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부녀
검성탈체크의 검술은 철저하게 실전용이다.
고아의 신분에서 노예로 끌려와 투기장에 팔리고.
투기장에서는 그저 주역의 차례가 오기 전에 그 흥을 돋우기 위해 희생될 역할이었던 소년.
그렇기에, 갑주도, 방패도.
다른어떤 무기도 주어지지 않고.
오직 녹슬고 낡은 검 한 자루만을 쥐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던져 넣어 져.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며.
어느 샌가, 투기장의 가장 높은 위치에까지 오른 후.
검투노예로서 반평생 이상을 보낸 그가 살아남기 위해.
뼈를, 근육을, 목숨을 깎아 가면서 이뤄낸 경지였다.
그 이론은 실로 간단했다.
베이면 안 되는 곳을 베이지 않는다.
베야 하는 곳을 벤다.
그야말로 검술, 칼싸움의 기본.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것을 하기 위해 수많은 검사들이 피땀을 흘려 노력하고.
자신의 유파를 만들거나, 타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생각하면.
연마된 동체 시력과 강인한 신체.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는 것을 즐기는 투쟁 본능.
그를 움직이는 모든 것이.
탈체크를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해주었다.
[일검 일섬 일자 일성]
누군가가 자신을 보며 그런 고상한 말을 남겼는가.
탈체크는 콧방귀를 뀌었다.
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결국, 검이란 건 무언가를 벨 수만 있으면 되는 물건이다.
명검을 마다하고 오래되어 붉게 변한 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 번의 휘두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자신이 휘두르는 검을 견디지 못하는 약골들이 너무 많을 뿐이다.
한 번을 버틴다면 다음에 두 번 더 베어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라는 인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용사 레시아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강한 인간들 따위는 차고 넘쳤다.
그 마검 황제도 그러했고, 전성기의 루티 시온스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탈체크 자신은 결국 잘 포장된 살인귀.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이 모여도 먼지 한 줌의 가치도 없다.
제대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지.
[무검 무섬 무자 무성]
이 삶에 무언가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생의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치는 순간 발생하는 찰나의 영역.
그리고목숨이 오가며 그찰나의 영역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발생하는.
생사의 무간(無間).
그 영역을 몇 번이고 경험할 수 있던, 자신의 `싸움운`뿐.
용사 레시아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 왕국을 돌아다니며 그 흔적을 쫓던 탈체크는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죽을 때까지 이 무가치한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네 아이를 맡아달라고?"
그런 여행길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전우인 용사, 그리고 그 성검 부부가 부탁해왔을 때.
탈체크는 어이가 없어 마시고 있던 술을 뿜어냈다.
우선.
인간과 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난센스였고.
이 둘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기껏얻은 아이를 자신에게 맡기는 것도 문제였다.
"너희가 데려다 키우면 되잖냐. 나한테 애 돌보는 게 가능할 것 같아?"
"... ..."
어두워진 전우의 얼굴을 보고, 탈체크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은 아이를 만들기 위한 왕국의 실험에 참여하면서 많은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최근 연구에 참여한 이들이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
연구소가 폐쇄되면 자신의 아이는 폐기처분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들의 눈에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각오가 동시에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강한 인물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려는 것이었다.
탈체크는 물론 그 자리에서 거절하려 했다.
그렇게 살해당하는 것이걱정된다면 자신이 경호라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끈질기게 탈체크를 설득했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아이의 목숨에 위협이된다는 것이었다.
성검과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가 교단의 과격파 등에 알려지게 되면.
어머니인 성검의 감지할 수 있는 암살자가 보내질 것이다.
탈체크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선, 그런 일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그들.
결국, 탈체크는 똥 씹은 표정이 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수락했다.
"그럼, 탈체크님. 저희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두 번째로 술을 뿜었다.
아무래도 연구소에서는 아이에 애착을 두지 못하도록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저 코드명으로 `슈발리에`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을 뿐.
자신들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어도 괜찮겠지만.
이제부터는, 탈체크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된다.
그러므로 탈체크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것이 붕괴하여.
폐허가 된 연구소 건물.
주변에 즐비한 시체들 사이에 주저앉아있는 은발의 아이.
"...이오나."
탈체크는 잔해와 시체들 사이를 걸어가 그 아이를 안아 올렸다.
자신이 붙인 이름을 처음으로 입에 담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을부르는 것이라고는생각하지 못한듯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이 아이의 부모는 죽었다.
시체도 찾지 못한 상태이다.
탈체크는 구겨진 인상으로 이오나를 품에 안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이 무가치한 인생에.
싸움 외의 가치가 생길 것만 같아.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001
싸움은 클레온과 이오나의 가세로 더욱 치열해졌다.
루베라의 능력이 탈체크를 방해하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클레온이 검을 휘둘러온다.
캉! 하는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탈체크의 몸 이곳저곳에서 상처가 일어났다.
클레온의 검이 막히면 루베라가.
루베라의 검이 막히면 클레온이.
특히, 이오나가 탈체크의 손에서 벗어나면서.
억제하고 있던 상처도 벌어지고.
무엇보다도.
"하앗!"
이오나를 쥔 클레온 본인이 성가셨다.
클레온의 움직임은 이오나를 잡기 전보다도 훨씬 무겁고, 예리해져 있었다.
탈체크는 그 움직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검술 그 자체였으니까.
[경험의 이식...]
그것이인간과 성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능력.
자신을 잡고 휘두른 인간의 경험을 저장하여.
다른 인간이 자신을 잡았을때.
그 몸을 빌려 기억해둔 경험, 지식을 재생하는 것.
물론 몸과 경험의 상성을 고려해야 했지만.
탈체크의 검술과 클레온의 몸의 상성은.
[상상 이상이에요…!]
[그야 당연하지. 클레온은 탈체크에게 단련 받아서 몸을 길렀으니까.]
이오나의 감탄에 왠지 조금 심통이 난 듯 목소리를 내는 갈라테아.
클레온이 탈체크의 검술을 완벽하게 사용하면서
마법을 비롯한 갈라테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 불만인 듯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흉내를 잘 냈지 클레온?"
"당신 덕분이지."
혀를 차며 검을 크게 휘둘러, 달라붙은 클레온을 떨쳐내는 탈체크.
타이밍을 노리며 옆에 있던 루베라는 그대로 탈체크의 다음 표적이 된다.
"바리사다!"
[응! 굴절!]
탈체크의 붉은 검이 루베라를 노리고 휘둘러지면.
루베라는 이번에는 탈체크의 앞에서 뒤로 이동한다.
"소용 없…. 윽!?"
다음 순간. 자신의 발을 거는 것을 발견한 루베라.
탈체크가 미리 자신의 검집을 사용하여 루베라가 이동할 곳을 예측한것이었다.
몸이 크게 흔들리면, 바로 휘둘러져 오는 탈체크의 검.
자신의몸을 포함한 굴절을 사용하기엔 한 호흡이 부족하다.
최대한 바리사다로 몸을 지키지만, 아픔에 대비하여 어금니를 꽉 문 순간.
"루베라!"
자신의 손을 잡아온 이오나.
이윽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성검의 모습을 취하면.
루베라는 조금 전, 탈체크가 클레온을 떨쳐내기 위해 사용한 강력한 일격을.
이오나를 통해 재현한다.
"크윽!"
직격 당하지는 않았지만, 검이 튕겨져 나온 탈체크는 그 충격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버리고.
루베라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오나를 클레온에게 던져주었다.
[위, 위험했다….]
땀을 흘리진 않지만,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바리사다.
"역시 쓰기 힘든 능력이군요."
[상대가 괴물인 거야...]
바리사다의 변명은 틀리지 않았다.
성검 하나와 마검둘.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며 탈체크의 검술까지 흡수한 클레온.
그리고 자신을 상대로.
비록 방어에 치중하고 있다지만 싸움을 끌어내고 있는 탈체크는.
역시 검성이라 불리는 남자라고, 루베라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가시구먼. 이전에 레시아와 들어간 적이 있는 환영의 동굴이 떠올라."
탈체크는 `크으.` 하고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이야기했다.
클레온 역시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답하듯 입을 열었다.
"...들은 적이 있어. 자신의 환영과 싸웠다고?"
클레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탈체크.
"그래. 몇 시간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자, 레시아가 성검의 힘을 최대출력으로 발휘해 동굴 째로 무너뜨렸었지."
"... ..."
클레온은 이전 알베인이 사용한 거대한 마력의 칼날을 떠올렸다.
레시아도 같은 일이 가능했었던 것이겠지.
"...그런가."
"자, 그럼 계속해볼까."
탈체크의 말에 루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군요. 맥스웰들이 안에 들어간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 이상 승부를 끄는 것은 위험해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하지만 저 고릴라를 잡기 위해선 커다란 한 방이 필요할 것 같군."
클레온의 눈이 반짝였다.
루베라는 그 눈을 보고 질색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또 악당 같은얼굴이 되었군요. 이번에는 또 무슨 계획이죠?"
"계획은 없어. 그저, 전력을 부딪치는 것뿐이야."
클레온이 심호흡하며, 전신의 마력을 갈라테아와 이오나에게 균형 있게 흘려 넣는다.
[...그걸 하려는 거구나 클레온.]
[그, 그게 뭐죠?]
갈라테아는 클레온의 의도를 파악하여 그 마력에 동조하듯 검날에 마력을 담아간다.
이오나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갈라테아를 따라 마력을 받아냈다.
"조금 떨어져. 공격 범위가 클 테니까."
"그렇게 틈이 보이는 자세로 가만히 준비하다간 탈체크가 바로 다가와서 벨 겁니다. 시간을 벌어드리죠."
순간, 잔영을 남기며 사라지는 루베라의 몸.
직선으로 질주하여 탈체크의 몸을 공격해온다.
"저 녀석, 뭘 하려는 거지?"
클레온이 다시 수상한 자세를 취하자 경계하던 탈체크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돌진해 온 루베라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녀를 강하게 내리쳤다.
[루베라는 탈체크의 후면에 있다!]
바리사다의 굴절.
다시 한 번 탈체크의 뒤로 이동하는 루베라.
이번에도 탈체크의 검집이 그곳에있었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그 검집을 예측한 루베라가 그것을 밟고 하늘로 뛰어오른다.
빙글, 하고 하늘을 가리듯 돌며 탈체크의 뒷목을 노리고 검을 휘두른다.
"하늘 기둥...!"
이전, 우두머리를 끝장낼 때 썼던 기술.
틈이 많고,공중에서 사용해야 하므로 상대방의 움직임이 멈춰있어야 한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이 공격만큼은 상대도 신경을 써서 막아내야 하므로.
자신의 몸을 던질 각오로 사용하면, 반드시 상대에게 틈을 만들 수 있었다.
루베라의 예상대로, 검을 위쪽으로 올리며 그공격을 막아내는탈체크.
하지만 그 시선은 당황한 듯 클레온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오나와 갈라테아로부터 뻗어 나온 거대한 마력의 칼날.
그리고 서서히 압축되어, 예리하게 연마된 듯 일렁이는 마력의 파도가 검신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검이 위로 올라가 있고, 검집은 루베라에 의해 땅에 떨어진 상황.
탈체크의 몸통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
다음 순간, 클레온이 질주한다.
양손의 검에서 방출되는 마력이 추진력이 되어.
그 속도를 증가시키면.
검은빛과 흰빛이 궤적을 이루며 클레온의 질주에 맞춰 움직인다.
"크윽…!"
어떻게든 검을 되돌려 몸을 방어하려 하지만.
루베라의 굴절이다시 한 번 루베라의 몸을 회전시키며, 탈체크에게 추가 공격을 가해 검을 그 자리에 묶는다.
""클레온!!!""
루베라와 탈체크가동시에 그 이름을 외친다.
다음 순간.
흑백의 섬광이, 탈체크의 몸에서 교차하며.
그 가슴에 큰 상처를 낸다.
흑마력과 신성마력이 서로에게 반작용을 나타내면서.
강력한 충격이, 탈체크의 몸을 휘감았다.
"크...윽..."
이윽고, 거목이 쓰러지는 듯한 울림이 땅에 울리며.
검성 탈체크는 검에 의해 쓰러졌다.
용사레시아에게 맞이한 패배 이후로.
처음이었다.
002
땅에 쓰러진 탈체크에게 검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오나가 다가갔다.
검에 의해 찢어지고, 피에 의해 젖은 탈체크의 상의를 벗겨내면.
그곳에는 이차원의 마력에 의해 침식되어검게 변한 몸이 보였다.
클레온도 루베라도 그 모습을 보고 눈을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 몸은…."
클레온이 말하자 탈체크는 신음을 흘리며 자조했다.
"레시아 녀석을 찾기 위해, 차원의 틈과 관련된 곳은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어느새 몸에 이런 게 달라붙어 있더군."
약간의 마력이라면 신성마력으로 억제하여 치료할 수 있었겠지만.
탈체크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레시아를 찾겠다는 집념 하에.
계속해서 이차원의 틈에 가까운 곳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 자신의 몸은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그 마력에 오염되어있었고.
이오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초조했었던 건가. 탈체크."
"꼴사납지만 그런 거다. 클레온."
클레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탈체크.
그는 잠시 이오나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흥. 이제야 널 제대로 봐주는 녀석이 있군. 고릴라라고 불러대더니 설마 배신할 줄이야."
"... ..."
이오나는 조용히 탈체크의 주먹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어이 클레온. 이 녀석을 잘 부탁한다."
"...그녀는 강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바로 얼마 전과 같은 대답.
탈체크는 그 대답을 듣더니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다.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리고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거의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들게 움직여.
아직 부러지지 않고 땅에 떨어진, 붉은 검을 들어 올린다.
"클레온. 네가 레시아를 베어라."
"...탈체크. 당신..."
"녀석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몰라. 이차원의 틈은 모든 것을 비틀어버린다. 세계수라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조차도 괴물로 바꾸는 곳이다."
그리고 그 검을 클레온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내가 죽였어야 했다. 레시아는…. 내가 베었어야 했어. 그 약속만큼은 내가 지켰어야 했다."
탈체크는 나지막이 생에 남은 마지막 미련을 되풀이하듯 뱉어냈다.
그것은 잊지 못하는 추억 속의 동료가 남긴 저주와도같았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었다. 베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었으니. 벨 대상을 찾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오나도 루베라도.
레시아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클레온과 탈체크의 사이를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클레온의 표정이, 자신의 스승이자, 같은 여성에 대한 미련을 가진 남자로서.
탈체크를 동정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이어가라. 내 약속을."
클레온은 탈체크가 건넨 검을 쥐며 잠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는…."
"...흥. 그게 아니라도, 검은 네게 맡기마."
이윽고 팔에서 힘이 모두 없어진 것일까.
그 팔이 땅에 무겁게 떨어지면.
서서히 생명의 불이 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오나는 이 꺼져가는 불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용히 손으로, 불어오는 바람에서 불을 지키는 것만이.
그녀가 가능한 유일한 일이었다.
"어이. 쓸데없는 곳에 마력을 낭비하지 마라. 아직 끝난 게아니야."
탈체크는 그런 이오나와 클레온을 바라보며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은 맥스웰이 들어간 장막의 틈으로 향한다.
"그 바보가 맥스웰을 막았든 막지 못했든. 절계수는 깨어난다. 곧."
그때 커다랗게 땅을 울리는 소리.
장막의 너머에서 무언가 엄청나게 좋지않은 것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큭…. 아쉽군. 저 나무와도 싸워봤어야 했는데…."
"마지막까지, 반성하지 않는군요."
이오나의 말에 탈체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반성은 하고 있다. 클레온이 기절했을 때 녀석을베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크크, 하고 마지막 농담을남긴 뒤.
탈체크는 크게 한 호흡.
들이쉬었다가.
내쉰 뒤.
조용히, 그 숨을 거뒀다.
이오나는 잠시 그 손을 잡았다가.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죠. 절계수가 있는 한.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온과 루베라는 장막의 틈을통해 그 너머로 넘어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였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승에서 어떤 얼굴로 탈체크를 만나야 할까.
클레온은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콰직…!
하고,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장막 너머에서 들리면.
강렬한 은빛이 그 틈을 통해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틈을 기준으로 장막의 결계 전체에 금이 가면서….
이윽고 절계수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낭떠러지 너머, 이차원의 틈에서 빠져나온 것은 전체의 절반.
차원의 틈은 무언가에 의해 봉인되었다.
"설마."
클레온이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전신이 나무줄기에의해 꿰뚫린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유스테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목숨은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 성검.
성검의 힘으로 이차원의 마력 침식이진행되지 않아.
빠르게 치료하면 살릴 수 있는 목숨이다.
"이오나!"
"네!"
재빠르게 성검의 모습으로변형하여 클레온의 손에 쥐어지는 이오나.
그리고클레온은 성검으로 나무줄기를 동시에 베어낸 뒤.
유스테스를 들고 우선 뒤로물러났다.
루베라는 혀를 차며 클레온을 쫓는 줄기들을 바리사다로 베어낸 뒤.
숲과 절계수를 번갈아 돌아본다.
"생각보다 큰데요. 검으로 벨 수 있을까요?"
"...해봐야지."
신성마력의 회복력이 유스테스의 상처를 치료하지만.
이 뒤에 이 나무를 상대할 것을 생각하면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 녀석을 막지 못하면.
세계에 커다란 재앙이 펼쳐진다.
다행히, 몸은 절반밖에 넘어오지 못했다.
클레온과 루베라가 절계수의 앞에 선다.
굵은 줄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무의 거인.
반신밖에 없지만,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 그 원리조차 알 수 없었다.
한발자국 걸어올 때마다.
황폐해진 땅으로부터 나무줄기가 자라 오른다.
세계의 침식.
그야말로 세계 자체를 바꾸어쓰는 존재.
죽음을 각오한 채 클레온과 루베라가 달려드려 한순간.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숲으로 돌아와…."
두 사람에게 울리는 텔레파시.
그 목소리는.
라일라 플레임워치의 것이었다.