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그와의 오럴 섹스 되살리기
신경질적인 칼질 소리가 주방에서부터 끊이질 않았다. 분
명 혜영이 임신이 아닌 것에 화가난 이천댁이 도마에 화풀
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유… 정말 이상도하네. 병원서는 아무 이상 없이 튼튼
하다고 하는데 어째서 임신이 안되는겨. 서방님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건가… 아휴우… 나도 하루라도 빨리 이 감옥
을 벗어나야 하는데…"
혜영은 이천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지금 혜영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
다. 임신이 확인되고 10개월을 채워 아이가 태어나면 그녀
의 종살이도 끝이 날텐데 아직도 임신 소식이 없으니 시간
이 길어지는 것에 짜증스러울 터였다.
"아줌마… 미안해요. 어떻게 제 맘대로 되질 않네요. 정말
미안해요."
"아냐. 따지고 보면 이게 어디 아가씨 탓이우? 쯔쯔… 나
도 이거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못할 짓이구먼. 어휴… 나도
아가씨 만한 딸년이 있는 여편네여. 말만한 처녀 가둬놓고
씨받이 만들었으니… 이 죄를 어찌 받을지 모르겠어. 어휴
어휴… 이 년이 죽일 년이지. 그 놈의 돈 때문에… 어휴어
휴…"
이천댁의 넋두리에 울적해진 혜영은 허공을 응시한 채 식
탁 앞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아가씨… 미안하우. 응?"
이천댁이 제법 시큰해진 콧등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녀의
눈 속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내가 지켜봤는데… 아가씨가 무척 착하고 선해서 어쩌다
이런 일까지 하게 됐나 싶더라구. 우리 딸년 같은 생각이
드네. 어이구… 나두 주책이지. 후후"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거 알아요. 고마워요… 아줌마."
"고맙긴. 고생이야 아가씨가 하지. 서방님이 올 때마다 아
가씨가 고생하는 게 영 안됐어. 마음도 없는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다
니 그 동안 힘들게 살았을 텐데… 하긴 그래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겠지. 이해하우. 젊은 사람이 오죽 힘들었으면…
쯔쯔"
전화 벨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천댁은 전화벨이
울리자 잰걸음으로 거실로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사모님이세요? 네… 그럼요. 여긴 괜찮아요. 걱정
하지 마세요. 네… 네… 그러게요. 소식이 빨리 와야할텐
데…"
이천댁이 말하는 '소식'이라는 말은 분명 '임신'을 말하는
것이리라. 혜영은 이천댁의 등뒤에서 통화 내용을 엿듣는
것이 못내 찜찜한 생각이 들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
시 후, 이천댁이 방문을 노크했다.
"아가씨… 나야."
"네. 들어오세요."
이천댁의 얼굴에는 예상치 못한 수심이 가득했다. 혜영은
설마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임신이 잘 이루
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대리모를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가씨… 어쩌지? 사모님이…"
"무슨 일인데요? 말씀해보세요. 뭐죠? 왜 그러세요?"
조급함을 감추지 못한 혜영은 이천댁의 말허리를 자르며
재차 다그쳤다.
"저… 사모님이 서방님을 한 달 동안 이곳에서 머무르게
하시겠대. 임신이 될 때까지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구
먼…"
혜영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이천댁은 분명 자신을
염려하고 동정하고 있었지만, 임신이 될 때까지 민기가 자
신과 함께 머무른다는 것은 오히려 반가운 소식이었다. 머
릿속 가득, 일주일전 그의 페니스를 입안에 가득 물고 애무
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천
댁의 눈에는 혜영이 당황한 것으로 보여졌다. 혜영은 그런
이천댁의 염려와 걱정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그와 지냈던
일주일전 그 날 밤의 뜨거웠던 오럴 섹스만을 되살릴 뿐이
었다.
*
그제야 혜영이 말했던 '좋은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임
신하게 되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겠지
만, 오히려 그것이 두 사람을 일정기간 동거할 수 있는 행
운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정말 기쁘셨겠어요."
"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기뻤죠. 물론… 저도 여자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부인에게는 좀 미안했어요. 하지만 그런
미안함 때문에 기분을 망칠 만큼 너그러운 여자는 못되나봐
요. 그이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전화를 했더군요. 이천댁
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꿔주었지만 그는 듣기만 하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어요."
여자의 마음은 아니, 여자의 씀씀이는 남자보다 작다. 보
다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그녀는 민기와의 완전한
결합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소박한 마음은 단
한 달이나 일정 기간의 동거만으로도 행복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사악한 마음으로 민기를 탐내었다면 어땠을
까. 민기가 이혼하기를 바랬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녀의 소
박한 마음 씀씀이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사
람의 마음은 작은 것에 만족하기보다 점점 큰 것을 바라는
쪽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 나 나 먹었어."
유림이었다. 유림이는 입가에 묻은 드레싱을 냅킨으로 닦
아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이는 입가를 닦아낸 냅킨을 아
무렇게나 구기지 않고 곱게 접어 휴지통에 넣었다.
"유림이는 정말 착하구나. 안 가르쳐 줘두 뭐든지 혼자
잘하네?"
"히히…"
나의 칭찬에 아이가 수줍은 듯 곱게 웃었다. 아이의 얼굴
중에서 적어도 절반은 아빠를 닮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모습에서 혜영의 모습을 골라내고는 아이 아빠의 모습을 조
각 맞추기 해보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낸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림아, 이제 피아노 학원 가야지. 선생님 기다리시겠다.
가방 챙겨서 얼른 다녀와."
"응. 엄마. 나 햄 해줄꺼지?"
"엄마가 햄 같은 거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구 했잖니.
대신 고기 갈아서 동그랑땡 해줄게. 됐지?"
아이가 뛸 듯이 기뻐하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
갔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며 퉁퉁 부어 있었던 흔적이 사라
진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예쁘죠? 후후… 자식 자랑하는 것은 바보 같지만 정말
유림이는 예뻐요. 제 딸이지만."
"제가 보기에도 예뻐요. 제 딸이 아니어두 예쁜 걸요. 후
후후"
그녀와 나는 제법 큰 소리로 웃었다. 기분 좋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유림이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혜영 자신이 천성적으로 우울함을 쉽게 벗어나려는 본
능을 타고났음이 분명했다.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를 옭아매
는 과거 따위에 연연하며 우울증에 걸릴 여자는 아니었다.
물과 같은 강인함이랄까.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고 산을
무너뜨리듯 그녀는 부드러운 여자였지만 그 못지 않은 강함
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