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오르가즘의 끝
낮부터 내린 비는 늦은 저녁이 되어도 그칠 줄 모르고 오
히려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퇴근길의 사람들이 서둘러
귀가하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고,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
는 나의 마음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벌써 오빠가 바다로 나간지 1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먼
바다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편지가 도착
한 이후로 또 다른 연락이 없었다. 막연한 기다림으로 일관
해야하는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학
교 생활도 엉망이 되어갔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것조차 소
원해져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져갔다.
늦여름의 긴 장마는 정민 오빠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지루하고 쓸쓸했다. 수업도 빼먹은 채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갔다. 멍하니 앉아 창 밖의
비가 내리는 풍경만을 응시한지 두어 시간이 흘렀고, 채 마
시지 못한 커피도 차갑게 식어 더 이상 손길이 가지 않았
다.
"지니!! 지니야!!"
예상치 않은 방문객의 목소리가 초인종과 함께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현관문에
달린 조그만 렌즈로 밖을 내다보았다.
"오빠! 왠 일이세요?"
정민 오빠의 친구 민석 오빠였다. 정민 오빠와 어울려 다
니며 거의 모든 술좌석을 함께 했을 만큼 가깝고 둘도 없는
친구였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정민 오빠의 친구였
다. 또한, 정민 오빠는 자신이 배를 타고 있다는 연락을 민
석 오빠에게도 보내 왔었다.
"좀 들어가도 되겠니?"
"네. 들어오세요. 많이 젖었네요."
빗물에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부산스럽게 오빠가 들어왔
다. 양말도 온통 흙탕물에 젖어 벗어야만 했다. 장마비가 얼
마나 거세게 왔는지 오빠의 옷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유예요. 따뜻하게 데웠으니까 마시면 좀 기분이 풀릴
거예요."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내고 있는 민석 오빠의 앞에 우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정말 오랜만이네요. 몇 달 됐
죠?"
"그래, 그렇구나."
"갑자기 어쩐 일로…?"
민석 오빠가 빗물이 묻어 반짝거리는 머리칼처럼 축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 않
아도 온종일 내린 비로 우울한 하루였기에 오빠의 그런 눈
빛이 나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것만 같았다.
"너, 놀라지 않을 거지?"
"훗, 오빠. 그러지 말아요.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연속극
대사 같은 말은 우리 서로 피하기로 해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지니야…"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민석 오빠는 머뭇머뭇 간신히 말
문을 열어 놓고는 애꿎은 우유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
다. 심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우유를 마시는 오빠를 바
라보며 차라리 차가운 음료수를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민이가… 죽었단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삼류 코미디 프로를 본 것처럼 웃음
이 터져 나왔다. 정민 오빠가 죽다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리
가 어디 있지?
"오빠, 그런 말이 어딨어? 하하, 내가 우울해한다고 지금
그런 식으로 위로하는 거라면 그만 둬. 난 정민 오빠 더 이
상 기다리지 않을 거야. 괜찮아. 난, 정말 괜찮다구!"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에게 알려야 될 것만 같아서
이렇게 달려왔다. 나도 오늘에서야 알게 된 거야. 혹시 집으
로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할머님께 전화를 드렸더
니, 벌써 한달 전에 정민이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고 그러
시면서 막 흐느껴 우시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대.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났는데, 녀석이 갑판에서 우왕좌왕하다
가 파도에 휩쓸렸대나봐."
"그… 그럼, 그게 사실이란 말야?"
민석 오빠의 말을 전해들은 나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분명히 늦여름인데도 싸늘한 겨울 새벽 일찍 눈 내린
들판에 버려진 벌거숭이처럼 온 몸에 한기가 엄습했다. 극
단적인 공포였다. 이제 나 혼자다. 영미는 내가 죽였고, 무
언의 공모자였던 오빠마저 떠나버렸다. 이제 나는 그 비밀
을 혼자 가슴에 쌓아둔 채 처절한 죄책감과 공포심 한가운
데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이, 이럴 순 없어! 이렇게 가버리다니… 말도 안돼!"
"알아, 네 기분 이해할 수 있어. 나, 사실은 너와 정민이
의 비밀을 알아.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도 알
아. 처음에는 너와 정민이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어. 둘 사이
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민이는 다른
여자들을 대하듯이 평범하게 너를 대하지 못했어. 내가 알
고 있는 카사노바 정민이가 아니었어. 언제부터인가 겨울
방학을 지내고 돌아온 정민이가 무거운 그늘에 휩싸여 있었
고 정민이 덕에 너를 알게되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보
이지 않는 어떤 그림자가 공통 분모라는 것을 알았을 때 황
당하기까지 했어. 마치 두 사람은 비밀 결사라도 되는 것처
럼 무겁고 음침했어. 언젠가 정민이가 술에 취해 털어놓더
군. 네 앞에서는 담담하게 행동하려 애쓰던 녀석이야. 처음
에는 자신도 쉽게 생각했대. 귀찮게 굴던 여자가 죽었고, 너
를 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쁠 것이 없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녀석이 그렇게 흔들리게 된 것은, 결국 너
때문이었어. 쉽게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더 나빴던 거야. 어
려운 일이라고,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더라면 너를 만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너를 만날 때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울
부짖던 영미라는 여자의 괴성이 들려왔고, 밤마다 꿈속에서
까지 괴롭혔나봐. 녀석은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 더구
나… 죽은 사람과 네가 나란히 대학에 합격했을 때… 그리
고 그 사실 때문에 죽은 여자의 부모님이 실의에 빠진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게 된 거
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을 지른 다음 날 산
속에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태연하게 행동하며 나를
윽박지르던 오빠가 며칠 후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날에 바
닷가에서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영미의 합
격 소식을 알려 주었었다.
"정민이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잊기 위해 더욱 더 여자들
에 심취해 있었던 거야. 여자라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섹스
라고 하는 것이 낫겠지.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지울
수는 없지. 결국 마지막 선택한 도피길이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될 줄은 스스로도 몰랐을 거야."
나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나의 질투심과 시기심에 불길
속에서 죽어야만 했던 영미에 대한 죄책감과 영미를 죽음에
이르게 해놓고 빼앗아 버린 꼴이 되어 버린 정민 오빠….
어릴 적 잠깐의 불장난으로 마음을 주게 된 정민 오빠가 나
를 버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연인이었던 것에 대한 배신
감 따위는 이제 아랑곳없었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보다 더욱 무섭고 괴로운 것은
바로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
다. 그렇다고 영미와 정민 오빠가 먼저 간 죽음의 길을 따
라 갈 용기조차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몽유병 환자처럼 넋나간 표정으로 집안에 틀어박혀 허송
세월을 보내며 술과 담배에 빠져들었다. 학교도 포기했다.
갖고 있는 책보다 더 많은 숫자의 남자들이 집으로 나를 찾
아오기 시작했다. 책 한 권에 들어 있는 마침표 숫자보다
더 많은 섹스를 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되버린 것이다.
*
"오르가즘은 끝났어요…"
지니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을 맺어야할 것 같았다. 정
민이라는 사람의 소식을 들은 이후, 그날부터 지니는 평범
하지 않은 생활을 지금까지 계속해왔다. 그것은 다른 누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것이
다. 지니는 지금 자신을 돌아보고 어떤 결론을 스스로 내리
고 있었다. 비록 나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황홀한 오르가즘
은 이제 끝이에요. 모든 것은 허무한거에요. 그렇죠? 하지만
제 이야기가 끝이 나니까 좀 서운하네요."
"네… 그 동안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미연씨가 했지요. 저야 주절주절 수다 떤 것밖에
없는데요. 고마워요. 긴 이야기 들어줘서…."
"직업이잖아요. 이런 말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도 있었구요."
"네, 뭐 어때요. 하지만, 직업의식 이상으로 친구처럼 제
이야기에 귀기울여준 것 알아요. 그것을 고마워하고 있어요.
미연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여자고, 제가 갖고 싶어하
는 것을 갖고 있어서 부러워요."
"갖고 싶어하는 것이요?"
"네. 바로 평범함이죠. 물론 보이는 것만 그럴지는 모르지
만, 이미 보여지는 것조차도 평범하지 못한 사람과는 다르
잖아요. 난, 내가 이렇게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또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평범하게
살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워요."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다 어렵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하지 않았을테지만, 엄연히 일
이었기에 용기 내어 물어보기로 했다.
"이제… 앞으로 어쩌실 건가요?"
생각보다 지니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물 흘러가는 대로!"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일까? 말뜻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나에게, 힌트를 알려주는 퀴즈 프로그
램 사회자처럼 지니가 말을 덧붙였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사필귀정(事必歸正)!"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會者定離), 모든 일은 반드
시 바른 데로 돌아간다(事必歸正). 그렇다면 지니는 정민이
라는 남자의 죽음을 사필귀정으로 해석하고, 정민이 죽음으
로써 자신과 헤어진 것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말하는
것인가?
"미연씨, 다음 미팅은 친구들과 함께 그때 그 장소에서
일주일 후에 있어요. 알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예요!"
그 동안의 인터뷰를 성공(?)리에 마친 지니는 나에게 식
사를 대접했고, 간단하게나마 술도 한잔했다. 너무 늦기 전
에 나는 서둘러 돌아왔고, 지니 또한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
갔다.
머릿속에 온통 미처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뒤죽박죽이
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지니가 던졌던 말들을 되뇌여본다.
사필귀정(事必歸正)… 회자정리(會者定離), 사필귀정(事必歸
正)… 회자정리(會者定離)….
<<작가의 말>>
이것으로써《첫 번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남자와 여
자, 다섯 명이 들려주는 특별한 경험을 담은《첫경험 보고
서》는 전부 일곱 가지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어질 《두 번째 이야기》는 여러분들과도 친숙한 이야
기입니다. 사이버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들도 익히 경험
해보셨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짜릿하고 환상
적인 사이버 섹스와 폰섹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
다. 또한, 이런 '사이버 러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
이나 폰섹에 대한 호기심을 불태우고 계신 분들에게는 재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계속 ♣
첫 경험에 관한 일곱 가지 보고서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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