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대련
"정말이지. 아루루님은 너무 사람이 좋으셔서 탈이에요."
무릎을 꿇고 앉아, 검을 정비하던 검술과의 차석 `세실리아`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동그란 안경에 단정한제복.
그리고 화려하지 않은 화장과 땋아 내린정돈된 머리.
클레온이 말한 대로 모범생 타입의 여학생이었다.
"그만 화 풀어 세실. 아루루님은 같은 과 내에서도 상대할 사람이 없어서 불완전연소가 계속되고 있는 듯했으니까."
그런 세실을 진정시키듯 말하는 것은 세실과 같은 학년이며 그녀의 친구인 검술과의 남학생, 이름은 `레일`이다.
단정해 보이는 세실과는 정반대로,은발에 조금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듯, 사슬이나 은제 악세서리가 눈에 띄지만.
행동거지의 어딘가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그는 귀족 가문의 자제인 듯했다.
그 역시 세실과 함께 검술과의 규율을 관리하는 학생으로.
위치로 말하자면 `차석 보조`정도일까.
같은 과의 학생들에게도 엄격한 세실을 잘 보좌하고.
세실이 채찍이라면, 그는 당근 같은 역할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 모두 아루루의 팬이라는 것.
그리고 검술에 관련해서는 같은 과의 학생들에 비해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다만, 그런 두 사람이 한꺼번에 아루루에게 덤비더라도.
그녀에게 `한 판`을 따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아루루와 다른 학생들의 사이에는 커다란 실력의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흥. 라일라 플레임워치가 데리고 온 남자가 아루루님과 상대가 될 리가 없어요. 그것도 파렴치한성학과의 인간이라면서요?"
"으음…. 나도 성학과의 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곳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고?"
푸른머리를 가진 상쾌한 친구를 떠올리며, 레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하는 이야기의 절반이 성에 관련된 이야기다 보니.
한창 그런 연령대인 `레일`로서도 조금 곤란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만.
하지만, 세실리아는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면, 당신은 아루루님이 그 남자와 친하게 지내도 된다고 생각하나요? 이제 곧 약혼하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뭐, 그건 그녀가 생각하기 나름이지. 적어도나보다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하죠. 그녀는 3대에 걸쳐 세계를 수호해 온 용사의 혈족. 우리 `시종의 가문`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세실리아와 레일 모두, 왕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자제이지만.
아루루의 출생가문인 `트로메이아`에 비하면 그 지위는 너무나도 낮았다.
특히, 두 사람의 가문은 `트로메이아`가 배출하는 용사를 보조하기 위한 교육을 어릴때부터 시작한다.
성자의 가호 교단이 제창하는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삼위일체`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렇다면 아루루님을 믿어보자고. 자, 이쪽은 다 끝났어."
"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도 거의 다 끝났으니까."
레일이 먼저 도구의 정비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세실리아는 허둥지둥 자신의 몫을 끝내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
반듯한 외견과는 달리, 세세한 작업을 잘 해내지 못하지만, 과감하고 용기 있는 세실리아.
그리고 그런 세실리아와 반대로 손재주가 좋고 세세한 작업은 특기지만 행동력이 조금 부족한 레일.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아루루`의 용사로서의 길에 함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쾅-!!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을 모두 날려버릴 정도로 큰 소리가, 실습실에서울렸다.
"무슨 소리-"
캉! 카드드득...! 쿵!
또다시 울리는 소리에세실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면.
소리가 난 것은 아루루와 클레온이 한창 검을 마주하는 곳이었다.
어느샌가 구경꾼들이 원진을 이루고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루루의 희망에의해 사용하는 것은 각자가 휴대한 진검.
유리의 성검과 진홍의 명검의 대결이었다.
세실과레일은 학생들의 사이를 지나가.
어떻게든 두 사람이 펼친방어결계의 경계선 바깥에서 그 안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어떠한 대련의 상식도 날려버릴 정도로.
처절하고, 아름답고, 격렬한 검의 춤이었다.
지상에서 맞부딪힌 두 사람의 검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동시에 뒤로 튕겨 나온다.
아루루의 검- 유리의 성검 `아론다이트`는 성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자리에서 붉은 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듯 깨져버렸다.
이것으로 벌써42번째.
클레온은 손이 비어버린 아루루에게 성급하게 다가가지 않고 재빠르게 거리를 둔다.
아루루의 성검 `아론다이트`는 매우 날카롭고 가볍지만, 생긴 것처럼 충격으로 쉽게 파괴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아론다이트의 특색으로.
부서져, 산재한 파편에 마력을 주입하면 그 파편이 또 다른 아론다이트로서형태를 갖춘다.
아까도 이것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탓에 베인 팔에서 흐르는 피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이게, 각성한 성검의 진정한 힘인가."
클레온은 알베인의 칼리번을 떠올리며 어쩔 수 없이 그 힘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땅바닥에 박힌수십, 어쩌면 백에 달하는 아론다이트가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저것은 모두 진품이며, 하나하나가성검.
따라서 저 모두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루루`가 가지고 있는 마력.
오른쪽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며 자세를 잡은 아루루는 눈을 크게 뜨고 입꼬리를올린 채.
처음으로 만나는 호적수의 존재에 기쁨을 느끼며, 새롭게 만들어낸 아론다이트를 잡고 클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는 마검사. 그것도, 마검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지만 클레온은 아루루에게 맞추어 주겠다면서 신체 강화를 제외한 마법은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다음 순간, 아루루가 손에 들고 있던 푸른색의 투명한 유리조각을 클레온을 향해 던진다.
그러자, 날아가던 유리조각은 허공에서 성검으로 모습을 바꾸며 있을 수 없는 궤도로 비틀어지며 클레온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것이 아론다이트의 또 다른 까다로운 점.
손에서떨어진 상태에서도 마력을 통해 그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클레온이 재빠르게 검을 검집으로 되돌린 뒤, 마력을 통해 가속한 초고속의 거합을 뽑아낸다.
`그림자 얽기`
각인을 통해 발현된 루베라의 기술이, 동시에 급소를 치고 들어오는 성검을 파쇄했다.
"그 기술 정말 멋진걸…! 아까도 그 기술에 당해서 다리를 베였지만, 아직도 눈으로 좇지 못하겠어!"
아루루는 환희의 목소리를 울리며 몸에 흐르는 마력의 격류를 가속한다.
클레온은 그 모습에서 어째선지 탈체크를 겹쳐본다.
생김새도, 성격도, 사용하는 검술도 전혀 달랐지만.
강자에 대한 순수한 호승심과 강함에 대한 욕망.
그것만큼은 아루루가 탈체크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강자를 강자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리라.
일진일퇴의 공방.
서로 보여줄 수 있는 기술 대부분은 선보인 셈이지만.
양쪽 모두, 서로의 거리 내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클레온의 검은 탈체크에게서 사사받은 검술과, 루베라의 암살검이 자유롭게 전환되며.
공격의 궤도를 읽을 수 없고, 하나하나가 무거운 것이 아무리 무한히 재생하는 아론다이트라지만.
힘 조절을 잘못하고 틈을 보이면 그대로 승부가 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아루루의 검술은 마치 춤을 추듯, 가볍고 아름다운 것으로.
성검의 힘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전장을 누비며 바람 소리보다도 빠르게 휘둘러지는 쾌검은.
클레온이 낼 수 있는 가장 최고속도의 거합술에 비해서 조금 느린 수준.
푸른 섬광이 자신을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이미 그곳은 깔끔하게 베인 후이다.
"... 아루루님과 호각..."
세실리아는 그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가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일 역시, 눈앞의 광경이 자신들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무언가 느낀것인지.
주먹을 꽉 쥐면서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후우…."
크게 호흡을 내뱉으며 검을 다시 한 번 검집으로 되돌리는 클레온.
거리에 들어가지 않고 공격한다면, 상대쪽이 유리하다.
이쪽이 가진 원거리 공격 수단은 탈체크의 오의 하나 뿐.
아루루는 클레온의 눈이 그 안광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저릿한 감각이 손과 다리를 감싼다.
클레온의 뒤쪽에서 검은 안광의 사신이 튀어나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살기...! 클레온 씨. 당신은 정말로...!`
아루루는 그런 상대의 모습에 어찌할지 모를 정도로 높은 고양 감을 느낀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자신의 검을 치켜들면.
땅바닥에 박혀있던 백에 가까운 아론다이트가 마력의 제어로 하늘로떠올랐다.
"가라! 아론다이트!"
우렁찬 아루루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을 춤추던 아론다이트들이 동시에 클레온을 향해 쏟아진다.
클레온이 이것을 받아치지 못하면 그의 몸이 고슴도치처럼 변하는 것은 자명했다.
서로의 목숨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해진 전투.
성검의 격류가 클레온을 집어삼키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
참(斬)!
붉은 명검이 기이한 금속음을 내며 울부짖듯 뽑혀 휘둘러지는 일섬.
땅에서 하늘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격은.
흔들리지 않는 한 번의 휘두름으로.
쩌억-!
하는 소리를 내며, 땅, 결계,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든 성검을 그 자리에서 양단한다.
그리고, 그 참격의 충격은 공간을 타고 날아가 아루루에게까지 쇄도한다.
"아루루님!"
그것을 보고 피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뜨는 아루루를 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실습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고 생각하면.
아직 남아있던 허공의 아론다이트가 그대로 방패와 벽이 되어 그녀를 보호한다.
콰지지지직!
마치, 철판이 찌그러지는 듯한 귀를 찢는 파쇄음이 연속으로 터져나간다.
허공을 가르는 참격은 그대로 성검의 무리를 파괴하여 앞으로 나아가다가.
단 하나.
아루루의 얼굴앞을 지키던 마지막 아론다이트의 앞에서 멈춰 섰다.
깨끗하게 절단된 방어결계가 결국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여기까지군."
클레온의 그 말을 신호로 하듯 두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검을 허리로 되돌렸다.
넋을 잃고 있던 학생들도 주변을 둘러보면 싸움으로 황폐해진 실습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더는 대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어느샌가 머리를 묶는 끈이 풀어져, 장발의 생머리가 되어있던 아루루.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클레온의괴력을 버티기 위해 아론다이트를 몇 번이고 희생시키면서.
손의 가죽은 찢겨 나가고, 피가 흐른다.
전신에 흐른 땀이 오히려 머리를 말끔하게 깨운다.
생사를 걸고 검을 맞대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일까.
자신이 놀랄 정도로 깔끔하게 검을 집어넣었음에도.
몸을 달구는 투쟁의 열이 몸을 떠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전신에 혈액을 내보내는 심장의 펌프질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칼날의 위를 걸어가는 감각이었던 다리는 흥분때문에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때, 클레온이 어떻게든 멀쩡한 곳을 밟아 그녀에게 다가간다.
커다란 손이 내밀어 지면 아루루는 그것을 말없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다려도 아루루 쪽에서는 손이 내밀어 지지 않자 클레온은 자신의 의도를 입에 담았다.
"... 대련이 끝났으니 악수를…. 잠깐, 손에 상처가 났잖아."
그때가 돼서야 아루루의 손의 상처를 본 클레온이 쿠온의 회복마법을 빌려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그다음 순간.
휘익! 하고 클레온의 몸이 당겨지며.
아루루가 클레온의 입술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아루루의 행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그녀가 자신의 입을 열며.
끈적한 타액과 혀를 교환한다.
아루루의 송곳니가 클레온의 윗입술을 찌르자, 비릿한 피가 흘러나왔다.
"자, 잠깐 잠깐만요 아루루님!"
옆에서 떠들썩하게 소리 지르는 여학생의 목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타오르는 눈으로 클레온의 입술을 탐하던 아루루는.
"지, 진정해...! 아루루트로메이아!"
클레온이 반강제로 그녀를 떼어 놓았을 때.
그 재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지 깨달았다는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 ..."
스스로의 행동에 스스로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아루루.
주변은 어색하면서도 무거운 침묵으로 둘러싸였다.
사방팔방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눈총이 클레온을 찌른다.
"전투의 흥분으로 이상해진 건가."
클레온은 몸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아루루에게 이야기하자.
아루루는 그제야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야.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몸이 착각한 것 같아. 클레온 씨."
"착각...?"
말투와 태도는 아까의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루루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초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공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이 심장의 두근거림을 당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이성보다도 본능이 먼저 움직인 거야."
클레온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인간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번식본능이 깨어난다는 속설은 잘 듣지만.
이것도 그런 부류의 행동이란 것일까.
"...어쨌든. 좀 진정하라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니까."
"응? 아아…. 그러네. 응. 그게 좋겠어. 그럼 30분 뒤에 다시 보자. 검술과의 샤워실을 써도 좋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려 여성용 샤워실로 향한다.
아루루가 멀어져가자 주변의 검술과의 학생들이 불온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자! 클레온 강사님. 제가 샤워실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재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오는 레일.
다른 학생들은 레일의 행동에 머뭇거리고.
그 사이에 레일이 클레온을 이끌고 샤워실로 향한다.
뒤쪽에서 엄지손톱을 씹어대는 세실리아의 시선은 역시 무서웠다.
001
검술과 건물의 복도.
클레온과 레일은 어색한 침묵속에서 조금 거리를 둔 채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것은 물론 고마운 일이었지만
조금 전 아루루의 기행 덕분에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클레온 강사님. 아, 저는 레일입니다. 세실리아- 당신을 처음 맞이한 그 모범생과 함께 검술과의 차석이죠."
레일은 힐끗 클레온을 보면서 입꼬리의 미소를 띠고 이야기했다.
클레온은 그런 레일을 보며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루루는…."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에요. 1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지만."
마치, 클레온이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는 듯.
레일은 가볍게 그의 의문에 대해 대답한다.
"...그런가."
그러면 클레온도 더는 그녀에 대해 추궁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이다.
그 멋쩍은 침묵을 레일도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어서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방금 건 클레온 강사님이 아니라 그녀가 이상했던 거니까. 과의 다른 녀석들에 대해서는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클레온은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보다. 성학과는 어떤가요? 역시 검술과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겠죠?"
레일의 화제전환을 위한 이야기에 클레온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아니,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는 일이야 물론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지만."
"호오."
클레온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레일은 소리를 냈다.
"어느 과의 학생들도, 배움에 탐욕적이라고 해야 할까, 정력적이라고 해야 할까."
"정력적이라. 성학과인 만큼?"
"농담이 아니야."
"하하, 알고 있습니다."
결국, 레일의 분위기에 휘말리듯 클레온도 웃음을 보인다.
"저는 성학과에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조금 이상한 녀석이지만 성실하고, 무엇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녀석이죠."
"혹시, 데미스인가?"
클레온의 대답에 레일은 놀랐다는 듯 클레온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나요?"
"그에게는 나도 많이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친하게 지내주세요. 녀석은 존재감이 적어서 친구를 잘 못 사귀는 게 걱정이라고 했으니."
레일 역시 데미스가 보였던 것과 비슷한 미소로 클레온에게 부탁했다.
클레온은 그런 그의 부탁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거랑 비슷하게. 아루루님도 부탁합니다."
"... 그녀를?"
레일은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쓸쓸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이어 용사로서 교육을 받아 자라온 사람입니다. 타고난 신체와 단련된 기술. 그리고 성검의 힘 덕분에 지금까지 검술과의 학생들, 교사진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그녀에게 검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긴장감`이라는 것을 준 적이 없습니다."
레일의 길게 이어지는 말에 클레온은 조용히 그다음을 듣는다.
"당신이 그녀의 첫 `호적수`였다는 것이죠."
"...그런가."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존재의 유무가 무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지."
클레온은 크게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에게느낀 것은 오랜 세월 비어 있던 마음의 투쟁심에 붙은 불꽃과도 같은 감정이다.
어느새, 검술과의 샤워실 앞에 멈춘 두 사람.
"수건은 탈의실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복도를 걸어가며 멀어져 가는 레일을 잠시 바라보던 클레온은.
약속 시각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몸을 씻어내는 것이었다.
002
두 사람이 다시 모인 곳은 검술과의 건물 바깥에 있는
파라솔과 의자가 차려진 작은 노점 찻집이었다.
레일의 배려로 다른 학생들과 만나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와 전해 받은 찻집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아루루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복장은 어제의 제복이나, 조금 전 대결에서 입고 있던 활동복과는 다른.
그녀의 신분에 어울리는, 흰색의 기장이 긴 원피스였다.
머리에는 귀족의 아가씨들이 쓸법한 넓은 챙의 모자를 쓰고.
조용히 클레온을 기다리며 잔에 담긴 차를 즐기는 모습은.
조금 전, 짐승과도 같이 격렬하게 검을 부딪치며.
이성을 잃어 자신의 입술을 훔친 소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미안하군. 기다리게 했나?"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가벼운 인사말을 나누며 그녀의 앞자리에 앉는 클레온.
그러자, 아루루는 무언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금 거. 마치 연애 소설의 한 장면 같네."
"...미안, 나는 그런 건 잘 안 읽어서."
"데이트의 남녀가 만나는 장면에는 꼭 들어가는 대사지."
데이트라. 그녀의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아까 전의 입맞춤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루루의 표정은 아까와는 전혀 달랐고.
의식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인가, 하고 클레온은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낸다.
물론 그녀에게 할 이야기는 `석건`의 사용에 대한 동의였다.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아루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되었다.
아마, 동의를 해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겠지.
클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아루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의를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아. 다만, 동의하는 것으로 인해 무언가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그 책임을 지게 될 뿐."
클레온은 아루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해야 하는 물건은 국보급의 유물이다.
당연히 책임문제가 무겁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무언가 보수가 필요하다면 말해 줘. 이쪽에서 가능하다면 준비해볼 테니까."
기본적으로 의뢰와 보수의 사이클로 이루어진 `모험가`의 생활이 길던 클레온은.
그 버릇 그대로 아루루에게 이야기한다.
그러자 아루루는 잠시 클레온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두 세 번 깜빡였다.
"... ..."
"...왜 그래?"
그런 아루루의 태도를 의문을 느낀 클레온이 말하자.
아루루는 덥석! 하고 클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아까 전의 일이 다시 한 번 떠올라 놀란 기색이 되는 클레온.
"그래!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살살 부탁해."
003
"엑."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트리는 쿠온.
라일라와 사샤는 아직 수업을 듣는 중이고.
클레온은 아루루와 해어져서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쿠온과 함께 점심을 마치고 그녀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이런저런 정리를 하던 중.
오늘 있던 이야기를 꺼낸 클레온의 말상대를 해주던 쿠온은.
그가 입에 담은 충격적인 이야기에 그만 손에서 힘이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접시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귀족 녀석들은 정략결혼을 얼마나 좋아하는 건지."
"하, 하지만 그렇다고. 클레온에게 나, 남자친구인 척해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그것도 친 부모님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쿠온이 이야기하자, 클레온은 괜찮다는 듯이 대꾸한다.
"뭐. 하루 정도 연기에 어울려주면 수석으로서 `석건`의 사용에 동의해 준다니까."
아루루가 클레온에게 부탁한 것.
그것은, 아루루에게 귀족자제와 약혼을 하기 위해 본가로 돌아와 달라는 부탁을 수십 번 했지만.
결국, 아루루가 돌아오지 않자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그녀의 친부모가.
아카데미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아루루는 약혼을 거절하기 위해 이미 교제하는 남성이 있다고 한 것 같아서.
그 나잇대의 귀족 소녀가 할법한 고민과 거짓말이라고 클레온은 생각했다.
"부모님께 인사라니…. 그러면 진짜 같잖아."
쿠온의 말에 클레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진짜가 아니니까 괜찮아. 아루루도 이번만 넘기면 다른 방법을 생각한다고 하니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럼 말이야. 나중에, 우리 고향에도 들려주지 않을래? 클레온."
"...네 고향에?"
갑작스러운 말에 클레온이 그녀에게 되묻자.
쿠온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해 왔다.
"응. 어머니... 한테.소개하고 싶어. 클레온을."
가족애를 내세우며 자신에게 알베인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강요했던 어머니.
그런 그녀에게 지금의 자신에게는 클레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정말? 약속이야?"
"그래. 약속."
새끼손가락을 건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쿠온을 보며.
클레온은 다음 수석은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