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컴섹 하실래요?
두 번째 미팅이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정확한
시간에 장소에 도착했고, 그들에게 고용된 나는 10여분 일
찍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지니는 보이지 않았
다. 다섯명 중에 제일 먼저 인터뷰를 했던지라 조금은 가까
워진 탓인지, 약속 시간이 지나서도 나타나지 않는 그녀의
소식이 못내 궁금해졌다.
"지니씨가 아직 늦으시네요. 안오시나요?"
"인터뷰도 끝났는데 굳이 올 일도 없잖아요. 바쁜 일이
있나봐요."
첫 미팅에서 쌀쌀맞게 대답했던 폭탄 머리의 여자가 오늘
은 차분한 단발 생머리를 하고선, 여전히 시니컬한 억양으
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런거리는 분위기로 뭔가 잘
못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이 분이 아셔야 될
일인지도 모르고, 지니도 입 다물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
냥 사실대로 말하자. 그게 편할 것 같아."
은색 금속 장식이 요란한 검정 가죽 쟈켓을 입은, 조금은
마른 듯한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때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도 했다. 그들의 분위기로
봐서는 지니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틀림이 없
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해주셨음 좋겠
어요. 부탁입니다."
"좋습니다. 뭐, 어쩌면 지니의 이야기를 쓰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니도 원할테구요. 지니는 오늘
아침에 자수했습니다. 직접 경찰서로 출두했어요. 살인 및
방화로 기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자수했으니까 참작
은 되겠지요."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지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
긴 말, 사필귀정(事必歸正)과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자신이
앞으로 취할 행동에 대한 묵시적인 암시였던 것이다.
"자, 지니의 일은 우리들이 나서서 좋은 쪽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고 해서 경찰에서도 어떻게 나
올지도 모르고, 파문은 크겠지만 지니가 나름대로 신중한
선택을 했다고 우린 믿습니다."
"그래요. 우리들도 그렇게 믿어요."
예의 그 가죽 쟈켓 남자와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장미연씨라고 했었죠? 저는 민성기입니다. 그리고 이쪽
은 캐시에요. 본명이 있지만, 닉네임으로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하죠.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김준석, 민혜영입니다."
민성기라는 사람은 검정 가죽 쟈켓을 입은 그 남자였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훤칠한 이마 위로 쓸어 넘긴 그는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을 가진 사람으로 굳게 다문 입술이
매우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겼고, 말투 또한 그랬다.
"첫번째 인터뷰는 지니가 했으니 이제 우리들 차례군요.
순서를 정해야겠죠?"
민혜영이라고 소개된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나이가 들어 보였다. 옷차림 또한 첨단을 걷다시
피 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차분하고 정숙(?)한 분위기라
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팀의 아웃사이더처럼 보이는 여자
였다.
"어차피 모두 한번씩은 해야할 일이긴 한데… 준석이 어
때? 아니면 성기가 먼저 하던지?"
이번에는 캐시라는 여자가 말했다. 첫 만남에서 폭탄 맞
은 머리처럼 잔뜩 뽀글뽀글거리는 파마를 하고 나왔던 여자
였다.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파마를 풀고 단정한 생머리로
나타났다.
준석이라는 사람은 말이 없는 침묵형의 남자였다. 시종일
관 귓속말을 해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의 일인 듯
한 두 마디 이상을 떠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경
청하는 것으로써 만족하고 있는 듯 했다.
"어느 분이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다들 하셔야하는 일이
고, 바쁜 일이 있는 분들은 서로 일정을 맞춰보세요. 그렇게
순서를 정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약속이 정해지시면
내일부터라도 작업에 들어가도록 할께요."
그들 모두에게 나의 의견을 말하고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나설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서를 정하는
것에 관여하기보다는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 있을 지니의
일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녀 스스로 결정한
길이고, 어찌 보면 그것만이 그녀의 죄책감을 최대한 덜어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음 인터뷰는 내가 하겠소."
의외였다. 지금까지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김준석이라는
남자가 다음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람과의 약속을 정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지니의 이야기를 정리해야만 할
것이다. 이미 완성된 상태이긴 했지만, 그녀의 마지막 선택
을 들었으니 약간의 수정을 가해야 할 것이다. 事必歸正 會
者定離, 라고.
*
인터뷰 내용의 특성상 오픈 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 틈
에 섞여 오고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각자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책을 쓰
기 위한 인터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기에 당사자
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김준석. 이름 끝자가 '石'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
도로 그는 말이 없는 남자였다. 그가 원래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으면 말을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말이 없어서야 어떻게 인터뷰
를 진행할 수 있을까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그의 아파트는 25평 남짓 되어 보였고, 역시 혼자 살고
있는 남자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
왔고,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빈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 정
도로 꼭 필요한 가구나 살림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넓은 거실에는 원목 무늬의 바닥재가 깔려 있었고, 한쪽
에 놓인 스탠드 조명은 매우 차가운 분위기의 청동 소재였
다. 그 이외에는 따뜻함을 느낄만한 아무 것도 없었다. 화사
한 그림 한점 없었으며, 싱그러움을 느낄만한 화분 또한 없
었다. 그저 바닥에 놓인 하얀 색의 펑퍼짐한 등받이 쿠션과
방석이 고작이었고 그 한쪽으로 컴퓨터가 낮은 테이블 위에
놓여져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앉아요. 그냥 아무 곳에나 편하게…"
"네, 감사합니다."
"뭐 마실것이 필요하오?"
"물 한잔이면 족해요."
그와의 대화는 시작부터 건조했다. 어쩐지 그와의 인터뷰
가 시작부터 벽에 부닥치는 느낌이었다.
"나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싶소."
"편하게 말씀하세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요. 아니면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듯 해주셔도 되구요."
"난 친구가 별로 없소."
"……"
"좋소. 내 식대로 이야기하겠소. 나는 사이버 공간에서 주
로 활동하는 사람이오. 우리들 다섯 사람은 저마다 자기 생
활공간이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오. 전공이라고 해두지.
아, 내가 반말 조로 말해서 기분이 나쁘면 그렇다고 말해주
시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해 해줘서 고맙소."
'…오, …소'로 끝나는 그의 말투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
만 가급적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그것이 그의 성격이라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
다.
"우리들이 말하려는 것은 저마다 갖고 있는 섹스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눈치 챘을지 모
르지만 난 사이버 섹스에 대해 말할 것이고, 이해를 바라지
는 않지만 나의 섹스 법에 좀 알아둘 필요가 있을 거요. 모
르고서는 글을 완성시킬 수 없을 테니 말이요. 컴퓨터는 다
룰 줄 알고 있소?"
"네, 다룰 줄 압니다."
"그럼 PC통신은 하고 있소? 인터넷은?"
"그냥 필요한 자료를 찾고 전자메일을 다루는 정도입니
다. 다른 것은 잘 몰라요."
"요즘 사람답지 않군! 인터뷰를 하고 돌아가면 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PC통신에 대해 좀 더 경험을 쌓아두
는 것이 좋을 것이오. 부디 그래주길 바라오. 난 기왕이면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고 있으니
까. 물론 그래주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 그럼 시작하겠소?"
*
컴섹(COM_SEX). 사이버 공간에서 컴퓨터 통신 이용자들
끼리 이루어지는 섹스 풍토를 가리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준석의 대화명은 '밤의늑대'로 이미 사이버 섹스 족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준석은 대화방 대기실 이용자들의 명단을 눈여겨보았다.
눈에 익은 아이디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은 새로운 파
트너를 찾아야한다. 설령 눈에 익은 아이디가 있다고 하더
라도 서너번 관계를 맺고 나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
다.
마음에 드는 아이디가 있었다. 준석은 머뭇거리지 않고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인에 들어가기로 했다.
[메모:밤의늑대]안녕하십니까. 전 늑대입니다. 친구를 기다
리십니까?
[메모:재키]아뇨. 그냥…
준석은 더 이상 메모를 보내지 않았다. 말투로 봐서는 여
자가 분명했지만 굉장히 소극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
런 여자에게 컴섹을 권유하려면 처음부터 긴장해야만 한다.
상대가 자신을 고발할 수도 있고, 고발하지 않는다고 해도
컴섹을 모르는 여자에게 처음부터 가르치려면 꽤 공을 들여
야한다. 그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섹스
는 첫경험을 하는 여자를 좋아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가
상의 세계에서는 길들여진 여자가 좋다.
[메모:메사리나] 여자 사냥을 즐겨서 밤의 늑대인가요?
메사리나! 메사리나라면 고대 로마의 클라리우스 황제의
왕비로 궁궐에서 밤마다 몰래 빠져나와 매음굴에서 창녀로
나가 즐겼다는 역사 속의 음부! 메사리나라는 대화명만으로
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메모:밤의늑대] 오늘밤에는 당신을 먹고 싶군요!
[메모:메사리나] 컴섹 좋아하세요?
[메모:밤의늑대] 질펀한 컴섹이 제 전공입니다. 당신을 사
이버 섹스의 쾌락에 파묻히게 하고 싶군요!
[메모:메사리나] 전 이미 충분히 젖어 있어요! 오늘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롭고 쓸쓸하네요. 밤의 늑대가 필요해
요.
[메모:밤의늑대] 대화실로 초대하겠습니다.
준석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메사리나 역시
밤의 늑대라는 대화명을 갖고 있는 준석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준석의 말투로 그가 컴섹에 관한 한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음을 느꼈다.
밤의늑대>반갑습니다.
메사리나>오늘 밤, 늑대님을 만나게 되어 무척 흥분하고
있어요.
밤의늑대>컴섹, 경험 있으신가요?
메사리나>물론이죠. 지금도 제 몸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어요.
밤의늑대>실례지만 연세는?
메사리나>훗, 숙녀의 나이를 알아 무엇하게요?
밤의늑대>그래도… 혹시 비슷한 연령이라면 서로 말을
놓는 것이 편할 것 같군요.
메사리나>전 좀 조심스러운 편이죠. 가끔 비열한 남자들
도 있어서…
메사리나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즐길 때는 함께
즐겨놓고 돌아서서 자신의 아이디를 신고하는 비겁한 놈들
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의늑대>곤란하시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저에 대한 신상명세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메사리나>……
밤의늑대>당신이 원하신다면 밝히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밝히는 만큼 당신도 저에게 알려줘야만 합니다.
밤의늑대>저는 미혼이고 혼자 사는 남자입니다. 나이는
28세! 이름은 그냥 늑대라고 하겠습니다.
메사리나>전 그냥 리나라고 불러주세요.
밤의늑대>좋습니다.
메사리나>어쩐지 믿을 수 있는 분인것 같군요. 하지만 어
쩌죠? 전 결혼한 여자예요. 유부녀죠.
밤의늑대>그런데 이 시간에?
준석의 마음속에는 리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남편에 대해 성적 불만족을 갖고 있는 유부녀
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남편이 출장중이라 외로움을 느껴
컴섹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메사리나>전, 컴섹을 좋아해요. 컴퓨터의 가상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은 솔직하거든요.
밤의늑대>그렇죠.
메사리나>가끔 뒤통수치는 사람들만 아니라면 부담도 없
고요.
메사리나>남편은 섹스에 대해 소홀한 편이에요.
준석은 자신의 예상이 적중하자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메사리나가 띄우는 스크롤을 주시했다. 메사리나 또한 남편
이 채워주지 못하는 자신의 욕구를 준석을 통해 해결하고
싶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은 가느다란 전화선을 타고 준석
의 마음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기대와 열의에 찬 웃음을
짓던 준석은 그녀에게 마음속에 담겨두었던 메시지를 전달
했다.
밤의늑대> 컴섹 하실래요?
♣ 계속 ♣
첫 경험에 관한 일곱 가지 보고서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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