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6)

00021  두번째 손님:알몸 에이프런  =========================================================================

                                                      

“저, 우중씨,”

하영이 액정 화면에다 대고 머뭇거리며 말을 하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문이 열렸다. 로비에 앉아 있는 경비에게 남자의 이름과 호수를 말했더니 통과 허락을 해준다. 아마 미리 말해뒀나 보다. 경비가 그녀를 실례될 정도로 빤히 바라보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초리가 순간적으로 움찔한 것 같다고 느낀 건 과민반응일까. 찝찝한 마음을 가득 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까지 올라가는 하영.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그의 집이 있다. 초인종을 누를 것도 없었다. 문은 살짝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들어와.”

노크를 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꽤 잘 다듬어진 목소리다. 하영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백의 지퍼를 반 정도만 열었다. 손을 넣고 전기 충격기의 딱딱한 재질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굉장히 깔끔하고 모던했다. 전체적으로 블랙과 화이트만으로 이루어진 현대식 디자인의 실내는 부유하고 젊고 똑똑한 이미지의 남자가 기거해야만 할 것 같은 곳이었다. 하영은 반 정도 보이는 남자의 몸을 봤다. 거실과 부엌 사이엔 벽이 있었는데, 문 없이 문짝 하나만한 사이즈로 뚫려 있는 곳 너머, 남자의 움직임이 보였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육중한 몸매의 남자가 하영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요리에 열중해 있었다. 편안한 티셔츠에 바지, 그 위에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열심히 출렁이는 거대한 살덩어리 같았다. 하영은 숨을 훅 들이킨 후 머뭇거리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 실례합니다...

“남편한테 실례한다는 건 또 뭐야? 머뭇거리지 말고 저거나 입고 와.”

아까까지 열심히 볶던 스파게티면을 접시에다 분배한 남자는 손으로 오븐 위에 걸린 하얀 앞치마를 가리켰다. 이 남자, 성우 한다더니 제대로 연극배우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머뭇거림 없이 바로 역할극에 들어가 버리는 게 낙원 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하영은 가방을 식탁 바로 옆에 두고 앞치마 쪽으로 걸어갔다. 그 전에 힐끗 쳐다본 식탁 위는 엄청나게 찬란했다. 블루베리와 치즈가 올라간 카나페, 정확히 무슨 요린지 모르겠지만 소스에 조려진 닭고기 요리부터 해서 비싼 레스토랑 풀코스 같은 요리가 깔끔하고 맛깔스럽게 세팅되어 있었다. 아무리 비싼 집에 산다고 해도 엉망으로 어질러놓고 살 줄 알았는데 생긴 거와는 전혀 다른 고급 취향을 갖고 있어서, 하영은 남자를 다시 봤다. 

그런데 요리 다 끝났는데 앞치마는 왜? 냅킨 같은 거 대신인가? 어리둥절하면서도, 하영은 시킨 대로 앞치마를 걸쳤다.   

“잠깐만. 그게 아니야.”

앞치마의 리본을 뒤로 묶으려는 하영을 우중이 저지했다. 쿵쿵 거리는 걸음으로 단숨에 그녀 앞에 선 우중은 앞치마를 뺏어든 다음 다시 건넸다. 얼떨떨해하며 받아 드는 그녀에게

“저 방 가서 앞치마만 입고 와.”

“네?”

“다 벗고 앞치마만 입고 오라고.”

“어째서...?”

“넌 아직도 내 취향을 몰라. 난 알몸에 에이프런이 좋다고 했잖아.”

우중은 경악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하영을 억지로 밀어 부엌 밖으로 쫓아냈다.

“음식 식잖아. 빨리 입고 와.”

“꼭 입어야 돼요?”

하얗고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들고 머뭇머뭇하는 하영에게 우중은 가차 없이 말했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당신 그렇게 빼는 거 안 좋아한다고.”

와. 그는 제대로 연극하고 있었다. 하영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우중에게 압도당한 하영.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녀는 그를 구슬릴 깜냥이 안 되었다. 

하영은 어쩔 수 없이, 앞치마를 들고 부엌 근처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플하게 침대가 있고, 간이 책장이 있는 게 전부인 방. 문을 닫고 한동안 우두커니 앞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웨딩드레스보다 더 새하얀 그 앞치마는 앞판 부분이 살짝 하트 모양 느낌이 났고 앙증맞은 크기와 형태의 주머니가 하나 달려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소재로 만들어져 있어, 정작 부엌에서 일 할 때엔 잘 쓰이지 않을 것 같다. 하영은 천이 뚫어져라 앞치마를 보았다.

“식는다니까!”

빽 소리치는 우중. 거기에 휩쓸려 “잠깐만요!” 하고 외친 그녀는 눈 질끈 감고 가디건부터 시작해서, 입고 있는 겉옷을 모조리 벗었다. 아마 그는 속옷까지 벗으라는 말이겠지. 하영은 그냥 브래지어와 팬티 위에 앞치마를 걸쳤다. 쾅쾅! 뭔가가 세게 두드려지는 소리가 점점 속도 빠르게 났다. 손바닥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식탁 같은 것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소리는 그녀의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지금 가요!”

그녀는 결국 브라는 벗어서 옷 옆에 집어던지고 문 밖으로 뛰었다. 살짝 헐렁해서 잘 고정되지 않는 앞치마 끈 부분이 자꾸 옆으로 흘러내린다. 자꾸 손으로 올리면서 단숨에 식탁 앞까지 달려갔다.

“좀 크네. 더 작은 사이즈를 사놔야겠군.”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포크로 스파게티면을 말았다. 그는 그 다음부터는 그녀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하영도 그의 건너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족히 오인분은 넘을 것 같은 양식이 차려진 호화로운 식탁. 그녀 앞에는 우중의 사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양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지만, 워낙 종류가 다양해서 다 먹게 되면 엄청 배부를 것 같다. 

“잘 먹겠습니다.”

“...”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어서, 팬티 한 장에 앞치마만 입은 하영은 한기를 느꼈다. 반쯤 노출된 등이 썰렁하고, 맨살이 천에 닿는 느낌이 야릇하다. 그가 만든 모든 음식들이 다 맛있었지만, 자꾸 가리다 만 몸이 의식되어서, 하영은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하영은 먹다 말고 우중 쪽을 흘끔거렸다. 그는 천천히, 아주 우아한 손놀림으로 포크와 나이프질을 했고 스파게티면도 아주 능숙하게 잘 말았다. 

저 불어터진 몸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섬세한 동작으로 식사를 하고 있어서 그녀는 흘끔거리던 것을 잊고 아주 대놓고 그를 보았다. 그만큼 그의 동작엔 중독성이 있었다. 

“신경 쓰여서 못 먹겠잖아. 나 그만보고 너도 먹어.”

하영이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그를 보자 참다못한 그가 식사를 중단하고 그녀를 노려봤다. 

“아, 미안해요.”

============================ 작품 후기 ============================

13~20편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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