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불공평한 관계 =========================================================================
“배 안 고파?”
“그러고 보니 고프네.”
“내려가서 먹어. 벌써 9시 다 돼가.”
“엄마랑 아빠는?”
“아버님은 방에 들어가신 거 같고 어머님은 거실에 계셔.”
“하이고...”
“그러게 인사는 하고 들어갔어야지.”
“너까지 잔소리 하냐. 그건 그렇고 닭살 돋게 아버님 어머님이 뭐야.”
“맞는 말이잖아. 어차피 우리 결혼할 건데.”
“맙소사....”
김율은 원래 이러지 않았다. 둘은 친밀하면서도 쿨한 사이였다.
그건 어차피 부모님들 마음대로 정한 거잖아? 우리는 우리하고 싶은 대로 살자,
라고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은 율 쪽이었다. 둘은 설령 결혼하게 된다 해도 각자 애인을 사귀면서 자유분방하게 살기로 약조했었다. 그 약속은 몇 년 전, 둘이 약혼한 뒤로도 쭉 지켜졌다. 둘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서로의 연애사에 대해서 터치하지 않았다.
그러던 김율이 어딘가 변했다. 훌쩍 길어버린 머리만큼이나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가 수찬을 구속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는 있었던 쿨함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율은 수찬의 부모를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수찬은 위화감에 주춤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율은 빨리 내려오라며 수찬을 재촉했다.
“어휴, 넌 남자가 무슨 매너가 그렇게 없니.”
“피곤했다니까요.”
“너처럼 공부도 안하는 애가 뭐가 피곤하다는 거니?”
“그 소리 좀 그만하세요. 밥 안 넘어가요.”
“넌 그래도 싸. 이대로라면 율이가 너한테 아깝잖니. 노력 좀 해라.”
예상대로 수찬의 엄마 한유리는 수찬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가정부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있는 수찬을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온 유리는 수찬이 밥을 제대로 못 먹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잔소리를 했다. 그런 수찬이 고소한지 눈이 마주치자 혀까지 쏙 내밀어 보이던 율은 그칠 줄 모르는 잔소리가 안타까웠는지 이제야 그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수찬이 저한테 딸리지 않아요. 수찬이 정도면 훌륭하죠.”
“뭐가 어떻게 훌륭한데?”
“감수찬! 너 틱틱거리는 말버릇 고치랬지!”
“저게 수찬이 매력인걸요. 어머님.”
“어머나! 율이 넌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둘은 아주 죽이 잘 맞았다. 예전엔 분명 저 정도는 아니었다. 수찬은 혹시 율이 자기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김율이 붙임성 좋은 건 원래 그렇다고 쳐도 지금처럼 매력적이라느니, 훌륭한 신랑감이라느니(실제로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하는 소리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적당히 부모들 장단에 맞춰주는 정도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수찬과의 결혼을 원하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수찬은 자신이 제발 착각하고 있는 것이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혹시 설마에 사람 잡히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영희를 엄마한테 소개시켜버려? 아직 약혼만 했지 결혼한 건 아니잖아.
수찬은 영희를 엄마한테 소개시키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맨날 입고 다니는 개량 한복이야 벗기고 예쁜 옷 사주면 된다지만... 안 그래도 주눅 잘 들고 소심한 영희가 엄마처럼 기세고 권력지향적인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수찬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그의 눈엔 친구 같은 율보다야 영희가 훨씬 예뻤지만 영희는 당당히 소개시키기엔 어딘가 하자가 있는 애였다. 은근히 귀엽고 매력적이긴 해도 행동거지가 어딘가 촌스러워 친구한테도 당당히 여친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친구한테도 그런데 엄마한테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수찬은 적어도 겉을 치장하는 방식만은 영희가 율을 배웠음하고 바라게 되었다.
김율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찬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나이트 가운 안엔 아무 것도 입지 않았고 복도는 어두캄캄했다. 집에 오자마자 저녁잠을 잔 그이니 왠지 아직 깨어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노크해본다.
“수찬아? 나 들어가도 돼?”
방 안에서는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혼란스럽고 어지럽고 시끄러운 음악. 딱 수찬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율은 좀 더 세게 노크를 했다. 하지만 아래층이 의식되어 아주 세게 문을 두드릴 순 없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노크를 하고 수찬을 부르지만 감감무소식. 낙담한 율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수찬은 율이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율이 수찬을 좋아한지가 거의 1년이 다 되었으니 엄청 늦게 알아차린 것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눈치가 너무 빠르다며 감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가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아채지도 못하는데 왜 난 눈치가 빨라서 이런 걸 다 알아버린 걸까, 하며 통탄 중이다.
엄마인 유리의 호들갑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율과 시내에서 데이트 중인 수찬은 그녀가 점점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율은 어젯밤에도 교태스런 목소리로 수찬의 방문을 두드렸고, 알면서도 수찬은 열어주지 않았다. 율에게 연애감정이 없는 수찬은 자꾸 그녀가 애교와 교태를 부리는 것이 성가시기까지 했다.
“오~ 수찬이. 여친이야?”
이럴 때 누가 자기를 알아보는 게 싫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던 수찬은 철민이 아는 척 해오는 게 무척 짜증났다. 이왕 들켜버린 거, 율을 누구라고 소개시켜야 하긴 하는데 싶어 그는 난감해졌다.
“어. 내 사..”
“안녕하세요 김율이라고 합니다. 수찬이랑 사귄 지는 꽤 됐어요.”
“안녕하세요. 엄청 예쁘시네요.”
수찬은 어, 내 사촌이야, 라는 무척 식상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김율이 선수를 쳐버렸다. 이건 반칙인데! 싶어서 율을 노려보자 율은 수찬을 팩 외면해버렸다.
철민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사귄 지 1년이 넘었네, 부모님이 친하네,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는 율이 얄미웠다.
수찬은 그녀가 1년이라고 한 이유가 그를 좋아한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 뜻인지는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