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손가락으로 리드미컬하게
그가 건네준 디스켓에는 많은 양의 텍스트 파일들이 보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통신에서 만난 여자들과의 대화
내용을 갈무리 해놓은 것으로, 한 여자와의 대화는 두 개의
파일을 넘지 않았다.
"오늘이 두 번째 인터뷰로군. 내가 준 파일들을 열어봤
소?"
"네. 봤습니다."
"어땠소? 뭔가 PC통신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지 않았소?"
"어떤 쪽으로의 느낌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통신에 관해 꿰뚫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잘하
질 못해서…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저 준석씨의 이야기니까 이해하려 했을 뿐입니다."
준석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또한 그의 입을 통해 흘
러나오는 말 또한 간결하고 명료했다. 디스켓에 저장되어
있는 파일들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그의 모습과는 늘 반대였
다. 통신에서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그가 어찌하여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그는 현실 세계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가상 현
실 공간에서 이루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 세계에서
수줍음을 많이 타던 사람들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목소리를
키우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할 때가 온 것 같소."
"……"
"내가 통신이라는 공간에서 만난 수많은 여자들 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리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자 말
이오. 어쩌면 그녀를 통해 내 인생이 달라졌다고 해야할지
도 모르겠소.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겠지?"
그는 잠시 말을 끊으며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볼 수 있었듯이, 극히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있어 어색하지 않은 부자연스
러움이라면 그의 흡연 습관일 것이다. 담배의 절반이 재로
타버려도 그것을 떨어내지 않고 무심히 잊고 있는 그의 습
관. 더 없이 깨끗하고 정렬이 잘된 그의 공간과 빈틈없어
보이는 냉철한 모습을 가진 그가 지닌 유일한 오점 같은
것.
"엠마는 반신불수였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삼류 영화 같
은 이야기가 나에게도 생긴 것이지. 아마 당신이 들어도 웃
을지 모르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디스켓을 건네준 것인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오. 일단 그런 세계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고… 그 디스켓 말고 오늘은 두 번째
디스켓을 줄 것이오. 그것은 그녀와 나의 모든 대화들이 들
어 있소. 다른 사람들의 자료는 들어 있지 않을 것이오. 그
녀는… 내가 사이버 공간을 통해 만난 많은 여자들 중에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자… 남들이 유치하다고
할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고 말해야겠지…."
*
"엠마, 나이가 몇이지?"
"그걸 왜 묻는 거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아니 물론 그건 아니야. 하지만 어쩐지 당신 목소리가
어려 보여서…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거든. 후후, 혹시 미
성년자라면 내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것만 같아서 말야."
수화기 저쪽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고 어린
여학생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키득거림 같은 것이었다.
준석은 마음속으로 엠마가 분명 어린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
했다.
"나… 스무 살이에요. 미성년자는 아니에요. 이젠 됐나
요?"
"다행이군. 하지만 역시 어린것은 사실이군요."
"어머? 남자들은 어린 여자일수록 더 좋아한다고 들었는
데 늑대님은 예외인가요? 제가 스무 살밖에 안된 어린 여자
라서 싫다는 건가요?"
준석은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어린
여자에 대한 밝힘증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준석의
경우도 물론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엠마에 대한 느낌은 천진함이나 때묻지 않
은 순진무구함과도 같은 것이어서, 꽃을 꺾기 전의 조심스
러움 같은 것이 자신을 갈팡질팡하게 만들고 있었다.
"늑대님… 그러지 말아요. 난 오늘 밤 친구가 필요해요.
전 정말 외로워요. 친구도 없어요. 내 방에 갇혀 홀로 쓸쓸
한 밤을 보내는 것도 이제 지겨워요. 친구가 되어 주세요.
키스해주세요… 제발!"
준석은 수화기에 대고 입술을 오므리며 키스를 하는 시늉
을 했다. 쪽, 하는 경쾌한 소리가 저쪽에 전달되었는지 엠마
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요… 이제 당신에게 제 소리를 들려 드릴께요. 전
지금 너무 뜨겁게 달궈졌어요. 팬티가 축축해요. 닦아내지
않으면 손이 온통 미끈한 액체로 범벅이 될꺼예요. 들어보
세요… 내가 지금 얼마나 젖어 있는지…"
준석은 자신의 아랫도리로 뜨거운 열기가 모아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엠마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엠마는 자신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애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려 질퍽이고 있
을 꽃잎을 손가락으로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준석
의 귀에 들려왔다. 보이지 않아도 눈앞에 있는 듯했다.
"아… 이런, 엠마! 정말 많이 젖어 있군!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그렇게 많이 젖은 여자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당신
정말 굉장해…"
울컥 솟아오르는 욕망의 불덩이가 아랫도리를 후끈 달아
오르게 하고 있었고, 엠마가 들려주는 그곳의 질퍽이는 소
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키스해 줘… 키스해 줘… 아아…"
그곳만큼이나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의 엠마가 간절하게
말했다. 키스를 하지 않고는 못 베길 만큼 절실한 목소리였
다. 준석은 미친 듯이 수화기에 대고 입맞춤을 했다.
"아아, 아쉬워… 넌 정말 다른 여자들과 달라. 한번 만나
고 싶어. 널 만난다면 행복할 꺼야. 밤새도록 우리 둘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텐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엠마
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숨을 죽이고 있
는 것처럼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왜 그러지? 설마… 벌써 끝난건 아니겠지?"
"……"
"엠마? 말해봐. 왜 그러는거지?"
"날 만나면… 날 싫어하게 될꺼예요."
기분 탓이었을까? 준석은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흐느낌
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흐느
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느껴졌다. 또
한 무척 슬픔에 잠긴 목소리였다.
"왜지?"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는 내가 실망을 안겨주는 그런 여
자이니까요."
"엠마… 난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하지만 네가 다른 여자들보다 못생겼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그런 말도 있잖아. 사랑을 하
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다는… 그러니까 널 정말 좋아하는
남자라면 너의 그런 점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꺼야.
하하… 혹시 알아? 내가 널 사랑하게 될지?"
그녀를 달래느라 내뱉은 말이었지만 스스로도 두려워하던
말이었다. 분명 실수였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알게 된지 불과 한시간도 되지 않은 여자에게
그럴 가능성을 심어준 자신이 사뭇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어…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 뭐냐면…"
"됐어. 그렇게 둘러대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나를 사랑하
게 되는 경우는 없을 꺼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그렇
게 되길 바라지 않아…"
긴 한숨을 담은 그녀의 이야기가 준석의 심장에 날카로운
바늘처럼 꼿꼿하게 박혀왔다. 그녀는 이미 준석의 마음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 끊을게."
차디차게 식어버린 엠마의 목소리가 전화를 끊겠다고 말
하자 준석의 마음속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그것은 전화를 끊으면 안된다는 강렬한 외침이었지만,
그 이유가 불꽃처럼 타올랐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
때문은 아니었다.
"엠마! 끊지마! 기다려!"
"……"
"너만 괜찮다면, 내가 네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우리가
비록 컴퓨터 통신 안에서 섹스를 목적으로 만나게 되었지
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서로에 대해 더욱 솔직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말뿐이라도 고마워… 하지만 난 괜찮아. 너무 염려하지
마."
"아냐.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지금 이러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통신에서 만난 사
람이니까 평소처럼 그냥 무시할 수도 있을 텐데, 이상하게
도 너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보다
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정말 이상해."
"날 동정하는 거지? 내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긴다고 해
서 너마저 날 동정하는 거지?"
"아냐! 그건 절대 아냐! 난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난 네 친구가 되고 싶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엠마의 침묵이 지루
하게 이어졌다. 그 침묵 속에 갇혀버린 준석은 스스로를 이
해할 수 없어 더욱 어리둥절했다.
'지금 내가 왜 이러는거지? 대체 이 엠마라는 여자에게
매달리는 이유가 뭐지? 컴섹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여자를…
내가 왜 친구로 삼겠다는 거지?'
엠마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준석은 한편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준석의 마음이 양분화 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녀를 붙잡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
는 그녀를 무시하려 했다.
"나… 반신불수예요. 지금… 휠체어에 앉아 있어요."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에 의해 팽팽해져 있던 밧줄이 툭,
끊어질 때처럼 준석의 가슴속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
다. 준석은 엠마라는 여자와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게 될 것
임을 불길한 징조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