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9)

친구 엄마는 대학교수

 12

“이거.. 강인이가 빌려준 책 안에 들어있던 거~ 맞지?”

 “아, 맞아요! 그랬던 거 같네요.

 어쩐지.. 하하하하..”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하고 가증스럽다.

 규복은 양심에 사정없이 비수가 꽂힘을 느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선혜가 저렇게 멍석을 깔아주는데, 덥썩 물어야지..

 선혜의 부연을 들으니,

 가끔씩 책을 보다가 멈출 때, 책갈피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넣을 때가 있단다.

 그런 습관이 있는 걸 선혜도 알다보니

 규복이 건넨 명찰도 그녀가 저지른 실수로 여긴다는 말.

 .....

 ‘그게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이어지지?’

 규복은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선혜답다는 생각에 슬쩍 웃는다.

 평상시의 (강단에서라든가) 선혜는

 매우 냉철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데..

 이런 사석에서는 또 인간미가 넘치다 못해 어리숙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뭐 모로 가든 서울만 도착하면 되지~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고백을 입증할 ‘증거물’로 들고 나왔는데

 저렇게 반색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규복은 속으로 ‘후...’ 한숨 돌리며

 겉으로는 한술 더 떠, 능청맞은 연기를 선보인다.

 “저도 처음에 황당했거든요, 책 가운데 덩그러니 있으니까요,

 물론 아주머니 얼굴이 워낙 이쁘시니까, 헷, 엄청 반가웠고요..

 어, 아무튼 거짓말 아니에요,

 빌린 책 안에 들어있는 걸 보니까 보물찾기라도 한 기분이었어요”

 “풋~ 그래..

 내가 좀 방정맞아서 이렇게 좀 흘리고 다녀, 호호”

 선혜의 가식 없이 웃는 미소를 보고

 규복은 어떻게 납득은 됐는가보다, 하며 안도한다.

 혀가 제대로 풀어지지 않아서 말이 뒤엉키는데도 선혜가 잘 받아주는 것 같아 고맙기까지 했다.

 “야.. 그랬구나.. 세상에..

 이걸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니...”

 선혜는 정말 감동한 나머지,

 큰 눈망울에 눈물이 덩그러니 맺혀 있다.

 본의 아니게 규복이 선물을 건네준 셈이다.

 사라진 것도 몰랐던 물건을 근 10년만에 되찾고

 예전 추억에 젖는 눈치.

 감개무량한 여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시간을 되새긴다.

 규복은 선혜의 어여쁜 속눈썹 사이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사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양심에 가책은 느끼지만..

 예상보다 훨씬 고무적인 그녀의 반응에, 그 역시 감동이 밀려왔다.

 ‘저 예쁜 눈의 생김새.. 내가 첫 눈에 반했던 그 눈이었어..

 그래..’

 말없이 몇분간 예전의 추억을 품에 묻던 그녀,

 곱게 드리워진 쌍꺼풀을 천천히 올려 뜬다.

 촉촉하게 젖은 눈썹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정말로 뜸을 들이느라, 아름다운 눈의 생김새가 돋보였기 때문일까..

 현재의 규복은 선혜의 눈 뜨는 모습에서조차

 고급스러운 기품을 느낀다.

 눈을 감았을 때의 쌍꺼풀은 커 보이는데 뜰수록 작아지는 타입.

 눈꺼풀이 얇고 가녀리다.

 작지 않는 눈 주위로 얇은 애교살도 보여서, 표정이 더 화사하고 다채롭다.

 규복은 새삼스럽게 선혜의 깊은 눈매에 빠져든다.

 ‘저래서 아주머니가 동안이란 말을 듣는지도 몰라’

 그저 흐뭇한 눈길로, 콩깍지가 씌여 바라보는 소년.

 여인이 그런 규복의 얼굴을 향해 입을 연다.

 “저기..”

 “네, 네”

 “이럴게 아니라 내려서 좀 걸으면 어떻겠니”

 “네넵”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다소 경사가 있는 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내린 눈 덕분에 ‘뽀드득’ 발 아래 경쾌하게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규복은 선혜가 휘이- 손짓하는 대로, 군소리 않고 천천히 따라갔다.

 “후훗, 안 미끄러져, 얼른 따라와야지~”

 “아.. 네, 좀 겁나서요, 이익!

 미끄러운데요”

 “쿡, 바보~”

 선혜는 잘 쓰지 않는 호칭까지 쓰면서 규복을 놀렸다.

 다른 이가 아닌 선혜라 그런가,

 바보라는 말조차 규복은 설렌다.

 그저 배시시 웃으며 선혜의 늘씬한 뒷태를 바라볼 뿐이다.

 “눈이 와서 설경이 이쁘고, 저녁이지만.. 그림이 더 사는 것 같네,

 어때, 규복아?

 여기 이름이 서달산 숲이야..

 조금 내려가면 현충원도 가깝고, 경치도 좋고, 공기도 참 맑고~ 깨끗하기 까지!

 이만한 동네가 잘 없단다..”

 “네.. 멋져요.. 이모 덕분에 좋은 산책길을 알게 되네요”

 “후훗, 그치?”

 규복이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웃자

 선혜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다.

 그 화사한 미소를 보며 규복은 아까의 고백에 이어 긍정적인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굽이치던 길을 따라 오르다가 선혜가 멈춰선다.

 “잠깐, 눈발이 좀 거센걸.. 아까는 이러지 않았는데..”

 “....”

 “우리 이제 돌아갈까?”

 “네.. 제가 볼 때도 좀 위험해 보이네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 조심, 서로를 잡아주며

 규복과 선혜는 오를 때처럼 차분하게 등산로를 내려온다.

 그러다보니 선혜는 잠깐씩 어깨를 규복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평지에 도착하니 좀 낫다.

 아까보다 확연히 눈이 쌓여서.. 하얗게 바닥에 드리워진 풍경.

 고요한 심상에 마음까지 정화되는 듯하다.

 가만히 그 눈 덮인 정경을 응시하던 선혜가

 “하아~”

 뜨거운 입김을 불더니 말을 꺼낸다.

 “.....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종강하던 날, 네가 나 좋다고 말해준 날, 그 이후로..”

 “.... 예”

 “막막했어.. 네 얼굴을 앞으로 어떻게 볼까, 사실은 두려웠거든”

 “....”

 “이제까지 친근하게, 친 아들처럼 편안하게 대하던 규복이,

 너였는데..

 지금까지 너와 나 사이 아무 탈 없던 흐름에 균열이 생기는 거잖아”

 규복은 그렇지 않아요, 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설마.. 했었어.

 내가 편도선이 부었을 때,

 너 기억나지?

 같이 호숫가 옆에 갈대숲 걷던 날..”

 규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열이 너무 올라서 위험했는데..

 병원에 데려다줘서 놀랐더랬지, 후훗.

 그랬는데.. 킥, 이 얘기 왜 하는지 알아?”

 “어, 알 것 같은데요..”

 “뭔데.. 알면 말해볼래?”

 “어, 음..

 아주머니 제가.. 병원에 데려간 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더니 이번엔 선혜가 장난스런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그럼”

 “후훗, 너.. 아줌마 자는 사이에.. 볼에 뽀뽀했었지?”

 “....”

 규복은 그야말로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주머니가 다 알고 있었을 줄이야..

 병실에 선혜를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한 날,

 완전히 잠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잠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몰래 다가가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해놓고 나서 당장은 뿌듯하고 기뻤지만

 규복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한동안 선혜의 얼굴을 멀쩡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부끄럽고 떳떳치 못했던 규복의 속내와

 부자연스러웠던 행동까지도, 선혜가 꿰뚫어보았을 지도 모른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규복은 갑자기 선혜가 퍽 낯설게 느껴진다.

 “얼굴 표정이 너무 어둡다, 규복아, 괜찮아?”

 “아.. 아니에요”

 “응.. 나 말 실수했나봐.

 내 의도는, 음.. 그냥, 네가 그.. 쪽, 해준게..

 아주 싫지는.. 않았다는 말이야..”

 “예, 하하.. 괜찮아요, 이모..”

 선혜는 규복이 무슨 생각하는지 몰라도 얼굴이 급 어두워지자

 진심으로 걱정스런 말투로 규복을 어루만진다.

 할말은 하되, 규복이 되도록 상처 입지 않도록

 한 마디 한 마디 배려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 상처 받지마.

 상처 받으면 안돼, 규복아.. 알았지? 응..”

 규복과는 정 반대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쌓인 눈바닥을 괜히 발로 훔치는 선혜.

 규복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선혜가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로 뭐라 글자를 새긴다.

 그리고 “탁, 탁” 손바닥을 털며 일어났다.

 규복은 이제까지 하하호호 선혜와 웃으며 등산길을 오르더니

 문득 그녀가 낯설어 거리감까지 느껴졌다.

 선혜는 그런 심경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편하게 대할 뿐인데..

 여하튼 규복이 말수가 대폭 줄자 의아하게 생각한다.

 “너 말이 진짜 없다~ 아줌마 혼자 떠들게~ 힝, 안 그래?”

 “아니에요.. 헷,

 저는 이모님 말씀하시는거 듣는 것만 해도 좋아하잖아요”

 “칫..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침묵을 지키는 건지.. 어떻게 알아”

 “진짜인데요..”

 자기도 모르게 떨떠름한 말투와,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규복.

 현재 그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선혜는 말 없이 규복을 쳐다보더니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 두드리며 돌아가자고 말했다.

 -

 2월의 첫주.

 규복은 어머니가 쓰던 안방의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

 어머니의 유품을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곧 눈물을 터뜨린다.

 마음이 잘 추스려지지 않았다.

 아직 약관의 나이이고 감정을 다스리는데 미숙한 아이.

 때문에 이제 양친이 모두 세상을 등지고

 유일하게 자신이 의지할 대상은 얼마 안 되는 가족 친지와

 ‘선혜’ 한명 뿐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고 갑갑하다.

 그렇게 의지하고 사모하는 사람으로부터..

 반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을 들었으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규복이라도 선혜가 건넨 말의 의도는 파악하고 있다.

 ‘그건.. 어떻게 해석해도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잖아.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그게 맞지.. 아주머니는 가정도 있고, 아저씨랑도 화목한 사이고,

 나 같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한심한 꼬맹이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견딜 수 없어진다.

 우두둑, 우둑, 소리 날 정도로 목관절을 꺾었다.

 ‘근데 또..

 우리 속 없는 이모는 연락을 하셨어요.. 어쩐 일로’

 비꼬는 생각이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 없이, 선혜에게서 아침에 온 톡을 바라본다.

 『일어났니?

 배고프면~~ 톡 보내~~ㅋㅋ 아줌마하고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저절로 웃음이 터진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차가울 때는 차갑고 모질게 느껴지다가

 또 별안간 밝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니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물론 이는 규복이 자기만의 이미지화 시킨 범주 내에 선혜를 가두었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다.

 실제 선혜는 규복에게 최대한 배려해주었고

 완곡어법으로 거절은 하되,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알겠어요..ㅎㅎ 저 그럼 고기 사주세요.. 괜찮나요?』

 『움~ 고기라~ 얘가 유지비가 많이 드는 애네~ㅋ

 그래~ 가자~ 몇시에 볼래?』

그날 점심, 사당역에서 만난 두 사람.

 선혜는 유난히 알록달록 다양한 색이 뒤섞인 니트를 입었다.

 가로로 오렌지-하양-검정색이 곁들여진 스트라이프.

 그리고 하체에 찰싹 들러붙는 하얀 백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이다.

 “여기~ 얼른 와~ 히히~ 제 때 왔네!”

 언제 봐도 눈이 즐거운 선혜의 코디.

 다리가 상당히 길고 미끈하게 잘 빠진데다,

 늘씬하면서도 건강미가 돋보일 만큼 탄력이 넘치는 허벅지.

 멀리서 보기에도

 시원스럽게 일자로 쭉~ 뻗어 있는 그녀의 각선미가 멋지다.

 규복은 괜히 우쭐하다.

 ‘저 사람이 내가 만날 사람이야~’ 라고..

 어줍잖은 자부심으로, 지나가며 그녀를 곁눈질하는 사람들을 의식한다.

 ‘쩝,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그래봐야 이제 의미없는 걸~ 휴..

 아줌마가 내 여자가 될 것도 아니고..’

 금방 현실을 깨닫자 의기소침해진다.

 이런 생각을 모르는 선혜는, 활짝 웃으며 성큼~ 어린 아이처럼 다가와

 규복의 늘어진 어깨를 “탁탁!” 세게 치는 것이다.

 그 손의 힘이 얼마나 센지, 다부진 어깨의 소년은 살짝 통증마저 느꼈다.

 “여기~ 맛있는 집 있어~ 빨리 가잣~ 나 배고팡~”

 “킥킥, 알았어요.. 하하하하~”

 “? 왜 웃어..?”

 “아녜요.. 아주머니 말투가 너무 귀여워서요..”

 “하하, 그래? 나.. 또~ 너무 왈가닥했나봐~

 미안~ 갈비 먹을 생각하니까 기분이 업되가지궁.. 헤헤~”

 여전히 유쾌한 말괄량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들 친구의 어깨에 ‘척’ 손을 얹고 가자고 이끈다.

“참.. 규복아 너~”

 “네~”

 “군대는 대략 언제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아.. 예리하신 질문인데요.

 저 아마.. 잘하면 이번에 아예 휴학을 하고, 1학기 쯤에 신청해서,

 만약에 된다면 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뜻밖에 규복이 상세히 답변하자

 소갈비를 굽고 있던 선혜의 손이 움찔,

 살짝 떨리며 멈춘다.

 “저, 정말..이야?”

 “예.. 그러고 보니 미리 말씀을 드리진 못했네요..

 저~ 잘하면 공군으로 입대하려고요”

 “공군이라.. 그래..”

 규복은 선혜가 우물쭈물 말을 곱씹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노출하자 의아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근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한다.

 표를 예매해놓고,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

 카페에 들어가 따듯한 차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근데 아주머니, 머리 색깔은 또 언제 바뀌셨대요, 하하..

 대충 3개월 쯤에 한번씩 바뀌는 건가요?”

 “쿡쿡, 시도 때도 없이 자꾸 바뀌지?

 걱정마~

 이번에는 오래 갈거야..^^

 앞으로는.. 바뀔 일이 없을 거거든”

 선혜는 민망한지 규복의 놀림에 웃는다.

 사실 현재의 칠흙같이 새까만 머릿결은 규복의 모친 장례식 조금 전에 한 것으로,

 그녀가 머리 염색을 한 데에는 모종의 사정이 숨어 있었다.

 규복은 그걸 모르고 던진 질문이지만

 선혜는 그 속사정을 그가 혹시 알고 물어봤나 싶어,

 순간 내색은 안하지만..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나저나 군대를..

 공군으로.. 자원해서 입대하는 거?”

 “그쵸.. 예.. 요즘은 군대도 유망 직종의 하나라

 본인이 원할 때 아무 때나

 아~ 그래요~ 오세요~ 하고 자유롭게 갈 수가 없어요”

 “응~ 그렇다더라.

 나두 남학생들에게 이야길 많이 들으니까.

 그럼 너 혹시.. 가게 되면

 이번에 바로 3~4월달 쯤에.. 입대하려고?”

 “....

 아마도요.. 가능하면 일찍 가고 싶어요..”

 “그래..”

 대답을 하는 규복의 목소리도 맥아리가 없고

 그러냐고 애써 수긍하지만, 선혜의 음색도 기운이 없다.

 영화는 최근 개봉한 액션 블록버스터.

 규복은 그다지 선호하지는 않는 장르.

 다만 선혜가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자 의외라는 생각과 함께,

 선혜의 기쁜 모습 자체가 큰 낙이라..

 함께 영화를 감상하면서 규복도 마음이 밝아졌다.

 ‘아주머니는 디게 다양한 장르를 보시는 가보네..

 고전 영화나 뭐래더라, 스릴러나 멜로~ 역사물 같은거 많이 보는 거 같던데’

 규복도 여러 가지 장르를 크게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기에

 선혜가 한두가지에 국한되지 않고 소비하는 패턴이 맘에 들었다.

 더 넓게 확장해보면,

 음악이나 여러 가지 영역에서도 그녀와 코드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 이튿날도 선혜는

 여전히 밝고 구김 없는 보이스로 규복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규복은 마음이 복잡하고 싱숭생숭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주니까’ 반갑기는 한데..

 선혜의 연락을 기뻐하면서도,

 계속해서 그 눈 오던 날의 말투와 표정만 떠오른다.

 선혜가 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약간 거리를 두는게 낫지 않나.. 싶은 마음이었다.

2월 6일 목요일.

 규복과 선혜는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통화 중이다.

 선혜의 톤이 상기되어 높아져 있다.

 “....

 18일부터 2박 3일간요?”

 “응~ 우리 교수님들끼리 개강하기 전에 보통은 12월에 사은회를 가는데~

 이번에 약간 미뤄져서~ 2월달에 가거든~

 쿠쿠, 이번에는 양양이야~”

 “강원도 쪽.. 그래요..”

 “너 왜 또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훗~

 있잖아, 내가 이 얘기 왜 신나서 하는 줄 알아?

 히히”

 “글쎄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주머니 생각을~ㅋ”

 규복도 예전보다 뻔뻔해졌다.

 전 같으면 쩔쩔매며 받드는 선혜에게 이렇게라도 '감히' 대드는 말투는 쓰지 않았다.

 선혜는 규복의 재치있는 말투에 또 키득, 웃는다.

 “나랑 같이 가~ 규복아”

 “....

 네? 같이 가요? 사은회를..?”

 “어~”

 잘 들어보니 선혜 왈, 사은회 자체를 같이 가자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다 계산을 해뒀으니, 규복이 전에 말했던 일정과 맞추자는 제안이다.

 “너 저번에.. 외삼촌 댁이 그 근처라고 그랬잖아.

 곧 놀러갈 거라고.. 아니야?”

 “맞아요.. 맞는데, 놀라서 그러죠..

 어떻게 그걸 기억하세요?”

 “후후,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사랑하는 규복이 일인데, 왜 기억을 못해~?”

 선혜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애교섞인 말투를 던지자

 규복의 가슴이 또 심쿵거린다.

 ‘이런 불필요한 애정 표현 하지 좀 말라고요!’

 ...

 혼자서 거울을 바라보며 그런 입 모양을 짓는다.

 그래놓고 규복이 황당해서 대답이 없자

 선혜도 내가 너무 막 던졌나?

 싶어 배시시.. 웃는다.

 수화기 너머로 웃는 선혜의 해맑은 웃음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알겠어요, 크큭, 제가 졌네요..

 이모님한테는 못 이겨요~~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아주머니 생각은요”

 아직 호칭의 변화가 입에 배지 않아,

 일부러 이모와 아주머니를 섞어쓰며 뜸을 들이는 규복.

 “말했잖아~

 나하고 하루 일찍, 17일에 가서~ 너는 가는 김에 내가 태워줄테니까

 아줌마랑 가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겸사겸사~ 삼촌 집에 가면 좋지 않을까..?”

 “뭐야, 하하, 제가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면 좋겠다~라고 제안하시는 거죠?”

 “웅.. 말하자면 그런건데..”

 “ㅋㅋ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아~ 아주머니 귀여워..”

 “풋, 또 귀엽대.. 히히~

 그럼 암튼 그렇게 하기로 하는 거야?”

 “예예, 저야 당연히 좋죠~!”

전화를 끊기도 전에 규복은

 퍼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먹을 불끈, 쥔다.

 위기가 곧 역전의 기회라고 누가 그랬던가?

 혈기 왕성한 규복..

 선혜가 제시한 좋은 여행 일정에 덧붙여..

 자기만의 야심찬 시나리오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떠오른다.

 아닌게 아니라..

 선혜에게도 며칠전 영화보던 날 알렸듯이,

 여차하면 병무청 입영 신청을 해보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미련없이 입대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선혜도 그걸 알기 때문에 마지막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며

 일부러 이런 계기를 만드는 모양인데..

 규복은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약간 음흉한 계획을 실행해보기로 한다.

 규복 입장에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선혜와의 뜨거운 ‘첫날 밤’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보자는 심산이다.

그리고 날짜는 차곡 차곡 다가와..

 선혜와 약속한 17일 아침이 된다.

 신경이 다소 예민한 규복답게

 그 전날, 그러니까 16일 저녁은 아무리 잠을 일찍부터 들려고 노력을 해도,

 다음날인 아침까지 온전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눈 밑에 다크 서클이 한가득~

 이래 가지고 선혜와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한숨을 쉬며

 집 안을 돌아댕기면서 빠트린 짐은 없나 꼼꼼이 체크한다.

 ‘알약하고, 짜먹는 앰플 스틱.. 그래, 이거 빼먹으면 큰 일 나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혹시라도 깨지지 않도록 보존에 만전을 기하며,

 미리 준비한 무언가를 옷섶에 잘 챙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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