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아슬아슬한 위기
민기가 떠나는 이른 아침… 혜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
는 것이 두려웠다. 혜영은 대충 옷을 꿰어 입고 방을 나서
려는 그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초라하
게만 느껴졌다.
"그런 얼굴 하지마. 네가 여기 있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자주 들리도록 할게. 그리고 이것은 내 뜻이기보다 어머님
의 뜻이었잖아. 다행스럽게도 너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허
락된 관계인 이상 당당하게 올 거야."
"…네"
민기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서운해하는 빛이 역력한 혜
영을 따스하게 포옹하고는 다시 한번 속삭였다.
"사랑해, 혜영아. 예전에도… 또 지금까지도 널 사랑하고
있어. 비록… 우리가 헤어져 있었지만 다시 만났으니 앞으
로는 나를 믿어 줘. 알았지? 오늘 저녁에 올게. 기다리고 있
어."
"네."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내가 사다줄게."
"안돼요. 아줌마가 이상하게 생각할거예요."
"아참, 그렇군. 그래… 할 수 없지."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혜영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민기는 그 날 저녁 혜영
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이천댁 아줌마가 아침 일찍 잠들어 있는 혜영을 깨운 것
은 민기가 다녀간 뒤, 일주일쯤 지난 후였다. 이천댁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혜영에게 조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뭐, 뭐죠?"
"임신 테스트를 하는 기구래. 난 늙어서 사용법은 모르지
만 아침에 일어나서 첫 소변으로 하라고 하더군. 관계 후에
일주일이 지나서 하면 거의 100% 확실하다고 하니까… 오
늘 아침에 첫 소변을 받아서 실험해보우. 알았지?"
씁쓸한 마음으로 상자를 받아든 혜영은 때마침 느껴졌던
요의 마저 사라질 정도로 서글퍼졌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
었지만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임신이 아니면요?"
"아니면 할 수 없지. 서방님이 다시 올 거야. 만약 임신이
라면 다시 올 이유가 없잖우? 그러니까 어서 해봐요. 사모
님도 궁금해하셔. 좋은 소식이 들리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노
마님의 심정을 아가씨도 이해해주길 바래. 알았지?"
둔탁한 흉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나의 머리를 육
중한 무게가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임신이 아니어야한다.
그래야만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는 반반의 가능성에
혜영은 불쑥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현재 배란기였기 때
문이다.
손자를 바라는 노인이 씨받이 여인의 배란기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와 민기의 어머니는 임
신의 가능성을 높이고, 불필요한 정자를 낭비하지 않기 위
해(사실은 아들이 부인이외의 여자와 필요 이상의 관계를
갖는 것을 막기 위해) 배란기를 체크했던 것이다.
"아, 뭐 하는거유? 빨리 해보라니까…"
작은 상자를 손에 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으로 떠올랐다. 절반의 가능성이지만 임신
일 경우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는 소변이 아닌 다른 액체를
사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무엇을? 이천댁의 소변을 몰래 받아둔 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락날락 거리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
다. 또한 혜영 자신의 소변에 물을 섞는다는 것은 어차피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혜영은 미리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둔감함에 낭패감을 느
끼며, 오직 임신이 아니기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소변을 임신 진단 시약에 적셨다.
5초… 10초… 15초…
적셔진 소변이 시약이 묻어 번지며 보랏빛 선이 한 개 나
타났다. 임신 반응이 나타나려면 좀 더 기다려 소변이 시약
전체를 적실 때를 봐야만 했다. 지루한 시간, 만약 시계를
가져다 놓았다면 초침의 째깍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심
장이 멈추었을 것이다.
길고 지루한 시간 끝에, 드디어 시약이 완전한 반응을 혜
영의 눈에 보여주었다. 결과는… 임신이 아니었다. 혜영은
뛸 듯이 기쁜 마음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휴! 이봐 아가씨! 아직 멀었어? 빨리 나와봐! 응?"
쿵쿵…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며 이천댁이 재촉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러나 혜영은 밖으로 나가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만약 지금 밖으로 나가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웃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혜영은 수도꼭지를 돌려 차가운 물을 세면대 가득 받았
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억지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쁨으
로 붉게 물든 얼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봐! 아가씨!! 빨리 나오라니까? 왜 대답이 없는 거야!
어휴… 정말 답답해 미치겠네!"
"나가요~! 잠시만요, 지금 세수하고 있어요."
혜영은 느긋한 마음으로 얼굴에는 억지로 실망의 빛을 띄
운 채 이천댁이 기다리고 있는 거실로 나갔다.
"어때? 임신이우? 그것 좀 보여줘바! 응?"
혜영은 미안하고 머쓱한 표정을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시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미안해요. 임신이 아니에요. 어떡하죠…?"
임신 진단 시약을 받아든 이천댁의 얼굴에도 잔뜩 실망하
는 표정이 지어졌다.
"어쩌겠수?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 서방님과 새댁도 몇
년 동안 임신을 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금방 임신이 될라
구…. 나야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번에 임신이 되
었으면 아가씨가 덜 고생을 했을 텐데…"
"그러게요. 또 다시 곤혹을 치를 생각을 하니… 속상하네
요.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요. 아가씨가 참어. 내 얼른 사모님께 연락하고 서방
님을 오늘이라도 오시라고 할게."
"제발 그래주세요. 어차피 겪을 일이라면 빨리 치르는 것
이 나을 것 같아요. 매도 빨리 맞는 놈이 낫다잖아요. 하루
라도 빨리 임신을 하는 것이 저도 이 답답한 구속에서 풀려
나는 것이니까요."
혜영은 오늘이라도 당장 민기를 부르겠다는 이천댁의 말
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뻤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천역덕스
레 거짓말을 했다.
-그를 만나는 게 곤혹스럽다니? 아냐… 난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고 싶어.
아침 식탁을 준비하며 혼잣말로 넋두리를 하고 있는 이천
댁을 등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온 혜영은 민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밖에 있는
이천댁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소리없는 웃음이었다.
*
"그럼 그날 저녁 그 남자 분을 다시 만나셨겠군요."
"네. 그랬어요. 그 사람도 반가워하는 눈치였어요. 마음
고생이 많았는지 좀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이천댁에게 들
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윙크까지 해 보였으니까요."
"후후… 정말 아슬아슬하군요."
"하지만… 더 좋은 일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
마… 그런 좋은 일이 있을지 생각도 못했죠. 지금 생각하면
그와 처음 밤을 지낸 날부터 그를 다시 만나 함께 했던 시
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간들인 것
같아요."
"좋은 일이요?"
나는 그녀에게 있어 정말 좋은 일, 행운이라는 것이 무엇
일까 마음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민기라는 남자의 부인이 교
통사고라도 당해서 죽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이 이
혼이라도 한 것일까? 만약 내 입장이었다면, 그 이상의 행
복한 일이나, 행운은 없을 것만 같았다. 좀 사악한 면이 없
지 않아 있지만.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