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섹스의 의미
남자와 여자가 뒤엉켜 격렬한 정사를 나누고 있는 비디오
영상에 나는 숨이 멈추었다.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정사 장
면을 보여주는 의도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
렇게까지 하는 그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파기하지 않았군요."
"당연하죠! 이걸 왜 파기해요? 저에게 엄청난 부(富)를
제공하는 밑천인대요. 호호호…"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파기
되었어야할 비디오 테이프가 자신에게 부(富)를 제공하는
밑천이 된다는 것은, 그녀는 자신과 강 사장의 정사 장면을
세인들에게 팔아 넘기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엄연히 불법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이런 비디오 테이프가 암암리에 시중
에 나돌고 있다는 것 모르셨어요?"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강 사장도 알고 있어요. 지금 이 테이
프는 원본이니까 우리들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기술
자를 통해서 약간의 편집을 했어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
도록 모자이크 처리를 했죠. 후후… 하지만, 강 사장의 얼굴
에만 그렇게 했어요. 전 그냥 내버려뒀죠."
그녀의 그런 의도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자
신의 얼굴이 암암리에 공개가 될텐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들은 쾌감으로 찡그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내 얼굴이 안 보인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저런 피스톤 운동이나 페팅쯤이야 누구나 하는
것인데… 후후."
"뭐… 그런 것과 상관없이 강 사장님의 문제를 쉽게 해결
해주셨으니 약속하신 대로 거래를 끝내셨겠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와 강 사장은 약속한
거래를 충실하게 이행했고 서로를 배신하거나 누를 끼치지
도 않았다. 그녀가 비디오 테이프를 암시장에 내다 파는 것
또한 강 사장의 이해가 작용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하는 일이면 이제 절대 반대 안해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삶의 은인인 저를
홀대하겠어요? 그는 나에게 너무도 잘해줘요. 사랑하는 것
과는 좀 다르지만…"
"사랑이 아니라면… 어떤…?"
"뭐, 모르겠어요? 그냥 일종의 거래 관계로 이루어졌던,
그래서 거래가 끝난 뒤에 친구로 남는 그런 관계죠. 그는
요즘 다른 여자와 어울려요. 재혼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요.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와… 후후"
강 사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을 즐기
게 된 것이었다. 그것으로써 섹스를 거래 대상으로 삼았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고 기준은 유감스럽게
도 나에게 없었다. 나는 그들의 그런 모종의 거래가 낳은
결과만을 바라보고 싶었다.
남자에게 있어 존재의 의미와 가치까지도 거론될 정도로
중요한 성능력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길었던 마음 고생에
서 빠져나온 그가 느꼈을 무한한 자유와 행복감만을 알아주
고 싶다. 그것은 인터뷰 과정에서 들었던 그의 방황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발기가 되지 않는다고 병신 취급을 받는 남자들과 임신을
하지 못한다고 버림받는 여자들은 결국 같은 패배자이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결코 '성능력'으로 판정될 수 없음에도
인간으로써 어디 한 곳 빠지는 부분이 있다고 무시당하거나
천대받을 수는 없다.
"강 사장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의 입장과
비교한다면 임신을 할 수 없었던 여성이 기적적으로 임신한
것과 마찬가지인 기쁨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 사람의 삶 전체가 뒤바뀌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
에요. 무능력한 노인으로 남아 있다가 이제 혈기 왕성한 중
년 남자로 돌아간 거죠. 사업하는 자세도 달라졌어요. 전보
다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대요. 얼마 전에 회
사 남자직원들을 데리고 우리 가게에서 회식을 했었는데…
그때 그가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얼마나 존경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죠. 직원들은 그를 마치 친구 대하듯 했어요. 이해가
돼요? 삼십대 사십대의 직원들이 아버지뻘 되는 오십대 사
장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것이?"
남자들의 세계를 여자들이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
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세계를 남자들도 100% 이해할 수
는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서로 공통적인 아픔으로 방황하
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언제 어디서 누구라는 조건만을
제외한다면 우리들은 저마다 한번쯤 겪게 되는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도 찾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내가 안고 있는 고통이 가장 극렬하
고 지독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캐시는 강 사장의 용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발기불능
을 기어이 뛰어넘지 않았다면 지금쯤 오십대 노인으로 인생
의 황혼기에만 젖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한낮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정열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섹스라는 것은, 지나치면 자신에게 해가 되겠지만 그 독
한 마약성 뒤에 감춰진 모습은 인간의 삶을 즐겁고 생기 있
게 해준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적당한
것'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를 끝내고 현관을 나서는데 캐시가 불현듯
봉투를 내밀어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게 뭐죠?"
"원래 약속된 금액과는 달라요. 이건 강 사장님이 주신
거예요."
"이러실 필요 없어요. 전 이런 봉투 받지 않아도 강 사장
님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게 쓸 참이에요. 그분의 요구를
들어 들이는 게 아니라, 제가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
까요."
"알아요. 저도 믿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글 속에 좋은 이
미지를 심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연씨에게
표시하는 조그마한 성의일 뿐인 걸요. 받으세요. 별로 큰 액
수는 아니니까 부담되지 않을 거예요. 옷 한 벌 사 입으시
래요. 그래서 좋은 남자 만나 데이트하래요. 후후후…"
캐시는 어색하게 받아 쥔 하얀 봉투를 내 대신 가방 속에
밀어 넣어 주었다.
"고, 고마워요. 이런 일은 제가 바란 것이 아닌데…"
"뭘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강 사장님이
언제 시간 되시면 자기의 자서전도 부탁하고 싶대요. 맨몸
으로 지금의 사업체를 일으키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던 자
신의 이야기를 생을 돌아보는 뜻으로 엮어 보고 싶다더군
요."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강 사장의 명함을 받고는 거듭 고
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인터뷰였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지만 나름대로 노력하며 아
름다운 모습으로 삶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멈
출 수 없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