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불공평한 관계 =========================================================================
“마영희, 너 지금 기분이 어때?”
화장실 문 너머에서 수현이 물었다. 영희는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영희의 신경은 온통 뚜껑을 덮어놓은 플라스틱 막대기에 가 있었다.
“야, 열어봐.”
영희는 변기를 내리는 걸 깜빡한 채로 문을 열어주었다. 수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들어와 변기 뚜껑을 덮어버리고, 거기 앉았다.
“시간 됐어?”
“글쎄.. 모르겠어...”
수현이 영희의 손에서 임테기를 뺏어버렸다. 분홍색 뚜껑을 열자 선명한 두 줄이 드러났다. 수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것을 영희 쪽으로 흔들어보였다.
“이제 어쩔래?”
영희는 허옇게 얼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등을 수현이 토닥여주었다.
영희는 하교하는 수찬에게 다가갔다. 마침 철민과 대화하고 있던 수찬의 얼굴이 굳어졌다.
“쟤 누구야?”
“아는 동생.”
수찬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영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오빠, 할 말이 있어.”
“학교에선 말 걸지 말랬잖아.”
“중요한 말이야.”
수찬의 싸늘한 반응에 상처 받은 영희는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얼핏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의 뱃속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 앞에서 그녀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에겐 믿음직한 아군이 없었기에 수찬에게라도 매달려야 했다.
수찬은 영희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학교 건물 뒤편, 건물과 담장 사이의 좁아터진 공간으로. 그곳엔 마침 아무도 없었다.
“말해. 뭔데?”
수찬은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요즘 수찬은 갈등 중이었다. 그냥 영희를 내 공인 여친으로 해버리고 약혼을 깨버릴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또 친구들 앞에 영희가 나타나자마자 평소 습관이 나와 버린 건 뭔데? 수찬은 스스로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낡아빠진 가방을 메고, 같은 교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는 영희가 부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오빠, 나 임신 했어.”
그 말에 수찬은 굳었다. 딱 한 번 사정한 그 날 이후 수찬은 극도로 조심했다. 설마 한 번인데 임신하겠어? 하며 가볍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확실해?”
“오늘 검사했어. 확실해.”
“잠깐만.”
수찬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감하고 싫은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처음 들었지만, 문득 어쩌면 이게 하늘이 내려준 기회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희 임신을 핑계로 율과의 약혼을 깨고, 영희를 여친으로 삼으면.
하지만 내가 영희의 구질구질함을 감당할 수 있을까?
수찬은 가만히 영희를 보았다. 역시 얼굴은 취향이다. 표정도 어딘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이 궁상맞음만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일단 집에 말하고 올게.”
수찬은 스스로에게 확신하지도 못한 주제에 일단 그렇게 말해버렸다.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왠지 엄마한테 말하고 나면 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수찬이 집에 말한다고 하자 영희는 기분이 굉장히 묘해졌다. 무책임하게 나오거나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에 저도 모르게 감동 받고 말았다.
“그럼 내일 결과 말해줄게.”
어색한 손짓으로 영희의 등을 토닥여준 수찬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 참에 모두에게 영희를 여친이라고 소개하고 같이 손잡고 하교까지 해줬더라면 완벽할 텐데, 싶은 서운함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모처럼 보여주려는 책임감에 고무된 영희는, 내일을 기대하기로 했다.
“엄마, 나 율이랑 결혼 안 해도 돼?”
수찬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손톱을 바르고 있던 엄마, 한유리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유리의 손이 헛나가고 말았다. 그녀가 바르고 있던 파란색 매니큐어가 미끄러져 테이블에 길게 그어졌다. 유리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매니큐어 솔을 꾹 밟고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무슨 소리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격한 유리의 반응에 수찬은 바로 주눅 들었다. 지금껏 유리를 거슬러 본 적이 없었던 수찬이었기에 그녀가 화나면 어떻게 변하는지, 알고 있지 못했다. 그녀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생소하고 무서웠다. 그는 이미 반쯤 꼬리를 내려버렸다.
“아니.. 그냥...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가 나타나면...”
“내가 누누이 말했지. 피임 잘하고 다니라고. 결혼해서도 율이 몰래 피임 잘하고 다니면 되잖아. 대신 절대 율이 알게 해선 안 된다.”
유리는 율과 수찬이 결혼하면 율이 회사의 전속 한복 모델을 할 생각이었다. 많게 봐도 30대로 보일 만큼 잘 가꾼 그녀는 자신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유리는 율이 아빠가 운영하고 있는 한복 브랜드인 다님 홈페이지에 들락거리며 자신이 입을 만한 옷을 고르는 것이 낙인 여자였다. 자신이 그 옷을 입고 막걸리를 들고 전 세계를 돌며 회사를 홍보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전통 있는 막걸리 회사와 전통 있는 한복 회사의 합작만큼 완벽한 게 어디 또 있을까. 그런데 파혼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
“감수찬. 왠만한 건 내가 다 허락할게. 근데 결혼은 율이랑 꼭 해야 한다. 알았지?”
유리가 매섭게 노려보자 수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영희가 율을 물리칠 만큼 강력한 여자라면 또 모를까, 유리한테 소개 시켜봐야 승산이 없었으니까.
“알았어요.”
“그래, 착한 우리 아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는 영희는 수찬과 결혼하면 지긋지긋한 집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며 부푼 꿈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