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전직여교사의 출장아내서비스 개시 =========================================================================
하영은 악몽을 꿨다. 눈을 번쩍 뜨자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모습, 꼴 보기 싫다.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옷을 훌훌 벗고, 온수에 샤워를 한다. 악몽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운 뒤,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려 할 때 전화가 울렸다.
“지금 바로 내 방으로 와요.”
수화기 너머, 나른하고 매혹적인 음성. 제 말만 하고는 사정없이 끊어버린다. 미친 듯한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재빨리 부엌에서 와인글라스를 꺼내 와 적색 와인을 조금 따르고, 한 번에 원샷 했다. 물론 진정되기는커녕 술기운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는 심장 박동. 마신 자리를 수습하지도 않고 후다닥 옷을 꿰어 입은 하영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달렸다.
똑똑.
주먹을 가볍게 흔들어 딱 두 번, 두드렸을 때 들어와요, 하고 허가가 떨어졌다.
와, 보고 또 봐도 잘생겼다니까. 하영은 훅 심호흡을 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려 애썼다. 문의 왼편에 놓인 책상, 뭉구는 거기에 앉아 깍지 낀 양손, 양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그 말을 하면서도 불안정하게 숨이 새어나가 목소리가 떨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뭉구 앞에선 도무지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다.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 하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술 마셨네요, 하영씨.”
“아, 앗. 티 나나요?”
“약간. 실례될 정도는 아닙니다.”
실례될 정도는 아니라는데 대놓고 사과하긴 그렇지?
하영은 살짝 고개를 숙여 소극적으로 미안함을 표했다. 코가 예쁘게 자리 잡았다는 둥 얼마간 신변잡기적인 얘기를 나눈 후, 뭉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첫 의뢰가 들어왔어요. 남자 프로필 건네줄 테니 가서 읽어보시고.”
말과 동시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파일을 건네는 뭉구. 그것을 받아든 하영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받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첫 면, 남자의 사진. 흔한 외모의 중년 남자였다. 이름은 성낙원, 47세. 다행인 건 머리숱이 많고 그리 나쁜 외모는 아니라는 점?
“하영씨가 할 일은 그 남자의 새 아내가 되어서 신혼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기간은 얼마나?”
“일주일. 장소는 안동. 숙소는 우리 쪽에서 예약했고 보디가드가 둘, 하영씨 일행을 미행할 테니까 그리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 제가 꼭 가야하나요?”
“하기 싫으세요? 참고로 이 남자는 하영씨를 마음에 들어 했어요.”
그 말에 하영은 우울해졌다. 마음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뭉구의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가 설레면서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하영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락할게요.
신혼여행 당일. 하영은 하얀 원피스에 커다랗고 하얀 밀짚모자를 썼다.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오자 승용차와 승낙이 대기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손을 흔드는 승낙을 차갑게 외면하며, 하영은 뒷좌석에 캐리어와 함께 탔다.
“왜애~ 옆에 타지.”
“닥치고 차나 운전해.”
“너 요즘 많이 까칠해졌어.”
차의 앞좌석 사이에 달린 거울을 통해 둘의 시선이 교환되었다. 하영의 위치에선 무표정한 승낙의 눈동자가, 승낙의 위치에선 차갑게 굳은 하영의 눈이 보였다.
“까칠해진 너도 아주 좋아. 매력 있어.”
하영은 세게, 앞좌석을 발로 찼다. 반동에 인상을 그리는 승낙.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실없는 농지거리를 하영에게 건넸다. 하영의 얼음장 같은 무반응이 워낙 견고해 이내 포기해버렸지만. 둘은 침묵 속에서 강남 터미널까지 달렸다.
차는 터미널 근처 보도 앞에 세워졌다.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차에서 빼내고 있는 하영에게 재빨리 다가간 승낙이 그녀를 살짝 밀친 다음 캐리어를 꺼내 주었다.
“신혼여행 재밌게 다녀와. 우리 처음 사귀던 때처럼 하면 신랑도 아주 좋아할 거야. 보니까 딱 순진한 여자 좋아하게 생겼더만.”
하영은 살벌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싱겁게 웃는다. 열 받은 하영. 오른손을 캐리어에서 떼고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그의 뺨에 닿기도 전에, 허무하게도 허공에서 잡혀버린 팔목. 승낙은 아픔이 느껴질 만치 세게 그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지금처럼 굴진 말고. 그러다 바로 파혼 당할라.”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댄 승낙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차로 돌아갔다. 차가 출발하여 그녀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아픔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시큰거리는 팔목도, 오래 전에 부상당한 마음도, 모두.
“은지야, 많이 늦었네.”
“아, 미안해요. 오는 길에 차가 많이 밀렸어요.”
남자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그것도 꽤 많이. 그의 입에서 풀풀 풍기는 맥주 냄새가 불쾌하기보다는 나도 술 마시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하영. 아, 뭉구씨가 뭐라고 하려나?
하영은 결국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남자 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지만, 마음을 다스린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도 늦은 덕분에 첫 멘트는 벌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지? 어색하다고 술까지 진탕 먹고 온 이 남자, 신뢰가 안 간다.
“저, 근데 낙원씨.”
“오빠라고 부르기로 해놓고. 은지도 참! 쑥쓰럼쟁이라니까.”
우웩, 쑥쓰럼쟁이는 또 뭐야! 꽤나 장신의 중년 남자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절로 닭살이 돋는 하영. 싫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사라니까 애들이랑 같이 있다 보니 말도 어려진 거겠지.
하영의 학교에도 있었다. 어설프게 애들 따라하려는 선생. 우습긴 하지만 노력이 가상해서 미워할 순 없는 타입.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밝은 척을 했다.
“오빠, 우리 뭐 타고 가요?”
“아, 지금 몇 시지?
엇! 은지야, 뛰자! 시간 다 됐다!“
낙원은 덥썩 하영의 손을 잡고 뛰려고 했다. 하지만 무거운 캐리어 때문에 뛸 수 없는 하영은 그를 뿌리치고서 캐리어를 가리켰다. 그녀가 알기론 그와 승용차 타고 안동까지 같이 가서 6박 7일로 신혼여행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하긴, 술을 진탕 마셨으니 운전할 수 없겠지. 게다가 하영은 면허가 없어서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버스는 떠나버렸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거리며 낙원은 버스 표 다시 끊어오겠다며 매표소 쪽으로 갔다.
어째 이 남자, 진상일 것 같아 하영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