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화-진실?
42화-진실?
"하..하하."
"소문이 좀 이상하게 퍼졌나 봅니다. 최근 들어 온 소식도 그렇고."
이곳은 성벽 위 망루, 루시안은 그란트의 말에 허탈하 웃었다.
두 사람은 성벽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난민이 바글바글 하다. 심지어 도망쳐 와 투항해오는 북서부군도 상당했다.
그는 지난 날 있었던 레라플 방어전이, 본인도 영문을 모른채 끝난 그 전투가 대체 어떤 내용으로 주변에 소문으로 퍼졌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북서부군은 한 순간에 괴멸당했다고. 이제 우리의 주적은 그 괴물들인가."
망루에서 내려 온 루시안은 심란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전장의 상황이 급변했다.
그리고 분명 그 시작은 자신이 주도했던 레라플 방어전이었고.
"하지만 놈들은 행패를 부린 것 치곤 전선을 뒤로 물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합니다. 게다가 이미 이 소식이 다른 곳에도 퍼졌을 터, 분명 다른 곳에서도 움직임을 보일 것입니다."
그란트는 오히려 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판단했다.
하기야 당장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전투를 어쨌든 승리한데다가, 적들이 뒤로 물러났으니 당장의 위험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영웅이 되셨습니다 공자님."
"...그건 그대도 마찬가진걸. 아름다운 전장의 무희라던가?"
성벽 아래서 레아나를 만난 루시안이 피식 웃으며 최근 생겨난 그녀의 부끄러운 별명을 말하자, 크게 움찔한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물론 계속 시선이 꽂히는 지금 처럼 루시안 역시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있었다.
"최악의 순간 괴물 군대를 상대로 마지막 희망을 보여준 진정한 기사이자 영웅..오글거려 미치겠군. 정말 이렇게 소문이 난거라고."
"이들 모두, 공자님의 품성과 실력에 모여든 이들입니다."
"실력이라. 난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루시안은 그녀의 말에 쓰게 웃었다.
그는 절대 그날의 전투를 자랑스럽다 생각하지 않았다.
소문은 그가 괴물 군대를 굴속시키고 쫒아냈다고 퍼졌지만, 실상은 버티는 것 조차 못하려던 순간 놈들이 돌변한 것이었다.
"...어쨌든 레아나, 준비해 두도록 해."
"무엇을 말입니까?"
"복귀할 준비. 우릴 보고 찾아 온 피난민들에겐 안 되었지만."
함께 도착한, 집무실로 쓰던 곳에서.
루시안은 자기 자리에 놓여져 있던 서류를 보더니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총사령관이자 그의 아버지, 헥트 백작이 이번 전공을 듣고 보낸 복귀 명령서였다.
"저는.."
"아버님 앞에 서면, 당신을 내 연인으로 소개할 거다. 설령 허락하지 않으셔도 상관 없어. 나는 반드시, 당당하게 널 가질 거니까."
루시안은 그녀를 안으며 속삭였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공자님의 노예로도 좋습니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레아나 역시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입에 담았다.
"복귀하신단 말입니까?"
"뜻밖의 사태가 터지긴 했지만 일단 놈들의 기세가 위축되었고, 레라플 자체가 위축된 놈들의 세력권과는 거리가 꽤 있으니 감행하신 것 같소."
루카스를 찾아 온 루시안은 자신과 황금사자 기사단의 복귀를 알렸다.
한통속이던 북서부군을 통수치고 단번에 먹어치운 글레트리아가 갑자기 움츠러든 이유는 하나겠지. 보나마나 놈의 부활을 위한 수작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놈을 막을 힘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막고서 수십% 폭증한 내상을 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 압도적인 힘은 내 근본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오만하게 굴고 남들을 깔볼 수 있는 이유.
이 힘이 없다면, 루카스의 조교도 못 견디고 죽어버릴 정도로 연약해질 테니까. 절대 잃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같이 가겠소?"
"저를 말입니까?"
"부탁한 하녀도 아직 채 가르치지 못했고, 무엇보다 아직 나는 은혜를 갚지 못했소."
진심인 루시안은 혹시나 루카스가 거절할까 꽤 조심스러워 보였다.
물론 루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곤 있었지만, 사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이걸 노리고 루시안을 도와주고 구해준 것이니까.
결국 루카스는 루시안의 제안을 수락했고, 순진한 루시안은 기뻐하며 돌아갔다.
"결과적으로는 일이 잘 풀렸군. 역시 이곳으로 진격해오던 그 괴물들을 처치한 건, '그날의' 너였구나."
"그렇습니다."
"쓸모 있는 일을 했군."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내 눈이 빛났다.
"그러면, 상을 주세요."
"..."
나는 대놓고 그에게 요구했다. 물론 어떤 형식의 포상이든 상관 없다.
창의적인 포상을 준비해 주는 것도 주인님의 의무니까.
"손가락 하나를 주지. 지금부터 5분간 자위금지를 해제할 테니 마음대로 해보거라."
물론 루카스는 내 기대대로 지지 않았다.
이제 눈치볼 것 없는 내가 영악하게 굴면, 그 이상으로 날 짓밟았다.
나는 곧바로 넘겨진 그의 손가락을 정성스럽게 빨고 핥으며, 한 손으로 속옷을 내렸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영감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되었다. 덕분에 참..별에 별 경험을 다 했으니까."
떠나는 날이 다가오며, 루카스는 헤이즐을 방문해 인사했다.
헤이즐은 공방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동안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던 루카스는 돌아가는 길에도 표정이 어두웠다.
"헥트 백작에겐 무슨 포상을 요구하실 생각이십니까?"
"당당하구나. 포상은 요구하는게 아니라 받는 것이다. 특히 신분의 격차가 급격할 때는 말이다, 눈만 마주쳐도 죽임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돌아가는 길, 내 말에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이런 대화도 불과 며칠 전이었으면 상상도 못했다.
"그래도 아들의 목숨을 구했는데."
"물론 나도 되도록 큰 걸 바라고 있다. 그래야 밑천 삼아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행히 루카스의 동기는 지금 까지 봐 왔듯 명확해 보였다.
내 정체를 알고서도 변함 없는 태도도 그렇고, 오히려 이용해 먹으려 들고.
역시 그가 가진 욕망은 조교 이전의 내가 호기심을 가질 만 했다.
"절 마음껏 쓰셔도 됩니다. 트로피든, 홍보물이든 뭐든."
"건방지구나.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안 넘어 오네, 예전엔 내가 내 생각을 말했더니 건방지다며 체벌해 줬으면서.
지금은 주제넘기는 기본이요 살살 대들기까지 하는데도 능글맞게 넘어갈 뿐, 도통 건덕지를 주질 않았다.
"인기가 상당 하십시다."
황금 사자 기사단이 레라플을 떠나는 날.
사람들은 구름처럼 마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모두 루시안과 레아나, 기사들이 떠나는 걸 안타까워 하며 더러는 눈물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만큼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루시안이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내 힘으로 얻은게 아니오."
루카스의 말에 루시안은 창 밖을 보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현재 이 마차 안엔 루시안과 나, 루카스, 세나 이렇게 넷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 옆으로는 말에 탄 레아나가 따르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와 가슴골이 오히려 더 어울리고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사정이 좀 변했소. 원래는 근거지인 이곳 트리텐으로 오라 하셨지만, 현재 아버님은 본대와 함께 이곳 베셀로 이동하셨지. 우리도 그곳으로 갈 것이오."
"전방 지역이로군요. 그것도 이번에 점령한."
"놈들의 목적을 알 수 없어서 그렇소."
목표로 한 베셀이란 도시는 글레트리아의 세력권과 근접한 전방이었다.
루카스가 날 힐끔거리는게 느껴진다. 그에게 글레트리아의 정체에 대해 대충 언질을 주었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마 전쟁은 끝날 거요."
"어째서 입니까? 이곳 서부는 이제..."
"결국 2파전인건 다름 없고 다른 세력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오늘 아침에야 입수한 소식이지만 북동부의 성검교국도 놈들, 그 괴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황실을 압박 했다더군. 북서부군이 악마와 손잡은 것이 제국 전체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면서."
루카스와 루시안 사이에서 복잡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자동적으로 나는 멍을 때리며 손만 꼼지락거리게 되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굴려도 흥미가 안 생기니 금세 때려치게 되었다.
이건 세나도 마찬가지라, 창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성검교국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똑같은 신인 레덴을 믿으면서, 지금의 레덴교가 타락하기도 하고 건실하기도 한 평범한 종교집단이라면 교국은 그냥 미친 광기로 무장한 광신도 집단이었다.
그 광기 덕에 게임에선...적으로 나온다.
"남부를 휘어잡은 남부 대공은 최근 레온 왕국에서 벌어진 오크족 난동 때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테고.."
그러던 중 들린 오크족의 난동이란 말에 귀가 쫑긋거렸다.
오랜만에 아는게 나왔다.
오크 영웅 가이샨이 이끄는 오크족의 대규모 침공은 게임 초반부의 주요 스토리.
제국이 사분오열하는데 서부 내전과 함께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플레이어의 활약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 플레이일 뿐, 정해진 스토리에 따르면 제국은 가까스로 놈들을 막아내긴 한다.
문제는 나한테 어그로 끌린 글레트리아가 설정을 깨부수고 대놓고 활동하기 시작한 덕에 스토리는 이미 어그러졌는데 지금 과연 오크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성녀님, 제국 영토 내에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은.."
"어차피 이미 국경은 넘었지요. 제국 황실은 이미 껍데기만 남았고, 이곳 서부는 무주공산. 감히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말에 타고 있던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를 따르던 기사들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간 큰 기사는 없었다.
"더 들어갑시다. 사악한 악적들을 찾아내서 정화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 그 무엇도 방해할 순 없습니다."
기사들을 다그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확실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사악함이 느껴집니다. 감히.."
속도를 오히려 더 높힌 그녀는 자신들을 보고 무기를 드는 괴물 병사들을 보며 웃었다.
동시에 뽑아든 검을 치켜들었다.
검에 휘몰아치는 강렬한 황금빛이 곧 괴물들을 향해 파도처럼 몰아닥쳤다.
"성녀님!"
"아직 안 끝났어! 저곳이 본진이다!"
일격에 두 괴물을 태워죽인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고 놈들이 지키고 있던 계곡 안으로 말을 몰았다.
"하.."
음습한 계곡 안에는 참혹한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당황한 괴물 병사들과 함께 널브러지고 토막난 인간의 시신들 부터, 헐벗은 채 묶여 신음하며 괴물들에게 당하고 있는 여인들.
그런 여인들이 수십인 걸 확인한 그녀는 이곳이 일종의 '사육장'임을 알아챘다.
"서, 성녀님. 놈들이 너무.."
"쓰레기들이, 더러운 것들이 너무 많아요.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에서 내린 그녀가 차분함을 유지하며 황금빛 눈을 번득였다.
동시에 강력한 힘이 움직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괴물 병사들이 허겁지겁 모여드는 순간.
그녀는 끌어 모은 힘을 폭사, 그 무엇도 남기지 않고 계곡 전체를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