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6)

00014  꾐에 빠지다  =========================================================================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주택가에 위치한 커피숍. 커다란 커피색 삼층 건물에 커피 하우스라고 건물 가운데에 글씨가 박혀 있다. 영어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바탕 없이 글자가 전부인 간판. 승낙은 바로 거기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 아는 형이 운영하는 가게야.”

“꽤 넓네.”

“응, 나 여기서 알바 한 적도 있어.”

“그럼 커피 만들 줄 알겠네? 좋겠다. 나도 카페 알바 해보고 싶었는데.” 

“그럼 시간 날 때 알바로 써 달라 그래.”

“어? 어떻게 그래?”

“시간 많잖아. 앞으론.”

하영은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나 며칠간 승낙이랑 실컷 놀다가, 학교 돌아가서 석고대죄 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찍혔기 때문에 완전 눈 밖에 나겠지만... 이런 우울한 생각, 하고 있단 걸 승낙이 알게 하고 싶지 않다. 하영은 속마음을 숨기고 적당히 맞장구치기로 했다.   

“하영아, 오빠 좀 믿으라니까?”

“누가 오빠야.”

적당히 맞장구치고 넘기려는 하영의 속내를 바로 간파해버리고는 갑갑해하는 승낙이. 하영은 그의 섬세함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갑갑해졌다. 그만두면 별 수 없으니까 나도 계속 교사하는 거라고! 너도 가난하고 나도 가난해질 건데 그럼 어떻게 해? 라는 말은 자존심이 상해 할 수 없다. 그토록 좋아하는 승낙에게 돈 문제를 부각시켜 자존심 상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까 승낙이 알아서 물러나준다면 좋을 텐데. 

“일단 들어가고 보자.”

체념한 듯 하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캐리어를 끄는 그. 어쩌면 오늘 안에 다시 실랑이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넘겼기에 하영은 마음을 놓았다. 

넓고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 내부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갈색으로 뒤덮여있었다. 예쁜 유리 덮개에 감싸인 오렌지색 조명과 벽난로, 피아노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저런 커피 기구들이 웬만한 프렌차이즈점들보다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한동안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곳에서 지냈던 그녀는 빨려들 듯이 풍경을 감상했다. 물론 교사하면서도 승낙이 만나러 서울 올라오곤 했었지만 거의 몇 주 만이니까, 엄청 환기가 된다.

구석에다 적당히 캐리어를 내려놓은 승낙은 하영을 데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유럽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직접 문을 여닫을 수 있는 형태의 엘리베이터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하영. 고작 삼 층 건물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다. 

“여기 대단하다.”

“형이 좀 돈이 많아.”

혹시 이 형 믿고 그러는 걸까? 하지만 아는 형 돈이지 네 돈은 아니잖아.

자꾸 딴지를 놓고 싶은 마음과는 별도로 공간의 부유함에 도취되어가는 그녀. 

엘리베이터는 곧 삼층에 도착했다. 승낙이 문을 옆으로 밀어 열어주었고, 하영이 내린 다음 따라 내린다. 카펫이 깔려 있고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고 은은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 이곳은 흡사 고급 호텔 같다. 뭔가 대단한 사건에 휘말릴 것 같은 기대가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형한테 인사하러 가자.”

승낙은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문 너머로 그녀를 인도했다. 붉은 기가 도는 나무재질의 문을 열자 왼편 벽 쪽에 커다란 책상이 있고, 한 남자가 앉아있다. 하영은 그를 본 순간 숨이 멎었다.  

“말했지? 아는 형이자 사업 파트너. 장뭉구라고 해. 이 쪽은 오늘 데려온다고 한, 있지? 하영이. 이하영.”

승낙이 서로를 소개해주고 나자 승낙 쪽으로 가 있던 남자의 시선이 하영 쪽에 머문다. 하영은 속이 탔다. 있지? 라니. 저 남자에게 자신을 뭐라고 소개한 걸까? 하영은 실례를 무릅쓰고 뚫어져라 남자를 보고 있다. 남자는 몹시 키가 클 것 같았고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졌다. 승낙이나 자신은 그냥 잘생기고 예쁜 건데, 이 남자는 어딘가 보통 인간 같지가 않다. 신이 온 정성을 다해 창조한 완벽한 피조물 같다고나 할까. 어딘가 나른하고 섹시한 분위기에 완벽하게 다듬어진 이목구비의 정교함. 남자의 외형에 압도당한 하영은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하영아. 너 너무 뭉구 형만 쳐다보고 있다? 나 서운하게. 이름 봐봐. 뭉구라고? 깨지 않냐?”

그 말에 살짝 웃기만 하는 뭉구. 입술을 양 옆으로 움직여 살짝만 웃었는데, 오른쪽보다 왼쪽 입술이 조금 더 올라간 것 같다. 하영은 홀린 듯이 입술을 움직여 뭉구를 변호했다. 

“아니, 어울리는데? 너무 번듯한 이름이면 오히려 너무 뻔할 것 같아.”

“하하하하하! 재밌는 사람이네, 당신? 내 이름이 번듯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추켜 세워주는 게, 기분 나쁘진 않네.”

굉장히 시원하게 부서지는 웃음소리. 저음이면서 그의 분위기만큼 나른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하영은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저 남자는 마치 마법 같다. 저 남자 앞에서만은 매력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진다. 하영은 뭉구에게만은 자신의 머뭇대고 고민하고 하는 모습 같은 거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뭉구에게 압도당하는 만큼 자신이 작게 느껴져 움츠려드는 하영. 그럴수록 필사적으로 그렇지 않은 척 애쓰고 있다.

“너무 둘만의 세계라서 빈정 상한다. 하영아, 나 그냥 갈까?”

하영은 토라진 척 그녀를 스쳐지나가는 승낙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의도 했다기 보단 반사적으로 나온 동작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 손 안에 승낙의 옷소매가 들어오고,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이상하게 안도하고 마는 하영. 하영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듯하자 승낙의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에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하영은 진심으로 싫은 것을 반쯤 참으며 그를 밀어냈다.

“남들 다보는 데서 이러지 마. 부끄럽잖아.”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에게 살짝 웃어 보인 뒤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은 승낙. 

“그럼 우리 이제, 사업 얘기 해볼까?”

“기본급 500만원에 인센티브 있고 숙식 제공. 완벽하지?”

“그거랑 매춘이랑 다를 게 뭐야?”

“어허, 매춘이랑 어떻게 같냐. 아내가 없어 곤란한 남자들을 도와주는 일종의 유급 봉사지요.”

“나 갈래.”

승낙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일어서자, 뭉구가 그를 저지한다. 화난 얼굴로 씩씩대며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버리는 하영. 

“어차피 돌아오게 돼있어. 냅둬.”

“그래도 형, 쟨 내 여친이란 말야. 예의상 달래줘야지.”

“그러던가.”

계단으로 단숨에 일층까지 뛰어 내려간 하영은 망설임 없이 카페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 승낙의 설명을 듣고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나보고 딴 남자들 아내 노릇 하라고? 미쳤어, 정말!”

적성에 안 맞는 일 때려 치고 자기랑 같이 알바나 하면서 가난하지만 마음 편하게 알콩달콩 살아가자는 얘기라면, 얼마간 망설였겠지만 결국은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녀는 그의 고백을 그렇게 해석했고, 미덥진 못했지만 기분 좋고 설렌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뭐? 뭉구랑 둘이서 출장 아내 서비스인가 뭔가 하는 걸 할 생각이라고?! 넌 자질이 있으니까 잘 할 수 있어?!

주택가 쪽으로 빠진 하영은 바로 앞 담벼락에 무너지듯 기댔다.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목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재미없이 공부만 한 학창시절, 그 결과 얻어낸 고등학교 국어 교사 자리, 적성에 안 맞고 힘든 교직 생활, 그 모든 무채색 나날들을 지나 승낙을 만났고 짧지만 짜릿하게 연애했다.

그가 있어 재미없는 직장 생활, 견딜 수 있었고 하루하루가 기대와 설렘으로 꽉꽉 차는 느낌 받곤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내 평생의 사랑이니 뭐니 하면서 거창하게 의미부여할 순 없을지 몰라도,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그는!!!

그녀는 미치광이처럼 꿱꿱 소리치면서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서로가 미칠 듯한 사랑에 빠진 건 아니라 해도, 어떻게 자기 여친한테 딴 남자 아내 노릇을 하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치 떨리는 배신감과 서글픔에 사로잡힌 그녀는 남 눈치 보지 않고 빽 소리를 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있는 힘껏 고함을 질러도 화가 가라앉지 않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하고 배에 온 힘을 다주어 고함쳤다. 

거의 1분 가까이 소릴 질렀더니 목이 쉬고, 따갑고 기력마저 주욱 빠진다. 슬슬 배도 고파오고, 울어 엉망이 된 얼굴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키며 근처에서 뭐라도 사먹으려던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빈손임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내 지갑! 핸드백! 다 교무실에 있잖아.”

이래서는 승낙의 도움 없인 학교로 돌아갈 수가 없다. 

진정한 문제들은 돌아가자마자 한꺼번에 들이닥치겠지. 내려가자마자 집 구해야하고 출근하자마자 관리자한테 꽤 혼날 테고, 생활 용품, 옷들 다 다시 장만해야 하고... 귀찮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승낙이 농간에 넘어가서는! 이게 다 뭐야! 제멋대로인 그에게 휩쓸려 자기주장 한 번 제대로 못한 자신이 싫고 승낙이 밉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내 방에 있는 짐들, 처리되지 않았을까? 진짜! 승낙이 걘 뭘 믿고 내가 출장 아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무리 교사가 힘들다고는 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해.

하여간 걔 때문에 옷이고 집이고 다 다시 사고 구하고 하,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그냥 집 주인한테 다시 들어간다고 해봐? 아직 살 사람 안 구해졌으면... 아, 안돼! 그런 꼴 보였는데 어떻게? 절대 안 돼! 그때 집 주인 표정... 어쩌면 다른 데다 소문냈을 지도 몰라. 아, 그럼 어쩌지. 학교까지 소문 다 퍼지면 진짜 힘들어지는데. 교장은 영희 같은 애랑 똑같다면서 문란한 여자 취급하겠지. 하, 마음 같아서는 그냥 안 돌아가고 싶다. 가만, 혹시.. 승낙이 얘 이것도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다시 못 돌아가게 하려고? 진짜.. 너무한다.....

안 되겠다. 집은 좀 멀리 구해야겠다. 대출이라도 받아야하나. 한 500만원 정도는 대출 받아야겠지? 

가만, 그 일 하면 한 달에 500만원이 기본이라던데. 교사 월급보다 많긴 많다. 그냥 한다고 해버려? 미쳤어!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고? 막장 인생 되고 싶은 거야?

오만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 하영의 앞에 승낙이 나타났다.

“하영아, 너 많이 울었구나.”

그녀 옆에 쭈그려 앉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를 하영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뚝뚝하게 앞만 보고 있는 그녀. 지금, 하영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아까 울어 퉁퉁 부은 눈과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 때문에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나 내려갈 거야. 지갑 학교에 두고 왔으니까 십만원 정도만 줘.”

하영은 딱 차비만 생각하고 만원 부르려다 밥값, 찜질방값 같은 게 필요하단 생각에 재빨리 계산을 고친 것이다. 오늘은 기분 더러우니까 돈 팍팍 써서 비싼 음식 사먹어야지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자신이 어떤 의미로는 더럽게 낙천적인 것 같아서, 하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영아, 나 많이 밉나보다. 근데 너, 정말 교사하는 것보다 이게 너한테 맞을 거야. 넌 다정하고 남들 잘 챙겨주잖아.”

“그래, 다정하니까 내 적성 살려서 애들이나 잘 돌봐보려고 한다. 돈이나 줘.”

“교사가 그냥 애들 돌보는 직업 아닌 건 네가 겪어봐서 잘 알 텐데?”

“너 정말 계속 짜증나게 한다. 날 좋아한 적은 있었니?”

“응. 지금도 좋아해.”

와, 제대로 미친 새끼네. 있는 대로 열이 뻗쳐 팩 쏘아보는데, 승낙은 진지하게 하영을 보고 있었다. 욕먹을 게 뻔한 말을 저리도 꿋꿋하고 신념 있게 할 수 있는 게 신기해서, 그런 핑계를 대며 하영은 두근거림을 억눌러야 했다.  

“너 내려가 봐야 더 고통만 받을 뿐이야. 그러니까 나랑 있어. 일 끝나면 데이트도 하고 그렇게 지내자.”

승낙은 머뭇대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하영의 이성을 배반하기 시작한 마음이 미친 듯이 갈등 때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고 가.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어쨌든, 배가 고프긴 했으니까 토라진 표정 그대로 그녀는 승낙을 따라갔다. 오늘은 정말 늦었으니까 늦은 게 맞으니까! 일단은 밥 먹고, 씻고, 자고 그 다음에 생각해보겠다면서.

그런 식으로 하영의, 어영부영 서울에 눌러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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