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위험한 정사의 끝
"이제, 다음 인터뷰가 마지막입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준석은 나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담배
연기만 내뿜었다. 무례한 그의 태도도 이제 다음 한번만 꾸
욱 눌러 참으면 끝이다. 이제 그의 비정상적인 사고방식과
도 결별할 수 있다. 아무 여자나 언제 어디서든 안을 수 있
다는 그 사고방식 말이다. 이를테면 조금전 나에게 보여줬
던 그런 행동들.
"아가씨 좋을 대로 하시오. 난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은데
서둘러 마치고 싶어하는 것을 보니 대단히 불쾌했던 모양이
로군."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더 필요한 자료가 있다거
나 인터뷰를 다시 요청할 일이 있다면 연락을 드리도록 하
겠습니다."
"좋소. 쇠뿔도 단김에 빼냈다고, 오늘 시간을 좀더 늘려서
잡도록 하시오. 사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소. 그녀와 함
께 했던 시간이 그리 길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썩 마음에 내키는 조건은 아니었다. 지금 바로 이 숨막히
는 집을 벗어나 늑대 같은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지만
그와 한번 더 만나는 것보다는 오늘 마무리 짓는 것이 더욱
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정도 더 부탁드립니다."
"인터뷰도 좋지만 난 배가 고프오. 식사를 해도 되겠소?"
넉살 좋은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베짱이면 어딜 가
도 절대 굶지 않을 것이다. 어이없었지만 나 역시 배가 고
프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3시. 그러
고 보니 점심이 훨씬 지난 시간이다.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인터뷰를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네. 그럼 식사하세요. 전 잠시 나갔다 들어오겠습니다."
"어딜? 함께 식사하는 것도 불쾌하오? 난 나 혼자만 먹으
려 한 것이 아닌데?"
"사양할께요. 전 생각 없습니다. 신경 쓰시지 말고 식사하
세요."
정색을 하며 만류하는 그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
디 가서 혼자 식사를 하는 편이 그와 함께 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정확하게 한 시간 후, 그에게 되돌아갈 것이
다. 남은 인터뷰를 끝내기 위해.
*
민영> 그날… 너무 감사했어요.
준석> 감사까지? 후후, 나도 너에게 고맙게 생각해. 찾아
와 줘서.
민영> 보고 싶었으니까요.
준석> 민영아…
민영> 네?
준석> 이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민영> 뭔대요? 저에게 못할 말이 어디 있겠어요. 괜찮아
요.
준석> 민영아… 사랑해. 진심이야…
초침처럼 깜빡이는 푸른 모니터 위의 하얀 커서가 지루하
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민영(MINYOUNG) 회원이 퇴실하였습니다 !!
민영의 반응을 기다리던 준석은 어이없고 당황스러운 표
정으로 민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도 민영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지루한 기다림은 계속 되었다. 전화 벨이 두
번 이상 울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달려가 받아도 보고,
하루에도 몇 십 번씩 통신에 접속하여 민영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만나
게 된 것은 아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준석의 친구는 준석에게 PC 통신이라는
세계를 배우기 위해 매달렸고, 준석은 그에게 채팅을 가르
쳐주기 위해 통신에 접속했다. 그 친구의 새 아이디를 사용
했던 것은 물론이다.
*
"그럼, 통신에서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인가요?"
준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담배를 입에 물고 긴 담
배 연기를 내뿜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
던 것 같았다.
"그녀는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어 컴섹을 즐기고 있었던거
요."
"……"
"그녀의 진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소.
다만…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뿐이오. 통신이라는 것을 하
루 이틀 했던 것도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그리 쉽
게 마음을 빼앗겼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소. 하지만 분명했
던 것은,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오. 그것은 연민이나 동정
따위가 분명 아니었소. 우리들이 현실 세계에서 느낄 수 있
는 그런 것처럼 운명적인 것이었다고 믿고 싶소."
"그녀에게 스스로를 밝히셨나요?"
"물론이오. 그녀는 내가 준석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
라는 듯 했소."
"설마 또 접속을 끊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진 않았소. 대신,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말해주었소.
자신이 처해 있는 처지가 너무도 불운했기 때문에 사랑이라
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했소. 이미 자기 자신도
나에게 감정이 다져지는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고 말이오.
그런데 내가 갑작스레 사랑을 고백하자 두렵고 무서워서 도
망치게 되었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것이 끝이었나요?"
"끝이라면 끝이겠지.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으니
까. 그리고… 그녀도 더 이상 컴퓨터 통신을 하지 않는 듯
했소."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상황에서 그의 표정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으로써 이 인터뷰의 결말을 낼 수 있
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그녀와의 만남을 어떻게 결론짓
고 있는지, 그녀에 대한 생각과 자신이 상주하다시피 했던
사이버 세계에 대한 변화된 생각들도 중요했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가상의 공간에서 무슨 진실을 기대
할 수 있겠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녀에 대한 평판을
듣게 되었소. 이미 대부분의 컴섹족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여자였소. 자신의 불편한 몸으로 남자들의 동정을
사고는 단 한번의 불같은 섹스를 나누고 상대 남자를 헌신
짝 버리듯 하는 여자였소. 모두들 그녀를 욕했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 그러질 못했소. 그녀의 그런 방황조차도 감
싸줄 수 있다는 것이 그때의 내 생각이었소. 내가 그녀를
붙잡아 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적도 있었소."
"……"
"우리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소. 저마다 아이디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게지. 그 안에서는 장애도 없고, 무능도
없소.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 사는 거요.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없어도 있는 척, 있으면 더 많
은 척, 못난 사람은 잘난 척, 뚱뚱한 사람은 날씬한 척, 날
씬한 사람은 더 예쁜 척… 스스로 갖고 있는 모든 피해의식
을 아이디 뒤에 감추고 살아가는 거요."
필터 가까이 까지 타 들어간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그의
모습이 긴 방랑 끝에 집으로 돌아온 탕아의 모습처럼 쓸쓸
해 보였다. 초췌하고 지친 모습으로 등에 지고 있었던 무거
운 짐들을 내려놓고는 힘겹게 한숨을 몰아 쉬는 듯한 그 표
정에서 기계화된 문명이 가져다주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비
롯된 상처와 아픔을 보았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긴 그의 이야기에서 일말의 희망
혹은 돌파구를 보았던 것도 같다.
"그래도… 진실은 있는 거요. 그녀가 진실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나 하나만큼은 진실이었으니까. 진실이 나에게만 있
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딘가에 있을 게요. 틀림없이 어딘가
에서 푸른 모니터를 앞에 두고 저 얇은 전화선을 통해 친구
를 기다리는 네티즌이 있을 거요."
Ⅱ부 끝. Ⅲ부에서 뵙지요...
♣ 계속 ♣
첫 경험에 관한 일곱 가지 보고서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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