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회: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간... -->
“으으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주희를 데리고 불빛이 환한 만남의 광장으로 돌아온 나는 주희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벤치위에 눕혀주고는 자켓을 벗어 그녀의 다리를 덮어주고, 무릎 베게를 해줬다. 그 때문인지 다행히 한시간만에 정신을 차리는 주희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정신이드냐?”
“여,여긴...?”
“아,아 하늘공원.”
“내가 왜 여기에...?”
아직 온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야 모르지...내가 널 발견했을 땐 아파트로 가는 지름길에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넘어졌는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다고...”
“아...!”
원래대로라면 그녀가 한시간전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기억해야 마땅하지만 별로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굳이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녀의 기억을 조작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의식을 잃은 것으로 기억을 수정해놓았다.
덕분에 엄청나게 왜곡된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작은 탄성을 내지르는 주희의 모습에 그녀 몰래 실소를 지었지만 말이다.
수정된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희의 모습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보다...이제 좀 일어나지? 나 다리저리거든?”
“그게 무슨...!”
“아,아...너 지금 내 무릎베고 벌써 한시간이나 누워있었다고...!”
“아...!”
-벌떡!
“이크!”
내 무릎을 베고 있다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주희 때문에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와 내 머리가 부딪힐 뻔 한 것을 간신히 피하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놈의 계집애가 칠칠치 못하게...! 하마터면 부딪힐 뻔 했잖아!”
“으윽! 시,시끄러워!! 그,그보다 내가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무,무슨 짓을 한건 아니지?!”
자기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지 얼굴을 더 붉게 붉히며 양팔을 교차해 자신의 몸을 가리는 주희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
“뭐...? 보자보자 하니까 이놈의 계집애가 고마운 줄도 모르고...!”
“했어, 안 했어?!”
“하, 이거 참...!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꼴이네?”
“야! 강진우!”
어이없는 마음에 주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두 눈에 쌍심지를 키며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 성난 외침에 윙윙대는 귀를 막으며 갖잖다는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야,야 걱정마, 걱정마! 너처럼 발육부진 꼬맹이한테는 관심도 없거든?! 그리고 뭐 만질게 있어야지 만지지!”
“이,이게 정말...! 만질게 없진 뭐가 없어?! 이래뵈도 D컵이라...흡?!”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자신을 훑어보는 내 눈빛에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의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던 주희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두 손으로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헤에? 보기보다는 큰 편이네. 아무튼 그건 나랑 상관없고. 내 옷이나 내놔. 얼른 집에 가게!”
“옷...? 아...!”
“그래, 그거 네 다리에 덮고 있는 거! 빨리 줘. 늦었단 말이야”
“쳇! 줘도 안 가져!”
-퍽!
주희가 의식을 차린 걸 확인했으니 귀갓길을 서두르기 위해 그렇게 말하자 주희가 성질을 부리며 자신의 다리를 덮고 있던 자켓을 내게 던졌다. 나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보이는 주희의 모습에 혀를 차며 자켓을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너 같은 여자애를 누가 데려갈지 참 궁금하다...쯧쯧!”
“남이사!”
“예,예 아무튼 난 간다.”
“흥! 가던 지 말던 지!”
어릴 적에는 안 그러더니 나이가 들면서 유독 틱틱거리는 주희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래 저으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아얏...!”
“.........?”
등 뒤로 주희의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주희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녀가 경험했던 엄청난 사건을 조금이나 보았던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서 벤치에서 일어나려다가 발목에 통증을 호소하며 발목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아있는 주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냐...?”
“사,상관하지마!”
“하아아...정말 너란 놈은...됐다. 됐어. 그보다 어디 좀 보자...!”
곧 죽어도 성질을 부리는 주희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나는 이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부여잡고 있는 발목을 살피기 위해 쭈그려 앉았다.
“무,무슨짓이야!”
-팍! 팍!
학교에 오르막이 많아서 인지 굽이 높지 않은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는 주희의 다리를 만지며 상처를 살피려고 하자 무슨 변태가 자신을 만지는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나를 밀쳐내려는 주희의 모습에 버럭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봐 좀!”
“.........!”
“꼭 소리를 질러야 조용해 져요...! 쯧!”
버럭 화를 내자 찔끔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주희를 바라보며 혀를 찬 나는 찬찬히 그녀의 다리를 살펴봤다.
아무래도 괴물이 습격할 때 다리가 삐었는지 왼쪽 발목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다행히 뼈에는 손상이 없었고, 단지 근육만 놀란 것 같았다. 주희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식수대로 다가가 평소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혜림누나의 것)에 물을 적셔 주희의 왼쪽 발목에 수건을 묶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냉찜질을 해주고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는 뒤돌아 앉았다.
“........?”
“업혀, 그 다리로 집에 가는 건 무리야. 게다가 너 일주일 후에 테니스 시합도 있다면서 그 꼴로 걸어가면 무조건 덧나서 시합 포기해야 하니까 군소리 말고 업혀!”
“아,알았어...!”
내 말이라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주희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이렇게 시비를 걸지 못하게 사전에 막아버리니 결국 아무런 말도 못하고 내 등에 업혔다.
-물컹...!
‘크,크흠! D컵이라더니 정말인가보네...?’
주희가 내 등에 업혀오자 느껴오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 움찔한 나는 의외로 커다란 그녀의 가슴과 그 탄력적이고 부드러운 중압감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등에 업히는 주희도 마찬가지 인듯했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박동과 내 등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가슴을 닿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노력이 온몸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이상한 짓하면 가만 안둘거야...! 트,특히나 이틈에 어,엉덩이를 만진다거나 하면...!”
“야,야 됐어, 됐어! 시끄럽고, 네 신발이나 잘 들고 있어.”
“칫...!”
부끄러움 때문인지 떨려오는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하자 괜히 얼굴이 더 달아오른 나는 황급히 주희의 무릎 안쪽으로 손을 뻗어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잘 받혀들고 집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
“.........”
업는 사람이나, 업히는 사람이나 뻘쭘하긴 마찬가지인지라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걸어간 끝에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도착한 나와 주희는 조용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주희가 그 묘한 정적을 깼다.
“아,안무거워...?”
“...무겁다. 살 좀 빼야겠어. 너...”
“으윽...! 너 정말...!”
고작 한다는 말이 ‘안무겁냐’라니...
정말이지 한주희 이 녀석은 고마움이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모르는 녀석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당연히 가는 말이 곱지가 않았고 덕분에 등에 업혀있던 주희가 발광을 하려고 했지만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때맞춰 도착했다.
-띵...!
“자꾸 그러면 확 버리고 간다?”
“쳇...!”
버리고 간다는 말에 금새 조용해지는 주희를 보며 피식 웃은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려온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덕분에 단 둘이서 엘리베이터에 타게 된 나와 주희는 괜히 묘한 정적에 휩싸여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묘한 정적 속에 있었을까...주희가 내 등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