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짓밟힌 여교사의 순정 =========================================================================
한참을 어깨를 들썩거리며 훌쩍이는 하영을 승낙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눈물,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울고 있는 모습이 그닥 예쁘지는 않지만 뭐, 본판은 예쁘니까.
“죄송해요. 이런 추태를 보이고 말았네요.”
“네. 별로 예쁜 모습은 아니네요.”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영에게 재빨리 티슈를 한 장 뽑아 건네는 승낙. 심한 말을 들은 직후라 뻣뻣해진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티슈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끼익,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난 승낙은 하영이 앉아 있는 소파형 좌석 바로 옆에 앉는다. 지금 뭐하는 거지? 하는 표정의 그녀, 몸이 닿을락 말락 하는 위치까지 다가가자 꿀떡꿀떡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순진한 여자도 괜찮지. 오래간만에-’
씨익,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은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한 그녀 쪽으로 티슈를 내밀어 콧물을 닦아준다.
“뭐하는 거예요?!”
확 달아오른 얼굴로 도망치려 하지만 그녀 바로 뒤는 소파 등받이 부분이고 그 옆은 벽이다. 도망칠 곳이 없어 허둥허둥 소파의 이곳저곳을 더듬기만 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 꼭 쥐어주며
“거울 없죠? 내가 닦아줄게요.”
하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무척 다정하다.
뭐지?! 이 사람?! 아까는 안 예쁘대놓고!! 짓궂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던 순간의 승낙이 아른아른 거려 불쾌하면서도 지금의 다정한 행동 때문에 헷갈리는 그녀는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쾌하니까 일어나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가 내 콧물 닦아주는 건 너무 민망하잖아! 그것도 첫 만남인데.
그는 하영의 한 손을 꼭 쥔 채로-그녀의 손이 점점 땀으로 축축해져가는 중이다.- 포장된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채, 입으로 지익 뜯고는 퉤, 찢겨나간 부분을 뱉는다. 포장을 입에 물고는 속에 든 물티슈를 꺼내는 그. 그 행동을 하는 내내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는 그는 그녀를 무척 설레게 했다.
심장이 쿵쿵 거리며 긴장과 흥분이 고조되어 가던 그녀는 살짝, 요염하게 눈만 올려 그를 마주보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그녀 또한 당당하게 그를 마주보고 싶다. 자기 코에 묻어있던, 좀 전에 그가 닦아주었던, 아직도 살짝 남아 있는 콧물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이미 그는 내게 오만정 다 떨어졌겠지. 그러니까 아까도 안 예쁘다고 한 거 아냐! 그냥 최후의 아량을 베풀어 나한테 잘해주는 걸 거야. 이러다가도 뒤에서는 지 친구들한테 내 추태에 대해 소상히 떠벌리고 다니겠지. 콧물녀라고 부르면서. 아, 쪽팔려 죽겠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를 뿌리치기 위해 힘껏 팔을 내저어보지만 더 센 힘으로 그녀를 제압하며 터치하듯 부드럽게 그녀의 코 밑을 닦아주고, 티슈 한 장 더 뽑아 눈물 자국까지 처리해주는 그.
“이러고 나니까 훨씬 예쁘네.”
만족스럽게 웃는 그에게 하영은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이십대 고등학교 교사와 가난한 뮤지션-승낙은 자신을 가난한 뮤지션이라고 소개했다.-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그럼 내일 또 봐.”
“벌써 가게?”
승낙은 하영의 어깨를 끌어안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면서 제대로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린 하영. 승낙의 품 안에 안긴 채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이 정도면 승낙도 들었겠지? 이미 자신이 무지막지하게 침을 삼켜댄다는 걸 간파 당한 줄 모르는 그녀는 제발 승낙이 이 소리 못 들었기를 바랐다.
“침 삼키는 소리도 예뻐, 넌.”
그녀를 꼭 부둥켜안고 등과 허리 쪽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그. 민망함에 확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어째 싫지가 않다.
승낙은 그녀를 끌어안고 뒷걸음질 쳐 한적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점과 음식점의 사이, 술을 담는 플라스틱 빈 통 같은 것이 쌓여 있는 공간으로 들어간 둘. 정신없이 그녀의 상반신을 애무하며 입술을 부딪혀오는 그의 격렬한 움직임에 하영은 자신을 내맡겨버리고 싶어졌다.
아직 한 번도 남자와 자 본 적이 없는 그녀는, 그가 자꾸 생각보다 빨리, 급하게 그녀가 가본 적 없는 세계로 자꾸자꾸 이끄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러우면서도 기대됐다.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 자꾸 저항하고 마는 그녀였지만 그가 더 세게, 자신의 저항을 무마시켜버리길 원하고 있었다.
“승낙아, 나 들어가 봐야 해. 곧 지하철 끊긴단 말야.”
숨을 헉헉 몰아쉬며 힘들게 의사표현을 하는 그녀를 승낙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엄청난 힘으로 그녀를 자기 안에 가두고 대답 대신 자꾸만 그녀 몸의 이곳저곳을 애무하는 그 때문에 하영은 아주 곤란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좋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렵다.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좀 더 뜸을 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 자버리면 한 번에 너무 많이 다 해버리는 건데.
하영은 이번에는 꽤 강단 있게 그를 밀어냈다. 그와 그녀 사이에 틈이 생겼고 하영은 그 틈을 더 벌려 그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나 그냥 가볼게! 진짜, 내일 보자!”
그렇게 말한 다음 전력질주를 시작한 그녀는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에게 붙잡혔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있자. 매번 헤어지자니 아쉬워.”
두 번 만났을 뿐인데 그는 매번이라는 표현을 썼다. 황당하면서도 왠지 귀엽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또 뭐야. 쉽고 가벼워 보이는데 그게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승낙한테 또 홀랑 넘어가 버린 하영. 그가 이끄는 대로 가까운 모텔에 체크인을 하고, 샤워를 하는 내내 현실감각은 없고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심지어 현기증까지 날 것 같다.
“아, 그만 좀 해. 나 너 싫어!”
가운을 두르고 나오는데, 승낙의 고함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란 하영.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보자 무안해하며 “좀 성가신 애가 있어서 세게 나온 거야.” 하고 설명하고는 멋쩍게 웃는다. 안심하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설마 너한테 그랬다고 생각했어?” 하고 말하며, 그는 그녀의 가운을 벗겼다. 아주 오랫동안 정성들여 그녀에게 고통과 쾌락을 가르쳐준 그는 그 뒤로 아주 띄엄띄엄 연락이 되었다.
오래간만에 하영이 보고 싶어져서 몸소 지하철을 타고 그녀의 학교에 방문한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교문 쪽으로 걸어가려던 그는 멀리서 달려오는 수찬을 보고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이 선생, 교사 그만두고 싶은 거야?”
끊임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험상궂은 표정을 도무지 풀려 하지 않는 교장. 네, 형편만 되면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어요!!! 라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참으며 죄인처럼 하영은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2년 차 교사인 그녀는 생활지도가 엉망인 신뢰 안 가는 교사로 찍혀 있다. 아이들은 만만하고 귀여운 선생이라며 꽤 좋아하는 눈치이지만 딱 그 평에 반비례하여 동료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은 하영을 싫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수업 분위기는 참관 수업 때를 제외하고는 어수선 그 자체이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가도 제대로 듣지를 않으니 점점 의욕을 상실해가던 그녀. 원래 선생이 꿈인 것도 아니고 이 쪽에 타고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니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하영은 나날이 태만해져 가고 있었다.
승낙이 빨리 성공해서 자신을 데려가주면 좋으련만. 학창시절에는 경멸했을 종류의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이 선생?!”
“네?”
“내 말 듣고 있어?”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 참.”
맨날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으죽죽한 교장. 그는 분명 하영이 나가자마자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맥주 캔을 꺼내 마실 것이다. 지금 그는, 골칫거리인 하영이 견디기가 힘들어 당장이라도 맥주를 입 안 가득 털어 넣고 싶어 안달일 것이다.
애써 참을 필요 없는데. 아무 말 안 할 테니 마음껏 마셔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찍혔는데 더 힘들어지겠지.
“한숨은 왜 쉬나?”
“네?”
“한숨 쉬고 싶은 건 나라고!”
“아, 저도 제가 한심해서요. 죄송합니다! 전.. 전 왜 이럴까요?!”
이건 하영의 주특기. 궁지에 몰리면 횡설수설하면서 상대의 말문을 막는다. 비굴한 수법인 것 같아 자제하려고 하지만, 이것 외의 돌파할 방법을 몰라서 매번 이러고는 자아비판에 빠진다. 예상대로 당황하는 교장. 하영이 밉긴 하지만 저렇게 불쌍하게 나오는데 계속 질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2년 밖에 안 되었으니 요령 없는 건 이해해. 하지만 계속 이러면 우리도 곤란하다고. 제발 좀 애들 지도하는 법 좀 연구하고, 이번 영희 건도 잘 달래서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잘구슬려 봐. 응?”
“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엔 제대로 한 번 잘해보자고. 이 학교에서 잘 배워가야 앞으로도 편하지. 선생 몇 년 하고 그만둘 것 아니잖나?”
“...네. 맞는 말씀이세요.”
하영은 제발 선생 몇 년만 하고 그만둘 수 있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을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교장의 설교가 드디어 끝났다는 것에 안도하며, 공손히 인사하고 교장실 문을 닫고 나오는 하영. 이번 학기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교장실에 불려간 건지. 생활 지도 담당 선생에게 1:1 지도도 몇 번이나 받은 데다 그녀를 측은히 여긴 옆 반 선생이 수업에 직접 들어와 도와주기까지 했는데도 그녀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마음이 없어서이겠지. 씁쓸하지만 그녀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식당일 하며 자신을 힘들게 키운 엄마만 아니었어도 교사는 되지 않았을 그녀.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더라면 당분간 아르바이트하며, 여행도 다니고 좀 느긋한 청춘을 만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인생이 아닌데 뭐.”
텅 빈 교사용 화장실, 거울을 보자 지치고 수척한 여자의 얼굴이 비쳐진다. 나름 멋을 내 화사한 핑크 색상의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화사해보이기는커녕 칙칙해 보이는 불쌍한 여자. 얼굴이 살짝 긴 편이긴 하지만 크고 예쁜 눈을 가졌고 예쁘다는 말 꽤 들으면서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살아오진 못했다.
비참함이 가득 차올라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끅끅대며 소리를 참는데, 지이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최승낙. 얼마만의 연락인지.
“승낙아.”
자주 연락하지 않는 그를 줄곧 원망해온 그녀는 만약 그쪽에서 연락해온다면 마음이 없는 듯, 너 따위 없어도 잘 지내고 있었다는 듯 도도하게 굴기로 마음먹었었다. 지금도 승낙인 걸 확인하자마자 덜컥 받아서는 안 되었는데, 그녀는 다짐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하영아. 나 많이 보고 싶었지?”
감미롭게 속삭여오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하영. 그와의 뜨거웠던 밤이 생각나 하반신이 저릿해져온다. 지금 그녀 삶의 유일한 낙인 그를 쉽게 내칠 순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만만해보이기는 싫어 살짝, 하지만 그가 돌아설 정도로 과하진 않게 삐진 티를 내보기로 했다.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에이~ 삐졌구나, 우리 하영이. 당연히 보고 싶었지.”
“근데 왜 연락도 안 해?”
“하고 싶었어. 근데 말했던가, 나 완벽주의 있잖아. 그래서 일하는 동안은 연락 잘 못해. 요새 이것저것 아르바이트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거든.”
“그래도 잠깐씩이라도 연락할 순 있었잖아.”
“그게 안 되는 남자는 싫어?”
정말 곤란한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조르듯 말하는 그가 섹시하다. 이런 나라도 사랑해달라는 애틋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하영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정말 난 쉬운 여자구나 싶어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 한 켠에선 꺼림칙함이 남아 있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그에게 넘어가버렸다.
“그나저나 하영아. 나 지금 어디게?”
혹시 날 만나러 와준 걸까? 아까부터 좀처럼 진정하질 못하고 있는 심장 박동이 엄청나게 빨라지며 현기증마저 느끼는 그녀.
서울에서 지하철 타고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리는 이곳까지 게으른 그가 날 찾아왔다면, 지금까지의 불안은 일시에 날아 가버릴 텐데. 부디 내 예측이 맞아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영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