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3화-진실?
43화-진실?
베셀은 레라플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도시였고, 성 밖에까지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로 인해 더 북적거리고 커다랗게 보였다.
"으음, 소문이 이미 퍼졌다는게 이런 소리였나."
루시안이 슬쩍 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밖에는 마차가 도시에 들어가기 전부터, 수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다.
한숨을 쉰 루시안은 물론이오, 밖에 있는 레아나 역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후드를 써버렸다.
"공자님.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시 중앙의 관저.
목적지로 잡은 그곳엔 이미 우리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는 루시안을.
칼날 같은 정예함을 뿜어내는, 정렬한 기사들을 대동한 노집사는 관저 앞에서 깍듯한 예를 갖추며 루시안을 맞이했다.
"통신용 수정구로 미리 이야기는 해두었지만 일단 아버님과 만나 그대들에 대한 이야길 할 테니 지금은..."
"공자님, 각하께서 조교사 역시 함께 호출하셨습니다."
루시안은 우리를 먼저 보내려고 했지만 노집사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루시안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건가? 어째서지?
"그럼 루카스도 함께 가지요."
"공자님, 엘프 노예 따위가 감히 끼어들 자리는 아닙니다."
"..."
일단 수긍한 루시안이 다음으로는 쭈뼛거리는 레아나를 데리고 오자, 노집사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순간 분위기가 묘해졌다.
루시안은 말을 잃었고, 움찔한 레아나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며, 루카스는 눈을 빛내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노예가 아닙니다."
"공자님."
"그녀는 이제 노예가 아닌 기사단의 일원이며, 이번 방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은은한 분노를 누른 루시안이 구경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슬쩍 둘러보며 조용히 말하자, 노집사의 눈이 살짝 움찔거렸다.
"아버님께 반드시 소개해야 하니, 그리 아십시오."
그리곤 레아나의 손을 잡아 끌고 노집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루카스는 그대로 굳어버린 노집사에게 인사하곤 루시안의 뒤를 따라갔다.
졸지에 나와 세나는 뻘쭘한 이 상황에 덩그러니 버려지게 되었고.
노집사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정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는데.'
루카스는 루시안의 뒤를 따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루시안을 이용하기로 결정하며, 그는 나름 뒷조사를 했었다.
그 결과 알아낸 것은 루시안은 평범하고 평범한 차남이라는 것.
후계자 계승에 발을 완전히 뺀 것도, 그렇다고 적극적인 것도 아니며 헥트 백작의 눈 밖에 난 것도 완벽한 신임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헥트 백작은 장남이건 차남이건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보는게 옳을 것이다.
"문제 될 것 없다 레아나. 설령 아버님이 널 내치라 명해도 내가 거부할 것이다."
루시안은 긴장한 레아나의 손을 움켜쥐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문제는 자신이 뿌린 씨앗인 레아나가 루시안의 마음에 너무나 큰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너무 과하면 곤란해.'
루시안이 고결한 영웅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만한 실력과 실적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루카스 본인은 이미 조교학을 탐구하며 영웅들이라 불린 이들의 타락과 비참한 최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성문제라는 것도.
"각하! 2공자께서 드셨습니다!"
여러 생각을 정리하던 사이, 그들은 어느새 헥트 백작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구나?"
"...아버님."
루카스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곧바로 고개를 숙였으니까.
옆을 보니 당황한 레아나도 루카스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귀찮은 예식은 필요 없다. 사정도 다 들었으니 본론만 이야기하지."
그는 루카스와 레아나 모두를 일으켰다.
루카스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담을 수 있었다.
헥트 백작은 루시안과 엇비슷한 모습이 보이는, 노련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루카스는 과거라면 감히 마주치지도 못했을 대귀족의 눈길에 순간 위축되며 움찔했다.
'아니야. 이건 그녀를 위해서..!'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 가슴을 폈다.
자신은 이번 대담에서 반드시 얻어가야 할게 있었다.
"레아나는..."
"알고 있다. 이번 레라플 방어전에서 큰 활약을 했고, 일족의 왕녀 출신으로 남동생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려 조교당한 출신이며, 옆의 조교사가 조교했고, 그 조교사가 네게 주선한 것도 모두 다."
헥트 백작이 자신이 아는 것을 줄줄 읊어대자 세사람 모두 말을 잃었다.
설마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을 줄 몰랐을 뿐더러,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좀 관심을 갖고 찾아봤지. 안 그래도 우리 좌군을 반쯤 궤멸시킨게 황금숲의 엘프군대니까."
"그, 그럴수가.."
헥트 백작의 말에 레아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레아나는 그들과 아무 연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느냐. 신비로운 이종족인 엘프라지만 검만 알던 네가 계집 하나에 빠져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웃기는 구나."
헥트 백작은 레아나의 앞을 가로막은 루시안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일단 당분간은 전선을 좀 안정화시킬 예정이다. 네 형도 곧 복귀할거다."
"공격하지 않으십니까?"
"미쳤느냐. 정체도 모르는 괴물 군대에, 옆에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귀쟁이들이 우릴 노리고 있는데."
귀쟁이란 말에 레아나의 몸이 움찔했다.
"당분간 소강 상태일 터. 큰 타격을 입은 황금 사자 기사단도 수습해야 할 것 아니냐."
"페르도 단장은..."
"그의 시신은 반드시 수습하겠다. 그럼 이제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해야겠지."
궤멸 당한 황금 사자 기사단 이야기에 이번에는 레아나가 아닌 루시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반면 지금까지는 병풍 처럼 서 있던 루카스는 백작의 마지막 말을 듣고 다시금 긴장을 끌어 올렸다.
"그래, 어쨌든 소문에 영웅이라 불릴 만큼 공을 세웠으니 그에 맞는 논공행상을 해야겠지."
"..그렇습니다."
여유롭게 말한 헥트 백작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세 사람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 보았다.
"넌 바라는게 있느냐?"
"없습니다. 저는 기사로서 제 할일을 했을 뿐. 단지 다른 이들에겐 그에 맞는 상을 주십시오."
제일 먼저 제의를 받은 루시안은 칼 같이 답했다.
백작은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솔직히 다른 누가 들어도, 그 의도가 뻔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루시안은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 엘프를 정실로 들이고 싶으냐.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된다."
"아, 아버님.."
"네 몸이 너만의 것이더냐. 우리 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여기까지 왔으면, 응당 그 책임을 져라. 왕녀 출신이라 하나, 동족에게 배신당하고 노예까지 떨어져 너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존재와 우리 가문의 핏줄인 네가 맺을 순 없다."
당황한 루시안에게, 웃음기를 싹 지운 백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안은 금방이라도 반박할 것 처럼 발끈했으나, 차마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백작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노예 엘프가 아니라 황금숲의 여왕이라면 혹시 모르지."
그러나 백작은 이내 히죽 웃기 시작했다.
루시안도, 레아나도 그 말뜻을 알아 듣고 눈이 커졌다.
"당연히 마음이 있지 않겠소? 뒤틀린 정의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백작은 레아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배신하고, 동족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에게 팔아넘긴 일족의 배신자.'
레지골드를 향한 분노를 태웠다. 기회만 있다면 당연히 그를 단죄할 마음이 굴뚝이었다.
"조교사에겐 무엇을 줄까. 내 그대가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알고 있다."
"무엇을 주시든, 제게는 과분한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카스는 이번엔 자신을 향한 그의 질문에,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응답했다.
최대한 많은 것을 얻겠다 각오했지만 솔직히 순전히 백작의 마음이었다.
'금이나 풍족히 얻는다면 큰 수확이다. 적어도 공자와의 연은 여전하니까.'
"너는 이자를 완전히 네 전속 조교사라고 여기는 것이냐?"
"전, 전속 말입니까?"
"요즘 조교사 하나 두는게 뭐 대수더냐. 네 형도 그러는 것을."
루시안은 갑작스런 백작의 질문에 당황했다.
루카스 역시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전속이 아니라면 다른 말로 바꿔 볼까. 이자를 네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냐?"
백작은 질문 내용을 바꾸었다.
루시안은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표정을 바꾸었다.
"그렇습니다."
루시안은 비장한 얼굴로 확실하게 대답했다.
루시안에게 루카스는 레아나를 소개해주고 여체를 알려준 장본인이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니까.
"글도, 셈도 다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작위를 줄테니 우리 가문에 봉신할 생각이 있나?"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좋아. 신하가 된 기념으로 루카스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명하십시오."
루카스가 그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자, 백작은 의자에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조교사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당연히 조교 의뢰지."
"무엇이든 조교할 수 있습니다."
"그것 참 믿음직스럽군. 하지만 농담이야. 아마 불가능 할걸세. 애초에 잡아두는 것도 불가능한 여자라."
혀를 찬 백작이 수정구 하나를 루시안에게 던져 주었다.
수정구 안에는 하나의 영상이 담겨 있었다.
그들에겐 익숙한 괴물 군대와...새하얀 갑주를 입고 백마를 달리며 그 괴물들을 모조리 베어 죽이고 태워 죽이는 은발의 여인.
"교국의 성녀 아리아 폰 레스트펠트. 지금 교국의 성기사단을 이끌고 괴물들을 토벌하겠다며 우리 영역 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중이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교국과 적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놈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백작은 이번엔 루시안에게 한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읽은 루시안이 말 없이 그걸 루카스에게도 보여주었다.
"적혀 있는 교국의 성녀 아리아 폰 레스트펠트는 곧 이곳 베셀로 와서 나를 만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정해야 하지. 편을 먹느냐 반목하느냐."
교국의 목적은 단 하나. 본인들이 규정한 사악한 악적들을 제거하고 레덴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이기에,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 아군도 적도 아닌 애매한 집단이었다.
"...만약 제가 이 여인을 조교할 수 있다면, 믿고 맡겨주실 수 있으십니까?"
"재밌군. 진심인가? 그녀는 대륙에서 손에 꼽는 강자로 늘 들어가는 인물이네."
그렇기에 루카스는 자신이 나서보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백작은 농담인 줄 알고 피식 웃었으나.
'강하다 한들 과연 리아 보다 강할까. 시도할 가치는 있다.'
그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