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6)

00020  첫날밤  =========================================================================

                                                      

“잠깐만!”

“하,하앗, 응?”

“콘돔!”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던 낙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동작이 둔해지고 망설임이 깃들긴 했지만 여전히 허리를 놀리고 있는 그의 어깨를 콱 움켜쥐고 하영은 필사적인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녀도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녀의 내부는 아직도 바짝바짝 조여들면서 더 강한 것을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은지야..”

낙원은 낭패감 가득한 얼굴로 하영을 보았다. 반쯤 그녀의 몸에서 벗어난 그의 성기에서 찔끔거리며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맙소사!

“나 임신하면 안 돼.”

사색이 된 하영. 결국 둘은 산부인과에 가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았다. 약국에서 약을 타자마자 정수기 물을 받아 삼켰고, 돌아가는 택시 안은 다시 침묵으로 어색해졌다.

“미안해요. 이런 건 내가 챙겼어야 됐는데.”

“아니, 아니야. 내 쪽에서 신경 썼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남은 시간, 낙원은 하영을 수발들면서 보냈다. 약을 먹어 몸이 급격히 나빠진 하영을 위해 죽을 사오고 온몸을 가볍게 마사지까지 해주는 낙원. 입장이 바뀐 것 같은 대우에 난처해하는 하영을 한사코 수발들겠다는 낙원을 하영은 차마 말릴 수도 없었다. 

*

“자, 이번엔 이런 게 필요할 지도 몰라.”

승낙은 기분 나쁠 정도로 빙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천 소재의 검정 가방. 짧은 손잡이 끈이 앞판 뒷판에 각각 한 개씩 달렸고 가로가 긴 사각형 형태의 그 가방은 승낙의 손에서 달랑거리고 있다. 하영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봤다. 아까, 뭉구는 이번 일은 꽤 힘들 수가 있겠다고 했다. 하긴 어딘가 진상 냄새가 강하게 나는 남자였다. 아주 많이 뚱뚱한 체형에 괴팍해 보이는 얼굴. 그 남자의 부인 노릇을 하고 난 뒤엔 정신적 보상이 필요할 것 같았다. 

“넌 나한테 무슨 관심이 그리 많아.”

하영의 메마른 목소리에 승낙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못 알아듣겠다는 듯 꺼벙하고 순진한 표정을 한다. 

“무슨 소리? 난 동업자로서 널 서포트 해주고 있을 뿐인데?”

승낙은 억지로 하영의 손에 가방을 쥐어준 다음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그녀가 노려보며 탁 쳐내자 몹시 기쁜 듯한 표정을 짓는다.

“너 정말 굉장한 쓰레기다.”

“그럼 너는? 굉장한 쓰레기한테 정신 못 차릴 듯이 빠져든 너는 뭔데?”

“그건 내 평생 실수야.”

승낙의 눈이 갸름하게 떠졌다. 가늘게 좁혀 뜬 눈으로 그녀에게 가까워져 오는 그를 하영은 냉정한 눈으로 보고 있다. 진짜, 지금도 객관적으론 이 남자는 매력적이다. 이 남자와 있으면 공기가 팽팽해지고 순간순간이 드라마틱해진다. 그게 하나하나 눈에 다 들어오는 데도, 더 이상 마음이 안 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실수가 아니라 행운이라는 걸 인정하면 좋을 텐데.”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아, 네~ 안에 든 것들 사용법이나 잘 익혀둬. 니 몸 하나는 제대로 지켜야지. 안 그래?”

“마치 나한테 엄한 일 일어나길 바라는 말투다.”

“그럴 리가?”

하영은 그와 더 이상 말 섞지 않기로 했다. 

역시나 가방 안엔 호신용 도구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냥 사용하기 편한 한두 가지 선별해서 줘도 좋을 텐데, 사용법도 제각각인 수십 개의 도구들을 가방이 미어터져라 우겨넣은 것은 분명 승낙 본인만의 선택일 테지. 그의 악취미가 읽어져서, 하영은 몹시 불쾌해졌다. 

대충 침대에 우루루 쏟아놓고 눈에 띄는 두 가지, 곰 스프레이와 전기 충격기만을 따로 빼놓은 하영은 나머지는 다 쓸어 담았다. 그녀는 꼴도 보기 싫은 가방을 지퍼를 채워 방구석에 대충 던져놓은 후 전기 충격기를 집어 들었다. 스위치를 올리자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손 안에서 진동하는 전기 충격기. 설마, 이걸 쓸 일, 일어나지 않겠지? 뭉구는 이번에도 남자의 집 밖에 경호원 한 명을 배치해놓겠다고 했다. 하지만 경호원이 문을 따고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혹은 운이 나빠 경호원이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녀의 안위는 그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하영은 서랍장 위에 놓인 서류철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으악. 첫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남자의 사진은 보고 또 봐도 끔찍하다. 삼중사중턱에 족히 백 키로는 넘을 듯한 과체중의 남자.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미남형이었더라면 그나마 저 체중으로도 볼 만헀겠지만, 이 남자의 이목구비는 평범한 편인지 저 정도로 살이 쪄버리니 눈코입이 모두 살에 묻혀버렸다.  

나이, 30세. 이름, 김우중. 재택근무에 결혼 경력 없음. 가끔씩 성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보니 목소리는 괜찮은 모양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비싼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그 밑에 적혀 있는 우중의 요구 사항,

「저녁 7시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길 원함. 다음 날 아침 먹고 퇴근하는 걸로. 식사 준비하고 먹는 동안 요구사항이 따로 있음.」

“왜 요구사항이 따로 있단 말을 해 논 거야. 신경 쓰이게.”

하영은 인상을 그리며 냉장고에서 꺼낸 와인을 잔에다 조금 따랐다. 자신에게 어떤 요구사항이 있을 수야 있다지만 그건 그냥 만나서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근데 미리 그런 게 있다고 말해서 긴장하게 할 건 또 뭔가. 하영은 점점 더 이 남자가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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