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이제, 널 가질 거야.
지니의 술잔이 비어있다. 술병도 빈 병이 된지 오래였다.
정량보다 조금 넘친 듯 지니의 얼굴은 무르익은 홍시처럼
붉었고, 발음마저 부정확하여 더 이상 인터뷰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술이… 없네…?"
"이제 고만 마셔요. 인터뷰는 내일 계속 하도록 할께요."
두 번째 인터뷰에서 그녀는 너무 많은 감정의 변화를 가
져왔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는 인터뷰가 아니라,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미연씨, 가지 말아요…"
"……"
지니가 다가왔다. 스스럼없이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지니는 응석을 부리는 아이처럼 나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며
흐려진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잠을 주무시는게 나을 것 같아요. 지금은 인터뷰를 할
수 없을 것 같고… 내일 맑은 정신에 계속 하도록 하죠."
지니의 팔이 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뭐라 대답을
하기보다는 나의 목을 자신의 팔로 휘감아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내가 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 두려는 참
이었다. 지니에게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제발 가지 말아요."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단순히 나의 목을 끌어
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귀에 가지 말라는 말을 속삭이며 뜨
거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지니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
란 나는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다.
나는 지니의 그런 행동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볍게
뿌리쳤다. 인상을 찡그리며 거칠게 행동하지 않은 것은 술
에 취한 그녀가 나의 행동으로 기분이 나쁠 것을 배려한 것
이었다. 그러나 지니는 나의 그런 배려와는 아랑곳없이 오
히려 나를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죠? 제가 싫은가요?"
그녀가 마치, 마음이 변한 연인에게 애걸하는 듯한 어조
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더욱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가야해요… 일어나려구요."
"아뇨. 제가 미연씨의 목을 끌어안은 것이 싫으냐구요. 그
런가요? 미연씨에게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나요?"
지금 지니의 말은 그녀의 행동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결론이다. 나는 싫다는 말도 좋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
고 형언할 수 없는 이 불쾌감으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
는 것보다는 차라리 피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
이었다.
"난, 미연씨와 이야기하면서… 내내 미연씨의 마음을 읽
으려 애썼어요. 과연 당신이 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느낄
지… 당신이란 여자는 철로 만든 무감각한 여자는 아니겠
죠?"
"……"
"약속할께요. 미연씨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께요.
하지만, 약속해주세요. 오늘 가지 않겠다고. 그냥 있어줘요.
빈방이 있으니까 거기서 자고 가요."
시계를 보았다. 이미 밤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
나간다면 12시까지는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니의 얼굴에는 간절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
는 내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가야한
다는 필요성보다 애원하는 지니의 표정이 더욱 눈에 들어오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폐가 되지 않도록 옆방에서 쉴께요. 죄송해
요."
"아아…! 정말 고마워요. 미연씨가 가지 않는다니 너무 기
뻐요. 여태 저녁도 못 드시고 이야기만 나눴는데 미안했거
든요. 게다가 내 술주정까지 받아주고… 제가 맛있는 것 사
드릴께요. 뭘 좋아하죠?"
"괜찮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커피만 한잔 마실께요. 커피
마시면서 오늘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야겠어요."
"그래요. 그럼 커피하고 간단한 과일이라도 좀 준비할께
요."
그러나 지니가 준비한 것은 과일과 커피만이 아니었다.
지니가 주방에서부터 밀고 온 웨건에는 치즈 케이크와 과일
쥬스, 커피, 그리고 자신이 마실 새로운 위스키가 한 병 있
었다. 그제야 지니가 살고 있는 이 연립을 찬찬히 훑어 보
았다.
혼자 살기에는 좀 크다 싶을 정도로 넓은 집이었다. 거실
에 놓여진 가구도 모두 세트로 구성되어져 있고, 바닥에 깔
려 있는 카펫도 값싸 보이는 물건은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
는 그녀의 취향에 맞게 한쪽에 놓여진 웨건에는 언제라도
손에 닿게 좋도록 위스키와 글라스가 놓여져 있었으며 간단
한 스넥류도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주방에는 각종 요리 도구와 그릇들이 세
트로 구비되어 있었지만 요리를 직접하지는 않는 듯 일종의
전시품으로만 보였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상상하려 애써도
앞치마를 두른 지니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미연씨! 내가 그 오빠를 아직도 만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요?"
앞에 놓여진 커피 잔을 들어 크림을 넣는데 지니가 문득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만 미리 서두를 필요는 없죠. 어차피 지니씨가
모두 이야기할 내용이 아닌가요? 저야 듣고 좋은 글이 되도
록 신경 쓰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군요…"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 밑에 젖어드는 그림자를 보게 된 것은
거실의 조명이 어두워서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밤이 이슥하도록 지니의 이야기가 계속 되
었다.
*
"축하한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열심히 공부하고 좋
은데 시집가야지… 하하하"
"고맙습니다, 아빠"
"말만해! 내가 너 갖고 싶다는 것은 다 사주마! 허허허~!
이거 맏딸인 네가 대학에 덜컥 합격했으니 밑에 놈들도 앞
으로 잘 될 것 같다! 역시 내 딸이야! 허허허~! 이제 아빠가
예쁜 옷도 사줄게! 그리고 학교 다니려면 서울에 좋은 하숙
집을 알아봐야지! 내일 당장 아빠랑 함께 서울로 가자."
집안이 온통 난리였다. 대학 입학 합격 소식을 들은 온
친척들이 축하 인사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고, 영미의
일이 불과 얼마 전이었음에도 이미 먼 옛날 기억처럼 멀어
지고 있었다.
"에이그… 영미도 함께 서울로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
데… 몹쓸 것이 그 밤중에 왜 마실을 다녀서 비명횡사를 하
누… 지 에미 가슴에 못 박고 일찍 저 세상으로 가다니…"
엄마는 아직도 영미의 죽음으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
는 영미 엄마를 떠올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엄
마의 혼잣말에 지레 놀란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 당신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애 기분을 망치고 그
래? 이제 잊어야지, 어쩌겠어? 산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잊혀지는 거야! 안 그래도 우리 지니가 영미 기억을 좀 잊
었는가보다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에이, 몹쓸 여편
네 같으니라구…"
엄마와 아빠의 넋두리를 듣다 못한 나는 방에서 나왔다.
내가 지른 불 속에서 타죽은 영미가 금방이라도 뛰어와 나
를 노려볼 것만 같았다. 언짢은 마음이 되어 합격의 기쁨은
사라지고 영미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와 견딜 수가 없던 나
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정민 오빠를 만나러
갈 참이었다.
"오빠… 집에 있어?"
용기를 내어 오빠를 불러 보았지만 오빠는 집에 없었다.
대신, 오빠의 할머니가 문을 열며 오빠가 바람 쐬러 바닷가
로 나갔노라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오빠가 있다는 바닷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빠는 바닷가에 있는 갯바위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
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에는 시커먼 갯벌이 마수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고, 먼바다에 떠 있는 고깃배가 햇빛을 받아 반
짝였다.
"오빠…"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겨있던 오빠의 뒷모습이 어쩐지 무
거워 보였다. 낮은 목소리로 오빠를 부르자 오빠가 나를 알
아보고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영미가… 합격했대…"
죽은 영미가 합격했다는 말이었다. 갯벌 속으로 몸이 가
라앉는 낭패감에 온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응. 영미 엄마가 울고 있대. 할머니가 장에 다녀오시다
만났는데 그 말을 하면서 영미 엄마가 더 슬퍼하시나 봐."
미쳐버리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영미 엄마에게 딸
을 죽인 죄인이 나라는 말을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빌고 싶
었다. 나는 나의 질투와 시기로 친한 친구를 죽음으로 이끌
었고 친구의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죽은 영미보다도 불행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죄책감으로 혼
란스러운 나의 하루하루가 형벌로써 이어지게 된 것이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