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안동까지 신혼여행서비스 =========================================================================
어쩌다 같이 하교하고-하교길 내내 어색해서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누었단다. 그녀의 생일파티에 운 좋게 단 한 번 참석하고-그는 단 한 번이라는 말은 일부러 뺐지만 정황상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다정하게 낙원아, 하고 먼저 인사하고... 기타 등등
예쁘고 인기 많은 소녀가 반 아이 중 한 명에게 별 생각 없이 던진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 너무나 명백해 마음이 착잡해지는 하영.
집에서는 딸과 아내에게 천대받고, 이렇게 짝사랑이자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대리 아내를 부르는 남자라.
“은지야, 그때 나 어땠어?”
“..사랑스러웠어.”
“뭐?”
“좀 칠칠맞지만 은근히 배려심 있고 찐하고 멀대 같이 큰 게 살짝 싱겁게 느껴지는데도 어딘가 마음이 갔어. 그래서 반에 잘생긴 애들 다 놔두고 오빠한테 간 거잖아.”
“아, 뭐야. 반은 욕 같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
낙원은 잠시 망설이다 하영의 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최대한 진심을 우겨넣은 거짓말에 조마조마하던 하영은 그가 어딘가 기분 좋아하는 것 같자 마음이 놓였다. 망설이면서 그녀를 만질까 말까 망설이는 소심함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게 느껴져서, 하영은 먼저 그에게 손을 뻗어 잡아주었다. 수줍게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고, 그녀가 잡은 손을 더 꼭 쥔 낙원. 어색함과 떨림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의 손동작이 하영은 그리 싫지 않았다.
논밭과 도로, 드문드문 낮은 건물들이 있는 안동 버스 터미널 주변은 처음 와 본 곳임에도 하영에게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지방 중소 도시의 풍경이 주는 전형적인 느낌이랄까, 그런 걸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하영이 일했던 곳과도 비슷하다. 모든 건물들이 낮은데다 전체적으로 휑한 느낌을 준다는 것, 찾아보면 있을 건 꽤 다 갖춰져 있는데도 어딘가 옛날 같다는 점도 닮았다.
멍하니 풍경에 잠겨 있는 하영을 낙원이 조심스레 건드렸다.
“은지야, 무슨 생각해?”
“아, ... 그냥 예전에 일하던 곳이랑 비슷해서.”
“거길 좋아했나 보구나.”
좋아했나 보구나, 라니.
하영은 어딘가 깬다고 생각하며 얼버무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낙원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촌스럽고 섬세하지가 못하다. 못할 말을 하는 건 아닌데 말을 던지는 타이밍이나 표정, 감정 처리 같은 것들을 세련되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만년 인기 없는 남자로 살아온 거겠지.
승낙이 새끼는 이런 부분에선 도산데. 불쑥 승낙이 떠오르면서, 그와 낙원을 비교하고 있는 자신이 싫다. 자꾸 인상이 그려지면서 속이 뒤틀리려는 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하영은 한껏 밝은 척을 했다.
“오빠, 너무 덥다. 우리 뭐라도 좀 마실까?”
“그럴까? 그럼 저기 슈퍼에서 뭐 좀 사 마실까?”
“..그것보단 저기 카페 들어가자. 짐도 있는데.”
“아.. 그래, 그러자.”
낙원이 살짝 의기소침해진 것 같기에 하영은 명랑한 척을 하며 살짝 그의 손을 잡았다.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 싶어 부담을 느꼈지만, 그가 수줍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자 우쭐해졌다.
뭉구가 예약해놓은 호텔에 짐을 푼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안동 하회 마을로 갔다. 택시는 에어컨을 틀어놓아 시원했지만 창 너머 바깥 풍경은 보기만 해도 현기증 날 만큼 더워 보인다.
“오빠, 오늘 무지 덥겠다.”
“그러게.”
낙원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날 이 더운 델 오자고 했는지 보통 그런 얘기 해주지 않나? 입을 꾹 다물고 자기 손만 내려다보고 있는 낙원이 하영은 답답했다. 슬슬 오빠 소리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술김에 말을 놓은 것도 후회되기 시작했다.
알맞게 차가운 공기에 뒤덮인 택시 안에 불편한 침묵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맥주 빨이 다해서인지 더 이상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하지 않는 두 사람. 낙원은 하영의 반대편 차창에 시선이 못 박혀 있고 하영은 자기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다.
이럴 때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건 자신일까? 아마 직업의식이 투철한 여자였더라면 정말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가 자기한테서 헤어날 수 없게 최선의 연기를 펼쳤을 것이다. 마치 실제 연인처럼, 아내처럼, 정말 서로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게끔. 근데 그런 건 숙련된 전문 배우나 가능한 거 아닐까?
하영은 조바심이 났고 속이 탔다. 이대로 아무 노력도 안하자니 불편하고 켕킨다. 물론 이 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사람이 자길 좋게 평가해주지 않아도 기본급 500은 받을 수 있고, 그건 교사 월급 2배 가까이 되는 돈이다. 하지만 자기 손님을 옆에 앉혀놓고서 심각한 고민에나 빠져들려니 죄책감이 생겼다. 어딘가 떳떳치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때, 별 생각 없이 앞쪽으로 향하던 하영의 시선이 앞좌석 거울 쪽으로 향했다. 금색 테두리 안경 너머의 무표정한 시선이 자기 쪽을 향해 있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그녀.
“안동은 처음이세요?”
“아, 네. 처음이에요.”
하영은 난생 처음으로, 택시 기사가 말 걸어줘서 고마웠다. 걸걸한 목소리가 뒷좌석을 넘어오자 딴 곳을 보고 있던 낙원의 시선도 하영과 같은 곳으로 모아진다. 두 사람의 거리는 다시 좁혀졌다. 딱히 서로를 보고 있진 않지만 의식하고 있는 걸 두 사람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전 예전에 한 번 와봤어요.”
“어떤가요? 여기.”
“좋은 곳이네요.”
“하하, 어떻게 좋다는 말씀이신지?”
“그냥, 한가롭고 편안하네요.”
“아 그래요. 두 분, 아직 서로 안 친한 것 같네요.”
“아직은요. 친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하영은 저도 모르게 낙원을 보았다. 그가 머뭇대면서 하영을 마주 보았고, 어색하게 씩 웃었다. 그는 택시 기사에게까지 신혼여행 온 갓 결혼한 부부라고 거짓말 하진 않았다.
하긴, 신혼인 부부가 이렇게 어색하다는 게 말이나 돼? 게다가 나이 차이도 너무 났다.
그나저나 친해지고 있는 중이라는 말, 어째서인지 하영의 심장을 울렸다. 낙원으로서는 적당히 둘러댄 말이었겠지만 어딘가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