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쿤닐링구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당함과 자신
감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이 겪어왔던 모든 이야기들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해 받으려는 행
동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준석의 경우는 당당함이나 자신감과는 거리가
먼, 자조 섞인 말투에 적당히 시니컬한 분위기가 나를 아연
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엠마와 함께해온 것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지니와의 인터뷰는 그리 힘겹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터뷰라는 것이 그저 남의 이야기를 한가롭게 들어주는 것
과 달라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대방의 마음과 일치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급적 이해하고 존중해야만 한
다. 적어도 그네들의 입장에서 글을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니의 경우…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
다. 그것은 아마 같은 여자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질투와 시기심이 나에게도 전이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준석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왜 내가 함께 생각하고 알아
차릴 수 없을까. 그가 느끼는 것을 왜 내가 느낌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일까.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왔
을 때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김준석과의 인터
뷰 내용을 원고에 기록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려 했지
만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심리에 부딪친 나는 잠시 손을
놓았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며 나도 모르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1시
가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미연씨?"
"네. 접니다만, 누구신지…"
낯선 사내의 짧은 목소리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나는
기억 속의 인물들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일치되는 사람이 없
었다.
"나, 김 준석이오."
사내의 말에 그제야 의문이 풀린 나는 늦은 시각에 전화
를 걸어온 그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네에. 무, 무슨 일이신지…"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좀 전에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더군요. 귀가 시간이 늦은 편이오?"
"아뇨! 샤워하고 있…"
나도 모르게 '샤워 중이었다'는 말이 튀어 나갔다. 그 말
이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늦은 밤에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샤워 중이었다'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다
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내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잠이 오질 않소.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오.
방해가 됐다면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마침 저도 원고가 잘 되질 않아서 바람이라
도 쐬고 싶었거든요. 차라도 한잔할까 합니다."
"좋소. 그럼,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따뜻한 차를 마
시도록 하시오."
"네에…"
"혹시 집에 코코아가 있소?"
"네. 있어요."
"그럼 코코아를 뜨겁게 타서 마시도록 해봐요. 기분이 한
결 나아질 거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 나왔다. 겨우 두 번의 인터뷰로
그와 내가 가까워진 것도 아니건만, 그는 지금 나에게 정도
이상으로 다정하게 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권유대로 한번 해볼게요."
나는 개인적으로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한다. 그는 한결같
이 정열적이고 열정적인 피아노 선율을 세상에 남겨 놓았
다. 나에게 없는 광기가 그 선율에 담겨져 있어서일까? 쉽
게 몰입할 수 있는 선율에 늘 정신을 잃고 만다.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하오?"
"네"
"그렇군. 유명한 곡이지. 지금의 이 곡, 피아노 협주곡 제
3번 말이오. 괜찮다면 잠시 음악을 듣겠소. 볼륨을 좀 높여
주시겠소? 옆집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왜 그의 분위기에 이끌리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그가 시
키는 대로 오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침묵 아닌 침묵
이 어색하게 흘렀다. 수화기를 든 채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있을 그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그리고
는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라 숨을 멈춰야만 했다.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협주
곡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 틈에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김준석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심하
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장 미연씨?"
"네… 말씀하세요."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숨을 죽여 대답했다.
"지금… 무엇을 입고 있소?"
숨이 막혀 왔다. 그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당
장 인공호흡이라도 실시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까… 당신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중이라고 했소. 그
렇다면 지금 당신이 입은 것은 나이트 가운이거나 커다란
샤워 타월일 것이오. 내 말이 맞소?"
"……"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당신의 대답을 듣는 것보다 내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이 더욱 아름다울 테니 말이오."
"……"
입을 열면 지독한 긴장감에 내 자신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당신의 살결에서 지금쯤 향기로운 비누 냄새가 나겠지.
혹시 오데콜로뉴를 썼다면 밤에 맞는 달콤한 향이 나겠지.
하지만 당신은 그런 것을 쓸 여자가 아니오. 아마도… 시트
러스 샤워코롱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이 나의 몸에 다가와 코를 들이대며 향을 맡고
있는 듯한 착각에 소름이 돋았다. 야릇한 기분이었다. 한번
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전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손을 댄다면… 아마 당신의 피부는 금방이라도 물이 베
어 나올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을 것이오. 한번도 만져보
진 않았지만 당신의 피부는 꽃잎처럼 향기를 품을 것 같았
소. 하지만 아무런 향을 느낄 수 없었지. 마치 모란처럼 말
이오."
"……"
"당신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 당신이 입고 있는 가운을
풀어헤치고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당신의 살결을 부드럽
게 쓸어 내리고 싶소. 그리고 입을 맞…"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분명한 외침이 들려왔다. '안돼! 전
화를 끊어!'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
기를 내려놓았다. 전화 벨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손끝이 심하게 떨려와
몸을 떨고 있었다.
아직도 따뜻한 코코아를 주방으로 가져와 내팽개치듯 개
수대에 쏟아 부었다. 머리끝이 쭈삣쭈삣 곤두선 것처럼 야
릇한 전율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촉 낮은 스탠드 조명을 켜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아도
그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는 듯 했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
라 그가 나의 곁에 누워있는 듯 했다. 문득, 나도 모르게 나
의 살결을 쓰다듬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말대로 나의 피부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부드러움
그 자체였다. 손길이 스칠 때마다 야릇한 흥분으로 곳곳의
말초신경들이 반응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나의 손은
그 행로를 분명히 정한다.
나의 손이 머문 곳은 검게 반짝이는 음모가 무성한 그곳
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나는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수화기 저편에서 속삭이던 그의 몇 마디
말에 나의 몸은 뜨거운 액체를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눈앞에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몸에 욕망의 불을
당긴 그가 내 몸 위로 올라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