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씨받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달리 차분하고 조용해
보였던 그녀의 이름은 민혜영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서른 둘.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에서 살아온 날들만큼
의 성숙한 여유가 느껴졌다.
"이렇게 집으로 오시라고 한 것이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
어요."
"아뇨. 오히려 말씀하시기에 도움이 될 겁니다. 다른 낯선
곳에서는 오래 이야기 나눌 수도 없고요."
그녀를 만난 시간은 오후 2시쯤이었다. 따뜻한 홍차에 우
유를 섞은 밀크 티를 내놓은 그녀는 아직 할 일이 남았는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하기에 바빴다.
"미안해요. 곧 아이가 올 시간이라서요. 간식이라도 준비
해놓아야 짜증을 안 부려요. 오늘은 놀아주지도 못하니까…
특별 메뉴라도 준비해야겠어요. 잠깐이면 돼요."
그러고 보니 아담한 거실 이곳저곳에 어린 여자아이의 사
진이 놓여져 있었다. 아이는 4살이나 5살 정도 되어 보였고,
노란 모자를 눌러쓰고 노란 유니폼을 입은 것으로 보아 다
니고 있는 유치원에서 찍은 사진인 듯 했다.
"아이가 참 예쁘네요. 여자 아이 맞죠?"
"네에. 유림이에요. 민유림. 제 성을 따서 민유림이라고
했어요. 이제 곧 숨차게 뛰어 들어 올꺼예요. 아마 지금쯤
아파트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 있는 곳으로 뛰고 있을걸요?
후후…"
그녀의 양어깨에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딸 유림이에 얽힌
사연이 가득함을 알았다. 아마도 그녀가 시작할 이야기는
유림이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유림이는 몇 살이죠? 여섯 살?"
"아뇨. 다섯 살인데… 아이가 좀 조숙해요. 아빠 없이 혼
자 자라서 눈치가 빠른 것 같아요. 혼자서도 뭐든 열심히
하려고 들고, 또래의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욕심도
대단해요.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칭찬하면 화가 나서 울음
을 터뜨릴 정도예요."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는 엄마의 심정이 되어보진 않았지
만 어린 딸의 자랑을 늘어놓으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표정으
로는 마냥 행복하게 보였다.
쾅! 쾅! 쾅!
딩동 딩동…
"엄마! 엄마아아!!"
요란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가 번갈아 들
리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
자 그것보라는 듯이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현관으로 나갔
다. 문이 열리자 잔뜩 볼멘 표정으로 어린 꼬마 숙녀가 들
어왔다.
"오늘은 또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영철이가 아빠랑 여행 간다고 막 자랑하잖아. 엄마! 우리
두 제주도 가여. 거긴 비행기만 타구 간대. 영철이는 엄마랑
아빠랑 셋이서 제주도 간다구 자랑했어. 엄마, 제주도가 어
디야?"
아이를 달래는 김혜영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이에게 없는
아빠를 의식한 탓이 분명했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꼬
마 숙녀 유림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빼
다 박았지만 닮지 않은 눈매와 콧날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유림아. 여기 이모에게 인사해. 그래야 착한 아이지?"
꼬마 숙녀 유림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 속에 맺힌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아
가슴이 찌르르 쓰려왔다.
"유림이 안녕? 제주도 가고 싶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도
모르면서, 친구가 아빠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자랑에 속이
상해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중에, 이 다음에… 엄마랑 이모랑 함께 가자. 지금은
엄마가 바쁘시거든. 유림이는 착하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함께 가자는 약속을 했음에도 아이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
았다. 어린아이를 달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
었다.
"이모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하고, 인사도 안하고… 유
림이 정말 나쁜 아이구나?"
엄마인 혜영의 얕은 꾸중에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아이는 그 작은 입술을 달
그락거리며 울먹였다.
"엄마 미워! 나도 아빠랑 가고 싶어! 왜 나만 아빠가 없
는 거야! 영철이도 아빠 있고, 정미도 아빠 있어! 내 친구들
전부다 아빠 있는데 왜 나만 없는 거야… 앙앙앙…"
혜영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그녀는 아이가 울음을 터
뜨리자 당황한 나머지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유림아…"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거실
로 나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
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울음 끝에 지쳐 잠이 든 듯 했고, 혜
영의 표정은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오십대 중반의 여인은 거의 무
표정하다시피 굳어진 얼굴이었다. 저고리 앞섶에 매달린 브
로우치는 사파이어와 루비가 박힌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오
십대 중반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단정한 그녀의 모습에
혜영은 벌써부터 질리고 있었다.
"뭐… 자세한 내막이야 아가씨도 알 테고, 그래요. 알고
왔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께요. 우린 아이가 필요해요. 우리
아들이 5대 독자인데… 결혼한지 3년이 지나도 영 소식이
없어요. 병원에서는 아들 내외 모두에게 문제가 없다고 했
지만, 어미 된 마음으로써는 이 방법이라도 써서 빨리 대를
잇고 싶어요."
조목조목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에게 있어 혜영은 도구일
뿐이었다. 혜영은 이제부터 자신에게 벌어질 일들에 긴장하
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어디 아픈 곳은 없죠? 보아하니 몸은 튼실해 보이
는구먼. 얼굴도 그만하면 빠지지 않는 것 같고… 성격이 좋
아 보여 마음에 들어요. 어쨌거나 엄마의 모습을 조금은 닮
을 테니까…"
"아픈 곳은 없습니다. 잔병치레도 거의 하지 않아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혜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
가 갑작스레 다정한 태도를 보이자 혜영은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아가씨… 부탁해요. 아들 하나만 낳아 줘. 응? 아들만 낳
아주면 사례는 심심지 않게 할께요. 이 노인네 소원이라우.
죽기 전에 아들놈 손주 안아 보고 싶어요. 제발 부탁해요."
혜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인은 그녀의
손을 놓고는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이것은 계약서와 계약금을 넣은 아가씨 명의의 통장이에
요. 아들만 낳아준다면 나머지 잔금과 함께 이 아파트는 아
가씨 것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알겠지만 일단 출산할 때
까지는 이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유롭지 못해요. 나
갈 때는 꼭 가정부와 함께 가도록 해요. 특별한 일 아니면
가급적 외출하지 말도록 하고… 이따 아들 녀석이 퇴근해서
올 테니 준비하길 바래요."
여인이 건네준 통장에는 계약금 천만원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잔금은 2천만원. 아들을 낳으면 싯가 1억 5천만원인
이 아파트가 혜영의 것이 되는 것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