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누구의 정자인가 (2)
* * *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시발 적당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본다. 혹시나 밖에 있는 나의 그녀, 곧 나의 신부가 될 그녀가 들을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미경은 미동도 없었다. 짧은 미니스커트 사이로 거뭇한 무언가가 보였지만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로지 내 눈을 똑바로 보고서 입을 꾹 닫고만 있었다.
“뭐 말을 좀 해봐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애가 타는 건 나였다.
갑자기 갓난쟁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는 나보고 아빠라고 불러 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못 들은거야, 이해 못한거야?”
지금 상황이 웃긴걸까. 그녀의 붉은 입술이 씰룩이고 있었다.
“얘 아빠가 너라고. 열 달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이의 아빠가 동호 너야...”
뭐...?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 충격이었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치 죽일 것 같네.
“그... 그게 말이 돼요? 아이 아빠는 성대라면서요! 그때 그렇게... 말했잖아요.”
혹시나 그녀가 들을까 데시벨을 더 낮췄다.
“그런 줄 알았지. 근데 막상 낳고 보니까 성대 녀석이랑 닮은게 하나도 없더라니까. 그럼 누구겠어 바로 너 아니겠어?”
이런 씹....
“와.... 나 어이가 없어서. 내 아이라는 증거 있어요? 막말로 당신 남편일수도 있고, 성대 아저씨 애일수도 있잖아요.”
저렇게 세상물정 모르고 자고 있는 아이가 내 아이라니. 절대 물러나서는 안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뜻대로 아빠가 되어줄 수는 없었다.
“확실히 너야.”
하... 씨발.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는 그녀의 아랫 허벅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이 정도 반발은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여유로웠다.
평소 같았으면 풍만한 젖가슴 감촉이 생각나 반쯤 발기가 되었겠지만, 자지 역시 시급한 상황을 인지했는지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 근데 도대체 여기는 왜 온거에요?”
자신이 원하는 질문이 왔는지 그녀의 입꼬리가 씩 하고 올라갔다.
“왜 오긴. 아들이 아빠 찾으러 온게 잘못이야?”
“아들이에요?”
아. 이런거 물어보면 안되는데.
“응. 왜 딸을 원했니?”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아들인데 어떻게 하니. 서운하겠다 얘. 그래도 우리가 잘 키워봐야지.”
우... 우리? 이런 쌰앙...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지만 차마 아이 앞에서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속도 모르고 자고 있는 저 아들, 아니 아이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내가 여기 왜 왔겠어? 뭐 이제와서 사과라도 받으러 왔겠니. 이미 집이고 직장이고 다 날아갔는걸. 당연히 너가 사랑해 마지않는 저 년한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왔지.”
“사실을 알리다니 무슨 사실을!”
미경의 입에서 정아 이야기가 나오자 언성이 높아졌다.
“저 년... 아니. 미안하다 아가야. 정아씨는 성대가 아빠라고 알고 있잖니. 이 아이의 진짜 아빠가 누군지를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 그게 전직 선생님으로서의 도리 아니겠니. 호호.”
미... 미친년. 이 년 이거 완전히 돌아버렸다.
도무지 뭔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나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꽤나 오랜 기간 이를 간듯한 미경은 막힘없이 준비한 말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근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더라구. 자기 때문에 미안하다나 뭐래나. 진심으로 사과 하는 사람 앞에대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잖니.”
후...
심성 착한 나의 그녀가 미경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갔다. 아이를 업고 온 미경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베풀었을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미경 역시 그녀의 전 남편과 바람을 핀 상간녀일 뿐이었다. 대놓고 소박을 쳐도 모자랄 판에 친절하게 안방 자리까지 내어주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냐.
미경이 그냥 엿이나 먹일려고 이 곳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경험한 미경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여우 같은 여자. 풍만한 젖가슴은 젖소를 연상시켰지만 하는 짓은 영락없는 여우 그 자체였다.
안 되겠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미경이 파놓은 덫에 꼼짝 없이 빠질 것이 분명했다.
“원하는게 뭐에요.”
쎄게 나가자.
“뭐?”
“도대체 원하는게 뭐냐구요. 솔직히 여기까지 왔으면 원하는게 있어서 온 거 아니에요. 안 그러면 여기까지 왔겠어요? 그니까 얼른 말해 봐요. 안 그러면 나도 이판사판이니까.”
“풉...”
“지금 이게 웃겨요?”
짜증이 확 올라왔다.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미경이의 태도에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상.”
“네...?”
“보상을 원해. 내 인생을 망치게 한 너희들한테. 그것도 아주 제대로 된 보상으로 말이야.”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제야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 원하는 보상이 뭔데요.”
일단 들어나 보자.
“일단... 내가 살 집이 없어졌잖아. 너희들이 남편한테 말해서 위자료 한푼도 못받고 쫒겨 났거든. 당연히 양육비조로 모은 돈도 다 빼앗겼고 말이야.”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쌌다.
남편을 두고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나누는 유부녀 클럽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남의 애까지 배어 오다니. 어디 손가락 하나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돈 줘.”
“네?”
“돈 달라구. 아이는 키워야될꺼 아니니.”
여전히 당당한 그녀였다. 처음 내 앞에서 옷을 벗으며 덜덜 떨던 그녀는 완전히 딴 세상으로 가버렸다. 눈앞에 그녀는 세상 독기로 가득 물이 오른 미시 그 자체였다.
“어... 얼마를 원하는데요.”
“최소한 이 집 정도? 일단 살곳부터 마땅치 않아서 말이야. 아이를 모텔에서 키울 수는 없잖아?”
와... 씨발년. 이거 완전 날강도네?
터져 나오는 욕을 참느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최소가 이 집이라고? 내 유일한 재산이 돌아가신 엄빠가 물려준 이 집인데. 이거 달라고?
그럼 나보고 거리에 나앉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후... 그게 말이 돼요? 갑자기 아이 하나 데려와서 이 집을 달라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괜히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 대화의 의도는 그녀가 찾아온 목적에 있었기에 충분히 더 이야기를 이끌어내야 했다.
“그럼... 같이 키우던가.”
“네?”
“어차피 아이도 아빠가 있는게 좋잖아? 아빠가 있어야 애 발달에도 좋잖니. 내가 학교 선생님이라서 잘 알잖아. 그치?”
이런 씨발. 학교에서 잘린 주제에 또 선생님 타령을 하고 있네.
“그니까 아이도 아빠 집에서 지내고. 나도 너희 집에서 같이 살고. 그럼 일석이조 아니겠니?”
와....
뻔뻔함이 도를 지나쳤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개소리를 주장하는 그녀 때문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선택해. 너가 너희 집에서 나가던가. 아님 내가 너희 집으로 들어가던가.”
“와 씨.... 그걸 지금 제안이라고 하는거에요?”
“제안 아닌데?”
“그... 그럼 제안이 아니면 뭔데요.”
“통보야. 몰랐어?”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 양 손을 펼쳐 보였다. 꽤나 짙게 눈화장을 했기 때문인지 원래 커다란 눈이 더 커보였다.
“오늘부터 여기 들어올 꺼라고. 이제 같이 사는거야.”
오냐오냐 들어줬더니 끝이 없었다. 그녀의 안하무인 태도에 치가 떨렸다.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인내심도 바닥 나고 있었다.
아기고 뭐고... 씨발. 내 아들도 확실하지 않은데.
내가 안 받아주면 어쩔 거야?
“나가요. 나가. 애초에 들을 필요도 없었어. 그 아이 아빠가 나라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에요.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나보다 성대랑 훨씬 많이 했잖아. 근데 이제 와서 내 아이라고?”
지금까지 참았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미경이 년이 있으면 잘 되던 일도 안 풀리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녀는 길조 몰고 오는 까치가 아니라 악운을 부르는 까마귀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입고 온 가죽 미니스커트가 까마귀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빨리 안나가!?”
미경은 내 외침에도 동요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흥분한 나를 보며 아이가 깰까봐 가슴팍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안나가면 내가 직접 내보내줄게. 일로와요.”
이판사판이었다. 잘못하다가는 한 지붕 두집 살림 차리게 생긴 판인데 나라고 못할게 무엇이냐. 몇십년을 짜놓은 그녀와 나의 인생 플랜에 불청객이 끼게 할 수는 없었다.
당장 침대 맡으로 가 미경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버티는 미경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이거 놔!”
“빨리 안 나와요!”
미경의 티셔츠 사이로 퍼런 핏줄이 드러나는 하얀 젖무덤이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시중에 맞는 사이즈가 없어 항상 특대 브래지어를 착용하곤 했다.
지금은...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겨우 그녀의 팔목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녀였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내가 문 열어줄게. 애 데리고 당장...”
아 씹....
어느새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의 그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아이 아빠가.... 동호라고?”
아.... 좆 됐다.
하긴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을리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그녀도 유심히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
이제 막 이혼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그녀가 듣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다 들었구나? 굳이 말 안해줘도 되겠는데.”
미경이 이때라는 듯 상기된 목소리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 맞다, 잠깐만!”
또 뭔 개소리를 지껄일라고?
“그럼 내가 이제... 동호 정부인이 되는건가?”
나와 그녀를 바라보는 미경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가고 있었다.
이 년 이거... 완전히 돌아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