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불공평한 관계 =========================================================================
“야, 니가 왜 내 여친이야?”
“약혼녀 있단 말 안했지?”
따져야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율이 토라진 것 같았다. 수찬은 어이없고 당황스러웠다.
“야, 우리 각자 애인 사귀기로 한 거 잊었어? 왜 그래?”
“애처럼 굴지마!”
율이 팩 소리 지르자 수찬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쿨하고 대하기 쉽던 예전의 율은 어디가고, 예민하고 잘 삐지는 여자애가 한 명 그의 옆에 있었다. 그는 이 변화가 아직도 잘 적응되지 않았고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멋대로 약혼을 시켜서 점점 수찬의 목을 조여오는 부모님들 상대하는 것만도 벅찬데 얘까지 자기를 골탕 먹이려 드는 게 정말 피곤했다.
하지만. 솔직히 아까, 철민을 상대하는 율의 능숙함은 그를 꽤 우쭐하게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율은 옷도 조신하면서도 예쁘게 잘 입고 (외출용 옷은 얌전한 편이다. 수찬을 만나러 집에 올 때에는 화려하게 입고 오지만.) 태도도 밝고 당당하다. 사실, 누군가에게 소개 시켜주기에는 영희보다 율이 훨씬 나았다.
수찬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버하면서 율을 달래주기 시작했다.
“야,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뭘 잘못했는데?”
“그냥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너 하자는 대로 다 해줄게.”
“진짜? 그럼 영화 보러 가자!”
율은 단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더니 수찬에게 폭 안길 듯 다가와 그의 팔짱을 꼈다. 그의 몸에 율의 가슴과 얼굴이 살짝 닿았다. 폭신하고 무게 있는 가슴이 그를 누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상황에서 그는 징그럽다며 그녀의 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녀와 갈등 구조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율은 영화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디비디방을 발견하고는 거기로 들어가자고 했다. 수찬은 디비디방보다는 영화관이 편했지만 율은 다리 아프다며 내 구두 안 보이냐면서 찡찡댄다.
“넌 무슨 남자가 매너가 없냐!”
“야, 너 엄마한테서 좋은 말 배웠다.”
“헤헤”
율은 혀를 살짝 빼면서 귀여운 척하며 웃었다. 율은 밝은 성격이긴 해도 이런 애교는 부리지 않았다. 마치 작정하고 애인 모드로 가려는 시도 같아서, 수찬의 마음이 우울해졌다. 다행히 영희가 시내 같은 데 자주 놀러 다니는 애가 아니어서 망정이지 이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푹푹 한숨만 내쉬고 있는 수찬을 율이 찔렀다.
“나 보고 싶은 영화 있어. 빨리 들어가자.”
“너 영화 보러 가자는 거였어?”
“무슨 소리야?”
고개를 갸웃하는 율을 보니 수찬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율은 들어가자마자 ‘지구의 운명’이라는 영화 케이스를 뽑아들더니 카운터에 내밀었다.
“정말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거야?”
“응! 나 이거 정말 보고 싶었어!”
그 말에 수찬은 할 말이 없으면서도 수상해졌다. 처음 와 본 디비디방인데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순식간에 영화를 골라 버리는 것도 어딘가 수상했다. 하지만 너무나 태연한 율의 모습에, 게다가 아까 한 번 삐지기도 했고, 해서 수찬은 군말 없이 계산했다.
“아~ 정말 기대된다!”
율은 수찬의 근처를 맴돌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모습을 디비디방 아저씨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율처럼 밝고 예쁜 처녀 손님은 오래간만이었기 때문이다.
“수고하세요.”
둘에게 자리를 세팅해주고 문을 닫으며, 디비디방 주인이 말했다. 수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아저씨 미친 거 아냐?”
“뭐가 어때서? 친절하기만 한데?”
율은 핸드백을 멀찌기 밀어놓고 구두를 벗고 소파 위로 올라갔다. 거의 침대 같은 느낌의 소파는 누워서 영화를 관람하기에도 적당했다. 율은 올라가자마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 조심성 없는 움직임에 그녀의 스커트가 반쯤 올라갔다. 그녀의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났고 팬티도 살짝 보였다. 수찬은 기겁을 했다.
“야! 조심성 없이.”
“너도 옆에 누워. 영화 시작하겠다.”
태연한 척 말하는 율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수찬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율은 올라간 치마를 다시 내리지 않았다. 수찬은 어기적거리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쿠션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눕지? 그게 더 편한데?”
“난 앉는 게 편해.”
“아, 그래?”
율의 목소리가 어딘가 시무룩하다. 이 모든 게 착각이길 바랐건만, 점점 분명해져 버렸다. 율은 어느 새 수찬한테 반해 있었다! 맙소사!
영화사 마크가 뜨고 곧 영화가 시작되었다. 까맣고 별이 반짝이는 우주 공간. 돌연 파란 지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지구를 우주 공간을 방황하던 거대 오징어가 물총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지구는 그럴 때마다 휘청휘청했다.
“너 정말 이게 보고 싶었어? 진짜 취향 한 번?”
“조용히 하고 보기나 해.”
영화는 몹시 황당무계했다. 그걸 보고 있는 수찬의 표정이 썩어갔다. 수찬은 흘낏 율을 보았다. 율은 정말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이걸 보고 싶었단 말이야? 수찬은 율이 다시 보였다. 앞으로 더더욱 율을 멀리해야만 할 것 같았다.
거대한 케찹 괴물이 오징어와 싸우기 시작했다. 오징어는 케찹 범벅이 되어 절규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구가 클로즈업 되더니 어떤 가정주부가 비명을 지르며 국자를 내던졌다. 그 국자가 우연히 우주 밖으로 날아가 오징어를 가격했다.
수찬은 너무 한심해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어제 율을 의식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이 참에 잠이나 잘까.
그는 소파 쿠션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수찬의 뒷목에 쭈삣 소름이 돋았고, 그의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는 줄 알았던 김율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와 수찬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운 채로 몸만 돌려 다리와 엉덩이를 움직여 수찬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의 얼굴이 수찬의 다리에 닿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수찬의 다리를 만졌다.
“야..”
“가만히 있어봐.”
율은 막무가내였다. 은근하던 손놀림은 멈출 줄을 모르더니, 슬그머니 그의 다리 사이로 진입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율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했어?”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수찬이 고개를 돌려 율을 보자, 누운 상태인 율이 눈만 올려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아주 자극적인 각도에 표정이었다. 율은 피가 몰리고 있는 그의 고환을 옷 위에서 어루만졌다. 물컹한 그것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 길게 쭉 뻗은 예쁜 손톱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율과 이런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