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2 장 (3/26)

제 2 장

그가 가진 최초의 기억은 펄럭이는 막사 자락에서 시작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못 이겨 안쪽으로 찬바람을 들이밀던 막사의 천 자락. 누군가 자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야. 가서 저것 좀 붙들어 봐.”

짜증 섞인 어른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잠결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는 시키는 대로 비실비실 걸어가 막사의 문을 붙잡았다. 어린 그의 손에 무겁고 꺼칠꺼칠한 낡은 천이 잡혔다.

한겨울의 거센 바람에 희롱당한 천 자락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얇고 허술한 옷깃 사이로 칼날 같은 바람이 서슴없이 숨어들었다.

어렸던 그는 천 자락을 고정시킬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 손으로 천을 움켜쥔 채로 속절없이 밤새 문 앞을 지켰다.

고사리 같은 어린 손은 금세 꽁꽁 얼어붙었다. 그의 어린 몸뚱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매서운 겨울바람은 그의 살갗을 할퀴듯 긁으며 지나갔다. 추위를 피하고자 몸을 옹송그려 봤지만 웅크린 등만 아팠을 뿐,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못 했다. 괜한 투정을 부려 어른들의 심기를 상하게 해봤자 힘들어지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평은 고아였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순간부터 이미 그랬다. 하지만 그런 처지치고는 꽤 운이 좋은 편이기도 했다. 최소한 굶지는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곳에 버려진 데다, 그곳에서 평생의 밥벌이가 될 기술을 익힐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버려진 곳은 군인 막사가 즐비한 변방의 병영이었다. 제 몸 하나 간수 못 하고 굴러다녔을 어린 시절이 누구의 손을 탔는지는 그도 모른다. 아마도 군영을 따라다니던 창녀가 여의치 않게 임신해 몸을 푼 후 그대로 두고 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저 혼자서 하는 추측일 뿐 근거가 있는 생각은 아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혼자였고, 사방엔 고개를 한없이 젖혀도 얼굴을 볼 수 없는 까마득한 어른들만 가득했다. 그들은 걸어 다닐 때마다 발끝에 차이는 석문평의 존재를 매우 성가시게 여겼다.

어린 석문평에게, 거치적거린다고 걷어채이거나 늦되다고 얻어맞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영역에 속했다. 손에 무기를 들 수 없는 자는 그저 잉여일 뿐인 병영에서, 제 밥벌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는 귀찮은 혹 덩어리 이상의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간혹가다 고향에 어린 자식을 두고 온 병사들의 측은한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의 관심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당장 자신의 목숨이 급급한 상황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고아에게 신경을 써줄 만큼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삶은 살아졌다. 비록 식은 밥 한 덩이에 쉬어 버린 나물 반찬밖에 얻지 못할지언정 밥은 굶지 않았고, 바람이 들이치는 막사의 가장자리에서 새우잠을 잘지언정 한뎃잠은 자지 않았다.

눈치껏 잔심부름을 하고, 분위기를 파악하고, 공기처럼 존재하는 법을 익히며 아이는 살아남았다.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는 삶의 요령을 금세 배웠다.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지만, 마치 짐승의 새끼가 그렇듯 그 역시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그렇게 살아남았어도 여태껏 몸을 팔아 본 적은 없었어. 이런 날강도 같은 것들. 그런 이 몸의 정조를 그냥 날로 먹으려고 들어? 화대라도 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고작 월봉 조금 더 얹어 준 주제에 일은 몇 가지나 더 시키는 거야? 천마의 밤 상대도 하고 미행도 하라고? 엉덩이가 찢어진 채로 천마의 뒤를 쫓아다니란 말이지? 하! 내가 붕어 똥이냐? 그런 짓까지 하면서 마교에 들러붙어 있게?’

마영으로 승전하면서 오른 월봉은 결코 ‘조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금액이었으나, 석문평은 그 사실을 가볍게 무시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지금 그는 공정하게 사리를 따져 가면서 판단할 기분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천마의 거대한 거시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어떻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욕실에서 겪었던 불행한 일이 아직도 온몸에 생생했다. 그는 그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의 불쌍한 엉덩이가 두 번씩이나 그런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마적 대장이야 감히 천마를 습격한 죗값을 받아 그렇게 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저 착실하게 임무에만 몰두했던 자신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고작해야 생계 좀 책임져 줬다고 자신이 몸까지 바치길 바란다면 마교가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본 거였다. 무인은 충성을 맹세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바치지만 낭인은 정확히 받은 만큼만 일한다.

낭인이 가장 우선적으로 챙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몸이며, 두 번째는 돈이다.

마교는 문평에게 그 둘 중 무엇 하나도 제대로 약속한 게 없었다. 보상에 대한 약속은커녕 계약에도 없는 임무를 강요하고는, 못 하겠다고 버티는 그에게 목숨까지 위협했다.

그들은 문평이 교 바깥에서 온 외부인이라는 걸 까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 같은, 교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문평은 철저히 받는 만큼만 줄 생각이었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그냥 안 된다고 해? 싫다고 하고 죽자고 거부하면 이야기가 통할까? 아냐. 아니지. 턱도 없어. 자기 제자들 앞에서도 서슴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던 사람인데, 나 따위가 하는 말을 순순히 듣겠어? 그냥 비웃은 후에 하고 싶은 걸 마저 하겠지. 잘못하면 귀찮게 반항한다고 죽도록 맞을 수도 있어.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패지도 않는다는 소린 없었으니까.

그럼 도망갈까? 이 꼴 저 꼴 다 보면서 붙어 있느니 아예 이곳을 떠나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은데. ……아냐. 그건 더 불가능해. 당문의 추적에서도 겨우 도망쳤는데 이제는 마교의 추적을 받으라고? 그 짓을 어떻게 두 번씩이나 해. 게다가 이제는 도망갈 구석도 없는데.’

반항할까 생각해 봤지만 천마가 그런 게 먹힐 위인이 아니고, 도망을 치려 해도 호완평이 마음에 걸린다. 그야말로 앞엔 호랑이요 뒤엔 승냥이가 있는 형국이다.

머리에 김이 나도록 모색해 봐도 딱히 그럴듯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석문평은 답답한 기분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럴 때 머리 좋은 누군가가 곁에서 조언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누군가와 상담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톡.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고, 무릎에 얼굴을 묻는 궁상맞은 자세를 하고 있던 문평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음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확인해 보니, 그 소리는 창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톡. 톡. 누군가 고의적으로 내는 게 분명한 그 소음은 규칙적인 간격으로 창틀을 두드렸다.

‘누구지, 이 늦은 시각에?’

문평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야심한 밤이다. 시각은 무려 삼경三更13). 특별한 사연으로 인해 잠 못 드는 자신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잠들었을 시간이건만, 이 시각에 찾아와 문도 아닌 창틀을 두드리다니?

정상적인 방문으론 여겨지지 않았다. 상대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진 문평은 옆자리에 풀어 놓았던 검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평은 신경을 곤두세워 바깥의 기척을 살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창가로 향했다.

“누구냐?”

창틀 옆으로 다가가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상대의 정체를 추궁했다.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검병을 손아귀에 쥔 채였다. 바깥에선 잠시 대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기이한 침묵에 의심이 한층 더 깊어진 문평은 검병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석 형. 석 형이 맞습니까?”

창 아래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다.

‘학이? 임학인가?’

예상치 못한 상대의 정체에 깜짝 놀란 문평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설마 학이냐?”

“예. 석 형. 저 학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시 들어 봐도 임학의 목소리다. 상대의 정체를 확신한 문평은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열자 창틀 아래 숨어 있던 임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 빛이라고는 희미한 달빛뿐이었지만, 사위가 어둡다고 해도 몇 년이나 동고동락한 임학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임학의 팔을 잡고 얼른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끌려 올라온 임학은, 문평이 주위를 경계하며 문을 닫는 것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찾아왔느냐?”

문평은 작은 목소리로 임학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임학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문평의 질문에 대답했다.

“낮에 순찰하다 석 형이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소문해 봤더니 아무래도 석 형이 맞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와봤습니다.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을 해 보려고요.”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아도 사려 깊은 그는 결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비록 방 안에는 단둘밖에 없다지만, 이곳은 내전에 상주하는 무사들이 모여 지내는 숙소 안이다. 잠이 들었다고는 해도 기감이 예민하고 귀가 밝은 무인들이 지척에 있는지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문평은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를 방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작은 일에도 조심성을 버리지 못하는 문평의 태도에 임학의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문평은 어둠 속에서 홀로 반짝이는 임학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오로지 눈빛뿐이었다.

“오랜만이다, 학아. 그간 잘 지냈느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별일 없지?”

서로 한 몸같이 붙어 다니다가 갑자기 떨어져 얼굴도 보지 못한 지가 벌써 보름이 넘었다. 많은 시일이 흐른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아득하게 먼 느낌이다. 느닷없는 임학의 등장에 친구들이 그리워진 문평은 두고 온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다.

“별일 없을 리 있습니까? 석 형께서 그렇듯 갑자기 사라지셨는데요. 이유도 없이 사람은 사라졌지, 기다려도 연락은 없지. 쓰시던 방에서는 짐까지 빠졌지. 다들 걱정을 해도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멀쩡히 교내에 계시면서 어떻게 소식 한 자락 안 주셨습니까?”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이 또박또박 임학이 말했다.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석문평은 그 음성에서 자신을 걱정했던 임학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에게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외전의 무사들에겐 금지나 다름없는 내전 안쪽까지 찾아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석문평은 내심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뜻하지 않은 임무를 맡았다. 일에 관련된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섣불리 발설해선 안 되는 극비 임무다. 비밀 보장의 규율이 워낙 엄중한지라 걱정할 줄 알면서도 소식조차 전하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문평은 오랜만에 보는 임학이 한없이 반갑기만 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모두 늘어놓으며 회포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진짜로 그렇게 하기엔 서슬 퍼런 호완평이 마음에 걸렸다.

호완평은 천마에 대한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자기가 손수 골라낸 문평조차도 베려고 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니, 임학에게 극비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살인멸구를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간편한 방법쯤으로 믿는 사람에게 괜한 꼬투리를 잡힐 짓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그럼 석 형께서 내전에 계시는 것도 임무 때문입니까?”

“그래. 그렇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워낙 소리 소문도 없이 사람을 빼 갔기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지나치게 은밀한 행사였던지라 혹여 바깥으로 나가는 험한 임무에 차출되신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었거든요. 보아하니 다행히 그런 쪽의 일은 아닌 것 같군요. 덕분에 최소한의 근심은 덜었습니다.”

임학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싶은 바를 확인하게 되자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려 깊게도 문평의 입장이 곤란함을 알고 배려해 준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문평은 자신을 발견한 게 임학이라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중하지만 판단은 빠르지 않은 악 형이나, 촐랑대고 생각이 얕은 최가가 자신을 발견했었다면 지금처럼 좋게 일이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다른 사람에게도 부디 안부 전해다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저 임무가 있어 차출되었고 끝나기 전엔 돌아갈 수 없다고만 전하거라.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를 보더라도 아는 체하지 말라고 이르거라. 일이 끝나기 전까진 나라는 사람은 모르는 것으로 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너 또한 그래야 한다.”

그의 당부를 들은 임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라면 내게 좋은 의논 상대가 돼줬을 텐데…….’

임학의 믿음직한 모습을 바라보던 문평은 문득 아쉬운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문평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임학처럼 좋은 의논 상대는 없었다. 그는 영민하고, 생각도 깊고, 거기다가 입까지 무거운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문평은 믿고 의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할 건 포기해야 했다. 무슨 물귀신도 아니고, 자기 문제가 벅차다고 임학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려면 필시 천마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알다시피 천마에 대한 모든 정보는 극비 중의 극비로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더구나 자신은 마영이었다. 그 사실을 임학이 알게 된다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문평만이 아닐 터였다.

마영단은 그런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구성원들의 정체도, 수장도, 심지어는 그 숫자까지도 모든 것이 그림자 속에 가려진 단체다.

마영단은 구성원들에게 한 가지 특별한 의무를 강요했는데, 그것은 바로 엄중한 비밀 준수의 의무이다. 그 의무로 인해 마영들은 단의 정보를 외부에 알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다른 사람에게 밝히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만약 서약을 어기고 자신의 정체를 바깥으로 발설한 자가 있으면 말한 본인은 물론이고 그 정보를 들은 사람까지 모조리 숙청하는 것이 마영단의 규율이다. ‘저’ 호완평이 단주로 있는 집단이니 그럴 만하다고 문평은 남몰래 생각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앞으로는 날 찾아오지 마라. 못다 푼 회포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풀자. 내가 해야 하는 사과는 그때 다 하마.”

어차피 이루지 못할 일에는 포기가 빠른 문평이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미련 없이 잘라 내며 임학에게 말했다.

“굳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위에서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나 석 형이나 매양 같은 처지인데 이 정도의 일도 이해 못 하지는 않습니다.”

임학은 방 안으로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부디 건강히 지내십시오.”

인사를 끝낸 임학은 다시 창을 넘어 바깥으로 나갔다. 자신을 걱정해서 찾아와 준 동생인데 차도 한잔 대접 못 했다. 도둑도 아닌데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창문을 통해 나가다니. 저 녀석도 나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한다.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문평은 임학이 방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창문을 닫지 못했다. 늦가을의 소슬한 바람에 몸이 식었지만, 문평은 한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멍하니 바람을 맞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결국 문평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잠이 모자라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뇌정전으로 향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던 석문평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웅장한 뇌정전의 모습에 땅이 꺼져라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해 보니 천마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자는 꼴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다 보니, 이제는 늦잠을 자는 모습을 봐도 별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문평은 말없이 걸어가 자신의 지정석에 섰다.

출입문 바로 옆, 출입문과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담은 족자 사이를 차지하는 작은 공간이 지난 며칠간 지켰던 문평의 자리다. 그의 체격에 비해 너무 좁아서 가만히 서 있기도 불편하고, 문간이라 문이 열릴 때마다 비켜서야 하는 단점이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방 안에서 천마의 시선이 가장 덜 미치는 곳이기에 문평은 이 자리를 좋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은신술이나 배우는 건데.’

하나 오늘은 이 자리조차 불안했다. 시선이 가능한 덜 미치는 곳이기는 해도 아예 안 미치는 곳은 아닌 데다,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도록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형편이니 불안하지 않을 리 없다. 같은 방 안에 있으면서도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기척조차 완벽히 숨기고 있는 다른 마영들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문평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저런 무공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천마의 눈에서 스스로를 감출 수 있는 무공.

머지않아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에서 막 깬 맹수처럼 느릿하게 하품을 한 천마는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를 켰다. 잘 만든 활처럼 탄력 있는 육체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풀어진다. 우아하리만큼 절묘하게 균형 잡힌 근육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나체는 은은한 아침 햇살에 상아색으로 빛났다.

아침의 생리 현상 때문인지 천마의 성기는 반쯤 발기해 있는 상태였다. 반만 발기했어도 보통 남자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물건이지만, 천마의 몸에 붙어 있으니 특별히 튀지도 않고 보기 싫을 정도로 흉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딱 적당한 크기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까지 일어나서, 할 수만 있다면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천마는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야생의 맹수 같았다. 느닷없이 마주친 맹수를 보고 기겁한 인간의 곁을 무심히 지나가는 맹수처럼, 천마는 볼 때마다 당혹해하는 문평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어슬렁거렸다.

그가 설렁줄을 당기자 란란과 예화가 나란히 들어왔다. 늘 그렇듯 예화는 의복을 들고 있고 란란은 찻상을 준비했다.

천마가 차를 마시는 동안 예화와 란란은 능숙한 솜씨로 천마에게 옷을 입혔다. 별달리 도와주는 것도 없이 일상적으로 움직이기만 할 뿐인 천마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척척 옷을 입히는 두 사람의 손놀림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천마는 앉은 자리에서 세수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숙련된 솜씨를 자랑하는 시비들은 마치 입 안의 혀처럼 움직이며 천마의 시중을 들었다. 따로 명을 내리지 않아도 착착 움직이는 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매끄러웠다. 그들은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

아침 시중이 끝나고 시비들이 물러가자 천마는 책을 펴들었다. 점잖게 서탁 앞에 앉아서 읽는 게 아니라 발목이 푹푹 잠기는 푹신한 바닥 깔개 위에 비단으로 만든 베개를 잔뜩 쌓아 놓고, 그 위에 등을 기댄 불량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책을 읽는다.

다행히 이번에 천마가 손에 든 책은 예의 그 강시술 책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한결 크기가 작고 두께도 얇은, 겉표지가 딱정벌레의 등껍질처럼 딱딱한 특이한 책이다.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다. 천마는 계속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책을 읽었고, 석문평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벽에 딱 붙어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났다. 천마는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다소 늦은 점심상이 차려지고, 천마가 식사하는 동안 문평은 밖으로 나와 주먹밥에 차 한 잔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천마는 계속 독서 삼매경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게 문평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가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단순히 무시만 하는 게 아니라 문평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하품이 나오면 하품을 하고, 머리가 간지러우면 머리를 긁고. 뒹굴뒹굴 바닥을 뒹굴며 책을 읽다가 목이 마르면 차를 마셨다. 그는 방에 혼자 있는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평 본인조차 자신의 존재를 잊을 지경이었다. 공기가 되고 싶었던 문평은 천마 덕분에 소원을 이뤘다.

‘……뭐야. 별로 달라진 것도 없잖아.’

마영들의 은신술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천마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 문평은, 시간이 지나도 천마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차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바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천마가 자신에게 보내는 무관심이 워낙 일관성 있다 보니, 자신이 괜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날 곽진무가 한 말이 워낙 충격적인 데다가, 이전에 겁탈 직전까지 당했던 기억도 있어 지나치게 과민했던 모양이다. 문평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천마의 태도에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공기로 존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흥분이 가라앉고 머릿속이 차가워지면서 어제와는 다른 방향의 생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괜한 설레발을 친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고, 곽진무가 했던 말을 너무 과대 해석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지금 와서 되새겨 보니 문평이 천마의 취향이라고 우긴 것은 곽진무 혼자였고, 천마가 그것을 긍정한 적은 없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문평이 천마의 취향에 맞다고 하더라도 그 취향 중에 일부만 들어맞는 건지, 아니면 전부 들어맞는 건지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닌 말로 제자들이 보기에 딱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마가 보기엔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실제로 천마는 문평을 처음 봤을 때 딱히 탐탁히 여기지 않았었다.

마적 대장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긴 천마가 자기 취향에 맞는 남자는 반드시 살려 보낸다는 소리지, 자기 취향에 맞는 남자만 보면 아무나 겁탈하고 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남자라고 해서 자기 취향의 여인을 발견할 때마다 무조건 끌고 가 범하지는 않는다. 남색가라고 별다를 리 없었다.

‘호완평이 미워서라도 또 건드리진 않지 않을까? 보아하니 대놓고 미인계를 쓴 모양인데, 설사 회가 동하는 미끼라도 그런 빤한 수작이 보이면 있던 정도 떨어지게 마련이지. 첫째 제자와 사이도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 설마 미운 제자가 준 떡을 날름 받아먹기야 하겠어? 천마도 자존심이 있지.’

문평은 마침내 그런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기 위안적인 추측이라는 것은 물론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딱히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문평으로서는 이런 생각이라도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다.

산중에서 비를 만난 사람은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비 그을 장소가 있기를 바라게 된다. 천재지변이나 다름이 없는 천마를 앞에 둔 문평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 스스로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니, 그쪽에서 자신을 모르는 척해 줬으면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껍데기에 머리를 박은 자라 꼴이로군.’

자기 꼴이 기가 막힌지라 문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나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이때껏 제 몸 하나는 잘 챙기며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사람에게 휩쓸리다 보니 도무지 중심 잡기가 힘들다.

이래서 강호인들이 힘을 키우려고 하는 것이다. 외부의 바람이야 어찌 되었든, 굳게 뿌리를 내리고 꺾이지 않기 위해서.

문평은 다소 안일하게 살아온 지난날을 진심으로 반성했다. 그냥 밥만 먹고 살면 족하다 싶어 수련에 열의도 없었고 별다른 노력도 안 했는데, 그런 지난날의 나태함이 오늘의 결과를 낳았으니 자신은 남 탓할 자격도 없었다.

호완평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의 무공수위가 절정 정도만 되었어도 자네를 선택하진 않았을 거야.”

그는 직설적으로 문평의 처지를 꼬집었고, 문평은 이제 그 말이 얼마나 아픈 뜻인지를 깨달았다.

‘다시 수련을 시작해야겠군. 쉬엄쉬엄하느라 몸이 많이 굳었으니 당분간 고생이겠어. 일단 목표는 절정 고수로 해두자. 혹시 모르니 단주에게 은형잠행술隱形潛行術의 비급도 받아 놔야지. 나도 마영이라고 제 입으로 분명히 말했으니 설마 비급을 아끼진 않겠지.’

문평은 모처럼 생산적인 결심을 했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라도 단련 시간을 늘려야겠다. 시간이 모자라면 차라리 잠을 줄이자. 그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천마는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나태하게 드러누워 책을 읽는 모습이지만, 그런데도 특유의 오만한 기색은 여전하다. 오죽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깔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겠는가.

저렇게까지 기질이 억세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문평은 도통 세월을 어디로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천마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런 천마를 보고 있노라면, 문평은 옛 선현들이 어째서 역리逆理는 거스르고 순리順理는 따라야 한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포영의는 보고서를 읽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포영의가 올린 보고서를 보고 있었지만, 별달리 주의 깊게 읽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남자는 자신이 말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린 시선은 초점이 흐린 채로 탁했다. 또 딴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대사형. 사형?”

포영의는 서늘한 음성으로 호완평을 불렀다. 두어 번 불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포영의는 가면을 뒤집어씌운 듯 무표정한 얼굴로 호완평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삼사제. 내가 또 딴생각을 했다.”

“제 이야기를 못 들을 만큼 사정이 여의치 않으시다면 조금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 급한 보고도 아니니까요.”

“아니. 그럴 거 없다. 네 시간을 어찌 두 번 빼앗겠느냐.”

“그때 빼앗기나 지금 빼앗기나 제가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조금 있다가 정신이 바로 드시면 그때 다시 불러주십시오.”

냉담하게 말을 내뱉은 포영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감한 얼굴을 한 호완평이 그런 포영의를 만류했다. 그렇지 않아도 칼 같은 성품을 지닌 사제다. 유능하긴 하지만 유달리 정이 없고 냉철한 위인이라 평소에도 대하기가 어려운데, 마음을 상하게 해 놓고 사과도 없이 내보낼 수는 없었다.

호완평이 거듭 만류하자 포영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적으로는 대사형이고 직급상으로는 상급자인 셈이니,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저 강경하게 나갈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욱 냉담하게 굳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호완평의 기분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대사형?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포영의는 딱딱한 목소리로 호완평에게 물었다. 얼핏 들으면 그를 걱정하는 투로 들리지만, 사실은 같은 실수를 어째서 두 번이나 했는지 그 이유를 말하라는 추궁이다.

호완평은 도무지 봐주는 법이 없는 사제를 향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삼사제의 성품으로 보아, 대충 주워섬기는 두리뭉실한 변명으로는 넘어갈 수 없을 듯했다.

“아무래도 때가 때인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호완평은 하는 수 없이, 자기가 걱정하고 있던 문제를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포영의는 깨끗한 이마를 잠시 찌푸렸다. 호완평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몰라 잠시 머릿속을 더듬어 보다가, 머지않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벌써 시월인가요?”

“그래. 벌써 시월이다. 시월하고도 열아흐레지.”

호완평은 근심스레 중얼거렸다.

“조만간 움직이시겠군요. 늦어도 하루나 이틀 내인가요? 아예 거르실 게 아니라면 그 안에 출발하실 텐데요.”

“내 생각에도 그러실 것 같다. 그곳에 가시면 백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겠지.”

호완평은 한숨 섞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늦든 빠르든 어차피 들어갈 이야기입니다. 아니, 벌써 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사형도 아시지 않습니까? 비록 사부께서 뇌정전 안에서만 머무시지만, 그분의 정보는 저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일이지요. 사부를 대상으로 한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하는 호완평에 비해 포영의의 태도는 한층 객관적이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른 만큼 생각하고 있는 바도 달랐다.

무거운 한숨을 쉰 호완평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여느 때라면 서른 중반 정도로밖에 안 보였을 젊은 얼굴이, 지금만큼은 제 나이로 보였다.

“……백 부인의 상세는 어떠냐? 더 안 좋아지셨느냐?”

최근의 사정을 모르는 호완평이 조용히 물었다. 포영의는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이가 나이시니까요. 고희를 넘기셨습니다. 무림인이 아니었다면 그 나이까지 사는 것도 드문 일이지요.”

“백 부인의 병세를 염려한 제갈세가諸葛世家에서 보림문寶林門의 신의神醫를 불렀다던데. 그 일은 어찌 되었고?”

“엄만형嚴萬形이 신의로 유명하다지만, 자연의 섭리를 어찌하겠습니까. 백 부인의 병은 노환이라 사람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가? 도움이 안 됐단 말이지.”

“예. 사형. 엄만형이 직접 그랬다더군요. 백 부인께서 올해를 넘기시지 못할 듯하다고요.”

이야기를 들은 호완평의 안색이 한층 더 침중해졌다. 그는 늘 입가에 매달고 있던 웃음까지 잃고서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좀처럼 얼굴을 굳히는 일이 없는 그가 딱딱하게 표정을 지우자, 그저 사람 좋게만 보이던 그의 얼굴이 실은 얼마나 단단하고 완고한 선을 가졌는지가 선연히 드러났다.

맹수가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맹수가 아닌 것은 아니듯, 늘 편안하게 사람들을 대한다고 해서 호완평이 무섭지 않은 인물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호완평은 마중사기 중에서 가장 강한 고수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존재다. 포영의는 그 사실을 잘 알았고, 그렇기에 사형이 걱정스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형. 이야기를 듣자 하니 복건성福建省에 있던 옥기린에게까지 연락이 갔다고 합니다. 복건 땅에서 왜구들을 모두 몰아내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던 그가 모친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북상 중이라니,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백우경이 중원으로 돌아온단 말이지?”

호완평은 강호상에서 옥기린玉麒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무당 제일의 검사 백우경白遇慶의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며 가만히 침음했다.

‘백우경. 백우경이라.’

호완평의 머릿속에 몇 년 전 우연히 마주쳤던 백우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우경은 정말 대단한 미남이었다. 호완평 못지않게 키가 크고 체격도 단단했지만, 옥기린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 덕에 전혀 둔중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파 전체가 추앙하는 고수로,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손꼽히는 일대의 기린아였다.

백우경은 정파의 대협객답게 성품이 곧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으며,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품성을 지녔다. 그는 천마의 제자들인 마중사기에 대항할 수 있는 정파 유일의 희망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마중사기와 옥기린 중 누가 이기냐에 따라 향후 천하 정세의 향방이 달라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호완평이 사람들의 그런 기대 때문에 백우경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백우경을 마음에 담은 것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백 부인이 임종하면 백우경이 ‘그것’을 물려받게 된다. 그러나 물려주는 것은 단지 물건뿐. 평생 굳게 지켜 왔던 비밀까지 물려주는 일은 결코 없을 테지. 어쩌면 피비린내 나는 상쟁이 다시 한번 벌어질지도 모르겠구나. 사부는 남에게 변명하는 분이 아니시니, 이번에도 아무런 변명 없이 모든 걸 받아들이실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만한 그의 사부는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억울한 오해를 받아도 결코 변명하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생긴 귀찮은 일은 힘으로 해결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는 스스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천마의 무위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이제껏 그 방법이 통했지만, 과연 백우경에게도 그 방법이 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호완평은 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검게 가라앉은 그의 두 눈에 단호한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영의야.”

포영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호완평이 이런 눈빛을 할 때마다 감당치 못할 일들이 터졌다.

이 대책 없는 사람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이러는 것일까. 셋째 사제가 하는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완평은 묵직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달리 방법이 없다. 늦기 전에 기린패麒麟佩를 찾아와야겠다.”

언제나 그렇듯 사형이 치는 일의 규모는 포영의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입을 딱 벌린 포영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형을 바라보았다.

“대사형!!”

소스라치게 놀란 포영의가 자기도 모르게 호완평을 불렀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이런 빌어먹을!”

석문평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무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쉬지도 못하고 달렸더니 입 안에서 단내가 났다. 단순한 단내만이 아니라 비릿하고 씁쓸한 맛까지 함께 나는 걸 보니 위액이 역류해 담즙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맙소사. 입 안에서 담즙 맛이 나다니!’

문평은 자신의 몸이 예전 당문의 추격에 쫓겼을 때처럼 극한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는 수 없이 달리던 것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온몸에 휘돌던 공력을 풀어내자 힘이 빠진 다리가 휘청거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해 나무에 기대선 그는 단전의 공력을 확인해 보았다. 운기조식조차 못 하고 있어서인지 고작 밤톨만 한 기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정도의 진기로는 고작해야 반나절밖에 더 달릴 수 없을 것이다.

공력도 공력이지만 몸도 문제다. 단련된 무인의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신체란 한계가 있는 법.

극한까지 몰아붙인 근육은 벌써부터 약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더 달렸다간 근경련이 올지도 모른다. 몸이 재산인 무인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상황이다.

‘제기랄. 여기가 어디지?’

일단 자신의 몸부터 점검해 본 석문평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하늘까지 가릴 정도로 우뚝 솟은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닿지 않은 깊고 깊은 원시림이다. 다 큰 장정이 두 팔로도 안지 못할 거대한 나무들이 사방에 가득했고, 잡목도 무성히 자라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어둑한 숲속에는 오로지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 소리뿐이었고, 이따금 길짐승들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조난이라도 당할 것 같다. 석문평은 우울한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조난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산속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느 산 어느 숲인 것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천마가 남긴 희미한 흔적을 쫓느라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샌가 이런 곳에 도착해 있었다.

‘숲이 울창한 것을 보니 신강 땅은 벗어난 것 같은데……. 진짜 여긴 어디지?’

그는 대략의 위치를 짚어보기 위해 자신이 달려온 길을 머릿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동쪽으로 한참 왔으니 감숙甘肅인가? 아니면 청해靑海? 젠장. 나무가 너무 무성해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어.’

문평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축축하게 젖은 땅의 습기가 옷에 배어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반 동안 흘린 땀으로 인해 옷도 엉망이다. 이 옷을 벗어 잘 말리면 올겨울 먹을 소금 걱정은 없을 정도다.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해 배도 고팠고, 갈증은 그야말로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깊게 한숨을 몰아쉰 문평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미치겠다. 사람 애먹이는 짓도 정말 가지가지다.

자신을 이런 꼴로 몰아넣은 원흉의 낯짝을 머릿속에 떠올린 문평은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할 수만 있다면 만나자마자 턱주가리를 돌려찰 텐데, 그럴 수도 없는 상대이니 그저 이만 갈 뿐이다.

문평이 생고생을 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하루 반 전. 천마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그날도 문평은 뇌정전으로 향했다. 곽진무의 경솔한 발언이 있었던 직후의 팽팽하던 긴장감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간 며칠로 인해 다소 느슨해진 즈음이었다.

아직 완전히 경계심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천마에게 워낙 일상적으로 무시를 당하다 보니 애초에 갖고 있던 조심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뭐 별일 있겠어? 여태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해진 그는 심지어 태평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른바 안전 불감증에 걸린 것이다.

늘 출근하는 시각에 도착해 침전으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천마는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밤에 뭘 하기에 저렇게 맨날 오전까지 한밤중일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자기 자리로 간 문평은 다시 공기가 되는 놀이를 했다.

천마는 문평이 공기와 동화된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설렁줄을 잡아당겼고, 이후 무슨 예식처럼 이뤄지는 아침 의식은 순서까지 거의 똑같이 진행되었다.

그래. ‘거의’ 똑같았다. 마지막 순간에 뜻밖의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날의 아침 의식 또한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게 끝났을 것이다.

“장포를 내와라.”

아침 식사를 하고, 찻물로 입가심한 천마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천마의 시중을 들고 막 물러나려던 예화와 란란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눈을 조심스럽게 마주 본 그녀들은 곧 고개를 돌려 천마를 바라보았다. 둘 중 나이가 많아서 언니 행세를 하는 예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떤 옷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거나 내와도 상관없다. 그리고 차합에다 아예차峨蕊茶도 좀 담아다오.”

그다음에 천마가 주문한 것은 그가 평소 즐기는 차가 아니라 맛이 순하기로 유명한 아예차였다. 아예차는 사천에서 나는 명차로 맛이 담백하고 향이 은은하기로 유명한 차다.

이제껏 보아 온 천마의 취향하고는 전혀 맞지 않은 차인데, 그 차를 끓여 오라는 것도 아니고 차합에 넣어 오라고 하니, 문평은 여기서부터 슬슬 불길함을 느꼈다.

행동이 빠른 시비들은 천마가 명한 것을 순식간에 준비해 왔다. 편하게 입고 있던 백의 경장 위에 흑색 장포를 걸치고, 아예차를 넣은 차합을 소매에 집어넣은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의 명백한 외출 준비에 두 시비는 무릎을 꿇고 낭랑한 목소리로 “다녀오십시오.”라는 인사를 했다. 묵묵하게 인사를 받은 천마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뜻밖의 일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던 문평은 문으로 다가오던 천마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 것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부지불식간에 든 시선이 천마와 마주쳤다. 거의 열흘 만에 처음으로 마주친 시선이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스치듯 문평의 앞을 지나친 천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시비들만 있는 방 안을 가만히 둘러본 천마는 조용한 목소리로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마영.”

“네. 교주님.”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언뜻 들어도 서너 명 이상은 족히 됨직한 목소리다. 방 안에 마영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어도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몰랐던 문평은 솔직히 좀 놀라고 말았다.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제껏 기척도 없이 숨어 있었나 싶어서였다.

“따라오지 마라. 벨 것이다.”

천마의 경고는 무심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고하다.

지고한 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영들은 선뜻 대답을 못 했다. 그들의 임무는 그림자 속에서 천마를 따르며 그를 호위하는 것인데, 번번이 그 임무를 방기하라는 명을 받으니 그들로서도 처지가 곤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 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천마는 천마 아닌가. 그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영혼의 주인이기까지 한 사람인데, 그의 명을 감히 거역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교와 교주에 충성하는 마영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마영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천마는 돌아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명이 이행되지 않으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의심치 않는 태도로 당당하게 방을 나섰다.

문평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천마의 명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도 마영이었으니까. 아직 다른 마영의 얼굴은커녕 신발 끝조차 못 본 처지이긴 하지만, 마영으로 불리고 있고 그에 걸맞은 녹봉도 받고 있으니 스스로의 정체를 부인할 도리가 없다.

‘천마의 명에 따르는 편이 낫겠지? 호완평보다는 천마가 훨씬 위잖아. 마교인은 교주에게 충성하지 마중사기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호완평에게 특별히 명받은 바가 있었지만, 교주의 명이 두려웠던 문평은 마영단주보다 교주가 훨씬 윗줄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귓전에 가느다란 전음이 파고들었다. 곱고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 틀림없는 란란의 목소리다.

“오늘 일을 대비해 단주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평소 천마와 마찬가지로 그를 그림자 취급하며 눈이 마주쳐도 인사조차 없었던 그녀가 다짜고짜 날린 전음에 얼떨떨해진 문평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확인한 결과 자리에서 일어나 모른 척 청소를 하고 있는 란란의 입매는 분명 조그맣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음을 보낸 사람이 그녀가 맞는 것이다.

“신입 단원 석문평에게 특별 명령을 내립니다. 교주님의 행적을 쫓으세요. 석문평 단원에겐 그 어떤 명령보다도 그 명이 우선입니다. 설사 그와 상반되는 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최초의 명을 따르셔야 합니다.”

란란은 고 조그맣고 귀여운 입술을 움직여 터무니없는 명령을 전했다. 그 소리를 들은 문평은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문평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마영단주가 천마보다 세? 호완평이 혁련상 이겨?’

자신도 못 하는 일을 왜 남에게 시키는 것일까. 남보고 죽으라는 이야기를 너무도 쉽게 하는 그녀가 야속해서, 문평은 자기가 대체 왜 그런 명령을 따라야 하느냐고 대놓고 반항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빌어먹게도 문평은 여전히 전음을 못 했다.

문평은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란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전음을 보내는 이유가 정체를 숨기기 위함임을 알고 있는 터라 대놓고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란란은 천마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둔 비단 베개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입으로는 계속해서 전음을 보냈다.

“설사 교주님의 명을 어겨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단주님의 명을 어기면 반드시 죽게 될 거라고 하셨으니, 제 생각엔 빨리 움직이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조곤조곤한 어조로 터무니없는 것을 명하는 건 호완평이나 란란이나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석문평은 언젠가 겪었던 일의 완벽한 재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는 짓도 그렇고 말하는 투도 그렇고 두 사람은 완전히 판박이다.

‘뭐가 이렇게 똑 닮았어? 호완평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으니 친자식은 아닐 테고……. 설마 양녀인가?’

닮아도 지나치게 닮은 두 사람을 보니 떠오르는 것은 그따위 생각뿐이다. 하나 어쩌랴. 란란이 호완평의 양녀이든 아니든 힘없는 석문평은 그녀가 전하는 호완평의 명을 여지없이 따라야 했다. 혹여나 그가 말을 안 들을까 싶어서 란란까지 안배했으니, 끝까지 명을 듣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어떤 수단을 강구해 놨을지 모르는 일이다.

추측건대 란란은 호완평이 숨겨 놓은 간자間者일 확률이 높았다. 아마도 그리 섣부른 짐작은 아닐 것이다. 천마의 시비가 시비 중에서 높은 지위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시비는 시비다. 그런 위치의 여인이 전음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이 높다는 건, 천마의 애첩쯤이 되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뒤늦게 포섭되어 무공을 배웠을 린 없고, 아무리 봐도 미리 훈련받은 후 은밀히 배치된 것이다.

천마는 무섭지만 호완평은 징그럽다. 어쩌다 자신을 꼭 집어서는 이렇게나 괴롭히는 건지. 천마가 아니라 호완평이 지긋지긋해 이놈의 마교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진 석문평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은 명령대로 움직였다.

‘빌어먹을.’

낮게 욕설을 내뱉은 석문평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신법이 표홀한 데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공력이 심후한 천마니 벌써 꽤 멀리까지 갔을 것이다. 문평이 그 거리를 따라잡으려면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달렸다.

지금까지. 줄곧. 무려 하루 반 동안. 그는 쉬지도 못하고 달렸다.

문평은 그동안 잠도 못 자고 물도 못 마시고 식사도 못 하고, 오로지 달리기만 했다. 물론 용변도 보지 못했다. 너무 오래 달리다 보니 용변을 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아마도 변비에 걸리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만큼 여유 있는 정신은 아니었다. 어차피 죽어서 똥 못 누나 변비 때문에 똥 못 누나, 똥 못 누는 건 똑같다. 변비에 걸리면 똥을 눌 때마다 호완평을 저주하게 되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달려야 할 때였다.

그렇게 뛰어서 마침내 이곳까지 다다른 문평은 이제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더 이상은 여력이 없다.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선 그는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조금 쉬고, 곧이어 간략하게 운기조식을 했다. 대주천을 할 시간이 없어 간단히 소주천만 했기에, 단전에 모인 진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시전할 정도는 되었다.

낮게 심호흡한 석문평은 흙바닥에 귀를 갖다 댔다. 축축한 흙바닥에 귀를 꼭 밀착해서 붙이자,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에 맞춰 낮게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청술을 위해 귀 뒤에 존재하는 천극혈天隙穴에 조심스럽게 진기를 불어넣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뇌가 터질 수도 있는 혈도였기에 진기를 운용하는 석문평의 태도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천극혈을 통해 흘러나간 진기가 땅을 통해 퍼져 나갔다. 흘려보내는 진기의 양이 많아질수록, 두근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종내에는 누군가 큰북을 귀에다 갖다 대고 두드리는 것처럼 커졌지만, 문평은 눈을 감고 그 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조금 뒤, 북소리는 다른 소리들로 바뀌었다. 드디어 진기를 통해 북돋운 청력이 고막을 지나는 핏줄의 고동 소리에서 벗어나 주위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평은 귀를 대고 누워 숲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소슬한 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무줄기에서 약한 진동이 일었다. 십 장 밖에서 고라니가 바위 위를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고, 겨울을 대비해 굴을 파는 토끼의 앞발질 소리도 들린다.

문평은 만씨 노인네에게 배운 대로 들려오는 소리를 분석하고, 필요 없는 소리 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원하는 것을 좇았다. 짐승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하게 걷는 소리부터 뛰는 소리, 곤두박질치는 소리, 기어가는 소리, 그리고, 그리고…….

멀리까지 감각을 확장하자 숲의 저 안쪽에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소음이 감지되었다. 서로 다른 동물들이 내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는 것을 보니, 동물들이 무언가에 놀라 뛰쳐나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소리는 짧은 시간 동안 점점 더 먼 곳으로 퍼지고 있었는데, 설사 전력으로 달리는 호랑이라고 할지라도 낼 수 없는 속도였다.

갑자기 느껴지는 기척에 화들짝 놀란 동물들이 성급하게 몸을 피했다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드는 기척이 생생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속도. 짧은 착지에 먼 도약.

‘저기다!’

문평은 직감적으로 그 기척을 내는 사람이 천마임을 알았다.

워낙 뛰어난 신법을 가진 천마이기에 뛰어난 추종술을 가지고서도 그가 내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었던 문평은, 이렇게 주위에서 나는 기척을 살펴 방향을 읽어내는 방법으로 겨우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것도 지금 당장 향하는 방향만 알 수 있을 뿐 천마가 중간에 방향을 바꾸면 다시 천리지청술을 발휘할 때까지 그 행적을 놓치고 마는 데다, 만약 천 리 이상으로 거리가 벌어지게 되면 그나마도 사용하지 못할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쓸 만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애쓰면서 필사적으로 뒤를 쫓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길. 쉬지도 않고 가는구먼.’

지청술을 펼치고 있는 잠깐의 시간에도, 천마는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귀를 대고 소리로 흔적을 좇는 자신조차 따라잡지 못할 수준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문평은 최대한 빠르게 지청술을 위해 돌리고 있던 진기를 안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마가 향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중이라 경공을 펼치기도 난감했지만, 그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천마의 옷자락이 허공에서 표표히 흩날렸다.

마치 허공에 계단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시전해 천천히 곡 안으로 걸어 내려오는 그를 바라보며 파랗게 깎은 머리를 한 온후한 여승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아미타불.”

조용히 불호를 왼 여승이 천마에게로 다가왔다. 얼핏 보아도 불혹은 족히 넘어 보였지만, 젊었을 때의 미태를 엿볼 수 있는 단아한 외모는 아직까지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데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천마 시주. ……어머나, 천마 시주?”

그녀는 점잖게 다가와 인사를 하려다가 새파랗게 젊어진 천마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당황했는지 은은히 볼을 붉혔는데, 그 모습마저도 몹시 아름다웠다.

“어떻게 이렇게 젊어지셨습니까? 천마 시주 맞으시지요?”

작년에만 하더라도 오십이 넘은 중후한 모습으로 암자를 찾아들었던 그인지라, 그녀는 갑작스럽게 젊어진 천마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되물었다.

생김생김은 분명 그녀가 기억하는 천마가 맞는데 그 얼굴은 너무 젊었다. 천마의 아들은커녕 손주뻘도 안 되어 보였다.

오래된 지인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하는 소리가 귀찮았던 천마는 소맷자락에서 차합을 꺼내 여승에게 던졌다. 가슴께로 정확히 날아오는 차합을 가볍게 받아 든 그녀는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안에 든 것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아예차峨蕊茶로, 아예차 중에서도 최상질의 물건이었다. 이맘때 아예차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은 한 사람뿐이다. 그 증거로 인해 천마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난데없는 일이라 놀랐는데, 잘 생각해 보니 천마가 저렇게 된 연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로환동 하셨군요. 천마 시주. 대단한 내력이십니다.”

기특한 일을 한 아이를 칭찬하는 어미처럼, 여승은 한껏 뿌듯한 태도로 말하더니 기쁘게 합장했다.

어이가 없어진 천마는 그녀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그보다 열 살이나 어린 데다 배분은 그 제자뻘인, 그야말로 까마득한 후배에 불과하면서도 그녀는 늘 저렇게 손위 누이처럼 굴었다.

그것이 본디 그녀의 성품임을 알지 못했다면 화를 내도 열두 번은 더 냈겠지만, 불행히도 저런 성품은 하늘이 내린 천품이라 그의 고약한 성질머리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명색이 정파의 명숙이라는 네가 별걸 다 기뻐하는구나. 내가 반로환동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대세가는 문을 닫아걸었고, 구대문파는 며칠간 산문도 쓸지 않았다더라.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좀 서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네 뿌리를 보아서도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러나 천마 또한 천품이 천품인지라, 완전히 곱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는 슬쩍 꼬인 비아냥거림으로 여승을 희롱했다. 존경받는 명숙이며 정파 제일의 웃어른 반열에 속한 그녀가, 마인 중에 마인인 자신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할 리가 없다는 투였다.

“제가 정파인이니까 이러는 겁니다, 시주. 그렇지 않아도 천하에 상대가 없으셨던 시주께서 도리어 젊어지기까지 하셨으니, 한동안은 천하가 조용할 것이 아닙니까. 시주 덕에 당분간 쓸데없이 피바람이 불 일은 없을 터이니, 정파인으로서 그리고 불자로서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피바람만 안 불면 천하의 주인이 마인이든 협객이든 상관없다 그건가?”

“천하가 어찌 한 사람의 것일까요. 이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 넓은 땅 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시주께서도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 봐도 조곤조곤. 그저 상냥하게만 말을 받는 여승이다. 그러면서도 한 치도 지지 않는 것이 과연 그녀다웠다. 천마는 어이없이 웃고는 암자 앞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았다. 겨울에 쓸 소채를 평상 위에서 말리고 있던 여승은 정갈한 손길로 소채들을 치워 내고 방 안에서 다구를 꺼내 왔다.

천마는 언제 봐도 소박한 암자를 둘러보았다. 고작해야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뿐인 암자는 작다 못해 초라했다. 병풍처럼 봉우리가 사방을 고르게 두른 곡 안의 경치는 수려했지만, 그 외에 볼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뒤꼍에는 손수 돌보는 채마밭과 고즈넉하게 꾸민 화단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다.

그저 평범하고 소박할 뿐인 이 암자는 어느 구석을 봐도 전대 여중 제일 고수였던 검후劍后 조약영曺約英의 처소다운 데가 없었다.

‘궁상맞은 할망구 같으니.’

낮게 혀를 찬 천마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며 괜한 시비를 걸었다.

“이놈의 암자는 무너지지도 않나. 기우뚱기우뚱하면서도 몇 년째 그대로구먼.”

“제가 잘 돌보아서 그렇답니다, 시주. 늙은 몸이라도 바지런 떠는 천성은 어디 가지 않더군요. 잡념을 없애는 데 소일거리만큼 든든한 게 없답니다.”

그녀는 젊어서는 적련원군赤蓮元君이라는 아리따운 이름으로 불렸고, 장년에 이르러서는 여중 제일 고수의 명칭인 검후의 명성을 얻었으며, 늙어서는 출가해 묘원淼圓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녀는 자주 바뀐 이름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잔잔히 웃는 얼굴은 그린 듯이 온후하고 고와서, 그녀의 꼿꼿하게 곧은 심지를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차 드세요.”

그녀는 조용히 꺼냈던 다구로 그새 차를 끓여 내 천마에게 내밀었다. 묘원이 끓여 준 차가 자신이 가져온 아예차임을 알게 된 천마는 조용히 미간을 접었다. 못마땅함이 역력한 천마의 얼굴을 본 묘원 사태가 낮게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차라고는 이것밖에 없어서.”

별로 죄송하지도 않은 것 같은 태도로 묘원 사태가 말했다. 밍밍하니 네 맛도 내 맛도 없는 차를 대접받은 천마는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나? 왜 늘 이것밖에 없는 거지?”

“어쩔 수 없어요. 노납老衲에게 차를 보내 주시는 분은 시주밖에 없으시거든요.”

묘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할 것이다. 천마가 묘원에게 가져오는 것은 늘 똑같은 아예차이기 때문이다. 검박한 생활을 하는 묘원 사태가 유일하게 즐기는 사치가 바로 차이기에 늘 이것만을 가져다주던 천마는 다시 한번 미간에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앞으로는 다른 차를 좀 즐기도록 해봐. 세상에 명차가 얼마나 많은데 고지식하게 늘 아예차만 찾나.”

“왜요. 전 이 차가 좋은데요. 시절은 지나고 사람은 변했는데,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아예차뿐이더군요. 그러니 미련이 남네요. 어린 시절 먹던 맛인지라 질리지도 않고요.”

아예차는 사천성의 아미산 부근에서만 나는 차인데, 묘원은 아미파峨嵋派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아예차를 마시면서 자랐다. 만약 아미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원도 한도 없이 마실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사천이 아니라 청해성靑海省이고, 그중에서도 깊고 높기로 유명한 곤륜산崑崙山의 안자락이다.

천마는 그녀가 왜 하필이면 이 멀고 먼 곤륜산까지 와서 은거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차를 마셨고, 묘원은 웃으면서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년에 받았던 차를 일찌감치 다 마시고 한동안 제대로 된 차를 얻지 못했던 묘원은 조용히 다향을 즐겼고, 여러 가지로 심상이 복잡해진 천마는 묵묵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만족할 만큼 차를 맛본 묘원이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천마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말없이 앉아 백회곡魄回谷을 둘러싼 절벽들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올해도 재는 잘 올렸습니다. 늘 그렇듯 제갈세가에서 공양을 보내왔더군요. 이 먼 곳까지 공양을 보내면서 한 해도 빼놓지 않아요. 정말 제갈 시주다운 일이죠.”

묘원은 무릎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천마는 묘원의 말을 듣고 서늘히 웃었다.

“그래. 확실히 그녀답다.”

천마는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확실히 그녀는 뭔가를 잊는다는 법을 몰랐다. 사랑도, 증오도, 원망도.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그 무엇도 잊지 않고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천마는 그런 그녀가 고맙고도 증오스러웠다. 평생토록 ‘그’를 잊지 않는 그녀가 고맙고, 본인 스스로가 저지른 죄업의 결과를 끝까지 천마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그녀의 태도가 밉고도 증오스러웠다.

“……그녀의 용태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긴 들으셨지요?”

“그래. 그렇다고 하더군. 하긴. 그녀도 벌써 고희가 넘었지.”

조심조심 염려하듯 묻는 어투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천마는 무심히 대답했다. 묘원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뭘 말인가?”

“기린패麒麟佩 말입니다.”

“기린패가 어쨌는데?”

“제갈희련 시주가 숨을 거두고 나면 기린패는 그 아이 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운정 오라버니께서 돌아가신 그때 이후로, 기린패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천하에 없습니다. 우경이 그 아이가 그 패를 손에 든다면 무슨 짓을 할지는 뻔하지 않습니까? 본인에겐 그럴 생각이 없어도 주변의 압력에 밀리고 말 것입니다.”

“하라고 해. 그까짓 것.”

“천마 시주.”

“난 상관없는 일이니, 뜻대로 하라고 해. 누가 뭐래도 난 그 아이의 살부지수殺父之讐다. 정당한 복수를 막을 마음은 없어.”

천마는 입가를 비틀며 신랄한 미소를 머금었다. 묘원은 지독히 그다운 반응에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천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천마는 검협劍俠 백운정白雲靜을 죽였고, 제갈희련의 아들인 백우경은 검협의 아들이기도 했다.

곤륜파 출신으로 호협하고 인정 많던 백운정은 젊은 시절 적련원군 조약영과 의남매 간이었으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림 삼신녀 중에 하나인 녹경원군綠卿元君 제갈희련諸葛喜戀의 정인이었던 남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협객 중의 협객이었다.

원군元君이라 함은 선녀라는 뜻으로, 여신선을 아름답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천하에 손꼽히는 미색이던 정파의 세 여인은 각각 적련원군과 녹경원군, 그리고 포화원군이라는 과분한 호칭으로 불렸었다. 그녀들은 붉은 연꽃, 푸른 대나무, 흰 배꽃이라는 이름 그대로 각각 붉은색, 녹색, 흰색 옷을 즐겨 입었고, 서로 간의 사이도 매우 돈독해서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

사랑보다 무공에 관심이 더 컸던 조약영이나, 태중에 이미 정혼한 약혼자가 있어 일찌감치 혼인한 남궁호혜南宮湖暳와는 달리 타인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겼던 제갈희련은 그 빼어난 미모만큼이나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존재였다. 제갈세가의 고명딸로 태어나 뛰어난 재지를 인정받았으며, 그 영민함과 미모로 인해 수많은 추종자까지 거느리고 다니는 당대의 미인이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녀의 가볍던 애정 행각은 곤륜 출신의 검협 백운정을 만나면서 끝이 났다. 그녀는 백운정의 수려한 외모와 견실한 태도에 단번에 반했고,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를 따라다니다 마침내 그의 정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꿈같은 시절이었지…….’

누구나 젊은 시절을 아름답게 여기기 마련이지만, 조약영에게는 특히나 더 그랬다. 그녀에게 있어 젊은 시절이란 검협이 살아 있던 그 시절을 일컬음이었고, 그녀의 일생에서 그 시절만큼 아름다운 시절은 달리 없었다. 친구들은 의기와 협의로 뭉쳤으며, 옳은 일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뜻을 세우는 데도 거침없었다.

올바르고 굳건하던 검협 백운정. 영민하고 재치 있던 녹경원군 제갈희련. 현숙하고 사랑스럽던 포화원군 남궁호혜. 포화원군의 남편이자 무림 제일의 쾌남아로 일컬어지던 오호권 팽가회.

조약영은 아직까지도 그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웃던 눈부신 날들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호숫가의 버드나무 사이를 걸으며 시와 문장을 토론하고, 불의를 들으면 밤새 말을 타고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끈질긴 미망未忘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그토록 빛나던 시절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40여 년 전에 일어난 호남혈사에 휘말려 팽가회와 남궁호혜는 행방불명되었고, 그들의 구심점이던 검협은 기린패 때문에 융중산隆中山에서 죽었다.

“네 말대로 기린패가 무엇인지는 천하가 다 알지. 운정의 죽음이 기린패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있겠나.”

그렇게 말하며 천마는 냉랭하게 웃었다.

한때 천마를 죽을 만큼 미워하고 원망했던 조약영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변한 곳이 없는 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호남혈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자 의로 맺은 오라비인 검협을 죽인 당사자였다. 만약 우연한 기회에 기린패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직도 천마를 원수로 여기며 그에게 복수할 날을 꿈꾸고 있었을 터였다.

불행하게도, 뒤늦게나마 기린패의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은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해 융중산에서 일어난 일의 진정한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셋인데, 당사자인 천마는 변명할 줄을 몰랐고, 스스로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제갈희련은 그를 진실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제갈희련이 주장하는 이야기만을 알았고 그 이야기만을 믿었다.

백운정의 자식인 우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천마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만 알았지 어째서 죽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집스러운 제갈희련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진실을 자식에게 알리지 않았다.

“기린패가 백씨의 피를 부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기린패의 이름을 또 한 번 유명하게 하는 것은 시주께서도 바라시는 일이 아닐 것 아닙니까?”

묘원은 젊은 날의 원망을 잊고 이제 평온해진 마음으로 남은 생을 보내고 있지만, 속세에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인연의 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절히 말했다.

그녀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오라비의 아들인 백우경도, 그 오라비를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천마도. 지금의 그녀에겐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너희 정파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자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고 하지? 그렇다면 도리를 지키게 해줘야지. 그 아일 유복자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도리도 못 한 자식으로까지 만들란 말이냐? 난 그렇게 못 한다.”

“도리를 다하는 자식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천추의 한을 만드는 일입니다. 부탁입니다. 천마 시주. 기린패를 회수하세요. 그게 최선입니다.”

“한번 줬던 걸 다시 뺏으라고? 아무리 별걸 다 해 본 나라지만, 그런 짓까지 해 본 적은 없구나.”

묘원은 자기 일이 아님에도 깊이 마음이 쓰이는지, 듣지 않는 천마에게 거듭 같은 부탁을 했다. 반면 천마는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허튼소리를 하며 초점을 흐렸다.

“기린패는 앞으로도 두 번의 기회가 더 남았습니다. 그 두 번이 몇 명의 피를 더 부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칫하면 의도하지 않은 혈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런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한 번 남았다.”

“뭐라고요?”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이란 말이다. 제갈희련이 멋대로 기회를 써먹었던 적이 있었지. 아마 그 일이 있고 난 뒤 7년 후쯤일 게다.”

천마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녀, 제갈희련이 운정을 꼭 닮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 그의 앞에 서 있던 그날의 광경은 잊으려야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제갈 시주와 그 일 이후에 만나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묘원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뒤쪽으로 팔을 뻗어 상체를 지탱하는 방만한 자세로, 별일 아닌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그날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기린패를 통해 불러내는 데로 나와 봤더니 제갈희련이 있더군. 옆에는 우경 그 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말이야. 운정이 그렇게 죽고 7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계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어. 새파랗게 독을 품은 뱀 같은 눈동자며, 제가 한 잘못을 죽어도 인정 않는 지독한 고집까지 완전히 똑같았지.”

백우경을 바라보는 천마의 시선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제 어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한 날렵한 턱선에, 제 아비를 빼다 박은 깊은 눈.

소년의 얼굴엔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과 그 사람을 세상에서 지워 버린 원수의 모습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아이의 모습에서 그 아비를 느꼈기에 한순간은 사랑스러웠지만, 아이의 손을 붙들고 있는 어미를 보고 있노라면 그 아이가 혐오스럽기도 했다.

“만나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제갈희련의 표독한 성격도 천마의 거침없는 성미도 모두 잘 알고 있는 묘원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래도 별일은 없었어. 제갈희련이 고집스럽긴 해도 우둔한 성품은 아니거든. 실은 짜증이 날 정도로 영리하고 머리가 좋은 여자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 다 해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고.”

그녀는 기린패를 이용해 절벽과 절벽이 마주 보는 산중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도착해 보니 제갈희련이 서 있는 곳은 천마와 약속한 장소와 마주 보고 있는 반대편 절벽이었다. 그녀는 그 절벽 위에 서서 아이에게 저자가 바로 천마라고 손가락질했다.

“저자가 네 아비의 원수이니, 너는 꼭 저자를 죽여서 이 어미의 한을 씻어 주어야 한다.”

한이 맺힌 듯 절실히 말하는 그녀가 얼마나 가증스럽던지. 그녀는 그러고는 두 말도 없이 산을 내려가 버렸다. 천마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녀를 쫓지도 않았었다.

“……그녀의 배 속에 아이만 없었더라도 나는 제갈세가를 지웠을 거다.”

천마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 아이가 있었어도 갈등은 했지. 정말로 제갈세가를 없애 버리고 싶었거든. 제갈세가와 한 방울이라도 피가 닿은 사람이라면 모조리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천마의 깊은 눈매가 어둡게 짙어졌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 끼우고,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맞잡은 두 손 위로 선명한 환시幻視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결코 묻혀서는 안 될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던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서, 그는 그 사람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 점에서는 그 아이 역시 예외가 아니야. 운정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동시에 그 계집의 자식이기도 하다. 그 아이가 사랑스럽냐고? 그래. 사랑스럽다. 하나 동시에 증오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온전한 호의를 보이지도 못하고, 완벽히 미워하지도 못한다. 아직도 판단을 내리지 못했거든. 그 아이가 이어받은 두 가지 피 중에 어느 피를 더 우선해야 좋을지를 말이다.”

묘원 사태는 서글픈 눈매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천마의 심정이 어떨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기린패의 진실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을 때, 그녀 또한 천마와 완전히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천마가 가엾으면서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결과를 만든 천마에게 화가 났다.

명백한 모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서글픈 자가당착.

“그 아이를 만나 보세요. 천마 시주.”

그 많은 슬픔을 거쳐 숱한 회한도 지나갔다. 이제는 평온함에 안착한 그녀가 가지런한 태도로 천마에게 충고했다. 씁쓸한 천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천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와 같은 일을 홀로 끌어안고 있어서는 결코 매듭짓지 못할 겁니다. 시주의 번뇌는 지나치게 깊고 오래된 것이어서, 시주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 아이를 만나 보세요.

곁에 두고 보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그 아이를 지켜보세요. 그렇게라도 직접 만나 보시고 나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 아이가 시주께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말입니다.”

천마를 바라보는 묘원 사태의 눈은 정갈하게 맑았다. 담담하고, 관조적이고, 그렇지만 투명하다.

그 아이를 만나 봐라? 천마는 입속으로 묘원 사태가 한 충고를 조용히 되새겨 보았다.

‘다 자란 그 아이를, 세월이 지나 죽은 운정의 또래가 된 그 아이를 다시 한번 만나 봐라 이 말이지?’

썩 내키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그녀의 충고는 일리가 있었다. 묘원의 말대로다. 그저 생각만으로 해결될 문제였으면, 그가 아직까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리 없다.

딸랑. 딸랑. 딸랑.

침중한 태도로 고민하는 그의 귀에 난데없는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고즈넉한 암자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망스러운 방울 소리에 의아해진 천마가 고개를 들었다.

묘원 사태는 살짝 당황한 태도로 곡의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이 백회곡은 호리병처럼 배가 둥글고 목이 좁은 형태의 분지여서 천마가 한 것처럼 허공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그곳이 바로 호리병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곡의 입구인데, 시끄러운 방울 소리는 그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천마가 물었다. 묘원 사태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곡 밖에 설치해 놓은 진에서 나는 소립니다. 누군가 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 모양이네요.”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해? 이곳이 이름만 백회곡이지 실은 불회곡不回谷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아직도 있었나?”

“산이란 길을 아는 손님만 찾는 곳은 아닙니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이곳까지 당도하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방울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왔다. 천마는 요란한 방울 소리가 시끄러워서 좀 짜증이 났고, 묘원 사태는 근심스러운 얼굴이 됐다.

잠시 동안 방울 소리를 듣고 있던 그녀는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듯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찾아 신었다.

“누군가 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모양입니다. 외진外陣은 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 들어와 고생하지 않도록 간단히 돌려보내게 되어 있고, 내진內陣까지 들어와야 비로소 발이 묶이게 해 놨는데요……. 방울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 보니 누군가 내진에 갇힌 모양이에요. 제가 가서 꺼내 줘야겠습니다.”

진짜로 그냥 가서 꺼내 줄 작정인지 묘원 사태는 맨손으로 일어났다.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 했다. 누가 무슨 마음을 품고 온 줄 알고 맨손으로 덜렁 간단 말이냐?”

평생을 강호에서 살아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경계심이 없는 태도에 천마는 가볍게 그녀를 나무랐다. 권장법에라도 통달한 사람이면 또 모르겠는데, 묘원은 평생 검 하나만 들고 살아온 검치였다. 저렇게 빈손으로 나갔다가 낭패라도 보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별소리를 다 하시네요. 불자가 그럼 칼을 들까요. 여기 계세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나 묘원은 천마의 걱정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저 괜찮다는 듯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여전히 빈손인 채로 그냥 가버린 것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본 천마는 낮게 혀를 찼다.

‘강호의 은원이라는 게 얼마나 끈질긴 건데 저렇게 방심을 하나. 자기가 마음에서 칼을 놓았으면, 세상 사람들도 다 저처럼 칼을 놓을 줄 아는가 보지?’

천마는 불자라서 칼을 안 든다는 말을 지나가는 개도 안 웃을 변명으로 치부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선장禪杖 대신 계도戒刀를 들고 설치는 소림이며 아미며 하는 것들은 죄다 땡중이란 소리 아닌가?

뭐. 그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설사 그들이 땡중이 맞다고 할지라도 저 멍청한 묘원보다는 영리한 땡중이다. 그들은 악인에겐 도가 없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기 때문이다.

방울 소리는 아직도 멎지 않았다. 묘원이 빈손으로 간 것이 마음에 걸렸던 천마는 자신을 채근하듯 끊임없이 울리는 그 소리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묘원의 뒤를 따라갔다. 해마다 운정의 재를 지내 주는 묘원에게는 그도 마음의 빚이 있었다. 자기가 없는 장소에서라면 몰라도 그가 있는 곳에서 그녀가 다치게 되는 것은 천마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천마가 곡의 입구에 설치한 진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천마는 늘 침착한 그녀답지 않게 황망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진 안을 들여다보는 묘원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란 묘원 사태가 화들짝 몸을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뭐야 저건?”

그녀가 곤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천마는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묘원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진에, 사람이 갇혀서…….”

그래. 그가 보기에도 그렇다. 진 안에 사람이 갇혀 있다. 고작해야 열서너 발짝 남짓 떨어져 있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땅에 몸을 뉜 채 열에 들뜬 눈으로 헐떡거리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천마는 흥미로운 눈길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소금을 맞은 뱀처럼 힘겹게 꿈틀거리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이의 얼굴은 그에게도 낯이 익었다.

호완평이 그에게 붙인 꼬리. 예전에 잠깐 맛만 보았던, 자칭 마영 석문평.

‘내 말을 안 들었군.’

천마는 낮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오지 말라고 따로 명까지 내렸는데 기어이 따라와 저 꼴을 당하다니. 저건 대체 뭐 하는 물건인가 싶다.

명을 따르지 않는 수하에겐 한없이 냉혹한 천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제자인 호완평이 어떤 수작을 벌였을지 대강 눈치를 채고 있는 데다가, 사내가 그에게 보여 주고 있는 광경이 퍽 그럴싸한 절경이었기 때문이다.

석문평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누구에게 잡히기라도 한 듯 허리는 높이 들어 올리고, 다리는 넓게 벌린 외설적인 자세였다.

바닥을 뒹구는 중에 풀어졌는지 상의는 거의 벗겨졌고, 하의도 상태가 아슬아슬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엔 머리카락이 엉켜 붙어 있었다. 초점 없는 눈엔 두려움과 쾌락이 공존하고 있어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웃.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간절히 애원하는 석문평의 목소리는 울음까지 섞여 가늘게 떨렸다.

어디가 만져지고 무슨 짓을 당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반응은 격렬했다. 급하게 숨을 밭으며 허리를 뒤틀고, 누군가가 엉덩이를 움켜쥔 것처럼 경직해서 떤다. 붉게 물든 눈가에서 줄줄 눈물이 흘렀다.

“안 됩니다. 제발.”

짙은 탄식이 가득한 목소리는 제법 애절했지만, 그 목소리의 뒤를 잇는 것은 고자라도 벌떡 세울 만큼 감미로운 교성이었다.

누가 봐도 사내가 지금 겁탈당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절망적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몸짓으로 보건대, 같은 사내에게 당하는 겁탈이다. 속절없이 밀어붙이는 상대에게 당하고 있는 듯 그의 몸은 힘없이 들썩였다.

그를 겁탈하는 상대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적나라하게 그의 반응을 살필 수 있었던 천마는 근래 보기 드문 구경거리를 발견하고 기분이 썩 괜찮아졌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한없이 가엾고 불쌍한 꼬락서니였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천마는 회가 동했다.

전에 자신이 손을 댔을 때는 그저 뻣뻣하기만 해서 안는 맛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싸한 감탕질을 곧잘 한다.

‘어이구. 저 허리 놀리는 것 좀 봐라.’

문평의 본능적인 허릿짓에 눈길을 준 천마는 탐욕스레 입맛을 다시며 눈을 형형히 빛냈다.

“무슨 진을 설치했기에 애가 저 꼴이냐? 환희밀밀진歡喜蜜蜜陣이라도 설치를 한 게냐?”

천마가 눈이 즐거운 광경에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흥미롭게 물었다. 진 안에 든 남자의 정력을 고갈시키기 위해 고안했다는 환희밀밀진은 환음진幻淫陣의 일종으로, 채양보음으로 정력을 키우는 요녀 집단인 환희루歡喜樓의 비기다.

고희가 넘도록 청백지신을 지킨 묘원 사태는 천마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진의 성격과 걸맞지 않게 어처구니없는 상태를 보이는 침입자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붉게 물들인 얼굴로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에요. 번뇌진煩惱陣은 단순한 미혹진迷惑陣으로 진에 갇힌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눈앞에 보이게 함으로써 발을 묶어 두는 구실을 하는 진이에요.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호해서 깊게 빠질 일도 없고, 그저 눈으로만 보게 되는지라 저렇게 격렬하게 느끼지도 않는 진인데…….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높은 신음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처럼, 이를 악문 문평이 팔을 들어 상대를 밀어내는 것 같은 동작을 한다. 그래도 상대는 끈질기게 밀고 들어오는 듯 허리가 들썩이고, 다리까지 더욱 외설적으로 뒤틀렸다.

어찌나 현실감 있게 당하고 있는지 진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귀접鬼接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을 거다.

“도통 이해가 안 돼요. 말씀하신 것처럼 환음진도 아니고, 저렇게 강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진도 아닌데.”

“뭘 잘못 만졌나 보지. 설치된 지가 오래되어서 어디 한 군데 고장이 났든지.”

“저도 그럴까 봐 선뜻 진을 해제하지도 못하겠네요.”

묘원 사태는 여전히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시간이 걸리겠는데, 이걸 어쩌지?”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가상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 무사히 진을 해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진을 해제하는 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구경거리가 늘어나는 천마는 느긋한 태도로 관람에 전념했다.

사내의 허리에 휘감기 딱 좋은 기다란 다리에 강한 허리. 거기에 찰지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가진 문평은 원래부터가 천마의 취향이었다.

제자가 골라 보낸 게 아니라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아마 석문평은 지금 환상 속에서 당하고 있는 꼴을 진작에 경험했을 것이다.

“이상하다? 진은 괜찮은데. 특별히 잘못된 곳이 없는데요?”

자신의 환상에 의해 겁탈당하는 문평을 구해 주기 위해, 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심히 애쓰던 묘원이 초조한 태도로 천마를 돌아보았다. 천마는 그녀에게 말없이 눈썹만 쓱 올려 보였다.

그녀는 다시 억울한 표정이 됐다. 천마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심받는 것이 억울한지 그녀의 온후한 얼굴에는 속상한 감정이 가득했다.

“제 생각에 이 일은 진이 아니라 저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요. 뭔진 모르지만, 지나치게 깊게 두려워하는 게 있어 스스로 그 환상 속에 빠져 버린 것 같거든요. 아마 근래에 몸을 축내는 일이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크게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 한 것 같네요. 예를 들어…….”

“교주님! 안 됩니다. 제발, 크윽.”

“……교주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저것과 비슷한 일을 당했다거나 말이죠?”

변명을 하던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그녀는 석문평이 연이어 내뱉고 있는 ‘교주님’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듣다가, 미심쩍은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교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의혹에 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천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뭘 어쩌라고? 내가 어쨌는데.”

“저 사람이 부르는 교주님이라는 게, 시주 맞으시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별것 안 했어. 적어도 저 아이가 스스로 나간 것만큼의 진도는 나가지 않았거든. 평소에 날 사모했나 보네. 내가 워낙 인물이 출중하잖아.”

천마는 뻔뻔스레 대답했다.

천마가 남색가라는 것은 지금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전대에만 하더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닌지라 다들 쉬쉬하긴 했지만, 천마가 여자는 건드리지 않고 남자만 골라 따먹고 다닌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묘원은 천마의 변명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 시주는 우경이보다도 어리잖아요. 시주한텐 겨우 손자뻘밖에 안 돼 보이는데요!”

“영계 찾는 건 사내라는 생물의 오래된 전통이야.”

“무슨 그런…….”

“한데 저 아인 계속 저대로 둘 텐가? 가만 놔뒀다간 ‘나’하고 한 판 더 뛰게 생겼는데?”

천마의 능글맞은 지적에 고개를 돌린 묘원은 절정에 달한 듯 급하게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흔들어 대는 사내를 보고 황급히 진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간드러진 교성과 신음을 번갈아 가며 내뱉고 있는 사내의 앞섶은 이미 터져 나온 백탁으로 축축이 물들어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녀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불호를 외며 진을 해제하고, 몸부림치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젊은 육체가 음란하게 퍼덕였다.

그녀가 한창일 때도 본 적이 없는 색욕 넘치는 장면인지라 눈을 어디에 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진을 해제하고 나서도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는 사내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그녀의 팔 안에서 땀에 젖은 몸뚱이가 축하니 늘어졌다. 환상 속에서 몹쓸 짓을 당한 젊은이의 얼굴은 정기를 빨리기라도 한 것처럼 핼쑥하기 짝이 없었다.

***

거대한 그림자가 몸을 덮쳐 왔다.

문평은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위에 올라탄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압슬壓膝이라도 가하는 듯 사내의 몸이 무섭게 내리눌렀다.

벌거벗은 서로의 피부가 고스란히 맞닿았다. 사내의 깊은 가슴골과 단단한 쇄골, 복근이 잡힌 딱딱한 허리와 그 밑의 장골까지. 그의 벗은 몸 위로 사내가 가진 몸의 윤곽이 두렵도록 선명히 느껴졌다.

사내가 커다란 손을 들어 허리를 잡았다.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손에 붙잡힌 허리가 부서질 듯 아파 왔다. 긴 혀가 목덜미를 핥아 내렸다. 사람의 것보다는 짐승의 것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두텁고 긴 혀.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지독한 공포감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 하지 마세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눌려 자신 있게 상대를 떨쳐 내지 못한 문평은 오히려 애원이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사내에게 간청했다. 그가 들어도 한심한 애원에 사내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가 웃자 낮은 진동이 맞닿은 가슴께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문평은 두 사람의 면밀히 밀착된 피부가 여실히 느껴지는 감각에 치를 떨었다.

“다리를 벌려 봐.”

사내는 나지막하게 명령하며 문평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예민한 부분을 사정없이 꼬집힌 문평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다리를 벌리라니. 내가 왜!’

경각심이 든 문평은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사내의 무릎을 막을 순 없었다. 어지간한 여자의 허리통만큼 굵은 허벅지가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부드러운 고환과 약한 회음부를 짓눌렀다. 연약한 부분을 사정없이 노출당한 느낌에 문평은 낮게 신음을 삼켰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왔다.

필사적으로 사내의 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저 바르작거리기만 할 뿐 몸 위에 얹힌 육체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내 것을 박아 줄 테니 다리 벌려 봐. 쉬이. 괜찮지?”

사내가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하며 엉덩이를 움켜쥔다.

‘뭘 박겠다고 시팔놈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마음속으론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그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자신도 병신 같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애원만 간신히 흘러나올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내는 그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별 반항도 못 하고 사내의 거대한 양손에 엉덩이가 잡혔다. 동그란 엉덩이의 양쪽을 한쪽씩 잡은 사내가 엉덩이를 벌린다.

문평은 사내를 발길질로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은 사내는 장난치듯 킬킬거리며 웃기만 할 뿐, 자기가 하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제발!”

문평은 구태의연한 애원만 늘어놓으며 엉엉 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덩이는 여전히 헤집어졌고, 그의 분문 앞엔 뜨거운 흉기가 놓였다. 불에 달군 몽둥이처럼 뜨겁고 무시무시한 그것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문평은 있는 힘을 다해 엉덩이를 빼며 애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그러나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웃음소리는 높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하하하. 사내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웃으며 끔찍한 흉기를 들이밀었다. 좁은 구멍이 사정없이 벌어지면서 몸 안으로 불길이 밀려들었다.

“악! 아악!!”

문평은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괴롭게 퍼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 사이로 흉기가 점점 더 깊게 들어왔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몽둥이도 아니고 무슨 통나무를 들이미는 것 같은 충격에 숨까지 막힌 문평은 호흡을 되찾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사, 살려줘. 제발!”

생존의 위협을 느낀 문평이 상대의 어깨를 잡았다. 몸을 가르던 사내는 그의 말에 화답하듯, 허리를 더욱 깊숙이 넣었다.

‘아냐, 이거 말고! 살려 달란 말이다, 이 잡놈아!!’

“억!”

문평은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지불식간에 눈을 뜨긴 했지만, 한 번 박자를 잃은 호흡은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콜록콜록. 급하게 들이켠 숨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문평은 얼이 빠진 듯 혼몽한 채로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끔찍한 봉변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등은 땀에 젖어 축축했고, 온몸은 골고루 쑤시고 아팠다. 뼈는 뼈대로, 근육은 근육대로 분리되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개중에서도 가장 힘든 부분은 바로 허리다.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척추 마디마디가 아팠다. 문평은 아픈 허리에 손을 갖다 대며 아직 초점도 맞지 않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그가 누워 있던 방은 참으로 소박했다. 침상과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는 손수 깎은 듯 투박했으며, 건너편 벽에는 마찬가지로 화공의 솜씨가 아님이 분명한 수수한 필치의 탱화가 놓여 있었다. 비록 흙만 바른 벽이지만 방 안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어디선가 은은히 향냄새도 풍겼다.

‘암자…, 인가?’

방 안을 감도는 지나치게 정갈한 분위기를 느낀 문평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암자가 아니면 불심 깊은 촌로의 집일 것이다.

‘나를 구해 준 사람의 집인 건가?’

문평은 땀으로 척척하게 젖은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슨 일을 당했기에 집주인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일까?’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의아했던 문평은 목덜미를 문지르다 말고 멈칫했다. 손끝에 상처가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문댔더니, 피딱지가 떨어져 나왔는지 피부가 따끔하다.

문평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덜미의 상태를 살폈다. 꼭 맨땅에 문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뒷덜미의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깊은 상처가 난 것은 아니지만, 꽤 넓은 부분이 갈려 버린 듯 뒷목 전체가 따끔따끔하게 아프다. 누군가 피를 닦아 내고 약초를 붙여 준 모양인데, 그 덕분에 몸에선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겨진 녹색의 약초물이 묻은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문평은 혼란한 머릿속을 더듬었다. 다소간의 노력이 소모된 이후에야 기억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문평은 눈을 감고 천천히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그의 기억은 천마의 뒤를 추적하던 시점부터 다시 시작됐다. 문평은 몇 번이나 거듭해 천리지청술을 시전한 후에야 마침내 천마가 있는 방향을 간신히 읽어 낼 수 있었다. 문평은 지체 없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법을 필사적으로 운용했다. 자칫하면 기척을 놓칠 만큼 그들의 거리는 멀리 벌어져 있었다. 문평은 주변을 돌아볼 여력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남다른 감각을 가진 문평은 문득 뭔가 꺼림칙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덜컥 주위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낮이었는데 갑자기 사위가 컴컴해지고, 멀쩡하던 숲이며 바위 따위가 다 사라졌다.

‘뭔가가 잘못됐다.’

놀란 문평은 황급히 발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갑작스레 오감이 먹먹해졌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는 소리가 없고,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도 없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마저 무겁고 답답했다. 사방은 어둠뿐이었고, 주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괴괴한 적막만이 흘렀다.

‘이런 젠장. 진에 빠졌구나!’

문평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이토록 깊은 산중이니 은거기인의 처소 하나쯤은 있을 거란 짐작을 했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달리기만 했던 문평은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야 깨닫고 뼈아픈 자책을 했다.

무슨 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걸리고 나니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문평은 진 안에서 경솔히 움직이면 어떤 꼴이 나는지 잘 알기에 마치 독 있는 뱀을 밟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없이 제자리에 섰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서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험난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그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바로 그때. 눈앞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문평은 경계심 어린 얼굴로 눈을 들었다. 자욱한 어둠을 헤치고, 한 남자가 문평을 향해 걸어왔다. 육 척 장신인 그보다 족히 네 치는 더 큰 위압적인 키에, 지나치게 완벽한 몸매를 한 그 남자는 문평도 익히 아는 상대였다.

“교, 교주님?”

문평은 당혹스러운 음성으로 사내를 불렀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 교주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평을 노려보았다.

상상치도 못한 상대의 등장에 문평은 깜짝 놀랐다. 사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소심한 심장이 두근두근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한다.

‘내가 뒤를 쫓는 것을 알고 있었나? 그래서 일부러 나를 여기로 유인한 건가?’

천마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따져 보던 그는 점점 더 불길한 가설을 떠올렸다.

‘설마 지금 이 진을 천마가 쳐놓은 건 아니겠지?’

천마가 직접 내린 명을 과감하게 어긴 데다, 당사자에게 딱 걸리기까지 했다. 찔리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닌 문평은 제 발이 저려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문평은 차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천마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숙인 머리 위로 와 닿는 눈길은 한없이 무심해서, 천마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광영된 주인인 교주님을 뵈옵니다. 추, 충성.”

잠시 멍청하게 서 있던 문평은 뒤늦게야 정신을 수습하고 예를 올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는 천마가 문평은 죽도록 두려웠다. 바들바들 떨면서 무릎을 꿇자 머리 위에 슥 천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 어라?’

불길한 예감에 섬찟 몸을 굳힌 문평의 어깨에 묵직한 손길이 다가왔다. 헉, 낮게 신음을 흘린 문평이 겁에 질린 눈을 들어 천마를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든 시선에 코앞까지 다가온 천마의 얼굴이 보였다.

뜻밖에도 천마는 웃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무서운 눈을 하고서.

문평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 소리는 불행히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천마의 뜨거운 혀가 그를 덮친 것이다. 천마는 그를 막무가내로 땅바닥에 넘어트렸고, 문평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천마에게 깔렸다.

그 뒤는 뭐. 따로 설명하기도 싫은 지옥이었다. 천마는 예전에 못다 한 일이 못내 아쉬웠던지 집요하게 달려들었고, 문평은 목이 쉬도록 울면서 천마에게 당하고 또 당했다.

천마의 거대한 성기가 무자비하게 쑤셔 박힌 엉덩이는 피 칠갑이 되었고, 천마의 허릿짓에 덩달아 흔들린 허리는 고통으로 인해 세울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진짜로 아팠다.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가 상상하던 모든 최악의 사태가 고스란히 현실이 된 것이다.

‘결국, 당하고 말았구나. 곽진무의 말을 그렇게 흘려듣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했어야 했는데!’

지나간 기억을 모두 떠올린 문평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문평은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바보처럼 방심하고 말았던 스스로를 나무라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천마가 자신의 몸 안을 가르던 감촉이 너무도 생생했다. 아직도 그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것처럼 허리가 뻐근하고 엉덩이가 무거웠다. 아마 항문 또한 심하게 찢어져 있을 것이다.

‘불쌍한 내 엉덩이. 불쌍한 내 항문.’

문평은 깊게 애도하는 기분으로 엉덩이를 매만졌다. 대체 어느 정도로 끔찍한 참상이 일어났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엉덩이가 멀쩡했다.

‘어?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문평은 이불을 걷고 자신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벌거벗은 나신 위에 덧입었던 흑색 장포를 풀고 이곳저곳 꼼꼼히 살피는 그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연하게 질려 갔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몸은 의외로 상한 구석이 없었다. 피부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였던 순흔도, 강한 악력에 잡힌 멍 자국도 없다.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흔적 몇 개는 더러 있었지만 그 이상의 상처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일은 엉덩이가 진짜로 멀쩡하다는 사실이었다!

좀 욱신거리긴 했지만 피도 없고 찢어지지도 않았다. 혹시나 해서 손을 넣어 더듬어 보기까지 했지만, 정말로 다친 곳이 없었다.

“깨어나자마자 자위부터 시작하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음란한 몸이군.”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낯부끄러운 소리를 서슴없이 내뱉는 상대의 언사에 울컥해 돌아봤던 문평은,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는 그만 허옇게 질리고 말았다. 상대는 무려, 또다시, 천마였다.

흰 경장 차림을 한 천마가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두 팔로 팔짱을 끼고 긴 다리는 불량스럽게 꼬아 기대고 선, 지극히 파락호스러운 자세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엔 짓궂은 빛이 가득했는데, 문평은 그 이유가 자신의 항문을 검진하고 있는 손가락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손을 빼냈다. 정확히는 항문에 집어넣은 게 아니라 그 주위를 더듬어 본 거지만, 다리를 벌리고 앉아 뒤쪽에 손을 대고 있었으니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교, 교주. 광영이…영광…….”

문평은 남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광경을 보였다는 수치심에 죽을 것같이 부끄러워져 더듬더듬 정신없이 말했다. 일단 인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있어 제대로 된 문장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문평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붉다 못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디 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하게 붉어진 얼굴이 수치심과 치욕감으로 범벅되었다.

강제로 옷이 벗겨진 사람처럼 이불자락을 끌어올려 몸을 가린 문평은 시선조차 들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꽤나 재미있는 짓을 하더군.”

음미하는 시선으로 문평의 모습을 관찰하던 천마가 천천히 운을 뗐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혼란에 빠진 문평은 뜨거운 코를 무릎에 박을 때까지 몸을 웅크리며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천마의 시선을 피하고자 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으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마의 눈은 재미있다는 듯 더욱 가늘어졌다.

“내가 잘하던가?”

그는 불쑥 던지는 어투로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문평은 자신에게 한 것이 분명한 질문에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사라져 땅속으로 파고들고 싶은데 천마가 자꾸 말을 거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심정이 어떻든 간에 교주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문평은 더듬더듬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 속에서 말이야. 네가 반응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등장하는 환상을 보고 있는 모양이던데, 상당히 흥미로웠어. 그런 요란한 환상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거든.”

‘환상? 무슨 환상?’

문평은 천마가 하는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눈만 깜빡였다. 천마는 친절하게도 그런 문평을 위해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기억이 안 나나? 곡 입구에 설치된 진에 걸렸었지. 단순한 미혹진에 불과했는데 단단히 홀려서는 마치 귀접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뒹굴더군.”

천마는 나긋나긋 상냥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화, 환상? 그게 환상이었다고?’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둔탁한 통증을 느낀 문평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그게 다 환상이었다고? 억지로 다리를 잡아 벌리던 강인한 악력도, 몸 안으로 파고들던 그 엄청난 흉기도, 이 끝에 씹히고 깨물리던 그 통증들도 전부 다?

‘그, 그래서 흉터가 없었나? 그게 죄다 환상이라서?’

지나치게 말끔한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설명이긴 하다. 하지만 문평은 눈앞에 증거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천마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꼭 천마가 자신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

문평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실제 같은 환상이 대체 어디 있어? 진을 펼친 사람이 무슨 귀곡자라도 돼?’

문평은 자신의 몸 위로 올라왔던 남자의 무게며, 그의 피부와 닿던 감촉, 심지어는 귓전으로 불어넣던 숨결까지 모두 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그 모든 게 가짜라고 한다.

‘그게 진 때문에 보인 환상이라고? 내가 미혹된 거라고?’

당할 거 다 당하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억울했다. 그의 심정으로는 꼭 진짜로 당한 것만 같은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니 억울한 마음을 누구에게 배상받아야 좋을지 모르겠다.

“네 환상 속의 나는 어땠지?”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문평의 앞으로 천마가 걸어왔다. 어슬렁어슬렁. 그렇게밖에 형용할 수 없는 느릿한 발걸음임에도 문평은 맹수를 떠올렸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앞에 두고 유유한 맹수처럼, 벽으로 등이 막혀 더 이상 도망갈 데도 없는 문평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천마는 완벽한 포식자의 기운을 뿜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던가? 잘 빨아 주던가? 설마 다짜고짜 박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 애무는 해줬나? 저번에 보니 젖꼭지가 예민한 것 같던데, 그곳은 제대로 만져 주었겠지.”

문평은 천마가 쏟아 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살초를 섞은 초식 같다고 생각했다.

‘뭘 묻는 거야 대체. 나더러 어떤 대답을 하라고!’

완전히 현실처럼 느껴졌던 정사가 실은 환상이었고, 정신적으로는 진짜로 겁간당한 거나 다름없는데 실제로는 아니라고 했다.

문평은 도무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소식에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쉴 틈을 주지 않고 쏟아지는 천마의 공격에 정신적으로 멍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닌 것 같군. 그래. 그럴 것 같았지. 네가 내 환상에 당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는데,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더라고.”

태평하게 말하던 천마가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얼굴에 드러나는 못마땅한 기색에, 문평은 간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 환상이라고 해도 명색이 나를 전제로 한 환상인데, 상대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게 하고 그저 울리기만 했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거든. 네가 보기엔 내가 그렇게 못할 것 같으냐? 이 나이를 먹도록 상대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그저 아프게만 할 것 같아?”

문평은 실제로 그러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것은 몹시도 위험한 일인지라 차마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말할 수 없었다. 문평은 그저 우물쭈물 얼버무리며 답변을 회피할 뿐이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남이 기껏 어렵게 대답을 하고 있는데, 천마는 듣지도 않았다.

“설마 저번에 있었던 일을 근거로 단정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가 퍽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말이지. 만약 그런 거라면 섭섭할 거야. 매우 섭섭할 거야.”

“교, 교주님.”

“환상에서 당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울부짖게 만들어 주겠어. 나는 나를 오해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는 성격이 아니거든.”

단호한 태도로 말을 끝낸 천마가 음험하게 웃었다. 실제로는 어떻게 웃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문평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런 걸 두고 바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던가? 아니다. 이건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지고, 갈비뼈도 부서진 데다, 발가락까지 열 개 다 동강 난 꼴이다.’

문평은 발밑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만 같은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환상 한 번 잘못 봤다는 이유로 천마에게 깔려 울부짖어야 할 처지가 되다니. 문평은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환상을 본 게 어디 내 탓이야? 따지려면 진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사람에게 가서 따져야지! 왜 애꿎은 날 가지고 트집이야. 내가 뭘 했는데. 내가 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제껏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을 모조리 참아 왔던 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뭐 하시나요, 천마 시주.”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그야말로 미치고 펄쩍 뛸 것 같은 기분이 된 석문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였는데, 방 안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문평은 엄청난 좌절감으로 인해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눈을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쉽게 입맛을 다신 천마가 몸을 비키자 지나치게 큰 천마의 몸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 그녀는 아담하게 작은 몸집에 회색 가사를 두른 여승이었다. 불혹이 넘어 보이는 나이지만, 아직도 젊은 시절의 미태를 곱게 간직한 그녀는 몹시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허리춤에 맑은 물을 가득 담은 대야와 마른 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그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은 눈앞의 여승인 모양이었다.

“내 거니까, 상태를 들여다보는 중이지.”

물론 ‘내 수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 문평은 이렇게 된 시점에서도 애써 현실도피를 시도했다.

“벌써부터 괴롭히지 마세요. 이제 막 깨어난 사람인데요.”

그녀는 부드럽지만 나무라는 것이 역력한 어투로 천마를 탓했다. 천마는 내가 뭘, 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천마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조용히 한숨을 쉰 여승이 몸을 돌려 문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에 애써 밝은 미소를 띠더니 살갑게 말을 붙였다.

“예상보다 일찍 정신을 차리셨네요. 다행입니다. 기가 많이 허해져서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할까 염려했었거든요.”

그녀의 웃음은 참으로 자애로웠다. 따뜻한 품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온화한 눈빛에, 어린아이처럼 맑고 부드러운 신색. 그녀는 보는 사람을 절로 편안케 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불온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누구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감사합니다. 스님. 은혜를 입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문평은 정중한 태도로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여승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합장했다.

가까이서 보니 첫인상보다는 좀 더 나이가 있는 얼굴이다. 불혹은 물론이거니와 지천명知天命14)은 족히 넘었을 만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연연한 미모는 그녀의 젊은 시절이 얼마나 영화로웠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누구지?’

문평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을 빼앗기면서도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천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라고, 그런 괴이하고 무서운 진으로 무장한 곡 안에서 사는 사람이 결코 정상적인 인간일 리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저렇게 아름답고 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대의 노마老魔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문평은 한술 더 떠 그런 추측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누가 알겠어? 저 아름다운 모습조차도 간악한 방법으로 유지하는 것일지. 저 여승은 알고 보면 채양보음으로 젊은 사내의 정혈을 갈취해 젊음을 유지하는 환희루의 노고수일지도 몰라. 그 진도 이상했잖아. 꼭 환음진 같았다고. 천마는 미혹진이라고 말했지만, 세상에 어떤 미혹진이 그런 끔찍한 참상을 보게 만들겠어? 그건 틀림없이 환음진이야.’

문평은 천마에게 당한 직후라 경계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여승의 겉모습에 절대 속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옷깃을 여몄다.

문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은 묘원 사태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가엾은 아이 같으니. 하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묘원 사태는 내심 불호를 외며 생각했다.

천마와 문평 사이에 일어난 일을 거의 정확하게 추측한 그녀는 안타까운 기분으로 문평을 동정했다.

고희가 넘은 그녀에게 있어서 문평은 거의 사손뻘이나 다름없는 까마득한 아랫배분의 사람이다. 건장한 성인 남자라고는 하지만 나이 든 노인의 눈엔 온전히 그런 것만도 아닌지라, 그녀는 길 잃은 어린아이를 보듬는 듯한 기분으로 문평의 처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주께서도 무인이시니 본인의 몸을 잘 아시겠지요. 현재 시주는 심신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괴롭힌 후에 헛것까지 본 터라 심기가 많이 상했답니다. 되도록 안정을 취해야 해요. 노납이 혼자 사는 암자라 불편한 것이 많겠지만, 원한다면 언제까지든 쉬다 가도록 하세요.”

그녀는 침상 옆의 탁자에 가지고 왔던 대야와 수건을 내려놓았다. 만약 문평이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다면 그녀가 닦아 주었겠으나, 문평이 정신을 차린 데다 몸을 사리고 있어 스스로 몸을 닦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럼 좀 더 쉬도록 해요. 혹여 배가 고프면 부엌으로 가보세요. 아궁이 안에 산마를 묻어 놓았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천마를 채근해 방을 비워 주었다. 문평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가 자리를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이 사라지자, 그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과도한 긴장 때문에 흘린 식은땀으로 등허리가 척척했다. 문평은 땀 때문에 살갗에 달라붙는 흑색 장포를 벗고 그녀가 놓고 간 대야의 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했다.

몸을 닦으며 꼼꼼히 살펴봐도 정사의 흔적은 없었다. 정말 그 모든 게 진이 불러일으킨 미혹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겪은 일이 실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문평은 몸을 닦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 보니 참 별일을 다 겪는다. 내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내가 된 것인지 구별이 안 되는 꿈을 가리켜 장자몽莊子夢이라고 한다던가. 문평은 정말로 한바탕 꿈을 꾼 기분이었다.

‘뭐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자.’

그의 앞에 놓인 골치 아픈 상황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눈앞에 닥친 터라, 석문평은 상념에 오래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당한 그 일이 죄다 환상이었던 것까지는 좋다 이거다. 환상 따위에 휘둘린 게 아무리 억울해도 진짜로 당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지금 문평이 골치 아픈 건 그다음 상황이다. 환음진에서 있었던 일을 빌미 삼아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는 천마. 그런 천마에게서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지금 그의 앞에 놓인 당면 과제였다.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거냐고? 마교에 사내가 나 하나야? 만만한 수하가 나뿐이야? 왜 나만 갖고 그래!!’

의지할 데 없는 고아로 병영을 굴러다닐 때조차 겪어 보지 못했던 정조의 위협이다. 꽃다운 열서너 살의 미동도 아니고, 나이는 서른을 넘은 데다 키는 육 척.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 한번 들어 본 적 없는 장신인 데다, 곱다는 소리는커녕 잘생겼다는 소리 한 번 못 들어봤다. 그런데도 천마는 문평을 진지하게 눈독 들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안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확연히 그랬다.

젖은 천을 손에 든 문평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천에서 흐른 물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지만 차가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승은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구중궁궐 안의 후궁들이 들으면 복 받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고 일갈할 고민이지만 그는 정말로 그것이 문제였다.

***

“그 일만큼은 안 됩니다.”

창백하던 눈가가 흥분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이였으면 보기 싫은 적면赤面이었을 테지만, 피부가 유달리 하얀 포영의는 눈가에만 은은히 핏기가 돌았다. 꼭 여인이 정성 들여 눈 화장을 한 듯 곱게 번지는 복숭앗빛이다. 호완평은 단단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그런 포영의를 바라보았다. 포영의 또한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지지 않고 호완평을 마주 보았다.

기린패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꺼낸 이후로 벌써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포영의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거듭된 호완평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포영의는 변함없이 완고했다. 완고할 뿐만 아니라 강경하기도 해서, 도리어 포영의 쪽에서 호완평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늘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그가 이 문제에서만큼은 화를 내고 소리까지 쳤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은 언제나 제자리걸음만 하다 끝났다.

“안 됩니다. 이번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포영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다시금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부님을 모르십니까? 사부께서 아무리 사형을 총애하신다지만 그런 일을 용서하시진 않을 겁니다. 세상에, 기린패라니요! 그분이 기린패와 관련된 일에 얼마나 민감하신지는 사형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여태껏 그 일에 대한 참견은커녕 언급조차 용납하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제라고 용서하실 것 같습니까?”

포영의는 거의 고함치듯이 말했다. 그러나 호완평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포영의가 이 정도 반응도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으냐. 앞으로 다가올 비극을 막기 위해선 달리 방법이 없다.”

“백우경이 당할 일만 비극입니까? 사형께서 당하실 일은 비극이 아니고요?”

기가 막힌 포영의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문제다.”

“다르긴 뭐가 다릅니까? 혈육이 혈육을 죽이나, 사부가 제자를 죽이나 손에 묻는 피는 똑같습니다. 이런 게 사부를 위하는 일 같습니까? 제 생각엔 절대 아닙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을 뒤로 미루기 위해 괜한 목숨만 날리는 것 같단 말입니다! 이번 일이 사형의 핏값으로 정리된다 한들 다음엔 어찌하실 겁니까? 이 다음번의 일은 사형이 저세상으로 간 후에 일어날 텐데, 그땐 또 어찌 막으시려고요?”

“뒷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틀어막고 가면 되겠지.”

“무슨 수로요?”

“기린패를 부숴 버릴 생각이다.”

“사형!”

“그게 제일 깔끔한 방법이다. 아예 길을 없애는데 제가 어찌 이곳까지 와 닿겠느냐.”

남은 기가 막혀 돌아가시겠는데, 정작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른 호완평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느낀 포영의는 치미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이 정신 나간 대사형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사부 하나밖에 없어서, 제 목숨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사부의 뒤만 좇는 이놈의 미친개를 자신이 대체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그들의 사부인 천마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남들이 생각하기에 있을 수 없는 무례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보통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일에는 불같이 화를 내는 괴팍한 성정을 갖고 있었다.

일을 판단하는 기준도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져서, 전날에는 너그럽게 보아 넘긴 일을 오늘은 용서하지 않는 등 몹시 제멋대로였다.

그렇듯 변덕스러운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기린패와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사부는 이 일만큼은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했는데, 그는 초지일관 강경한 태도로 그에 대한 접근을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론 해내지 못하겠지. 어쩔 수 없이 네 도움이 필요하구나.”

호완평은 진지한 눈으로 포영의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알고 자신도 아는 죽을 자리이건만, 같이 손잡고 가자는 말을 하는 호완평의 태도에서 부끄러운 기색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이 죽자는 말씀을 더없이 쉽게 하시는군요. 저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포영의는 냉담하게 그의 청을 잘라 냈다.

“영의야.”

“사형, 저를 사제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런 일에 끌어들이지 말아 주십시오. 자기 목숨이 쉽다고 해서 남의 목숨까지 쉬워 보입니까? 말리는 제가 옳고, 하겠다는 사형이 나쁜 겁니다. 이 이상 실망스러운 행동, 보이지 마세요. 사형.”

포영의는 이를 갈며 말했다. 호완평은 그러한 포영의의 태도에, 그가 이번 일로 자신에게 얼마나 크게 화내고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포영의를 설득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말했던 대로 이 일은 포영의의 도움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갈세가 출신으로, 당대를 호령했던 여걸 제갈희련은 병상에서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내는 제갈세가는 온갖 기문진과 함정으로 둘러싸인 철옹성 중의 철옹성이며, 그야말로 용담호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장소다.

그런 제갈세가에 침투해 보물의 위치를 찾는 일이었다. 포영의가 장악하고 있는 추밀각의 정보력 없이 기린패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기린패를 빼돌린다는 것은, 추밀각의 정보력을 가지고도 오히려 부족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건 사부님을 위한 일이다. 안 그러냐?”

“전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드렸습니다.”

“난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혈육의 피는 손에 묻히는 것이 아니다. 사부께서 아무리 대범한 분이셔도 그런 일까지 편히 잊지는 못하실 것이다. 영의야, 난 그분에게 그런 참혹한 일이 없었으면 한다. 너를 키워 주고 나를 키워 주신 분이시다.”

“사부께 큰 은혜를 입었음은 저도 잘 압니다. 자칫했으면 그저 남첩으로 끝났을 운명인 저를 이렇게까지 세워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시지요. 그래서 저는 더욱 저 자신을 아깝게 낭비할 순 없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기회를 아무렇게나 버릴 순 없기 때문입니다.”

옥신각신. 사형제 간의 대화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진전 없이 이어졌다. 포영의도 호완평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영의의 도움이 없으면 일을 이룰 수 없는 호완평은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자칫하면 목숨이 날아갈 위험한 일에 발을 담글 생각이 없는 포영의는 계속해서 그의 권고를 물리쳤다.

화가 난 포영의의 얼굴은 홍조가 더욱 짙어져 이제는 뺨과 목덜미까지 울긋불긋하게 물들었다. 평생 그를 보아 온 호완평조차도 처음 보는 화난 얼굴이다.

더는 참을 수 없어진 포영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완평도 따라 일어나며 포영의의 손목을 잡았다.

“영의야!”

“이거 놓으십시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도와다오.”

“그럴 순 없습니다.”

“부탁이다. 다시 생각해 보렴. 이 일은 너에게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제가 당과에 넘어가는 어린아이인 줄 아십니까? 그 일이 말씀대로 되지 않을 것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호완평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포영의는 냉소적이었다. 그럴밖에. 그는 호완평만큼이나 자기 사부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네게 피해가 가게 하진 않겠다. 되도록 내 한목숨으로 끝나도록 애쓸 것이다.”

자기 말이 먹히지 않음을 알았음일까. 호완평은 그에 더해 단서를 달았다. 그 말을 들은 포영의는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저게 대체 무슨 약속이 된단 말인가. 그게 제멋대로 장담할 수 있는 문제던가?

“그게 사형 뜻대로 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게 만들겠다. 그게 내 약속이다.”

“전 사형 목숨이 날아가는 것도 싫습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라. 이 일은 네게도 큰 손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렴. 내가 사라진다면 소교주의 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다름 아닌 너다. 세상일에 관심 없는 둘째도, 여인인 막내도 이을 수 없는 자리이니 남은 사람은 너뿐이지 않겠느냐? 차기 천하제일인의 자리다. 마교의 교주요, 천마의 후계자다. 그 자리가 네 것이 될 것이다.”

호완평이 절실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포영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잠시 미동도 않고 제자리에 서 있던 포영의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눈을 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해 참람한 말을 하는 사형을 노려보았다.

“사형은 제가 그런 걸 바라는 줄 아셨습니까?”

포영의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며 차갑게 되물었다.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겉치레일 뿐, 그 속내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치욕감에 입술이 떨렸다. 조금 전 스스로 느끼기 전까진 자신에게 존재하리라곤 생각도 못 해 본 어마어마한 배신감이 그의 심장을 덮쳤다.

‘내가 이제껏 보여 준 모든 성의를, 사형은 고작 저따위로 해석하고 있었단 말인가?’

포영의는 뜻하지 않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자신이 그에게 바쳤던 충성을. 그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따르던 마음을. 호완평은 제대로 봐 주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일이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했고, 그의 손을 더럽혀야 할 상황에는 기꺼이 나서서 자신의 손을 더럽혔다. 그러나 호완평은, 그가 보인 모든 정성과 애정을 한낱 가식으로 치부했다. 그동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실상 마음에 품고 있던 속내는 결국 저랬던 것이다.

그는 포영의를 호시탐탐 사형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로, 그러면서도 사형의 앞에서는 견마지로를 다하는 교활한 인간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포영의를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얼굴에 덧씌운 가면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속은 뒤집혔고, 목 안에선 신물이 올라왔다. 토할 것 같다.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기분인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포영의는 애써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호완평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다. 하나 호완평은 그의 팔을 한층 더 힘주어 잡았다. 분한 마음에 공력을 일으켜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한 공력이 손목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너를 모욕함이 아니다. 내가 이리도 간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 모든 것과 다름이 없었던 교의 지위조차 버릴 만큼. 사부의 후계 자리를, 차기 천하제일인이나 다름없는 그 자리를 서슴없이 버려도 좋을 만큼 내게 그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사형이 그런 데 의미를 두는 분이 아니심을 제가 잘 압니다.”

포영의는 냉혹하게 대꾸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나라고 사람이 아니겠느냐? 나도 무인이고 사내인데 야심이 왜 없겠느냐?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버리지 않았을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소중히 보듬고 공을 들여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들었을 자리다.”

포영의는 차갑게 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파랗게 멍든 시선으로 호완평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니. 아니겠지요. 사부께서 주신 것이니 소중했겠지요. 그분께서 그 손에 쥐여 주려고 하신 것이니, 필요 없다 여기면서도 버리지 못한 거겠지요.’

호완평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호완평을 잘 알고 있는 포영의는 그가 말한 거짓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이 사람은 늘 이렇다. 포영의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 내내 그의 눈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걷어차도 다시 주인의 발치로 기어드는 충직한 개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가치를 온전히 천마 한 사람에게 맞춘 호완평은 징그러울 만큼 끔찍이 하나에만 몰두했다.

‘저런 사람에게, 저렇게 오로지 하나만을 바라는 사람에게 나는 대체 뭘 원하고 있었단 말인가.’

포영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상처를 받는 스스로의 마음이 가소롭다고 생각하며 허허롭게 웃었다.

지독한 허탈감에 마음속이 텅 비었다. 예전엔 거기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주 빛나고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다 주고 싶어요? 정말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까? 조금의 주저도 없습니까? 자기 자신을 다 내주는 건데요. 자기 인생, 자기 목숨, 자신의 명예. 평생을 쌓아 온 모든 것을 그냥 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당신은 정말 그래도 괜찮단 말입니까?’

포영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호완평의 얼굴을 향해 냉소적으로 물었다.

“사형.”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호완평은 분명 괜찮다고 할 것이다. 한술 더 떠 사부를 위해 그럴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포영의가 아는 호완평은 그런 사내였다.

하지만, 설사 호완평이 괜찮다고 할지라도 포영의가 괜찮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리 바라도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내버려지는 것을 그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저는 그런 것 따위 바라지 않습니다.”

포영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눈을 떴다. 흔들리던 가슴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겁게 뭉쳐 떨어져 내리던 눈물과 조각조각 부서지고 깨어진 심장, 그의 가슴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아니, 차라리 시체가 된 것 같았다.

“사형이 진정으로 아끼지 않았던 것들 따위. 그저 거추장스럽게만 여겼던 그런 것들 따위엔 저도 관심 없습니다. 그렇게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사형. 차라리 다른 걸 주십시오. 사형이 주고 싶은 게 아니라 제가 받고 싶은 것을 주세요.”

포영의는 건조하게 버석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스스로가 내는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처럼 모호하고 아득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침내 포영의는 그렇게 대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설득하던 호완평에게, 그가 필요 없다 내다 버리는 쓰레기를 받는 조건이 아닌 제가 원하는 것을 얻는 조건으로 항복하고 말았다.

호완평은 포영의의 대답을 듣고 환하게 얼굴을 폈다. 포영의는 그 모습을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기뻐할 줄 알았어. 당신은 정말 모든 것을 걸었지. 하지만 당신은 모를걸? 내게 뭘 대가로 치러야 할지.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야.’

적어도 모든 걸 끝낸 뒤에, 자신이 직접 눈앞에서 대가를 요구하기 전까지 호완평은 자기가 포영의에게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이 기어코 원하던 바로 그것을, 그에게서 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영의는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호완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자기 자신이 호완평 못지않은 바보 천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호완평에 대한 일이라면, 그는 원래부터 똑똑했던 적이 없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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