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6)

00016  첫손님:첫사랑을 잊지못하는 남자  =========================================================================

                                                      

“나 모레부터 일주일간 집에 안 들어올 거야.”

“그래, 잘 갔다 와.”

낙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최소한 예의상으로라도 어딜 가냐, 일주일씩이나 가서 뭐할거냐, 누구랑 가냐, 정돈 물어봐 줄줄 알았다.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둥 마는 둥 중이던 은성이 자기 말을 못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자신과는 달리 멀티에 능한 그녀는 한 번에 세 가지도 동시에 해치우곤 했으니까. 그래도 자신의 아내가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무신경하다는 걸 결코 납득하고 싶지 않던 그는 확인 차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 해주고 싶은 말 없어?”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보는 그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까만 두 눈이 그에게 상처를 준다.

“돈 너무 많이 쓰진 마.”

그렇게 말하고 다시 뜨개질감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는 그 순간 사는 게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은성의 손에 들린 보라색 털실 매듭은 그녀 손을 거쳐 점점 더 촘촘해져가고 있는 중. 낙원은 비참함에 비틀대며 겨우 그곳을 벗어났다. 

사실 생각해보면 은성은 자신을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가신 동네 꼬마였던 그녀가 여자로 보였던 그 순간부터 오로지 그만이 그녀와 혼자 사랑에 빠졌다.

아파트 앞 놀이터. 반 이상 닳은 담배꽁초를 모래사장에 집어 던진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나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저, 저번에 전화했었던,”

“낙원씨죠?”

“아, 네. 저, 모레부터 신혼여행 떠나고 싶은데요.”

말하고 보니 자신이 몹시 바보처럼 느껴진다. 국어 교사답게 그는 적당한 단어를 물색해보았지만 

예약 확정하고 싶은데요-너무 사무적이다. 

저번에 그 아가씨로 부탁해요-이건 룸살롱 같은데 드나드는 게 취미인 남자가 하는 말 같아서 기분 나쁘다. 

등등, 몇 개 정해둔 후보 멘트가 막상 쓰려니 다 적당하지 못한 것 같아 결국 즉흥에 의존하고 말았다. 

어쩌면 이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다 바보 같이 들리는 지도.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기에 통화 버튼을 누른 직후부터 낙원은 낭패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네, 잘 생각하셨어요. 오늘 시간되시나요?”

물론 시간이라면 많았다. 방학이고, 연수 일정을 피해서 날을 잡았으니까. 하지만 뭉구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낙원은 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뜸을 들여 생각해보는 척을 한 다음 시간 된다고 대답했다. 

낙원은 술을 꽤 많이 마셨지만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셔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앞의 여자, 자신의 가짜 아내가 자신을 탐탁지 못하게 여긴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 첫 만남인데 술 냄새 풀풀 풍기고 나타난 남자가 바로 호감일 순 없겠지. 씁쓸하지만 인정해야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못 이기고 술부터 마셔버린 자신의 나약함을 질책해보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은지야, 배 안 고파?”

“아침 먹고 왔어요. 안 고파요.”

“아, 그래. 우리 안동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자.”

“네, 그래요.”

낙원은 점점 자신이 어릿광대처럼 느껴져 비참해졌다. 그는 들뜬 척, 분위기에 취한 척 계속 너스레를 떨어대면서도 옆 좌석의 여자를 흘끔댔다. 그의 첫사랑의 이름을 따 서은지라고 부르기로 한 그녀는 은지처럼 투명한 피부에 예쁘장한 외모를 지녔다. 그가 그녀를 지목한 이유도 은지를 닮아서였는데 직접 보니 은지보다는 어두운 성격 같다. 

은지랑 결혼했더라면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물론 은지는 인기가 하도 많아 낙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부분은 감안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때 실연의 상처로 망연자실하고 있었던 게 차가운 은성이 아니라 은지였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언제까지고 후회하는 것도 바보스러워 낙원은 곧 이런 망상을 훌훌 털어버렸다.  

그래, 모처럼 아내를 샀으니 진짜 신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즐기자. 

술이 점점 올라서인지 아까보다는 마음이 밝아진 낙원. 자기는 취하고 은지는 그렇지 않다는 게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은지야, 나만 술 마시는 거, 좀 아닌 것 같지?”

“그러게요. 오빠 많이 긴장했나 보네요. 첫 신혼여행이라서.”

첫 신혼여행이라는 말은 너무 가시 돋친 말인가 싶어 하영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입을 막았다. 다행히 술기운에 무신경해진 낙원은 그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가방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그녀에게 건넨다.

“자, 공평해지게 너도 마셔. 우리 은지, 술 싫어하던가?”

“오빠도 참. 내가 언제 술 거절하는 거 봤어?”

그녀는 그의 손에서 맥주 캔을 뺏어들어 단숨에 반 정도 털어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이라도 이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이.

원래 술 안 좋아하고 못 마시던 그녀였지만 서울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술에 익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술 마시고 나서부턴 악몽을 덜 꾸게 되었으니까.

“은지야, 너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서서히 술기운이 올라와 마음이 편해진 하영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는 부담스럽고 어색해서 도저히 나와 주지 않던 동작이 서서히 가능해지고 있다. 그녀는 흥미로운 듯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그의 말을 경청하려 들었다. 뭉구가 말했더랬다. 너무 설정을 맞추면 도리어 깨니까 적당히 맞춰주라고. 하영은 이 남자가 자신과 남자의 사이를 어떤 식으로 설정했는지 궁금했다. 

“너 기억 못하는구나. 서운하게.”

“오빤 너무 섬세해서 탈이야. 난 그런 것까진 다 기억 못한다고.”

내 말이 좀 어색한가? 아무렴 어때. 하영 눈에, 낙원은 그렇게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자기도 허둥거리고 못미더우면서 까다롭기까지 하면 정말 곤란하지. 

하영의 짐작처럼 낙원은 기분 좋게 그녀와 자기의 첫 만남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너, 지금 같았어. 밝고 하얗고 예쁘고, 옷차림도 지금이랑 비슷했지.”

아, 그래서 이렇게 입고 오라고 한 거군.

은지란 여자는 낙원의 첫사랑인 모양이었다. 고교 시절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만인의 연인이었던 소녀. 알만했다. 분명 짝사랑일 테지. 낙원은 은지라는 소녀와 무수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하나를 보물단지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지만, 인기녀 은지에겐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하찮은 기억들일 뿐일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