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죄책감을 지우는 섹스
"아, 배고파! 미연씨는 배 안고파요?"
"저는 아침을 늦게 먹어서인지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지니는 소파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배를 움켜잡고 죽는
시늉을 하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행
동에 웃음이 나왔다. 2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그녀에게도
아직 소녀적인 장난기가 남아 있는 듯 했다.
"으아아앙~! 소 한 마리라도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아
요! 이상하네… 오빠와의 첫날 이야기를 하는데 왜 이렇게
배가고프지? 말로만 한 것인데도 실전보다 더 힘드네…"
지니가 쇼퍼에 드러누워 무방비 상태로 몸을 뒤척이자 입
고 있던 레이스 란제리의 한쪽 어깨가 흘러내리며 유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숨
이 막히도록 눈부시게 하얀 살결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고
정되었다.
"배고프시면… 식사하신 후에 계속 하시지요?"
"음, 어차피 배달 시킬 거니까 올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
하지요."
"네, 그러세요."
"근데… 제가 이렇게 옷을 벗고 있어서 불편하신 가요?"
"아뇨. 상관없어요. 어차피 메모하느라고 쳐다 볼 겨를도
없어요. 후후, 하지만 상당히 매혹적인 몸매네요. 같은 여자
가 봐도 좀 부러워요…"
지니의 눈이 고양이처럼 반짝거렸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
이 좋아진 듯 했지만, 뭔지 모를 수수께끼를 가득 담은 듯
한 눈빛이었다.
"이제 제 이야기도 거의 끝난 것 같네요."
"……네."
"난… 그때의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내가 아무리 다
른 사람들과의 섹스에 열중한다고 해도, 그때의 그 황홀함
에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거든요. 물론, 사람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요. 저의 경우는… 남들보다 특별했
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끼가 있었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도 성(性)에 일찍 눈을 뜨고 호기심에 가득
했을 거예요."
지니의 얼굴이 평화로와 보였다. 지금까지 그녀와 인터뷰
를 하는 동안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무엇이 그녀
를 그토록 평화롭게 만들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녀가 아니었다. 나는 섹스에 자유로운 여자도 아니었고,
지니라는 여자와는 같아질 수 없는 어떤 벽이 틀림없이 존
재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오빠와 나는 그 이후로도 자주 만났어요. 만나서 서로의
육체를 갈구하고 끊이지 않는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죠."
"그럼 아직 그 정민 오빠라는 분을 만나고 계신가요?"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과정
에서 오빠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어릴 적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와 그 과거에 무언의 공모자가 된 정
민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어떤 결론에 이를지 결론을 지어줘
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흔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과, 정의(正
義)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지니와 그 오빠의
과거 행적은 그런 것들에 위배되는 일일테고, 지니의 이야
기가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을 때 사회적인 논란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은 뻔한
일이다.
*
어느 날 갑자기 행적을 감춰버린 정민 오빠의 소식을 찾
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오빠가 다니던 학교를 찾
아가 여기저기 수소문 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오빠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고, 학교에 자퇴서를 냈
다는 사실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 오빠로부터 편지가 날아든 것은 만 삼 개월이 지나
서였다. 항공우편이었다. 편지의 내용에는 너무도 청천 벽력
같은 이야기들만이 가득해 너무도 당황스러워 땅속으로 꺼
져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지니야.
먼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너로부터 이렇게 떠나온 것
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지우려 애를 써도,
죽은 영미의 모습이 네 얼굴과 겹쳐지고, 그럴 때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지니야.
성(性)은 자유롭다는 것을 나는 아직 믿는다. 그러나 그
자유를 누리는 내 삶의 방식이 너무도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에 한 여
자가 죽음을 맞이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버렸
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은 영미의 그림자가 나를 따라 다
니 는 것만 같았다. 죄책감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여자들
의 몸을 우롱하고 섹스에 탐닉하며 늑대 같은 날들을 보내
보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단다.
그래서 이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너의
괴로움을 나도 알고 있다. 둘도 없는 친구였던 영미를 죽음
의 길로 인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친 듯이 울음을 터뜨리
던 너의 모습을 아직도 지울 수가 없어.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들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음을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
나 나에게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어. 이런 나를 용서해 주겠
니? 너에게는 또 한번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
만 나도 달리 어쩔 수 없었다.
도와다오. 내가 과거로부터 철저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나를 도와다오. 숨이 막히도록 따라붙는 영미의 그림자로부
터 벗어날 수 있도록 네가 나를 놓아줘. 서울이 싫어졌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싫어졌어. 질식할 것만 같은 그곳을 떠
나니 차라리 홀가분하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던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외항선을
탔다. 처음에는 지독한 멀미에 무척이나 고생했지만, 이제
나도 뱃사람이 다 된 것 같아.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펄펄 뛰는 고기들을 볼 때마다 삶의 의지
를 되새겨보곤 한다.
지니야.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
다. 그 '언젠가'가 정작 언제가 될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
만. 내 마음이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그날이 다가오면, 그때
웃는 모습으로 너에게 돌아갈게.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너의 모습을 그려본
다. 넌 그럴 수 있어! 행복은 알고 보면 평범한 것에서 오
는 것이란다. 너에게 그런 날들이 다가올 것을 멀리서나마
빌어본다. 안녕.
정민.
*
"오빠의 편지를 받은 날부터 꼬박 한 달을 앓아야만 했어
요. 오빠로부터 또 다시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나 또한 말은 안했지만, 애써 감추고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 뿐 영미의 죽음에 괴로워한 것은 마
찬가지였거든요. 다만 난 오빠를 의지할 수 있었고, 오빠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오히려 나를 받아줘야만 했기
에 더 힘들었을 거예요."
지니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당사자가 담담하게 대꾸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기분이 왜
암담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게 언제의 일인가요?"
"3년 전의 일이에요."
"그럼 아직까지도 그 오빠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인가요?
어쩌면 돌아왔을 수도 있겠네요. 3년 동안 내내 배를 타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지니의 얼굴에 쓰디쓴 웃음이 퍼졌다. 편안함은 걷히고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며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어차피 물어봐야만 할 질문이었기에
당황스러운 표정은 감추었다.
"아뇨. 오빠는 죽었어요. 사고였죠.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
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고가 오빠에게도 닥쳤고, 폭풍 속
에서 오빠는 바닷 속에 가라앉았어요. 시체를 찾지도 못했
지요. 그 넓고 황량한 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아 물고기의 밥
이 되었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면 너무 잔인할까요?"
지니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질문이 아니라 그 어떤 위로나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 계 속 -
첫 경험에 관한 일곱 가지 보고서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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