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 어우동 -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점점이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
랫도리가 잘려 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에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축축한 액체가 폭포처럼 쏟
아지며 시트를 적셨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아… 아줌마! 아아… 아아악[email protected]# 아줌마!!"
공간을 가르는 날카로운 비명에 이천댁이 놀란 눈으로 뛰
어들어왔다.
"이, 이런! 색시! 색시[email protected]!!# 정신차려! 아이고… 예정일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이게 왠일이람? 양수가 터졌
네…"
"아… 아줌마… 진통이… 진통 간격이 너무 짧아요. 어서
병원에…"
"그, 그래! 알았어! 참아! 조금만 참아!"
몇 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진통에 배를 움켜쥔 혜영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구
급차가 도착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만 느
껴졌다.
*
홀가분함… 무거웠던 몸 한쪽이 쑥 빠져나간 허전함. 혜
영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었지만 만삭이었던 배가 홀쭉
하게 들어간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고생했어, 색시…"
민기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혜영의 이마를 자신의 손수건
으로 닦아주며 온유한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뒤에는 민기
의 아내가 서 있었다. 그녀 또한 만삭이었다. 이제 곧 그녀
도 아이를 낳을 것이다.
"아이는… 아이들은요?"
"아이가 궁금하지? 축하해요. 아들 딸 쌍둥이라우. 아이들
이 아빠를 닮아 예쁘고 눈매가 곱상해. 얼굴 윤곽도 아빠를
빼다 박은 것 같더라구…"
민기의 어머니가 흡족한 듯 말했다. 아들과 딸 쌍둥이. 혜
영은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되뇌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
제 그들은 선택할 것이다. 두 아이 중 하나를. 그래서 완벽
한 가족을 만들려 할 것이다.
"사실… 이건 미리 말하면 안되겠지만 우리 며느리가 낳
을 아이가 딸이라우. 박사님이 살짝 귀뜸 해주셨어요. 그래
서 말인데… 우리 아이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을 꺼야. 마
침 예정일이 큰 차이가 없으니 조만간 아이를 낳으면 그때
데려갈까 해. 쌍둥이를 낳은 것처럼 말이지."
"……"
"에이그, 이런 주책하고는… 금방 몸 푼 산모에게 이 무
슨 말이람! 신경쓰지말고 푹 쉬도록 해요. 알았지?"
"아이가… 보고 싶어요."
혜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이천댁을 돌아보았다.
아이를 데려오라는 무언의 지시인 것 같았다. 이천댁은 웃
으며 병실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언뜻 봐서는 잘 모를 정도
로 똑같이 생긴 쌍둥이 아이가 혜영의 품에 안겨졌다. 눈을
감고 입술을 오물거리는 아이들은 아직 엄마를 알아보지 못
하는 듯 했다.
아이가 주먹을 들어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이자 혜영의 가
슴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눈물이 되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혜영은 가슴을 풀어 헤쳐 아
이에게 초유를 먹이기 위해 젖가슴을 드러냈다.
"초유… 먹일라고?"
"네… 어느 쪽이 사내아이죠? 사내아이부터 먹일께요. 곧
제 곁을 떠날텐데 해줄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네요. 초유를
먹어야 아이가 튼튼하게 자란다고 하더군요."
민기의 어머니는 두 아이 중 하나를 혜영에게 안겨주었
다. 그 아이가 바로 사내 아이였다.
"이름을 유진이라고 했수. 여자 이름같기는 하지만 유명
한 작명가 선생님이 지어주신거라우…"
혜영은 아이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 보았다. 젖무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힘차게 모유를 빨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 내리던 혜영은 녀석의 손
가락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으스러질 것
만 같은 연약한 손가락과 뼈마디가 가슴이 찡하도록 사랑스
러웠다.
*
틱틱-
끝까지 돌아가 버린 테이프가 듣기 거북한 소음을 냈다.
나는 혜영에게 잠시 쉬도록 권하고는 새로운 테이프를 꺼내
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후우… 이럴 땐 저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져요."
"어머… 미연씨,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절대 배우지 마세
요. 후후…제 이야기가 너무 답답하죠?"
"아뇨. 답답한 게 아니라, 뭐랄까… 속상해서요. 아직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내심 속상하고 서글퍼요.
돈으로 무엇이건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일련의
행위로 팽배해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혜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겪은
일이 비정상이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던 것이다.
"미연씨라면… 아마 저와 같은 길을 택하지 않았을 거예
요. 저처럼 나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이 마지막 선택으로
그런 길로 가는 걸꺼에요. 궁지에 몰린 사람은 무엇이건 붙
잡아 살아 남으려 하죠. 더 이상 길이 없었어요.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그것이 쉽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더
이상 나를 지탱할 길도 없었고… 당장 어떻게 해서라도 살
아남아야 한다는 위기감에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
죠. 인간으로써의 도리라던가… 엄마로써의 모습이라던가…
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
무 늦었던 거예요."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필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동안
몇 번이고 같은 벽에 부딪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만약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나였다면… 민혜영처럼
대리모가 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인가. 그리고 뒤늦게 자신
이 사랑했던 남자라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았을
때 순순히 내줄 수 있을 것인가.
"저였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혜영
씨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요. 자책하지 마세요. 분
명… 저도 그랬을지 몰라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 역시 그녀와 같은 길을 가게 되었
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때로 피할 수 없는 선택을 강
요하기 때문이다. 혜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이야
기를 계속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