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2화-난적
62화-난적
"저 미친 괴물이 뭔지 알고 있느냐."
"본질적으로 글레트리아의 괴물 군단과 다를 바 없는 놈입니다."
빽빽히 몰려 들어 놈을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서, 루카스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마치 몸에 있는 모든 생의 기운이 쫙 빨려 남근으로 향한 흉하면서도 딱히 위협적인 것 같지는 않게 생긴 외형 탓인지, 모여든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놈을 구경하기 바빴다.
"...위험한 놈이란 소리구나."
"어서 주변 사람들을 물려주세요. 놈이 발광하여 피해를 입히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나는 주변 분위기에 혀를 찼다.
음심 그 자체인 레스트리아의 힘에 중독된 자들은 대부분이 일개 잡몹에 불과하지만 평범한 RPG게임인 이 게임이 선정적인 부분으로 성인 등급을 먹게 하는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놈이 부리는 부하들의 체액 한 방울 한 방울이 극독에 가까운 마약에 가깝다.
기화한 극히 일부만을 들이켜도 이 주변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안카..리아스.."
"저놈 저거 자꾸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놈의 목표는 나였다.
주변인들은 내 본명을 모르니 가만히 있었지만, 나는 초조해지는 가슴에 미간을 찌푸렸다.
"전부 물러나라! 이건 명령이다!"
루카스가 소리치며 자신에게 이목을 끌었다.
확실히 옷이 날개라고 차려입은 그의 행색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귀족임을 알아보고 흠칫하며 물러섰다.
"접촉하지 마라! 추악한 악마의 힘에 오염된 자다! 전부 물러서!"
그는 노예를 조교할 때의 카리스마를 십분 발휘했다.
확실히 그간의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날 처음 만났을 때의, 어딘가 위축되고 찌들어 있던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의 성장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접촉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냐?"
"이미 늦었으니, 이 자리에서 소각해야 합니다."
저 멀리서 소란을 접수한 경비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괜히 일이 더 커지는 건 사양이다.
결국 루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타올라라]
나는 루카스의 품에 기대어, 불쌍한 희생자인 레스트리아의 병사를 손가락으로 겨누고 마력을 움직였다.
한순간에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 그 흉한 몸을 불태워버렸다.
"마, 마법사셨습니까?"
"그건 중요한게 아니네. 일단 당장 자작님을 뵈야겠어."
달려 온 경비대장은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에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루카스는 당황한 그를 다그쳐, 주변 부터 정리하게 시켰다.
"...역시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레스트리아는 글레트리아 같은 보스몹 중 하나였다.
게임할때야 그냥 쳐 죽이기 바빠서 자세한 스토리는 모르지만, 지금 이 시기에 등장할 놈은 절대 아니었다.
순간 레덴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글레트리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놈이 예정보다 일찍 활동을 시작했고, 놈으로 인해 자극 받은 다른 악마들이 있다고.
레덴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나로인한 스노우볼이 여기까지 굴렀다는 뜻이었다.
"위험한 놈인 것이냐?"
"그건..."
루카스의 말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보스몹들의 목적이 대체 뭐였지? 분명 저마다 목적이 달랐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기도 했는데.
일단 레스트리아는 나의 정체를, 내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나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이들이 누굴까.
지금 여기 있는 루카스와 세나, 레라플에 있는 헤이즐과 티나.
그리고...레아나.
"혹시 헥트 백작에게 연락을 보내셨습니까?"
"아리아를 조교하고 있다는 보고를 준 것 말고는 아직 없다. 그러고보니 노먼 행정관이 연락이 늦는다고 이상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레아나가."
나는 루카스의 마지막 말을 듣고 그 원인을 직감했다.
애초에 티나와 헤이즐은 지금 내 위치를 모를테니까, 내 정보를 발설할 수 있는 사람은 레아나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백작에게, 루시안과 레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럴수가."
루카스의 얼굴도 덩달아 굳었다. 헥트 백작은 그가 붙잡은 동앗줄이니까.
"...무슨 일입니까?"
"성녀님을 뵈어야 겠습니다."
방 앞에서 마주친 성기사, 엘라는 언짢은 티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루카스를 보고 대놓고 얼굴을 구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아니, 만날 수 있어요."
하지만 엘라의 말은 대놓고 무시당했다.
방에서 나온 아리아는 우리를 방안으로 들였다.
"성녀님...!"
"잊었나요 엘라? 나는 이미 여신께 직접, 진정으로 인정 받은 몸입니다. 이제는 내 뜻이, 교단의 교칙보다 위에 있어요."
아리아는 여유로웠다.
발끈한 엘라는 미소짓는 아리아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
이게 분노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어쨌든 이제는 명분도 없는 엘라가 교단의 법도를 운운하며 아리아를 통제하지는 못했다.
"들어오세요 주인..아니, 리아. 그리고 자작님도."
아리아는 엘라를 지나쳐, 우리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편해보이는군...요."
"날개를 꺼내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루카스는 그녀의 새로운 갑옷을 보며 말했다.
갑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전과는 형태가 많이 달랐다.
상체는 갑옷으로 빈틈 없이 감싸인 건 똑같았지만, 특이하게도 흉갑의 등부분과 배꼽을 포함한 배부분은 깊게 파여 있었다.
하이레그인 갑옷이 골반과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건 레아나를 봤던 것 때문인가.
어쨌든 정조갑옷이라고 불리던 전과는 달라진, 이제는 갑옷이라기보다는 게임 코스튬 수준의 아머는 상전벽해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파렴치한...그보다 성체를 이리 쉽게 노출하다니요."
"오히려 성체이기에, 부끄러움 없습니다. 같이 씻을 때면 신의 축복을 받은 아름다운 몸이라고 엘라가 직접 말해왔잖아요?"
"그건 오직...큭."
엘라는 그게 마음에 안든다는 반응이었지만 아리아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결국 입을 다문 엘라가 구석에 조용히 서 있기 시작하자, 우리는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그리 비밀스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국의 성녀께, 그리고 성기사단에 제보를 하러 온 것이죠."
"제보..말인가요?"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던 아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루카스의 말대로 이번엔 우리가 아리아의 주인들로 찾아온게 아니니까, 엘라가 듣던 말던 상관 없었다.
오히려 듣는게 좋았다.
"새로운 악마의 등장입니다. 오늘 낮, 도심 한복판에서 나타난 그 악마의 하수인을 처리했습니다."
"아, 악마..."
"그리고 그 악마는 지금 백작 각하게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행정관이 각하와 연락이 안 된다고 푸념하는 소리, 분명 듣지 않았습니까."
루카스는 설득하기 위해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이번에 원정을 나온 성녀 직속 성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한 엘라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사실 짜고치는 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아리아야 내 말 한마디면 알몸으로 꿇어 엎드려 내 발을 핥아댈 수 있는 노예였으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증거가 될만한 악마의 하수인은 어쩔 수 없이 소각했습니다만, 확실합니다. 그리고 위험합니다. 백작 각하께 문제가 생기면 이 일대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혼란을 틈타 악마들이 세력을 불릴 것입니다."
"그건..."
"흠..그리고 각하께 빛을 지워둔다면 향후 교국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루카스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아리아는 마치 결정을 맡기겠다는 듯 엘라를 돌아보았다.
명분도 실리도 이렇게 완벽할 수 없었다.
개입하지 않으면 그게 바보인 것이었다.
"확인이라도 해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럼 바로 성기사들에게 가요. 안 그래도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곳에서 바로 움직이죠."
자신이 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쁜 것인지 표정은 딱딱했지만, 엘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조교사는 언제 봐도 기분이 나쁘..."
"너무 미워하지 마요 엘라."
루카스가 떠난 자리, 그를 씹어대던 엘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 성녀님..!"
"원래 알고 있었어요. 엘라가, 내게 관심이 깊었다는 걸."
그녀를 뒤에서 살며시 껴안은 아리아의 숨결이, 움찔거리는 그녀의 귓가에 불어닥쳤다.
"이, 이건..."
"금욕은 아무 의미 없다고 하셨죠. 내가 여신께 배우고 깨달은 것은,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진심이라는 거에요."
"아아..."
아리아는 그녀의 손을 잡아 드러나 있던 자신의 다리에 가져다 대었다.
탄식을 내뱉은 엘라는 부드러운 허벅지에 안착한 그 손을 차마 떼지 못했다.
오히려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조금씩 움직이기까지 했다.
"출정 준비해요 엘라. 새롭게 나타났다는 그 악마들을 빨리 잡아야겠으니."
"알, 알겠습니다..."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은 아리아의 말에 이제는 거침 없이 허벅지를 주무르던 엘라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앞으로 성기사들의 그 불편한 갑옷도 다 이렇게 바꿔야겠어요."
아리아는 순식간에 녹아내린 엘라를 받쳐주며, 히죽 웃었다.
"우리도 갈 준비를...해야겠지?"
"저 혼자 아리아와 갔다와도 됩니다."
"크흠.."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루카스는 따라와 봤자 도움이 안 된다.
이제 어지간한 기사 이상인 세나라면 모를까 그는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하니까.
"하, 하지만 주인님의 상이 없으면 좀 힘들지도."
물론 나는 그걸 바라진 않았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혼자 자위하는 것도 아리아가 빨아주는 것도 그의 조교에 비하면 좀 부족했다.
"...첫 만남때의 조신하고 신비스럽던 소녀는 어디가고."
루카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쾌락에 눈뜨게 하고 이런 개변태로 조교한게 누군데.
"그때 당시가 더 꼴리시면 그때로 돌아갈까요? 철저히 참으면서 연기해 보겠습니다."
"되었다. 내가 기억을 잃는게 아니고서야 그게 되겠느냐. 무엇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쓸데 없는 짓은 하지 않겠다."
그는 혀를 차며 내 제안은 거절했다.
내 정체를 숨기고 쾌락에 무지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어쨌든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럼 준비를 하겠습니다."
"둘이 같이 가서 준비해라."
루카스는 나와 세나를 모두 보내 여행 준비를 시켰다.
계획은 아리아와 함께 성기사들과 합류, 헥트 백작의 상황을 알아보는 것.
아리아를 조교하고 아군으로 삼은게 딱 맞춰 큰 도움이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