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회: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간... -->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말하며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는 마리아교수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약간의 손해가 있긴 했지만 어색했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어색한 한국말 대신 편하게 영어를 사용하며 그동안 마리아교수님에서 볼 수 없었던 활달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교수님을 향해 마주 웃어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후훗, 그나저나 어떻게 아신 거에요? 제가 영어 말고 다른 언어도 쓸 줄 안다는 걸?”
“아, 그거? 뭐, 진우, 네가 네 입으로 언어능력이 뛰어나다고 말 한데다가, 평소와는 달리 미국인인 내가 들어도 같은 미국인인 줄 알 정도로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거랑, 독학했다는 말에 설마 했었지. 그 다음엔 뭐, 슬쩍 떠보니까 바로 넘어오던걸?”
“이런...당했네요...”
“호홋,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아참! 그나저나 진우 너...몇개 국어나 할 줄 알아? 불어랑 영어 밖에 모르는 건 아니지? 그렇지?!”
짧은 문답이 오가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 알고 있으니까 어서말해!’라는 눈빛을 보내며 잔뜩 흥분한 교수님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에효, 숨겨서 뭐하겠어요. 불어랑 영어 말고 다른 언어도 몇 개 알아요.”
“몇개나 되...?!”
“아,아...뭐, 방금 보신데로 불어, 영어...는 넘어가고 라틴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아랍어등등 총 15개 국어 정도?”
“마,맙소사...! 진우 너 천재구나?!”
“하,하 천재는 무슨...! 그냥 언어능력이 조금 뛰어난 편이죠.”
“그,그게 조금 뛰어난 편이면 엄청 뛰어난 정도는 어느 정돈데?!”
“하하, 그게...그렇게 되나요?”
총 15개 국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는 마리아교수님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근데 저희가 이런 것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게 아니잖아요, 교수님?”
“아! 그렇지! 미,미안 너무 흥분해서 그만...”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이야기하자 그제야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떠올린 마리아 교수님이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런 교수님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나저나 교수님의 고민은 뭔가요?”
“으음...”
사소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본론을 꺼내자 마리아교수님이 살짝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엄지손톱을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많이 망설여지나 보다. 나는 그런 교수님의 모습에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약한 암시로 마리아교수님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감을 높이면서 말이다.
“괜찮아요. 교수님 지금 여기서 저한테 한 말은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리고 교수님도 제 비밀을 꼭 지켜주시고요...!”
“후훗, 그래, 그럼 진우를 믿고 마음 편히 이야기할게”
“예, 교수님”
암시의 효과인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자는 내 말 때문인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말문을 여는 마리아교수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교수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진우,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됐잖아? 그래서 한국말도 서툴고 같은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잘 적응도 못하겠고...”
“..........”
“학생들을 가르치긴 하는데 가끔씩 질문을 해올 때 대답해주면 내가 뭘 잘못 대답했는지 웃는 학생들도 있고, 꼭 내가 지나갈 때마다 누가 뒤에서 내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교수생활하기가 많이 힘들어...고향 생각도 나고...”
“아...그러세요?”
“으응, 게다가 한국에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어서 하숙집 같은데서 혼자 생활하는데 사람들이랑 말이 안 통하니까, 어쩔 때는 꼭 세상에 나 혼자만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
“저런...미국에 계신가족이나 친구들이랑 통화라도 하시지요...”
“으응? 아, 하긴 하는데...아무래도 다들 직장이 있고, 바쁘다보니까...특히나 교수라는 직업이 의외로 쉴 시간이 별로 없거든...게다가 퇴근시간이 되면 거기는 한밤중이라 전화하기 미안하기도 하고...”
“으음...!”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이는 마리아교수님의 모습에 나는 교수님의 이야기가 끊기지 않도록 맞장구를 쳐주거나 호응을 해주며 교수님의 상태를 진단했다. 솔직하게 전문지식이 없는 내가 진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내 소견으로는 교수님은 지금 가벼운 향수병과 업무부적응을 함께 겪고 있는 것 같다.
홀로 타지에 들어와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생활하며, 외국인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관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하나 만들 수 없었고, 그렇다고 고향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연락하자니 엄청난 시차 때문에 연락하기 꺼려진다. 더군다나 언어적인 문제 덕분에 사소한 오해가 일어나거나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한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온통 한국인이 다보니 교수님을 지나가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교수님의 귀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로 들릴 뿐이다. 그 덕분에 약간의 피해망상증도 겪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교수님의 고민과 이런저런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정도 교수님의 상태를 파악했고, 교수님의 마음에 꽁꽁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한바탕 털어내고 후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떠세요...? 한결 마음이 편하시죠?”
“으응? 응...!”
“후훗,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미,미안해 진우야,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아서...”
“아...! 아니에요, 저 다른 사람이야기 들어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그러니...?”
“예. 그보다...”
너무 자기 이야기만 한 것 같다며 미안해하는 마리아교수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주제넘지만 교수님의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주,주제넘다니...오히려 이쪽에서 고맙지...! 이렇게 마음 편히 이야기한 것 얼마만인지 모르겠는 걸?”
“하하하...그래요? 아무튼...현재 교수님의 고민을 해결해 줄 방법은 아무래도 친구...를 사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친구...?”
친구를 사귀라는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마리아교수님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 친구요. 그것도 교수님의 속마음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베스트 프렌드’요. 지금 교수님은 홀로 타지 땅인 한국에서 생활 하시다보니 이런저런 고충이 많을 거에요.”
“으응...!”
“때문에 교수님의 고충을 헤아려줄 수 있는 사람과 교수님을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죠. 아까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 놓고 이야기한 게 오랜만이라고 하셨죠?”
“응.”
“후훗, 바로 그런 이유에요 인간은...아니 사람은 꽤나 감수성이 풍부한 동물이라 누군가에게 항상 위로받고 싶어 하고, 기대고 싶어 해요. 특히나 교수님처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을 더더욱이요. 하지만 교수님은 지금 타국에 와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혹은 지인이 없어서 그런 위로 같은 걸 받지 못했죠. 그래서 가슴속에 안 좋은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울해지거나 괜히 다른 사람이 나 몰래 뒤에서 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그,그래...?”
“예, 뭐, 사실 딱히 위로 받거나, 기대거나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교수님이 저한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한테 교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지금 저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후련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처럼요.”
“아...!”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마리아교수님이 작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 거리는 모습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좀 민감한 이야기지만...”
“..........?”
“이왕이면 남자친구를 만들어보세요. 그냥 친한 친구보다는 훨씬 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 쪽이 났거든요. 사람들은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이 위로받고 있다, 관심 받고 있다, 보호받고 있다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대화와 함께 그...육체적인 접촉이 가능한 쪽이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보실 수 있거든요. 뭐, 그것도 우선적으로 교수님의 마음에 들어야겠지만요.”
“으음...! 자,잘 알았어. 진우야. 그리고...고마워...!”
육체적인 접촉이라는 대목에서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는 그런 교수님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핫, 뭘요...! 뭐 정 그러시면 나중에 밥이나 한번 사주세요. 맛있는 걸로.”
“알았어, 나중에 밥 한번 사줄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자, 그럼...오늘 상담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상담사 ‘강진우’였습니다.”
“푸훗! 고마웠어요. 상담사님, 전 마리아, 마리아 가든이에요.”
나중에 밥 한번 사달라는 말에 피식 웃으며 흔쾌히 대답하는 마리아교수님에게 익살스럽게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하자 교수님이 웃음을 터뜨리며 악수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렇게 뜻밖의 인연을 받아들였다. 마리아 가든이라는 인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