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천마는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한 태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맵시 있게 차려입은 장포는 언뜻 보면 짙은 흑색이었으나, 햇빛에 비칠 때마다 은은한 빛이 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은사를 섞어서 짠 은란금銀蘭錦으로 지은 옷인 듯했다. 혁대에는 패옥佩玉이 걸려 있어 걸을 때마다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길을 걷기엔 과분한 혁리화革履靴는 장포와 마찬가지로 검은빛이 돌았는데, 아마도 물소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싶었다.
석문평은 천마의 뒤를 세 발자국 떨어져서 따라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맵시 있게 떨어진 천마와 달리, 머리는 대충 묶은 데다 다림질도 제대로 못 한 옷자락이 구깃구깃 구겨져 있는 볼품없는 차림새였다.
‘이거야 원. 완전히 주인집 도련님과 종놈이구먼.’
빈손으로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남자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손에 보따리를 든 남자. 멀리서 봐도 그림이 딱 잡혔다. 산천 유람 나온 부잣집 도련님과 그 시종. 그 외에는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는 일행이다.
석문평이 손에 든 보따리는 묘원 사태가 챙겨 준 것들이다.
“기가 많이 허해졌고 몸도 안 좋아요. 게다가 충분히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움직이니 아무래도 약초를 챙겨가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묘원 사태는 채마밭 뒤에서 가꾸던 약초들 가운데 기를 보하는 것만 골라 야무지게 보따리에 싸 주었다.
“밖에 나가는 일이 통 없어서 행낭도 없네요. 보따리에 싸 드렸는데 괜찮을까요?”
멋쩍게 미소 짓는 그녀 앞에서 문평은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내미는 보따리를 소중히 받아 안았다.
그녀의 암자에 머문 시간은 고작 이틀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진심을 아는 데 결코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다.
천마 때문에 괜히 예민해져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던 문평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자기가 생각했던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겉모습과 속내가 일치하는 보기 드문 인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상냥하고 온화한 여승이었다.
‘설마 그분이 묘원 사태일 줄은 나도 몰랐지. 전대 여중제일인이 곤륜산에서 은거하고 있을 줄이야.’
소문을 좋아하는 그의 동료들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아미 제일의 무인이며, 현 아미장문인의 사저이기도 한 그녀가 몇 년 전부터 두문불출하여 외인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대체 무슨 까닭으로 사문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먼 외지까지 나와서 은거를 하고 있는 걸까? 내막을 모르는 문평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그보다 더 모를 것은, 어째서 그런 분이 천마 같은 이와 교분을 트고 지내느냐는 것이다.
검후 묘원 사태라면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명숙이다. 물론 강호상의 기인들이 나이가 들면 서로 허물이 없어져 정사 간의 차이에 개의치 않고 교류하게 된다는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런 일이 천마와 검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문평은 두 사람의 관계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묘원 사태는 문평이 처음으로 만난 다정하고 상냥한 웃어른이었다. 겉모습은 젊어 보여도 실제로는 고희가 훨씬 넘은 그녀는 마치 친할머니라도 된 것처럼 살뜰하게 문평을 챙겨 주었다.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 보지 못했던 문평은 못내 민망하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상냥하게만 대해 주시는 어르신의 보살핌은, 친한 친구나 동료들에게 챙김을 받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슨 소꿉놀이라도 하느냐며 옆에서 픽픽 비웃는 천마만 없었더라도 좀 더 다정히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문평은 천마가 원망스러웠다. 생긴 건 묘원 사태보다 30년이 젊지만 진짜 나이는 오히려 열 살 가까이 많은데도, 성품이며 행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분은 그렇게나 제대로 된 어른이신데. 저 사람은 대체 왜 저 모양이야? 나이를 어디로 먹었길래?’
내심 백회곡에 좀 더 머물고 싶었으나, 천마의 성가신 채근에 생각보다 일찍 곡을 떠나야만 했던 문평은 서운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앞서가는 천마의 등을 몰래 흘겼다.
천마는 정말 뭘 하든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환자를 괜히 찾아와서 괴롭히다가 묘원 사태에게 쫓겨나질 않나, 늘 바지런한 묘원 사태의 일을 돕기 위해 문평이 따라붙으면 정말 잘 어울린다, 한 쌍의 바퀴벌레다, 근데 묘원이 너는 젊은 서방 만나 좋으냐, 하는 식으로 짓궂은 시비를 걸어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 꼴이 꼭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어린 남자애 같아서, 문평은 아무래도 젊은 날 천마와 검후 사이에 남모를 연분이 있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다 날 저물기 전에 마을에 도착도 못 하겠군.”
한가하게 걸음을 옮기던 천마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 사실을 이제 아셨습니까?’
문평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천마 때문에 덩달아 발걸음을 멈추며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꼭 산책 나온 사람처럼 편하게 걷고 있기에 오늘 밤은 밖에서 노숙할 생각인 줄 알았다. 백회곡을 나온 후 줄곧 이런 속도로 걸어서, 길을 나선 지 반나절이 지나도록 곤륜산조차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산세는 지나치게 깊고 험준했다. 이 근처에는 화전민조차 없을 듯했다.
“너, 문평이라고 했던가?”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천마가 고개를 돌려 문평을 바라보았다. 문평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천마의 하문에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교주님.”
문평의 대답은 매우 싹싹했다. 좀 전까지 등 뒤에서 남몰래 구시렁대던 사람의 대답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말이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반응이다. 속에 쌓인 불만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문평은 어수룩하지 않다.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 나름의 생존법이 있는 것이다. 분기가 치민다고 해서 앞뒤 재는 것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휩쓸렸다간, 죄 없는 목숨줄도 같이 휩쓸려 갈 터였다.
“백회곡까지 나를 따라잡은 것을 보니 신법이 제법 대단한 모양이지? 흑야의 이름은 나도 몇 번 들어봤지만, 그 신법인 녹수무영에 그 정도로 묘용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뇨. 별로 대단한 무공은 아닙니다. 피똥 싸게 달려야 겨우 당신 그림자나 쫓을 수 있는 걸 가지고 무슨 소리랍니까.’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은 따로 움직였다. 천마를 대하고 있노라면 사사건건 머리와 입이 따로 노니, 이러다가 무당면장의 분심이용分心二用의 묘리를 스스로 터득하게 생겼다.
“속하가 알기로 녹수무영의 효용은 그 빠르기가 아니라 지속력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빠르게 달려나간 길을 오랫동안 달려 보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뿐인지라, 그리 쓸모가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차피 토끼를 이기는 건 거북이야. 뜻밖에 겸손하군.”
“과찬이십니다.”
“나는 빈말을 하는 게 아니다. 썩 괜찮은 무공이야. 내가 백회곡을 드나든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여기까지 따라잡았던 사람은 네가 처음이거든. 그 정도 경공이라면 속력을 좀 내도 따라올 수 있겠지. 이제부턴 제대로 달릴 테니 놓치지 말고 따라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교주님. 다음 마을까지 쭉 달리겠습니다.”
“아니. 다음 마을이 아니라 다음 도시까지. 묘원이 해주는 음식은 너무 담백해서 질렸다. 오늘은 제대로 된 요리를 좀 먹어야겠어.”
“예?”
‘다음 도시라니? 다음 도시가 어디야?’
천마가 내린 막연한 명령에 당황한 석문평이 자기도 모르게 맹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석문평의 되물음을 들은 천마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약강若羌까지 쭉 간다. 오늘 저녁은 약강에서 먹도록 하지.”
석문평은 언제나 예고 없이 벼락을 때리는 천마를 향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잠깐만요 교주님? 약강현이라니요. 거긴 청해도 아니고 신강이잖습니까? 여기서부터 천 리는 족히 넘을 텐데요?’
“그럼 저녁때 보지.”
느긋한 걸음걸이에 마음 놓고 있다가 느닷없이 청천벽력을 맞은 석문평이 아연해하는 사이, 천마가 휙 하니 앞으로 내달렸다.
탄력 있는 활처럼 한껏 휘었다가 살처럼 쏘아져 나가는, 교본으로 써도 좋을 만큼 훌륭한 궁신탄영弓身彈影이었다.
완미完美할 정도로 완숙한 천마의 동작은 경지에 이른 사람답게 배울 점이 많았지만, 별것 아닌 신법으로 또다시 그의 뒤를 쫓아야 하는 석문평은 그 모습을 보고 속이 훌떡 뒤집히고 말았다.
‘이러다 진짜 화병으로 죽겠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람 속을 들들 볶아 대는 천마로 인해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문평은 까마득히 멀어지는 그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는 건지! 평생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아서인지 몰라도 도무지 남을 배려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불만이 많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 오래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행적을 놓칠 가능성은 없지만, 천마가 먼저 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더 무섭다.
문평은 보따리를 풀어 허리춤에 단단히 다시 묶고 신법을 운용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틀 전에 끝난 줄 알았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되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쉴 여유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한 줌의 진기로 십 리를 간다는 녹수무영으로도 천 리 길을 반나절 만에 달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천 리 길이라는 게 말이 천 리 길이지, 그 길을 하루 안에 달릴 수 있는 말은 명마 중에서도 전설상의 명마인 한혈마汗血馬뿐이다.
‘주, 죽겠다!.’
그런 길을, 그야말로 죽도록 달려 도착한 문평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가 왜 피 같은 땀을 흘린다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루 만에 천 리를 달렸더니 그도 피가 땀으로 나올 지경이다. 말이라고 해서 그와 사정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주인 한번 잘못 만나 이게 웬 고생이란 말이냐.’
문평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설상의 말에게 동병상련의 정까지 느끼며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미친 듯이 달려 약강에 도착하니, 약강의 성벽엔 마교의 흑화黑話가 적혀 있었다. 전문적으로 간자 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도 간단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고안된 약식 흑화였는데, 해석해 보니 성안 가장 번성한 대로변에 위치한 호화객잔으로 오라고 쓰여 있다. 천마는 벌써 거기에 가 있는 모양이다.
‘호화객잔? 거 이름 한번 호화롭네.’
문평은 운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촌스러운 이름에 힘겹게 웃었다. 원래는 피식하고 비웃을 생각이었는데, 배에 힘을 주기가 힘들어 도저히 코웃음이 나질 않아 힘겹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하고 났더니 배가 당겼다. 근육통이 오는 것이다.
‘아. 배 아파.’
문평은 배탈이 난 사람처럼 엉거주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손으로 배를 짚은 채 너털너털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자세로 걷고 있는 그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그런 눈빛을 신경 쓸 만큼 그의 정신은 맑지 못했다.
밥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이대로 그냥 자고만 싶었다. 달려오는 동안 먼지를 말도 못 하게 뒤집어썼음에도 심지어는 세수조차 귀찮았다.
천마가 말한 객잔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약강현에서 대로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인데, 그 길에서도 호화객잔은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호화객잔은 이름에 걸맞게 정말로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건물의 높이가 무려 3층이나 되는 데다가, 간판도 사람 두엇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우리는 정말 호화찬란해!’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과시적으로 번쩍번쩍한 모습이 천마의 취향과도 닿아 있다.
문평은 배를 움켜쥔 자세 그대로 객잔으로 향했다. 매우 눈에 띄는 외양을 가진 천마였기에 그를 어떻게 찾느냐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평이 막 객잔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문이 열리고 점소이 하나가 나왔다. 마침 잘됐다 싶어 문평은 점소이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앞문으로 오면 어떻게 해? 뒷문으로 가.”
천마처럼 생긴 사람이 안에 있는지를 질문하려고 막 그에게 다가갔던 문평은, 점소이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안에 계시는 분과 일행인데, 사람을 좀 찾…….”
“헛소리 말고 뒤로 돌아가라고. 누굴 경을 치게 하려고 그래? 우리 객잔이 거지 동냥이나 다니는 그런 덴 줄 알아? 뒷문으로 가. 그럼 쉰밥 몇 덩인 얻을 수 있을 거야. 어서 꺼져.”
콜록.
문평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라 버리는 점소이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거지 취급을 받다 보니 어쩐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물론 평소 같았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점소이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쳤을 테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겐 그런 격렬한 반응을 보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머쓱해진 문평은 새삼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배가 아파 배를 움켜쥐고 있지만, 달리 보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평범한 무명옷은 구깃구깃한 데다 달려오는 동안 뒤집어쓴 먼지 때문에 엉망이었고, 바람에 뒤엉켜 머리는 산발이고, 게다가 등엔 보따리까지 짊어졌으니, 확실히 갈 데 없는 유랑민 꼴이긴 하다.
“점소이. 지금 내가 꼴이 이렇지만, 안에 진짜로 일행이 있네. 안에 혹시 흑포黑袍를 입으신 분이 계시지 않는가?”
“진짜 끈질기네. 흑포를 입은 사람이 세상에 한둘이야? 장사 방해되니까 뒤쪽으로 꺼져. 안 가? 자꾸 이러면 쉰밥도 없어?”
문평의 발치에 더러운 구정물을 확 뿌린 점소이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검이라도 차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이 무인처럼 보였다면 점소이가 감히 저러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평은 숙소에 두고 온 검이 그리워졌다.
한숨을 쉬며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막 안쪽으로 들어가던 점소이가 길을 막는다.
‘아가야. 엔간히 좀 하자?’
문평은 사람 보는 눈이 발바닥에 붙은 점소이를 한숨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안 된다니까 그러네, 자꾸…….”
“내 주인이 이 안에 계시는데 자꾸 길을 막으면 쓰나. 나는 괜찮지만 내 주인은 몹시 무서운 분이시거든? 자칫하면 자네가 경을 치는 수도 있으니 더는 막아서지 말게.”
문평은 힘없이 웃으며 점소이가 들고 있던 구정물 통의 손잡이를 잡았다. 참나무로 만든 통의 손잡이는 오래 쓰기 위해 단단한 쇠를 덧대어 놓았는데, 문평은 그 손잡이를 지그시 쥐었다가 놓았다.
무슨 짓을 하느냐고 벌컥 화를 내려던 점소이가 손잡이에 남은 뚜렷한 손자국을 보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헉. 무림인이었나?’
문평의 형편없는 행색과 지친 얼굴을 보고 그가 유리걸식하는 떠돌이인 줄 알았던 점소이는, 자신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처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혀, 협객님을 몰라뵙고 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점소이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변한 것은 안색만이 아니었다. 뻣뻣하기 그지없던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지면서, 굽실굽실. 아예 절까지 하며 사정한다.
마교가 진을 치고 있는 신강 땅에서 확인도 안 해보고 대뜸 협객님이라니. 그 단어 선택 하나만으로도 점소이가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를 알 수 있었던 문평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됐어. 그런 건 신경 쓸 거 없고. 아까 내가 했던 질문이나 대답해 보지. 안에 인물이 매우 빼어나고 흑포를 차려입으신, 큼. 그러니까 도련님이 계시지 않은가?”
“흑포 입은 분들이 워낙 많으신지라, 정확히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점소이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있는지라 엄청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문평은 하는 수 없이 천마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했다.
“체격 좋고 키도 매우 크시고, 은란금으로 만든 흑포를 입으셨는데, 얼굴이 매우 잘생기셨지. 반안潘安이니 송옥宋玉이니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말이야.”
말하고 보니 이건 뭐, 인세에 보기 드문 절세 미공자가 따로 없다. 겉모양새만 본다면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만, 문평은 어째 밸이 꼴리는 걸 느꼈다. 점소이가 설명을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리는 걸 보니 더 그랬다.
“아, 수레 타고 나가시면 척과영차도 능히 하실 것 같은 그분이요? 맞습니다. 지금 저희 객잔에 와 계십니다.”
점소이가 답지 않게 문자까지 쓰며 아는 척한다. 제 딴엔 문평의 비위를 맞춘다고 하는 짓이겠지만, 척과영차라는 말을 들은 문평의 기분은 더욱 떨떠름해졌다.
척과영차擲果盈車란, 서진西晋 시대의 유명한 미남 반안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반안의 미모가 어찌나 빼어났던지 성시를 걸으면 여인들이 넋을 잃고 따라나서는지라 자기 발로 걷지도 못하고 항상 수레를 타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여인들은 그래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가 수레를 타고 지날 때마다 수레 안으로 과일을 던져 자신들의 연모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척과영차라는 말의 유래다.
예전에 최위명이 반안의 옛 고사를 빗대어 자기도 수레를 타면 능히 세 수레의 과일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고 한다면 최위명은 농담으로 그런 거고, 점소이는 반 넘어 진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거다.
“안내를 좀 해주겠나?”
아까 점소이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보다 기분이 더 나빠졌지만, 물정 모르는 사람에게 화풀이할 생각이 없었던 문평은 별 반응 없이 점소이를 앞장세웠다.
힐끔힐끔 열심히 눈치를 보며 문평의 기분을 살피던 점소이가 얼른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점소이가 그를 안내해 들어가자 지나가던 점소이며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떤 점소이는 지나가면서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하는 시선을 안내하는 점소이에게 보내기도 했다.
‘내 꼴이 그렇게 심한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별 자각이 없었던 문평은 못 볼 것을 보는 것 같은 사람들의 시선에 새삼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먼지라도 좀 털고 머리도 다시 묶으면서 걸었지만, 사람들의 험악한 시선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천마가 있다는 안내를 받은 장소는 객잔의 3층. 그중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였다.
미리부터 도착해 술을 마시고 있던 천마의 앞에는 간단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속하 지금 도착했습니다.”
문평은 천마를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림같이 앉은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던 천마는 가볍게 고개를 돌려 문평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늦지 않았군.”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천마가 말했다. 생각을 할 줄 알면 사람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되는 거라고, 문평은 불온하게 생각하면서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려 천마께서 앞서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수하 된 몸으로 딴전을 피울 수 있을 리 없었다.
문평은 그야말로 똥줄이 타도록 뛰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색을 낼 수는 없었기에 그저 의연한 척을 했다.
“앉지.”
천마가 다시 술잔을 채웠다. 끼익,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천마의 맞은편에 있던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손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시전된 격공섭물隔空攝物.
무인인 문평은 천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한 한 수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의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천마의 경지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괴물 같은 무공이다.
문평은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슬쩍 주위를 살피면서 천마가 내준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술잔이 절로 빙글빙글 돌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팽이가 도는 듯 부드럽게 돌면서 도착한 술잔에는 술이 가득 차 있었으나, 회전하는 동안 한 방울의 술도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 게다가 문평이 손을 대기도 전에 술잔은 그냥 멈춰 섰는데, 딱 그렇게 되도록 조절한 절묘한 진기 운영인지라 솔직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에 담긴 것은 섬서陝西의 명주로 유명한 서봉주西鳳酒였다. 서봉주는 ‘맑기는 수정 같고 향기는 유란幽蘭 같다’라는 말이 전해지는 절품의 술인데, 가난한 문평은 5년 전 악형대가 득남했을 때 딱 한 번 마셔 본 게 전부였다.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꿀꺽. 문평은 입 안에 절로 고이는 침을 삼키며 천마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 이렇게 내밀었다는 건, 나더러 마시라는 뜻이겠지?’
물론 상식적으로 볼 때 이 상황이 권주 외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잔해.”
아까 점소이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눈치를 보며 문평은 천마의 기색을 살폈다. 한참 머뭇거리며 술잔을 받지 않자 천마가 귀찮은 태도로 허락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문평이 술잔을 손에 들었다.
술을 홀짝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러운 목 넘김에 감탄하며 술을 넘기자, ‘향이 유란 같다’는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은은한 난향이 번졌다.
아. 좋구나. 문평은 조심스레 술을 맛보며 뜻하지 않게 누리는 호사를 기뻐했다. 천마의 많은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문평이지만 술 취향만큼은 썩 마음에 들었다. 천마와 마찬가지로 그도 향이 짙고 독한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저녁은 했나?”
“아직 못 했습니다.”
저녁은커녕 점심도 아직 못 먹었다. 천 리 길을 반나절 만에 오는데 밥때를 꼬박꼬박 챙길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마침 생각났으면 밥 좀 달라는 듯이. 그 소리를 들은 천마가 피식 웃었다. 문평은 주책없이 배곯는 소리를 낸 자신의 위를 원망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뜻밖에도 천마는 그 일을 가지고 문평을 놀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친절하게도 문평을 위해 저녁까지 시켜 주었다.
천마가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푸짐하게 한 상 차려졌다. 문평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고급 요리들이 탁자 위의 나뭇결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이 들어찼다. 모두가 향이 진하고 맛이 강해 보이는 요리들뿐이었는데, 문평이 보기엔 천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 속일까. 문평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먹으라는 채근에 젓가락을 들면서도 은근히 불안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설마 천마가 그럴 리는 없고, 무슨 뒤통수를 치려고 갑자기 이러는 것일까? 밥에 독이라도 탔나?
근심을 놓지 못한 채 젓가락을 들긴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음식 맛은 좋았다. 일단 숙수의 솜씨가 워낙 뛰어났고, 재료는 물론이고 향신료도 아끼지 않고 듬뿍 사용해서 맛이 깊고 풍미가 진했다.
힘도 들고 배도 고프던 참이어서, 처음에는 느릿느릿하던 젓가락질이 점차 빨라졌다. 천마의 눈길을 의식해 허겁지겁 먹을 순 없었지만, 적어도 티를 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큼은 최대한으로 빨랐다.
‘이건 뭐 하자는 수작일까.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꼭 돼지 잡는 날처럼?’
천마의 의중을 골똘히 추측하며 입 안으로 젓가락을 옮기던 문평은 순간 멈칫했다.
무심결에 떠올렸던 비유가 어째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돼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잡아먹힐’ 여지가 있는 자신이다 보니 그 비유가 제법 상황에 걸맞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설마, 잘 먹여 놓고 덮쳐 보려는 수작인가?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이 음식들이 전부 화대花代야?’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기름지고 맛있던 고기가 이제는 질긴 가죽처럼 씹혔다. 젓가락을 든 팔뚝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젠장. 오늘 밤, 기어코 정조를 잃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내심 각오하고 있던 바이기는 했으나,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서글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천마는 애초부터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묘원 사태가 버티고 있는 백회곡에서 서둘러 나와, 말도 안 되는 주행 거리를 주파하도록 종용해 사람을 지치게 했다.
이게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천마의 의중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배열해 보니 아귀가 딱 맞는다.
자신의 추측이 지나치게 앞서 나간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그런 행운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문평은 울고 싶어졌다.
‘별거 아니다 석문평. 한 번만, 딱 한 번만 눈 감으면 돼.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버티면 될 거야. 설마 진짜 죽기야 하겠어? 마적 대장도 살아서 가긴 했다잖아.’
문평은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을 달랬다. 그래. 한 번. 딱 한 번이면 된다. 그거 한 번 안 당하겠다고 버티다 늘 이렇게 쫓길 바에야, 그냥 한 번 당하고 나서 관심권 밖으로 멀어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다.
자신이 천마 같은 절세의 미남자도 아니고, 남자를 사정없이 후릴 만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별 볼 일 없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안다. 천마도 딱히 자신이 예쁘거나 귀여워서 저러는 건 아닐 거다. 취향과 대충 비슷해 보이는 사내가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니까 한 번쯤 건드려 볼까 싶어 저러는 거겠지.
문평도 사내이기에, 그런 심리를 모르지 않았다. 남색가든 뭐든 간에 사내란 원래가 그런 족속이다. 색주가에는 남자란 모름지기 새로운 이를 총애한다는 속언이 있다. 천마의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볼 때 남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렴. 그는 천마야. 원한다면 세상에 가지지 못할 게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뭐 하러 나처럼 평범하기만 한 인간에게 집착하겠어. 눈에 띄었으니 잠깐 가지고 놀다 흥미를 잃으면 버리겠지.’
머리로는 그리 생각해도 마음이 납득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세뇌하려 애써 노력해 봐도 싫은 기분은 바뀌지 않았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인 문평은 자신의 몸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한데 천마는 그런 몸을 흙발로 침탈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저 흥미가 당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려고 드니,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반발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자. 이쪽으로들 앉으십시오, 손님들. 여기가 저희 가게에서 가장 좋은 자리랍니다.”
갑자기 계단 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한참 이성과 감성의 괴리로 고뇌하는 참이건만,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저렇게 시끄러울 건 뭐란 말인가.
문평은 삐쭉한 눈길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고민해 봤자 결론도 못 내릴 거였으면서, 생각을 방해받은 게 심히 짜증스러웠다.
요란하다 싶을 정도로 소란스럽게 등장한 일행은 딱 보기에도 귀한 집 자제들로 보였다. 그들을 안내하는 사람은 아까 문평을 안내해 주었던 바로 그 점소이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천마와 문평이 앉은 자리의 바로 옆쪽 창가 자리로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들 일행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물론 문평을 보는 시선은 아니다. 점소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부잣집 일행들은 자신들이 앉을 자리 바로 옆에 그림같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천마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여인들의 눈길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남자들조차도 놀란 듯 여기저기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린다. 최소한의 체면이 있기에 멈춰 서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무례하다고 여길 만큼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문평이라면 불편해했을 만큼 낯이 따가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천마는 별 반응이 없다. 하긴. 원래부터 남의 시선 따위 신경도 안 쓰고 사는 사람인데 새삼 저런 애송이들의 눈빛을 불편해할 리 없었다.
일행은 천마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로 어정어정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자신들이 어디에 앉는지 신경도 안 쓰고 힐끔힐끔 천마를 훔쳐보는 모양새를 보니 규송窺宋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옆집 사는 송옥을 훔쳐보기 위해 3년간 담 너머만 바라봤다는 처녀의 모양새가 딱 저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사내자식들은 왜 저러나 모르겠다. 저것들도 죄 남색가인 건가?
“늦었는데 식사들 하죠. 여기가 규모는 작지만 맛은 괜찮습니다. 때를 놓쳐 시장들 하실 텐데 얼른 주문하세요.”
천마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주눅이 든 듯, 잠시 어색한 분위기로 그저 앉아만 있던 사람들 사이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의 좌장 격인 것 같은 남자가 이상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며 주의를 끈 것이다.
그의 부름에 이끌려 정신을 차린 일행은 자신들이 얼빠지게 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이런 변방의 오지에서 평생을 두고도 보기 드문 절세의 미남을 만나게 되는 바람에 평정을 잃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내팽개치고 있던 자존심과 품위를 다시 기억해 내고는 서둘러 그것들을 주워 입었다.
“그래요. 저녁 시켜요. 저 진짜 배고파요.”
일행 중 가장 나이 어린 소녀가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삼단같이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그녀는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동그란 얼굴에 복숭아씨처럼 커다란 눈을 지녀 매우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하는 행동을 보니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우리 엄 소저께서 배가 고프시다니 기꺼이 저녁을 대령해야지요. 이봐. 점소이. 이리 와 보거라. 주문을 하겠다.”
또 다른 청년이 부산스럽게 말을 받았다. 평상시 말하는 투가 절대로 아닐 높은 음색의 목소리는 과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문평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두 번째로 입을 열었던 소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천마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라, 아가들아. 이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그러는 거냐. 괜히 눈에서 피눈물 빼지 말고 곱게 먹고 곱게 가라.’
문평은 엄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예감이 현실이 되지 않길 바랐다.
강호에서 정체를 모르는 상대를 만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는데, 저 철딱서니 없는 애송이들은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천마에게 호기심을 품었다. 여자들은 말을 걸어 보고 싶은 표정이 역력한 모양새였고, 남자들은 질투심도 들지 않을 만큼 대단한 그의 위세에 단단히 주눅이 들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허세를 부렸다.
천마의 기세가 워낙 대단해서 애송이들이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만만해 보였다면 그들은 서슴없이 다가와 천마에게 말을 걸었을 터였다. 자신들이 호랑이 굴에 굴러 들어가고 있단 사실을 전혀 모르고서 말이다.
“아유. 이곳은 어쩜 이렇게 모래 먼지가 많아요? 피풍의를 뒤집어썼어도 고스란히 다 묻었어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바람을 어떻게 견디죠?”
누가 봐도 작은 소녀의 언니뻘로 보이는 여인이 밉지 않게 불평하며 옷깃을 털어 댔다. 문평이 넌지시 건너다보니 그녀의 옷에 과연 먼지가 묻긴 묻었다. 하지만 유달리 흙바람이 강한 신강 땅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저 옷에는 먼지가 묻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눈처럼 새하얀 백색 화복을 입었으면서 그래, 먼지 묻는 일이 없기를 바랐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차림으로 여행까지 하고 있으면서?’
“하하하. 신강이 유달리 척박한 땅이긴 하죠. 물도 사람도 풍부한 강서 땅과 어디 비교나 될까요? 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 지독한 황풍黃風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단단히 몸을 감싸고 다녀도 저녁에 들어가서 옷을 벗어보면 모래가 한 줌은 쏟아지더군요. 사내인 저조차도 날마다 수욕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여인의 몸이신 소저께서는 오죽하시겠습니까?”
“어머나. 말씀을 들으니 저도 수욕 생각이 간절하네요.”
“그러시겠지요. 미리 준비를 시켜 둘 터이니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수욕을 하시고 편히 쉬십시오. 이 신모가 모두 준비해 놓겠습니다.”
여인의 혼잣말에 남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점수를 따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깔깔 웃으며 언니를 놀렸다. 너무 귀염만 받아 버릇이 없어진 어린아이다운 태도였는데, 그렇게 짓궂게 굴어도 그리 밉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했다.
“언니는 좋겠네. 신 공자님이 저렇듯 지극정성이시니. 우리 언니 이러다 정말 서문표국西門鏢局의 안주인이 되는 거 아니야?”
“얘는. 버르장머리 없게.”
“뭐 어때서 그래 언니? 정검문正劍門과 서문표국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데.”
“향매 너까지?”
그들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정겹게 정담을 나눴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천마를 훔쳐보는 게 영 대화에 집중을 못 하는 눈치지만, 최소한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했다.
서문표국이라.
문평은 그들의 대화 중에 나온 표국의 이름을 알아듣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가 알고 있는 서문표국은 중원 삼대 표국 중에 하나로, 중원 전체는 물론이고 신강 땅에까지 지부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그와 혼담을 나누고 있다는 정검문도 성을 넘어서까지 알려진 문파인데, 전통적인 대문파가 없는 강서江西성에서 가장 큰 정도 문파로 강서성의 주인 노릇을 하는 자들이다.
‘서문표국의 소국주에 정검문주의 딸들이라.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배경이 센데.’
물론 그래 봤자 천마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괜히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충분히 귀찮아질 수 있는 배경들이다. 문평은 눈치를 보듯 흘끔 천마의 안색을 살폈다. 저렇게 크고 의식적인 목소리로 자신들의 출신 문파를 떠들어 대는 것은 이쪽을 좀 알아 달라는 수작이다. 단순히 말이라도 한번 붙여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겠지만, 문평이 보기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도발이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변덕스러운 천마가 아니던가. 그는 그저 저들의 말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저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문평은 그들이 더는 천마를 자극하지 않길 바랐다. 그들의 안위뿐만이 아니라 문평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다행히 천마는 아직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우아한 자태로 서봉주를 자작하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어 한둘씩 불이 켜지는 거리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그윽하고 깊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수에 잠겼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그의 모습은 그럴싸했다. 그의 알맹이를 아는 문평조차도 잠시간 시선이 멈출 정도였다.
“듣자 하니 오는 길에 옥기린 대협을 만나셨다고요?”
청의를 입고, 취옥으로 장식한 근사한 영웅건을 둘러 멋을 낸 사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일행 중 가장 잘생긴 사내였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치장이 남달랐다. 손가락에는 반지를 꼈고, 허리엔 패옥을 찼으며, 심지어는 등에 차고 있는 검집조차도 휘황찬란한 보석 검집이다. 그가 얼마나 치장에 신경 쓰고 있는지는 그것만 봐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예. 관도에서 우연히 만나 호북까지 동행했어요.”
“허어. 백 부인께서 위독하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복건성에서 움직이지 않으시던 옥기린 대협께서 북상까지 하시다니요.”
“정말 그러신가 봐요. 예전에 뵈었을 땐 참 밝고 많이 웃으시는 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안색도 어둡고 조용하시더군요. 시일만 촉박하지 않았다면 양번襄樊까지 따라가 노마님을 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백 부인께는 무림 전체가 빚을 졌는데, 후배의 도리로 가 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지금도 후회스러워요.”
큰 엄 소저가 염려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침중한 태도에 가볍게 입을 열었던 청의 청년이 어색한 얼굴이 됐다. 단순히 ‘우리는 옥기린 같은 사람하고도 안다’라는 의도로 말을 꺼냈던 모양인데, 본래의 의도와 달리 큰 엄 소저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선뜻 대응할 말을 찾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렇지요. 무림 전체는 그분께 큰 빚을 졌지요.”
멋들어진 얼굴과 달리 순발력은 그다지 좋지 못한 청의 청년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맞는 말입니다. 당년에 융중산에서 검협과 백 부인이 천마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정파가 이리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천하가 마교의 발아래서 신음하고, 그에 대항하는 순정한 젊은이들이 끝없이 피를 뿌려야 했을 겁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평온히 둘러앉아 정담을 나눌 수 있는 것도 다 그분들의 공덕입니다.”
청의 청년보다는 순발력이 좋은 듯한, 아니. 그보다는 그냥 그런 화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덩치 큰 청년이 뒤를 이어 맞장구친다.
곰 같은 체구에 우직한 인상이라 딱 봐도 힘깨나 쓰게 생긴 청년인데, 생김새만큼이나 미련한 소리를 입에 담고 있어 훔쳐 듣던 문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저, 저 미친놈들!’
문평은 호랑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것도 모자라 수염까지 뽑는 애송이들의 작태에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겁먹은 눈으로 천마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천마는 초연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들이 지척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오히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저게 뭣 하는 수작이야. 저놈들은 여기가 어디라는 걸 정말 모르나? 여긴 신강이라고, 신강! 마교가 주인이고 천마가 황제인 그런 땅이란 말이다!!’
3층에 앉아 있는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지 힐끔힐끔 그들을 돌아보았다. 소리나마 작았으면 또 모르겠는데, 유달리 목소리들이 커서 굳이 엿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는 3층 전체에 고스란히 들렸다.
“그래도 여긴 신강 땅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좀…….”
순발력은 없어도 눈치는 있는 편인 듯, 청의 청년이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미련한 곰은 고리눈을 뜨고 청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여기가 신강 땅이라는 게 뭐요? 혹여 마교도가 들을지 모르니 이런 말 따윈 하지 말라 그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목소리라도 좀 낮추자는 뜻인데…….”
“그게 그 뜻이지 뭡니까? 명색이 정파인이라는 자가 장소에 따라 말을 바꾸란 말입니까? 이 팽모, 절대로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설사 천마의 앞에서라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그게 정파고 그게 협俠 아닙니까?”
완고한 곰은 청의 청년이 아주 큰 불의를 저지르기라도 했다는 듯 분개해 말했다.
‘얘야. 넌 벌써 그러고 있는 중이란다.’
뉘 집 애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자기들 멋대로 천마의 별호를 부르고 있는 애송이들을 보며 문평은 지끈지끈한 편두통을 느꼈다.
“근데요, 전 전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어요. 백 부인이 돌아가시면 기린패는 누구의 것이 되는 건가요? 역시 옥기린 대협께서 물려받으시게 되는 건가요?”
자칫 잘못하면 험악하게 변질될 수도 있었을 분위기의 한중간을 철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가 커다란 눈을 순진하게 깜빡이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심히 맹랑한 질문에 당황한 듯 소녀의 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나무라는 눈길로 소녀를 바라보며 낮게 꾸짖었다.
“무쌍無雙아.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왜. 언니? 내가 뭐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친언니가 안색까지 바꾸며 꾸짖어도 소녀는 태평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왜 야단을 맞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하며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냥 궁금하다고 무림의 웃어른이 돌아가실 거라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니? 게다가 남의 물건의 행방을 왜 궁금해해? 기린패가 누구의 것이 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있지. 왜 없어? 나도 명색이 무림인인데! 기린패의 주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향후 무림의 향방이 바뀌는 거잖아. 다들 쉬쉬하면서도 궁금해한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나는 다만 그걸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스스로를 무림인으로 자처하는 그녀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천진하고 귀여운 어린아이일 뿐이다. 언니의 꾸짖음이 억울한 듯 볼을 잔뜩 부풀리는 모습을 보고 누가 그녀를 의젓한 어른이라 생각하겠는가.
‘아. 저 아이가 청조靑鳥 엄무쌍이군.’
문평은 맹랑하리만큼 겁이 없으면서도 애교를 놓치지 않는 태도를 보고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청조 엄무쌍은 정검문주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공언할 정도로 귀애하는 딸로, 그 언니인 백조白鳥 엄미란嚴美蘭과 함께 청백쌍조靑白雙鳥로 불리고 있는 어린 소저다.
자매가 같이 쓰는 별호에 동생의 이름이 먼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실제로 유명한 것은 언니보다는 동생 쪽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앞으로 대단한 미녀가 될 거라는 소문이 천하에 자자하기 때문이다.
직접 보니 과연 장래가 촉망되는 미인이긴 했다. 문제는 그녀가 그 장래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건데, 솔직히 말해 문평은 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녀와 그 일행이 무림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화약고 앞에서 불꽃놀이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엄 소저. 그저 궁금한 마음에 작은 소저가 실수를 한 것 같은데, 너무 혹독히 야단을 치시면 오히려 저희가 민망합니다.”
신 소국주가 은근슬쩍 끼어들어 두 사람을 말렸다. 남자는 미인에 약하다고 했던가. 신 소국주는 혼담은 언니 쪽 하고 진행된다면서 오히려 동생 편을 들었다.
신 소국주의 노골적인 두둔에 언니인 엄 소저의 얼굴이 살짝 언짢아졌다. 그녀의 정혼자나 다름없는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동생을 두둔하자 그만 속이 상했던 것이다.
자존심 강한 그녀는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곁에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는 문평의 눈에는 그 모습이 확연히 들어왔다.
“기린패는 아마 옥기린 대협에게 갈 것입니다. 작은 엄 소저. 그분이 아니면 감히 누구에게 패를 가질 자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기린패가 무림의 보물이라지만, 검협의 아드님이신 옥기린 대협에게서 그 패를 빼앗으려 들 만큼 염치없는 자는 없습니다.”
본인을 팽가라고 밝혔던 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직설적으로 뜻을 밝힌 것은 아니지만, 그 말도 두둔은 두둔이었다. 분명 무례한 구석이 있는 엄무쌍의 질문에 별다른 화도 내지 않고 재깍 대답하는 것을 보니, 겉으로는 무관심한 체해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한 번만이라도 직접 봤으면 좋겠어요. 기린패.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하던데.”
향매라는 이름으로 불린 황의黃衣의 여인이 살짝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미모는 엄씨 자매보다 떨어지지만 나른한 분위기가 특색이 있어 사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그들 일행 중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천마를 바라봤던 사람인데, 지금도 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말로는 기린패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눈으로는 천마를 지그시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쪽을 향해 살포시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자태는 충분히 매혹적이었으며, ‘무척이나 아름답다고’를 강하게 발음하여 그 말이 내포한 중의적인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노력은 무척 가상했지만, 불행히도 천마는 고자는 아니되 남색가였다. 천마는 그녀를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난 그냥 보기만 하는 건 별로예요. 할 수 있다면 한번 가져 보고 싶어요.”
엄무쌍은 이번에도 대담하고 당돌한 말을 했다. 엄미란이 질색을 했지만 주위 사람은 그냥 허허 웃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었는지 그녀는 다시 조그만 입술을 열어 조잘댔다. 주위 사람들이 지나치게 응석을 받아 주는 것이 어떻게 애를 망치는지를, 그녀는 마치 표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기린패가 무림의 보물인 건 천마 때문이죠? 천마가 그 패와 관련된 중요한 언약에 묶여 있어서, 패를 가진 사람의 소원을 뭐든지 들어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말이에요. 겨우 세 번밖에 쓸 수 없는 패라고는 하지만 아직 기회가 두 번이나 남았어요. 그걸 그냥 썩히는 건 아까운 일이죠.”
만약 문평의 손에 기린패가 있다면, 그는 소원했을 것이다. 제발 저 계집애의 입을 좀 닥치게 만들어 달라고.
“내가 만약 기린패의 주인이라면 말이죠, 천마에게 자진해 달라고 말하겠어요.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 거 아니에요? 만약 뜻대로 된다면 무림의 화근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거고, 거절을 당한다고 해도 그가 스스로 한 말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거죠. 천마와 같은 일대의 대종사에게 그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일이 그렇게 되면 과연 천마가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요? 어떻게 봐도 정파의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어요. 제가 검협이었다면, 융중지약을 맺는 게 아니라 자진을 원했을 거예요. 어째서 이런 좋은 생각을 아무도 못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옥기린 대협께 귀띔해 드려야 하는 걸까요?”
설상가상雪上加霜. 절체절명絶體絶命. 진퇴양난進退兩難. 사면초가四面楚歌……. 아, 또 뭐가 있지?
문평의 머릿속에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너는 이미 죽었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자성어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불안불안하다 했더니만 저 버릇없는 꼬맹이가 기어이 입으로 화를 자초했다. 자그맣게 튀는 불똥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아예 화약고에다 불을 지른 것이다.
천마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가 소녀의 망언을 들었다는 사실을 문평은 알 수 있었다. 천마의 얼굴은 무심했으나, 더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눈을 번득이며 입가에 시린 냉소를 머금었다.
“너, 꼬마 계집.”
천마가 술잔을 내려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꼬마 계집, 엄무쌍을 불렀다. 그리 큰소리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입을 열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심지어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그녀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그런 즉각적인 반응은, 그들이 얼마나 천마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나 다름없었다.
‘결국 성공을 하긴 했지. 저 사람의 관심을 끄는 데는 말이야. 근데 관심 중에는 부정적인 관심도 있는 법이거든.’
단지 철없고 입이 싸다는 죄밖에 없는 애송이들이다. 문평은 그들이 앞으로 당할 봉변이 안타까워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리 호감이 가는 아이들은 아니지만 재수에 옴이 붙어 천마 앞에서 그를 욕했다는 사실만큼은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평은 여태껏 살면서 쟤들처럼 운수 나쁜 애들은 처음 보았다.
“네?”
엄무쌍이 자기도 모르게 대꾸했다가 볼을 붉혔다. 상대가 ‘꼬마 계집’이라는 상스러운 호칭으로 불렀는데도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으니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천마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냉소적으로 물었다.
“검협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나?”
그녀는 머뭇머뭇했다. 천마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교가 무자비하게 감행한 중원 침공으로 인해 강호가 도탄에 빠졌을 때, 검협이 등장했다. 그는 호남에 이어 호북까지 밀고 올라온 마교를 저지하기 위해 융중산에서 천마와 대면했는데, 그때 그의 손에는 천마를 제어할 수 있는 기린패가 들려 있었다.
기실 융중산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기린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 검협은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기린패를 손에 넣었고, 그 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정의로운 검협과 그의 아내인 제갈희련은 기린패가 가진 세 번의 기회 중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해 천마를 만났고, 그에게 더 이상의 혈사를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이유로 기린패의 언약에 묶여 있던 천마는 하는 수 없이 그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기린패의 주인인 검협을 살해한 후 떠났다.
검협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천하가 다 알았다. 설사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물어도 알 법한 이야기인데, 소녀는 굳이 그 일을 아느냐고 묻는 연유를 알 수 없어 머뭇거렸다.
“아니. 다른 걸 묻지. 꼬마 계집, 너는 기린패가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나?”
여전히 냉정한 태도로 천마가 다시금 물었다. 소녀는 이번에도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당돌하긴 하지만 눈치가 빠른 그녀는 천마가 요구하는 답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상대가 던지는 질문이 자신에게 답을 듣기를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님도 알았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느냐 하는 점이다. 모욕감을 느낀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태어나서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다.
“기린패는 천마가 소원을 들어주는 패가 아니라 단지 천마를 세 번 불러낼 수 있는 패에 불과하다. 자기 쪽에서 필요할 때 단 세 번, 그를 불러내어 얼굴을 볼 수 있는 게 효능의 전부란 말이지. 더군다나 그 기회를 이용한 사람을 살려서 돌려보낸다는 장담도 없다. 검협이 당한 일이 바로 그 증거지.”
천마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천천히 일어나는 천마에게로 향했다. 앉아 있을 때도 큰 줄은 알았지만, 서 있으니 남다른 키가 더욱 두드러졌다. 크지만 빈틈 하나 없이 날렵한 체구에 깎은 듯이 수려한 얼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엄청난 미남이었지만, 그의 깊은 눈매를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원을 들어주지.”
사내의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그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멍한 얼굴로 천마를 바라보고 있던 엄무쌍의 무릎에 뭔가가 툭 떨어졌다.
천마의 존재감에 위압당하는 바람에 자신에게 뭐가 날라 오는지도 몰랐던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무릎 위를 바라보았다.
천마가 소녀의 무릎 위에 떨어트린 것은 그가 달고 있던 패옥의 일부분인 형아衡牙였다.
형아는 패옥의 장식 부분인 형옥 사이에 달아 패옥들이 부딪칠 때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하는 옥으로, 부딪치는 일이 많아 쉬이 닳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천마가 던진 형아는 표면에 정교한 천녀문天女文이 새겨져 있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진귀한 장신구였다.
“이제부터 그건 형아패衡牙佩다. 단지 일각 동안이기는 하지만, 내게 무엇이든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있는 효능이 있다. 자. 소원을 말해 봐라. 내가 무엇을 이뤄줄까?”
어리둥절한 소녀는 천마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천마의 기세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일행 중 하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서문표국의 소국주가 천마의 방자함이 거슬린 듯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닷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장. 형장은 대체 누구이기에 이리도 무례히 행동하시는 겁니까?”
눈앞에 선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신 소국주는 당당하게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팽가 성을 가진 사내도 덩달아 인상을 썼고, 초조한 표정의 청의 청년은 안절부절못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들을 오연히 내려다보며 천마가 웃었다. 그의 수려한 입매에 그림 같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나는 천마라 한다.”
“……네?”
“그러니, 소원을 말해라 꼬마 계집. 나는 네가 스스로 했던 말을 지킬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하구나.”
잠시 동안, 천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소녀의 얼굴이 서서히 질려갔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일행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했다. 천마에게 끊임없이 눈웃음을 치던 황의 여인도, 천마의 앞에서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던 팽가의 자식도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천마의 돌발적인 선언에 찬물을 끼얹은 듯 3층 전체가 고요해졌다. 선뜻 믿기지 않는 선언이었으나, 아무도 그가 거짓을 말한다고는 여기지 못했다. 천마 자신이 내보이는 압도적인 존재감도 존재감이지만, 감히 천마를 참칭僭稱할 만큼 간담이 큰 자는 천하에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일찌감치 따라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석문평은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홀로 한숨을 쉬었다.
“방금 말했듯이 네게 주어진 시각은 일각뿐이다.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다.”
천마의 침착한 충고에 소녀의 창백한 입술이 덜덜 떨렸다. 단지 입술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같이 떨렸다. 떨리는 손끝에서 형아가 굴러떨어졌다. 구슬처럼 둥글게 깎은 옥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다.
그녀는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벙긋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는 소녀의 모습은 보기에 심히 애처로웠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천마의 시선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살려 주십시오. 천마님. 살려 주십시오!”
아무 말도 못 하는 소녀를 대신해 나선 것은 그녀의 언니, 엄미란이었다. 엄무쌍 본인도, 엄무쌍을 추종하던 남자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홀로 나선 그녀는 두려움에 질린 새파란 얼굴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간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너무 귀하게만 자라 세상을 모르고, 아직 어려 철도 없습니다.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이런 일 두 번 다시 없도록 단단히 교육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절을 하며 부르짖었다. 언니의 울부짖음에 그제야 실감이 나는지, 소녀의 흙빛 얼굴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울었다.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아마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울음을 참느라 할딱할딱한 거친 숨소리가 어린 새의 그것처럼 연약하게 흘러나왔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천마는 가만히 손을 휘저었다. 그의 가벼운 손짓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던 형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천마는 그 구슬을 다시 소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옥은 깃털처럼 부드럽게 내려앉았으나 구슬이 무릎에 닿자 소녀는 경기를 일으켰다. 그녀는 무릎 위에 자신을 내리누르는 형구라도 있는 것처럼 허리를 뒤로 빼며 피하려는 몸짓을 보였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 너 스스로가 할 수 있다고 공언했던 그 한 마디만. 그 말을 하면 네게도, 네 일행에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너는 네 말을 지키게 되겠지.”
밀어蜜語라도 나누듯 감미로운 목소리가 소녀를 유혹했다.
‘네가 하겠다는 말을 해봐라. 그러면 너도 살고 네 언니도 살 것이다. 너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네 일행도 목숨을 건지겠지. 그뿐이겠느냐? 세 치 혀 하나로 천마를 물리쳤으니 전설이 되고 영웅이 되겠지.’
빙그레 웃고 있는 천마의 얼굴은 그런 뜻을 여지없이 알렸다. 엄무쌍이 자진하라고 말하면 정말로 자진해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도 소녀는 여전히 말을 못 했다. 소녀뿐만 아니라 소녀와 자리를 같이한 일행들도 다 똑같았다.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그들은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굴릴 뿐, 언감생심 천마에게 자진하란 명을 내리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천마님.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아니. 한 사람은 입을 열었다. 경각에 달한 여동생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무릎이 닳도록 절하며 비는 엄미란만이 그들 일행 중 유일하게 용서를 빌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천마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딱딱 이가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소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어붙어 가면서도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무감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천마는, 마침내 약속했던 일각이 지나자 싸늘히 웃으며 형아를 거둬들였다.
“너는 지키지 못할 말을 하고, 꼭 해야만 하는 말은 끝내 못 하니 입이 필요 없구나. 오늘은 운이 좋았다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내 너를 위해서라도 한 가지 일을 해주고 가겠다. 형아패의 첫 주인이 되어 주었으니 그 정도 호의는 보이는 것이 옳겠지.”
말을 마친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무쌍은 천마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뒤로 넘어가 정신을 잃었다.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진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꽤 세게 머리를 부딪쳤지만, 그녀는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무쌍아!”
깜짝 놀란 엄미란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소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를 확인하려고 미친 듯이 소녀의 몸을 더듬던 그녀는, 자신의 경지로는 뭐가 잘못됐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자 젖은 눈을 하고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주, 죽이셨나요? 이 아이의 목숨을 거둬 가신 건가요?”
그녀는 비통하게 울며 물었다.
“설마. 아무리 고약한 소리를 들었다 한들 저런 어린아이에게 직접 손을 쓸까. 다만 그 아이에게 필요 없는 것 한 가지를 거둬 갔을 뿐이니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직접 손을 써놓고도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한 표정을 한 천마가 한가로운 태도로 말했다. 엄미란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자신들이 한 실수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아무 소리도 못 하고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일행이 그녀들을 잡아끌었다. 혹여나 입을 열었다 천마의 시선을 끌까 두려운 듯, 입은 꾹 다물고 그저 옷깃을 잡아끄는 것만으로 의사 표현을 한다.
여동생을 끌어안고 울던 엄미란은 그들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한 그들의 모습은 몹시도 침울했다.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들은 이대로 약강현을 떠나지 싶었다.
천마는, 한 소녀를 거의 죽을 만큼 겁에 질리게 하고, 그녀에게서 알지 못할 무언가를 빼앗아 놓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무심한 얼굴로 몸을 돌려 문평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손에 들고 있던 형아를 문평에게 던져 주었다.
문평은 그가 던져 준 형아를 본능적으로 받아 들었다. 잠시간 형아패라는 이름을 가졌던 옥은 다시 봐도 귀한 물건이었으나, 문평은 손안에 독두꺼비라도 쥔 듯한 기분이 들어 내심 흠칫했다.
“식사는 다 했나?”
천마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그렇게 물었다. 아직 배가 찬 것은 아니지만, 천마가 벌인 일을 보고 놀라 식욕이 뚝 떨어진 문평은 그의 질문을 긍정했다.
“예. 교주님.”
“그럼 방으로 들어가지. 피곤하다.”
냉담하게 말한 천마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가자니 가야지 별수 있나. 문평도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천마가 잡아 둔 숙소는 호화객잔의 뒤편에 따로 마련된 별채로 매우 호화로운 장소였다. 뇌정전만큼은 당연히 아니지만, 일개 객잔의 별채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공들여 꾸며놓은 곳이다.
하지만 문평은 별채를 차분히 둘러볼 여력도 없었다. 별채의 문을 들어서자마자 멱살을 움켜잡혔고, 무슨 일인지 채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입술을 빼앗겼다.
천마가 성난 짐승처럼 낮게 목을 울리며 문평의 입 안을 훔쳤다. 입맞춤을 하는 것인지 입 안을 깨물고 헤집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입맞춤이었다.
‘허, 헉. 까먹고 있었다!’
문평은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저도 모르게 밀어내던 양 손목이 갈퀴 같은 손에 잡혔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세게 벽에 밀쳐진 문평은, 그대로 벽에 짓눌린 채 폭풍우 같은 애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맞다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라는 생각이 뒤늦게 깜빡였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천마의 애무는 지나치게 거칠었다. 예전 욕실에서의 그것과 비교해서도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환상 속의 그보다도 더욱 거칠고 난폭했다. 보드라운 입술을 날카로운 이로 물어뜯듯 씹는가 하면, 사포를 문지르는 것처럼 성마른 손길로 등허리를 문질러 댔다. 사람들이 거지로 알았을 정도로 먼지를 뒤집어쓴 데다 아직 씻지도 못했는데, 거침없이 몸을 헤집는 천마는 위생 따윈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앗. 아파!’
문평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대련 상대로 쓰는 거라고 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것이다.
‘제법 잘한다더니? 환상 속의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울부짖게 해줄 거라더니?’
잘난 척이란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이 꼴이었다.
“교, 교주님. 잠시만…….”
천마는 찢어 버릴 듯 거칠게 문평의 어깨에서 흑의 무복을 벗겼다. 바지는 벌써 무릎 밑에까지 내려가 있었다. 맨땅에 쓸려 딱지가 앉은 뒷목이 다시금 벽에 문대졌다.
천마는 거칠게 문평의 허벅지를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려 자기 허리에 감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세가 위태로웠던 문평은 휘청하며 천마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천마의 거대한 흉기가 엉덩이 근처에서 꺼떡거렸다. 설마, 라고 생각했지만 흉하기 그지없는 자세가 점점 갖춰지는 걸 보니 이대로 그냥 꿰뚫을 모양이다.
‘이 사람이 진짜 누굴 죽이려고! 이대로 넣으면 나 진짜 찢어져! 말년에 기저귀 차고 다녀야 한다고!’
남색을 해 본 경험은 없지만 병영에서 자라 어느 정도의 상식은 있었던 문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열었다.
“교주님, 안 됩니다!!”
더는 참지 못한 문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숱하게 생각만 했지, 단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낸 적 없었던 거부를 드디어 입 밖으로 토해 낸 것이다.
문평의 비명이 워낙에 절절했기에, 천마도 반응을 보였다. 피라도 봐야 속이 시원할 것처럼 문평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있던 그가 짜증 어린 눈빛으로 문평을 바라보았다.
“뭐지?”
문평은 이유를 묻는 천마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를 밀어냈다. 많이 밀어낸 것은 아니고, 그저 살짝. 두 사람이 눈을 마주 볼 만큼만 말이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았는지 천마도 버티지 않았다. 그는 문평이 의도한 대로 순순히 문평과 눈을 맞췄다.
문평은 천마와 시선을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눈 속 깊은 곳이 이글거렸다. 단순히 욕망만으로는 볼 수가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얼음처럼 투명한 눈동자 뒤에서 들끓고 있었다.
‘뭐야. 뭐에 저렇게 화가 난 거야?’
자신이 보리라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더 어둡고 음울한 눈동자를 발견하게 된 문평은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 불타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어둠 속에서 맹수와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등덜미로 전율이 흘렀다.
“교주님.”
아무리 그래도 내 코가 석 자. 천마의 알지 못할 사정보단 자기 사정이 더 급한 문평은 마른침을 삼키며 교주를 불렀다.
“말해 봐라. 무엇이냐?”
허튼소리를 하는 거면 뼈도 안 남기고 다 씹어 먹겠다는 어투로 천마가 으르렁거렸다. 문평은 다시금 흠칫했지만, 천마의 반응에 일일이 쫄았다간 기저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임을 떠올리곤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왕 당하는 거라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당해야지.’
문평은 하룻밤 정사에 신세를 망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모두 끌어모아 어렵게 입을 열었다.
“교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절 울부짖게 해주시겠다고요.”
이딴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건방지다고 그냥 목을 치면 어쩌지? 문평은 번다한 근심에 얼굴 근육이 굳는 걸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천마의 시선이 어이없다는 듯 변했지만, 그것도 개의치 않았다.
“환상 속에서 당했던 것과는 다르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제 오해를 바로잡아 주겠다고도 하셨고요. 아닙니까?”
입으로는 당돌한 말을 하고, 눈으로는 천마의 시선을 직시한다.
‘왜 이래. 나 꿀리는 거 없어.’
꿋꿋하게 들고 있느라 목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문평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천마의 격렬하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의 반듯한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접혔다.
“그래서?”
“그런데 지금 하시는 태도로 봐서는, 앞으로도 교주님을 계속 오해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물자 없기로 유명한 병영에서도 남색을 하는 상대의 엉덩이에 기름 정도는 발라 준다. 국에서 남긴 돼지기름일 때도 있고, 콩기름 남긴 것을 얻어 올 때도 있고, 하다못해 등잔 기름을 쓸 때도 있지만, 그래도 기름은 기름이다.
“하. 맹랑하군.”
부들부들 떨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목이 메는 와중에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 잠자코 듣고 있던 천마는, 늘 겁에 질려 고개도 못 들던 놈이 던진 당돌한 도발에 어이없이 웃었다. 꼬마 계집 때문에 극도로 더러워졌던 기분인데도 불구하고 놈을 보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제 주제에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저런 말이 다 나올까? 감히 저놈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던 반응인지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제대로 울부짖게 해 달라 그 말이냐? 약속을 지켜 달라?”
“본인께서 직접 하신 말씀 아닙니까. 스스로가 하신 말씀은 지키는 분이신 줄 알았는데요.”
“아니. 잘못 봤다.”
“……네?”
“난 내가 지키고 싶은 말만 지킨다. 아까의 꼬마 계집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던데 너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더냐?”
천마는 가볍게 쥐어박는 듯한 어조로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말은 신랄하게 하고 있어도 눈빛은 차분했다. 문평이 보인 의외의 반응에 불꽃처럼 치밀던 격렬한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덕분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저 화풀이 삼아 문평을 범할 생각이었던 그였지만, 상대가 저렇게 나오는 이상 조금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었다. 기분은 아직도 매우 더럽지만, 기분을 푸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에게도 싫어하는 상대를 억지로 겁간하는 취미는 없었다.
‘내가 조금 심하긴 심했나 보군.’
천마는 은근슬쩍 눈을 굴려 문평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녀석을 껴안고 뒹군 것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문평에게 남은 흔적들은 만만치 않았다.
사정없이 깨물려 벌겋게 부풀고 있는 젖꼭지가 아파 보였다. 팔은 꼬집힌 것처럼 점점이 멍들어 있었고, 목덜미며 어깨며 이가 닿은 곳은 닥치는 대로 깨물었던 듯 잇자국이 난잡했다. 입술도 터져서 피가 맺혀 있었다. 정사를 치르던 중이 아니라 매를 맞던 중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다.
‘안 지키실 겁니까?’
문평은 겁먹은 눈초리를 하고도 끝까지 천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지만 원망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정녕 그냥 하실 건가요? 문평은 눈으로 묻고 있었다.
겁도 많은 게 웃기지도 않았다. 뒤에서는 구시렁거려도 앞에선 시선조차 못 마주치던 게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정말 각오를 단단히 하기는 한 모양이다.
천마는 일이 정말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넌 어떤 것을 좋아하지?”
천마는 문평에게서 몸을 떼어 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자신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다리도 내려 주고, 항문에 막무가내로 집어넣으려던 성기도 뒤로 물렸다. 겨우 반쯤 발기한 것을 집어넣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 일개 생리 현상에 연연해할 만큼 젊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천마가 짓누르던 몸을 뒤로 물리고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하자, 도박처럼 말을 던졌던 문평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범한 사내의 얼굴, 솔직히 말해 별로 볼 것 없는 얼굴이긴 하지만 표정이 풍부한 눈만큼은 제법 봐 줄 만하다.
천마는 기꺼운 기분으로 그 눈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자기 속내를 저렇게 곧이곧대로 내보이는 인간을 만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심은?”
“네가 즐기는 방식이 있을 게 아닌가. 내 방식대로 하면 나야 좋겠지만, 너까지 즐거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하는 걸 좋아하지? 여럿이서 하는 건 좋아하나? 서서 하는 게 좋아? 아니면 앉아서 하는 게? 성기와 고환 중 어느 부분을 더 느끼지? 고환 빨아 주는 것, 좋아해?”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면전에서 쏟아져 내렸다.
‘뭐, 뭐, 뭐를 어쩐다고요?’
천마의 앞에서만은 언제나 머저리가 되어 버리고 마는 문평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심스럽게 버벅거렸다.
‘난감하게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지금 나더러 저 낯 뜨거운 질문에 대답하라는 건가?’
언제나 사람이 대답 못 할 몹쓸 것만 물어보는 천마에게 문평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천마의 질문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체위는 어떤 걸 좋아하나? 호보虎步? 어접린魚接鱗? 학교경鶴交頸? 봉상鳳翔? 원박猿搏? 장소는 어떤 데서 하는 걸 좋아하지? 침상 위? 탁자 위? 바닥? 물속? 아니면 서서 하는 걸 좋아하나? 청간은 어때? 혹시 구경꾼이 있는 편이 더 회가 동하는 편인가?”
이야기를 들으니 공포감이 일었다. 어떤 공포감이냐 하면, 천마가 늘어놓은 숱한 방법들을 몸소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다. 문평의 취향이 궁금하다면서 외려 자신의 취향을 늘어놓은 천마는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회가 동한 듯 보였다.
그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사내에게 당할 생각이 없었던 문평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딱 한 번,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
문평은 세뇌하듯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설마 저런 꼴을 다 당할 리가 있나. 천마가 그때까지 날 기억하기나 하겠어? 당장 내일부터 내 이름을 까먹는다고 해도 하나도 놀랍지 않을 텐데.’
그저 세뇌만으로는 안심이 안 돼서, 그럴듯한 이유까지 붙여 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드럽게 하는 걸 좋아합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수치심이 들었지만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게다가 영 거짓말인 것도 아닌 게, 문평은 여유롭게 시간을 들인 느긋한 정사를 좋아했다. 비록 팍팍한 팔자 탓에 경험은 별로 없지만, 그럴 때도 하룻밤에 두 번 이상의 정사는 벌인 적이 없을 정도로 느긋하게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깨끗하게 씻은 후, 침상 위에서, 아프지 않게 하는 겁니다.”
“소박하군.”
너한테는 소박할지 몰라도 나는 절실하다. 문평은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 어린 얼굴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가 희미하게 웃으며 문평에게 손짓했다. 잘생긴 얼굴 위로 물결치듯 천천히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기에는 좋았지만,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웃음을 짓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불안했다.
“이리 와.”
그의 부름에 머뭇머뭇 앞으로 걸어 나왔다.
“좀 더 가까이 와.”
그가 시키는 대로 가까이 다가갔더니 팔목이 붙잡혔다. 상체가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몸이 기울었다. 반대편 손으로 천마가 뒤통수를 감싸 온다. 뜨거운 숨결이 귓전에 닿았다. 그는 젖은 혀로 맛을 보듯 귓바퀴를 핥고, 이 끝으로 지그시 귓불을 물었다가 놓았다.
“지금 당장 구음口淫을 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범해 주지.”
천마는 나른하게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진하다 못해 향기가 날 것 같은 미소가 그 입술 위를 축축이 적셨다.
“선택은 네게 달렸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당하든지, 아니면 구음을 해주고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든지.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마.”
천마는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문평에게 그것은 종용이었다. 천마가 원하는 방식이 겁간이나 다름없음을 아는데, 그걸 선택할 미친놈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문평은 뒤통수에 와 닿는 손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뜨겁고, 무거운. 마치 낙인을 찍기 위해 달구어진 인두와 같은 손. 힘을 주어 끌어당기는 것은 아니지만 문평은 거부할 수 없는 인력을 느꼈다.
거절하면 진짜로 거칠게 당하고 말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아무런 배려도 없이, 인간이 아니라 장난감 인형처럼. 반면에 구음을 해주면 그보단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여전히 인간답게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몸이 상하지는 않을 터.
문평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문평의 고개가 기울어짐에 따라 뒤통수에 닿아 있던 손이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까슬까슬하게 껍질이 까진 뒷덜미에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빌어먹을. 나지막하게 입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문평은 질끈 눈을 감으며 입을 벌렸다.
***
아직도 입 안이 얼얼했다.
예전에도 경험한 적 있지만, 천마의 성기는 과연 대단한 물건이다. 천마天魔가 아니라 천마天馬라도 되는 양, 거의 말만 한 크기의 성기는 지속력도 강하고 힘도 세서 문평을 무척이나 애먹였다.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반도 채 안 들어가는 데다, 제멋대로 요동쳐서 입천장까지 얼얼하게 만들었으니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었음에도 문평은 지옥을 맛보았다. 오죽하면 구음을 해준 게 아니라 당한 거라는 기분이 들겠는가. 잘못하면 뒷구멍 대신 목구멍이 찢어질 뻔했다.
그러나 문평이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성기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뿜어낸 정액이었다.
미끈미끈하고 미적지근했던 그것. 혀 위에 달라붙을 듯 머물렀다가 힘겹게 몇 번을 삼켜야만 겨우 목을 넘어갔던 그것은 문평이 이제껏 맛본 것 중에 가장 끔찍한 식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걸 마시고 났더니 입 안에서 풋내가 났다. 물로 몇 번을 헹궈 내고, 소금으로 이를 닦아도 정액 특유의 비릿한 풋내는 도통 가시지 않았다. 아직도 정액이 혀에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직접 손가락을 넣어 혀를 문대기도 해봤던 문평은 백방이 무효함을 알고 그냥 손을 들고 말았다.
차르륵. 차르륵.
그런 고생 덕분에 문평은 수욕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문평의 머리에서 모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천마가 수욕 시간을 허락한 것이다.
점소이를 불러 나무통에 물을 채우고, 피곤에 지친 몸을 담그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머리를 감고, 세수도 했고, 몸도 닦았으니 이제는 침실로 돌아가야 할 테지만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종일 혹사당한 근육이 온수의 힘을 빌려 나긋나긋 풀어지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은 움직일 때마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찰랑거렸고, 수욕물에 푼 사향은 아득한 정신을 부드럽게 일깨워 주었다. 차라리 이대로 딱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웠다.
‘아니. 딱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있지. 벽 너머의 말 한 마리.’
문평은 나무통의 가장자리에 뒤통수를 기댄 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와 협상을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생애 최고 승률의 도박에 성공한 셈이지만 정작 따버린 판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평은 모든 것을 도로 무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아. 진짜 나가기 싫다. 이런 걸 두고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하나? 나는 화장실에서 아예 나가기가 싫으니 그조차도 해당이 안 될 것 같은데.’
나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안 나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진짜로 나가기가 싫어서, 마냥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미적거렸나 보다. 문평은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천마가 욕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 씻었습니다. 조금만 더 있다 나가려고 했는데요.”
문평은 자기가 들어도 믿지 않을 변명을 주워섬기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마는 문평의 젖은 어깨 위에 마른 천을 둘러 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알아.”
‘혼자서는 절대로 안 나왔겠지.’
천마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먹음직스러운 문평의 몸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그냥 그저 그랬지만, 언제 봐도 몸만큼은 딱 천마의 취향이다.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긴 다리. 날씬한 허리. 달리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엉덩이는 탄탄하게 올라붙었고, 팔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날렵한 근육이 붙었다. 험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여기저기에 흉진 데가 적지 않았지만, 천마의 눈에는 그마저도 보기 좋았다.
사내로 태어나 몸에 흉터 하나 없다면 그것은 헛산 인생이다. 사내에겐 싸움에서 얻은 흉터가 역사요, 훈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마는 환골탈태 이후 완벽히 사라져 버린 자기 몸의 흉터들이 무척 아쉬웠다. 유년기의 흉터들은 30대에 일어난 첫 번째 환골탈태 때문에 사라져 버렸고, 그 후 50여 년을 들여 겨우 다시 모아 놨더니 두 번째 환골탈태로 또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그의 몸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심지어는 점조차 없었다.
‘이 녀석은 여기에 점이 있었군. 귀여운데.’
핥듯이 자세한 눈으로 문평의 몸을 살피던 천마는 문평의 오른쪽 어깨, 그러니까 목덜미와 어깻죽지 사이의 어느 한 군데에 작은 점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보통 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한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지만, 우연찮게도 천마가 남겨 놓은 치열과 치열 사이 공백의 한중간에 위치하는 바람에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천마는 그 자리에 작게 입을 맞추며, 들고 왔던 마른 천을 문평의 젖은 몸에 둘렀다.
문평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벗은 어깨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진짜로 정직한 몸이란 말이야. 자기가 느끼는 걸 있는 대로 고스란히 표현하고.’
‘잘 느낀다’와는 확연히 다른 의미로, 솔직하기 그지없는 몸이다. 내심 만족감을 느낀 천마는 빙긋 웃으며 문평을 안아 올렸다.
엉거주춤 서 있다가 천마의 품에 신부처럼 안기게 된 문평은 당황하며 천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른 천을 두르긴 했어도 젖은 몸을 닦은 것이 아닌지라 천마의 몸에까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천마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문평을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제가 걸어갈 수 있습니다. 교주님.”
천마의 품에 안긴 게 민망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끌려가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드는 건지. 품에 안긴 문평이 뒤늦게 버둥거리며 자기 발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안 왔잖아. 약속해 놓고.
천마는 발버둥 치는 문평을 내려다보며 나른히 미소 지었다.
‘한번 놓친 기회는 절대로 안 돌아오는 거야. 아직도 그걸 모르나?’
“부드럽게 당하게 해달라고 해서 부드럽게 해주는데, 왜? 이것도 불만스러운가?”
너그러운 어투로 이야기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말 속에 담긴 뼈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문평은 말뜻을 재깍 알아듣고 발버둥 치던 것을 멈추었다. 천마는 그 모습에 만족한 듯 가늘게 눈시울을 접었다.
문평은 천마에게 안긴 채로 침실로 이동했다. 침실에 도착해서도 천마는 그를 내려 주지 않았다.
천마는 문평을 안은 그대로 침상으로 직행했다. 젖은 몸을 닦지도 않았는데 비단 금침 위에 눕히는 천마의 행동에, 당황한 문평은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천마는 그런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봉밀蜂蜜처럼 달콤한 음성이 그 뒤를 따랐다.
“그냥 누워 있어. 움직이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어조로 하는 명령이긴 했으나, 명령은 명령이다. 이번에도 문평은 말을 참 잘 들었다.
문평은 천마가 자신의 다리를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손에 마른 천을 든 천마가 어깨에 문평의 다리를 올려놓고, 느릿하고 나른한 손길로 물기를 닦아 내렸다. 처음엔 흰색의 마른 천이라서 흔히 쓰는 면사綿絲인 줄 알았다가, 다리에 와 닿는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고서야 그것이 견사絹紗임을 알았다.
귀한 직물이 문평의 거친 다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또 한 번 보드라운 물로 다리를 씻어 내는 듯한 느낌인데, 그 느낌이 지나고 나니 보송보송하게 물기가 말랐다. 천마는 꼼꼼하면서도 느릿하게 물기를 닦아 내며 어깨 위에 올라온 발목에 중간중간 입을 맞췄다.
복숭아뼈와 발목 사이의 오목한 부분에 천마의 입술이 닿았다. 살짝 문지르고, 이 끝으로 은근히 물었다 놓는다. 발끝에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좇아와 엉덩이골 사이로 파고들었다.
움찔 다리를 움츠렸던 문평은, 오금을 부드럽게 쓸어 내며 다리를 펴게 하는 천마 때문에 허리를 뒤틀었다. 명확한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은근한 손놀림이 간지러우면서도 짜릿했다.
‘무슨…….’
별거 아닌 동작에도 일일이 감각이 느껴졌다. 오른 다리를 닦고 나자 왼 다리 차례가 됐다. 천과 천마의 손길 중 무엇이 비단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천마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움찔움찔. 천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 끝이 오므라들었다.
믿을 수 없게도 몸 안쪽에서 은근한 열기가 지펴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일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뜨거웠다. 문평은 혼란하게 주위를 살폈다.
‘이게 뭐지? 뭐야 이건!’
천마의 손길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문평은, 예상외의 감각들이 몸 안을 일깨우자 당황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여인을 끌어안고 애무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들이 그의 피부 위를 가로질렀다.
천마의 손길이 지날 때마다 난생처음 느끼는 새로운 감각들이 씨앗처럼 흩뿌려지고, 그 감각들은 다시 깊은 뿌리를 내리며 그의 몸을 잠식했다.
젖은 견사는 버려지고 새로운 견사가 몸 위를 훑었다. 깃털인 양, 온수인 양, 물기를 닦아 낸 자리 위로 감미롭게 천마의 입술이 와 닿는다. 천마의 입술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조금 전에 문평의 입술을 물어뜯고 피를 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온전히 풍요로웠다.
천마는 문평의 홀쭉한 아랫배를 이로 슬쩍 물었고, 두드러진 장골을 혀로 핥았다. 할짝할짝. 습기를 머금은 피부 위로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윽.”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려던 문평이 성대를 울렸다. 벌린 다리 사이로 묵직한 사내의 체중이 올라왔다. 끔찍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천마가 뿌린 씨앗이 조금씩 발아하기 시작한 몸은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감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금씩 피부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아래로 발그스름한 홍조가 피어났다. 뜨겁게 꿈틀대는 천마의 성기가 문평의 성기를 애무하듯 비빈다. 천마도 인간이고 문평도 인간이니 서로의 체온이 엇비슷할 텐데도, 천마의 성기는 데일 듯이 뜨거웠다.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음모를 쓰다듬었다. 문지르듯 음모를 쓸어내린 메마른 손이 성기를 가볍게 잡았다. 천마의 손은 건조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무인의 손이라면 굳은살이 박이는 것이 마땅한데도, 천마의 손은 딱딱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흡사 피부 위에 견사를 한 겹 덧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균형 잡힌 모양으로 섬세하게 뻗은 손가락이 그의 성기를 능란히 어루만졌다. 단순히 ‘훑는다’라는 표현으로는 미처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애무. 남자의 약한 곳을 골고루 자극해 대는 그 손길에 문평의 성기는 빳빳이 일어서고 말았다.
“아윽. 앗.”
문평은 성기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애무에 밭은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신음을 참기 위해 척척해진 비단 이불을 그러잡으려고 애썼지만, 매끄러운 이불은 손아귀에 잘 잡히지 않았다.
천마의 다른 손이 고환을 움켜쥐었다. 두 개의 구슬을 서로 비비듯 가볍게 쓸고, 주머니 밑의 예민한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 내린다. 배 속 깊은 곳까지 짜릿한 감각이 느껴져 허리를 뒤틀었다. 비단으로 고환을 감싸고 쥐어짜는 것만 같은 오묘한 느낌. 아찔하리만큼 관능적이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문평은 자신의 심장이 어떤 의미로 뛰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예전처럼 단지 두렵기에 뛰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 그가 천마에게 받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던 어떤 것 때문에, 그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쓸 만한 물건이군. 크기도 적당하고, 알도 실하고. 이걸 가지고 그동안 재미있게 놀았겠지?”
천마의 젖은 입술이 문평의 귀를 뒤덮었다. 말랑말랑한 귓불을 가지고 놀듯이 깨물면서, 천마는 우아한 목소리로 음란한 말을 속삭였다.
“여인들에게 이걸 집어넣으면 기분이 어떻던가?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꽉 조이는 그때의 느낌말이야. 성기를 젖은 음문이 감싸고 조였다 풀었다 하는 느낌. 상상만 해도 근사하지? 상대의 몸 안에서 꿈틀대는 자기 성기를 느끼는 것만큼 근사한 일은 달리 없을 거야. 상대를 완전히 지배하는 느낌. 그 완전한 정복감이라니.”
천마의 손이 고환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회음부와 그 밑의 항문. 작은 꽃처럼 주름진 입구 끝을 손톱으로 슬쩍 긁은 천마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움찔 허리를 떤 문평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더 깊게 감았다.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너는 모르겠지. 너 같이 단련된 몸을 가진 사내들은 말이지, 거기를 조이는 힘이 강해. 근육이 단련되어서 가끔은 아프기까지 할 정도야. 하지만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야.”
쉴 새 없이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도, 천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원치 않은 쾌감이 몸을 지배했다. 이를 악물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써 봤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쾌감은 악몽처럼 끊임없이 찾아왔다.
“너희 같은 남자들은 말이야, 몸이 깨질 때 정신이 같이 깨져 버려. 처음 몸을 열면, 너희들은 말도 못 하게 깊은 충격을 받지. 자신이 열릴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해봤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야. 그럼 일이 얼마나 근사해지는지 아나?
그때부터 그들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지. 평소 굳건히 지켜 왔던 자부심과 자존감도 잊어버리고,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게 같은 남자라는 사실도 잊어버리지. 오로지 구멍. 자신에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구멍에만 온 감각을 쏟는 거야. 그 안에 다른 남자의 성기가 드나들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되뇌면서.”
천마는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깨질 것 같은 말을 하며 문평의 항문을 문질렀다. 말로는 엉덩이를 사정없이 헤집고 들어가 그의 정신을 깨버릴 것처럼 하면서도, 항문을 매만지는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어느새 향유를 꺼내 기름을 발랐는지, 미끈거리는 손가락이 문평의 몸 안으로 침투했다.
문평은 양쪽으로 크게 다리를 벌린 채, 자신의 몸 안을 지분거리며 스며드는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좁디좁은 내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골고루 기름을 묻힌다. 그의 손가락이 지날 때마다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익숙지 않은 내벽이 진저리를 쳤다.
한 개. 두 개. 세 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손가락은 어김없이 개수를 늘려 갔다. 그럴 때마다 떨리는 문평의 입술은, 천마의 입술이 덮었다.
손가락으로는 항문을 농락하고 혀로는 입술을 농락했다. 아래위 두 개의 입이 모두 공격당한 문평은 낯선 쾌락에 정신이 없어, 자신의 성기가 빳빳하게 일어서서 배를 두드리고 있단 사실도 몰랐다.
천마는 문평의 입에 입맞춤하며 그의 몸을 옆으로 돌렸다. 완전히 옆으로 돌린 게 아니라 비스듬하게. 왼쪽 다리는 바닥에 그대로 늘어트리고, 오른쪽 다리는 자신의 어깨에 걸도록 한 천마는 끈질기게 두드렸던 그의 몸 안으로 드디어 출입을 시작했다.
성기가 문평의 몸 안으로 들어온 것은 어느 한순간의 일이었다. 문평은 끊임없이 내부를 유린하는 손가락 때문에 처음에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지금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라 천마의 성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자각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한 성기가 뿌듯하게 몸속을 메웠다. 항문을 완전히 막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내벽은 한계까지 팽창되었고, 부드러운 내막은 핏줄이 뒤엉킨 거대한 기둥에 짓눌려 힘겹게 버둥댔다.
문평은 뱃속을 꿰뚫는 고통스러운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굽힌 손가락이 부드러운 비단 이불 위를 헛되이 긁고 지나갔다. 어디 하나 걸리는 곳 없이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이불 때문에 잡을 곳이 없었던 문평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뒤틀었다. 비스듬히 옆으로 누운 자세 덕분에 천마의 성기가 더욱 깊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공에 들린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뱃속이 완전히 꽉 들어찬 것 같았다. 내장이 직접 찔리는 감각에 헛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천마는 아직 덜 들어왔다는 듯이 그의 몸을 힘겹게 비집어 열었다.
문평은 자신의 몸 안에서 날뛰는 천마의 박동을 생생하게 느꼈다. 다리 사이에 심장이 하나 더 있는 듯한 생소한 감각. 뜨겁게 박동하는 그것이 꿈틀거리자 허리 전체가 흔들렸다.
“아앗. 아윽. 앗!”
움직임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저 천천히 문지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비벼지기만 하던 것이 서서히 출입으로 바뀌어 간다. 처음에는 그저 온건했다. 그러다가 점차 강약이 거세지고, 마침내는 그냥 쳐올리기만 하는 것처럼 빠르게 변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항문의 주름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문평은 자기 자신이 얇은 막이 되어 천마의 성기를 감싸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천마의 성기가 드나드는 내벽과 그 주위로만 쏠렸다.
내장이 들쑤셔지는 얼얼한 감각. 타인이 자신의 몸 안을 점령하고 있는 낯선 현실에 대한 공포심.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확 쏠렸다가, 다시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그 피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짜릿짜릿하고 따가운 그 어떤 것이. 피를 태우고, 살을 지지고. 그러고도 모자라 뼈까지 태우는 그런 감각이 그의 온몸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아악. 앗. 아악!!”
문평은 빠른 움직임으로 쳐대는 천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겪는 감각이 뱃속에서 부글거렸다. 아프고 힘들면서도, 심장이 떨렸다. 자기 자신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천마는 모든 것을 자기 의도하에 두고 완벽하게 통제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문평은 살이 발리고 뼈가 드러났다. 몸속에 들어와 있는 천마의 성기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만 같은 감각. 속절없이 예리한 그 감각에 문평은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이것이 정사가 아님을 알았다. 이것은 정사도 아니고, 교미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만찬에 불과했다. 석문평이라는 한 인간을 맛보는 천마만의 만찬.
그리고 문평은, 그 만찬에 초대되지 않았다.
***
확안경擴眼鏡을 통해 섬세한 내부를 훑었다. 종잇장만큼이나 얇게 누른 금속판이 톱니 모양으로 서로 맞물리며 정교한 구조를 형성한다. 모든 것이 절묘하게 계산된 오차 없이 완벽한 세상. 기호를 사용하지 않은 수식이다.
젓가락보다 얇은 집게로 작은 톱니 하나를 벗겨 낸다. 시계 안에 들어 있는 가장 작은 부품 중 하나인 톱니는 고작해야 크기가 손톱만 하다. 그만한 톱니 안에도 동그란 중심축이 들어 있다. 어린아이의 섬세한 손끝으로도 집어낼 수 없을 것같이 작고 얇은 축. 꼭 잠자리의 다리 같다.
곽진무는 심호흡을 했다. 저 중심축 하나를 빼내기 위해 벌써 이각 동안이나 고민했다. 머릿속으로 그려 낸 설계도에서 저 중심축의 기능은 중요했다. 어쩌면 시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품인지도 모른다. 저 작은 축대가 돌아감으로써 초秒가 시작되고, 그 초가 분分이 되고, 그게 다시 시時가 된다.
정밀하게 계산된 기하학적 각도와 산학의 결과로 시간을 알게 된다니, 산학이 세상을 구성한다고 믿는 곽진무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은 없다. 진무는 거기에서 정묘한 미美를 느꼈다. 형이상학적이고 정신적인 극미. 곽진무에겐 세상 어느 미인보다도 더 마음에 와닿는 아름다움이다.
“뭐 해요?”
막 집게로 축대를 끌어 내려던 참이었다. 신중하게, 귀한 시계를 망가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부품을 꺼내 놓으려던 참. 그때 갑작스레 우악스러운 손길이 닥쳤다.
곽진무는 느닷없이 어깨에 매달린 사람 때문에 하마터면 시계를 망가트릴 뻔했다. 삐끗하고 빗나간 집게가 다른 부품을 찔렀다.
곽진무는 깜짝 놀라 집게를 집어 던지고 허둥지둥 시계 안을 살폈다. 다행히 겉면에 흠집이 나긴 했어도 구조 자체는 무사하다. 곽진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뭘 또 그렇게 헤집어 놓고 있어요? 뭔데 그래요?”
호기심 많은 고개가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며 들어왔다. 곽진무는 서탁 위로 시계를 밀어 놓고 몸을 돌렸다. 확안경도 벗어 버렸다.
“깜짝이야. 사매. 인기척 좀 내라.”
하마터면 귀한 물건을 망가트릴 뻔한지라 곽진무는 대놓고 투덜거렸다. 하나 뻔뻔한 사매는 곽진무의 타박에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무인이라는 사람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상대가 인기척을 내길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먼저 알아채야지.”
“네가 수표보狩豹步를 사용해 기척도 없이 덮친 걸 모를 줄 알아?”
“어머, 그럼 정말 내 기척을 눈치 못 챘단 말이에요?”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놀랐겠어?”
“흐응. 그래요? 괜찮네. 수표보를 사용하면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단 말이지…….”
그녀는 묘하게 눈을 빛내며 혼잣말을 했다.
“잠깐만. 너 뭐 하려고 그래?”
장난기 다분하고 버릇없는 그녀에게 여러모로 심한 꼴을 당한 적이 많았던 곽진무는 미심쩍은 사매의 모습을 보고 덜컥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집중을 많이 하고 있을 때나 그렇다는 이야기지, 평소에도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니야. 나도 무인인데 설마하니 그러려고.”
뒤늦게 변명을 해보았지만 먹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새 잡아먹은 고양이처럼 흐응, 하고 또 한 번 콧소리를 낸 사매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그런지는 두고 보고요.”
두고 보자는 말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한데 어쩐 일이야? 벌써 상행에서 돌아왔어?”
마중사기의 막내인 초교연은 그동안 상행을 나가 있었다. 마룡쟁패를 끝낸 바로 다음 날 떠났으니 시일이 제법 된다.
한동안 교내에 시끄러울 일이 없어서 조용하고 참 좋았는데. 사형제 중 유독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말괄량이 사매에게 늘 휘둘리기만 하는 곽진무는 그녀의 상행이 생각 외로 빨리 끝났다는 사실에 내심 아쉬워하며 질문을 던졌다.
몸을 돌려 다탁 앞으로 간 초교연焦較蓮이 의자에 앉으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중간까지 따라가다가 돌아왔어요. 사막 바람이 너무 거칠어서.”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놀란 건 오히려 곽진무였다.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간신히 물었다.
“……네가 이번 상행의 행수 아니었니? 근데 너 혼자 돌아왔다고?”
“아이참. 문 총관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사실 상행에서 필요한 일은 문 총관이 다 하잖아요. 나야 뭐 겉으로 보기 좋으라고 세워 놓은 허수아비고.”
“그래도 사람이 책임감이라는 게,”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교의 직위를 맡아 놓고 그냥 내팽개쳤다는 이야기에 곽진무는 얼이 빠졌다. 아무래도 그냥 둬선 안 되겠다 싶어 충고하니 초교연은 제대로 다 듣지도 않고 말을 끊는다.
“책임감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이야긴데요, ……지금 사형이 만지작거리고 있던 거 ‘탁상시계’죠?”
“아, 응.”
“그거 나한테 구해 달라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난 상행까지 맡았었는데?”
생글생글. 귀엽게 웃는 얼굴을 하고 초교연이 물었다. 곽진무는 등에서 진땀이 나는 걸 느끼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물건, 서역이 아니면 구하기 힘든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파사국까진 가야 한다며? 난 사형이 너무너무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기에 그 먼 파사국까지 갈 생각을 다 했는데, 여기 떡하니 물건이 있네? 어머나. 어떻게 된 일이야.”
마교 제일의 미인으로 손꼽히던 요왕妖王 만수백요萬獸伯妖 예옥경裔鈺瓊의 딸인 초교연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매우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턱선은 갸름한 데다 뺨은 붉었고 눈은 크면서도 끝이 가늘었다. 전체적으로는 오목조목 어여쁜 이목구비인데 새침하게 끝이 올라간 눈 때문에 살짝 여우 같은 인상이다.
사람은 생김새를 따라가는 걸까? 여우상을 한 그녀는 성격까지 여우를 닮았다. 특히나 이렇게 화를 내고 있을 때를 보면 사람 간을 빼 먹는다는 불여우나 다름없다.
“아니, 그건……. 사부님이 구해 주셨더라고. 전부터 탁상시계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그것을 귀담아 두셨나 봐. 사매도 알지? 사부님께서 의외로 자상하신 거.”
어린 시절부터 곽진무는 사매를 이기지 못했다.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해봤다. 그는 산학을 좋아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털털한 성격이었고, 반대로 그녀는 매사 꼼꼼하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터라 성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듣기론 후아주랑 맞바꿨다던데.”
“잘, 잘못 들은 이야기야. 맞바꾸다니. 사부님께서 귀한 선물을 주셨기에 답례를 드린 거지.”
“사형이 언제부터 사부한테 그렇게 깍듯했는데?”
“난 원래가 깍듯해. 워낙 허물없는 성격이라 오해를 쉽게 사곤 하지만, 마음속으로 나만큼 사부님을 깊이 공경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아, 대사형은 빼고. 난 대사형만큼은 아니야. 대사형 정도 되면 솔직히 말해 좀 무섭지. 난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그다음으로다가 그래.”
바가지 긁는 마누라를 대하는 남편처럼, 곽진무는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이어 갔다. 초교연이 자신을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있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했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상대였다면 아예 처음부터 속일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젠장. 누가 그런 것까지 다 고해바친 거지? 며칠 전만 하더라도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을 텐데. 설마 내 주변에 간자가 있는 건가?’
곽진무의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말 그대로 중원도 아니고 완전히 외지, 중간에 연락기지로 삼을 마을조차 없는 오지 중의 오지를 여행하는 도중에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었다는 게 무서웠다. 별로 똑똑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은 사매가 자신을 대할 때만 왜 저렇게 철저해지는 것일까.
‘날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사매.’
곽진무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는 정말 사매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초교연이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본 곽진무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아름다운 여인이 화가 나서 새침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있으니, 혹여 멋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그 모습을 매우 앙증맞고 귀엽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친동기나 다름없이 자라,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곽진무에게 그런 초교연의 행동은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초교연의 허리에는 그녀의 성명 무기인 환요편이 말려 있었다. 그녀가 허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그 무기를 출수出手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만 안 했지 완벽한 협박이다.
환요편幻妖鞭은 채찍을 주 무기로 쓰는 그녀를 위해 천마가 교룡蛟龍까지 잡아 특별히 장만해 준 진귀하고 보기 드문 무기다.
길이는 삼 척. 두께는 손이 가는 여인의 손가락 굵기만 하고, 은은하게 빛까지 나는 아름다운 은색이라 겉보기엔 채대를 장식하기 위해 두른 장식 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대 맞으면 살만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뼈까지 부서지는 무시무시한 흉기다. 뼈도 그냥 부수는 게 아니라 아예 조각조각을 내 버리니, 상대를 병신으로 만들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무기는 없는 셈이다.
“소사매. 미안해. 진짜 내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그녀를 달래기 위해 곽진무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화난 눈초리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하는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초교연과 대조되는 곽진무의 강아지처럼 아래로 처진 눈매에서 순한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고의로 사매를 골탕 먹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서운해 사매. 내가 왜 어리고 어여쁜 사매에게 그런 짓을 하겠어? 세상에 그 어떤 사형이 사매같이 귀여운 여동생에게 그런 심술을 부릴 수 있겠냐고.”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하는 연기라서 그런지 의외로 실감이 났다. 아마 마주 선 사람이 초교연만 아니었더라면 이대로 넘어가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일생일대의 명연기였다.
‘진짜, 저렇게 귀엽지만 않았으면, 콱.’
싸늘한 눈으로 곽진무를 노려보고 있던 초교연은 내심 이를 갈았다. 그녀보다 거의 10살 가까이 연상인 남자인데도, 저 인간은 왜 저렇게 귀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귀여워서 같이 있자는 건데도 늘 슬슬 피하기나 하고, 그게 심술 나 좀 짓궂게 놀리면 당장 엉덩이를 빼면서 달아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들처럼 내숭을 떨어서 넘길 수 있는 상대인 것도 아닌 게, 저 인간은 산학에만 발정하는 변태 중의 변태다.
“근데 정말 그것 때문에 돌아온 거야, 사매?”
눈치는 빠르지 못한 인간이면서 분위기 파악은 또 잘했다. 초교연이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더는 화를 내는 기색이 없자, 슬금슬금 곽진무가 말을 붙여 왔다. 그녀의 기분이 다소나마 누그러졌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나 때문에, 그러니까, 탁상시계 소식 때문에 많이 화났구나?”
너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어? 진짜로 내 뒤에 뭐 붙였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니까 우물쭈물. 결국에는 한다는 소리가 그랬다. 초교연은 허리를 짚은 자세 그대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랬다면 어쩔 건데요?
무언으로 묻는 그녀의 태도에 곽진무는 다시 우물쭈물했다.
“아니, 뭐, 별로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좀 궁금해서.”
“후아주 내놔요.”
초교연이 맡겨 놓았던 물건을 달라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 하고 당황한 곽진무가 어리둥절한 탄성을 발했다. 초교연은 그런 곽진무의 코앞으로 더 가까이 손을 내밀며 재촉했다.
“운남에서 가져온 후아주, 나한테 내놓으라고요. 사부님께 사례로 드렸다고 해도 몰래 챙겨 놓은 건 따로 있을 거 아니에요? 사형 혼자 몰래 마시려고 숨겨 둔 거요. 그거 이리 내놔요.”
“소사매?”
“없다고 발뺌할 생각은 말아요? 사형이 대사형이 아닌 이상 그 귀한 술을 고스란히 다 사부께 바쳤을 리는 없을 테니까. 얼른 내놔요. 나 그거 필요해요.”
초교연의 때아닌 억지에 곽진무는 난감해졌다.
후아주는 정말 귀한 술이다. 산삼 같은 영물처럼 운과 때가 따라야지만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인데, 거기에다 양도 그리 많지 않다.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는 원숭이들이 바위틈이나 나무 틈새에 숨겨 놓고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5년을 기다렸다 닥닥 긁어 온 것도 고작 두 병밖에 안 되는데, 그중에 한 병은 이미 사부를 줘버렸다. 아끼느라 이제껏 후아주의 맛도 못 봤던 곽진무는, 남은 한 병을 고스란히 사매에게 바치기가 정말이지 억울했다.
“이거 진짜 귀한 거야. 아무리 사매에게라도, 그냥은 주기가…….”
“나 사형 때문에 상행 중에 그냥 돌아온 거 알고 있죠? 사.형. 때문에 화가 나서, 열이 치밀어 그냥 돌아와 버렸단 말이에요. 이제 내가 교에 도착했으니 사부께서도 그 일을 알게 될 텐데, 그럼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교내에서 맡은 직무에 관해서 만큼은 철저하신 분이 사부시잖아요. 그런 사부에게 빈손으로 갔다가 이 어린 소사매가 무슨 꼴을 당할지 걱정되지도 않아요? 사.형.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하게 생겼는데, 아무런 도의적 책임도 못 느끼나요?”
초교연은 상큼한 아미의 한쪽을 슬쩍 치켜세우며 곽진무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런가요? 상관없어요?”
상관없을 것 같다고 곽진무는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진짜로 환요편이 날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에휴. 일을 꾸미기 전에 저 성질머리부터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곽진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편하게 살아 보겠다고 엉뚱한 일을 꾸몄다가 이런 낭패를 보게 됐다.
‘후아주. 내 후아주. 진짜 아직 밀봉도 안 뜯어본 새 건데. 나는 진짜 맛도 못 봤는데.’
“곽 사형?”
“……잠깐 기다려. 소사매. 가지고 올 테니까. 서늘한 곳에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광에 두고 있었어.”
곽진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안 주고 버틸 수 있으면 모를까, 그럴 수는 없는 형편이니 그냥 줄 거 빨리 주고 용서를 받는 편이 이로울 성싶었다. 그는 풀 죽은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초교연은 그가 우울하게 방을 나가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치 감시하듯 번득이는 눈동자가 뒤통수에 내리꽂혀서, 곽진무는 등이 몹시 따갑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별일 없는 모양이네. 걱정 많이 했는데.’
곽진무가 방을 나가자 그녀는 매서운 표정을 풀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상행을 나갔던 곳에서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고 맡은 직무까지 내팽개친 채 정신없이 돌아왔던 초교연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이사형의 행동을 보고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다행히 곽진무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자기 마음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니니, 그 소식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동요를 내보였을 터였다. 물론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이야 하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교로 붙인 말총처럼 곽진무만 따라다녔던 그녀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골치 아픈 상황이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사부님의 심기가 편치 않으신데, 불에 기름을 붓는 것도 아니고.’
평소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별 관심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였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녀 자신은 상관이 없어도, 곽진무와는 깊게 관계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부의 성격도, 이사형의 성격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옥 같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는 걸까? 이사형에게 타격이 최소한으로 미칠 방법은 어떤 게 있지?
‘아. 난 이런 거에 약한데. 그렇다고 삼사형에게 이 문제를 의논해 볼 수도 없고.’
오는 동안 내내 생각했지만 제대로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돈 계산하는 걸 좋아하고, 상재도 썩 있는 편이지만 전략이나 정략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그녀는 이런 유의 일에 유독 약했다. 이런 일이라면 얼음덩이 같은 삼사형이 전문이긴 했지만, 이 일은 누구에게 함부로 털어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하면 이사형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인지라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렇지 않아도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살포시 이지러진다. 미인이 고민하는 광경은 보는 사람의 눈에는 무척 아름다웠으나, 막상 당사자의 내면은 그리 편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