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불공평한 관계 =========================================================================
길은 텅 비어있었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영희는 입술을 깨물더니 자진해서 나시와 브래지어를 풀었다. 나시를 벗는 것까진 좋았는데 브래지어는 괜히 벗었나.
훤히 가슴이 드러나자 썰렁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수찬에게 보여주는 것도 여전히 쑥스러운 부분이 있는데다 여긴 야외니까.
“너 오늘 되게 말 잘 듣는다.”
수찬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영희를 쳐다보았다. 이럴 때만 좋은 거야? 라고 묻는다면 분위기 망치겠지.
영희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기쁜 동시에 씁쓸하기도 했다.
수찬은 영희를 눕혔다. 나무 바닥으로 된 평상 위에 눕혀놓고는 치마 속에 손을 넣었다. 살살 팬티 위를 만지다가, 오래지 않아 벗겨버린다.
“아, 잊을 뻔했다.”
그대로 영희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리를 잡던 수찬은 벌떡 일어났다. 무르익은 분위기에 자극받아 조금쯤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영희.
그가 갑자기 멈춰버리자 아쉬웠다.
“피임은 제대로 해야지.”
그는 가방에서 콘돔을 꺼내와 비닐을 뜯었다. 그걸 자신의 물건 위에 씌운 수찬은 다시 영희 쪽으로 다가왔다.
“오빠 고맙지? 알아서 챙겨주니까.”
“어? 응..”
영희는 얼떨떨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영희는 수찬을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섹스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야동 한 번 본 적이 없었고 인터넷에 널리고 널린 성경험담 한 번 접해본 적이 없었던 영희.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도, 경험도 전무했던 영희였기에 피임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알아서 콘돔을 챙겨오는 수찬을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고 있었기에, 영희는 왜 고마워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찬은 치마를 들추고, 영희의 허리를 거칠게 잡아 올린 다음 한 번에 자신의 물건을 밀어 넣었다.
“아!”
충분히 젖어 있지 않은 그녀의 내부는 그의 물건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뻑뻑했다. 갑작스런 진입에 놀란 그녀의 내벽은 적당히 이완하거나 수축하지 못했다. 절로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는 영희를 고려하지 않고 수찬은 거칠게 허리를 흔들었다.
“하! 죽인다!”
아직 남자가 익숙하지 않은 영희의 내부는 좁고 뜨거웠다. 넣자마자 꽉 조여오는 느낌에 수찬은 탄성을 질렀다. 쾌감이 범벅이 되어 찌푸려진 얼굴로 거칠게 몸을 놀리는 수찬의 아래에서, 영희는 이 고통이 완화되기만을 그저 기다리며 참고 있었다.
“으!”
인상을 찡그리고 신음을 뱉는 영희가 수찬의 눈에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자신과 보조를 맞추는 영희에게 화답하기 위해 더욱 세게 몸을 뺐다가 들어오는 수찬.
처음 하던 때에 비하면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덜 아팠지만 영희는 아직 이게 뭐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
영희를 만나고 돌아온 수찬. 영희에게 너무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쓴 나머지 너무 피곤했다. 게다가 몇 번이나 사정하고 난 직후라서 더더욱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금 그는 자기 방에 콕 쳐박혀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새어나오는 화기애애한 소리에 수찬의 마음에 덜컥 불안감이 번져나갔다. 관찰력이 없는 수찬은 차고에 세워진 진파랑색 미니쿠페를 그냥 지나쳤었다.
수찬은 소리만 듣고도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달리 화기애애하고 즐거워 보이는 것이, 손님이 와 있는 것 같다.
신발을 벗던 수찬은 앞코가 뾰족한 은색 구두를 발견했다. 이런 구두를 신고 이 집에 올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수찬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하여간 시대착오적이라니까. 이 집은.”
불만스레 툴툴대고 있는 그는 가급적 그들 몰래 이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결국은 인사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졸렸다.
“어, 수찬이 왔나 봐요?”
“우리 율이는 귀도 참 좋아.”
김율, 이 화상아...
수찬은 이 순간 김율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귀 하나는 기똥차게 밝은 김율은 쪼르르 달려와 수찬 앞에 선다.
구두와 색을 맞춘 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는 율은 딱 봐도 엄청나게 꾸미고 있었다. 글래머스한 라인이 돋보이는 옷은 살짝 가슴골이 드러나게 만들어져 있었고, 그 가슴골 사이를 촘촘하게 여미고 있는 리본이 굉장히 화려했다.
언제 길렀는지 제법 긴 머리는 적당히 웨이브가 들어가 있었고 붉은기가 도는 갈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화장도 했고 확 눈에 띄진 않지만 악세서리를 귀며 팔이며 손이며 다 하고 있는 김율.
“야, 너 왜 한숨 쉬는데?”
“그냥 너 보니까 피곤하다.”
“뭐?”
수찬은 영희를 만나고 온 직후,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김율을 보고 싶지 않았다.
김율만 보면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하이톤이 되는 엄마,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김율을 아끼는 아빠.
그들을 생각하자 그는 숨이 막혔다.
“얘들아, 여기 와서 얘기 나누렴.”
“나 너무 피곤하니까 니가 엄마한테 잘 얘기해줘라.”
수찬은 이제 한계였다. 그는 김율에게 모든 걸 맡기고 냅다 방으로 내빼버렸다.
희미한 노크소리가 수찬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뭉개져 들리던 작은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그의 의식 또한 차츰 깨어나기 시작했다.
“누구야..”
기운 없이 중얼거린 수찬의 말소리는 문 너머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문 너머로부터 자니?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김율이 와있지.
수찬은 서서히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직 잠이 덜 깼기에 쌩까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다가는 엄마한테 싫은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수찬은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야! 잠깐만!”
멀어지는 발소리. 조급해진 수찬이 냅다 소리치자 발소리가 멈추었다. 발소리는 곧 수찬의 방을 향해 나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 활짝 미소 짓는 율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바로 들어온다. 수찬은 그 표정에 난감해졌다.
율의 표정만 보면 마치 그를 보게 되어서 너무 반갑고 좋은 것처럼 보였다. 집안에서 정한 공식 약혼녀이긴 해도 친구 이상의 감정은 아니었던 둘. 애인도 아닌 자기를 보는 게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그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떨떠름한 수찬의 표정을 캐치한 율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것 또한 수찬을 경악시켰다. 예전 같았으면 농담도 못하냐? 하고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수찬은 설마, 싶으면서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읽은 걸까. 율이 먼저 선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