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5화-전쟁이 아닌 게임
65화-전쟁이 아닌 게임
저 앞 하늘에, 아리아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지상부에서 달리고 있는 나는 굳이 그녀에게 내 모습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분명 놈이 근거지로 삼았을 성이었다.
단지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점은, 성이 붉은 돔에 뒤덮여있다는 것이었다.
"싸우겠다고..."
나는 저 돔을 본 적 있다.
게임에서, 놈의 둥지를 뒤덮고 있던 돔이다.
놈은 저 안에서 나올 수 없는 대신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다.
놈은 도주가 아닌 싸우기를 선택한 것이다.
슬쩍 아리아를 쳐다봤다.
레덴은 레스트리아도, 글레트리아도 내가 만들어낸 원흉이라 욕했지.
하지만 아리아야 말로 내가 만들어낸 이 세상 최고의 변수덩어리였다.
변수는 변수로 잡을 수 있다.
"..저리 비켜."
인근 마을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가 나를 덮쳐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이미 놈은 내 존재를 보고 있겠지.
지금은 이런 조무래기들 신경 쓸 시간 없었다.
[오고 있군. 둘 다!]
"으음..."
[마룡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직접 보니 알 것 같군]
"뭐가 말이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같은 시각, 성 가장 깊은 곳, 영주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안토니오는 목걸이의 말에 움찔했다.
현재 일대의 인간들을 모두 지배하고 있는 그들이 보고 있는 여러개의 수정구들은 이 성으로 접근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날개 달린 천사와, 그보다 뒤에서 땅을 박차며 달려오고 있는...하녀.
[아무렴, 아무 이유 없이 저러고 있을리가 없지. 저 새끼용은 지금 큰 부상을 입은 상태다. 이러면 작업이 더 쉬워지겠군]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이오?"
[내가 마룡들을 한 두번 본게 아니야. 저 새끼용이 진정한 마룡이었다면, 그냥 저 자리에서 본신으로 변해 브레스를 갈겼겠지]
레스트리아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낄낄거렸다.
최근들어 평소와는 달리 꽤 경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모습에 살짝 당황한 안토니오를 무시한 레스트리아는 자신의 힘을 움직였다.
[우선 성녀님부터 맞이해 보지. 이쪽은 좀 까다로울 것 같지만, 자폭공격에는 별 수 없을거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이들을 출격시켰다.
만삭의 임산부마냥 배가 부푼 성의 하녀들이, 이지를 잃은 텅 빈 눈을 한 채 비틀거리며 한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강력한 충격이 돔에 가해졌다.
검을 뽑아 든 아리아가 신성력을 폭사하여 돔을 공격한 것.
그 일격에 돔 전체가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당황한 레스트리아는 허겁지겁 돔을 열어 그녀를 들여보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의 위력에 당황한 상태였다.
"일부로 열었어...아무도 없나?"
돔 안으로 들어와 성벽에 착지한 아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돔 밖과는 그 공기부터가 달랐다.
덥고, 습하고. 마치 공기가 자신의 몸에 붙어 흐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최음효과까지.'
심지어 공기 안에 들어있는 희미한 최음효과까지 알아차린 아리아는 날개를 휘둘러 신성력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에게 어떤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신지배를 받고 있는 성의 병사들이나, 루카스에게 들었던 변이체, 레스트리아의 주구들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으...으에에.."
당황한 아리아가 순간 주춤거렸다.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모두 나체의 여인들이었다.
그것도 배가 산처럼 부푼.
그녀들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아차린 아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녀들에게 검을 겨누었으나, 베지 못했다.
마에 오염된 이들.
과거였다면 가차 없이 정화하겠다고 싹 날려버렸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으헤..히..."
제일 처음 다가 온 하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몸을 들이밀었다.
아리아는 동시에 신성력을 접촉한 여인의 몸 안에 흘려넣었다.
"그윽..끄에에엑! 히에에엑!"
신성력을 주입당한 여인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동시에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직감한 아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젠...장!"
그 직후 일어난 폭발.
비릿한 피분수와 함께 주변에 잘게 분쇄된 육편이 튀었다.
팔을 내린 아리아는 고기조각이 되어버린 여인을 허망하게 내려다 보았다.
여인의 배 안에서 자라고 있던 무언가 역시, 신성력으로 죽어버린 상태였다.
곧 주위로 다른 여인들이 모여들었다.
아리아는 입술을 깨문 채, 자신을 둘러 싼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자애로운 성녀님. 이들을 구원하고 싶나?]
그리고 그때, 한 여인의 입에서 평탄한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오히려 잘 되었다.'
틀어진 계획에 안토니오가 당황한 사이에도 레스트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본래 계획은 성녀 아리아가 세간에 알려진 평가대로 악마의 씨를 임신한 하녀들을 가차 없이 베어 죽인다면, 그걸 계기로 심어진 씨앗의 힘을 폭주시켜 대폭발을 일으켜 타격을 준다는 계획.
하지만 아리아는 여인들을 베지 않았다.
오히려 치료하겠답시고 신성력을 흘려넣었다.
그 영향으로 씨앗은 자폭도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지만, 레스트리아는 오히려 이것에서 기회를 보았다.
"악마, 레스트리아!"
다만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시대에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없을텐데. 레덴이 말해주더냐? 신기하군, 레덴이 벌써 그정도의 간섭력을 얻었다니]
"수작질 부리지 마라."
[수작이 아니다. 나는 네게 기회를 주는 것이지]
일단 다시 여유를 찾은 레스트리아가 대화를 주도했다.
아리아는 현혹과 세뇌에 일가견이 있는 그의 말을 들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주변 여인들을 베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널 상대로 도망치겠다는 것이 아니다]
"뭐..?"
[네 목적은 사악한 악을 토벌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곳에서 날 죽인다 하더라도, 사실 이곳에는 나와 맞먹는 악이 하나 더 있다]
레스트리아의 세치 혀가 놀아나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그에 맞먹는 또 다른 악이라는 소리에 살짝 긴장했다.
"북쪽의 괴물 군단 같은 놈을 말하는 건가?"
[글레트리아? 지금 제 앞가림도 못하는 그 돼지 자식보다 더 거슬릴 수 있는 존재지. 비록 우리처럼 세력을 이루고 정점에 이르려는 것이 목적인 놈은 아니지만, 단신으로도 우리 전체와 비교할만한 강자]
아리아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레스트리아의 말이 통째로 거짓일 수도 있으나, 만약 진실이라면 상상 이상의 큰 문제였으니까.
[대수림 한복판에 자신의 둥지를 짓고 잠이나 쳐 자야 하는게 정상인 오만의 왕, 마룡 안카리아스. 지금 그놈도 이곳에 있다]
레스트리아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사악한 마룡을 먼저 처치할 수 있게 도와주지.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성에서 얌전히 떠나주겠다]
"웃기는 군. 결국 목숨을 보전하려 도망치려는 것인가? 내 목표는 네놈의 주살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도 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수밖에]
레스트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들이 한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이를 악문 아리아가 히죽이고 있는 레스트리아의 빙의체를 노려보았다.
[선택과 집중은 언제나 중요하지. 자, 성녀님.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잘 생각해 보도록]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그는 아리아의 반응을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성녀를 이용해 부상 상태인 마룡을 무력화, 이후 내 인형으로 만든 마룡을 이용해 성녀까지 타락시킨다면..!'
이미 그의 내면에선 계획이 성공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성과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리아와 아리아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기에 그런 것이지만, 일단 아리아 역시 지금은 리아의 정체는 모르고 있기에 결국 아리아는 이를 갈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아리아가 들어간 걸 확인한 직후, 나는 돔을 부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직후 돔은 스르륵 열렸다. 마치 알아서 들어오라고 하는 것 처럼.
역시 파놓은 함정이 있겠다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으나, 성문을 통과해 메인 홀에 들어가니 날 반기고 있는 건 가지런히 놓인 한 벌의 옷 뿐이었다.
나는 그 옷을 펼쳐보았다.
메이드복이 분명했다.
단지 가슴부분은 뻥 뚫려 있고, 천조각 수준인 치마는 골반에 걸치면 엉덩이의 반도 못가릴 수준이었지만.
속옷도 정작 고간 부분은 뻥뚫려 있었다.
"이 개자식이..."
얼굴이 일그러지고 욕설이 나왔다.
이 옷의 사이즈는 딱 내 사이즈였다.
감히 나를 얕보는 레스트리아의 의도를 알아차린 내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군. 큰 상처를 입어 인간의 품에서 겨우 연명하는 어린 마룡아]
그때 누군가 나타났다.
세레나.
나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게임에서 스쳐지나가는 조연 캐릭터지만, 이뻐서 기억하는 캐릭터. 레아나의 동생.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세레나는 늠름한 여전사가 아닌, 음탕한 암퇘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피어스를 달랑거리는 풍만한 가슴에선 모유를 줄줄 흘리고 있었고, 하복부며 허벅지며 음란한 문신이 가득했다.
그녀는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야한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슬며시 내민 혀에도 남성기로 보이는 검붉은 타투와 피어스가 달랑이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저 몸을 조종하는 건 세레나의 의지가 아니였다.
"본체는 어디가고? 무서워서 숨었나?"
[약점을 숨기는 것은 전술적인 행동이지]
레스트리아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지금 당장 들고 있는 옷을 입고, 내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평생 노예로 살 것을 맹세하면 못 받아 줄것도 없다. 너도 인간의 노예로 있는 것 보단 내 밑에 있는게 낫지 않겠나?]
"애초에 싸울 생각만 잔뜩이군. 네 기운, 성의 중앙에서 느껴진다. 거기서 기다려. 지금 가서 죽여버릴 거니까."
[그래?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얹어주지. 네 내상을 치료할 방법이라면?]
레스트리아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과거라면 내가 혹할만한 조건이긴 하다.
하지만 놈은 나와 레덴이 맺은 비밀 계약을 모른다.
굳이 이놈한테 모든 걸 걸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 없어."
나는 그대로 놈을 지나쳤다.
[건방진..! 놈을 막아!]
당황한 레스트리아의 명령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공들여 만든 변이체는 제 주변에 호위로 두었는지, 모두 정신지배를 당하고 있는 성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번에 날려버릴 생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불로 치환했다.
사정 봐줄 이유 전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