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춘야
사희는 딸의 둥글게 부푼 배를 만졌다. 아직 완연히 언덕을 이루는 게 아닌데도 보기 좋게 둥근 것이 탐스러운 과일 같았다. 사희는 언젠가 딸을 가졌던 때가 생각나 미소가 지어졌다.
“귀한 아드님일 것 같아.”
“어째서요?”
“서 대인께서 꿈을 꾸셨거든. 그게 내 생각엔 태몽 같아.”
은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희는 순하게 웃었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그녀보다 어린 소녀를 마주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이런 여인이었다.
“서 대인께서 태몽을 꾸셨다고요?”
“응. 대인께선 내가 너를 가졌을 때도 태몽을 꾸셨대.”
“···신기하네요.”
“너를 가졌을 땐 상제의 따님에게서 오색으로 빛나는 복숭아를 한 아름 얻으셨다고 했어.”
어머니가 웃었다. 은환은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째서 서 대인이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태몽을 꾸었는지 모를 일이다. 서 대인은 아버지를 끔찍이도 싫어하는데 말이다. 아니.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며 역겨워했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그녀에게만은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했다. 은환이 그것을 당연하게 느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서 대인이 언제나 그러해 왔기 때문이었다.
“대인께선 이번엔 어떤 태몽을 꾸셨대요?”
“그게 말이야. 사냥하기 위해 숲으로 갔는데 온통 황금색으로 빛나는 호랑이를···.”
은환이 호기심을 보이자 사희가 조잘대기 위하여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그때 밖에서 투레질 소리가 나더니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놀라 은환의 손을 움켜잡았다. 은환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침소 밖으로 나섰다.
“환아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은환은 금의위를 대동한 채 서치윤의 자택을 찾아온 윤협을 바라보았다. 고작 나흘이었다. 나흘인데도 흉흉할 정도로 야위었다. 그녀는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사달이 난 것을 듣고 궁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가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그립다고 하지 않으면 거짓말일 것이다. 은환은 궁을 뛰쳐나오면서도 그의 체취를 잊지 못해 울음을 삼켰으니까. 그런데도···.
“돌아가자.”
수척한 얼굴이 음울했다. 근육으로 두툼하던 흉통 또한 전과 달리 얇아진 느낌이었다. 하긴 화 태비께서 훙서하셨으니···. 은환은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서 대인은 은환이 황궁을 나오게 된다면 굳이 화 태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은환은 여전히 그녀의 며느리였고 화 태비는 윤협의 생모였다. 회임한 아이의 조모이기도 했다. 하여 그녀가 세상을 떠났단 소식에 은환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으나 서 대인의 반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황제가 이곳을 찾지 않는다면 은환이 먼저 황제를 찾지 않을 것을 서 대인과 약조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를 연모하느냐?’
산장에 서 대인과 단둘이 남았을 때 서 대인께서 물으셨다. 그런 물음은 처음이라 은환도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답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는데 어째서 대답할 수 없을까.
사랑하는데 어째서 그를 떠나 이곳으로 왔을까. 양천에 갈 곳 하나 없는 계집이 황궁을 나와 어쩌자고. 그러나 은환은 언제나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기회만 되면 달아나려 머리를 굴리며 아이를 떼기 위해 용을 썼으면서···. 그런데도 그와 혀를 섞는 일이 좋았고 그와 음부를 얽는 일이 좋았다.
그가 다른 여인의 지아비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고 비참해 죽을 것 같았다. 이젠 첩으로 살 제 팔자가 가련해지는 게 아니라 그를 다른 여인에게 빼앗긴다는 게 화가 나 죽을 것 같았다.
서남의 아버지 댁에서도 그랬다. 대혼례를 앞두고 자포자기한 채였을까. 부용이 그 꼬락서니로 그를 유혹해도 심신이 지친 상태였기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를 사랑해서 그의 후궁으로 사는 일이 버거웠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젠 모르겠다···.
“너를 데리러 왔어.”
“···.”
“은환아.”
간절한 목소리였다. 은환은 식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냉랭한 빛은 아니었다. 동그란 눈동자는 지치고 아득해 보였다. 윤협은 말 위에서 내려 그녀에게 걸어갔다. 은환은 멀어지지 않았으나 그를 끌어안는 일도 없었다.
입 안이 말랐다. 목 안이 미칠 듯이 탔다. 그녀의 입술을 물고 싶었다. 아내의 식은 눈을 바라보던 윤협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더듬어 찾았다. 은환이 고개를 팩 돌렸다. 윤협은 습관처럼 그녀의 턱을 조악하게 쥐지 못했다.
이보다 더 망가지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가 이 여자를 지금보다 더 망가트릴까 봐 참을 수 없이 두려웠다. 어쩌면 이미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처럼···. 그리하여 윤협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치게 될까 무서웠다. 본래도 미친 사내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더욱 미치는 것이다.
“은환아···.”
조여드는 속을 느끼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린 여자의 얼굴은 부스러질 것처럼 연약했다. 친정에 왔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상했을까. 어깨를 잡으려 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은환은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있었다.
“다 끝났어.”
은환은 대꾸하지 않았다. 윤협이 일그러지는 낯을 억지로 폈다.
“정말이야. 은환아. 이제 네가 힘들어할 일은 없단다.”
말라붙은 목에 억지로 기름칠을 하며 은환을 얼렀다. 핏기없이 해쓱한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윤협은 은환이 자신을 봐 주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입가가 당겨졌다. 그러나 마주한 은환은 생각보다 표정이 없었다.
“하오나 폐하께선 심사가 뒤틀리실 때마다 언제나 그와 같이 저를 범하시겠지요.”
은환이 배를 어루만졌다. 이 배 속에 아이가 들어있든 말든 내키면 내키는 대로 질구에 양물부터 밀어 넣던 사내였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나. 그것을 몇 번이나 거부했다. 은환은 때때로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 순간이 올 때면 언제나 진절머리가 나 그를 때리고 할퀴고 싶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저 오욕에 불과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내가 그녀를 범한 것은 오욕이 아닌가.
그토록 밀어내며 거듭 호소했었다. 그런데도 윤협은 그녀를 엉망으로 가지려 들었다. 그 커다란 몸이 처음에는 무섭다가 나중에는 넌더리가 났다. 강제로 익힌 쾌감이 두려웠다. 윤협은 은환의 몸을 잘 알았다. 어딜 어떻게 쑤시고 뭉개야 그녀가 자지러지는지. 어떻게 젖꼭지를 빨아야 그녀가 엉엉 울며 그의 목을 감는지. 쾌감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로 인해 알았다.
“은환아.”
“제가 한낱 장사치의 천첩이 낳은 여식이란 것 또한 바뀌지 않겠지요.”
“그건···.”
윤협은 입술을 다물었다. 네 아비가 조운철이 아닌 서치윤이라고 해도 은환은 여전히 천첩의 딸일 것이다. 서치윤이 여식을 지극히 아낀다고 하나 적녀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서치윤은 남의 첩을 탐해 씨를 배게 한 자였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은환인 것이다.
귀족에 비할 수 없는 천한 장사치라고 해도 귀족이 그의 첩을 탐해 여식을 본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니 서치윤 또한 지금껏 집안에 알리지 못한 것일 테지. 은환의 말대로 은환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을 테다.
아니. 밝혀진다면 은환의 처지가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서치윤이 친부임을 알리지 못한 이유 또한 그 때문일지 몰랐다. 은환의 처지가 더욱 비참해지는 것···. 그러나 은환은 윤협에게 하나뿐인 여인이며 연인이었다.
“너를 이리 둘 순 없다.”
“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폐하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아요.”
은환이 표정 없이 말했다. 단조로운 그 말투에 윤협의 발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르지 못한 호흡 때문인지 눈앞이 아물거렸다. 그는 은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은환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잡아챌 우악스러운 힘을 기대했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깜빡거리다 시선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의 윤협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참을 바닥을 더듬다가 등을 돌렸다. 은환이 놀라 그를 응시했다.
“내일 다시 오겠다.”
그가 말 위에 올랐다. 부러 은환을 보지 않겠다는 듯 허공에 박힌 시선이 평연했다. 그러나 은환은 그의 모서리가 조금씩 깨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은환이 그에게 상처 준 것이다. 그녀는 아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황제와 금의위들이 서치윤의 저택을 떠났다. 양천에 거처를 마련한 그의 저택은 황궁과 그리 멀지 않았다. 돌아가는데 한 다경 하고 조금 더 걸리려나. 그리 멀지 않음에도 그가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은환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가 떠난 자리를 헤집다 그만 뒤돌아섰다. 어미가 그녀를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궁으로 돌아와 다시 장례에 임했다. 역당들을 치죄하는 일에 있어서 조정은 그가 지나치게 느슨하다고 했다. 윤협 또한 그리 생각했다. 그는 충분히 냉혹하고 더 잔혹해질 수도 있었다. 연친왕과 강친왕 형제를 묶은 뒤 산 채로 포를 뜨고 가슴뼈를 빠갠 뒤 내장과 목을 장대에 걸고 백성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그뿐일까.
그들의 처첩들을 노비로 만들고 어린 사내아이들은 참수하여 목을 매달 수도 있었다. 그런 일들은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리 벌한다 하여 꿈자리가 사나운 것 또한 아니었다. 그 모의가 성공했다면 은환이 그리되고 그가 그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치죄함에 망설임 따윈 없다. 여태껏 그리 잘해온 일이다. 그러나···.
‘···아비를 닮지 말렴. 그 애를 네 아버지처럼 사랑하지 마.’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속삭였다. 윤협은 무던히도 제 부친과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그와 자신은 별반 차이도 없는 사내들이었다. 윤협은 자랄수록 지독하게 그를 빼닮았다. 하여 여인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했다. 곪게 하고 미치게 했다. 상처받으면 그녀를 범하여 흉터 진 마음을 드러냈고 제 아래서 헐떡이는 그녀를 보며 충만감을 느꼈다.
아비와 별달리 다를 것도 없었다. 은환이 그를 밀어낼 때마다 그녀를 겁탈했다. 그래서 은환은 떠난 것이다. 그녀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왜 믿지 못하냐 윽박지르며 범할 때마다 은환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얼마나 곪아갔을까. 그의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붙잡아두기 위해 취한 방식이 너무도 사나웠다. 죽은 아버지와 정말로 다른 게 없었다.
“오라버니.”
축축한 눈을 한 화양이 그를 맞았다. 윤협은 상복으로 갈아입은 채 어머니의 앞에 앉았다. 피어오르는 향의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문득 드는 오한을 참고 앞을 바라보았다. 은환이 자꾸 가물거렸다. 죽은 사람이 어미가 아니라 아내 같았다.
그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어미가 아니라 은환 같았다. 그 꼴을 그렇게 보고 살았는데···. 결국은 자신이 그녀를 망쳤다. 은환이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은환이 끝내 그를 버리겠다고 하면 어떡해야 할까.
그녀를 강제할 수 없었다. 더는 강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이미 보아서. 그래서 그랬다. 윤협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의 옆에 앉은 화양이 눈물을 닦다가 놀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오라버니. 무슨 일 있었어요?”
해쓱한 얼굴에 도는 사나운 기운이 여윈 윤곽과 맞물려 더없이 흉흉했다. 본래도 날카롭던 윤곽이라 이따금 보고만 있어도 서늘했다. 그러나 두 눈. 검은 눈동자에 울렁이는 물기들이 기묘했다. 형형한 눈동자가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도 어미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화양은 무어라 말을 더 붙여보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라비의 여자가 궁을 나갔다. 며느리로서 도를 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나지 않는다면 우스운 거짓말일 테지만 화양은 그녀를 이해해야 했다.
적어도 어미의 딸로 태어난 화양이라면 그녀를 이해해야 함이 옳았다. 화를 누그러트린 채 눈을 가만히 슴벅였다. 나흘 전부터 오라비는 극도로 말수가 줄어들었다. 본래도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마디 말이나 나누었을까. 손에 꼽힐 만큼 드문 횟수였다.
“귀비께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끝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물었다. 어차피 돌아올 답 따윈 없겠지만. 화양은 그를 흘깃거렸다. 우묵하게 팬 뺨이 안쓰러웠다. 사랑한다고 해놓고 제 아비의 패악질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똑같아지려는 모습에 한숨만 나던 그녀였다. 그런데도 혈육은 혈육이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이런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가 귀비에게 달려가 돌아와 달라 하는 것도 옳지 못했다.
궁에서의 삶이 어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황궁의 여인으로서 감내야 해야 할 무수한 일들. 유경효의 여식과 올린 혼례가 무효 되어 황후의 위가 비었다 한들 그녀가 그것을 가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그런 것이다. 언제든 간에 황후의 자리는 채워져야 한다. 가 귀비가 그를 감내할 수 없다면 그녀 또한 어미와 마찬가지로 살아가겠지. 차라리 지금이 적기일지도 몰랐다. 궁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편이 그녀의 삶에 좋은 것일지도.
“놓아주기로 하셨나요?”
오라비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어미가 잠든 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요. 그편이 귀비에게도 나을지 모르죠.”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귀비를 향한 화는 아니었다. 오라비에게 화가 났다.
“오나라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긴 하지만요.”
답이 없는 사내를 두고 화양은 되는대로 이죽거렸다. 윤협은 살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화양은 그가 조금 이상하여 힐긋거리다가 슬쩍 그의 소매를 당겼다.
“오라···.”
“은환이 나를 버리면 어떡하지?”
윤협이 누이를 돌아보았다. 화양은 굳어 그를 응시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린 것처럼.”
윤협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숨쉬기 어려운 듯 낯을 구겼다. 갑갑증이 난 사람처럼 옷깃을 움켜쥔 그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양이 염려스러운 눈으로 자리를 벗어나는 그를 응시했다. 윤협은 화심전으로 돌아와 은환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던 침상을 바라보았다.
선물한 것 중 어떤 것도 지니고 떠나지 않았다. 윤협은 그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린 은환을 생각했다. 평소라면 노여움에 차 그녀의 가랑이를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는 아주 쉽고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아비가 어미에게 언제나 그랬고 그 또한 은환에게 언제나 그랬다.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했고 부부란 본래 그런 것이라 여겼다.
‘보고 자란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
입술을 씹었다. 그는 괴로움에 숨을 헐떡이다 침상에 주저앉았다. 은환과 이 침상에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이 힘들었다. 겁간이라 소리치던 여자. 쾌감에 차오르면서도 두려움이 맺힌 눈으로 헐떡거렸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저항을 앙탈 정도로 여기며 그녀를 뭉갰다. 어쩌면 그들이 나눈 것은. 아니. 그가 그녀를 안고 사랑했던 시간은 모두 거짓일지 모른다. 사랑이 아닌 일방적인 폭력이며 그들이 나눈 밤은 운우지정이 아니라 매야 겁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맞았다.
맞아서 더 괴로웠다. 윤협은 오한에 이를 악물었다. 은환이 결국 저를 버리면 어떻게 될까. 은환이 그를 완전히 떠난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붙잡아 가두려 할 것이다. 그럴 바엔 제 손으로 제 목을 긋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그는 등을 굽힌 채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자꾸만 심장이 아렸다. 심장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그토록 무감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녹슬어 지친 얼굴이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어 마주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이전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었으면 좋겠다. 하면 어떻게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씨근거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은환을 끌고 와 화심전에 가두는 건 쉽다. 서치윤이 제아무리 귀족이라지만 그는 황제다. 권위를 들이민다면 은환을 찾아 이곳이 제자리인 양 욱여넣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윤협은 홀로 호흡을 고르지 못해 괴로워하다 눈을 감았다. 은환이 그리웠다. 웃지 않는 은환이라도 그리웠다. 그녀의 가슴에 밴 달콤한 체취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리하여 울고 소리 지르는 은환이라도 갖고 싶었다. 윤협은 아무것도 없는 금금을 한 움큼 안아 그것을 그녀인 양 쓰다듬었다.
***
화양은 열을 앓고 있는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상복을 갈아입지도 못할 만큼 끙끙 앓는 사내의 얼굴은 눈두덩과 우묵한 뺨이 열감으로 가득해 벌그스름했다. 그녀는 야윌 대로 야윈 사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궁녀가 들고 온 수반에 마른 영견을 적시고 물기를 꾹 짰다. 나흘 전부터 제대로 섭식하지 않았다는 태감의 말이 걸렸다. 간단한 요기만으로 허기가 해결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상태로 백병전을 치렀다고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닳게 한 것인지는 그녀가 잘 알았다.
‘가 귀비.’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 때문에 오라비가 이렇게 상한 것이다.
‘그냥 좀 무던하게 살면 안 되나?’
지긋지긋했다. 매몰될 만큼 사랑에 이기지 못하는 남녀를 보는 것은 지겨웠다. 화양 또한 지금의 지아비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주가의 사내들은 대체 왜···. 그녀는 눈썹을 찡그린 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환아···.”
앓는 신음이 가느다랬다. 이어지지 못하고 뭉텅뭉텅 끊기는 앓는 소리 속에서 들리는 것은 지아비를 버리고 간 여자를 찾는 흐느낌이었다. 쥐고 있던 영견으로 오라비의 얼굴을 닦았다.
“가 귀비는 여기 없어.”
냉랭하게 읊조렸다. 오라비는 악몽을 꾸는 건지 숨을 버겁게 내쉬었다. 젊은 사내가 노인처럼 숨을 고롱고롱 내쉬는 게 염려되었다. 화양은 자신이라도 오라비의 아내를 찾아가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어떻게든 데려와 마주 보게 해야 할까.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뭐야, 오라버니. 청승도 가지가지야. 정말. 가서 잘못을 빌어야지. 혼자 앓아누워 있으면 어떡해.”
화양이 오라비의 이마를 닦아주며 부드럽게 타박했다. 문득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화양은 놀라 잠시 굳었다. 그의 눈길이 제게로 이동했다.
“일, 일어났어?”
영견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누이를 보는 눈이 무감했다. 차라리 정신을 못 차리며 앓고 있을 때가 더 감정이 느껴졌다. 무생물처럼 누이를 보던 사내가 일어났다. 화양은 그에게서 조금 물러나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윤협은 대꾸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본 것이 너무도 끔찍했다.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오금이 저렸다. 산 채로 심장이 꺼내져 두 동강이 나는 것 같았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
열로 인한 악몽인 걸까. 화양이 적신 영견을 내려놓고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오라버니.”
“은환이 나를 돌아보지 않는 꿈을 꾸었어.”
그녀를 보던 시선이 비스듬히 돌려졌다. 화양은 조금 굳어 오라비를 응시했다. 스스로를 ‘짐’이 아닌 ‘나’라고 지칭하는 오라비는 오랜만이었다. 즉위 이후로는 형제자매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위에서 군림했으므로 언제나 ‘나’가 아닌 ‘짐’이었다.
그리하여 화양은 오랜만에 소년 시절의 오라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시고 곧장 제위에 오른 그였다. 제위에 올랐던 시절에도 그는 소년이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황제로 여물어진 탓에 이제는 말랑한 감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화양은 그를 유일하게 ‘오라비’로 보는 공주였다. 그가 그녀 앞에서 ‘나’가 아닌 ‘짐’이라 칭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허물어져 녹슨 눈을 하다니.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하지 않았어.”
“···.”
“내가 아닌 다른 사내를 바라보고 그의 아이인 듯한 아이를 품에 안고 미소 지었어.”
“그건···.”
화양이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 할 때였다.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던 윤협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게 끔찍한 것은 아니야.”
“그럼?”
화양이 표정을 굳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라비는 마치 당장이라도 깨져 나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스스로가 우습다는 듯 조소했다. 그녀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렇게 하는 게 옳을 것 같았기 때문이야.”
“···.”
“그 여자가 제 원하는 대로 살게 내버려두고. 제 원하는 사내를 선택하도록···. 그렇게 두어야 하는 게 옳아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양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생각했다. 악몽을 꾸었다는 오라버니는 처음이었다. 소년같이 웃어도 속은 단단한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악몽을 꾸고 그 악몽 속에서 무참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여자의 과거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벽장 속에 갇혀 죽어 썩더라도···.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여자가 어머니처럼 말라붙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남매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화양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잘못을 빌어.”
흩어지지 않는 악몽을 더듬던 윤협이 그녀를 보았다. 누이는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왜 잘못을 빌지 않아? 아버지나 오라버니나···. 정말 웃겨.”
화양은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노라니 죽은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웃긴 게 아버지가 끔찍하단 걸 알면서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퍼질 때가 있단 것이다. 그의 미친 행적이 소름 끼치면서도. 제게만은 한결같이 자상했던 아버지라서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분이 나고 눈물이 났다.
어머니에게 잘못을 빌기 위해 간 곳이었다. 하남의 그 절벽은 어머니가 자랐던 외조부의 농가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자 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어머니에게 잘못을 구하려 했다고 했다. 그리고···.
“잘못을 구하는 건 너무 늦어도 안 돼. 모든 건 때가 있는 법이거든.”
화양은 젖은 눈을 돌린 채 속삭였다. 아버지는 눈물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 죽음 앞에선 눈물도 아까운···. 처에게나 자식에게나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잘못으로 치자면 처자식뿐이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눈물은 났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라버니가 사랑하는 여자를 바르게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어딘가 뒤틀려, 놓지도 붙잡지도 못한 채 그렇게 곪아 썩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뒤늦게 제 잘못을 알고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라버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화양이 눈 밑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잘못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윤협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은환이 언젠가 울며 소리치던 날이 떠올랐다. 홍개두···. 여인이라면 모두 쓸 수 있는 신부의 붉은 개두···.
***
은환은 종일 울었다. 아이를 가지면 이렇게 되는 걸까. 정신없이 울고 난 다음에도 곡기를 끊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하니 어미 또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어미를 서치윤이 품에 안았다. 은환은 맥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치윤은 어미를 무슨 자기 부인인 양 안고 다독였다. 부인이 아니면 애틋한 첩인 양 그렇게 아꼈다. 어릴 때부터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아 와서 의문을 느끼지 않았지만 때때로 서치윤과 어미가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은환을 안고 다독일 사내가 없으니까. 제 손으로 밀어낸 사내였다. 제 손으로 돌려보낸 사내였다. 그가 미웠고 그가 넌더리 났다. 그런데도 애틋해서. 눈물이 날 만큼 애처로웠다. 제 마음을 제가 감당할 수 없었다. 은환은 멍하니 허공을 문질렀다. 어쩌면 아이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야트막하게 부푼 둥그런 배를 문질렀다.
어제 아침에 했던 말과 달리 그는 은환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그녀를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치윤은 그가 선황의 아들이라고 했다. ‘선황의 아들’ 곱씹으면서도 불쾌한지 일그러트린 낯이 형형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둔 것처럼.
단지 그리 묶어 매듭지은 것만으로 단정할 수 있는 사내인 듯했다. 은환이라고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생부는 몸서리처질 만큼 잔혹한 사내였고 잘라내듯 내던질 수 없는 까닭에 그의 아내는 말라 죽어갔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결말이 그리 매조지어지지 않아도 그랬다. 황궁이란 곳이. 사내가 앉은 황제란 자리가 사람을 그리 갉아먹었다. 하여 그들이 나눈 사랑이 까맣게 말라붙어간 것이리라.
서치윤은 은환이 그리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고통을 감내하기엔 은환은 너무나 여린 사람이라고. 그 짐을 짊어진 삶 또한 은환에겐 버거운 삶일 것이다. 은환은 산장에서 머물렀던 밤. 서치윤이 간절하게 읊조렸던 것을 되뇌었다.
‘나는 네가 그리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은환아. 네가 그런 곳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게 보기 힘들어. 네가 후궁의 첩지를 받았다고 했을 때 네 어미에게 죽을죄를 진 것 같았다.’
은환을 궁에 들여보낸 것은 서치윤이라고 했다. 조운철이 그녀를 늙은이의 재취 자리나 첩 자리에 팔아 아들의 출셋길을 열려고 할 때 그에게 딸을 입궁시키라 권한 것은 서치윤이었다. 평민이라 해도 차마 남의 여식의 일이며, 제 소관이 아닌 일이니 이리해라 저리해라 할 수는 없었고 그를 부드럽게 타일러 은환에게 다른 선택지를 내민 것이다.
지금 와선 후회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은환을 궁으로 보내면 직접 그녀를 돌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했다. 적어도 양천은 서남보다 제 입김이 많이 닿으니 말이다. 그러나 은환이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모든 게 낭패스러웠으리라. 은환은 시선은 내리깔았다.
“은환아.”
서치윤의 품에 안겨 훌쩍이던 어머니가 어느새 석반 상을 차려 들고 왔다. 그녀는 서치윤이 황제의 명으로 양천에 올라왔을 때 함께 양천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포악한 성질의 아비가 그녀를 곱게 보내주었을까 싶었지만 서치윤 또한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던 고로 언제나 그러하듯 아비를 개만도 못한 것 취급하며 지르밟았으리라.
“뭘 좀 먹어야지.”
사희를 따라 들어온 몸종들이 그녀의 앞에 상을 내려놓았다. 어선소에서 나온 요리들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모양새를 보니 직접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무어라도 입에 댈 수밖에 없었다.
은환은 말끄러미 상을 보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꿩의 육수로 뜨겁게 끓인 탕을 그릇에 떠 한 점 입에 넣으려 할 때였다. 좋은 날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직접 해주던 요리였는데 오늘따라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 요리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제발 외조모의 성의를 봐서라도 아이가 음식을 먹어주길 원했다.
‘이건 저번에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요리잖아. 아가. 그때도 네 할머니가 이 요리를 직접 하셔서 내어주셨어. 그러니 제발 감사하게 먹어. 응?’
은환은 간절한 마음으로 한입씩 먹었다. 그때는 윤협이 제게 한 점씩 살점을 발라 먹여주던 요리였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은환은 급하게 몇 점 욱여넣고 자리를 일어났다. 딸의 식사를 살펴주려 앞에 앉아있던 사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환은 어미를 등지고 저택을 나왔다. 서치윤의 저택에는 봄을 맞아 피어나는 꽃나무들이 많았다. 군락을 이뤄 만발한 꽃들을 보다 보면 넋이 나갈 것 같았다. 화려하되 요란하게 피지 않은 꽃들이 그윽하고 운치 있었다.
은환은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하늘에 뜬 반달이 창백했다. 어느덧 매화가 진 자리에 초록색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제 손으로 돌려보내 놓고는 내심 윤협을 기다리던 은환은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며 그를 생각했다.
희붐한 달빛이 꽃이 진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문득 오한이 들었다.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 어깨에 두를 것이 없었다. 은환은 한껏 웅크린 채 매화나무 근처를 서성거렸다. 서글픔에 눈물이 비죽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고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윤곽이 움직였다. 은환은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은환이 저택으로 돌아가려 걸음을 뒤로 물렸다. 간신히 저택 안으로 들어와 한숨을 쉴 때였다. 누군가 급하게 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아악!”
비죽 튀어나온 손이 하얗고 차가워 더욱 소스라쳤다. 은환이 비명을 지르자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은환은 눈을 질끈 감고 ‘폐하, 폐하!’ 하고 속삭였다. 그 소리에 손이 움찔하더니 이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놔, 놔줘요. 제발, 아이를 가졌으니···.”
은환이 중얼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돌처럼 단단한 가슴팍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손목을 움켜잡았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은환은 그를 밀어내며 끙끙거렸다. 문득 허리를 잡지 않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끙끙거리던 은환이 고개를 들었다. 코끝을 덮은 자정향의 향기가 낯설지 않았다. 문득 그녀를 안은 커다란 사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은환아···.”
“폐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은환은 아기 고양이처럼 몸을 만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밤빛 속에서 윤곽이 흐리멍덩했다. 은환은 손을 뻗어 그의 코와 입술을 더듬었다. 파르스름한 턱에 손등이 닿자 쾌감이 느껴졌다.
말캉한 입술을 쓰다듬다가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더는 ‘여긴 어쩐 일이냐.’ 물을 수 없었다. 그리 돌려보내고 나서 진종일 울던 그녀였다. 스스로를 기만하며 조롱하기 전에 이미 진이 빠져 더는 그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은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윤협은 말없이 제게 안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직도 밉겠지.”
무겁게 닫혔던 입술이 열리며 더운 호흡이 콧잔등에 닿았다. 은환은 흐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겁탈한 사내가 나니까.”
‘폐하.’ 하고 읊조리고 싶었다. 한없이 여위어 이대로 밤기운 속에 문드러질 것 같은 사내였다. 가여워하면 안 되는데 가여워하게 되었다. 사랑이 이렇게 미친 짓이었다. 그녀를 겁탈한 사내라고 소리치던 밤을 곱씹으려 했다. 서치윤이 말한 대로 황궁은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삭게 할 곳이었다. 윤협은. 아니. 윤협의 사랑은 그녀에게 버팀목이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윤협이 좋았다. 윤협을 너무도 사랑했다. 은환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곤 한 가닥씩 숨을 뱉었다.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를 외롭고 불안하게 했지.”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그의 손가락이 집어 들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밤을 걷어내던 달빛이 윤협을 덮은 어둠을 한 자락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은환은 그를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가시처럼 앙상한 사내가 아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를 붙든 손이 간절했다.
“···미안해.”
커다란 남자가 주저앉듯 한쪽 무릎을 굽혔다. 은환은 놀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지가 무너져도 천자는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었다. 은환은 그를 일으키려 끙끙대다가 자신도 똑같이 주저앉았다. 문득 배가 무거워져 숨이 가빴다. 습관적으로 부푼 배를 들려고 하니 윤협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천자로서 네 앞에 있는 게 아니야. 사내로서 용서를 빌기 위해 찾아온 거야.”
은환은 굳어 그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에 북받쳐 무릎을 꿇은 게 아닌 것 같았다. 은환은 고개를 든 채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와 시선을 맞췄다. 윤협은 나무에 묶어놓은 그네로 은환을 데려갔다. 앉을 곳을 찾아 그녀를 앉히려는 것 같았다.
은환은 그가 시키는 대로 그네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한결 배가 편했다. 그리고 다시 윤협이 무릎을 굽혔다. 사내라고 해도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어나세요. 폐하.”
“사내라고 하지 않았어. 언제나 네 앞에서는 사내야. 은환아.”
“그래도···.”
“윤협.”
‘그리 불러줘.’ 윤협이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이 은환의 손끝을 부드럽게 잡았다. 은환은 그를 말간 눈으로 응시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너를 사랑해서.”
물기가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은환은 다시 젖으려 하는 눈 때문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윤협이 부드럽게 눈 밑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사랑해. 은환아.”
“폐···. 아니. 윤협.”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제발···.”
너무 놀라 눈물도 들어간 것일까. 은환은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들여다보았다. 물기가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고 있었다. 은환은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눈가를 더듬었다. 마음이 못내 흐무러졌다.
“너만 바라볼 테니. 너만을 내 아내로 사랑할 테니.”
바람이 불었다. 난만하게 피던 계절을 지나 야위어가기 시작한 매화의 꽃잎이 그의 눈가에 떨어졌다. 봄에 흩날리는 눈 같기도 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사내의 눈물이 꽃잎으로 솟아난 것 같기도 했다.
은환은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꽃잎 속에서 그녀를 간절히 올려다보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황궁은 끔찍한 곳이다. 삭아서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사람의 눈물을 쥐어짰다. 그런 곳에서 사내를 믿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사랑을 믿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은 없다고 했다.
“너 외에는 어떤 여자도 내 옆에 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은환은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협이 그 끄덕임에 굳은 낯빛을 풀더니 소매 춤에서 꺼낸 반투명한 물건을 내밀어 보였다. 밤빛에 젖어 윤곽이 어슴푸레했으나 붉은 빛만은 선명하여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홍 개두였다. 은환은 그것을 조금씩 만지작거리며 울음을 참아냈다. 문득 그의 손이 개두를 가져갔다.
“나와 혼인하자.”
윤협이 개두를 은환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황제와 혼례를 올릴 수 있는 여인은 하나뿐이었다. 은환은 놀라 눈을 슴벅였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하는 걸까.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윤협이 다시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는 은환이 낀 반지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환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협이 야윈 얼굴로 희게 웃었다. 불현듯 개두가 걷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다가왔다. 은환은 눈을 감았다. 말랑하게, 그러나 간지럽게 맞닿은 달콤한 입술의 감촉이 봄 깊은 향을 머금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꽃이 눈처럼 흩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