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4 장 (5/26)

제 4 장

세상에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이 있다.

학식이 짧은 석문평은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는 잘 모른다. 다른 어려운 말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말의 용례뿐이다.

강호에서는 그 말이 퍽 자주 쓰인다. 주로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이 입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바로 그거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명문 대파들, 사파중에서도 전통 있는 사파들, 오대세가를 비롯한 무림세가들, 그리고 기인이사들. 그들은 항상 비인부전을 부르짖으며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곤 했다.

무공을 배우고 싶어 강호의 문을 두드리는 청년들은 많고 많지만, 그 사람들은 대부분 ‘비인부전’이라는 말 한마디만을 듣고 돌려보내진다. 비인부전. 사람이 아닌 자에겐 뜻을 전하지 않는다. 사람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지식을 전수하여 그릇되게 쓰이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말뜻만 생각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 그 많은 청년들이 모두 다 인간적 됨됨이가 글러 먹었단 말인가? 명문에서 무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다 인성적으로 고르고 바른 인재들일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선도를 닦는 도가나, 학문을 전수하는 유림에서라면 또 모를까, 강호에서는 아니다. 강호에서 말하는 비인부전이란 대부분 인간적인 품성 하고는 별 관련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인간’이란 성품이 아니라 체질을 말한다. 고된 훈련을 이겨 낼 수 있는 체격, 어려운 무리를 이해할 수 있는 빼어난 오성, 그리고 대성을 이룰 수 있도록 특화된 체질.

그중 하나라도 갖춘 사람은 인재人才라 불리고, 둘을 갖춘 사람은 수재殊才라 불린다. 그리고, 그 셋 모두를 한 몸에 조화롭게 갖춘 사람은 기재奇才라고 한다.

천마 혁련상赫鍊常이 바로 그 셋 모두를 한 몸에 갖고 태어난 보기 드문 기재다. 역사와 전통이 오래돼 인재가 모이는 마교에서도 특출하게 눈에 띄는 자질인지라, 100년 내 제일 기재라고 일컬어지기까지 했다.

그의 재질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그의 사부가 되는 전대 마교주는 어린 천마를 보자마자 손부터 잡아끌었다고 한다. 아이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의 재질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나이 10살에 마교주의 눈에 뜨인 혁련상은 별다른 절차도 없이 바로 그의 제자가 됐다. 본래 마교 출신도 아니었던 그는 단지 재질이 출중하다는 이유만으로 마교주의 양자까지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는 다만 재질만 뛰어난 게 아니라 운도 좋았는데, 그보다 적게는 20년, 많게는 30년 가까이 먼저 들어와 무공을 닦았던 사형들이 그가 마교주의 제자로 들어오기 1년 전에 벌어진 마룡쟁패에서 모조리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경쟁자도 없이 교주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30대에 화경化境에 올랐고, 40대에 천하제일인이 되었으며, 80대에 등봉조극登峰造極, 즉 현경에 이르렀다.

당대는 물론이고 그 선대에도 그와 비교할 자는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수백 걸음을 앞서 걷고 있었다. 그가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지만, 앞서 나간 그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의 행보가 언제나 거침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걷는 길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발걸음을 방해할 만한 존재는커녕, 뒤에서 그의 발목을 잡을 존재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저 사람의 저런 성격은 그런 선, 후천적 요인이 결합해서 이뤄진 산물이라 이거네? 원래부터 그런 성격인 데다 그 성격을 바꿀 만한 고난 따윈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인격이 저따위라고?’

천마라는 사람은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저 모양인가?, 라는 화두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에 몰두했던 석문평은 마침내 그럴듯한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완벽하게 안하무인인 것은 그를 큰코 다치게 해줄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경쟁자가 없었다. 하늘이 내린 지나치게 빼어난 자질과 운 덕분에, 그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발견해 본 적도, 타인에게 져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을 사형들은 자기들끼리 동귀어진하는 바람에 그의 인생에서 물러났고, 전대 마교주의 단 하나 있는 제자이자 양자로 애지중지 키워지다가 고작 30대의 나이에 한 단체의 주인이 되었다. 무공에 대한 재능도 만발해 50대엔 적도 더는 없었다. 천마는 무슨 강호기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한결같은 꽃길만을 걸어왔다.

문평은 무공의 경지나 그 성취가 인격의 도야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혁련상을 보고 알았다. 도가나 불가처럼, 심신을 닦는 마음공부가 전혀 없는 마교의 무공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을 뿐 인성을 다듬는 데는 무소용이었다.

이런 사람한테 뜻을 전하지 말라고 생긴 말이 비인부전인 것으로 아는데, 강호에서는 완전히 그와 반대되는 상황만 연출된다고 생각하니 일개 무부인 문평조차도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강호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어디가 안 좋은가?”

무심결에 내어 버린 한숨 소리를 들었나 보다. 천마가 몸을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문평은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재빨리 지우고 어색하게 웃었다.

딴생각하고 있었던 것까지는 상관 안 하겠지만, 그를 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뒤끝이 매우 좋지 못할 것이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데. 정 힘들면 이리 와서 앉아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천마가 앉으라고 가리킨 곳은 그의 허벅지 위였다. 아무리 뇌정전 안이라곤 하지만 바깥은 바깥인데, 문평더러 하늘이 훤히 트인 데서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으라 권하는 것이다.

“이 자리가 편합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문평은 꿋꿋한 태도로 천마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래?”

대수롭지 않은 듯 되물은 천마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권하긴 했어도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듯이.

‘또 무슨 일을 당하려고 거기에 앉아. 저 사람은 내가 일각에 한 번씩 지난 일을 까먹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원으로 나오기 직전, 앉아 있는 자세가 단정하다는 기막힌 이유로 천마의 무릎 위로 끌려 올라가 거한 낮 정사를 치렀던 문평은 그래 놓고도 다시 무릎 위로 올라오라는 권유를 하는 천마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허리는 아직도 우릿하고, 깨끗이 닦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항문에선 이물감이 느껴졌다. 옷으로 가린 데가 많아서 그렇지, 벗겨 보면 온몸이 전부 얼룩덜룩 성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연이은 정사가 낳은 흔적이었다.

단 한 번, 개에 물린 듯 지나가리라 생각했던 정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천마의 말대로 그가 ‘깨는 것’을 좋아한다면, 자신 따위 이미 다 깨지고 산산조각이 나 형태도 안 남았을 텐데, 천마는 아직도 그를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다.

약강에서 천산으로 올라오는 열흘 내내 천마와 몸을 섞었고, 그 열흘 중 이틀은 아예 객방에 틀어박혀 바깥 빛도 보지 못했었다. 천마는 난생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어린 청년처럼 집요하게 문평의 몸을 탐했다. 처음부터 강간이었던 게 아니라 스스로 허락한 바가 있었던 문평은 그런 천마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만약 실제로 아팠다거나, 몸을 다쳤다거나 하면 그래도 거절할 이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핑계도 댈 수 없을 정도로 천마는 정사가 능숙했다. 통증을 느꼈던 것은 첫날뿐으로, 그날 이후부터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천마의 성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엄청난 모험이지만, 비역질에도 백전노장인 천마가 문평의 몸을 세심하게 배려해 가며 즐긴 덕분에 문평은 늘 걱정했던 찢어진 엉덩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파과破瓜를 당했던 당일도 고통스럽긴 했지만 근육은 찢어지지 않았다. 한계까지 늘어나고 마구 찔리는 바람에 뱃속이 요동치긴 했지만, 천마같이 커다란 남자를 받아들인 것치고는 의외로 대가가 적었다.

천마와의 정사는 지나치게 진하고 달았다. 익을 대로 익어 과즙마저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처럼, 혹은 벌집째 베어 문 봉밀처럼. 농익은 정사는 그의 몸을 흔들었고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천마의 손길에 익숙해져 간다.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종내에는 그가 주는 쾌감에 길들여지려고 한다.

자신이 모르던 감각, 몰랐으면 더 좋았을 감각들이 천마에 의해 하나하나 개발되고 개화하는 것은 문평에게 끔찍할 정도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천마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일에 더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손쉬운 몸이기에 손을 뻗어 희롱하는 것뿐인데, 그에 적응한다는 것은 곧 석문평이란 사람의 인격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에게서 육체만을 보고 있는 천마는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그에게도 혼백은 있었다.

“아, 여기 계셨네요?”

상념에 잠겨 있던 등 뒤에서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평은 발소리가 작은 것이 아무래도 여자인 것 같아 뒤를 돌아봤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다. 예화나 란란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문평이지만, 지금 그에게로 걸어오는 여인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묘원 사태가 젊었을 적하고 비슷할까? 묘원 사태처럼 청초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화사함은 오히려 그녀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그야말로 모란꽃 같고 동백꽃 같은 요염한 여인. 문평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웬일이냐?”

뇌정전의 정원에 만들어 놓은 가산家山의 한 귀퉁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일산을 펴 놓은 채 책을 읽고 있던 천마가 여인을 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다.

“선물 가져왔어요.”

용건은 말하지 않고 다짜고짜 손에 든 병을 불쑥 내민 여인에게 천마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보내기는 강국康國1)으로 보냈는데, 갔다 오기는 대리大理2)를 갔다 왔나 보구나? 중간에 길을 잃었던 거냐?”

“강국까진 가다가 중간에 돌아왔고요, 대신에 대리를 다녀온 사람을 후려쳐서 한 병 더 받아 냈어요. 그 앙큼한 사형이 글쎄 두 병을 가져왔으면서 한 병만 내놨더라고요. 사부께서 얼마나 술을 즐기시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래서 확 뺏어 왔어요. 저 잘했지요, 사부님?”

여인은 애교 있게 말하며 천마의 앞에 술병을 내밀었다. 문평이 보니 어째 낯이 익은 모양새를 한 술병이다. 수수하게 흰 백자 술병에, 입구를 틀어막은 밀랍에…….

‘헛. 저것 설마, 또 후아주인가? 후아주가 한 병이 아니라 두 병이나 있다고? 대체 뭐 하는 미인이길래 저렇게 완벽한 걸까? 천하절색의 미인이 후아주까지 들고 있다니. 남자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한 몸에 다 가졌구나.’

붉게 물들인 치마에 잘록한 허리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드는 옥색 채대를 두르고, 양옆엔 맑은 소리가 나는 패옥을 찼다. 손 위에서 춤을 출 수도 있을 것 같은 연약한 몸매에 사내의 간장을 녹이는 조그마한 얼굴. 거기에 가는 눈웃음까지 치면서 후아주를 들고 나타난 여인이라니. 문평은 마음속 깊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비록 천마에게 안기는 몸이긴 하지만, 남자로서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한 문평은 그녀를 보고 자신이 여전히 사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내보단 여인에게 먼저 눈길이 가고, 그중에서도 어여쁜 여인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천마가 아무리 여자처럼 자신을 안아도 그런 근본적인 부분만큼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문평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남몰래 생각했다.

“잘하기는. 무아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그놈은 겉으로는 털털해 보여도 은근히 계산적인 성품이어서, 너같이 감당 안 되는 애한테는 일찌감치 손을 들어 버린단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껏 쌓아 온 죄가 많아 면이 서질 않으면서, 어쩌려고 또 이런 짓을 했어? 넌 그놈에게 미운털 박히는 게 그렇게도 좋으냐?”

설사 박색의 추녀라 할지라도 후아주를 들고 왔으면 기꺼이 반겨 맞았을 문평과 달리, 천마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가져온 술조차 받지 않은 채 꾸중 섞인 말부터 내뱉었다. 미녀가 그 말을 듣고 어깨를 움츠렸다.

“게다가, 상행 나가던 중간에 그냥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무슨 변명을 할 셈이지? 후아주는 거기 내려놓고 제대로 고하거라. 엄연히 교의 직무를 맡고 나갔으면서 어째서 그런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이냐?”

이어 나오는 천마의 말은 한층 더 엄중하다. 평소엔 그저 사납고 위협적이기만 한 기세가 엄중하게 가라앉자, 거의 위엄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원래 내가 상상하던 천마의 모습이란, 바로 저런 거였는데……. 난 진짜, 천마는 원래 저런 줄 알았다고.’

문평은 그의 곁에서 지낸 지 한 달이 다 돼서야 처음 보는 그의 위엄에 한숨을 내뱉으며 한탄했다.

“사부님……”

호된 꾸지람에 미녀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그녀는 얌전히 반성하는 태도를 취했다.

“알아요. 사부님.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다는 걸요. 하지만 저에게도 사정이 있었답니다. 정말 급한 일이 생겼거든요.”

“상행 나간 너에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있단 말이냐?”

“예. 사부님. 정말 급한 일이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마영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그녀도 몰랐지만, 그들이야 늘 천마의 곁에 있는 자들이니 신경 쓸 것이 못 된다.

의아한 것은 그들이 자리한 삼 장 내에 웬 남정네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까 처음 볼 때부터 궁금하긴 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건지.

옷차림을 보아하니 하인은 아닌 것 같고, 무위를 보아하니 고위급의 무사도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사람이 천마 앞에 불려 와야 할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사부님, 저 사람은……?”

“신경 쓸 거 없다.”

의아해하며 남자의 존재에 관해 물었더니 천마가 딱 잘라 버렸다. 잘못한 것이 있는 그녀는 더 물어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천마가 다시 물었다.

“말해 봐라. 무슨 급한 일이었느냐. 납득이 간다면 처벌을 가볍게 해줄 수도 있다.”

결국 벌을 안 주지는 않겠단 소리였다.

“제가 파밀고원을 거반 지나 타현塔縣에 당도했을 때 말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아무래도 여의치 않았는지 전음으로 바꿔 다시 말했다.

“곽효郭孝를 봤습니다.”

충격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무심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보긴 했지만, 틀림없이 곽효였습니다. 사부님의 뇌전염운雷電染雲에 당해 날아갔던 얼굴 반쪽이 아직도 그대로더군요.”

마교의 상위 계급 출신인 그녀는 마교오가魔敎五家 중에 하나이던 곽씨세가郭氏勢家의 소가주인 곽효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숙부라고 부르며 따랐던 기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반란을 일으켜 천마를 시해하려 들었을 때 천마의 옆에 있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 더욱 컸다.

고작 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 나이로 눈앞에서 잔인하게 사람이 죽어 나가고, 사부가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봤었으니,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일로 그녀의 아버지는 한쪽 팔을 잃었고, 마교오가의 절반 이상이 토막 났다. 산공독인 신선폐神仙廢와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을 음독한 상태로 끝까지 싸웠던 천마가 곽씨세가의 가주였던 철마鐵魔 곽항郭伉의 목을 베지 못했다면, 아마 그날 목숨을 잃은 것은 그녀와 천마가 되었을 것이다.

“심상치 않은 것은 그의 주위에 중원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세력이 있는 눈치입니다. 행동이 일사불란한 데다 곽효의 명을 따르는 자가 많더군요.”

천마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평생을 보아 온 사부지만, 그의 속내를 그리 잘 읽어 내지 못하는 초교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쓰는 것도 그렇고, 전서구를 보내는 것도 그래서 제가 직접 달려왔습니다. 사부께서 아셔야 할 일 같아서요.”

곽진무에겐 탁상시계의 일 때문에 온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 이야기는 교에 돌아와서야 들었다. 곽진무의 상태를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초교연이 마침 잘됐다 싶어 그 핑계를 댔지만, 솔직히 말해 곽효를 처음 봤을 땐 선물이고 뭐고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군자마검君者魔劍 곽효는 곽진무의 아버지다. 그는 본래 마교인이면서도 별호에 군자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공명정대하고 반듯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분별 있는 태도로 인해 처신이 바르다는 평을 받았고, 부하들을 다스리는 데도 능력이 있어 인기가 높았다. 더군다나 곽효는 아들인 곽진무가 천마의 제자인 데다가 천마가 가장 아꼈던 부하인 육마戮魔 손규孫赳의 딸 손여영孫麗英의 남편이기도 해서, 천마에게도 굳은 신임을 받았다.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천마조차도 그랬다. 그러나 그의 반란에 누구보다도 놀랐던 사람은 그의 부인인 손여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독이 담긴 술잔을 천마에게 건넸던 그녀는, 일이 벌어진 이후에야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곽효가 부인에게까지 철저히 비밀로 해두었던 건 그녀가 그 일을 결코 찬성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천마가 중독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손여영은 남편이 다른 뜻을 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아끼는 천마의 신뢰를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그에게 독배를 전하게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천마의 앞을 몸으로 막았다.

직접 칼을 든 곽효가 무공도 익히지 않은 그녀의 몸을 난자하면서까지 떨쳐 내려 했지만, 그녀는 목숨을 잃으면서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초교연을 살린 것이 천마였다면, 천마를 살린 것은 손여영이었다. 그녀가 몸으로 지킨 그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면 독의 발작을 억누르지 못한 천마는 곽효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수괴의 아들이면서도 곽진무가 천마의 제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손여영의 공이 컸다. 천마는 곽씨세가의 핏줄이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모조리 멸족시켰지만, 손여영의 아들인 곽진무만큼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 무공을 모르는 여인이 목숨을 바쳐서 지켜 준 것에 대한 천마 나름의 보답인 셈이었다.

“……진무는?”

“이사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소식을 들었다면 어떻게라도 티가 날 사람인데,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 보이거든요.”

“그게 아니라, 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했냐고 묻고 있는 거다. 곽효를 봤다는 이야기를 그놈에게 했어?”

“아뇨. 하지 않았어요. 하면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곽효의 일은 곽진무에게 있어 역린 중의 역린이다. 그가 유리걸식하는 고아 출신으로 천마의 손에 거둬져 마교로 들어온 호완평이나, 남색을 즐기는 천마에게 남첩으로 보내진 포영의보다도 후계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아버지가 저지른 원죄 때문이다.

초교연이 생각할 땐 그가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산학만 파고드는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그런 상처를, 아무리 그녀라고 할지라도 가볍게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가능하면 곽진무가 이 일을 모르고 지나가길 바랐다.

“잘했다. 그 녀석 귀엔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네.”

곽효의 소식을 듣고 천마가 어떻게 나올지 적잖게 근심하고 있었던 초교연이 안심하며 대답했다.

“……고작 그런 일 따위로 일찍 돌아왔단 말이지?”

안심하기가 무섭게, 천마가 엄한 얼굴을 하고 초교연을 야단쳤다. 순간 놀라 자라목이 되었던 초교연은 늦지 않게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전 정말 절실했어요, 사부님. 그렇지 않았다면 일을 내팽개쳐 두고 오진 않았을 거예요.”

초교연은 그에 더해 제법 그럴듯하게 연기까지 했다. 뇌정전은 교의 중지이지만, 그러므로 오히려 더 소문이 잘 퍼져 나가는 장소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작은 일도 끝내 큰일이 된다.

“절실하건 뭐건 간에 그건 네 개인사다. 공적으로 맡은 직무를 그 아래로 두는 것은 교의 규율을 우습게 아는 처사임을 왜 몰라? 네가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의 무얼 믿고 일을 맡기겠어?”

“사부님…….”

“긴말할 것 없다. 네 처소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해라. 내가 따로 부르는 일이 있을 때까지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올 줄 알아.”

“따로 부르는 일이 있을 때까지요? 확실히 정해져 있는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네가 하는 태도를 봐서 날짜는 조절해 주마. 하지만 진심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몇 년이 지나도 처소에서 나오지 못할 줄 알거라.”

천마의 단호한 태도에 초교연은 울상을 지었다. 그의 사부는 입 밖에 낸 말만큼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다. 아무리 연극이라고는 해도, 아니 연극이기에 더욱 확고히 지킬 사람인 것이다. 그녀가 너무 쉽사리 풀려나 교내를 돌아다니면 의심하는 눈이 생겨날 수도 있기에 그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초교연으로서는 예정에 없던 연금 생활이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물러가거라.”

천마가 손짓으로 초교연을 내쫓았다. 하는 수 없이 초교연은 예를 표하고 일어나 천마의 앞에서 물러 나왔다.

문평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천마의 사부다운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말투가 경박하고, 지나치게 신랄한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평소 천마가 보인 행동들을 생각하자면 그래도 썩 그럴듯하게 사부 흉내를 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라웠다. 호완평이나 포영의, 곽진무와 같은 그리 좋지 않은 선례로 봤을 때 천마가 제자에게 다른 사부들과 비슷하게 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마라고 할지라도 어린 여제자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니, 반대로 여제자라서 사정을 안 봐주는 건가?

‘알쏭달쏭하군. 뭐가 맞는 거지?’

문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역시 전자가 맞겠지만, 천마는 매우 특수한 경우이므로 후자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취향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공언한 곽진무는 건방지게 개기는 것까지 다 봐줬으면서, 예쁜 여제자에겐 저리도 냉담하게 구니 문평의 의심이 아예 일리가 없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

“학아. 학아.”

조원들과 함께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던 임학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아, 최 형? 무슨 일이십니까?”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자기 방에서 문을 반쯤 열고 나온 최위명이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허튼소리를 잘하는 명랑한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웃음기가 없어서 살짝 고개를 갸웃한 임학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아?”

“괜찮습니다. 일과도 모두 끝났고 따로 할 일도 없어요.”

“그럼 들어가자. 안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최위명은 임학을 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최위명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간 임학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단속하고 돌아서는 최위명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최 형?”

임학은 최위명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좀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지 않는 그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너, 얼마 전에 말이다. 문평이 그놈을 만났었다고 했지?”

“네. 만났었습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한 최위명의 질문에 임학은 순순히 대답했다.

“문평이 그 녀석이 인사도 없이 방을 떠나게 된 건 어떤 임무를 맡아서라고 했지? 그래서 당분간 못 돌아오게 됐다고 말이야.”

“예. 그랬었죠. 새삼스럽게 그 일은 왜 물어보십니까.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드렸던 말씀 아닌가요?”

“문평이 임무를 맡은 곳 말이야, 혹시 뇌정전 아니냐?”

뜻밖의 말을 들은 임학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극히 순간적이었을 뿐 곧바로 표정을 고쳤지만, 주의 깊게 임학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최위명의 눈길은 피하지 못했다.

“뇌정전이 맞는 모양이다. 네 얼굴이 그렇게 굳는 걸 보니.”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십니까?”

굳이 밝히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문평이 입단속을 해달라고 부탁했었고, 자신이 생각할 때도 그런 일은 많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그저 한두 단계 직급이 높아진 정도라면 운 좋게 벼락출세한 거라 여기고 축하해 줄 만했지만, 외전의 하급 무사가 갑자기 내전에서도 가장 중지인 뇌정전에 발탁되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필시 윗사람들의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터. 그와 같은 아랫사람들은 그런 사정 따위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내가 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래서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이상한 이야기라니요.”

“그게……. 허 참.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뇌정전에 있다니 말하기가 곤란하구나.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보려고 한 것뿐인데 어쩐지 진짜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이제는 임학의 얼굴도 최위명만큼이나 심각해졌다. 가능하면 모르쇠로 넘어가고 싶긴 했지만, 막상 문평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모른 체하기가 어려웠다.

“누구에게 무슨 이야길 듣게 되셨는데 그러세요? 석 형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래. 그렇다더라.”

“말씀해 보세요.”

“내가 지금 사귀고 있는 아가씨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 아가씨가 내전에 있는 경비 무사들의 숙소에서 빨래를 하고 있거든?”

웃는 얼굴이 편안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최위명이 간간이 교내의 젊은 여인들과 연분이 난다는 것은 임학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그 아가씨가 어제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자기가 무사들의 빨래를 줄곧 하는데, 한 사람의 옷에서 자꾸 이상한 게 묻어 나온다는 거야. 처음엔 그게 뭔지 몰라서 의아했는데 자기랑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가 보더니, 향유와 정액이 엉긴 거라고 하더래. 내전 무사 중에서 누가 비역질을 하는 모양이라고.”

문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화제가 영 이상하게 흘러간다. 임학은 빤한 시선으로 최위명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최위명은 여전히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이게 끝이 아니니 더 들어 봐. 그래서 그 아가씨는,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고 하면서 그냥 잊고 있었대. 빨래할 때마다 신경질이 나긴 하지만 직접 가서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자꾸 그 옷을 내놓는 무사 이름만은 단단히 외워 뒀다고 하더라고.”

뜬금없는 이야기에 임학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문평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내전 무사 속옷 이야기는 대체 왜 한단 말인가? 하지만 최위명이 아무리 실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아 놓고 농담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임학은 일단 끝까지 듣기로 했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굳이 듣게 하는 이유가 뭔지, 끝까지 들어보고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은 형이라도 한마디 해줄 생각이었다.

“그 아가씨한테 또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는 뇌정전에서 근무를 한대. 뇌정전에 있는 욕실에 물을 긷는 일을 한다나. 근데 그 아가씨가 말하기를, 요즘 교주님께 남첩이 하나 생기셨다나 봐. 욕실에서 종종 거하게 일을 벌이고 간다고 소곤거렸다는데, 그 남첩이라는 사람이 외전에서 막 뽑아 올린 하급 무사 출신이라더래.”

설마. 임학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최위명이 하는 이야기의 줄기가 어디로 뻗어 나가는지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아가씨가 말하기를, 자기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대. 자기한테 늘 향유 묻은 옷을 내놓는 무사가 마침 그 외전 출신의 무사래. 근래에 외전에서 뽑아 올린 무사는 그 하나뿐이라 자기가 똑똑히 기억한다고 하더군.”

그들이 알고 있기로도 최근 내전으로 뽑혀 간 외전 무사는 문평 하나뿐이다. 최위명은 낮게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나도 외전 무사니까 그 사람 혹시 알고 있느냐고, 그 사람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설마 문평이 이름을 그런 데서 들을 줄 알았어야 말이지. 바람결에 얼핏 교주님께서 사내를 종종 건드리신다는 이야길 듣긴 했지만, 낭설이라고 생각했지 진짜라고 믿었겠어? 하물며 문평이 놈이 그런 대상이 된다는 건 진짜 상상도 못 해볼 일이잖아.”

임학 역시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석 형처럼 평범한 남자를 왜요? 우리 교주님쯤 되시는 분이라면 남색을 하셔도 그보다 나은 상대가 넘쳐나실 게 아닙니까?”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고. 나라고 이런 이야길 믿고 싶어서 했겠어? 나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네게 물어본 거야. 진짜로 문평이 뇌정전에 근무하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근데 그것도 맞다고 하니, 난 뭘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임학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석문평의 얼굴을 생각했다. 난감하게 굳은 미소와 뭔가를 말하고 싶어 머뭇거리던 얼굴. 하지만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임학 또한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돌아섰었다.

‘석 형,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설마 이것은 아니겠죠? 혹시 내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냥 와버린 겁니까?’

혹시나 싶은 마음이 큰 까닭에 임학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아는 석문평은 정말로 평범한 남자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라서 정에 약하고, 예쁜 여인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는. 그러면서도 정작 그 앞에서는 말도 잘 못 하는 바보스러운 면이 있는 보통 남자.

평범한 사람이 갑작스레, 그것도 본인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윗전에게 몸을 내줘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임학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진짜로 짐작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가정 자체를 아예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함, 아니겠어요? 어떤 사정이 얽힌 것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엔 괜한 악소문 같습니다. 외전 출신의 무사가 갑자기 승전해 내전으로 들어가니까 그걸 시기해서 험한 말이 퍼지는 거겠죠. 설마 석 형에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임학은 속으로 긴가민가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들은 이야기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된 건가 싶어 불안해하고 있던 최위명이 고개를 들어 임학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다름 아닌 문평 형입니다. 그 형이 남첩 노릇을 할 주제씩이나 된다고 보십니까? 거기다가 상대가 무려 교주님이라니요? 너무 허황한 이야기잖습니까.”

“하지만 누가 감히 교주님의 이름을 넣은 유언비어를 퍼트려?”

“글쎄요.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요. 어쩌면 교주님께 정말 남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 동안 여인과 관련된 소문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으셨던 분이니,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해요. 하지만 그 상대가 문평 형이라는 건 괜한 말일 겁니다. 그런 사정이 없으면 외전 무사가 감히 내전에 어떻게 들어왔느냐 하는 식으로 중상하기 위해 말을 갖다 붙인 게 아닐까요.”

임학은 자신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였으나, 그건 최위명을 안심시키기 위해 보이는 모습이지 진짜 마음이 아니다.

임학은 자기가 하는 말이 허튼소리임을 잘 알았다. 무엇보다, 소문이 흘러나온 곳이 무사들에게서가 아니라 시비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들은 무사들 간의 알력다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그녀들이 문평의 흠을 잡는 이야기를 일부러 지어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그럴까?”

“제 생각이 그렇단 겁니다. 사실일지 아닐지는 저도 몰라요.”

“아니, 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아닌 것 같긴 해.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이게 긴가민가하고 무척 당황스러웠거든. 너무 뜻하지 않은 말을 들은지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최위명은 쉽게 속아 넘어갔다. 믿기지 않은 진실을 추궁하기보다는, 믿고 싶은 말을 믿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허언에 기분이 상했을 사람인데, 우리까지 이런 이야기를 떠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힘이 들 겁니다.”

임학은 그래도 혹시 몰라 최위명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이야기가 교내를 떠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거짓이라면 감히 교주님의 이름을 더럽힌 대역 죄인이 되는 것이고, 사실이라면 문평 자신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최위명도 그것을 아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까보단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임학에게 말했다.

“그나마 네가 있어 다행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혼자 힘으로는 아무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 다행히 네가 똑똑해 분별을 잘 해줘서 다행이지, 네가 없었더라면 문평에게 해가 될 이야길 고스란히 믿을 뻔했다.”

임학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름대로 납득이 가는 설명까지 들은 그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최위명은 임학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리며 그를 치하했다. 임학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주 웃어 주고 싶었지만, 근육이 굳어 웃는다기보다는 찡그린 것에 더 가까운 표정이 되고 말았다.

***

포영의는 지쳐 있었다.

정보 업무란,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집중하고 있는 첩보 업무에는 항상 예리하게 날을 세운 이성이 필요하다. 이 정보가 무엇을 뜻하는 실마리인지. 이 실마리가 큰 그림의 씨실인지 날실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구별해야 하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정보라고 할지라도 소홀히 할 수 없고, 자신이 제대로 판단을 하고 대처를 했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다. 날카로운 지각과 발 빠른 판단력, 그리고 정돈된 지성. 그 세 가지를 고루 소모해야 하는 그의 업무는 원래부터 막대한 심력을 소비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에게 편두통이 잦은 이유도, 그렇지 않아도 까칠한 그의 성격이 더욱 날을 세우게 되는 것도 모두 지나치게 소비되는 심력 때문이다.

안 그래도 피곤한 그에게 요즘에는 더한 압력이 얹어졌다. 미련한 미친개. 한 곳만 보고 죽어라고 달려가는 그 어리석은 개가 그에게 힘든 과업을 떠넘겼다.

정도맹正道盟보다도 오히려 더 뚫기 힘들다는 제갈세가에서 무림 최고의 보물 취급을 받는 기린패의 탈취라니. 차라리 황궁에서 옥쇄를 빼 오는 게 이보다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포영의는 이미 그 일을 하기로 수락했고, 그 대가로 자신이 가장 바라던 것을 약속받았다. 호완평이 천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듯, 호완평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포영의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경계 태세가 엄중한 제갈세가에 옥기린이 도착했다. 옥기린은 정파의 명사로 명망이 높은 자이니 비록 백 부인의 병환이 깊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몰려들겠지. 아니, 어떤 자는 백 부인의 병환 자체를 핑계로 삼을지도 모른다. 자당을 걱정해 병문안 와준 사람들에게는 옥기린도 얼굴을 내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호협하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이 늘 그렇듯, 옥기린 백우경은 친구가 많았다. 복건성에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해 모집했던 청혈단淸血團의 의형제들도 그렇지만, 만검서생萬劍書生 유영종劉令棕이라든지 양의검兩意劍 조세화曺勢禾와 같은 명망 있는 고수와도 친분이 깊었다. 그런 자들도 옥기린의 귀향에 맞춰 제갈세가를 방문하게 될 테니, 자칫 잘못했다간 시도만으로도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포영의가 어두운 방의 문을 열었다. 주위에 사람 두는 것을 싫어해서 청소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이지 않는지라 방 안은 어둡고 고요하다. 지친 기분으로,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며 포영의는 계속해서 방도를 궁리해 나갔다.

‘잡인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어수선해진 분위기는 그나마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세가 내로 침투시킬 사람이 문제야. 오랫동안 세가 내에서 입지를 굳힌 간자를 이런 일로 내버릴 수 없으니 새로운 사람을 구해야 할 텐데. 어떻게 의심받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그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올해는 겨우 한 달이 남았을 뿐이고, 시시각각으로 백 부인의 병세는 위중해졌다. 그녀가 죽고 나면 기린패는 옥기린의 손으로 넘어간다. 초절정 고수인 옥기린 백우경. 설사 포영의가 직접 나선다고 할지라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정체를 위장하고 활동하는 자들 중 한 명을 집어넣어야 하나? 젠장. 배경을 의심받지 않고 명성을 키우기는 쉽지 않은데. 만약 정체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정도맹의 경각심만 커질 거야. 요즘 가뜩이나 덩치를 키우는 데 몰두하고 있는 정도맹인데, 그들에게 핑계까지 준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포영의가 돌연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깐 사이에 그의 다섯 손가락에 비수 다섯 개가 뽑혀 나온다. 비도법의 생명은 은밀함이다. 기도비닉企圖秘匿3)을 위해 검신을 흑철로 만든 흑오비黑烏匕는 빛을 받아도 결코 반사되는 법이 없었다. 포영의는 그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성명 절기를,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흩뿌리듯 던졌다.

“누구냐!”

“인사가 거칠다.”

다섯 방향으로 소리도 없이 날아가던 비수의 기척이 어느 순간에 사라졌다. 비수를 던지고 나서야 들린 목소리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포영의는, 곧바로 입술을 깨물고 세 걸음 뒤로 걸음을 물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자신이 조금 전 쏘아 보냈던 흑오비가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그것도 그가 던져 냈던 수에 비해 한 수 위의 수법으로 말이다.

찰나간에 그는 두 손뿐만이 아니라 소매 전체를 사용해 비수들을 막았다. 두 개는 손으로 잡아챘고, 나머지 두 개는 소맷자락으로 감쌌지만, 하나가 비었다. 곧이어 따끔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팔뚝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다. 그의 팔뚝을 비스듬히 베고 지나간 흑오비가 바닥에 박혔다.

“공부가 부족하다. 아직도 회류비回流匕를 연성치 못한 건가?”

“……광영된 주인인 교주님을 뵈옵니다.”

주인 없는 방에 홀로 들어와 기다렸던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였다. 설마 천마가 자신의 방에 연락도 없이 와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포영의는 식은땀이 가득한 이마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했다. 어둠 속에서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렇게들 하나같이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놈이 없군.”

포영의는 숙였던 이마를 들지 못했다. 너무 지쳐 있었던 데다가, 잡생각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댄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무인이면서 사람의 기척을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 비록 그 사람이 일부러 기척을 죽인 천마고, 그가 포영의를 시험하려고 일부러 벌인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늦은 밤에 연통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네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들렀다.”

“절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도 될 일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직접 왔겠느냐? 어여쁜 꼬리까지 뒤에 떼어 놓고?”

포영의는 안력을 돋워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주로 다탁으로 쓰는 탁자 앞에 천마가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운 모양새가 딱 그다웠다.

“옥문관 쪽 탐보망이 요즘 어떤지, 확인해 본 적이 있나?”

여전히 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 앉아 천마가 질문을 던졌다. 포영의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피가 떨어지는 팔을 지혈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이렇게 화풀이를 하신 거로군.’

천마의 성격에 익숙한 포영의는 천마가 자신을 일부러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뭐가 문제였던 걸까.

“네. 얼마 전에 안 그래도 재점검을 끝냈습니다.”

“그물은 제법 촘촘한 편인가?”

“탐보망은 피라미도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해야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기본을 놓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곽효가 옥문관 쪽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군. 그 미꾸라지는 눈치도 제법 빠르니, 탐보망이 철저한 곳을 지나는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거다.”

곽효! 그 이름을 들은 포영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선뜻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천마에게 되물었다.

“지금 곽효라 하셨습니까?”

“그래. 곽효라고 했지.”

“반도 곽효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씀입니까?”

“타현塔縣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연아가 말하더군. 그동안 쥐새끼처럼 몸을 감추고 있더니, 새외라 방심을 했던 모양이지.”

포영의는 연아가 봤다는 말에, 초교연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중임을 맡고 나갔던 상행 업무를 중간에 내팽개치고 돌아왔던 이유가 그래서였군. 제멋대로긴 해도 자기 본분은 잊지 않는 아이라 이상하다 여겼는데, 그런 까닭이 있었던 건가.’

그러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서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초교연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근신을 명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어서 포영의는 천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곽효가 중원으로 돌아올 거라는 정보를 얻었단 말입니까?”

“세력이 있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중원인이라고 했지. 내 생각에도 곽효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운 이후라고 생각한다. 그는 완벽한 준비 없이는 일을 도모하는 자가 아니다.”

예전에 그를 믿었다가, 뼈저린 꼴을 당한 바 있는 천마가 담담히 말했다. 포영의는 드러나지 않게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천마의 말처럼 곽효는 그런 남자다.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하고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가 아니던가.

곽효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마교에 있지도 않았던 포영의지만, 그는 천마만큼이나 곽효를 잘 알고 있었다. 포영의 자신의 아비가 곽효의 암계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포영의의 아비는 독곡毒谷의 곡주였다. 사파인 데다 독을 다루기 때문에 같은 사파 내에서도 백안시당하는 문파의 문주였다. 그는 문파를 지킬 힘을 얻기 위해 마교에 가입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마교에서 하는 요청이라는 이유만으로 독을 내주었다.

그러나 독곡을 회유했던 것도, 그 독을 사용했던 것도 마교가 아니라 곽효였다. 포영의의 아비는 자신이 만든 독이 천마를 암습하는 일에 쓰였다는 걸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마의 노여움이 독곡 전체로 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문파의 소곡주였던 포영의가 연동으로 격하돼 마교로 끌려오게 된 것도 그 탓이었다. 아비를 대신해 곡주의 위에 오른 숙부는, 천마가 남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린 조카를 보냈다. 조카의 빼어난 미색이라면 틀림없이 천마의 총애를 받을 것이니, 그것으로 독곡은 살아날 수 있을 거라 여기면서 말이다.

천마에게 곽효가 원수이듯 포영의에게도 그는 원수였다. 어리석은 아비를 속여 끝내는 죽게 하였고, 자신을 연동으로 만들었다. 만약 천마가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지 않았더라면, 포영의는 숱한 사내들의 배 밑에서 몸부림치다 인생이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비선을 가동해 그가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지 파악해 봐. 교에 대한 원한이 적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제일의 목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곽효의 세력, 그와 닿아 있는 연계 세력. 찾을 수 있는 데까지 다 찾아내. 세부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드시 실기하게 될 것이다.”

“예. 사부님.”

“자세한 것은 완평이 놈하고 상의해서 진행하고, 만에 하나라도 진무에게 이 이야기가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 일어나지 않도록 해라. 추밀각에서 잡아내지 못한 정보를 부외자가 가져왔다. 운에 목숨을 맡길 거면 추밀각이 왜 필요하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가볍게 지나가는 듯한 충고였지만, 그 말에 뼈가 담겨 있다는 것을 포영의도 알았다. 그는 가슴이 뜨끔했다. 본래의 의무와는 상관없는 엉뚱한 일에 정신을 팔고 있던 차라 찔리는 게 많았다.

“죄송합니다.”

“내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너도 잘 알 것이다. 네가 네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완평이까지 휘청거리게 된다. 하나로는 부족하니 둘을 묶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만들어 놨으면 제구실은 해야지. 언제까지 내가 참견을 하게 만들 셈이냐.”

포영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쯧쯧. 또다시 낮게 혀를 찬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듯,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태도엔 거침이 없었다.

포영의는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천마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천마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따라 나오지 마라. 번거롭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본인 위주로 일을 처리한 천마는 곧 허공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방 안에서 천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배웅한 포영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곽효. 곽효라.’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던 머리가 그 이름 하나로 편두통이 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천마의 뒤통수를 쳤던 반도 곽효. 반도이며 배교자이기도 한 그의 뒤를 추적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얼굴의 반이 녹아내리고, 단전에 큰 상처까지 입은 상태에서도 천마의 추적을 뿌리치고 달아났던 남자다.

지난 20여 년간 그렇게 찾았어도 결국 흔적 하나 찾지 못했던 사람인데, 그런 자가 세력까지 갖추고 나타났다는 사실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천마의 말대로 그의 제일 목표가 마교일 것을 아는데, 그런 자를 쉽게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기린패에, 옥기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곽효인가.’

포영의는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열이 올라 뜨끈뜨끈한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생각들이 오갔다.

***

한밤중에 남몰래 물을 덥히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잠에서 깨어날 만큼 경계심 많은 무사들이 모두 잠든 첫새벽에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솥에 물을 길어 오고, 장작을 때고, 그 물을 다시 길어 수욕통에 붓는 일은 엄청난 정신노동이 필요하다.

수욕장이 숙소와 다른 건물이라 엄두나마 낼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찝찝하더라도 그냥 참고 말았을 것이다.

수욕통에 물을 채워 넣은 문평은 옷을 벗었다. 조금 전, 천마와 치렀던 격렬한 정사 탓에 진한 흔적이 남은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험하게 다뤄진 게 아니라서 다친 곳은 없었지만, 피부 위를 꽃처럼 물들인 순흔의 흔적이 적나라했다.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검고, 어떤 것은 노르스름하다. 순흔의 각기 다른 색깔은 그것들이 한날한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문평은 이 적나라한 흔적들 때문에 다른 무사들이 욕장을 이용하는 시각을 피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람들의 눈치가 이상한데, 그들의 눈초리에 더한 이유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어디서든 하고 싶어 하는 천마와 그나마 타협을 봐서 뇌정전의 건물 안에서만 정사를 벌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소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쉬쉬하는 기색이긴 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눈치다. 문평은 자신이 앞에 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도 지나가고 나면 수군대는 사람들의 태도를 예민하게 느꼈다.

무슨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지만, 그에게 직접 소문을 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를 아는 친구도, 믿어 줄 상사도 없고, 정확히 말해 정사 말고는 하는 일도 없다. 여전히 천마를 따라다니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천마가 교외로 출타하지 않는 이상 성가신 그림자 이상은 될 수가 없는 역할이다.

지난번에 그가 천마를 추격하는 와중에 간간이 남긴 흑화로 최소한 천마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던 호완평은 문평의 기능에 만족한 눈치였지만, 제 사부에 대한 호완평의 집착에 동의할 수 없는 문평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최소한의 자부심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문평은 물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뜨거운 물에 찬물을 섞으면서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게 인생이라고 믿고, 그저 흘러가듯 살아온 그에게도 이런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들이 자신의 몸을 볼까 두려워 한밤중에 몰래 물을 끓이고, 그 물로 다른 사내의 흔적이 잔뜩 묻은 몸을 닦아 내는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절대 그 자신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주처럼 한밤중에 자는 시비를 두드려 깨워 호화찬란한 욕실에서 한가롭게 수욕하는 삶을 바란다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만으로는 영 찝찝하다는 소리를 흘리듯 했다가, 하마터면 그 밤중에 예화와 란란은 물론 그 아래의 시비들을 모조리 깨울 뻔했던 것을 기억해 낸 문평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문평은 천마와 몸을 섞는다고 해서 부잣집 첩실마냥 굴 생각이 없었기에 종종 주어지는 정도를 넘은 과한 대접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생각하기에 베푸는 배려와는 종류가 다른, ‘나와 몸을 섞고 있으니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는 식의 강퍅한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방식의 배려는 배려가 아니라 화대다. 그리고 문평은 차라리 화간을 했으면 했지 몸을 팔 생각은 없었다.

문평은 물의 온도가 어느 정도 내려가자 수욕통에 몸을 담갔다. 원래는 먼지를 간단히 씻어 내기만 할 뿐 이렇게까지 수욕을 즐기지는 않았었는데, 최근 지독하게 과한 천마와의 정사에 시달리다 보니 몸의 굳은 근육을 풀어 주는 수욕을 좋아하게 되었다.

뼈가 욱신거릴 정도로 과도하게 혹사를 당한 후에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얼얼했던 통증들이 물에 녹는 것처럼 사르르 사라지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혼자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세상만사 모든 시름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문평은 천마가 물수건으로 닦아 줬던 몸을 한 번 더 깨끗이 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있으면 사람들이 깰 텐데 그때까지 여기서 버텼다간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조심스레 사용했던 물을 버리고 자신이 있었던 흔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덜컹.

욕실을 다 치우고 이제 막 옷을 주워 입으려 허리를 폈을 즈음이었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문평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경황 중에 다급히 옷가지를 움켜쥐었지만, 미처 입을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라, 이거 뭐야. 사내새끼 아니야?”

끝이 무디고 발음이 불명료한, 그다지 듣기 좋지 않은 목소리가 수욕장 안을 울렸다.

지금 막 수욕을 마친 깨끗한 몸이었던 문평은 역한 술 냄새가 확 하니 풍겨 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몸은 어떻게 제대로 가누고 있었지만, 취기가 심하게 도는 듯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한 남자가 문간에 서 있었다. 문평도 숙소를 오가다 얼굴 정도는 봤던 남자지만, 그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쓰벌. 한밤중에 물소리가 나길래 웬 아가씨가 몸이라도 닦고 있는 줄 알고 와봤는데 저따위 사내새끼라. 이거 무슨 재수가 이따위야.”

중얼중얼. 혼잣말로 이야기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컸다. 술에 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어투다.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대답하는 남자는 취해도 보통 취한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젠장. 문평은 낭패한 기분으로 젖은 몸 위에 황급히 옷을 걸쳐 입었다. 누가 근처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치 하나만이라면 그래도 상대할 만은 하겠는데, 저치와 똑같이 술에 취한 다른 일행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바라는 일이 아닌지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술을 많이 자셨군. 이만 들어가서 쉬시오.”

문평은 점잖게 말하며 속옷도 입지 못하고 바지부터 꿰입었다. 제대로 닦지 못한 몸이라 옷감이 척척하게 피부에 달라붙었지만, 저치에게 맨살을 보여 주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근데 넌 몸이 왜 그러냐? 사내새끼가 꼭 얼룩 강아지마냥. ……어라? 얼굴이 낯이 익네? 내가 저 면상을 어디서 봤더라?”

곱게 지나가려고 하는 그를 취객이 놓아주지 않았다. 들어가 쉬라는 말만 던진 후 그냥 나가려는 기색이자,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 문 앞을 막아서더니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다.

문평은 몰랐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내전 무사는 술에 취하면 개가 되기로 유명한 자였다. 오죽하면 별호 외에 따로 ‘여견자如犬子’라는 별명으로 불리겠는가. 간단히 말해 개 같은 놈이라는 뜻인데, 멀쩡할 때라면 몰라도 술에 취했을 때만큼은 그런 별명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이 사내였다.

“아하. 기억난다. 이거 그 남총男寵이구먼. 별것도 아닌 얼굴로 어떻게 우리 교주님을 꿰차서는 날이면 날마다 재미를 본다는 남달기男妲己. 아냐. 성이 석씨이니 석달기인가?”

함부로 떠들어 대는 사내의 말에 문평의 얼굴이 은은히 붉어졌다. 뒤에서 은밀히 소문이 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어 본 적이 없으므로 어떤 식으로 소문이 도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문평은 사람들이 자신을 뜨거운 철판에 사람을 태워 죽였던 희대의 요녀와 비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남총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울 판에 달기라니.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 일일이 변명을 하는 것도 구차한 일이다.

기분이 상한 문평은 사내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술 취한 인간을 길게 상대해 봤자 어차피 자기 손해다. 자신 앞에서 저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 보니 취해도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일 아침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기억이나 할는지 모르겠다.

“씨팔. 가만히 있어 봐. 남총 주제에 지금 사람 무시해?”

“……이거 놓지?”

“몸이 아주 예술이던데? 얼룩덜룩하니. 교주님께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다 보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안 뵈냐? 어?”

사내를 지나치려던 순간 팔이 잡혔다. 화를 내는 것도 짜증스러워 낮게 경고하자, 술 냄새가 확 끼치는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다.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문평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거추장스럽게 구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어? 노려보네. 씨팔 노려보면 어쩔 건데.”

파락호마냥 불량스럽게 중얼거린 남자가 문평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곤 비열하게 속삭였다.

“너 그렇게 맛이 좋냐?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그 몸으로 감히 교주님을 꼬셨단 말이지. 속살이 제법 쫄깃한가 보네? 그러니까 교주께서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게 아니겠어?”

“후회할 소리를 하는군.”

“후회 같은 소리 하네. 너 지금도 사내 꼬시려고 이 밤중에 물소리를 낸 거지? 몸이 그렇게 뜨겁냐? 한시라도 사내랑 뒹굴지 못하면 잠이 안 와?”

뜨끈뜨끈한 입김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불쾌하다. 혐오스럽다.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모욕이다. 더 이상 듣고 있기가 싫어 다시 사내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갑자기 몸 위로 그림자가 덮쳐 왔다. 갑작스레 달려든 사내 때문에 속절없이 벽으로 밀려났던 문평은 목덜미를 물어뜯어 오는 사내를 느끼곤 이를 악물었다.

‘개새끼, 진짜 죽인다!’

“씨팔, 나도 맛이나 좀…….”

범하겠다는 게 아니라 진짜 산 채로 뜯어 먹겠다는 듯 다가온 사내가 목덜미를 짓씹었다.

손바닥으로 사내의 배를 쳐내서 몸을 떨어트린 문평은 이를 악물고 놈의 다리를 걸었다. 사내의 옷깃을 잡아채 몸의 방향을 돌리고, 미산보微散步를 사용해 벽과 사내의 몸 사이를 빠져나왔다. 미꾸라지처럼 날렵한 그의 보법에 문평을 벽에 몰아붙였던 상대가 도리어 곤경에 빠졌다. 팔을 붙든 채 그대로 뒤틀어 버린 문평의 관절기에 당하고 만 것이다.

“술을 마셨으면 곱게 처잤어야지. 개 같은 짓을 하면 개 취급을 당한다는 걸 몰랐어?”

한쪽 팔은 뒤틀어 관절을 빼놓고, 한 손으론 반대쪽 어깨를 벽에 사정없이 밀어붙이며 문평은 사내에게 으르렁거렸다.

“이 천한 남창 놈이 어디서 감히!”

사내는 고통으로 이를 갈면서도 기세를 죽이지 않고 등등하게 소리를 질렀다. 문평은 관절을 뽑은 손에 더 큰 힘을 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천하면 나랑 붙어먹는 교주도 천하지. 같이 붙어먹는 처지에 누군 천하고 누군 귀하다고?”

“이 씹…….”

“살려 두는 걸 고맙게 여겨. 내가 진짜 달기였으면 넌 포락형이야.”

얼굴에 벌겋게 열까지 내며 악을 쓰는 사내의 팔을 다시 한번 꺾어 비명을 지르게 만든 문평은 수도로 놈의 뒷덜미를 내려쳤다.

평소라면 그리 쉽게 당할 자가 아닌 듯하지만, 술에 취해 엉망이 된 상태로는 무공조차 소용없었다. 사내의 고개가 푹 꺾이며 몸이 바닥으로 처진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사내의 팔을 내팽개친 문평은 신경질적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그 짧은 순간에 목덜미에 치열이 고스란히 남았다. 천마조차도 신경 써서 눈에 보이는 곳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인데 뜻밖의 놈에게 험한 꼴을 당한 것이다.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문평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사내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기에 내공을 운용하진 않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찬 발길질에 남자의 몸이 가죽공을 차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퍽 하고 굴러갔다.

그러고도 분을 참지 못해 사나운 눈으로 사내를 일별한 문평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수욕장을 나갔다. 악문 입술에서 짙은 핏기가 번져 나갔다.

***

그의 장난감은 오늘 기분이 매우 나쁜 모양이었다.

난을 치고 있던 천마는 흘낏 눈을 들어 가만히 앉아 있는 석문평을 바라보았다. 문평은 언제나처럼 단정한 자세를 하고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천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은 계속 서 있겠다 고집했지만, 그냥 부하도 아니고 종종 몸까지 섞는 상대를 온종일 세워 둘 수는 없어 의자를 하나 마련했다.

그가 직접 의자까지 들여놔 주자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문평은 이제 서서가 아니라 앉아서 그의 곁을 지켰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 섰던 구석 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거기에 앉아 있는 게 꽤 궁상맞아 보인다. 그러나 천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좋다는데 굳이 입을 댈 까닭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벼루에 붓을 담그며, 천마는 문평의 기색을 궁금하게 여겼다. 본인 딴에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지만, 노회한 천마의 눈엔 그의 마음이 다 들여다보였다. 따지고 보면 손자뻘밖에 안 되는 까마득한 어린것이니, 천마가 그 속을 읽어 내는 것은 어린애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손쉬운 일이다.

“이리 와 봐.”

때마침 난을 치던 것도 끝났다. 생각난 김에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아 볼까 해서, 천마는 손짓으로 문평을 불렀다.

형식적으로나마 몸을 섞는 관계가 된 후 이렇게 종종 말을 걸어오곤 하는 천마에게 이미 익숙해진 문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마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문평이 물었다. 마음이 가라앉아 있으니 평소보다 말투도 어두웠다. 천마는 짐짓 모른 체, 문평을 더 가까이 불렀다.

“가까이 와서 이것 좀 봐 주겠어? 오랜만에 난을 쳤더니 감이 잘 안 잡히는군.”

“제가 뭘 압니까. 그림 같은 건 볼 줄 모르는데요.”

“눈 달린 사람이 그림 볼 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핑계 대지 말고 이리 와서 살펴봐.”

천마가 거듭 권하자 문평은 마지못해 다가와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종이도 아니고 문양 없는 흰 비단 위를 우아하게 가로지르는 난 잎이 보였다. 웅장한 기세의 바위벽에 가련히 붙어 있는 난초 한 포기. 석란石蘭이다.

‘잘 그리네.’

운필運筆이 웅장하고, 농담濃淡이 자유롭고, 그딴 거 따윈 하나도 모르는 문평의 감상은 그냥 평범했다. 솜씨가 제법 좋다는 건 느껴졌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뭐라고 평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바위를 바위답게 위맹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낭창한 난 잎의 표현도 제대로 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칭찬 거리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를 봐야 제대로 감상하는 건지, 뭘 칭찬해야 좋은 건지도 모르는 문평은 그저 멀거니 그림만 바라보았다.

천마의 성정을 보자면 난을 친다고 해도 바위같이 뻣뻣한 난을 그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완급을 제대로 조절했다. 하긴. 천마의 경지가 등봉조극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데 조화造化를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다방면에 재능이 깊은 인재를 보고 십전무재十全武才라 하던가. 단순한 팔방미인하고는 깊이가 다른, 다방면에 있어 깊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보기 드문 존재가 바로 십전무재다.

문평이 봤을 때 천마는 바로 그 십전무재인 듯했다. 여태껏 그는 천마가 뭘 못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이면 그림, 글이면 글, 시면 시, 악이면 악. 못 다루는 게 없고, 모자라는 게 없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가끔은 의아할 정도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그에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성이다.

“어때 보이나?”

자기가 잘 그렸다는 사실은 본인도 알 텐데, 천마는 굳이 문평의 의견을 물었다. 문평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어 천마를 칭찬했다.

“좋습니다.”

“두리뭉실하군. 특별히 어떤 점이 좋지?”

“바위는 바위답고, 난은 난다운 점이 좋습니다.”

“그 밖에는?”

“기술적으로 잘 그린 것 같습니다.”

딱히 꾸민 데가 없는 소박하고 보잘것없는 칭찬에 천마가 웃었다. 비웃는 건 아니고, 그냥 대답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네 눈에 그리 보였다면 나쁘진 않겠군. 좋아.”

별 볼 일 없는 석문평의 칭찬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천마가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비들을 불렀다. 대기하고 있던 예화가 서둘러 달려와 인사하자, 귀찮은 듯 인사를 물린 천마가 비단 폭에 그린 난을 가리키며 명했다.

“먹이 마르면 족자를 하고, 표구가 끝나면 요화원妖花園으로 보내라. 이번 수연晬宴을 축하한다고 덧붙여 전하고.”

“예. 교주님.”

‘웬일로 난을 치더니 선물을 할 거였나?’

의아한 문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귀한 분께 갈 난을 왜 나보고 감정하라고 했지?

요화원이라면, 마교의 호교삼왕護敎三王중 하나인 요왕妖王 만수백요萬獸伯妖 예옥경裔鈺瓊의 처소이다. 천마의 심복인 호교삼왕 중에서 유일하게 여인인 만수백요 예옥경은, 벌써 60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대단한 미인으로, 젊은 시절 마교의 꽃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그녀는 천마의 제자인 초교연의 어머니이기도 했는데, 어머니의 미모를 닮아서인지 그 딸의 미색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고 보니 만수백요가 올해 환갑이라던데.’

수연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근래에 만수백요의 환갑잔치가 있을 거라는 소문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여인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 수연을 크게 하지 않는 법인데, 만수백요는 환갑을 맞아 꽃을 사들이고 수연장에 걸어 놓을 백등까지 만드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환갑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의미가 있다. 환갑 이후의 인생은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환갑을 넘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만수백요는 지위도 높고 무공도 높아 쉬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교에서 교주 바로 다음가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호법인 호교삼왕이니, 마중사기를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라 할 수 있었다.

“만수백요님의 수연에 참가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수연일도 아닌데 표구한 족자를 먼저 보낸다는 건, 당일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호교삼왕의 환갑잔치가 그리 작은 자리는 아닐 텐데 그 자리에 참석조차 하지 않겠다는 천마의 태도가 의아하다.

천마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문평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부지불식간에 그의 손에 닿는 곳까지 와버렸던 문평은 몸을 뒤로 빼지도 못하고 곤란하게 머뭇거렸다.

“넌 낮에 이러는 거 많이 싫어하지?”

그걸 알면서도 천마는 어루만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올해는 안 간다.”

천마는 순순히 대답하며 문평을 은근히 끌어당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야 했던 문평은, 천마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마주 보는 형상이 되어 버린 걸 알고 볼을 붉힌다.

천마는 은은한 홍조가 마음에 들었다. 수줍음이라든지 기쁨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수치심에 물드는 볼이 신선했다. 그렇게 숱하게 몸을 겹쳤음에도 이놈은 여전히 이랬다. 몸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으면서 마음만은 아직도 늘 처음이다.

‘참. 변하지도 않고.’

문평의 몸을 가지고 논 지 근 한 달이 되어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며 마음만은 꺾이지 않고 있었다.

요즘에는 삽입을 해도 그리 아파하지 않는 것 같고 때때로는 허리를 흔들며 조르기도 할 지경인데, 몸을 그렇게 길들여 놔도 마음이 길들지는 않는 것이다. 천마는 그런 문평의 태도가 진심으로 흥미로웠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남자. 천마가 보는 문평은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이날 이때껏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고, 자존심이 별반 세지도 않다. 비굴할 땐 확실히 비굴하고, 세상 무엇보다도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범속한 자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천마는 이자가 어떻게 이처럼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일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기로 유명하던 강호의 협객도 안아 봤고, 대쪽같이 절개가 꼿꼿한 선비도 안아 봤다.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마적단의 두목은 물론이거니와 서역에서 거의 왕과 같은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군주도 안아 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문평처럼 끈질기게 버티지는 않았다. 차라리 확실하게 그를 증오하든가, 아니면 그의 몸에 이끌려 정신없이 쾌락으로 굴러떨어지든가. 대개가 그 둘 중의 하나지 그와 다른 선택을 보여 준 이는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천마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문평의 콧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내려갔다. 간질간질하도록 부드러운 애무에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입술 끝에 맺힌 피딱지가 애처로웠다. 어젯밤에 놓아 보낼 때만 하더라도 없던 것인데, 또 자기 방에서 혼자 생각하다 입술이라도 물어뜯었나 보다.

“왜, 왜 안 가십니까?”

이대로 멍하니 앉아 있으면 또 당하고 말 거라는 데에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문평은 다급하게 화제를 찾았다.

천마는 자신의 무릎 끝에 엉거주춤하게 앉은 문평의 허리를 안쪽으로 잡아당기며, 딱지가 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팔 한쪽 날린 값을 이번에 갚아 달래서.”

“예?”

“초지백이 말이야. 올해는 기어코 청혼한다더군. 자기는 벌써 고희고, 할망구도 환갑이 넘었으니 내년 안에는 꼭 결혼해야겠다고 하더라고. 내가 있으면 불편해서 답도 제대로 못 할 거라기에 자리를 피해 주는 거야. 어쩌겠어? 몽달귀신이 되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다는데. 죽어가는 놈 소원 하나 들어주는 셈 치고 허락했지.”

“……요왕하고 염왕炎王께서 아직 혼인을 안 하셨습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아연한 표정을 지은 문평이 물었다.

“몰랐단 말이야?”

깜짝 놀라는 문평의 반응이 재미있었던지, 천마가 낮게 웃으며 문평의 턱선으로 입술을 내렸다.

“그래. 아직 안 했다.”

“두 분 사이에 따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저기, 환요편 아가씨…….”

“교연이가 두 사람 사이의 자식이긴 하지. 처음 태어났을 때 여와문女媧門의 풍습대로 예씨 성을 붙이겠다는 것을, 축융도가 미친 듯이 들고 날뛰어 겨우 자기 성을 줄 수 있었지만. 그나마 딸이라서 만수백요가 그 애를 키웠지, 아들이었으면 그냥 축융도한테 주고 모르는 척했을 거야. 여와문의 풍습이 원래 그렇다는군. 여자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를 낳아도 딸만 기른다고.”

만수백요 예옥경은 본디 남만 출신이다. 삼황오제의 한 명이며 물의 신이기도 한 여와를 섬기는 일족의 딸로, 그 별호처럼 오만 가지 짐승을 다루는 데 소질이 있었다.

젊은 날의 그녀는 꽃보다 아름다웠으나, 태도는 몹시 거칠었다고 한다. 여인들이 주인인 여와문에서 자라 남다른 가치관을 형성했으니, 여자는 그저 고분고분하고 남자 말을 잘 따르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중원 사내들이 받아들이기에 버겁기는 했을 것이다.

일족이 사는 좁은 세상이 답답했던 그녀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세상과 가장 많이 부딪힌 것도 바로 그런 가치관 문제였다.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온 그녀는 여인을 종속물 취급하고 함부로 다루는 중원의 풍속에 경악했다. 사내란 자고로 여인의 선택을 받아야 하고, 여인이 내치면 아무리 서러워도 그냥 물러서야 하는 존재이거늘 중원의 것들은 계몽되지 않아 미개하고 도덕도 없었다.

남자 주제에 여자에게 찝쩍거리지를 않나, 수틀리면 강간도 서슴없이 저지르질 않나, 하는 꼴이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격분한 그녀는 자신에게 치근대는 놈들을 크게 패서 돌려보냈고, 강간하려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유달리 염기 어린 외모에 색기가 철철 넘치는 몸매를 가진 그녀는 일반적인 여인들에 비해 심하게 남자가 꼬였는데, 그 사실이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었다.

남만에서 올라온 요녀妖女가 마주치는 남자마다 때려죽이고, 사내의 씨를 다 말리려고 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와중에 또 하필이면 화산의 제자를 죽이는 바람에 일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강호 공적이 되었다. 소문이 어디서 와전됐는지, 젊은 남자의 정혈을 갈취하고 죽여 버리는 존재가 된 그녀는 중원의 정도 문파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그녀를 만난 사람이 바로 천마다. 단순히 심심해서 중원 유람을 하고 있던 천마는 정파의 떨거지들이 눈앞에서 떼로 얼쩡거리기에 귀찮아서 쓸어버렸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천마가 자신을 구해준 줄 알았던 만수백요가 천마의 앞을 막아섰다.

남만 출신인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도 참 특이하게 했다. 그녀는 살려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대신, 신세를 크게 졌으니 그를 갚기 위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말함으로써 천마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뭐, 결국 아이는 초지백과 만들었지만,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씨를 달라고 조르기는 했지.’

중원의 여인들과 가치관이 다른 그녀는 씨를 달라는 소리를 참으로 당당하게 했다. 천마를 사랑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고, 천마의 씨라면 참으로 튼튼할 것 같으니 그 씨를 받아 건강하고 씩씩한 여자아이를 낳아 보겠다는 뜻에서였다.

전형적인 중원인인 초지백은 그것 때문에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만수백요가 천마에게 이성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녀가 사랑이라는 걸 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초지백이다.

그녀에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날 이때껏 그토록 귀찮게 굴며 주위를 맴도는 인간을 그냥 놔두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문평은 여전히 아리송한 눈치였다. 그 또한 전형적인 중원인에 불과해서, 여인이 처녀의 몸으로 공공연하게 애를 낳고 그 아이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혼인은 안 할 거라고 버티는 상황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문평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천마는 문평의 몸을 가지고 혼자서 잘 놀았다.

단단히 묶었던 허리춤을 풀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천마는 날렵하게 뻗은 등 선을 어루만지며 문평의 턱과 볼을 은근히 희롱했다.

남자답게 날카로운 턱선과 단단한 목덜미는 언제 봐도 군침이 돌았다. 천산산맥의 모진 바람에 시달려 거칠어진 피부도, 잘 구운 밀병처럼 황금빛이 도는 피부도 모두 마음에 든다. 건강하고 단단한 근육은 씹는 맛이 좋았다. 어찌나 찰지고 감도가 좋은지, 한 입 깨물 때마다 단감을 깨무는 것만 같다.

천마는 귓전에서 목으로 흐르는 선을 따라 입술을 옮겼다. 천마의 입술이 농밀해지자, 문평의 호흡이 가빠졌다. 천마의 무릎 위에서 문평의 성기가 차츰 단단해지기 시작한다. 쾌감에 익숙해진 몸은 작은 움직임에도 쉽사리 문을 열 준비를 했다.

풀어 헤친 상의 속에서 빳빳이 젖꼭지가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탐스러운 유실이 천마의 입을 유혹하고 있었다.

“음?”

부르르 등줄기를 떠는 문평의 반응에 흥겨워져 더 깊게 그의 몸을 파고들려던 천마는, 입술에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문평의 오른쪽 목덜미 부분. 정확히는 목덜미와 어깨가 맞닿는 승모근 쪽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낯선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울혈이 맺힐 정도로 강하게 상처가 남은 명백한 치열. 요즘에는 자신도 남기지 않을 만큼 크고 흉한 흔적이다.

그 흉터를 발견한 천마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새 애인이 생긴 건가?”

잠시 멈칫했던 천마는 곧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가 짓씹어 놓은 흉터를 혀로 할짝대며 흥미롭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호기심 외의 다른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문평은 잠시 턱을 굳혔지만, 곧 무덤덤한 어조로 천마에게 대답했다.

“아니요. 개에게 물렸습니다.”

“흠. 개라?”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엔 사람의 이빨 자국인 것 같은데.”

“사람이라도 사람다운 행동을 하지 않으면 개지요. 개가 달리 개겠습니까.”

문평은 그답지 않은 똑 부러진 태도로, 천마의 참견을 걷어 냈다.

‘당신하곤 별 상관없는 일이잖아.’

자신이 당한 일을 변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도 아닌 의연한 태도가 천마의 주의를 끌었다. 물론 아직도 발그스름한 홍조가 남아 있는 얼굴이라든지 콧잔등에 송골송골하게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 같은 것들이 그 의연함을 많이 갉아먹긴 했다.

하지만 석문평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일은 대단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천마로서는 문평의 몸 상태보다 그의 마음에 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개가 우리 잡초를 물었는데? 요즘 개는 풀도 뜯나?”

‘잡초’란 요즘 들어 천마가 문평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쓰러트리면 쓰러트리는 대로 쓰러지지만 뿌리만은 곧고 깊어서, 나름 애정을 담아 귀엽게 부르는 애칭인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잡초라고 부를 때마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고작 개가 저지른 일에 어인 관심이십니까? 개야 늘 저지레를 하는 것을요.”

“아무리 잡초라도 내 화단에 있으면 내 잡초지. 버르장머리 없는 개가 내 화단을 헤집었는데 그걸 그냥 놔두나? 처음 일이 생겼을 때 단단히 버릇을 고쳐 둬야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없을 거 아니야.”

“물 주는 일 없어도 자라는 게 잡초 장점 아닙니까. 굳이 돌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희롱하듯 넌지시 묻는 천마의 질문에 문평은 여지없이 딱 자른 대답을 했다. 바깥에서 얻어맞고 돌아와 어미에게 이르는 아이처럼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고자질할 수는 없었다.

일을 고하면 천마가 알아서 처리를 해주겠지만,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자신이 천마의 남첩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하는 꼴이 된다.

일시적인 유희를 벌이는 것뿐이지 첩이 아니고 연동도 아니라고 애써 자신을 세뇌하고 있는데, 본인이 첩처럼 행동해서야 앞뒤가 맞지 않는 일 아닌가.

‘흠.’

물론 해줘도 좋고 안 해줘도 상관없고. 정말로 신경이 쓰여서가 아니라 문평이 어떻게 나오는지 살피기 위해 관심이 있는 척했던 천마는 끝까지 문평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하자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어디서 봉변을 당하고 왔든지 간에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닌데도, 거듭된 거절을 당하고 나자 은근히 기분이 가라앉는다.

문평의 반응을 보아하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략 알 것 같았다. 한데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입도 벙긋 안 하는 게 어쩐지 괘씸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단은 자신이 손을 대고 있는 몸인데 그를 건드리는 놈이 있다는 사실도 어이없는 데다가, 그런 짓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입을 봉하고 있는 문평의 태도 역시 별반 재미없긴 마찬가지다.

‘애교 삼아 억울하단 한마디만 했어도 제 분은 풀었을 텐데. 미욱한 것 같으니라고.’

낮게 혀를 찬 천마가 문평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문평은 반항하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들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돌보지 않는 잡초라도 남이 꺾으면 화가 나는 게 주인이지. 나는 내 물건에 남의 손이 타는 일이 익숙지 않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겠지만 같은 일이 두 번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알아듣겠나?”

“예. 알겠습니다.”

“내가 개를 쫓는 꼴을 보기 싫으면 네가 잘해야지. 세상에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어디 있다던?”

문평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그 속내를 번연히 읽어 낸 천마가 웃으며 말했다.

문평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천마의 손이 다시 다가와 문평의 몸을 범했다. 문평은 피가 맺힌 입술을 가만히 씹으며 천마의 품 안에 안겼다.

남의 손을 타는 게 싫다던 천마의 말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문평은 유난히 길고 집요하게 이어졌던 정사를 생각하며 낮게 진저리를 쳤다. 원래부터 정력 하나는 타고난 천마지만, 오늘만큼 그의 진을 빼놓은 적은 없었다.

쉽게 삽입을 하지 않고 애태우며 지분지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애무했고, 심지어는 성기와 항문까지 빨아 주었다. 혀로 여린 주름 사이사이를 핥았고, 고환의 얇은 막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를 때까지 깨물고 빨아 당겼다.

더는 견디지 못한 문평이 울고불고하며 다리를 벌리고 애원해도 끝까지 안 박아 주더니만, 결국은 진짜로 안 박고 그냥 끝내 버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삽입이 없는 정사라 몸에 무리가 덜 갈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피부 속 깊이 박힌 신경의 최말단 부분까지 뇌전 같은 전율이 흘렀다. 쾌감에 녹초가 되도록 시달린 문평은 정사 직후, 허리조차 세울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천마의 침상에 누워 있다가 몸을 추스르긴 했지만 아직도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뱃속엔 불편하게 뭉친 덩어리가 얹힌 듯 답답했다. 삽입은 안 했어도 사정을 세 번이나 했으니 그가 기진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천마가 그에게 저지른 만행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눈에 띄는 곳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배려를 하더니만 오늘은 보란 듯이 목에다 커다랗게 상흔을 남겼다. 그것도 목보다는 어깨에 더 가까워 옷깃으로 가릴 수 있었던 처음의 장소가 아니라, 결후 바로 옆에 눈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그런 장소에 떡하니 순흔을 남긴 것이다. 보라색으로 짙게 맺힌 피멍은 예사 것이 아니라 하루 이틀 안에 빠질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다녀야겠지.’

우울해진 문평은 고개를 숙인 채로 길을 걸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본래부터도 유달리 잦은 시선이었는데, 목에 큼지막한 순흔까지 달고 나타나자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더욱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자신은 아마도 머리 위에 큼지막하게 ‘남첩’이라고 씌어 있는 모습일 것이다.

‘끝장났네. 석문평.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으니.’

문평은 처량한 기분으로 우울하게 자조했다. 이러다가 천마와 관계가 끊어지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총애를 드디어 잃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문이 장하게 날 텐데. 그때는 천마가 무서워 감히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눈앞에서 비웃을 텐데.

‘내가 무슨 기첩妓妾도 아니고. 이건 뭐 하자는 취급인 건지.’

자신이 처한 처지가 너무 어이없어서 문평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진짜로 그랬다. 문평이 천마의 남첩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마교인들은 점잖던 웃어른이 갑자기 색욕에 눈이 멀어 어디서 본데없는 기녀 하나를 떡하니 데려다가 놓은 것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저게 뭘 했기에 우리 교주님이 홀딱 빠지신 것일까. 꼴같잖은 게 요분질은 꽤 잘하나 보지?

요망한 것이 감히 어울리지도 않는 안방을 차지하고 앉았다는 듯,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언짢기 짝이 없었다.

그를 흰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한 모든 원인이 문평에게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가 마교 내부 출신이 아니라 외부 출신의 굴러 들어온 돌이라는 점도 악재로 작용한 듯, 내전 안에서 그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문평은 억울했다. 저들이 보는 대로 자기가 좋아서 꼬신 거였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된다는 걸 자꾸 끌어안으며 억지로 밀어붙이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고, 한 번 허락하니 두 번 거절할 수 없어 어영부영 밀려가는 건데, 그런 걸 가지고 요사하다느니 남달기라느니 해가며 욕을 먹으니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 없다.

운이 나빠 내가 당한 거지, 까딱 잘못했으면 너희 중의 하나가 당했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아느냐고 소리치고 싶을 때도 종종 있었다. 천마에 대한 개인숭배가 철저한 마교인들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순순히 믿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렇게 천마가 좋으면 너희가 몸을 좀 바치든가. 너희들이 그래 주면 나는 오히려 고마워. 마지못해 끌려가는 이 짓거리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저들이 흰 눈으로 보면 나도 흰 눈으로 보겠다. 잘못한 거 없는데 내가 왜 당해? 양심상 이보다 더 떳떳하고 당당할 수 없는 문평은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의 야릇한 시선에 어깨가 움츠러들다가도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등을 펴고, 숙였던 고개도 빳빳하게 들고 걸었다. 그럴수록 수군대는 소리가 더 커졌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문평은 형극 같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길을 걸어 처소에 도착했다. 내전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인사하고 지내는 사람조차 없는 그의 처소는 언제나 그렇듯 쓸쓸하다. 고요한 밤에는 가끔 잠도 오지 않아서, 때로는 최위명의 코 고는 소리까지 그리워졌다.

하루빨리 이 지겨운 임무가 끝나서, 외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게 문평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석 형.”

헉. 깜짝이야.

우울한 기분으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던 문평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침상 곁의 그늘진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수하게 젊은 얼굴에 영민한 눈동자를 가진 그 사람은 임학이었다.

“어쩐 일이냐. 어떻게 여길?”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문평이 서둘러 문을 마저 닫았다. 내전 무사는 자존심이 높고 자부심이 강해서 외전 무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전엔 외전 무사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까지 하니 임학이 여기에 와 있는 걸 들켰다간 좋지 못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여길 또 왜 왔어?”

문평은 낮은 목소리로 임학을 나무랐다. 그가 아무런 용건도 없이 찾아올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위험한 짓을 서슴없이 하는 그가 걱정되었다. 저번에는 그나마 한밤중이었다지만, 지금은 겨우 저녁때가 아닌가.

일과를 마친 무사들이 숙소로 돌아올 시각이라 드나드는 사람들이 제일 많을 때인데, 이놈이 무슨 배짱으로 이 시간에 여길 찾아들었는지 모른다.

“괜찮습니다. 내전 무사들이 입는 옷을 빌려 입고 들어왔으니, 누구도 저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겁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정말 내전 무사들이 입는 표기복表記服을 입고 있었다. 오른쪽 가슴께에 인다라망因陀羅網을 상징하는 구슬 세 개가 새겨진 것을 보니, 아마도 교법당 무사의 옷인 모양이다.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기는 하다만……. 그래. 무슨 일이냐?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해서 들어왔어?”

문평은 복잡한 기분으로 표기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외전 무사인 그가 내전 무인의 무복을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저렇게 공을 들여서 준비했다면 자신을 꼭 봐야 할 일이 있었다는 소리다.

사려 깊은 아이니 그런 일이라도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지. 그리 생각하고 나니 나무라는 일이 더는 의미 없었다.

“……석 형.”

임학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깊은 눈으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문평은 그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고 느꼈다.

‘무슨 일이지. 저 아이가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한동안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문평은 뒤늦게 그의 눈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깨닫고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다급히 손을 올려 목덜미를 가렸다. 난색을 숨기지 못한 그의 얼굴이 임학의 눈에 똑똑히 비치고 있었다.

“하, 학아…….”

“그 자국, 누가 만든 겁니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문평의 얼굴만으로도, 임학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믿기는 싫어서, 그는 굳이 입을 열어 문평을 추궁했다.

그의 질문을 들은 문평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임학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형님.”

임학의 단정한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늘 침착한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명백한 동요에, 문평은 한순간 그가 자신을 찾아온 연유를 깨닫게 되었다.

“네가, 네가……. 다 알고 있구나. 알고서 확인하러 온 거구나.”

문평은 말이 아니라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 따위 신경 안 쓰겠다고 생각했었던 문평이지만, 막상 임학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임학이 들었으면 다른 사람도 다 들었을 것이다. 유난히 소문을 좋아하던 사람들인데 왜 아니 그럴까. 자신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걸 알면서도, 그들에게 그 소문이 미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평은 발밑이 무너지는 듯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 사람들이 다 안단 말이지? 다, 들었단 말이지?’

흰 반점이 점멸하는 눈 속에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결같이 듬직하고 자상하던 큰형 악형대, 늘 까불거리며 밝게 떠들어 대던 친구 최위명, 그리고 나이는 어리지만 침착해 의지가 되던 동생 임학.

그들은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 본 친구들이었고, 처음으로 가져 본 가족 비슷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 자신의 적나라한 치부가 드러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아연실색.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문평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발밑으로 피가 다 빠져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새하얗게 변한 그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휘청였다.

당황한 임학이 서둘러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문평은 뒷걸음질 쳐 그의 팔 안에서 벗어났다. 무서운 것을 피하는 어린아이 같은 몸짓이었다.

“다, 알아? 모두 다?”

문평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알아차린 임학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은 몰라요. 최 형이 어디서 이야기를 듣고 오긴 했지만, 그것도 제가 잘 단속시켰습니다. 아시잖아요. 내전의 소문이 외전까지 흘러나오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걸. 악 형은 모르시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도 들은 적 없습니다.”

“……그래?”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문평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의 상황이 그럴 뿐이지, 앞으로도 이어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소문은 빠져나간다. 강은 둑으로 막지만, 입에서 입으로 흐르는 소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뇌정전의 높은 담 밖으로도 흘러나온 소문이 아니던가. 내전의 담이 아무리 높아도, 뇌정전의 담보다는 높지 않을 터.

문평은 참담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가냘픈 경련을 일으켰다.

문평의 얼굴이 너무나 끔찍하게 변하자, 임학은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단순한 소문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자신이 문평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야 하겠기에 생각 끝에 굳이 나선 길인데, 막상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상처를 받는 문평을 보니 제 생각이 너무 짧았다는 자책이 든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예민한 일인데 너무 무리하게 접근했다. 걱정한답시고 마음만 바빠서는 정작 본인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석 형.”

임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문평을 불렀다. 이번에도 혹여 섣부른 말이 될까 잠시 망설였던 그는 너무 괴로워하는 문평을 보다 못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석 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를, 우리를 좀 더 믿으셔도 됩니다. 이런 일로 우리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잡을 수 있다면 떨리는 손을 꼭 잡아 주었을 것이다. 안을 수 있다면 품에 안아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를 문평이 거부하고 있었기에 임학은 말로밖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석 형에게 어떤 일이 있었든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석 형이 어떤 연유로,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겪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석 형은 우리를 걱정하는 모양이지만, 설사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석 형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석 형을 예전과 다르게 보지도 않을 겁니다.

이런 일 따위로 멀어질 사이였다면, 애초에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석 형이 우리의 친구라면, 우리에게도 석 형은 친구입니다. 부디 우리를 걱정하지 마세요.”

문평이 당한 일은 분명 무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힘없는 여염의 아낙도 아니고, 무공을 모르는 백면서생도 아닌데, 무력하게 몸을 빼앗기고 희롱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무자비한 형벌이었을 터다.

강호에 칼을 들고 나선 무사는 칼로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야속한 사람들은 무인으로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지 않고, 저항 없이 내주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해 문평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문평이 현명하게 순응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순응했기에 살아남았고, 그랬기에 고통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던가.

그를 위해서라도, 또한 그를 걱정하는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저항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어떻게 잃는지도 모르는 채 친구를 잃었더라면 그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을 터였다. 만약 문평을 그런 식으로 잃었다면 임학은 마교에 대한 충성심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네 얼굴 보기가 부끄럽구나.”

문평은 핏기가 사라진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임학이 거짓 없는 마음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맙고, 그러므로 더욱 부끄러웠다.

상대를 이기지 못하기에 넘어갔다며 스스로에게 변명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이 편하기 위해 한 타협이라는 것을. 쫓기는 것이 두렵고, 위협당하는 것이 겁이 나 차라리 그냥 먹히는 쪽을 택했다.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일에 몸을 맡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했다. 상대가 천마니까. 그를 이기는 것보다 그에게 지는 게 더 쉬우니까. ……변명은 끝이 없었다.

임학은 착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문평이 부끄럽다는 말 한마디 후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라면 몰라도, 제 앞에선 그러지 마십시오. 낯설고 서운합니다.”

“학아.”

“아니, 설사 다른 사람의 앞이라 해도 부끄러워하지는 마세요. 뭐가 부끄러운 일입니까? 죄 없는 자를 죽인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를 겁탈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상대가 상대 아닙니까? 상대가 그분이시라면 감히 누가 절개를 지키겠습니까? 형이 남총이라고 찧고 까부는 사람들이요? 하. 천마께서 그 앞에 가서 같은 요구를 한다고 해보십시오. 저들이 과연 그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문평의 쓰린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일까. 임학이 역성을 드는 티가 역력한 대꾸를 했다. 격식 없는 말투로 서슴없이 흉을 보는 게, 꼭 억울하게 욕을 본 자기 형을 편드는 동생 같다.

어린 동생인데도 속내가 깊다. 이런 형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돌봐 주는 것이 고마워 문평은 흐리게 웃었다. 너무도 심란한 마음에 웃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웃는 얼굴을 보이고 싶었다. 그는 임학이 자기 일로 더는 마음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생각 하곤 한다. 날 비웃는 자 중에 얼굴 잘난 놈이 있으면, 그놈을 끌어다가 그분 앞에 선보여 주고 싶단 생각도 종종 하곤 해.”

문평은 메마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부끄럽다고, 창피하다고 피하고 숨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의연하게 견디고 있는 척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아도 못난 형이면서, 그예 더 못난 모습으로 보이기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 문평은 하잘것없는 허세를 부렸다.

“왜요. 한번 그래 봐 주지 않고서요?”

“나도 진짜 그러고 싶었는데, 막상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꽁무니를 빼더라고. 내빼는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잡지를 못하겠더라.”

그래도 허세나마 남아 있어 다행이다. 문평은 임학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떠도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저 미소 역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둘 다 웃고 있는 형상 비슷하기는 하니 마음을 유지하기가 한결 낫다. 임학의 앞에서 울고불고하는 꼴을 보였다면 그 뒤로도 마음을 수습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진짜로 그냥, 걱정되어서 와 봤던 겁니다.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석 형이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걸 알면서도 그냥 돌아 나온 게 마음에 걸려서요.”

“안다. 네 마음. 고맙다. 학아.”

진심은 진심으로 통한다고 했다. 문평은 임학의 한결같은 태도에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문평은 손을 뻗어 가만히, 임학의 손을 잡았다.

메마른 손에 단단한 임학의 손매가 잡혔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천마와는 다른 거칠고 딱딱한 무인의 손. 그 손에서 느껴지는 정직함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문평은 그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았다. 말로 다 하지 못할 감사를 그리 표현하는 것이다.

“그만 가라. 너무 오래 지체하는 건 위험하다.”

“그냥 이렇게 얼굴만 보고 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일이라도……,”

조금 신색을 회복한 그가 임학을 돌려보내려 하자, 임학이 머뭇거리며 도울 것이 없느냐 묻는다. 그 마음이 기특하고, 그렇지만 좀 괘씸하기도 해서 문평은 손으로 임학의 어깨를 내리쳤다.

“이 녀석. 넌 네가 되게 대단한 인물인 줄 아는구나? 네 도움 하나로 해결될 일이면 내 선에서 끝났다. 너나 나나 힘없는 아랫것인데 그 무슨 만용이냐?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 단속이나 잘해라. 일 끝나고 돌아가면 등 비빌 구석이라도 남아 있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맵게 때렸기에 꽤 아팠을 텐데, 임학은 그저 미간을 찌푸리기만 할 뿐이었다. 착한 놈. 손을 들어 임학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문평은 임학을 내보내기 위해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그가 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뜻하지 않은 일에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던 문평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 사람이 여길 어떻게?’

문평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뒷걸음질 쳤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하얗게 질려 버린 것은 임학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그래도 문평보다는 행동이 빨랐다. 그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난생처음으로 눈앞에서 보는 자신의 주인에게 극공의 예를 다했다.

“광영된 주인인 교주님을 뵈옵니다.”

그 인사에서 알 수 있듯이, 문평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 교주였다.

“이놈이 그 ‘개’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예를 표하는 임학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문평에게 불쑥 물었다. 상대의 느닷없는 등장에 여전히 정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 문평은 멍청한 목소리로 천마에게 되물었다.

“예?”

“저놈이 내 풀 뜯어 먹은 개냐고.”

문평은 그제야 가까스로 천마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왜 그런 것을 묻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벌써 끝난 이야기 아니었던가?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게 만들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고, 벌같이 집요하던 정사까지 마쳤으니 계산도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렇지만 셈을 제대로 치렀다고 생각한 사람은 문평뿐인 듯했다. 천마는 얼음이라도 얼릴 듯 서늘한 어조로, 시린 냉소를 베어 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 풀 뜯어 먹은 개놈의 면상을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왔다. 누가 감히 내 화단을 헤집어 놓고도 그냥 갔는지, 대체 어느 몹쓸 똥개가 그런 짓을 했는지 꼭 알아야겠다.”

……천마는 참 뒤끝 있는 존재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흑의 장포를 걸쳐 입은 그는 일반 무사의 좁은 방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좁은 방 안이 꽉꽉 차다 못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구체적인 밀도까지 가진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 압도적인 기도.

난생처음으로 그런 기도를 맞닥트린 임학이, 질린 얼굴로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문평은 달랐다. 그동안 천마를 접하면서 내성이라도 쌓인 것일까? 문평은 그의 기도가 아니라 그의 용건 자체에 주목했다.

“아니, 왜 새삼 그러십니까? 다 끝난 일 아닙니까. 뒤늦게 이러실 일이 아닙니다.”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문평은 애써 천마를 달랬다. 처음에는 단순히 천마가 자신의 방으로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만 놀랐던 문평은, 천마가 가지고 온 용건을 알게 되자 더욱 크게 기함하고 말았다.

“네 생각은 그런가? 내 생각하곤 좀 다르군.”

문평이 간곡히 만류했지만, 천마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아까는 별생각 없는 것 같더니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일까? 문평은 천마의 변덕스러운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끝났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천마의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천마의 기분이 결정적으로 나빠진 이유가 자신의 태도 때문이라는 것도, 그로 인해 짜증이 난 천마가 집요한 애무로 문평을 몸부림치게 만들었다는 것도, 그러고도 성에 안 차서 그를 보내 놓고 혼자 서성거리다 기어코 달려와 버렸다는 사실도, 모두 알지 못했다.

“널 보내 놓고 가만히 생각하니 말이지, 모욕당한 건 네가 아니더라고. 잘 생각해 보니 그놈이 기망하려고 한 상대는 네가 아니라 나였어.”

‘기망은 무슨 놈의 기망. 당신이 무슨 황제라도 돼?’

문평은 자신이 당한 일을 지나칠 정도로 거창하게 부풀린 것이 못마땅해서 그렇게 불평했지만, 사실 천마가 그리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마교에서 천마는 황제 그 이상의 존재다. 짐이라는 말로 자신을 칭해도 그를 고깝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개도 주인을 보고 때린다는 말이 있지. 그 개가 주인 있는 풀을 잘못 뜯었단 이야기야.”

아까 했던 ‘내 화단’론이 또다시 등장했다. 문평은 참을성 있게 그가 외면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해 줬다.

“잡초잖습니까.”

“잡초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잡초를 키우는 게 누구냐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제천대성이 따 먹은 복숭아가 서왕모가 키우는 게 아니었으면 그가 벌을 받았을까? 주인 있는 물건을 함부로 건드렸으면 주인을 상대할 각오도 해야지.”

천마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의 요지인즉슨, 감히 자신이 손을 대고 있는 놈을 다른 놈이 건드린 게 아니꼽고 비위 상한다 이거다.

졸지에 서왕모가 키운 천도복숭아가 된 문평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하늘을 찌를 듯 대단한 저놈의 자존심,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에까지 기어이 참지 못할 정도로 기승스러우니 그냥 기가 질렸다. 아무리 그래도 교주라는 사회적 위치와 체면이 있는데. 꼭 어린아이 드잡이질하듯 저래야 하는 걸까?

천마야 자기 기분을 풀기 위해 저지른 일이니 끝나면 후련하겠지만, 문평은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지끈해지는 걸 느꼈다.

일반 무사들의 숙소에 천마 본인이 친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일대의 사건인데, 친림한 이유라는 게 남첩이라는 소문이 장한 남자를 누가 건드렸는지 찾아내려고 온 거라니 더욱더 기함할 일이다. 이 소문이 밖으로 퍼지면 그는 빼도 박도 못하게 남달기 신세다.

그렇지 않아도 귀인을 홀리는 요망한 것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판국에,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런 일을 자처한단 말인가?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저놈인가? 내 풀 뜯어 먹은 놈이?”

천마를 느닷없이 만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 데다, 개니 풀이니 복숭아니 하는 뜻 모를 비유들로 인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던 임학은, 천마가 자신을 똑바로 지적해 묻자 흠칫 놀랐다.

현령 앞에서 죄지은 것도 없이 마음이 불안한 촌민들처럼, 임학도 싸늘한 얼굴로 쏘아보는 천마 때문에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 녀석은 제가 외전에 있을 때 같이 근무하던 아는 동생입니다. 제게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천마의 화살이 임학에게로 날아가자 문평은 황급히 그를 변호했다.

“외전의 무사인데 왜 복장은 교법당 복장이야?”

“외전의 무사들이 내전을 사사로이 드나드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죄송합니다.”

임학을 개로 만들 수 없었던 문평은 서둘러 입을 열다, 자기도 모르게 그만 임학이 저지른 불법을 천마에게 고하고 말았다. 제 입으로 말하고 나서야 아뿔싸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임학을 자신의 입으로 고자질한 꼴이 된 문평은 그만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수습할까. 당황한 문평이 뒤늦게야 사죄의 말을 덧붙였지만, 천마는 그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저놈은 아니란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하나? 눈물로 빌어야 하나? 임학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갖가지 방법을 떠올리고 있던 문평은, 임학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넘어가는 천마의 태도에 놀랐다. 문평이 의혹 어린 눈길로 천마를 바라보자, 천마가 어서 말하라는 듯 그를 채근했다.

‘타, 탓할 생각이 없는 건가?’

잠시 눈치를 보던 문평은 천마가 임학의 불법에 대해 끝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당황하던 태도를 당장 고쳤다. 아무래도 딴생각이 너무 깊어 임학이 저지른 일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인데, 이럴 땐 그냥 자기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이득일 성싶었다.

“물론 저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개의 이름 역시 말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아랫것들 간의 일은 아랫것들끼리 수습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자칫 크신 위엄에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문평은 당황한 신색을 수습하고, 시치미를 뚝 떼며 천마에게 대답했다. 천마에게 그걸 고자질했다간 정말 마교 내에 있을 수 없게 될 터이니 그 나름대로는 필사적이었다.

“말하면 저 아이를 옷 입혀서 돌려보내고, 말 안 하면 저 아이를 발가벗겨 돌려보내겠다.”

문평이 계속 버티는 모습을 본 천마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문평은 애먼 사람을 발가벗겨서 돌려보내겠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천마에게 이제껏 많은 협박을 받아 왔지만, 지금같이 황당한 협박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예?”

“너희가 암묵적으로 무슨 규칙을 가지고 있건 간에, 외전 무사가 내전에 들어오지 말라는 규칙은 교에 없다. 하지만 무사가 소속한 곳의 표기를 단 표기복을 입는 것은 간자가 교내에 스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책 중에 하나로, 교법에서는 무사가 본인의 소속과 상관없는 표기를 다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저놈은 간자가 아니니 교법당에까지 끌고 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입어선 안 될 옷을 입었으니 벗기는 게 옳겠지.”

천마가 말하는 법은 문평이 알고 있는 법과 정반대였다. 설마 교주가 교법을 잘못 알고 있을 리 없으니, 아마도 문평과 임학이 착각한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교활한 협박이었다. 여기에서 외전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 거리를 발가벗겨서 내몰겠단 말인가. 아랫도리 드러내 놓고 다녀도 상관없는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데다 자존심도 강한 무인을.

이건 임학더러 목을 매란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어쩔 테냐. 나는 언제나 그렇듯 너에게 선택의 여지를 줄 생각이다. 저 아이를 발가벗겨 내보내겠느냐, 아니면 개의 이름을 말하겠느냐?”

그는 언제나처럼 선택이 아닌 강요를 종용했다.

“교주님.”

“네가 선택하기 편하게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줄까? 만약 한 번 더 물었는데도 네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난 숙소 밖으로 나가 내전의 무사들을 모두 불러 모을 생각이다. 그리고 개를 찾을 때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네가 내 풀 뜯어 먹었냐고 친절히 물어볼 거란다. 그 꼴을 굳이 보고 싶다면야 계속 말을 안 해도 상관없겠지.”

천마는 정말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다는 투였다. 하지만 문평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천마가 자기가 말한 대로 실행한다면, 한 명으로도 많은 증인이 무려 수백 명이 될 터였다. 아무것도 모를 무사들에게 천마가 일일이 ‘네가 내 남첩 건드렸냐’고 묻고 다니겠다니……. 그야말로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 안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이름을 모릅니다.”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도 눈앞에 절로 떠오르는 막막한 광경에 문평은 할 수 없이 진실을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천마가 차갑게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 말 없는 되물음에, 문평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제가 숙소로 돌아와 수욕하는 와중에 만난 사람입니다. 술에 많이 취했고, 정신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었는데 저를 보고 시비를 걸어와서……. 내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을 잘 모르니, 얼굴을 봐도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얼굴은 안다, 이거지?”

“알아보긴 하겠으나…… 제발 일일이 대조해 보고 찾아내란 말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기어이 얼굴을 확인시켜서라도 그놈을 잡아내겠다는 듯 말하는 천마에게 질색한 문평이 아예 사정을 했다.

“왜?”

“그자가 목덜미를 물어뜯기에 어깨 관절과 팔 관절을 빼놓고 배를 걷어찼는데, 오늘 아마 피똥을 쌌을 겁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과한 응징인데 교주님까지 가세한다면 제가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천마는 아까는 미처 듣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에 미간을 좁혔다. 어깨 관절과 팔 관절을 빼놓고 배를 걷어차?

그래. 그냥 순순히 당한 건 아니란 말이지.

“잘했군.”

감히 누군가가 자신을 업신여겼다는 사실이 여전히 불쾌한 천마였지만, 그놈을 거의 반 죽여 놓았다는 문평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런 놈은 패야지. 패 죽여도 된다.”

만약 자기 말대로 한다면, 문평에게 제일 먼저 맞아 죽어야 할 사람이 잘도 말했다.

“예.”

문평은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는 분위기에 안도하며 대답했다. 이렇게 해결될 일인 줄 알았으면 진작 두드려 팼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 엉뚱한 일에만 초점을 맞춰 괜한 실랑이를 했다고 생각하니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진작 말했으면 이렇게 번거로울 일도 없었을 것을.”

천마도 같은 생각인지 낮게 혀를 차며 문평을 탓한다.

‘내가 당신이니까 할 수 없이 당한 거지, 아무에게나 그렇게 순순히 당할 위인 같습니까?’

문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속내를 천마에게 털어놓지는 못했다.

“돌아가겠다.”

싱겁게 일을 마무리 지은 천마가 소맷자락을 털며 말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던 임학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천마가 들어왔을 때 인사를 까먹었던 문평도 이번엔 잊지 않고 인사를 했다.

문평은 이제야 겨우 일이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괜히 거듭 말이 나오긴 했으나 이제는 된 거라고. 이제 이 일에 대해서 천마와 말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확실히 그의 생각대로 되긴 했다. 천마는 문평에게 두 번 다시 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더는 문평과 말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들었지?”

천마는 문평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가 복도에 나서자 놀란 무사들이 분분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인간으로 만든 파도가 치는 것처럼, 그가 걷는 방향을 향해 쏟아지는 인사를 무심하게 밟고 지나가며 천마는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어제저녁에 술을 마신 후 팔과 어깨의 관절이 빠진 놈이다. 수소문해서 처리해라.”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허공 속에서는 그에 대한 대답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는, 자신이 명한 일들이 정확히 이뤄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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