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회: 최면, 그리고... -->
-위이잉...!
“음...? 어머! 진우야 오늘은 조금 일찍왔네?”
“아...예, 뭐...여기 일단 반납이요.”
“응! 잠깐 자리에 앉아 있어, 따뜻한 차 한 잔 가져다줄게.”
“예...”
도서관에 들어오기 무섭게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혜림누나가 나를 위해 빼놓은 신간을 들고 지정석이라고 팻말을 써 붙여놓은 자리에 가서 털썩 앉았다.
“하여튼...이것 좀 떼라니까...”
채음진경의 인연으로 혜림누나를 집까지 바래다준 게 인연이 되어 꽤나 친해진 나와 혜림누나.
내가 항상 도서관에 올 때면 차를 내오거나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게다가 도서관 유일한 단골이라며 이렇게 내 지정석까지 만들어버린 혜림누나의 오지랖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없는 도서관을 혼자 지키고 있자니 심심했던 건지, 아니면 원래 정이 많은 건지 친근하게 다가오는 혜림누나였다.
-탁...
“자, 따뜻할 때 마셔, 방금 내린 원두라서 향이 좋을 거야.”
“고마워요, 누나”
커피의 진한향이 물씬 느껴지는 원두커피를 건네는 혜림누나에게 싱긋 웃어준 후에 나는 누나가 끓인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흐음...향이 좋네요. 이거”
“그치? 친구가 외국에서 보내준 건데 먹을 만하더라고...”
“그래요?”
“응! 아참 그보다...!”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고는 싱긋 웃는 혜림누나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고는 한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면서 커피를 마셨다. 뭐 주로 얘기하는 것은 혜림누나였고 나는 그저 듣는 입장으로, 책을 보며 건성건성 대답을 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꽤나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쉼없이 재잘거리던 혜림누나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지 조용해 졌다.
“.......?”
보통 한번 떠들기 시작하면 내가 듣건 말건 적어도 2시간이상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혜림누나가 고작(?) 30분 만에 조용해졌다는 사실에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누나를 바라봤다.
“저,저기 진우야 그래서 말인데...”
“예...?”
“무슨 방법이 없을까...? 머리가 좋은 너라면 왠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거두절미하고 얼굴을 붉히며 은근한 기대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나는 멍하니 누나를 쳐다보았다.
혜림누나가 내가 책을 읽는 사이에 서론과 본론을 이야기 했겠지만 책을 보며 건성으로 대답해버린지라 그 내용이 머릿속에 거의 없었다. 대충 떠오르는 것은 ‘크기’, ‘성형수술’ 뭐 이러한 단편적인 것들이라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하아아...! 너 또 책 보느라 내 얘기를 하나도 안 듣고 있었구나...?”
“아하하...예...”
누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내 모습에 깊은 한숨을 쉬며 새치름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뜨끔해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혜림누나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삐졌다는 뜻이었다.
“정말이지 너는...!”
“아하하...죄송해요, 누나.”
“됐어, 어차피 한두 번 일도 아니니까...”
-홱...!
한두 번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팔짱을 끼고 상체를 홱 돌려버리는 혜림누나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오려했지만 지은 죄가 있는 나로서는 그저 묵묵히 참아내며 누나를 달랠 뿐이었다.
“에이,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그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라면 알고 있을 것 같다니요?”
“칫! 이,이번 한번만이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너하고 말도 안 할거야!”
“예이, 예이!”
뭐, 나야 혜림누나가 말을 안 걸어온다고 해도 손해를 볼게 없지만 그것 입 밖으로 꺼냈다간 무슨 불상사가 벌어질지 잘 알기에 그저 싱긋 웃었다.
그러자 혜림누나는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차례 쏘아보다가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붉히며 팔짱을 꼈던 손을 풀고 가슴어림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이거 말인데...”
“옷이요...?”
누나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새하얀 레이스가 단정한 모습으로 달려있는 하얀 블라우스가 있었고 나는 아무생각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아,아니! 이,이거!”
“도대체 뭘...?”
누나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나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혜림누나의 행동이 명확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누나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민망하게 스리 가슴어림을 가리키는 건지...어? 잠깐, 가슴어림? 가슴? 혹시...!’
“가슴...이요?”
“그,그래! 가슴!”
빙고!
혜림누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절벽가슴에 대한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 절벽가슴이 어쨌다는 건지...!
“그게 왜요...?”
“그,그게 말이지...”
비록 완전 평면을 자랑하는(?) 혜림누나의 절벽가슴이라지만 아무래도 남자인 ‘내’게 여자인 ‘혜림’누나가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많이 부끄러웠는지 차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혜림누나였다.
“호,혹시 조,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가슴이 커질 방법이 없을까하고...”
“예...?”
가슴에 근육을 붙이는 방법이라면 모를까 남자인 내게 ‘가슴이 커지는 방법’을 물어오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건 혜림누나도 마찬가지...!
“아,알아! 나도 안다고! 너,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왜,왠지 너라면 알고 있을 것 같거든...!”
“아, 그,그래요...?”
“으응...!”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꺼냈으면서도 많이 어색한지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하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색한건 서로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내게 이런 낯 뜨거운 이야기를 꺼낸 혜림누나의 용기가 가상해서 입을 열었다.
“그냥...수술하시면 되잖아요. 요즘에는 기술이 많이 좋아져서 티도 안 난다는데...”
“나,나도 알아봤는데...그게 말이지...아,아무리 기술이 좋아지고, 실리콘을 많이 넣는다고 해도 B컵 이상은 무리라고 하더라구...”
“........”
정말 할 말이 없다.
실리콘을 아무리 많이 넣어도 가슴 사이즈가 B컵 이상이 안 된다니...!
도대체 혜림누나의 가슴사이즈는 몇이 길래...!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그리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 죽으면 관속에 실리콘 덩어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게 더 싫기도 하고...”
“........”
하,하기야...수술을 해서 가슴을 키운다고 해도 실리콘은 썩지 않으니. 나중에 죽어서도 그대로 일게 아닌가. 아무튼 자신의 콤플렉스를 고치기 위해 이리저리 생각하고 알아봤는지 막힘없이 대답하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누나가 장난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나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나의 태도가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운동 같은 거는요?”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어...언젠간 커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크,크흠! 그럼, 호르몬 주사는...?”
“그것도 7년 전부터 3개월 주기로 맞고 있긴 한데 별로 효과가 없더라고...”
“시,식이요법은요...?”
“식단은 항상 고담백질로 하고, 유제품을 틈틈이 먹고 있지만...”
“...민간요법은요...?”
“딸기우유는 물대신 마셔...”
“..........”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대답들이다.
결론적으로 해볼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해봤고, 지금도 꾸준히 행하고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는 것! 의학적으로나 민간요법으로나 말이다.
그렇게 하고도 누나의 가슴은 절벽! 결국 나는 누나에게 상당히 실례가 돼는 질문 밖에 할 수 없었다.
“누나...”
“으응...?”
“여자 맞긴하죠...?”
혹시 혜림누나가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남성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내가 그런 질문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황당해하던 혜림누나가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다,당연하지! 가,가슴이 이래서 그렇지 나,나도 엄연히 여자라고! 오늘도 생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헙!”
“여자가 맞긴 맞나보네요...”
어쩐지 어디선가 피 비린내가 나는 것 같더라니...
아무튼 여자라면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을 울컥해서 말해버린 혜림누나가 새빨게진 얼굴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얼굴로 나를 흘낏흘낏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혜림누나가 틀림없는 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이미 해볼 건 다 해봤네 뭐... 약물치료에, 운동에, 식이요법에, 민간요법까지...가장확실한 방법이 수술이지만 그건 본인이 싫다고 하고...흐음...나라고 해서 뭐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저,저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우,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나한텐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 응? 진우야...!”
내가 방법이 없다고 말하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하는 혜림누나의 모습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아무리 수십만 권의 책을 읽고 불면증으로 인해 비상식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나라지만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아니, 뭐 저라고 해서 뭐 딱히 방법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혜림누나에게 방법이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