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6)

00018  술 마시며 남편과 편해지기  =========================================================================

                                                      

“은지씨, 위험하잖아!”

택시에서 내리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휘청하는 하영의 허리를 다급히 감싸 안으며 낙원이 소리쳤다. 그녀의 가는 허리에 한 바퀴 둘러진 두터운 팔에 하영의 가슴이 뛴다. 빈손으로는 택시 문을 닫고 아직 그녀의 허리에 밀착되어 있는 다른 손은 재빨리 떼면서 그는 그녀를 살짝 밀어 택시로부터 멀리 떼어놓았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택시 뒤꽁무니 쪽으로 엉겁결에 시선을 주던 그녀는 갑자기 그가 한 말의 의미가 확 들어왔다. 

“그냥, 우리 어색한 짓 그만해요.”

어색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낙원은 하회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성큼성큼 단숨에 매표소까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하영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두라는 말은 이제 내 역할 끝났다는 말인가? 하긴, 내가 생각해도 우리 너무 어색했어. 나도 견디기 힘들 지경인데, 저 사람은 오죽할까. 아무런 재미도 없는데 쌩돈 들여 계속 같이 있고 싶을 이유가 없겠지.

하영은 이 일에 소질이 있을 거라던 승낙의 뺨을 원 없이 갈겨주고 싶어졌다. 학교 홈페이지에 하영의 그렇고 그런 사진을 뿌려 돌아갈 곳을 확실하게 차단해버린 그. 자기 악몽의 원흉인 승낙을 갈아 죽여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돈이라도 원 없이 벌어볼 생각이었는데 이건 뭐 단순한 매춘보다 훨씬 어려운 일 같다. 그냥 술 따르고 웃어주고 자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자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환상을 계속해서 유지시켜줘야 하니까. 

교사보다는 쉬운 것 같긴 해도 만만찮다고는 할 수 없는 일. 낙원과 이대로 헤어지면 앞으로 이 일, 계속할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아 하영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쩌지. 달려가서 울고 불며 매달려봐? 아냐. 그랬다간 더 정 떨어질 게 뻔해. 이 시점에서 아양이라도 떨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다. 

“뭐해요? 안 따라오고.”

“네?”

“덥잖아요. 계속 돌아다니긴 뭣한 날이니까 입장해서 어디라도 들어가 있죠.”

하영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도 더 이상 반말을 하지 않고 있다. 

어색한 짓 그만두자는 게 연기만 그만두자는 거였나. 하긴 자기가 생각해도 자긴 예쁘고 젊은 여자라서 낙원한테는 아까웠다. 그의 태도에 따라 휙휙 변모하는 자신의 생각에 실소를 터트리며 하영은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어색함을 잊기 위해 주막처럼 꾸며놓은 식당에서 막걸리를 시켰다.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는 그 식당엔 종업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발을 벗고 테두리 둘러진 거대한 평상 같은 공간 위로 올라가 자리 잡자 곧 크고 넓적한 자기 그릇 같은 데에 담긴 막걸리가 나왔다. 안주 필요 없느냐는 말에 추가로 도토리묵과 파전을 시키는 낙원. 

하영은 자기 의사는 묻지 않아 살짝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손님 앞에서 티 나게 토라질 수도 없는 법. 굉장히 능숙한 여자라면 아양 떨면서 오빠, 나 뭐 먹고 싶은데~ 같은 식으로 낙원이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살살 꼬드길 테지. 하지만 하영에겐 그런 자질이 부족했다. 오히려 그런 자질이 뛰어난 남자에게 꼬드김 당하는 역할이었지. 최승낙 같은.

“은지씨, 피곤하세요?”

“아, 아? 네.. 더위 먹었나 봐요. 우리 술 한 잔씩 할까요..”

낙원은 사발에 막걸리를 떠서 하영 앞에 놓은 다음 자기 것도 떴다. 

흠, 그러고 보니 교사들은 이런 경향이 있다. 교장도 교감도 여선생한테 술을 따라주지 받으려 들진 않는다. 적어도 하영이 근무한 학교에선 다들 그랬는데 성희롱 문제가 불거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그런다는 인상을 받았다. 낙원이 이러는 것도 그 습관 때문일까. 하영은 남자 교사들이 자기에게 술을 따라줄 때마다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가끔 살살 애교 부리면서 남자 선생들에게 자진해서 술 따라주는 여교사도 있었지만, 하영은 예의상 주고받은 적은 있어도 먼저 따라준 적은 없었다. 얼굴만 예쁘지 무뚝뚝하단 소릴 많이 들어온 하영. 끼 부릴 줄 몰라서 되려 끼 부리는 남자한테 된통 당하기나 한 자신이 계속 이 일 할 수 있을까?

“은지씨는 말이 없는 편이신가 봐요.”

“처음엔 좀 그래요. 친해지면 말 많아지는 편이구요.”

하영이 막걸리를 입에 가져가자 낙원도 마시기 시작했다. 다시 대화가 끊기고, 잔은 금세 비워졌고 다시 채워졌다. 때맞춰 파전과 도토리묵이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음식이 거의 없어질 때까지 계속 먹고 마시기만 했다.  

“술 더 마실까요?”

왠지 페이스가 너무 빠르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색하기도 해서 냉큼 그러자고 하는 하영. 자신의 부족함이 계속 신경 쓰여서일까. 그녀는 점점, 이 남자가 자기한테 빠져들기를 바라게 되었다.

“저 어때요? 매력 있어요?”

“네?”

하영은 불쑥 일어나 낙원의 옆에 앉았다. 첫 만남 때 승낙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녀는 몹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이 남자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 이 순간 느낄까?

하영의 원피스 소매 부분에 그의 셔츠 옷깃이 닿을 듯 말 듯한 위치. 낙원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지금 선을 넘어버리면, 그 뒤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하영은 서로의 피부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살짝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그의 코가 닿았고 올려 뜬 그녀의 눈을 낙원이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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