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씨받이의 의무
- 어우동 -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길고 지루하게 느껴
지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불안감이 가중되었기 때문일 것
이다. 소변이 시약을 적시며 안쪽으로 보라색 선이 생겨났
다. 그리고… 좀 더 위쪽으로 또 한 개의 보라색 선이 생겨
나며 임신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이구!! 경사 났네! 임신이여! 임신!"
이천댁은 혜영이 들고 있는 시약을 받아 흔들며 소리쳤
다.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혜영의 얼굴은 어두웠다.
"왜 그래? 임신인 게 싫어? 에휴… 쯔쯔. 서방님하고 헤
어지게 될까봐 그러는겨? 할 수 없잖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어서 준비해. 병원에 가
보자고. 응?"
혜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가서 정확하게
검사를 받는 것이 보다 확실할 것이다. 어쩌면 임신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는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임신만 아니라면 민기와의 관계가 조금 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혜영의 마음처럼 결과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태아는 혜영의 지난 생리일 이후, 배란일에 임신되어
6주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기쁨에 들뜬 이천댁은 병원
에서 곧바로 민기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
다.
민기의 어머니는 전화를 받은 즉시 아파트로 쫓아왔다.
그녀는 태교를 위한 온갖 책들과 아이 옷가지 등등을 펼쳐
놓으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마치 자신의 며느리라도 되는
양 잠시도 쉬지 않고 '기특한 것, 기특한 것'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혜영은 견딜 수 없는 비애감에 사로잡혔다.
"사모님… 축하드려요! 이제 손자 안아 보시겠어요!"
"에그, 이천댁이 고생이 많았수! 앞으로는 산모를 위해 더
고생해야 할텐데… 이거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하누, 하하하
하…"
이천댁과 민기 엄마의 호들갑에 혜영도 못이기는척 웃기
는 했지만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혜영은 민기를 생각했
다. 민기가 임신 소식을 들으면 어떤 말을 할까. 어떤 표정
을 지을 것인가.
당장 오늘밤이 문제였다. 이제 혜영이 임신하였으니 오늘
부터는 민기가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민기
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그의 옷들을 꺼내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치, 해외 전장에서 이긴 장군의 본국 귀환 짐을
챙기는 어머니의 얼굴처럼 당당하고 뿌듯한 얼굴이었다.
"우리 민기가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응? 색시… 이게 모
두 색시 공이우! 내 잊지 않고 보답할꺼야. 아이고… 언제
10달 채우누, 응? 이천댁, 그러고 섰지 말고 이 색시 좋아하
는 음식이라도 좀 알아서 챙기고 그래봐. 내 김 기사 시켜
서 준비하라고 할 터이니… 아니면 이천댁이 알아서 장을
좀 보든지. 아냐아냐, 그럴 것이 아니라 한의원에서 보약이
라도 좀 지어야겠어. 암암~! 아이고… 좋아라! 세상이 달라
져 보이네 그려…"
민기의 어머니는 흥분한 나머지 두서없는 말들을 끊임없
이 쏟아놓았다.
"저는 건강해요. 보약까지 먹지 않아도 될텐데…"
"무슨 소리유? 아이 좋으라고 먹는 거지, 무슨…? 쓸데없
는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해요. 이봐요, 이천댁! 김 기사보
고 차 대기시키라고 말해요. 청담동 김 의원님께 가야겠어.
김 의원님이 용하거든. 후후후…"
혜영의 뇌리에 서늘한 생각이 스쳤다. 민기 어머니의 말
이 맞았다. 지금 환대를 받고 있는 것은 혜영 자신이 아닌,
바로 뱃속의 아이인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준비할게요."
민기의 어머니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하며 민기의 옷가
지들이 담긴 가방을 이천댁으로 하여금 차에 싣게 했다. 그
모든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혜영은 이제 혼자가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잊어버려… 어차피 임신을 목적으로 이렇게 된 거잖아."
혜영은 약이 담긴 탕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미소를 짓는 것조차 힘겨웠다. 아무런 예고
없이 민기와 헤어지게 된 사실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었다.
"약 다 식겠네. 어서 마셔요. 일부러 먼 곳까지 가서 지어
온 약인데…"
민기의 어머니는 일부러 약을 첩으로 지어와 이천댁에게
정성을 다해 달이도록 시켰다. 때문에 집안에는 한약재의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혜영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탕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걸 마시면… 아이가 건강해질까요? 정말 아이에게 좋
은 걸까요? 의원님 말씀으로는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더군
요."
"의원이 그랬으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그걸 의심하누?
그냥 마음놓고 편안하게 마셔요."
검은 액체는 적당히 식어 있었다. 혜영은 마치 사약을 마
시는 심정으로 쓰디쓴 그 약을 들이켰다. 곁에서 지켜보던
이천댁이 지레 얼굴을 찡그리며 편강 한 조각을 내밀었지만
혜영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견딜만해요. 별로 쓰지 않은 걸요."
"그래요. 용하네. 몸에 좋은 거라니 쓰긴 쓸텐데… 입에
쓰지 않은 약이 어디 있어. 아가씨가 잘 견디는 거지. 기운
내요."
"네…"
혜영이 힘없이 대꾸하고는 돌아서 주방을 나올 때였다.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혜영아…"
"오빠…"
민기였다. 혜영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눈물이
솟았다. 민기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
"이야기 들었어. 임신이라고…"
"응…"
"너무 걱정하지마. 우린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꺼야.
걱정하지마…"
*
언제 왔는지 유림이가 혜영의 옆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
었다. 혜영은 유림이를 무릎에 누이고는 가만히 두들겼다.
아이는 엄마의 손길을 받으며 잠들고 있었다.
"오빠는 걱정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우리들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죠. 오빠는 가
끔… 아주 가끔 들렀어요. 이천댁 아줌마가 우리들의 과거
를 모두 알고 있으니까 적당히 눈감아 주곤 하셨죠."
"다행이네요. 그나마 아줌마가 도움이 되어 주셔서…"
"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분이셨죠. 하지만 그런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요."
"그럼… 무슨 일이라도…"
"훗… 뻔하죠. 오빠가 아무리 조심해서 나를 찾아온다고
해도 결국 들킨 거죠."
"저런…! 그럼 어머님에게?"
"아뇨. 그랬다면 차라리 쉬쉬하며 덮어두려 했겠죠."
"그렇다면 부인에게?"
"네. 입덧이 심했었어요. 그래서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
고 앙상한 임산부가 되었었죠. 남들보다 오래했구요. 뱃속에
아이가 둘이다 보니 두 배로 했나봐요. 후후…"
"쌍둥이인 것은 아셨나요?"
"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정기적으로 초음파 검사
를 하다 알았죠."
"그랬군요. 그럼… 그쪽 집안에서는 오히려 좋아했겠네
요."
혜영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림이는 이
미 잠들어 있었다. 나는 혜영이 잠시 말을 멈추고 잠든 유
림이를 방에 눕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이를 눕혀
놓고는 미리 만들어 놓은 레모네이드를 가져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