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五. 전전반측 (5/8)

 五. 전전반측

 “서치윤의 양자라···.”

 황제가 나른하게 읊조렸다. 희섭은 차마 용안을 바라보기 두려워 시선만 떨구고 있었다.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작금의 황상을 뵙는 일이었다.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이나 양부와 같은 중년의 사내도 아닌 비슷한 연배의 젊은 청년이거늘 감히 같은 연배의 사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황제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냉엄하고 날카로운 눈에 맺힌 번득이는 열기.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스산했다. 희섭이 마른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목이 썰릴 것 같다. 아니. 썰린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건가. 황제의 하나뿐인 후궁을 움켜잡은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러나 그는 한때 절도사를 지낸 사내의 양자이자 항주의 도독 일가인 서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양조부이긴 하나 그의 조부는 한때 승상의 위까지 오른 위인이며 항주의 도독 일가는 오나라의 개국공신 가문으로 작금 세를 떨치고 있는 유 승상 일가보다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조정에서의 번잡한 일이 싫어 칠 년 전 상장군 직만 재수한 뒤 서남으로 낙향한 양부 또한 한때 눈앞의 사내가 동궁이던 시절 그에게 무예를 가르치던 태사로서 짧게 지냈으니 그와 면이 없는 것 또한 아닐 터. 만약 양부가 낙향하지만 않았더라면 조부와 같이 삼공三公으로서 위를 떨치고 있을 텐데···. 그러나 양부는 그리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여자가 이곳에 묶여있다면···.

 “태사께선 잘 지내시는가.”

 이제는 태사 직에서 물러났음에도 황제는 양부를 태사라 불렀다. 동궁이던 시절 제법 양부를 따랐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예. 아버님께선 정정하십니다.”

 “짐의 나비와는 어떤 사이냐.”

 “예?”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담뱃대를 물고 있던 황제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곁에 앉은 은환 또한 놀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희섭은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다 토해내듯 주대했다.

 “가비 마마와는 어린 시절 가까운 사이로 자랐습니다.”

 선득한 눈이 길어졌다.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일그러지는 것 같기도 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침이 독이 든 바늘 같았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그를 보던 은환이 입을 열었다.

 “빈첩의 작은 오라버니가 희섭 오라버니와 악우이십니다.”

 “그런가.”

 황제는 그렇게 대꾸하다 이어 말을 붙였다.

 “내 나비의 어린 시절을 잘 알겠구나. 아주 도토리만 할 때부터 보아 왔을 테니.”

 더는 올릴 말이 없었다. 저리 살벌하게 앉아 냉기를 풀고 있음에도 은환을 향한 시선에는 애정이 묻어났다. 마치 눈동자를 설탕으로 절인 듯 아릴 정도로 달콤한 시선이었다. 희섭은 벼린 칼처럼 서늘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본래 이런 사내일까. 아니면 제 앞에서만 이런 것일까. 마치 질투하는 것처럼. 그래. 후궁이 황제의 다른 후궁을 시기하는 것처럼. 황제가 하는 일이 그랬다. 계집이 누구의 소유인지 보란 듯이 끌어안고 귀가 가려운 애칭을 늘어놓으며 그를 자극하는 꼴이었다.

 어린애들이나 할법한 짓인가. 그러나 적어도 희섭이 씁쓸하다 못해 가슴 한편이 저리니 황제의 도발은 무용하지 않았다. 은환과 무슨 사이냐 물었지만 묻지 않아도 그녀와 어떤 사이였는지 알고 있단 뜻이다. 잠시나마 포착한 장면으로 그들의 내력을 짐작했으리라. 하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비의 모친을 돌보고 있다고 들었다.”

 은환의 허리를 안은 채 볼에 입을 맞추던 황제가 희섭을 힐긋 보았다. 희섭은 ‘예’하고 작게 아뢨다.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짐을 대신하여 사위 노릇을 하고 있으니 어찌 상을 내리지 않을까.”

 “폐하.”

 ‘사위’란 말에 은환이 소스라쳤다. 희섭도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저 아버님의 명을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태사가 가비의 모친에게 각별한가 보구나.”

 “그건···.”

 희섭이 대답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었다. 은환 또한 딱딱하게 굳은 채 그에게 안겨있을 뿐이었다. 그를 지긋이 쳐다보던 황제가 낮게 축객했다. 희섭이 일어나 절을 올린 뒤 사라졌다. 은환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희섭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다가 황제를 응시했다.

 “어미를 보지 못해 분이 난 얼굴이군.”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오늘 밤 짧게 다녀오려 했었다. 희섭이 집을 다녀갔다고 해도 직접 보는 것과 전해 듣는 것은 달랐다. 이제는 기회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다.

 “아기가 따로 없구나. 이 시간에 어미를 찾고.”

 “그게 아닙니다.”

 노여움에 눈가가 파드득 떨렸다. 황제는 나직이 웃을 뿐이었다. 턱이 들렸다. 입술이 게걸스럽게 삼켜졌다. 평소보다 조악한 완력이었다. 얽힌 혀가 뽑힐 듯 아팠다. 감정이 실린 행위였다. 은환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멍이 들 정도로 입술을 빨던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어린 것 같았다. 은환은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제야 두려움이 왈칵 들기 시작했다.

 “폐하···.”

 “짐이 네 어디까지 알 것 같나?”

 “희섭 오라버니는 그저···.”

 “듣기 싫으니 그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폐하.”

 울음이 터졌다. 은환이 덜덜 떨며 아이처럼 울었다. 윤협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르고 달래던 손을 찾으며 그에게 안기려 했으나 겁이나 그럴 수 없었다. 설마 그와 사통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희섭과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때 희섭과 혼인을 꿈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이지 ‘꿈’일 뿐이었다. 좋아했던 마음도 들떴던 기분도 한여름에 아물거리는 아지랑이에 불과했다.

 실없고 턱없는 꿈···. 고작 열셋 먹은 소녀와 열여섯 소년의 백일몽. 덧없고 무상했다. 양자라 한들 그는 태생이 귀족이며 그의 양부 또한 명문 귀족이었다. 하니 그 또한 귀족이었고 은환은 말해 무어 할까.

 아마 서 대인이 편견 없이 소탈하며 자상한 분이 아니었더라면 작은 오라비 또한 희섭과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은환 또한 잠시나마 그와 어울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런 어줍은 바람 또한 갖지 못했겠지.

 “폐하. 빈첩은.”

 “오라버니라 불러봐.”

 눈물을 닦지 못해 흐느끼며 윤협을 부르던 은환에게 다정한 속삭임이 들렸다. 은환은 고개를 들었다.

 “태사의 양자더러 오라비라 하지 않았나. 내가 그자보다 네 살이나 더 많은데 당연히 나에게도 오라버니라 해야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듣고 있노라니 발끝부터 노곤 노곤해지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대로 바라보고 있다간 심장이 목구멍을 역류할 것 같아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나비야.”

 “어, 어찌하여 나비옵니까.”

 “밤마다 쏘다니니 나비가 아니냐.”

 “오해이십니다.”

 은환이 눈썹을 좁혔다. 윤협은 낮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가 한 번 더 채근했다.

 “어서 오라비라 불러봐.”

 “망측스럽습니다. 어찌 천자를 그런···.”

 “하면 발정기가 온 나비라 계속 부를까?”

 “폐하!”

 미물에 비유한 것도 억울한데 발정기가 왔다니. 억울했다. 은환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는 입술 끄트머리를 부드럽게 당긴 상태였다. 볼을 물들인 은환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를 부드럽게 안은 황제가 ‘어서’ 하고 다시 채근했다. 반드시 듣고 말리란 얼굴이었다. 머뭇거린 끝에 입술을 작게 벌렸다.

 “오, 오라버니.”

 “듣기 좋구나.”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열이 몰려 표정을 가다듬을 수 없는 은환에게 윤협이 달콤하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앞으로는 그리 부르라.”

 은환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맺힌 동그란 눈물을 손등으로 닦은 그가 은환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

 “양자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 스무 해 전, 해로와의 전쟁에서 잃은 수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 했다.”

 “그러하옵니다.”

 잠든 은환의 기다란 머리칼 끝을 들어 올려 난향을 맡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태감이 슬그머니 그를 보았다. 기려한 얼굴에 밴 기운이 날카로웠다. 가비가 잠들지 않았을 때는 서늘하기만 하던 기운이었다. 결국은 흐무러져 그녀가 불편한 일 없이 둥글게 넘어가기도 했다.

 그 눈물 한 번에 또 애교 한 번에 모든 가시가 뭉툭해진 사내였다. 그리 넘어갈 줄 알았건만···. 태감은 서 공자에 대해 내밀한 모든 것까지 알아오라 지시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가비에게서 서 대인이라 불리는 서치윤은 붕어한 선황과도 면이 깊은 사이로서 황제가 동궁이던 시절 태사까지 겸했던 지체 높은 무장이었다.

 무예에만 공이 깊은 게 아니라 문무를 두루 겸비한 조정의 인재였다. 하여 그 오만하며 까다로운 선황에게도 인정받아 아끼는 장남의 태사로 봉하지 않았던가. 태감은 잠든 여자를 들여다보는 황제의 낯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폐하.”

 “은환이 서치윤과 좀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

 “예?”

 “서치윤에게 숨겨둔 여식이 있을 거라 의심한 적 있는지 묻는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어라 주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동자를 바쁘게 굴리며 생각했다. 서치윤에게 숨겨둔 여식이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가비가 서치윤의 숨겨둔 여식일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는 무언가를 아는 듯했다. 그에게 진실로 숨겨둔 여식이 있고 황제가 일찍이 그를 알았을 수도 있었다. 그는 대저 모르는 게 없는 사내였다.

 “항주에 본가를 둔 사람이 서남으로 낙향할 리 없지. 심지어 연고 하나 없는 곳 아닌가. 젊은 시절 정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계실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들었어. 손이 귀한 항주의 도독 일가에서 그를 질책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하오나···.”

 “무엇보다 그의 양자가 주기적으로 후당을 드나들며 생활을 살폈다고 하였지.”

 “그, 그러하옵니다.”

 “조운철은 관리들에게 제 첩을 종종 바친다고도 하지 않았나.”

 “서 태사께서 그런 것을 받을 리 있겠습니까.”

 “그럼 서치윤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녀를 안았단 뜻일까.”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폐하께선 서 태사께서 가비 마마의 친부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태감이 물었다. 윤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끄러미 하얀 여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의외긴 하지만 황제의 의심은 합리적인 면이 많았다. 특히 황제가 들은 바가 있다면 더욱 그랬다. 조정과 황제가 인정한 인재이며 명문가의 자제로서 출세만을 거듭하던 귀공자가 한낱 장사치의 천첩을 탐했다는 것이 의외로운 일이나 낙향한 서 대인이 어린 시절의 가비에게 유독 애정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라 했다.

 게다가 가비의 생모인 여인을 겉돌며 그녀를 살펴왔다는 것 또한 사실. 가비가 궁녀로 입궁한 뒤부터는 줄곧 가비의 생모를 챙기며 두 사람의 밀회를 목격했다는 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의심이 들만도 했다.

 “서 공자와 가비 마마가 어린 시절 연모의 마음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서 대인께서 서 공자가 가비 마마를 대하시는 것을 내키지 않으셨다 하옵니다. 특히 서 공자께서 가비 마마를 마음에 두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불같이 노여움을 터트리셨다고 하기도 하고요.”

 “가비를 아꼈다고 하지 않나.”

 “서 공자께서 가비 마마에게 접근하시는 것을 싫어하셨던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렇군.”

 “그 외에 염려하시는 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짐은 가비를 알았던 사내는 죄 죽이고 싶을 뿐이야.”

 “폐하···.”

 “물론 그리하겠단 뜻은 아니지. 정말로 그리한다면 혼군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할 것이옵니다.”

 황제가 웃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중반을 가비의 생모가 있는 후당에서 들겠다고 해라. 서 태사 또한 자리하라 이르고.”

 “봉행하겠나이다.”

 “그리고 양천에선 무슨 작당을 하고 있다 하던가.”

 곤히 자는 여자의 귓불을 지분거리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안광이 선득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

 “화, 황제 폐하께서 천녀의 한호에 이리 납실 줄 모르고···.”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여인이 새하얀 얼굴로 연신 말문을 더듬었다. 서치윤은 그것이 불편한 얼굴인지 딱딱하게 말라붙은 얼굴이었다. 아무리 감정이 약하며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지만 이리도 냉랭하게 맞이할 줄은 몰라 윤협은 웃음이 조금 났다.

 “고개를 들라.”

 나지막한 명령에 가비의 생모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이 발갛게 익어 완연히 사과 빛이었다. 윤협은 긴 속눈썹 아래 커다란 눈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은환과 닮은 얼굴이었다. 얼굴형이며 말간 피부. 긴 속눈썹과 작고 도톰한 입술. 화려한 미색은 아니다.

 모친이 그토록 화려하고 요염한 미색으로 부황을 사로잡았다면 눈앞의 여인은 말갛고 앳되었다. 도리어 모친과 먼 친척이 되는 서치윤이야말로 사내답지 않게 화려한 이목구비 아닌가. 불혹을 넘긴 지 꽤 되었다고 했거늘 저리도 젊고 기려할 수 있나. 발발 떨며 자신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여인을 향해 윤협이 가지런히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짐이 급작스럽게 찾아와 당황했을 것이다. 이리 중반을 준비한 것만으로 귀한 마음 아니겠는가.”

 시선을 돌려 식탁을 바라보았다. 김이 나는 탕병과 미만두. 노릇노릇하게 익힌 꿩 요리가 결코 이 집의 살림에 차릴 수 없는 차림새였다. 누가 보아도 서치윤의 저택에서 내어왔을 요리들이 분명한 식탁.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여인을 보며 나긋하게 웃었다. 은환과 닮은 점이 있다면 눈물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

 “그만. 폐하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 또한 예가 아니다.”

 서치윤이 딱딱한 낯을 일그러트리며 타일렀다. 그의 말에 여자가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서치윤이 훌쩍거리는 여자의 어깨를 잠시 감싼 뒤 윤협을 향해 작게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윤협의 윤허가 떨어지자 서치윤이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워낙 좁고 작은 집이다 보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송구합니다. 대인···.”

 “하나뿐인 딸아이가 어미를 보러 달려왔는데 이리 울어서 되겠나.”

 “흐윽···.”

 “사희야.”

 “이, 이제 울지 않을게요. 대인.”

 “자꾸 울면 은환이가 가슴 아파할 거야.”

 “네에. 울지 않을게요. 절대! 폐하가 가실 때까지 울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리고는 몇 번의 다독임이 더 들렸다. 그들이 나간 문을 흘깃거리던 은환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윤협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짐을 꼭 저승사자 보듯 하구나.”

 “시, 심약한 분이셔서···.”

 “서 태사께선 언제나 저리 다정하셨나?”

 “···예.”

 “그렇군.”

 윤협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은환은 그를 보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좋은 분이세요. 양천에서 낙향하여 이리로 오셨을 때부터 어머니를 가엾게 여기셔서 저희 모녀에게 잘해주셨어요.”

 “그렇구나. 짐은 서 태사가 사람의 마음이라곤 하나 없는 냉혈한인 줄 알았단다.”

 “···그러셨나요?”

 “해로의 읍성으로 쳐들어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만 명을 모두 도살하고 가호를 불태웠으니 그럴만하다고 느끼지 않겠나.”

 “그러셨군요···.”

 “젊은 시절부터 맹호를 떨친 무장이니 무용담이며 전설이 아주 많지.”

 윤협이 은환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진정이 되었는지 서치윤과 은환의 모친이 안으로 들어섰다. 서치윤은 반듯하게 예를 올린 뒤 자신도 앉고 은환의 모친도 앉혔다.

 “가비 마마의 친모는 궁중의 예법을 몰라 실수가 잦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헤아려주시옵소서.”

 “개의치 않습니다. 그를 따지며 중반을 들고자 온 것도 아니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윤협이 만두를 하나 들었다. 서치윤과 은환 또한 각각 음식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윤협은 연신 자신을 살피는 은환의 행동에 씩 웃으며 그녀의 접시에 만두를 하나 얹어주었다. 그녀는 그 만두를 한입 먹었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음식을 먹는 것이니 잘 먹겠지?”

 은환이 대꾸하지 않고 볼을 붉혔다. 서치윤은 그들을 오도카니 보다가 곁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여전히 긴장한 것인지 딱딱한 얼굴이었다. 이틀째 딸이 보고 싶다 울던 여자였다. 조운철이 그의 딸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직접 이 여자를 데리고 양천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은환을 궁으로 올려보낸 것이 맞는 일이었을까. 입에 들어오는 쌀이 퍼석했다.

 ***

 “양천에 불미한 무리는 어쩌시고 한가로이 첩의 소가를 방문하셨나이까.”

 “적이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려면 후방으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태사였습니다만.”

 “폐하의 마음까지 후방으로 물러난 것 같아 이 불충한 소신이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서치윤의 말에 윤협이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서치윤이 낯을 굳혔다. 윤협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비 마마께서 황손까지 회임하신 시점이옵니다. 결코, 태후와 승상의 감시를 느슨하게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나뿐인 여식을 짐에게 붙여놓으니 불안하여 밤마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폐하.”

 서치윤이 낯빛을 굳혔다. 윤협 또한 미소를 지웠다. 은환은 중반을 들고난 후 다과를 올리겠다며 나간 어미를 따라 나간 상태였다. 윤협은 둘러 묻지 않았다.

 “언젠가 짐에게 아가의 체취가 묻은 주머니라며 내미신 적이 있지요.”

 아주 과거의 일이었다. 그가 동궁이던 시절 서치윤을 만나 수학을 하던 시절이었다. 약관에 맞아들인 정실이 폐병을 앓아 세상을 떠나고 서치윤은 혼자였다. 정실은 물론 후실까지 맞아들여 번듯한 일가를 일군 형제와 달리 그는 계실을 맞아들여 가정을 일구지 않았다.

 독특한 이였다. 죽은 정실에 대한 애도가 깊다기에 그는 처의 상중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혀가 내둘릴 정도로 버석한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언젠가 작은 복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곱이니 그럴 만도 했다. 윤협은 그를 부쩍 잘 따랐으니.

 손에 쥔 것이 무엇이냐. 어찌하여 그런 눈으로 어린 누이의 장난감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느냐 물었다. 태사는 엷게 웃으며 정말로 아가의 물건이라고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 윤협에게 그는 복주머니를 보여주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자그마한 물건이었다.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려니 안에 무언가 든 것 같았다.

 윤협은 그의 앞에서 주머니를 열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하얀 수건에 갈색으로 말라붙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께름칙해야 할 텐데 질감 때문일까. 보드라웠다. 거북하지 않았다. 윤협은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코에 대보았다. 어미가 안고 있는 누이의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아기 냄새가 납니다.’

 윤협이 말했다. 태사는 ‘아기를 닦은 수건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윤협은 그를 길게 바라보았다. 기려한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누구의 아기입니까.’

 윤협이 물었다. 태사는 그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제 아기입니다.’

 윤협은 더 입술을 떼지 않았다. 정실이 죽고 첩실 하나 맞아들이지 않은 사내에게 아이가 있다. 일곱 살 아이의 머리로도 그 대답이 어떤 대답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내의 얼굴에 스민 그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윤협이 고민 끝에 입술을 다시 열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기쁩니다.’

 ‘하면 웃으셔야지요. 태사. 아기가 아버지가 슬퍼한다는 걸 안다면 울음을 터트릴 거예요.’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태자 전하께서 소신의 여식을 염려해주시니 참으로 감읍하옵니다.’

 윤협이 웃었다. 그러다가 다시 물었다.

 ‘본 태자의 누이만큼이나 어여쁜 아기인가요?’

 ‘소신의 눈에는 그러합니다.’

 ‘하면 본 태자가 아내로 맞이해도 됩니까?’

 태사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윤협은 아기의 수건에 코를 박고 킁킁댈 뿐이었다. 대꾸 없는 그를 향해 윤협이 고개를 들었다. 태사는 입술 끝을 휘며 읊조렸다.

 ‘소신의 아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수 있다면 안 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

 “그 아기가 은환입니까?”

 서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십 해 전 그러했던 것처럼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협은 서치윤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란하게 자리한 부녀를 보니 숨긴 것이 용하다 싶었다.

 “짐이 짐도 모르는 사이 태사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로군요.”

 윤협이 입가를 늘어트렸다. 서치윤은 여전히 냉랭한 얼굴이었다. 당시에도 그리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아기 은환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을 때 말이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날카롭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 딸과 윤협이 부부로 맺어진 것에 관해서 말이다.

 “환아를 궁에 보낸 것을 후회합니다.”

 “짐이 사위로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요.”

 “황상의 후궁으로서 운명을 아니 하는 말입니다.”

 “태사.”

 윤협이 미소를 지웠다. 날카로운 얼굴에 서린 단단함이 불쾌했다. 은환을 앗으려 한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태사의 여식은 짐의 곁에서 복과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폐하의 모친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두 눈으로 보셨으면서 그리 말씀하십니까?”

 “짐은 부친과 다릅니다.”

 윤협이 노여움을 누르며 일갈했다. 태사는 시선을 돌렸다. 문득 다과를 내어오겠다던 모녀의 발걸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기 전 서치윤을 향해 윤협이 빠르게 읊조렸다.

 “앵화가 피기 전 유경효의 수급을 거둘 것입니다.”

 ***

 연친왕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는 쌍둥이 형제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자신과 수 분 간격으로 아우가 된 놈이었다. 어떨 때는 한심했고 또 어떨 때는 측은했다. 그저 어미만 같은 형제라면 끊어내도 한참 전에 끊어냈을 텐데 한날한시에 태어났단 것이 무엇인지 그는 이 어리석은 사내를 끊어내는 일이 오른팔을 잘라내는 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궁 안에서 믿을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는 거세당한 채 벌건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술을 취해 처첩을 갈구던 놈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왕부며 작위까지 가져간 황제로 인해 강친왕 아니 이젠 ‘주현창’일 뿐인 사내. 태후는 어찌 해서든 다시 친왕의 작위를 얻도록 노력해보겠다 했지만 연친왕은 그를 믿지 않았다.

 “태후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그만 일어나지?”

 멍청하게도 동정심을 살 요량인지 자리를 펴고 누운 형제를 보던 연친왕이 읊조렸다. 아침나절부터 술을 마시다 태후가 온다는 소리에 자리를 편 강친왕은 술에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헛소리를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나직한 발소리가 들리며 곧이어 문이 열렸다.

 “태, 태후 마마···.”

 앓아누워 있던 강친왕이 일어나 예를 갖추려 했다. 태후는 그를 지긋이 보다가 연친왕을 응시했다. 연친왕 또한 예를 갖춰 그녀를 맞이했다. 흑색 배자에 흑색 군을 입은 여인이 검은 멱리를 벗어 탁상 위에 놓아두며 앉았다.

 “다과를 올리라 하리까.”

 태후가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양천을 벗어났으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심중을 헤아린 연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혼례가 보름이나 미뤄진 것을 알고들 계시겠지요?”

 태후가 물었다. 연친왕은 평연한 듯 뒤틀린 심사를 감추고 있는 태후를 보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노여움이 폭발할 것 같았다. 선황을 살해한 이후로 부러 감정을 누르며 다스리는 일에 열을 올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간 유 승상과 조정에서 많이 해 드셨으니 눈에 뵐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이런 뜻이다. 특히 당시 모든 참살의 현장을 보고도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던 화 태비까지 미쳐버렸으니 더욱 마음이 편할 것이다.

 설사 그녀가 증언해도 모두가 미친 계집의 소리라 들으니 사실상 효력이 없지 않나. 그 당시 황제를 시해했던 일을 공모했던 자는 유 승상과 태후 그리고 그와 강친왕이었다. 황제를 벤 이들 중 살아남았던 이들 또한 그와 유 승상. 그리고 강친왕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죽였고 시신을 찾아볼 수 없이 태웠다. 그렇게 공모자들은 황제 시해 사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황제는 결코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연친왕이 읊조렸다. 어둑한 얼굴로 허공을 더듬고 있던 태후가 그를 바라보았다. 꼭두각시가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가란을 황후로 들여 그 후계를 다음 황제로 삼을 수 있다면. 하여 가란이 회임만 한다면 황제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에겐 씨내리 이상의 용도가 없었던 탓이다.

 그것이 반정을 하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오나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계집 때문에 모든 것이 틀렸다. 태후는 입술을 악물었다. 황제는 꼭두각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연친왕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주윤협을 꼭두각시로 쓸 마음도 없었다. 가란이 회임만 하면 되니까. 가란의 회임···. 그것이 유 승상. 아니 경효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감내하려 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윤협은 대혼례의 시일을 뒤로하고 양천을 떠났다.

 그깟 계집에 미쳐 이 중요한 시기에 양천을 등지고 서남으로 떠난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계집이 그리도 좋을까. 그래서 하나같이 그렇게들 미쳐버리는 걸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를 무겁게 보던 연친왕이 의아한 낯으로 보았다.

 태후는 금방 웃음을 지우고 냉랭한 얼굴을 했다. 연친왕은 사사 당한 길 귀비의 아들이었다. 사랑하는 계집에게서 본 아들을 황후의 적자로 입양시켰으니 어린아이에게로 모이는 권력이 생각보다 비대하다고 생각되자 자식을 하나 더 보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은 줄줄이 계집아이들이고···. 마침 그 무렵 화설란과의 사이가 틀어질 만큼 틀어지자 다른 후궁을 총애하는 모습을 보여 그녀의 관심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주가의 사내들은 미쳐도 아주 미쳐버린 사내들이라 아주 우습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길 귀비를 회임시켰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를 궁에 밀어 넣은 것이다. 그것도 길 귀비에게 미약을 먹여 정신을 흐트러트린 후 말이다.

 길 귀비의 패를 뒤집어 그의 침상으로 불러들인 후 밀어 넣은 것은 자신을 닮은 시위였다. 길 귀비는 그를 황제라 믿었다. 그리고 눈앞의 쌍둥이 형제가 태어났다. 그리고 귀비는 형제가 열둘이 되던 해 사사 당했다.

 내막은 이랬다. 육궁의 후궁 중에서도 유일하게 황제와 밤을 보내며 수태까지 했으니 황제가 자신을 총애한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주희강은 길 귀비가 수태할 때까지 꽤 여러 번 그 짓을 벌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화설란의 질투를 얻으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총애하는 척 연기까지 했으니 황제가 자신을 총애한다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희강은 사람도 아닌 인간이다. 태후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주희강은 인간의 껍데기를 쓴 짐승이다. 다시 화설란과의 사이가 회복되고 쌍둥이와 그녀의 쓸모가 다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길 귀비를 버렸다. 그녀와 쌍둥이를 궁 밖으로 내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길 귀비를 이전처럼 아끼진 않았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태어난 쌍둥이에게는 퍽 잘해주었다. 살갑진 않았으나 태후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드러내놓고 냉랭하진 않았다.

 다만 그 모든 것을 길 귀비는 참지 못했다. 화설란이 제가 받을 총애를 가져갔으며 가문과 입지가 좋은 제 아들들을 제치고 한낱 궁녀 출신의 소생이 보위를 잇는다 생각하자 질투에 눈이 멀어버렸다.

 그리하여 어느 날 화설란은 픽하고 고꾸라졌다. 볕이 무섭도록 더운 여름날이었다. 회임한 배는 야트막하게 둥글었고 여자는 한여름 날에 우물가에서 죽은 귀신처럼 창백했다. 태후는 젊은 시절의 화설란을 떠올렸다.

 하얀 보름달의 파편처럼 작은 얼굴이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용모는 가히 화용월태의 자태라 할만했다. 그런 미모를 가졌으니 황제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태후는 가장 처음. 황제를 사랑했던 아주 짧은 시간을 제하고 나면 그 사랑이 부러운 적은 없었다. 그 총애가 진실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사랑이란 경효가 제게 베푸는 것이다. 사랑이란 제가 경효에게 보이는 마음이었다. 태후는 한여름에 앓아누웠던 여자를 떠올렸다. 화설란은 대체로 몸이 좋지 않았다. 황제가 총애할수록 그녀는 시들어갔다.

 그리 사이가 뒤틀려도 쉬지 않고 회임하는 여자가 때때로 가엽기도 했다. 황후전의 유모에게서 공주들을 유괴해 황궁의 담을 넘으려 한 일이 있고 난 후였다. 황제는 대노했고 이성을 잃었다. 그래. 그토록 오연한 사내도. 계집 하나 뜻대로 못해 눈이 뒤집히는 것이다.

 태자를 두고 공주들만 데리고 달아나려 했던 여자를 화심전에 연금한 황제가 그녀에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화설란에겐 죽이는 것도 매를 드는 것도 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리하여 화설란은 다시 회임했다.

 그리 회임한 여자가 앓아누웠으니 황제는 아주 돌아버렸다. 그는 아내에게 비소를 먹인 계집을 가만둘 사내가 아니었다. 길 귀비가 계관석을 궁내에 들였다는 것을 들은 황제는 길 귀비가 거처하는 선혜 궁을 뒤집어엎었다. 궁녀며 태감이며 어린 학비까지 잡아들인 사내는 길 귀비와 연관된 모든 이들을 고문했다.

 더러는 고신을 받기 전 혀를 깨물고 죽은 자들 또한 있었다. 결국, 어떻게 되었더라. 고신을 이기지 못한 학비 하나가 문지방 너머 엿들었던 것을 모두 고했다.

 “희강의 아들이니 만만치 않을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 계집.”

 연친왕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계집’이라 할 때 태후의 표정이 유독 사나웠다.

 “그 계집이 나타난 후로는 가란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지요.”

 “유 소저의 괴로운 마음 이해합니다.”

 연친왕이 읊조렸다. 태후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어미가 사사 당하는 것을 보아서일까. 연친왕은 어려서부터 조숙했다. 대단히 명석한 것은 아니라 해도 강친왕처럼 어리석지 않았다. 그 하나만으로 족했다. 황제가 될 자질은.

 “길 귀비가 사사 당하던 날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연친왕의 낯빛이 파랗게 변했다. 길 귀비는 사지가 찢겨 죽었다. 양팔과 양다리에 밧줄이 묶였고 그 밧줄은 형을 집행하는 말에 의해 동시에 당겨졌다. 어린 쌍둥이들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숨이 제대로 끊어지지 않아 껄떡이며 죽어가는 제 어미를···. 그리하여 십수 년이 흐르고 형제가 성장했을 때 황제는 형제들의 손에 숨이 끊겼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들의 탄생부터 농락했던 사내의 목에 칼을 쑤셔 넣었다. 그 얼마나 통쾌한 권선징악인가. 태후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통렬하게 복수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모친의 복수를 제대로 할 기회입니다. 오늘에서야 그 기회가 제대로 온 것입니다.”

 연친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 귀비가 죽고 그녀 소생의 두 황자는 그녀가 거두어들였다. 생모가 살아있어 언제나 그녀를 향해 유난스러울 정도로 애정을 느끼는 화설란의 아이들과 달리 곁붙일 데가 없는 황자들은 태후를 의지했다.

 “하오나.”

 “연친왕께서 보위를 이으시고 강친왕께서 형제를 보좌하셔야 합니다.”

 “태후 마마.”

 연친왕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스르륵 눈을 굴려 넋이 나간 강친왕을 보았다. 보위란 말에 눈을 번들거리는 강친왕이 신경 쓰였다. 태후는 그를 흘깃 보다가 다시 연친왕을 응시했다. 문득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연친왕비가 친정에서 귀한 차를 구했다며 다과를 대령하고 싶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태후가 눈썹을 좁혔다. 워낙 긴밀한 이야기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연친왕이 소리 내어 아내를 물렸다.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만이 울리는 방 안에 태후가 입을 열었다.

 “의사가 있으십니까?”

 “소자는···.”

 “연친왕.”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그를 향해 태후가 단단한 얼굴을 했다.

 “하면 유 소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연친왕이 조심스럽게 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란은 황후가 될 겁니다. 그 애는 황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니까요.”

 태후는 단호했다. 당연히 지금의 연친왕비는 버려질 것이다. 애초 왕비와 맺어준 이가 지금의 황제였다. 그는 연친왕부와 강친왕부를 감시할 생각으로 형제의 아내들은 자신이 점찍어 맺어주었다. 응당 그녀들의 아비와 형제들은 조정에서도 황제의 가장 내밀한 신하들이었다.

 “하면 유 소저는···.”

 “가란은 연친왕의 가장 큰 조력자가 될 것입니다. 유 승상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연친왕께서 태평성대를 열 수 있도록 마땅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가란이 낳은 연친왕의 아들이 다음 보위를 이을 것이고요.”

 태후가 기쁜 얼굴로 읊조렸다. 금반지를 낀 태후의 손이 탁상 위에 올라온 연친왕의 손을 덮었다. 연친왕은 불안한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굳센 얼굴이었다. 선황을 살해하고는 더는 두려울 것이 없어진 여인이기도 했다.

 과연 황제가 될 수 있을까. 주윤협을 죽이고 황위에 오를 수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그가 주윤협을 죽이지 않는다면 언젠가 주윤협이 그를 죽일 것이다. 왜냐면 그들 형제가 제 부친을 죽인 역적들이니.

 주윤협은 이미 태후와 유 승상이. 그리고 그들 형제가 선황 시해 사건에 공모자들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다고만 하여 황족과 승상을 찍어낼 수는 없는 법. 다만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숨을 죽이며. 그러니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에 하나다. 그리고 태후는 이미 성공한 전력이 있었다. 여기서 망설일 게 더 있을까···.

 “태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태후는 기쁜 듯 고개를 숙이는 연친왕을 응시했다. 좋은 꼭두각시가 되어줄 것이다. 제 모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 유용한 패가 되어주리라. 태후는 이보다 더한 효자는 없을 것이란 눈으로 사내를 보다가 자리서 일어났다.

 배웅하겠노라 이르는 연친왕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강친왕에게 몸을 잘 회복하라 전한 뒤 다시 멱리를 쓰고 왕부의 뒷문을 향해 걸었다. 검고 작은 가마가 뒷문에 서 있었다. 젊고 어리석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속 그녀를 가장 어리석게 만든 것은 주희강이었다. 그녀를 가장 교활하게 만든 것 또한 주희강. 그자였다.

 그자를 사랑했던 날이 있었다. 아주 어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가장 아름답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시들어지게 마련이고 시들어진 것은 추하게 변모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녀가 아는 이들 중 그리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태후는 가마 앞에 서서 고개를 돌려 왕부를 힐긋 보다가 가마 안에 올랐다. 그래도 조금은 덜 추하게 변할 수 있진 않았을까. 주희강 그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녀가 가마에 오르자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주윤협의 윤곽이 아물거리며 잡힌다 싶더니 그보다 짙은 선을 가진 사내가 그려졌다. 주희강이었다. 경효 오라버니와 다른. 오라버니의 윤곽과는 단 한 면도 겹치지 않은.

 한때는 그녀가 사랑했던 사내. 그녀가 젊음을 바치고자 했던 이. 그래서 화 귀비 화설란이 더욱 미웠을까. 그녀만이 애정을 독차지하니까? 황제를 남편이라 여겼던 시절에는 황제가 화설란만을 안는 것이 지독하게도 미웠다. 하여 추잡스럽게 질투했다. 시샘을 숨길 수 없어서···. 하사받은 궁도 아닌 아예 화심전에 살림을 차린 화설란이 끔찍이도 미웠다. 화설란이 황제에게 안겼다는 말을 듣고는 황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침소를 찾아가 그년의 침의를 걷어붙였다. 음부가 뒤집히지 않기 위해 악을 쓰던 화설란을 보며 속이 까맣게 썩었던 날이 떠올랐다.

 어째서 화설란만 사랑하는 것일까. 후궁이 사랑을 받는다 해도 그런 식으로 독점할 수 없었다. 어느 황제도 그렇게까지 후궁에게 매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준수한 태자였던 희강을 흠모하며 그를 바라던 여숙영은 그때부터 조금씩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황후가 되자마자 연모했던 사내가 다른 여인에게서 본 자식들을 죄 떠맡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그녀가 돌볼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유모며 태감, 궁녀까지. 화설란의 아이들에게 붙이는 하인들은 그녀가 고를 수도 없었고 원하는 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게 어떻게 어미란 말인가.

 말 그대로 적만 빌리는 게 아닌가. 조금씩 분이 갈리기 시작했다. 황후의 적에 아이들만 입적하여 곤전에서 맡아 기르는 행위였다. 그리하여 화설란이 뜻대로 제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모욕적이었던 것은···. 좋아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마음을. 그녀가 가졌던 순수한 연모의 마음을 희강의 손에 살해당하는 일이었다.

 언젠가였을까. 독수공방하던 밤. 희강이 그녀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정오 이후 정신이 아주 흐릿했던 날이었다. 그가 찾아온 밤 그에게 안겼다고 생각한 밤. 길 귀비와 아주 똑같은 수모를 당한 밤···.

 숙영은 아직도 그 밤 누가 자신을 안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사 당한 길 귀비 또한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밤이 지나 숙영은 회임했다. 그리하여 희강의 아이를 회임한 줄 알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갔다.

 사내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소인가. 숙영은 그 웃음을 보며 조금씩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숙영은 즉시 산청을 꾸려달라 말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은 척 그녀에게 시선에 두지 않고 자신의 작은 아기와 놀고 있었다. 화설란이 낳은 첫아들이었다. 화설란의 앞에선 조금도 예뻐하지 않는 척하더니 이따금 제 아기를 데리고 와 어르며 놀아주곤 했다.

 숙영은 그를 우두커니 보다가 제 궁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발아래 가시가 박힌 듯했다. 그리고 유산했다. 누가 그녀의 패물에 사향을 발랐을까. 누가 그녀의 죽에 행인 가루를 넣었을까. 자궁이 약하면 소량의 사향으로도 자궁이 수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여자들은 아이를 아주 쉽게 떨구는 법이라고 했다. 누가 그랬을까. 누가. 설마 화 귀비가, 그 계집이?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제 아들의 지위가 위험하니까? 이가 갈렸다. 피에 젖은 속곳을 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가 죽었다며 울어도 황제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울다 기절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분노와 두려움, 서러움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화 귀비. 화 설란. 그 계집의 아이를 죽일 것이다. 반드시 그리 다짐했다. 똑같은 고통을 돌려주겠노라. 수십, 수백 번 이를 갈았다. 피눈물로 보낸 시간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의 유산에 관해 제대로 된 진상 조사도 진행하지 않았다. 언제 알았던가. 배 속의 아이를 죽인 자가 황제란 것을. 다름 아닌 그가 숙영의 아이를 죽였단 것을. 하지만, 하지만 왜···.

 어째서 제 아이를 죽인단 말인가. 후궁이 다른 후궁의 아이를 죽이는 것을 알고도 더러 관여치 않은 황제는 많다고 들었다. 주가의 사내들은 유독 모질고 잔인하다고 했으니 희강 또한 그리하다면 별수 없었다.

 회임을 막기 위하여 후궁에게 약을 쓴 황제들 또한 무수히 많았다. 회임으로 인한 권력의 분배를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황후에게 그리 모진 자는 처음이었다. 제 손으로 제 정궁의 아이를 죽인 자는 희강뿐이었다.

 희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제가 싫다 한들 어찌하여 제 아이에게까지···. 베갯잇을 깨물며 울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끙끙 앓으며 울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약을 물렸다. 유경효였다.

 경효 오라버니···.

 말간 얼굴이었다. 황제만큼 수려하진 않으나 반듯한 호남이었다. 경효의 손이 펄펄 끓는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너덜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얽어 붙기 시작한 것은. 오라비의 친우로 집안을 드나들 때 물리도록 본 얼굴인데도 그 순간에는 눈썹 하나, 콧대 하나. 가슴 뛰게 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가슴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천천히 데우는 열기에 눈을 슴벅였다.

 경효와는 그때부터 연인이 되었다.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흠모해왔다고 했다. 황제의 배필로 정해진 신분이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했으리라 속삭였다. 부인을 맞이하고도 그녀를 잊을 수 없는 마음에 남몰래 흘린 눈물이 강을 이룬다고.

 그리하여 숙영은 궁에서의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경효의 사랑 때문에. 또 경효의 지략 때문에. 그는 숙영이 회임했던 아이가 희강의 아이가 아니라 했다. 자신을 닮은 수하를 보내 그녀를 농락한 것이라고 했다. 온몸이 부서질 듯 떨리며 이가 갈렸다. 반드시 복수하고자 했다. 이 설움과 노여움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희강의 아이가 아니라 한들 제 아이였다. 화설란 그 계집과 황제 또한 아이 잃은 슬픔을 알아야 했다.

 그리하여 화예를 죽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채운 분노가 조금은 삭은 듯싶었다. 경효로 인해 궁의 생활 또한 한결 나아졌다. 황제를 원하지 않으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내로 인해 상처받는 일도 없었다.

 그 무렵 경효의 아이를 가졌다. 몸이 좋지 않아 친정이 소유한 별장으로 정양 가기 위해 궁을 나섰다. 아마 혼자라면 수습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효가 누군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내였다.

 출궁을 윤허하지 않는 황제를 흔들어 그녀를 궁 밖으로 보냈다. 산달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더 지체되었다면 궁에서 출산했을지도 모를 판이었다. 하여 황제가 눈치를 챘을까. 궁을 나서는 날 황제는 입술을 늘어트렸다. 그가 흘린 읊조림이 살벌했다.

 ‘돌아오는 날엔 황후의 몸이 좀 더 가벼워져 있겠군.’

 음산한 미소였다. 끔찍한 일별 인사였다. 숙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나갔다. 그리고 가란을 낳았다. 응당 제 딸로는 키울 수 없으므로 나자마자 떼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경효의 노비가 낳은 아기가 되었다.

 정실이 회임하지 않은 데다 회임했다 한들 해산 시기를 맞출 수 없으므로 비첩이 낳은 아이밖에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경효는 아이를 정실의 적에 입적시켰고 정실의 딸로 삼았다. 잘된 일이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생각하자면 눈물이 났다. 십 수일도 되지 않아 그녀를 떠난 아기이기에 더욱 그랬다. 경효가 이따금 아이를 데리고 입궁하기도 했고 또 그녀가 지은 배내옷과 자수를 전달해주기도 했으나 허탈함은 참을 수 없었다.

 너른 궁에서 화설란의 품에 안긴 자식들을 보니 더욱 그랬다. 화예가 죽고 난 이후 화설란은 도망을 시도했다. 두 번째 도망이었다. 어린 아들인 태자를 등지고 떠난 행위에 황제는 노여워했고 어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태자는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다.

 두 번째 도망···. 도망친 화설란은 양천을 벗어나기 전 잡혀 궁으로 끌려왔다. 끌려온 끝에 자결을 시도했고 간신히 살았다. 살아난 여자에게서 황제는 더 이상 아이를 앗아가지 않았다. 숙영이 화설란의 아이를 떠맡는 일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먹고 잠들고 생활하는 궁에서 제 아이의 울음소리가 아닌 증오하는 사내와 여자가 낳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화설란의 자결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그녀의 품에서 자라는 것을 보는 것 또한 끔찍한 일이었다.

 무엇이든 끔찍했다. 희강을 죽이기 전까지 궁에서 산다는 자체가···.

 숙영은 가마에서 내렸다. 황궁에 도착하여 구등(球燈)으로 환한 휘락궁을 보았다. 희강이 죽은 후 설욕의 세월은 끝난 줄 알았다. 면전에서 당하는 비웃음도. 제 불륜과 사생아를 들킬 일도. 나아가 화예를 죽인 진범으로 드러나는 일도. 그러나 경효가 그랬다.

 ‘우리는 여전히 범의 아가리 속에 있어. 숙영, 우리가 범 새끼를 살려두지 않았나.’

 경효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숙영은 그제야 거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경효는 가란을 위해 황제를 씨내리로 이용하려 했다는 숙영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굳이 씨내리로 이용할 게 무어 있어? 이 더러운 주가의 나라. 나와 너를 영원히 속박할 나라···. 끝내면 그만인걸.’

 일순 호흡이 멈췄다. 맥이 빠르게 뛰었다. 경효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나라가 계속되면 그들은 영원히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윤협이든 연친왕이든. 설사 가란에게 어미가 누구인지 어찌하여 숨길 수밖에 없었는지 말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부모 자식으로선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해도 부부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지긋지긋했다. 단 한 순간이라도 경효와 부부로 살고 싶었다. 가란의 어미로 살고 싶었다.

 ‘직접 부수자. 우리의 손으로···.’

 경효가 읊조렸다. 숙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야 할 때였다.

 ***

 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지 않았다. 은환은 착잡한 얼굴로 엄마와 인사했다. 그녀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여식 앞에서 한참이나 울었다. 황제와 비의 앞에서 보일 예가 아니라는 서치윤의 타이름에도 눈물을 어찌하지 못해 어린애처럼 울었다.

 빨갛게 익은 얼굴을 감싸는 엄마의 어깨를 안고 은환은 중양절이 오기 전 다시 찾겠다고 했다. 엄마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가을도 너무 멀어. 은환아.’ 하고 속삭였다. 그리하여 두고 가기 힘들었다.

 서치윤이 억지로 떼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녀는 마치 지아비처럼 서치윤의 품에 안기는 어미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랐다. 황제는 그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온 황궁은 황제의 혼례 준비로 북적거렸다. 황후를 맞이할 준비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 은환은 궁으로 돌아왔다. 화심전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자신은 그 모든 것과 무관하다는 얼굴을 한 황제가 곤룡복을 입는 것을 바라보았다.

 부러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내내 화심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산책을 하겠다며 궁 밖을 서성였다. 그런데도 화심전을 황후와의 신방으로 꾸미기 위해 들락거리는 내복국의 궁녀며 신방에 들어갈 상을 준비하기 위해 황제의 태감을 만나러 온 어선소의 태감들까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하여 은환은 지친 몸을 이끌고도 화심전 밖을 배회하고 오던 차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렇게 눈앞에서 곤룡복을 입어보고 있었고 신방을 상징하는 듯 그들이 덮고 자는 금침과 금금과 탁자 위의 작은 화분까지 바뀌어 있었다.

 “그리 피곤한 얼굴로 쉬지 않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나?”

 태감의 손길을 받던 황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본래는 궁녀가 해야 할 일을 은환이 아닌 여인의 손은 싫다며 의복을 갈아입는 일까지 태감이 맡아 하는 황제였다. 그런 사내가 이젠 은환이 아닌 여인과 합환주를 나누며 그녀의 붉은 개두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그녀조차 써본 적이 없는 개두를. 혼례 올린 일이 없기에 쓸 수 없었던 붉은 개두···.

 “가비.”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보는 은환을 향해 황제가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은환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깐 뒤 고개를 저었다.

 “···조금 갑갑해서요.”

 사실은 몹시도 피로했다. 먹고 자던 자리가 바뀌자 신경이 곤두섰고 마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속이 메스껍기도 했다. 그러나 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바뀌어가는 화심전만큼 불편한 공간은 없었다.

 곤룡복을 입은 황제가 은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커다란 손이 은환의 어깨를 잡았다. 으스러지고 싶었다. 산산이 조각나 그의 앞에서 형태로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어딜 다녀왔어?”

 “사, 산책을 다녀왔어요.”

 황제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은환은 얽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조악스러운 힘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은환의 시선 또한 별수 없이 들어 올려졌다.

 “당분간은 화심전 안에만 있거라.”

 “하오나···.”

 “꽃구경은 서남에서 실컷 하지 않았나.”

 핏기없는 입술에 사내의 입술이 뭉개졌다. 은환은 입맞춤을 받으며 그의 어깨 너머 신방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입술이 떨어졌다. 은환은 눈동자를 굴려 그를 보았다.

 “영소전으로 가고 싶어요.”

 “거긴 왜?”

 “빈첩에게 하사한 궁이잖아요.”

 “하나 머물지 않는 곳 아니냐.”

 하사받은 궁이나 머문 적 없다. 이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그러나 앞으로는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황후가 누웠던 침상에 눕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와 합환주를 마시고 난 밤. 그녀가 따른 술을 마신 뒤 함께 침상에 누울 밤을 생각했다. 그녀를 안던 그녀를 안지 않던···. 그 밤에 은환은 무얼 하고 있을까. 무얼 하며 견뎌낼까. 차라리 회임이 빨라 아기라도 품에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견딜 수 있을까. 그 생활들을···. 아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았던 끔찍함이 차츰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비.”

 단정한 저음이 그녀를 깨웠다.

 “여긴 신방인데··· 황, 황후 마마와 폐하가 초야를 보낼···.”

 말문이 막혔다. 어줍게 뱉어내는 말들이 끔찍했다. 은환은 볼을 붉힌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을 급하게 깜빡거리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어깨를 움켜잡았던 황제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볼을 쥐었다. 마주하기 힘들었다. 같은 공간에 시선을 얽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하여 영소전으로 가는 것이냐?”

 “예.”

 “유가란과 짐을 여기에 두고.”

 “···예.”

 “짐이 유가란을 안았으면 좋겠어? 너를 안았던 이 방에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버티고 선, 두 다리가 무참하게 떨렸다. 은환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황제는 웃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왜?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게 즐거운가.

 “빈첩은···.”

 “짐은 그날 너를 안을 거다.”

 젖은 숨소리가 쌕쌕거림처럼 가늘게 울려 퍼졌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입술 끝을 미끄러트린 채였다. 눈물이 차올랐다.

 “짐은 너를 안을 거야. 유가란이 들을 수 있도록.”

 폐부가 조여들었다. 황제의 커다란 손가락이 은환의 볼을 닦았다. 그는 익숙하게 입술을 맞추며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어깨를 비틀어 벗어나려 하자 남자가 은환의 손에 제 발기한 양물을 쥐게 했다.

 ***

 밝은 날씨였다. 은환은 대홍원령포를 입은 유가란을 응시했다. 대삼을 걸친 뒤 봉관하피를 쓴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느다란 눈썹에 칠한 눈썹먹과 얇고 고르게 펴 바른 백분. 입술의 색이 도드라지도록 두드린 연지가 어색함 없었다. 본래도 체구가 자그마해 황제와 나란히 설 때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마디마디 굵다랗지 않은 구석이 없는 황제였다. 유난히 자그마한 여자와 나란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더는 상할 것도 없는 가슴인데 이상하게 얼얼했다. 가란과 나란히 섰던 황제가 황후와 마주 보았다. 문무백관들이 가득한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반듯하게 읍했다. 눈동자를 굴렸다. 흡족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던 태후는 표정이 없었다. 유 승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화 태비 또한 죽을 듯 창백한 얼굴로 아들 내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란과 부부로서 하나가 된 윤협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던 은환은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윤협은 이제 은환의 하나뿐인 지아비가 아니었다. 이 따뜻한 계절이 오기까지 그리 수십 번을 곱씹었는데도···. 호흡을 가닥가닥 끊어 내쉬다가 고개를 들었다.

 세찬 봄볕 속에서 빛나는 황후의 용봉관을 바라보았다. 아홉 마리의 용과 네 마리의 봉황이 푸른 점취로 장식된 봉관은 가란의 머리 위에서 드높이 빛나고 있었다. 은환은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젯밤부터 이마에 미지근한 열이 끓었다. 황제는 어젯밤까지도 화심전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잤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잘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오늘 밤에도 그녀와 함께 있으리라 했다. 혼례를 치르고 온 사내와 보내는 밤이 얼마나 비참할까. 사무치도록 끔찍할 것이다. 벌써 온몸이 으스러지는 기분이다. 지금을 견디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비강을 드나드는 숨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피가 역류하여 졸도할까 두려웠다.

 정말이지 피를 게워내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속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후궁으로서 황제의 혼례식에 참여한 터였다. 며칠째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인가. 황제는 맥없이 하얀 얼굴로 분을 바르는 그녀를 아침상 앞에 앉혀 입에 죽을 넣어주었다.

 ‘어차피 네 머리 위에도 용과 봉황이 빛날 텐데 왜 그런 얼굴이냐.’

 그를 응시하는 대신 제 용봉관을 응시하는 은환을 본 그의 말이었다. 하나뿐인 후궁이었다. 하여 그녀 또한 후궁으로서 참여했고 후궁으로서 봉관을 썼다. 황후와 똑같은 건 아니지만.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보는 은환의 손을 움켜잡은 그가 작은 반지를 내밀었다.

 ‘그런 넋 나간 얼굴로 있지 마.’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기운이 없다고. 그러나 은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혼례식을 위해 예복을 입은 황제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니 그 반지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준 거야.’

 선황이 태비에게···. 희강이 설란에게···. 홍옥이 가운데 작게 박힌 은색 반지였다. 나비와 석류 열매가 작게 실처럼 양각되어 있었다. 한데 하필 이걸 왜 지금 주는 걸까 생각했다.

 ‘언젠가는 홍개두를 쓰게 해주마. 정말이야. 곧 끝날 거니까.’

 ‘···.’

 ‘아픈 건 잠시야. 은환아.’

 대꾸하지 않았다. 부딪히듯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말랑한 혀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입술이 뭉개지면서 연지가 번졌다. 윤협이 은환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밀어 넣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달콤하고 말랑한 혀로 속삭이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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