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레라플 방어전
38화-레라플 방어전
소리가 들린다.
그가 걸어오는 소리가. 그의 걸음걸이, 걷는 소리, 조금만 집중하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곁에 누가 있다.
소리로 들으니 몸무게가 가볍다. 하지만 땅에 닿는 발 면적은 아이보다 크니까, 분명 여자다.
누구지? 그가 알고 지내는 여자 따위 없을 텐데.
하녀라기엔 하녀들 특유의 구둣굽 소리가 안 들린다.
"아..."
문이 열리고, 작은 탄식이 들렸다.
동시에 나는 그 여자가 세나임을 눈치챘다.
어디 가버렸나 했더니 그녀를 만나러 헤이즐의 공방에 간 거였나?
"저, 저는..."
"너는 우선 옷을 입고 와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정신을 놓은 채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두고 나가 버렸을 때부터 차분히 생각해 봤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루카스는 이러고 있는 날 보고도 철저히 무시하는 중이었다.
[슬픔]
그가 날 떠나기 직전 보였던 감정이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노나 모멸감, 허탈함 같은게 아니라 슬픔이라니.
도대체 뭐가 슬프단 건지. 차라리 내가 더 슬프다. 배신? 배신당한 건 나야. 고작 이런 일로...
"리아."
"..!"
그저 이름을 불렸을 뿐이다.
순간 멍한 정신이 번쩍 들며 등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동시에 속옷 안, 음란한 액이 나도 모르게 조금 스며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하고 깨끗하던 몸을 이런 음탕한 몸으로 조교 한 것,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맞아. 이게 내가 왜 그의 곁에 있는지에 대한 이유다. 지금의 날 만족시켜 줄 사람은 날 이렇게 만든 루카스 뿐이니까.
"고개를 들어라."
[각오]
내 앞에 선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나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읽어내린 그의 감정은 각오, 그런데 뭘 각오했다는 건지.
"주인님..."
그리고 그가 내 턱을 잡아선 들어올린 순간.
"턱을 들어. 정말 변함 없이 아름다운 얼굴이구나."
"주인..꺄흑.!"
그는 내 뺨을 세차게 때렸다. 내 몸이 옆으로 무너질 정도였다.
뺨이 화끈거리고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벌을 받아야 겠지.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탈주하고...도망 노예는 기본이 낙인형이지만 넌 이미 낙인이 있으니."
"죄, 죄송..흐윽.."
그는 내 가랑이를 발로 마구 비볐다.
저항할 수가 없다.
멘탈이 한 번 나갔던 영향인지, 몸을 덮치는 강렬한 쾌락이 전보다 더 극심했다.
어느새 찔꺽이는 음액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 봐 준 것 같다. 그러니 네가 날 떠나..아니 얕본 거겠지. 각오해라. 건방진 노예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줄테니."
"흐아♡하아앗♡"
참지 못하고 흘려대는 내 신음소리를 뚫고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이 진심으로 기뻤다.
그동안 나를 조교할때 묻어 나오는, 그의 행동에 내제되어 있는 미묘한 망설임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그의 행동을 보라.
내 애널의 처녀를 가져갔던 지난 번에도 내 음부를 고압적인 태도로 발로 짓밟고 비볐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조금의 망설임도 걱정도 없다.
전처럼 소중하고 연약한 귀중품 다루듯 하는게 아닌 진짜 길바닥 싸구려 성노예 다루듯 짓밟고 있었다.
나에 대해 실망해서일까? 내가 미워졌나? 더 이상 나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쪽이든 지금은 상관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진정 바라던 진짜 쾌락이니까.
"흐..흐아아앗♡♡♡!!!"
그저 신발로 건드리고 비비고 문질렀을 뿐인데,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렬한 절정이 찾아 왔다.
목과 허리는 제멋대로 꺾이고 눈이 돌아갔다.
오그라진 팔다리가 뒤틀리고, 세찬 조수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배설이란 행위를 하는 생명이었다면 분명 실금했겠지.
"너는 정말...타고난 성정부터가 진성 암캐로구나."
"헤, 헤헤..."
"벌은 아직 시작도 안 했거늘."
루카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쓰러져 드러 누워버린 내 얼굴 옆에 흥건한 신발을 가져다 대었다.
반쯤 정신이 나갔던 나는 혀를 내밀어 그걸 핥았다.
'할 수 있다. 줄 수 있어. 진정으로 기쁘게 해줄 수 있다고!'
루카스는 성대하게 절정하고 녹아내려 바보 같은 얼굴을 한채 자신의 신발을 핥는 리아를 내려다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 늘 조심하고 신경쓰며 그녀를 조교해 왔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진짜 용이든 아니든간에,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줄 것이다.
"일어나. 일어나 속옷을 벗고 엉덩이를 내밀어라."
그는 히죽 웃으며 절정의 여운에 빠져 있는 리아를 억지로 일으켰다.
*
"이게 대체..."
"공자님, 역시 이놈들이 레라플로 진군한다던 놈들의 별동대 같습니다. 규모도, 구성도 목격담과 일치합니다."
그란트가 고개를 저으며 루시안에게 다가왔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오? 어쨌든 군대는 아니라 했잖소. 정말 단신으로 이런 짓이 가능하단 말이오?"
어처구니 없는 건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그들은 제보를 받고 처참한 흔적뿐인 이곳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한창 전쟁을 준비하다 들었을 때는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곳은 이틀 전 리아가 글레트리아의 별동대를 분쇄한 현장.
그 사실을 모르는 루시안과 황금 사자 기사단은 지반이 뒤집어질 정도의 위력에 혀를 찼다.
"어쨌든...한 숨 놨군."
루시안이 힘 없이 웃었다.
큰 피해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적들이 전멸했으니 시간을 번 셈이었다.
"...그래?"
그리고 루시안이 기사들과 함께 흔적을 조사하던 사이, 레아나는 근처에 서서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근처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그들로부터 정보를 듣는 중이었다.
[소녀는 단 혼자, 너무나 강대하고, 강렬해서 감히 쳐다 볼 수 조차 없는 존재]
[반면 그 상대는 끔찍한 괴물의 얼굴, 차갑고 어둡고 무거워. 분명 본체는 따로 있어]
정령들은 숨어서 지켜본 것들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정령답게 모호하기 짝이 없었지만, 레아나는 감을 잡았다.
'분명 그녀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뭐지?'
레아나는 소녀라는 키워드 하나로 정령들이 말한 두 존재 중 하나는 자신을 휘어 잡았던 리아임을 반쯤 확신했다.
다만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아직 어린 엘프인 그녀도 감을 잡기 힘들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피난민..? 그리고 아군 병사들입니다!"
조사를 마치고 철수하려던 때, 기사들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저 멀리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 중 누군가가 선두에서 이곳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
깃발에 달린 문양이 익숙했다.
본대에 참여했던 한 귀족 가문의 문양이었다.
"공, 공자님..!"
"분명 로덴 가문의..."
"맞습니다. 로덴의 미하엘 로덴입니다!"
말을 달려 온 젊은 청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이유가 울분임을 파악한 루시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괴물 군단 소식 이후로 본대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노, 놈들은..놈들은 괴물들입니다."
로덴은 끓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덴이 증언하는 괴물 군단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직접 겪은 당사자가 말하는 내용은 훨씬 충격적이고 강렬했다.
"그런 놈들이 적어도 1만 이상...끝입니다. 이제 희망이 없습니다! 놈들의 다음 목적지는 레라플입니다! 그 괴물들이 이 땅을 뒤덮고 우리는 죽을 겁니다..!"
"...이 자는 휴식이 필요한 것 같군."
루시안은 점차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로덴을 그의 부하들에게 데려가게 시켰다.
'그리 강력한 놈들을, 혼자서?'
루시안의 머리도 복잡했다.
저 앞에 가득한 피난민, 패잔병들.
모두 그 별동대를 피해 가며 레라플로 향하던 이들이었다.
"피난민들과 살아남은 아군이 계속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괴물 군대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바, 발라스 일대의 모든 사람들이 사방으로 피난하고 있다합니다."
도시로 복귀했으나 문제는 이제 부터 시작이었다.
본디 루시안은 적들의 별동대를 성에서 한 번 막아내고,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공자님, 놈들의 별동대도 전멸했으니 빠르게 후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관 그란트 역시 원래 계획대로 나갈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란트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창 밖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길거리에 나앉은 피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상입은 병사들도, 부모 잃은 아이들도. 그는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을 버리고 갈 순 없네. 우리마저 떠나면 이곳은 놈들에게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할 테니까."
"공자님, 적들의 힘은 알 수 없고 저희의 전력은 너무나 약합니다."
그란트가 현실을 말했다. 그러나 루시안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단순히 저들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기사단은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도 모르고, 본대는 와해되었지. 이곳 레라플을 잃는다면 우리는 이 일대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될 것이고. 아버님이 계신 중앙도 위험해진다. 하지만 이곳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면 그 모든 건 반대로 작용할 것이고."
"무모합니다."
루시안에게도 나름의 일리 있는 계산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계산은 결국 정당화의 도구일 뿐.
쓰게 웃는 루시안의 얼굴에 그란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병사로 쓸만한 이들을 선발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란트는 결국 루시안의 명령을 따라,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그가 떠난 자리, 루시안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게 아닌지 모르겠다. 내 손에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레아나, 내가 옳은 결정을 내린 것일까?"
"...공자님."
흔들리는 눈으로, 루시안은 얌전히 서 있던 그녀를 끌어 안았다. 아니 끌어 안겼다.
"저는, 공자님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습니다. 힘 없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진정한 기사 다운 행동을 했다고."
그녀도 그를 안았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적극적으로 동생의 일을 알아봐주는 등 평소에도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던 루시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는 그를 완전한 선인이라 여기고 있었다.
동족에게, 남동생에게 배신당한 그녀에겐 충분히 의지할만한 사람이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명령하지 않으셔도 제 의지로."
"명령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
으스러지듯 품에 앉은 그녀의 입에서 입을 뗀 루시안은 손을 내려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창관으로 가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순간, 절대 허투로 보내고 싶지 않다."
"극상의 봉사로 모시겠습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레아나도 그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폭풍전야나 다름 없는 고요함이 도시를 덮고 있는 이 순간, 손을 맡잡은 두 사람은 후드를 쓰고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