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불공평한 관계 =========================================================================
선선한 공기, 따뜻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일까. 수찬은 영희를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수찬이 먼저 산을 올랐지만, 영희가 계속 뒤처지는 걸 알고는 보조를 맞추어주었다. 그가 성큼성큼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깜짝 놀란 영희는 우뚝 멈추어 섰다.
일일이 화를 내기에는 너무 기분 좋은 날이다. 수찬은 봄바람에 마음이 풀려, 영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힘들지? 조금만 더 걷자.”
그의 말투는 다정했다. 살짝 미소까지 머금고 그녀의 손을 맞잡는 수찬.
영희는 수찬이 자신에게 처음 다가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직 춥던 겨울, 다짜고짜 다가와 호감을 표하던 수찬은 저돌적이면서도 사랑이 넘쳤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생기발랄하고 다정했던 수찬. 마치 그때처럼 자신을 사랑으로 대하는 수찬의 태도에 영희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영희는 수줍게 머뭇거리며 수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찬은 영희에게 확신을 불어넣어주려는 듯 손을 세게 마주 잡았다. 의도와는 달리 너무 힘이 들어간 게 문제긴 했다.
영희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자, 멋쩍게 웃으며 수찬은 손에 가해진 힘을 완화시켰다. 부드럽게 영희를 잡아끄는 수찬의 다정한 손. 영희는 감동받고 말았다.
길이 좁아 수찬이 조금 더 앞에서 걷고 영희는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지만, 꼭 잡은 손은 그 뒤로 한 번도 놓아지지 않았다.
정말 오래간만에, 따사롭고 훈훈한 공기가 두 사람을 뒤덮고 있었다. 영희는 너무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영희는 푹, 고개를 숙인 채 자꾸 지어지는 미소를 억누르려고 했다. 그냥 순수하게 기뻐해도 되겠지만, 왠지 감정 표현이 쑥쓰러워 참고 마는 영희.
두근두근 뜀박질하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봄날의 산을 오른다.
오늘 아침, 수찬이 산에 가자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만 해도 영희는 달갑지 않았다. 너 좋다, 귀엽다며 난리를 치기에 마지못해 사귀어 줬더니 학교에서 아는 체 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그 때문에 속상한 나날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친구한테 그냥 좀 아는 동생이라고 소개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상한데, 시내에서 데이트할 때조차 손 한 번 잡아주지 않는다.
영희는 그런 그가 너무 야속해 헤어져버릴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수시로 그녀를 예쁘다, 귀엽다고 했었다. 하지만 어느 새, 그는 잠자리에서만 그 말을 한다. 몸만이 목적인 것 같은 이 관계,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며 지쳐가던 그녀였기에 뜬금없이 산에 가자고 했을 땐 솔직히 귀찮고 성가셨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음껏 내 몸을 더듬고 싶은 거야? 싶어서, 서럽기까지 했다.
“미안, 늦잠 잤다.”
그런 주제에 30분이나 그녀를 기다리게 한 그. 자기와의 약속은 약속 같지도 않다는 건가?
성의 없이 사과를 하는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 영희는 화가 났다. 하지만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해본 그녀는 열불이 나는 것 같으면서도 꾹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싫고 답답했지만 타고난 성격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오늘 헤어지기 전에, 말해버리는 거야. 그만 만나자고.
불과 1시간 전만해도 영희는 이런 결심까지 했었다.
“저기서 좀 쉴까?”
수찬은 길에서 약간 비켜간 곳에 있는 지붕 있는 평상을 가리켰다. 평상 안엔 아무도 없었다. 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찬은 영희가 좀 느리게 걸어도, 둘의 대화가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아도 지금까지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수찬이 오빠는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군 게 줄곧 미안했던 걸까? 그래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산에 오르자고 한 걸까?
영희는 거의 1시간 넘게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만 보여주는 수찬에게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배고프지?”
“응. 조금.”
“도시락 싸왔어. 먹자.”
“아!”
영희는 도시락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리 뒷산이라고는 해도 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왕복 2시간은 걸리는데, 당연히 그 사이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이건 기본적인 건데 왜 생각을 못했지? 친구가 수현이 밖에 없어서 내 사회성이 이렇게 떨어지는 거야? 아니 이건 기본 매너잖아!
영희는 당황해서 쩔쩔맸다. 또 수찬에게 싫은 소리 들을 것 같아서 마음이 어두워진다.
“너 안 싸올 것 같아서 내가 사왔어.”
그렇게 말하는 수찬은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말 속에 뼈가 들어 있지도 않았고 은근슬쩍 빈정거리지도 않는다.
영희는 조금 더 기다렸다. 혹시라도 반전이 있을까봐. 초조하게 질타의 순간을 기다려보지만 그는 다정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정말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영희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먹자. 식겠다.”
“오빠, 고마워.”
“고맙긴.”
수찬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행동이 영희를 불안하게 하는 것 같아, 안심시키기 위해 희미한 미소를 덧붙였다.
삽시간에 밝아지는 영희. 정말 알기 쉽고 단순하고, ...귀엽다.
수찬은 때때로 영희의 행동들이 갑갑했지만 영희를 결코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요즘 들어, 그는 자신의 화를 너무 자제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영희는 나날이 어두워져 갔다.
아무리 소심한 영희라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헤어지자고 하고 말 것이다.
연한 갈색 피부에 아담하고 청초한 이목구비를 가진 영희는 누구나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은근 인기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른 놈한테 뺏겨 버릴 것만 같아 수찬은 안달이 났다.
영희 예상대로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수찬.
이제 한 마디만 더 하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좀 심했지, 미안.
“오빠? 안 먹어?”
영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찬을 본다. 수찬은 도시락을 잠깐 옆으로 밀쳐두고 영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수줍어하며 살짝 눈을 내리까는 영희. 꾸민 행동 없이 정말 감정대로만 움직이는 그녀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런데도, 영희의 행동 어딘가가 때로는 답답하고 그의 신경을 긁어버려 항상 문제가 되곤 했다. 수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 타이밍에 사과하자니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그는 그냥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영희의 작은 입술을 살짝 건드리자 평소와는 달리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 약간 부끄러워하기만 하는 그녀가 그의 마음을 애틋하게 울린다.
“영희야, 밥은 조금 있다 먹을까.”
“응. 잠깐만!”
영희가 수찬을 세게 밀어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기에 영희도 수찬도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모처럼 분위기 좋았는데.
영희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화내고 싶지 않았지만 수찬은 이때만은 자제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불꽃이 튀고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아, 또다시, 시작되었다.
영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대로 모처럼 괜찮았던 분위기를 망칠 수밖에 없는 걸까?
“오빠, 도시락, 모처럼 사왔는데.. 엎지를까봐. 미안해.”
영희는 울지 않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표현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해냈다. 제발 다시 분위기가 전환되기를,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응, 그럴 것 같았어.”
수찬이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모처럼 마음먹었기 때문에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도 똑같았다. 하지만 참담한 심정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린 왜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분명 처음엔 모든 것이 좋았다. 수찬이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느낌이었긴 해도 결국은 영희도 응해주었다. 수줍게 미소 짓던 얼굴,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던 영희.
그 이상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아팠다. 훼방꾼이 나타나 그가 생각을 전개하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았다. 수찬은 찌릿하게 아픈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 영희를 세게 끌어안았다.
============================ 작품 후기 ============================
매 주말마다 연재할 생각입니다^^ 평일에는 비탄을 쓰구요. 파탄잘리에 올라와 있는 수찬과 영희와는 다른 성격입니다. 파탄잘리는 좀 즉흥적으로 쓴 거고 이건 수정봐서 다시 쓰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