

움찔 경련을 일으킨 조그만 구멍이 귀두를 삼킨다. 도저히 그런 것 따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작디작았던 것이 밀어 넣으면 밀어 넣는 대로 모조리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 구멍은 꼭 너 같구나. 석문평. 내숭이 아주 끝내주는걸.’

천마는 심술궂게 생각하며 허리를 깊이 묻었다. 탁자 위에 올라온 한쪽 다리를 자기 허리에 두르고 다른 쪽 다리를 어깨 위에 얹은 그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문평의 몸속으로 달려들었다.

문평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인 국부만을 집중적으로 공격당해 온몸의 신경이 하체로 온통 쏠린 상황에서 갑자기 삽입이 시작되었다. 담비 털로 만들어진 감미로운 유혹을 따라나섰는데 갑자기 무자비한 정복이 도착한 것이다.

몸이 한계까지 벌어져서 사내를 받아들였다. 강한 허릿심이 꿰뚫듯 들어와 몸 안을 채우고, 음란한 내벽이 그것을 받아 조인다.

퍽퍽 소리가 나도록 쳐올려지고 있음에도 미칠 듯이 좋았다. 자신의 항문 속에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예상해 본 적 없었던 기이한 신경 다발이, 천마의 몸이 들어올 때마다 격렬히 개화하며 불꽃을 터트렸다.

천마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탁자 위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문평은 탁자의 가장자리를 움켜쥔 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찌꺽찌꺽하는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방 안을 울렸다. 요란한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탁자의 다리가 삐걱대는 소리. 낮게 이를 악문 천마의 탄성. 탁자의 표면에 부딪히는 젖은 등의 마찰음, 허공에서 흔들리는 허리의 울림.

그러나 그 어떤 소리보다 더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을 채우는 사내를 반갑게 맞이하며 지르는 문평의 교성이었다.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도 문평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더욱더 견딜 수 없었다.

정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달은 어두웠다.

찬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창문을 꼭꼭 닫은 어두운 방 안. 깊이 들이치는 찬바람을 피하고자 두꺼운 모피로 창문을 가린 그런 어두운 방 안에서 문평은 문득 눈을 떴다.

혼곤한 정신으로 시선을 들었던 그는 자신이 익숙한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팔로 상체를 지탱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찌릿하게 허리가 울렸다. 무리한 자세를 지탱하느라 고되었는지 진한 근육통이 허리를 짓누른다.

느닷없는 고통에 혼미하던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누운 채로 자신의 몸을 차분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 단지 허리만이 아니다. 몇 번이고 사내에게 들린 채 허공에서 흔들렸던 허벅지의 안쪽은 아프게 당겼고, 팔의 관절은 지나치게 혹사당해 우릿한 관절통을 느끼게 한다. 격렬한 정사가 아니라 격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근육 마디마디가 쑤셨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따라 정사가 유달리 격렬하긴 했다. 탁자 위에서 한 번,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또 한 번. 침상 위에 기어 올라가 마지막으로 정사를 치르다 기진해 정신을 잃은 게 마지막 기억이다.

온갖 체액으로 뒤범벅된 채 잠들었는데, 깨고 보니 마른 피부에 보송보송한 비단 이불을 덮고 있다. 천마가 손수 이런 뒤처리를 해줬을 리 없고. 또 죄 없는 어린 아가씨들만 흉한 꼴을 봤겠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옆자리에 천마가 누워 있다. 천마라면 잘 때도 네 활개를 치면서 제멋대로 잘 줄 알았는데 뜻밖에 잠든 자태가 꽤 곱다. 긴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고, 정면으로 반듯하게 누워 잠든 모습이 몸가짐 바른 귀공자 같다.

어두운 달빛 아래에서도 충분히 두드러질 정도로 수려한 이목구비다. 표정을 잃은 천마의 얼굴은 그저 조각인 양 정교하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조차도 믿기지 않는 극도의 우미優美함. 남자인 것을 알아도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절묘한 아름다움이다.

잠시 천마를 내려다보고 있던 문평은 고개를 흔들고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한구석에서 규칙적인 소음이 들려온다.

재깍재깍. 천마가 ‘시계’라고 부르는 물건이 바늘을 움직이는 소리다. 처음 저 물건을 봤을 때만 하더라도 저 괴이한 기물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궁금해했었지만, 이제 그는 저것이 서역에서 쓰는 ‘시계’라는 물건으로 시간을 알려 주는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아도, 문평은 여전히 저게 왜 필요한 것인지를 몰랐다.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 때 귀만 잘 기울여 들으면 시간이야 얼마든지 알게 되는 것을, 저런 기물을 들여놓은 후 귀찮은 소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시간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기물의 존재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심지어는 지금처럼 기물이 끊임없이 소음을 내는 데도 별반 의식 없이 지낼 정도로 그에 적응되었다.

‘적응適應.’

문평은 스스로가 떠올린 단어를 무심결에 되뇌었다. 적응. 적응이라. 문평은 씁쓸한 기분으로 낮게 웃었다.

요즈음에 그 말처럼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말은 없었다. 고작 말 하나를 이렇게 어렵게 여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요즘은 그 말을 자주 쓰는 것조차도 마음에 걸린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시간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문평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 왜냐하면 시간은, 사람을 적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낯설고 두려운 것을 친숙하게 만들고, 멀었던 것을 가까이 만든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 심지어는 본인이 결코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들까지도 말이다.

이 방 안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할 줄 알았던 것들이었다.

이국적인 풍색風色이 느껴지는 색다른 물건들과 어디에 쓰이는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던 기물들. 도를 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이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대범한 것을 좋아하는 천마의 취향까지도.

그러나 이제 문평은 서서히 향 짙은 기문차의 맛을 알아가고 있었고, 천마가 끊임없이 들여오는 이국의 산물들에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방을 걸을 때 푹신한 바닥 깔개가 없으면 허전했고, 비단 금침을 덮는 것을 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경계하던 것들이 이렇듯 가까이 있었다. 그가 본래 두려고 했던 거리보다 더욱 가깝게.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그래서 더 두려워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그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남자일 것이다.

천마. 천마, 혁련상赫鍊常.

소문만 듣고 막연히 상상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 남자는, 처음 봤을 때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는 평생을 지나도 인연이 없었을 아득한 전설이 느닷없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감각이 얼마나 아찔하고 두려웠는지, 문평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낯설고 이질적이었는지도.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천마를 태연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와 나눈 열렬한 정사의 흔적을 온몸에 가득 품고서, 그와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본인도 짐작조차 못 했던 일인데 말이다.

천마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무겁고, 그의 영향력은 구주와 팔황을 덮는다. 마교인의 살아 있는 신이며, 정파의 영원한 주적主敵. 한 인간의 몸으로 이만한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존재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평에게 그는 그런 대외적인 의미와 다른 의미로 무거운 사람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사람. 자신 따위, 그의 곁에 있으면 본인의 인격을 잊고 노리개나 장난감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가 그렇게 취급할 뿐만 아니라, 문평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그 거대한 존재감 앞에서 문평은 언제나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초라해졌다.

“가장 무거운 것을 버려야지. 배가 침몰하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더 있나?”

문득 환청처럼,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한 본인은 알고 있었을까? 문평에게 가장 무거운 것이 바로 그라는 사실을? 문평이 간신히 세상으로 띄워 올린 작은 배를 좌초 직전으로 내몰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것을?

어쩌면 알지도 모르고, 어쩌면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든 모르든 간에 그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타인의 인생을 태연히 농락하고도 그것을 재미있어하고, 그렇게 망가트린 인간에게 흥미가 떨어지면 그냥 내버릴 수 있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의 눈에 ‘잡초’는 밟아도 상관없는 들길의 잡풀일 뿐이다.

문평은 그런 사람 때문에 자신이 변하는 게 두려웠다. 단순히 호화로운 의복이나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위세에 호가호위하게 되고, 그를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마침내 그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인간이 되는 게 무섭다.

천마가 자신을 상대해 주고 있다고 해서 그의 격이 같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자신과 천마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간극과 같다. 두 사람은 이미 출발선이 달랐다.

문평은 자신이 결코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굳건한 정신으로 천마의 곁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주제가 되지 못한다. 지금처럼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려 변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모든 것이 영원하리란 보장 따윈 없었다. 언젠간 반드시 홀로 서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문평은 천마에게, 그가 주는 안락함과 특권에 중독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랬다간 어떤 끝이 기다리고 있을지 뻔히 내다보면서도, 스스로가 변하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자각하지 못했다면 계속 그대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평은 자각했고, 한번 자각한 이상 두 번 다시 그 사실을 잊을 수는 없었다.

문평은 이제 정말로 이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을 칠 수 있다면 도망이라도 치고 싶고, 버릴 수 있으면 버리고 싶다. 자신이 완전히 쓸모없어져서 혼자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반편이가 되어 버리기 전에.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이 무거운 짐을 버려야 함을 아는데도, 그럴 방법을 몰랐다.

***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서운합니다.”

낡은 관제묘 안. 삭정이를 모아 일으킨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둘 다 키가 크고 체격이 훤칠한 보기 드문 미남들로 아무래도 일행인 듯 보였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이가 서운한 듯 던진 말에, 혁련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녕 서운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망울엔 간절한 소망이 매달려 있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헤어지기로 했던 동행이 아니던가? 새삼스럽군.”

무뚝뚝하리만큼 짧게 끊어지는 그의 말에도 상대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선하고 반듯한 얼굴이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어리석을 정도로 사람을 잘 믿는 인간의 얼굴.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지요. 먼 길을 오는 동안 형장과 동행한 덕에 지루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내일이면 각자 갈 길을 가야 한다니 말입니다. 그동안 말벗도 되고 좋았어요. 아니, 물론 형장은 그냥 듣고 제가 일방적으로 떠들긴 했죠. 그래도 묵묵히 들어 주시는 게 재미있어서 열심히 이야기할 수 있었거든요. 일단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횡설수설, 숫되게 얼굴을 붉힌 이가 어렵게 말을 덧붙인다. 세속에 치이지 않고 산속에서 도사들과 함께 살아와서 그런 것일까. 그는 말이 서툴고 정이 많았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자신에게도 살갑게 다가와 이것저것 말을 붙여 올 정도로.

혁련상은 모닥불 위로 떠올라 있는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진짜로 많이 닮은 것 같다. 마치 5~6년쯤 전의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생김생김이 참 판박이다.

그저 멀리서 보기만 하려고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이게 된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둘은 닮았다. 하지만 또 달랐다. 상대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만약 자신이 그였다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불을 빌리고자 했던 낯선 이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목표하는 길과 거의 일치하는 여정을 말하는 이방인을 덥석 동행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고, 그 사람을 동행 내내 철석같이 믿으며 살갑게 굴지도 않았을 거다.

바로 그 점이 두 사람을 같으면서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이목구비와 체형은 빼다 박았지만, 그 얼굴 위로 떠오르는 표정이 확연히 다르다. 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항상 웃었다.

생김새를 이루는 기본적인 틀이 비슷해도 인상이나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다르면 사람이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혁련상에게 확연히 보이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듯했다. 그와 오랜 동행을 하면서도 한 번도 혈육이냐는 질문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근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동행하고서도 혁련상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상대는 조금 한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처지를 아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알고 있는 혁련상의 눈에는 보이는 여러 가지 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혁련상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아주 어렸을 때다. 너무 일찍 헤어졌고 그 후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니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기, 형장? 정말 동호東湖에 한번 가볼 생각 없습니까?”

혁련상이 묵묵하니 대답이 없자, 남자는 따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남자는 또다시 혁련상에게 허튼짓을 권해 왔다. 자신의 목적지가 정도맹이 있는 무한無漢이라고 밝혔던 상대다. 그런 사람이 동호에 가길 권하니, 이는 자기랑 끝까지 동행하자는 소리나 다름없다.

동호는 호북성 무한에 있다.

“호북성이 처음이시라면, 동호도 아직 못 가보셨을 게 아닙니까?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동정호 한번 못 보고 가시는 건 너무 아쉬운 일 아닙니까? 동정호가 어딥니까? 바로 동정십팔채가 있는 곳입니다. 그 옛날 수호전水滸傳의 백팔 영웅들이 군웅할거 하던 바로 그곳! 사내로 태어나서 그런 장소 한번은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동호에 동정십팔채는 있겠지만 양산박梁山泊은 없을 텐데. 양산박은 산동성에 있네.”

잘못 알아도 뭔가를 크게 잘못 알고 있는 상대를 향해 혁련상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앗, 그랬던가요?”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일로 사람을 꼬시려던 상대는 단박에 풀이 죽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따르는 강아지의 배를 걷어찬 기분이 들어 마음이 언짢았다. 혁련상은 어쩔 수 없는 태도로 변명일 수밖에 없는 말을 했다.

“……자네의 성의는 고맙지만, 내겐 정말 급한 일이 있어 지강枝江에서 배를 타야 하네.”

상대가 저렇게 바라니, 한동안은 더 같이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내의 일은 거의 정리가 끝났고, 숙청할 자들은 이미 다 숙청했다. 청소가 이미 끝난 상황이니 당분간은 교를 비워도 일을 낼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가는 곳은 다름 아닌 정도맹의 소굴 무한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도맹의 세력권 안까지 들어온 게 부담스러웠던 참인데, 거기까지 따라갔다가 행여 정체라도 들키게 되면 자신도 자신이지만 상대에게 문제가 생길 것이다.

정파의 후기지수인 그에겐 자신 같은 사람과 친분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흠이 된다. 거기에다 두 사람이 혈연관계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심지어는 사문조차도 그를 감싸 주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가 형장을 귀찮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졸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아요. 형장께 저는 낯선 길에 잠깐 동행한 사람일 뿐이겠지요. 그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린 점 사과드립니다.”

상대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청을 했다가 면전에서 거절당한 탓인지 조금 머쓱해 보이지만, 그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혁련상을 불편하게 했음을 사죄했다. 명문의 제자다운 처신이다.

“이런 이야기, 제가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형장을 뵙고 있으니 이상하리만큼 깊은 친밀감이 듭니다. 꼭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하하하. 말로 하고 보니 역시 이상하네요. 형장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 다른 뜻으로 이러는 게 아니랍니다.”

말이 서툰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말을 제대로 털어놓지도 못했다. 하던 말을 또 하고, 혹은 번복하기도 하고, 그래도 꿋꿋한 태도로 상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그냥 친근해서요. 정말이지 낯설지 않습니다. 형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피가 당기는 모양이다. 그런가? 그래서 너는 내게 그토록 벽이 없었던가?

상대의 소박한 진심에 혁련상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오래도록 느껴 본 적이 없었던 낯선 감정이 가슴속에 치밀어 올랐다.

이런 감정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혁련상은 알지 못했다. 오로지 무공, 무공, 무공뿐. 그 외 다른 것이라곤 어떤 것도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혁련상에게 있어 감정이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무언가일 따름이었다.

상대는 자신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작 여섯 살의 나이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곤륜파의 도사에게 구사일생으로 구해져 여태껏 도문에서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고아인 줄 알고 있었다. 그를 제 손으로 구했던 곤륜파 도사의 확언이었으니 그리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아직도 혈육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도 바로 그의 눈앞에 말이다.

혁련상, 아니 백운강白雲康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형의 재질이 마교주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버린 어린 동생이 수십 년 만에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동생 백운정白雲靜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백운강은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고 생각이 깊었던 그는, 자신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사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의 사부는 그가 돌아갈 곳을 없애기 위해 그의 집안을 멸문시켰다. 하늘이 내린 기재인 백운강을 마교주의 아들 혁련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그를 마교의 차기 교주로 만들기 위해 그런 믿지 못할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백운강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두려워했던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인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집안을 멸문시킨 사부도 두려워한 적 없었고, 그의 빼어난 미모에 홀려 열네 살 때부터 그를 겁간했던 사모師母도 두려워한 적 없었다. 다만 힘이 없었기에 참고 견뎠을 뿐, 자신을 책임질 힘을 기르게 되자 사부도 사모도 절대 살려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있어서도 동생은 두려웠다. 세상 유일하게 그가 죄책감을 느끼는 존재이며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일지도 모르는 이 사람이, 운강은 진정으로 소중했다. 운정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주었기에, 백운강은 그 오래고 고된 시간을 이겨 낼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웠어도 저 아이를 기어코 다시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막상 이 시간이 되어서도 운강은 동생 앞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없었다. 백운정은 명문 정파의 제자이지만 자신은 천산 마교의 교주이기 때문이었다.

천산이든 십만대산이든 상관없이 마교라면 무조건 흰 눈을 뜨는 정도맹은, 젊은 나이에 새롭게 교주 자리로 오른 그의 약점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도맹도 말이 정도맹이지, 노회하고 늙은 정파의 위선자들이 더러운 흙탕물을 세상에 퍼트리는 곳이 아니던가.

정도正導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사파보다 더한 짓을 하고, 자기들이 불리할 때마다 추살령을 내려 공포감을 조성하는 쓰레기들. 그 승냥이 같은 자들의 눈에 운정이 뜨이게 된다면 운정의 인생은 다시 한번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또 한 번, 바로 자신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봤으니 됐다. 잘 컸고, 착하게 컸다. 그나마 곤륜파의 늙은것들은 사리가 밝고 엄정한 편이니 그 문호 안에서라면 저 녀석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운강은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 고작 한 달. 그 시간이 진정 아까웠던 사람은 운정이 아니라 운강일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서는 안 될 동생을 눈앞에 두고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힌 운강에게 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운강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만나고 싶다. 그 마음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연이라지만, 또한 헤어졌기에 다시 만나는 것도 인연이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가 아쉽습니다. 정녕 다시 만날 수 없겠습니까?”

본인 스스로는 알지 못할 인연에 이끌려 간곡히 말하는 동생을 바라보던 백운강에게 순간 충동이 치밀었다. 물보다 진한 혈연. 그 혈연을 영원히 끊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돌연 그를 지배한 것이다.

그것이 실은 충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라는 사실을 운강은 알고 있었다. 알지만 그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백운강은 허리춤에 찼던 패옥을 꺼내 장식부를 잘랐다. 백운정은 그의 느닷없는 행동을 휘둥그레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형장, 이게 무슨……?”

“이 물건의 이름은 이제부터, 그래. 기린패네.”

백운강은 자신이 차고 있던 패옥의 문양을 내려다보고 급히 이름을 정했다. 뚝 떼어 낸 패옥의 장식부에는 그 이름 그대로 발굽을 천으로 감싼 기린의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패야. 일생에 세 번. 딱 필요할 때만 이 패를 사용하게.”

“……무슨 소리입니까. 형장?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까?”

“내가 자네와 자주 만나는 것은 그리 좋지 않으니, 제약을 두는 것일세. 만약 이것으로도 좋다면 패를 받아 줬으면 좋겠네. 이 패로 나를 부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대륙 어디에나 있는 금원전장金員錢莊에 의뢰를 해놓을 테니, 이 패를 탁본한 후, 뒤에 수결과 날짜를 써넣게. 그걸 보고 내가 찾아가겠네.”

당황한 백운정이 머뭇거리더니 기린패를 내려다보았다. 물건 보는 안목이 없는 그가 봐도 상당한 귀물인데, 그런 것을 생면부지의 자신에게 덥석 내주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은 이 사람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고 앞으로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껏 여행 내내 그저 무던한 반응만 보였던 상대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것은 쉽사리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운정은 상대의 성의를 무시하도록 교육받고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호의를 가진 상대가 마찬가지로 호의를 돌려주고 있는 형국이니, 오히려 고맙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만, 예. 고맙습니다. 감사히 받겠어요. 이렇게라도 인연의 끈이 남겨졌으면 좋겠군요.”

백운정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서 패를 받아 갔다.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이 살짝 스쳤다. 운정은 아무 생각 없이 패를 거둬 갔지만, 운강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잠시 동안 운정의 손이 닿았던 손을 허공에 띄웠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너무 짧은 순간, 찰나의 만남이었다. 이후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었던 소중한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

천마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동생의 꿈을 꿨다. 그 애가 그렇게 죽고 나서 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서 그 애의 꿈도 그다지 자주 꾼 적이 없는데 오늘은 웬일로 그놈을 다 만났다.

평소라면 반가웠을 터인데, 때가 때이니만큼 마음이 심란했다. 괜한 생각인 줄 뻔히 알면서도 여러 가지를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이다. 자신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꿈 같은 게 마음에 걸린다. 딱히 현몽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제갈가의 계집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이즈음이 고비인가? 하긴. 해를 넘기기 힘들다 했으니 근래를 넘지는 못하겠군.’

마음이 산란하다 보니 절로 제갈희련에게 신경이 쓰였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절대 편하게 죽게 놔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던 원수 계집. 운정의 손을 떠난 기린패를 끝까지 흔들어 대며 그의 속을 뒤집어 놨던 장본인이다.

자기가 지은 죄업을 제대로 받았는지, 아직도 이렇게 정정한 그에 비해 그녀는 노환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소한 이야기였으나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듯, 여러 곳에서 그로 인해 동요를 보였다. 개중에서도 정파의 분위기는 특히나 침울했다.

그녀가 융중산에서 마교를 물리쳤다고 믿는 어리석은 것들은, 정도를 밝히던 큰 어른이 가시는 거라고 진심으로 애도하는 분위기란다.

‘큰 어른. 큰 어른이라.’

아직도 그녀의 젊은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혁련상에게 있어 제갈희련에게 덧붙는 그 단어는 매우 낯설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까지나 푸르게 독을 품은 눈을 한 표독한 젊은 여인이기 때문이다.

운정의 시체를 끌어안고 원독을 터트리며 복수를 부르짖었던 모습과 우경의 손을 이끌고 와 저자가 네 아비의 원수라고 선언하던 모습만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그인데, 세월은 어느새 이만큼 흘러 그녀는 노환으로 오늘내일하고 있고 자신은 은퇴를 심중에 두고 있다.

‘그래도 네 정인 가는 길이라 해코지는 하지 말라는 거냐? 아니면 우경에게 손을 대지 말아 달라는 거냐?’

혁련상은 오랜만에 꿈에 보인 운정에게 마음속으로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속의 운정은 20대 초반의 어린 얼굴을 하고 순박하게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심성이 착한 놈이라서 그런지 꿈에 나타날 때도 험한 모습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늘 가장 좋았던 때, 그 순간의 모습만을 보게 될 뿐. 그 이후 처참했던 두 번째 만남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혁련상보다는 그의 남아 있는 핏줄을 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모습을 현실에서 본 것만으로도 이성을 잃었던 혁련상인데, 꿈에서까지 그 모습을 보게 된다면 더 이상 참을 수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다시 봤다면, 다시 한번 자신이 그 애를 죽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면. 천마는 두 번이나 참을 수 없었을 터였다. 죽어가던 운정의 유언 따윈 기억조차 하지 못한 채, 칼을 들어 그 애의 핏줄인 우경까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갈세가를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기가 남편이라고 부르는 남자를 속여서 죽게 만들어 놓고, 뻔뻔스럽게 미망인 행세를 하는 그 여자 제갈희련의 목을 부러트리고, 운정을 함정으로 끌어들였던 다른 정파인들 역시 갈기갈기 찢은 후 들판에 뿌려 들짐승 밥이 되도록 했을 것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 그런 격렬한 살의는 그나마 좀 잠잠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동생을 떠올리게 되면 마음이 무거운 천마다.

‘하. 진짜 혈연 간에 이리도 큰 악연이라니.’

그가 운정의 악연인지, 운정이 그의 악연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아침을 먹고,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뭐 하나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 자신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문평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의 시선을 느끼고서도 어수선한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침내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굴었던 주인 때문일까. 오후가 되자 예화가 품 안에 서책 몇 권을 들고 침전을 찾았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천마가 평소에 즐겨 보는, 서역에서 들여온 서책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다탁에 앉아, 기문차의 향이 다 날아갈 때까지도 딴생각에 빠져 있던 혁련상이 뒤늦게 예화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예화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책자를 바쳤다.

“어제 북로를 지나간 화란和蘭 상인들에게서 사들인 서책들입니다. 이 책들이 들여오시라 하셨던 것이 맞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예화는 시비로 두기엔 아까울 정도로 영리했지만, 그녀는 나전어를 비롯한 서역어를 읽지 못했다. 서역책의 구매를 담당하는 것은 그녀이지만, 책을 구매할 때마다 천마가 직접 써서 주는 종이를 상인에게 건넨 후 책을 받으면, 천마가 준 종이와 비교해 그림을 맞추듯 기호를 맞춰 보는 형식으로 겨우 구분할 뿐이었다.

그런데 책이라는 건 가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어서, 예화는 새 서책이 들어올 때마다 책들을 가져와 천마에게 검사를 맡았다.

다행히 이번에도 실수를 하진 않았다. 얼굴이 밝아진 예화는 물러가고 천마에게 서역책이 남았다. 천마는 새로 들어온 서역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한 권을 집었다.

천마가 꺼낸 책은 소위 말하는 풍속첩風俗牒의 일종으로, 서역의 화공들이 그네들의 생활 기록을 목판으로 새겨 찍어 낸 물건이다. 화풍이 거칠고 과장된 묘사가 많지만, 서역인들의 일상생활이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물건이라 북경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호기심이 많은 편인 천마는 특히나 이런 화첩을 좋아해서 따로 수집도 하고 있을 정도로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성가신 상념을 날릴 촉매가 필요한 김에 마침 잘됐다. 천마는 넓은 다탁 위를 치우고 화첩을 열었다.

책을 무겁고 튼튼하게 장정하는 풍속을 지닌 서역의 책은 보통 중원의 것보다 크기도 부피도 더 나가게 마련인데, 화첩은 그에 비해서도 더욱 커서 가끔은 사람의 상체만 한 크기일 때도 있다. 오늘 들어온 책은 그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만한 크기가 아니라서 넓게 펴서 두고 보면 좋으리라 싶었다.

제일 처음 화첩을 열자 직방기直紡機를 새겨 놓은 모습이 보인다. 서역 사람들은 손으로 직접 수공 하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림으로 처음 보면 뭐가 뭘 만드는 기계인지 헷갈리지만, 익숙해지다 보면 기기별의 기능을 구분도 하게 되고 그 앞에 앉은 사람들의 옷차림만으로도 무얼 만드는 곳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진무 녀석이 보면 좋아하겠군.’

지나치게 산학과 기관학에 미쳐 있어 직방기를 사주면 거기에다 대고 사정까지 할 제자 놈을 생각하며 천마는 무심히 그림을 바라보았다.

한 장 또 한 장. 익숙한 광경이기도 하고 때로는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기도 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림을 들여다보던 천마는 다음 장을 넘기는 순간, 책장 사이에 얇은 종이 하나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단단한 재질의 서역 종이와는 달리, 팔랑팔랑 가볍게 날리는 중원식 종이가 책장 사이에 끼어 있었다. 접혀 있는데도 먹빛이 선명한 것을 보니, 그것도 누가 사용했던 종이다.

‘뭐지?’

천마는 가볍게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보았다. 누군가 탁본을 한 듯 넓게 먹이 묻은 한지에 선명한 선으로 새겨진 그림이 드러났다.

그림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슴의 몸통에 말의 다리를 달고, 소의 꼬리를 붙였으며, 머리에 한 개의 뿔이 있는 짐승이다. 네 다리를 버선처럼 천으로 감싸 신고, 바닥에 발을 디디지 않는, 그 독특하고 특징적인 짐승의 형상은 분명 기린이었다.

‘기린패!’

천마는 뜻하지 않은 기린패의 등장에 놀랐다. 기린패가 소리 소문도 없이 돌아왔다는 사실도 놀랐고, 돌아온 과정도 놀라웠다. 누군가 교내에까지 아주 은밀히 손을 쓴 것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으로 패가 돌아올 수는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마는 안색을 굳히며 종이의 뒷면을 바라보았다. 기린패가 자신에게 돌아왔으니 상대의 이름을 적은 수결과 만날 일시도 있을 것이다. 과연,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기린패의 뒷장에는 명백한 수결이 적혀 있었다.

「梟」

부엉이를 뜻하는 단 한 글자. 효였다.

자고로 부엉이란 부모를 잡아먹는다고 알려진 짐승이다. 그렇기에 부엉이는 마찬가지로 제 부모를 잡아먹는다고 알려진 전설상의 동물 경과 합쳐, 효경梟鏡이라고 불린다. 이는 매우 배은망덕한 자라는 뜻이다.

천마는 이와 음이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 군자마검 곽효. 천마가 알기론 스스로가 배은망덕함을 자인하면서도, 스스럼없이 그를 자랑할 수 있는 자는 그뿐이다.

하나 탁본 뒤에는 수결만 있을 뿐 그 외에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그저 놀리듯 기린패를 탁본해 수결을 적어 넣어 보냈을 뿐이다. 천마는 곽효의 이런 행위가 자신을 정확히 겨냥한 도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설마 기린패를 훔쳐내다니.

천마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에 든 기린패의 형상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완평을 불러들여라.”

그의 엄중한 명령을 듣고, 같은 자리에 있던 유일한 사람인 석문평이 얼른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엄해지지 않는 그가 이토록 진중한 기도를 보이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문평은 신법까지 운용해 있는 힘껏 호완평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다시 등장한 기린패 앞에서 천마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 좀처럼 노기가 서리지 않는 그의 눈빛에 붉은 핏빛이 번진다. 그는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힘껏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만약 천마의 눈앞에 곽효가 있었다면,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온몸이 포를 떠지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천마는 이 개 같은 놈을 절대로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천참만륙千斬萬戮을 내서라도 조각조각 잘라내고 도려내 만방에 뿌려 동생의 넋을 위로할 것이다.

기린패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동생의 넋을 기리는 유물이었다. 자신의 물건임에도 그의 처자의 손에서 빼앗아 오지 않았던. 동생을 위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마음.

그 마음이 조롱의 의미로 전해졌으니 천마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건 당연했다. 그는 폭풍우처럼 마구잡이로 들끓는 기분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호완평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린패를 도둑맞았나?”

천마가 급히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뇌정전으로 들어섰던 호완평은, 그가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후려칠 듯 떨어지는 천마의 매서운 목소리에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천마의 노기 띤 목소리로 사정을 알게 된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의 얼굴 위로 낭패한 표정이 스쳤다.

‘어떻게 벌써 아셨을까? 사부께서 정보를 얻으실 만한 통로를 모두 틀어막았는데, 대체 어떻게?’

호완평은 자신이 한 일을 신속하게 되짚어 보며 머리를 굴렸다.

“대답해라. 교의 업무를 통솔하는 네가 그 일을 몰랐을 리 없지. 정녕 기린패를 도둑맞은 거냐?”

곽효의 손에 기린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천마는 모든 사실을 눈치챘다. 그간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 왔던 비선이 일거에 쓸모없어졌을 리 없으니, 이에 대한 정보는 분명 교내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정보를 자신만 보고받지 못했다는 건 그를 누가 중간에서 의도적으로 차단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 사람이 누굴지 추측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써 권하는 일에는 결코 그런 월권을 하지 않으면서, 절대로 참견해서는 안 되는 순간에만 제멋대로 참견해 엇박자로 나가는 놈이 또 누가 있겠는가?

자신이 그동안 속아 왔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천마는 치솟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덜컹 덜컹 덜컹.

그의 기도가 극렬한 노기를 띠자, 그 광포한 기운에 방 안의 집기들이 흔들렸다. 물어뜯을 상대를 찾아 헤매는 듯 포악하게 으르렁대는 야수의 기운이 방 안을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진귀한 천축 비단이 찢기고 괘종시계의 투명한 유리판이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그의 앞자리에 놓였던 찻물까지 진동하며 넘쳐흐른다.

기가 질린 문평은 아예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나마 호완평이니까 저 압력을 버티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라면 진즉에 짜부라졌을 것이다.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에 놀란 시비들이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예화와 란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전 안을 들여다보다가, 윗전들의 다툼을 엿보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시비들을 데리고 몸을 물렸다.

“마, 맞습니다. 사부님.”

호완평은 천마의 광포한 진기로 인해 덩달아 들끓는 자신의 진기를 억지로 억누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진기를 움직이는 도중에 입을 열었으니, 그 노력이 제대로 유지될 리 없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흐트러진 진기로 인해 울혈이 올라왔다. 그의 입가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몸 안의 진기가 끓는 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범종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그를 제외한 주변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막이 그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진동음을 내며 흔들렸다. 그에 따라 폭주하는 진기가 날카롭게 몸 안을 할퀴었다. 그가 쌓은 내공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제멋대로 날뛰는 진기는 그의 뱃속을 휘저으며 극렬한 고통을 자아냈다.

“크윽.”

호완평이 길게 참지 못하고 바닥에 피를 토했다. 시꺼먼 피가 덩어리져서 그의 입 밖으로 흘렀다. 그가 캑캑거리며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천마는 냉엄했다. 천마는 죄인을 용서하지 않는 생사판관과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해라. 어떻게 된 일인지.”

용서 없는 말투로 천마가 명했다.

호완평은 호흡조차 힘든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천마를 바라보았다.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 흐릿한 눈에 사부의 차디찬 얼굴이 비쳤다. 얼음으로 깎은 조각인 양 선명히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 맺힌 것은 단 한 조각의 인간적인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사신의 표정이었다.

“사, 사부님.”

“완평아, 나를 또 속일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내가 이제껏 너를 참아 준 것은 네가 그리하는 마음에 나를 위한 진정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지만, 그 수준이 기만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나도 더는 용서하지 못한다. 사실대로 이야기해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네 목숨을 거둘 것이다.”

직접적인 경고를 좀처럼 하지 않는 그가 이번에는 대놓고 경고했다. 호완평은 이것이 일종의 최후통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천마가 자신의 행동을 싫어하면서도 그동안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도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천마는 여전히 들끓는 노기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위압했던 기를 풀었다. 몸 위에 올라가 있던 천근 같던 공기가 사라지고, 그제야 숨이 좀 쉬어졌다. 호완평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저도 모르게 토해낸 울혈 때문에 입 안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났다.

더는 숨기지 못한다. 천마의 광포한 기세를 보고 상황의 엄중함을 깨달은 호완평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포영의와 함께 알아냈던 정보가 깨끗이 정리되어 천마의 앞에 고해졌다.

“며칠 전, 콜록. 백 부인이 임종한 바로 그날에, 콜록. 기린패가 사라졌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천마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솟아올랐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열려고 했다가, 이를 부득 갈며 간신히 참았다. 호완평은 그런 사부의 반응을 두려워하면서도 보고를 계속했다.

“복면을 한 사내들 셋을 봤다는 증언이 있었고, 콜록. 화골산이 사용됐으며 제갈세가의 사람 여덟이 죽었다고 합니다. 한 명은 총관이었고 다른 일곱 명은 내고에 번을 서는 보초였는데, 보초들은 모두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기관과 진 속에 숨어 있던 보초들을 그렇게 골라 가며 살해했다는 건 제갈세가의 중심부에서 정보가 흘렀다는 뜻입니다. 우리 측 간자 중 가장 중심 정보에 근접해 있던 간자 고흠원도 빼내지 못한 정보였으니, 세가의 장로나 혹은 직계 가운데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번득였다.

“저희 측 간자 고흠원은, 죽기 직전 미지의 인물들을 만난 듯합니다. 그가 기린패를 도둑맞았다고 소리쳐서 사람들을 모았는데, 쿨럭.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이미 절명한 후였습니다. 그 직후 백 부인도 임종했고, 그 때문에 제갈세가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마교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때마침 죽은 고 총관이 마교의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들도 제삼의 세력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쿨럭. 그래서인지, 옥기린이 추적대를 소집했습니다.”

“추적대?”

거기까지 이르러서야 천마는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호완평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사부에게 말했다.

“네. 말로는 기린패를 추적하는 추적대라고 하는데, 실은 그에 더해 기린패를 탈취해 간 신비 세력의 뒤를 쫓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딱 한 번 나타나 기린패를 탈취해 갔다고 신비 세력이라 그랬을 리는 없을 테고. 그에 관련된 다른 일이 뭔가 더 있었겠군?”

핵심을 짚어 나가는 천마의 눈빛이 찌를 듯이 예리했다. 평생 한 집단의 장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뭐가 중요한지를 알아내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예. 있었다고 합니다. 신강과 워낙 거리가 떨어져서 여기까지는 소식이 별로 닿질 않았는데, 근래 광동과 복건, 산동 등지에서 납치 사건이 극성이었답니다. 원래 그곳들은 해안가라 해적이 많고, 왜구가 백성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일이 잦아 한동안은 왜구의 소행인 줄 알았는데, 그런 마을 중에 유달리 어른은 전몰하고 아이들만 사라진 곳이 몇 군데 있어 뒤를 쫓다 흔적을 찾았답니다.”

“그게 그들의 짓이라 이건가?”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증거가 있나?”

“납치 사건에서 사용된, 유달리 부식이 강한 화골산이 이번 제갈세가의 사건에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배합이 유독 특징적이라 전례가 없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두 가지 화골산이 같은 물건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옥기린이 증거를 보증했습니다.”

하. 호완평의 말을 들은 천마는 싸늘하게 웃었다.

‘곽효가 그런 기초적인 실수를 했다고?’

천마는 곽효가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자인지 익히 알고 있기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만일 그런 식으로 자신의 종적을 드러냈다면 그건 결코 실수가 아니다. 오히려 미끼다.

천마의 생각에 화골산의 어이없는 노출은 옥기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두 가지의 사건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옥기린이 그 뒤를 쫓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흔적을 남긴 게 분명했다.

‘낚시를 잘하는군, 곽효. 기린패로 옥기린을 낚고, 옥기린으로 나를 낚겠다?’

복건성과 옥기린. 옥기린과 기린패. 그것들은 결국 천마에게 연결되는 하나의 선이다.

곽효는 옥기린이 그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를 신뢰했던 자신이 생각 없이 흘렸던 실마리를 그가 꿰맞춘 덕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는 곽효가 그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크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아 그저 입단속만 시키고 말았었는데, 그게 지금 와서 이렇게 큰 화로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머리 검은 짐승을 믿는 건 미련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려 줘서 고맙구나, 곽효.’

천마는 내심 이를 갈며 생각했다.

화골산의 이야기를 들으니 곽효가 무슨 속셈을 지닌 건지 간단히 짚였다. 사실 천마가 가지고 있는 사연을 모두 다 안다면, 누구라도 간단히 추론할 수 있는 일이다.

동생의 일에 큰 회한을 가진 천마는 옥기린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여러 가지로 복잡한 감정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옥기린은 천마에게 단 하나 남은 혈육이다. 그런 그가, 그것도 자신 때문에 곽효 같은 자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어찌 천마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마가 세력을 이끌고 중원으로 내려갈 순 없는 일이었다. 옥기린이 자신의 조카라고 만천하에 천명할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못 할 짓인 데다가, 천마는 융중지약을 맺었다.

말이 융중지약이지, 사실 그 약속은 청해에서부터 시작된다.

신강에 있는 마교가 중원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당하는 것이 곤륜산에 있는 곤륜파다. 천마가 직접 교를 이끌었던 호남혈사에서는 동생을 생각해 그냥 지나쳤지만, 다음에 한 번 더 마교의 중원 침공이 있을 시엔 제일 먼저 잿더미가 될 문파가 바로 곤륜파였다.

운정은 그런 사문의 미래를 걱정해 천마에게 자비를 부탁했다. 자신을 키워주고 사랑해 준 사문의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동생이 원하는 바였기에, 하는 수 없이 천마는 약속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세력을 끌고 곤륜을 지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 약속이 바로 융중지약이다. 천하제일세를 자랑하는 마교가 여전히 신강에 묶여 있고, 호남혈사로 씨가 말랐던 정파인들이 그나마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백운정의 마지막 유언 덕분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으니, 융중지약을 지키자면 천마는 세력을 끌고 남하할 수 없었다. 하나 옥기린을 지키기 위해선 천마가 나설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철옹성인 마교에서 천마 혼자만을 끌어내려는 곽효의 계책이었던 것이다.

‘그래. 내가 혼자 있으면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더냐? 내가 그리 만만해 나를 불러낸 것이더냐?’

기린패에 의한 도발과 옥기린으로 인한 도발.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 천마는 냉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승냥이 같은 심성을 가진 자가, 자신의 좁은 소견에 빠져 천마조차 본인의 수준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게 읽혔다. 제아무리 강한 호랑이라고 할지라도 세력과 심복이 없으면 이빨과 발톱이 빠진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정도맹에게 빌빌거리며 중원 구경도 못 하던 마교를 천하제일세로 만들고, 단신의 몸으로 공동파를 멸문시켰으며, 호남혈사를 일으켜 정도 세력을 거의 다 쓸어버릴 뻔한 사람이 바로 천마인데도 말이다.

곽효는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마교가 천마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바로 천마 자신이 오늘날의 마교를 만든 것이다.

‘비열하게 뒤통수쳐서 재미를 볼 뻔했던 맛을 아직 못 잊은 게지. 그게 제게 남은 마지막 기회였음을 모르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등을 보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겐 결코 기회를 주지 않는 법이거늘.’

그때는 곽효를 믿었기에 당했지만 지금은 그를 믿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를 모르다니. 곽효가 영악하다고 생각했는데 영 헛똑똑이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 아셨습니까.”

자신이 지켜 왔던 비밀이 어떻게 밝혀졌는지가 궁금해 호완평이 물었다. 천마는 냉담하게 코웃음을 치며 그의 발치에 기린패의 탁본을 떨어트렸다.

“교의 관리를 어찌나 잘했는지, 내 서책에 이런 게 다 끼워져 있더구나.”

호완평은 힘겹게 배를 움켜잡고 있던 손으로 탁본을 주워들었다.

‘하아.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부를 도발해 왔단 말인가.’

천마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곽효라고 생각하고 있던 호완평이지만, 설마 그가 천마에게 직접 기린패를 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기에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좋아. 그렇게 나를 마주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만나 주지. 나도 네가 참 오랫동안 보고 싶었거든.’

천마는 입술을 뒤틀며 싸늘히 웃었다. 옥기린의 안부도 안부지만, 곽효 역시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죽여야 하는 자다. 자기 품에서 죽어간 여영이, 그 애가 마지막으로 흘렸던 그 피눈물을 생각해서라도 그놈만은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일 것이다.

“안 됩니다. 사부님.”

천마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 앞을 황급히 가로막으며 호완평이 소리쳤다. 천마는 그런 그를 얼음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다리가 풀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기어서 그의 앞을 막는 호완평의 태도는 처절하기 짝이 없었지만, 천마는 그런 제자를 내려다보면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비켜라.”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어조로 천마가 말했다.

“사부께서 이러실 것을 알고 알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 일을 아시게 되면, 혼자 몸으로라도 중원에 반드시 들어가실 테니까요. 하지만 안 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사부께선 혼자 몸이 아니십니다!”

눈치 빠른 제자는 그의 기색만 보고서도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그는 피를 토하는 듯 간곡한 어조로 만류했다.

“사부는 천마이십니다. 천마는 마교 그 자체입니다. 교주께서 중원에 홀로 들어가셨다가 잘못되기라도 하신다면 마교 전체가 바람 앞의 등불임을 왜 모르십니까. 10만 마교인들을, 당신 때문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정녕 내치실 작정이십니까?”

하나 천마는 호완평의 말에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이제껏 충분히 부와 명예를 줬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다 해줬어.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책임지며 살아야 한단 말이냐?”

“오로지 천마를 존모하는 10만 마교인들을 위해서라도 그래 주십시오. 사부만을 믿고 의지하는 저희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어리석은 놈! 언제까지 애정을 빌미로 매달릴 생각이야? 저번 마룡쟁패에서 그런 꼴같잖은 짓거리만 꾸며 내지 않았어도 이미 교주의 자리는 너에게 물려주었을 거다. 너는 언제까지 책임지는 일에서 도망칠 참이냐? 마교를 물려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 큰 짐을 홀로 지는 게 겁이 나 내게 이런다는 사실을 내가 정녕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느냐??”

분기가 치민 듯 천마는 거세게 호완평의 어깨를 걷어찼다. 사정을 보지 않고 거세게 걷어찬 발길질에 호완평이 거칠게 뒤로 쓰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뒤틀렸던 기혈이 다시 한번 상처를 입어 호완평은 울컥 피를 토했다.

“병신 같은 짓거리 말고 당장 물러가라. 오늘부터 네가 마교주다!”

“사부님!!”

“마영들은 들어라. 너희는 오늘부터 새 교주를 호위하라. 새 교주가 지금 병세가 심각하니 뇌정전 안에 모셔 두고 당분간 교 밖 출입을 엄금하라!!”

말이 엄금이지 실제로는 감금이다. 천마가 거침없이 명을 내리며 밖으로 나서자, 충실한 마영들이 뇌정전의 문을 닫았다. 상태가 정말로 좋지 못한 호완평이 비명처럼 천마를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폭풍 같은 기세로 일어나는 일들을 영문도 모른 채 얼떨떨하게 지켜보고 있던 석문평은, 침전 밖으로 나온 천마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이 타오르듯 이글거렸다. 호완평에게처럼 기세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형한 안광만으로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석문평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예의 바른 자세를 취했다.

“새 교주가 무슨 명을 내리든 따라오지 마라.”

천마는 싸늘한 어조로 경고를 내렸다.

“이 길은 나는 몰라도 너까지 지킬 수는 없는 길이다. 내 옆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말로 따라오지 마라.”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문평은 따라가지 않을 생각이다. 일의 전모를 몰라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얻어터지면서 호완평이 갑자기 교주가 되고, 천마가 맨몸으로 교를 뛰쳐나가게 만든 일이니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터였다.

“……꼼짝 말고 있어라.”

그러나 혼자 딴생각을 하고 있던 문평은 천마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천마가 무슨 말인가를 입 안에서 얼버무리다가, 갑자기 화가 난 사람처럼 확 하니 몸을 돌려서 가버렸기 때문이다.

신법을 시전한 천마는 빠르게 멀어졌다. 석문평은 멍한 얼굴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천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잠깐 지켜본 것뿐인데, 곧 그림자마저 까마득하다.

천마가 신법을 시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대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통의 하루였는데 갑자기 엄청난 일이 생겼다. 하늘에서 갑자기 우레가 울리더니 번개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 셈이다. 이런 걸 두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지 않을까? 문평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

각각 따로 두고 본 적은 있지만, 천마의 네 제자가 한자리에 모두 모인 광경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문평은 다소 주눅이 든 상태로 방의 가장자리에 섰다. 천마가 교를 떠난 상황에서 마중사기의 네 명이 다 모였다면 그야말로 최고 수뇌부 회의인 셈인데, 이런 엄청난 자리에 느닷없이 불려 와 자리를 지키게 된 문평은 어찌 된 영문으로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군요.”

포영의는 여느 때처럼 서늘한 안색을 한 채 조용히 말했다. 워낙 감정 없이 하는 말이라 진짜로 걱정을 해서 하는 말인지, 이렇게 될 걸 난 알았는데 너희는 왜 몰랐느냐는 뜻에서 하는 말인지, 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가 결국 일을 크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진작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일을 고했더라면, 이런 식으로 갑자기 일이 터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힘겹게 말하고 있는 호완평의 얼굴에선 병색이 완연했다. 그는 현재 방 안에 있는 사람 중 병상에 누워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사실 회의를 주재하기보다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천마가 봐주지도 않고 얼마나 모질게 걷어찼는지 늑골이 부러지고 갈빗대가 바스러지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

곽진무는 아까 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사람 중 정보가 가장 늦었던 그는, 이 자리에 와서야 곽효가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좀 실없어 보일 정도로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사람인데, 곽효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 곽진무를 초교연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은 눈치였지만 완강한 분위기의 곽진무는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일이 이렇게 됐든, 이제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는 것이죠.”

포영의가 호완평의 쓸모없는 자책을 잘랐다.

“그래. 네 말도 맞다. 지금 필요한 건 자성이 아니라 대책이지.”

호완평은 가슴이 아픈 듯 말을 할 때마다 안색이 질리면서도 굳건한 태도를 보였다. 초교연이 고개를 돌려 대사형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쩔 생각이세요. 대사형?”

“사부님의 뒤를 쫓아야겠다.”

호완평의 완고한 의견에 제일 먼저 반론을 꺼낸 사람은 포영의였다.

“무슨 수로 사부를 쫓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 교의 세력은 청해성을 넘지 못한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포영의는 쌀쌀맞게 말했다. 그 또한 사부의 안부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군사 역할을 맡은 자답게 객관적인 문제를 짚어 줄 필요가 있었다.

“기린패가 실종된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세력이 청해성을 넘어간다면 정파인들은 융중지약을 파약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신 사부님의 체면이 깎일 것이고, 그에 더해 마정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우리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면 득을 보는 건 어둠 속에 있는 곽효뿐입니다. 그자가 이 일을 꾸민 것은 일이 바로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또박또박 조리 있는 반론이었다. 진중한 표정으로 호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점은 알고 있다. 곽효가 우리 앞에다 어떤 덫을 놨을지 모를 이런 상황에서 경솔히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지. 내가 하는 말은, 세력으로 쫓자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쫓자는 것이다.”

호완평이 강건한 어조로 제의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 중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신 등신 바보 머저리같이 혼자 쫓아간다는 말 할 거면 사형, 나는 사형 갈비뼈를 하나 더 부러트릴 수 있어요.”

호완평이 진지한 만큼 초교연도 진지했다. 그녀는 냉정한 투로 말하며 호완평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대사형이 사부님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정신이 없어지는 것을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시면 안 되죠. 사부가 없는 지금 사형이 우리를 지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임시라지만 교주 자리에 오르셨다면서, 어쩌면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시는 거죠?”

‘교주’라는 발음이 어쩐지 뾰쪽하게 느껴지는 어투로 초교연이 말했다.

호완평은 그런 초교연의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내가 직접 가겠다는 게 아니다. 교주 자리를 맡은 나까지 움직인다면 교 전체가 흔들릴 텐데, 아무리 나라도 어찌 그런 바보짓을 하겠느냐? 게다가 이번에도 또 쫓아간다면 사부께서는 틀림없이 나를 죽이실 것이다.”

웬일로 호완평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다. 평소 모습만을 생각해 지레짐작했던 사제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교연은 입을 다물고 포영의는 심각하게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창백하게 마른 입술을 한 호완평은 더 이상 고개를 가누고 있기가 힘겨운 듯 베개에 뒤통수를 대며 말했다.

“영의야. 비선을 대고, 옥기린의 주변을 감시하도록 해라. 사부께선 틀림없이 그리로 가실 것이다.”

호완평은 우선 포영의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명했다. 포영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그 명을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옥기린을 직접 만나신다는 건가요? 사부는 이제껏 한 번도 그분을 만난 적이 없잖아요?”

옥기린과 천마가 어떤 사이인지 대략 짐작하고 있는 초교연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호완평은 힘없이 웃으며 그런 초교연에게 답했다.

“곽효가, 쿨럭. 직접 옥기린을 노리는 모양이니 어쩔 수 없다. 사부께서도 그걸 아셨으니, 결국은 그쪽으로 움직이실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부를 더 찾기 힘들 텐데요. 옥기린 쪽으로 움직이신다면 진면목으로 움직이지 않으실 거 아니에요? 나이 드신 모습도 아니고 지금 모습이시면, 옥기린과 거의 똑같아 보일 텐데요. 누가 봐도 혈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잖아요.”

옥기린과 천마의 얼굴을 둘 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혈연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았다. 그녀 역시도 그런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부님께서 옥기린의 자식이 아닌가 의심받으시겠지. 사부님은 이제 겨우 20대로 보이시지만, 옥기린은 벌써 40대잖아.”

천마한테 맞은 데가 어디 잘못됐는지, 호완평이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을 했다. 상황에 맞지 않은 호완평의 태도를 보고 잠시 당황했던 초교연은, 걱정스러운 듯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호완평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괜찮냐고? 만약 초교연이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안다면, 그렇게 함부로 물어보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분이 결국 옥기린을 만나러 가셨다. 그분의 친혈육인 옥기린을…….’

그 사실을 되뇌기만 해도 가슴 깊은 곳에서 심장이 울었다. 호완평은 머릿속으로 옥기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을 정도로 천마를 빼닮은 얼굴을 한 그 남자는, 호완평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되고 싶었던 것을 본래부터 타고난 존재였다.

그는 천마의 아들이었다.

순전히 추측일 뿐이지만, 호완평은 자신의 짐작을 거의 확실히 믿고 있었다. 기린패에 대한 사연도 그렇고, 백 부인과 관계된 일도 그랬다. 친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 상황에서 천마가 융중지약같이 불리한 약속을 맺었을 리 없고, 핏줄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손에 기린패를 그대로 놔뒀을 리 없다.

어차피 백 부인은 처녀의 몸으로 애를 낳았다. 그녀는 옥기린이 융중산에서 죽은 검협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검협의 아들인데 천마를 닮았다는 건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검협과 몰래 혼인을 올렸다고도 주장했지만, 그에 대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다.

호완평은 검협에 대한 제갈희련의 주장들을 모두 거짓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아비를 밝힐 수 없는 아이를 낳았기에, 이미 죽은 사람을 방패로 삼은 거라고.

백우경의 진짜 친부는 바로 천마일 거라고 말이다.

그랬기에 호완평은 백우경을 항상 질투했다. 비록 서로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부자간이지만, 그들은 그런 외면적인 것보다 더 깊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백우경은 천마의 손에서 자라지도 못했으면서도 천마와 꼭 빼닮았고, 그를 닮은 재지와 그를 닮은 재능을 가졌다. 평생토록 천마처럼 되고자 노력한 호완평조차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그는 천마를 닮았다.

그래서 호완평은 천마와 옥기린이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호완평이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친아들을 천마가 만난다는 건, 천마에게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어진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생의 모든 것을 천마에게 건 호완평에게 그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다.

옥기린에 대해 생각하자 다시금 입 안에서 쓴맛이 돌았다. 하지만 호완평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백우경을 향한 그의 은밀한 질투는 그를 평생 동안 괴롭혀 온 감정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자칫 잘못하면 천마의 목숨마저 위험할지도 모르는 판국이 아닌가? 지금은 자신의 저열함 따윈 잠시나마 잊어 두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때였다.

“사부가 비록 천하제일인이시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 곽효, ……미안하다. 진무야. 이해해라.”

호완평은 마음의 혼란을 벗으려고 노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곽진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 이사제가 동석하고 있음을 알고도, 아까부터 곽효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호완평은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사과했다.

그런 호완평에게 곽진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마음이 수습되지 않아 어떤 반응도 보이기 힘들었다.

“곽효, 그자도 그렇게 판단해 사부님을 끌어낸 것이겠지. 그 수법을 알고도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소한 사부님의 손발이 되어 줄 친위대만큼은 보내야 한다고 본다.”

그가 지금 꺼내 놓는 방안들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방책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차차 상황을 정리하자는 게 호완평의 생각이었다.

“그럼 사형은 누굴 보낼 생각이십니까?”

“마영대를 보내겠다.”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은밀함 만큼은 그들이 최고니까요.”

마영대의 객관적인 전력을 고려해 본 포영의는 그 말에 찬성했다. 교주의 비밀 호위로 은밀함이 무엇보다 장점인 그들만큼 이번 일에 적합한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사부님의 뒤는 어떻게 쫓아가죠? 사부님의 경공을 감히 누가 따르겠어요? 이미 가셔도 어디까지 가셨을 분인데.”

초교연이 또 다른 걱정거리를 제시했다. 등봉조극의 경지에 올랐으며, 다른 모든 무공과 마찬가지로 신법도 경지에 오른 천마를 대체 어떻게 쫓느냐 하는 문제였다.

초교연은 그가 다른 일반적인 고수들처럼 흔적을 남기고 다니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사부의 잦은 외유를 걱정해 꼬리를 붙였던 사형들이 번번이 실패했던 선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부께서는 최고의 꼬리를 두고 가셨으니까.”

뜻밖에도 호완평은 초교연과 같은 걱정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힘겨운 얼굴을 하고서도, 확고한 어조로 사부의 뒤를 쫓을 수 있노라 자신했다.

“꼬리요?”

“그래 꼬리. 곤륜까지 가시는 사부님을 유일하게 따라잡았던, 마교 내에서만큼은 최고의 꼬리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한 호완평이 석문평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초교연은, 아까부터 줄곧 왜 여기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또 갑자기 왜?’

오가는 심각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던 석문평은, 끝내 자신에게로 불똥이 튀고 마는 이야기 전개에 흠칫하고 말았다.

“천마께서 직접 명하셨습니다. 쫓지 말라고요.”

덤터기를 잘못 쓰면 천마조차 만류한 사지로 뛰어드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석문평은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렇게 변명했다.

“저번에도 그런 명을 하셨지만, 자네는 그 명을 어겼지.”

호완평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그러도록 윽박질렀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손을 대시는 게 아니라, 저까지 살피시지를 못하신다고요.”

“그분을 따라가게 되면 자네는 스스로가 살펴야지, 감히 그분께 짐이 될 생각인가?”

호완평의 날카로운 질문에 문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네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네. 이번에는 예전처럼 엄살을 떠는 게 아니야. 정말 그분의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거든. 부탁하네, 문평. 사부님의 뒤를 쫓아 주게.”

호완평이 직접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저 인간이 부르는 일에 따라갔다가 좋은 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대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자리까지 털레털레 왔던 것일까?

문평은 정말이지 거절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싫다는 말을 백 번도 더 했을 것이다.

‘너희 사부가 진짜로 오지 말랬다고. 너희는 사부 말을 왜 그렇게 죽어라고 안 듣냐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평은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호완평 한 사람도 아니고 마중사기의 네 명 모두가 그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로는 자네밖에 없니 어쩌니 하지만, 저들의 태도는 일방적인 강압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하여간 만 노야, 그 노인네는 왜 하필 나한테 이따위 걸 가르쳐 줘서는! 그냥 무공이나 가르쳐 주지. 뭐 하러 이렇게 고생만 바가지로 하는 걸 가르쳤던 거야!!’

늘 그렇듯 마음속으로 만 노야를 있는 대로 욕하던 문평은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곤륜으로도 아니고 강호 전체를 향해 쫓아 나가야 할, 무영추적행無影追跡行의 시작이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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