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6화-게임 시작
56화-게임 시작
"이제 내일이면 도착하겠군."
"어서 좀 쉬고 싶긴 합니다."
"성녀님도 씻긴 하셔야 하는데."
아리아와 함께하던 성기사들은 해가 떨어진 늦은 밤에도 달빛을 등불 삼아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피로가 쌓여 빨리 복귀해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리아의 갑옷과 정조대를 벗겨주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응?"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게, 저 멀리 이글거리는 태양이 날아왔다.
"저, 저건 설마..."
어둑한 밤하늘에 타오르는 그것은 이른 시간 찾아 온 일출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화염구.
그 화염구는 정확히 성기사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전부 피해!!"
성기사들을 이끌던 엘라가 말 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 직후 터진 강렬한 폭발에 성기사들은 물론 말들까지 모조리 땅에 구르고 넘어졌다.
"큭..감히 어떤 사악한 놈들이!"
바닥에서 곧바로 일어난 엘린가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주변엔 거대한 그을음과 구덩이를 남긴 화염구의 흔적만 있을 뿐, 습격자의 모습은 마법이 날아든 방향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괜찮나!"
"그, 그렇습니다...하지만 말들이.."
다행히 성기사들은 몇몇이 작은 부상을 입은게 전부였다.
그러나 말들은 달랐다.
같이 폭발에 휩쓸렸음에도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성기사들과는 달리, 말들은 타는 냄새를 풍기며 전멸해 버렸다.
'분명 일부로 말들을 노린 것이다. 게다가 방금 그 마법, 절대로 평범한 마법사의 마법은 아니다.'
엘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리아와 함께 베셀 성을 들어 왔을 때.
아리아는 분명 누군가 마법으로 자신을 훑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 수준 있는 마법사에 대해 딱히 증거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을 공격한 마법사 역시 상당한 존재.
그녀는 아리아의 말대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고위 마법사가 있다면 분명 이것 역시 그자의 짓이라 확신했다.
"이제 어쩌지요? 말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그리고 부상자들도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치료는..."
"성녀님이 해주셨지요. 일단, 일단 주변 경계부터 하세요. 우릴 노리고 있는 적이 있습니다. 그자를 무시하고 갈 수는 없으니까 우선 가까운 마을에라도 가서 정비하죠."
엘라는 이를 갈았다.
감히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성녀 아리아가 부재중인 사실을 노렸다는, 자신들을 만만히 보았다는 사실에.
"정비를 하고 성녀님께 사람을 보내 사실을 알려, 이곳으로 오시게 할 수밖에요."
한숨을 쉰 그녀가 투구를 벗었다.
아직도 근처에는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하."
작전은 성공했다.
성기사들은 나를 경계해 행군을 포기하고 근처 마을에 들어갔다.
비록 베셀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들도 전부 죽였으니 그들의 도착 시간은 적어도 며칠 더 걸릴 것이다.
나는 임무를 마치고 다시 성으로 복귀했다.
오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었다.
초인적인 각력으로 날듯이 땅을 박차는데도 동이 트고 오전이 되어버려, 나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베셀 근처 마을에서 부터 걸어야 했다.
"이런, 귀여운 아가씨가 왜 이런 음란한 차림으로 길을 걷고 계시지?"
그렇게 도시 근처 큰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당연하다는 듯 웬 미친 놈이 접근해 왔다.
슬쩍 주변을 살폈다.
꽤 발달한 마을이라 사람이 꽤 많았다. 농사도 안 짓나.
그렇다고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다. 무쓸모한 놈들.
"저는 벤 자작님의 하녀이고,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니 비켜주시죠."
나도 성격 많이 죽었다. 빙의 초기였으면 눈이 돌아가 그대로 찢어 죽였을 텐데.
"벤? 미안하지만 이 근방에서 그런 성은 들어 본 적 없는데. 귀족 사칭은 중죄라고 아가씨? 내가 보기에 귀족의 하녀라기 보다는...사창가의 신입 창부 같은걸? 밤사이 몸이라도 팔러 갔다 온 건가?"
놈은 오히려 자기 일행들과 깔깔대며 날 비웃더니, 더 다가오기 시작했다.
맨날 성에 틀어박혀 있는 루카스가 원망스럽긴 했다.
날 데리고 밖에 나다니며 야외플이라도 몇번 해줬으면 못 알아 보는 놈들도 없을텐데.
결국 내가 주목을 감수하고 마법이라도 써보려는 순간.
"무슨 짓입니까!"
"뭐야. 당신은 누구쇼?"
뜻밖에도 용사님이 나타나셨다.
이 거친 사내들을 밀쳐낸 사람은...어딘가 익숙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나는 이곳에 와서 검은 머리는 나와 티나를 빼고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머리칼이나 눈 색을 떠나 그의 외모는 너무나 익숙했다.
동시에 감이 오는게 있긴 했다. 설마 이렇게 바로 만날지는 몰랐지만.
"아는 사람들이니?"
긴장했는지 식은땀을 흘리던 그가 날 내려다 보며 물었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이 비리비리한 말라깽이가 지금 뭐라는 거지?"
"보니까 야만족 혼혈 같은데."
시비가 걸렸다고 생각한 놈들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이 게임에 동양인은 거의 안 나왔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런 야만족 취급이었다니 아무리 서양 판타지 배경이라지만 국산겜 맞아?
"이, 이거 놓으.."
"크억.."
그는 자신의 멱살을 잡아 챈 사내의 팔을 잡고 살짝 밀쳤다.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에서 살짝.
멱살을 잡았던 중년 사내는 크게 밀려, 비틀거리더니 자기 일행들과 함께 쓰러졌다.
[용사 지망생 김신우(26세)]
[성향: 온건]
[특성: 중급 검술, 중급 강체술]
[*퀘스트 수행 중, 퀘스트 명: 곤경에 처한 어린 하녀 돕기]
그틈을 타 그의 상태창을 읽어 내렸다.
내 예상이 다 맞았다.
단지 그가 가진 상태창이 내가 보는 상태창과 같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가 수행하는 퀘스트명을 본 나는 이것이 레덴이 관여한 일임을 직감했다.
"젠장..얼굴 기억했어!"
힘의 차이를 깨달은 놈들은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자기들끼리 내뺐다.
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안도, 기대]
그의 마음이 읽혔다.
낯선 세상에서, 지금 한창 전쟁 중인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야 할 사람의 마음 가짐 같지는 않았다.
대체 뭘 안심하고 뭘 기대한다는 걸까.
이세계에 떨어져서, 우연찮게 예쁜 여자애를 돕게 되어 인연을 이어가는 만화나 소설 같은 꽁냥거리는 전개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어. 그, 그래."
"제 이름은 리아, 베셀 성에서 벤 자작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선을 그었다.
도와준건 고맙지만 그뿐.
딱히 인연을 이어가기에, 그리 쓸모 있어 보이는 놈은 아니었다. 사내 자식이 조교에 쓰일 것 같지도 않고.
"이, 이게 뭐니?"
"제가 드리는 보답,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대신 그에게는 여지를, 나에게는 정보 수집을 위한 도구가 될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평범한 조약돌에 불과하나 그 안에는 내 마력이 소량 들어있었다.
조약돌의 위치를 감시하다보면 과연 이 세상에 풀어지게 된 용사 지망생이란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가 살아남는데 성공한다는 전제 하에.
그는 내가 등을 돌려 떠나는 순간까지,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 왔느냐."
"네 주인..님. 왜 안 주무시고.."
"성녀를 돕기 위해서지."
루카스는 어제 밤 그 자리 그대로 날 맞이했다.
퀭해보이는 얼굴은 피곤함이 가득해 보였지만,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성녀를, 아리아를 돕는다니요?"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가 절망에 빠지지 않게 도와다오. 절망과 자책 대신, 체념과 욕망에 빠지도록. 그것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는게, 여신의 뜻 아니겠느냐."
또 괴상한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 들어보면, 웬지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나야 사실 그런건 어찌되든 상관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노골적으로 다리를 비비며 얼굴을 붉혔다.
"저..저 밤새 되게 고생하고 왔는데..."
"그렇군, 고생한 노예에겐 상을 줘야지."
피식 웃은 그가 날 잡아 당겨 품에 안아 옷 위로 가슴과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잔뜩 기대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 소식이 없었다.
"..이런."
루카스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나를 품에 안고서.
움직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도 그냥 그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
"식사는 하셔야지요."
"..."
"...이제는 굶으시면 몸에 큰 타격이 갑니다."
쟁반을 내려 놓은 세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리아는 침대 위에 멍하니 앉은 채 미동도 없었다.
탁한 눈에는 초점도 없었다. 누가 봐도 폐인의 모습이었다.
루카스는 그녀를 돌보라고 명령했지만, 세나로서는 망가져버린 아리아를 다룰 방법이 없었다.
"계속 거절하시면, 강제로 먹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나가 팔을 잡아당기고 턱을 잡아 강제로 입을 벌려도, 그녀는 실 끊어진 인형마냥 흔들릴 뿐이다.
그 당당하고 거침 없던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모습에, 세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촉수 더미에 파묻혔던 자기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성녀의 상태가 아직도 안 좋더냐."
그때 문이 열리더니 루카스가 리아를 데리고 들어왔다.
황급히 자세를 정리한 세나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때.
초점 없던 아리아의 눈에 미미한 변화가 생겼다.
"역시 널 알아보는 건가?"
"아흑.."
루카스가 피식 웃으며 리아를 거칠게 밀었다.
리아가 바닥에 넘어지자, 아리아의 눈이 움찔했다.
리아는 그 상태에서 바닥을 기어 침대까지 왔다.
"성, 성녀님...죄, 죄송해요...제, 제가..저 때문에.."
리아는 울고 있었다. 그걸 본 아리아의 눈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네 탓이..."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리아를 끌어 안았다.
'이제는, 이제 내게는 이 애뿐이야...'
이를 악물고는 힘을 더 주어서 으스러지듯 껴안아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절대 잃지 않겠다는 듯이.
"꺄악!"
"안 돼!"
하지만 그녀의 각오는 단숨에 부숴졌다.
루카스는 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강제로 끌어내었다.
아리아는 저항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연약한 여인일 뿐.
그녀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루카스를 노려보았으나, 그 눈에 전과 같은 위압감은 전혀 없었다.
"뭔가 잊고 계신 것 같은데."
루카스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당신은 제게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성녀도 아니죠. 죄인입니다. 성기사들이 이걸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처형되겠지. 신을 모독하여 신벌을 받았으니."
"그러면 리아는요, 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루카스의 말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루카스의 말대로, 리아를 의식하고 있는 그녀는 미쳐버리는 것 조차 할 수가 없었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습니다. 다만 모두를 위해, 저는 따로 생각해준 바가 있습니다."
루카스가 그녀를 매도하며 무언가를 던졌다.
아리아는 자신의 맨 가슴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들었다.
"이제 성녀 아리아는 없습니다. 제가 키우는 인간 가축 아리아만 있을 뿐. 그걸 받아들여라. 그게 네가 속죄할 길이다. 그걸 바라고 있는 것 아니냐."
"내가..바라는 것.."
아리아는 천천히 마스크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