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생리가 끝나고
- 어우동 -
딩동딩동… 쾅쾅쾅[email protected]#
요란한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유림이었
다. 혜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유림이의 출현으로 이야기는
잠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유림아… 엄마가 여자는 얌전해야된다고 했잖니. 그렇게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고 그럼 어떡해?"
혜영의 꾸지람에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유림이 나를 보
고는 멋쩍게 웃었다. 어린 마음에 다른 사람 앞에서 엄마에
게 꾸지람들은 것이 못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이모한테 인사 안해?"
"으응, 이모? 아아, 저번에 왔던 이모구나! 그렇지 엄마?"
"그래, 이모에게 인사해야지. 이모가 보면 유림이는 인사
하는 법도 모르는 줄 알겠어. 그러니까 얼른 예쁘게 인사
해."
그제야 유림이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인형을 아이 얼굴 앞에서 흔
들었다.
"안녕하세요?"
"유림이도 안녕? 그 동안 잘 지냈어?"
"와아!! 이거 제꺼에요? 와아아…!"
"응, 유림이 꺼야. 예쁘지? 이렇게 누르면 소리도 들려."
아이의 인사에 대답하며 인형의 몸통 부분을 힘주어 누르
자 "I love You!"하고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림이는 놀라움으로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히히히… 엄마! 이거 봐요! 소리도 드려! 알러뷰? 엄마,
사랑한다는 말 맞지? 그치?"
아이는 신기하게도 인형의 "I love You" 소리를 알아들었
다. 그 소리가 신기한지 연거푸 인형의 몸통을 눌러 "I love
You" 소리를 들었다.
"마음에 들어? 이건 유림이 가방에 매달고 다니라고 이모
가 선물하는 거야. 다음에는 더 큰 인형 사줄게. 유림이가
엄마 말 잘 듣고 착한 어린이가 되면. 알았지?"
"나 지금도 착해요…"
유림이는 영악했다. 믿지 못하면 엄마에게 물어 보라는
듯 엄마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알아. 하지만 엄마가 조금 전에도 유림에게 말씀하셨잖
니. 문 두드릴 때 살살 두드리고 초인종 누르라고. 그러니까
유림이가 예쁜 아가씨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응?"
"에이……"
"예쁘고 착한 아가씨가 되야 이 다음에 멋있는 왕자님에
게 시집가지."
"난 시집 안가! 엄마랑 살 꺼야!"
나는 어린 유림이의 대꾸에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
가 멍해졌다. 생각지 못한, 또한 아이답지 않은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유림아…"
곁에서 지켜보던 혜영의 얼굴이 무거운 표정으로 뒤바꼈
다. 그러나 아이는 가방과 인형을 들고 제 방으로 총총 걸
음으로 사라졌다.
"아이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네. 이해해요. 저도 놀랐는걸요. 엄마의 쓸쓸함을 아는
것 같아요. 유림이는 무척 조숙하고 착한 아이네요. 혜영씬
행복하시겠어요."
우울한 빛을 띠고 있는 혜영을 위로한답시고 꺼낸 말이
고작 이것뿐이었다. 다른 말로는 특별히 위로할 방법이 없
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 언어의 한계에 부딪친 내
자신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이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유림이의 저런 모습을 볼 때
마다 대견스럽다기 보다 측은해지고 불쌍해져요. 아이가 아
이답게 자라지 못하고 어른의 모습으로, 어른들이 해야할
고민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저렇게 작은아이에게 내가
벌써 짐이 되어 있군요."
"너무 그렇게 비관하지만 마세요.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것만으로 우선은 행복하게 생각하세요."
"그래야죠. 유림이가 모난 곳 없이 건강하고 발랄하게 자
라주는 것에 만족해야지요."
"저… 외람 된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유림이 아빠는 지
금도 만나고 계신가요?"
인터뷰를 하다보면 종종 괜한 질문을 했나보다, 하며 이
미 뱉어낸 말에 후회할 때가 있다.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어차피 자연스레 흘러나올 이야기가 나의 호기심에 못 이겨
불쑥 튀어나올 때는 늘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차분하게 기다리면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네… 종종 만나요."
"그럼… 유진이는…? 그 아이도 만나시나요?"
"유진이는… 두 번 봤어요. 태어났을 때 병실에서 처음
봤고…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몰래 봤어요.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죠. 우리 유림이와 쌍둥이였으니까요."
"그랬군요. 무척 보고 싶으셨겠어요."
혜영의 표정은 오히려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일에
초연한 듯한 얼굴로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보고 싶죠. 유진이도 제 아이인 걸요. 유진이와 유림이
두 아이 모두 빼앗길뻔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유진이가 제
곁에 남아 있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유진이는 아빠와 살고 있는 거니까. 친 아빠잖아요. 다른 남
자도 아니고…"
"그래도… 그렇게 편하게 말씀하시는 게 잘 이해되지 않
는군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유진
이가 보고싶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의 담담한 표정이 의아스러웠다. 아이를 빼앗긴,
아니 어쩌면 거래의 상품으로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친 엄마로써 자식이 그립지 않다는 것이 못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미연씨… 유진이도 제게 올 거예요. 곧…"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대를 이을 손자를 필요로 했던
그 쪽 집안에서 순순히 유진이를 내준다는 것인가? 나는 뜨
악한 표정으로 그녀가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길 바랄 뿐이었
다.
*
혜영은 불안한 마음으로 달력에 그려진 숫자들을 꼼꼼히
헤아렸다. 하루 이틀… 그렇게 헤아린 숫자들이 50일을 넘
어 60일에 육박하고 있었다. 마지막 생리를 시작한 날로부
터 약 60일. 그렇다면 이미 원래의 생리 주기를 지나쳤다는
말이다.
"아줌마…! 아줌마…"
"왜? 무슨 일 있어?"
"저어… 그거 있어요? 임신진단하는거요."
이천댁의 얼굴에 번개처럼 미소가 스치는 듯 했다. 그녀
는 곧 환한 웃음을 퍼뜨리며 혜영의 아랫배를 훑어보았다.
"왜? 임신인 것 같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리가 없어요. 그 동안 잊었는
데… 벌써 60일이 되어가고 있어요."
혜영은 드디어 찾아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
다. 임신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라 민기와의 예견된 이별이
두렵고 불안했던 것이다. 지난 번 생리가 끝나고 배란기때
민기가 참지 못하고 체내 사정을 했던 것이 임신이라는 결
과로 나타났던 것 같았다.
민기가 원망스러웠다. 단 한번인데 괜찮을 것이라며 급한
마음에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던 민기의 여유 만만이 끝내
이별을 몰고 온 것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